아나스타시아 책 출간 현황
1. 아나스타시아
2. 소리내는 잣나무
3. 사랑의 공간
3. 함께짓기
4. 우리는 누구?
5. 가문의 책
6. 삶의 에너지
8. 새문명
8-2. 사랑의 의례
아나스타시아 책 출간 현황
1. 아나스타시아
2. 소리내는 잣나무
3. 사랑의 공간
3. 함께짓기
4. 우리는 누구?
5. 가문의 책
6. 삶의 에너지
8. 새문명
8-2. 사랑의 의례
스승님 뵈러 가는 날의 설레임
김의식
정회원 23기, 정통침뜸교육원 교수
스승님을 만나는 일은 옛삿날과 다르다
선생님을 뵈러가는 날은 언제나 가슴이 설렌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얼마전 33기 연수 때 水安堡(수안보)에서 뵈었는데도 몇 년 만에 찾아뵙는 듯 마음이 설렌다. 珠玉같은 말씀을 하나도 빠짐없이 담기 위해 마음속에 준비한 큰 주머니는 선생님을 뵙기도 전에 벌써 입을 벌리고 있다. 스승님을 뵈러 가는 날이 옛삿날과 다른 것은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의지가 충만하기 때문이리라.
뜸집은 크고 의연하다. 담 밑에서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작은 화초들과 재잘거리는 새들이 우리를 반기지만 왠지 허전하고 휑한 느낌이 드는 건 선생님이 계시는 뜸집이 너무나 커서일까, 아니면 세속에 굴하지 않는 선생님의 의기가 고고하셔서 홀로 우뚝 서 계시는 탓일까?
오늘은 스승의 날이다
선생님을 뵙는 오늘은 스승의 날이다. 오전에 많은 제자가 왔다 갔겠지 생각하고 뜸집에 가 있는데 선생님 방에서 손님 몇 분이 나온다. 선생님은 김지하 시인과 가족이라고 소개를 하신다. 시인에게 기념비 서문에 새길 문구를 부탁했다고 말씀하신다.
구당 선생님처럼 억압에 굴하지 않고 정도를 외친 사람이다. 시인의 시 '두타산'이 외워졌다.
쓸데없는 소리 말라
산이 산을 그리워하던가
된장이 된장을 그리워하던가
양파가 양파를 그리워하던가
쓸데없는 소리 말라
사람만이 사람을 그리워한다.
잘 만저 침 놓으면 아프지 않아
선생님의 피부는 지금도 뽀얗다. 하시는 말씀의 내용도 대부분 전과 같다.
선생님을 자주 뵙는 분들은 선생님께서는 항상 같은 말씀을 하신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열 번 백 번 들어도 싫지 않은 말씀이다. 듣는 사람 모두가 네 네 하고 대답은 해도 선생님의 눈빛은 "멍청한 제자들아 너희가 무얼 안다고 네네 하느냐"고 나무라시는 것 같다.
오늘도 전깃줄 이야기가 주된 가르침이었다.
"經絡은 전깃줄이요, 經穴은 접촉점이다. 스위치를 잘 만지고 鍼을 놓으면 아프지 않다. 우리 몸 어디에 鍼을 놓아도 電氣는 통한다. 비행기, 고속버스, 전철, 국도, 지방도 어느 길로도 서울에 갈 수 있듯이 시간의 차이일 뿐 通하는 것은 같다."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나는 경혈의 선택, 초인종의 선택, 접촉점의 선택은 과연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한다. 그리고 잘 만져 침을 놓으면 아프지 않다는 말씀은 또 무슨 의미일까? 어떻게 만져야 잘 만지는 것일까? 선생님의 당당함과 활기 넘치는 미래설계는 어디에 근거하며 기죽지 말고 자신감을 가지라는 기백은 어디가 원천일까? 답들이 언뜻 떠오르지 않기에 선생님의 말씀은 들어도 들어도 신비로울 뿐 싫지가 않다.
효과 있을 뿐 탈이 없다
사람들이 생각지 못했던 鍼을 쉽게 배우고 익혀 내 몸, 가족, 이웃, 약자에게 한 줄기 빛을 줄 수 있게 하신 선생님이 한없이 고맙고 존경스럽다. '보사 균형요법에 어려움이 없다', '침 사고는 굵은 쇠를 가늘게 다듬는 기술이 부족했던 시대에나 있었다.' '옛날 毫鍼(호침) 하나 구하면 꿈에 나타난 신령님의 계시로 얻었다 할 정도로 큰 횡재로 여겼다.' '침을 아무리 찔러봐라. 병신 된 사람 있는가. 있었으면 지금 침술은 사라졌을 것이다. 효과가 있고 탈이 없으므로 지금까지 삼천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등등의 말씀은 子子孫孫 영원히 침뜸을 남기려는 염원의 말씀으로 들린다.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어떻게 달 것인가
침뜸은 의술의 故鄕과 같이 추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오래전에, 침을 맞아본 경험이나 뜸으로 치료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침뜸이 자유로웠던 옛날을 추억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권력이 우리의 추억까지 뺏앗으면서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 개혁집단일까? 보수집단일까? 그 사람들의 행태는 의술로도 우리 사회를 분류해 놓았다. 인간의 존엄성 때문이 아니라 이익집단의 영리와 정치 논리에 의해서다.
선생님께서는 침뜸 의학과 현대 의학을 접목해 하나의 의술로 統合해야 하며 이를 위해 "醫는 하나다"라고 외치면서 당당히 맞서라고 하신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행동할 것이며 5천 명의 입과 두뇌는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에 대한 명쾌한 답이 있었으면 좋겠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가는 대전지부 비약적 발전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몰라서 못 할 수도 있는가 하면 섣부른 나의 언행이 자칫 목표에 역행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기 때문이다. 불가능하다는 짐작으로 행동을 포기하고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참여하고 보조를 맞출 수 있는 행동지침이나 가이드라인 같은게 빨리 마련됐으면 좋겠다.
참고로 우리 뜸사랑 대전지부는 지부장의 적극적이고 진취적 리드와 운영진의 헌신적 참여, 그리고 회원들의 협조와 동참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다. 특히 교육반이 3개로 늘어났다. 또한, 대전 대덕구청으로부터 봉사단체 가입을 요청받아 회원 100여 명이 행정기관의 봉사 요원으로 임명되었다. 7월부터는 100곳의 공공장소에서 tv 자막을 통해 뜸사랑을 홍보하고 교육을 알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모습은 우리의 권익이 늘어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의료법 59조와 61조의 조항을 메꿔라
지난번 설 인사 때 선생님께서는 침뜸에 대한 교육제도가 도입돼야 함을 강조하셨다. 5천 제자들이 앞장서서 침뜸 검정고시 시행을 강력히 요구하라고 하셨다. 朴正熙 시대에도 井邑(정읍)의 라용균 보사부장관이 침구사 자격 정부 고시를 치르려 하자 보사부에서 시험을 준비한 적이 있음을 소개하시고, 백지 상태로 있는 59조항은 침뜸 자격검정에 대한 것이 들어가야 할 조항이라고 하셨다.
옳으신 말씀이다. 다른 침술 단체들이 있지만 우리 만큼 체계적이고 후진 양성을 한 기관은 없다. 5천 명이나 되는 제자가 있고 실제 거쳐 간 사람은 더 많은 우리 뜸사랑이 잘못된 제도와 도전받는 현실을 타파할 십자군이 돼야 할 것이다.
"우리는 경과 조치법을 적용하여 시험을 시행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 우리 침뜸이 세계로 나가고 있는데 왜 본고장인 우리나라에서는 제한을 받고 있는가? 자유로운 침뜸은 나라의 일이자 국민의 주권이고, 경제적 가치 또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보물이다. 이제는 정치인을 만나 설득하고 우리의 정당성을 주장하라"고 하신 선생님의 말씀은 큰 틀의 행동지침이다. 법의 판결로 교육이 떳떳해졌지만 103세 선생님께는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침뜸을 이어 갈 사람들
선생님은 지금 5천 제자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 건립을 진행하고 계신다. 침뜸 보급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제자들을 고마워하시고 제자들의 이름을 만세에 전하자는 목적에서다. 2013년 돌에 명패를 새기는 방법을 추진했는데, 선생님의 기대와 명패의 작품성이 일치하지 않아 일단 보류하고 대신 비석에 이름을 새기는 방향으로 정하신 것이다. 현재 비석 건립 위원회를 구성하고 1차로 건립기금을 낸 800여 회원의 이름을 비석에 새기는 작업에 착수하셨다.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이 찾아와 예술성과 보존성있는 비석 앞에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이름도 있네 하며 보람과 긍지를 느끼며 그 이름이 만대에 전해지는 것을 상상해 본다. 지금부터 가슴이 뿌듯해진다. 침뜸의 발전과 침뜸에 몸담은 우리와 그리고 후학들을 위해 쉬지 않고 연구시고 행동하시는 老스승님의 모습이 측은하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하면서 선생님의 숭고한 정신을 더 충실하게 따라야겠다는 각오를 했다. 5천 회원 모두가 참여할 것을 기대해 본다.
구당 스승의 관심으로 대전지부 변화 바람
선생님께서는 특이한 자랑거리들이 있다. 첫째는 5천명이 넘는 제자들이 있다. 둘째는 부처상을 제외하고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돌로 된 전신상이 있다. 하나의 바위를 깍아 만든 높이 8m의 표지석 돌탑도 있다. 거대한 조형물들은 침뜸의 영원성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새 정부는 침뜸이 편히 살아가도록 고향을 찾아주고 우리 뜸사랑이 온 국민을 위해 날개를 펴게 하여 長城 뜸집이 빛나고, 선생님이 환한 미소로 여생을 보내시도록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특히 대전지부는 지부장 김기건의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활동과 운영진의 헌신적 참여, 정회원들의 동참으로 지난 5월 大田 대덕구청으로부터 봉사단체 회원 가입 신청을 받아 100여 명이 국가 기관이 인정하는 봉사 참여 시간을 인정,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침뜸 허용 요청을 光化門 일번가에 정회원 선생님들 모두 참여토록 하고, 교육 홍보를 100곳의 지정된 공공장소에 있는 'TV속으로'와 자막 광고 계약을 체결했다.
7월부터 '구당 침뜸 교육생 모집' 광고를 대전, 세종시, 충북 청주시 터미널, 병원, 찜질방, 식당, 골프장 등에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구당 선생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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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 뜸향처럼 향기나는 그런 사람 되겠습니다"
이정자
정회원 16기, 정통침뜸평생교육원 교수
스승을 찾아가는 행복한 시간
5월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灸堂 선생님을 찾아뵙기로 했습니다. 서울교수회에서 버스를 한 대 빌렸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결혼식에 더 이상 주례 선생님을 모시지 않는데 그 이유가 그들에게 존경할 만한 참 스승이 없다는 것이라고 어디에선가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참 스승이 계서서 이렇게 스승의 날을 맞아 찾아갈 수 있으니 진정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버스는 아침 6시에 청량리에서 출발했습니다. 長城(장성)으로 가는 버스에서 내내 스승님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사라져가는 우리의 정통 뜸을 기득권층의 온갖 박해 속에서도 뚝심 하나로 이어오신 구당 선생님. 火傷鍼(화상침)과 '무극보양뜸'을 일반에 공개하고 침뜸 봉사를 말없이 해오느라 한의사들의 고소고발로 전과 43범이 되었다는 구당 선생님.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버스 안에서 어떤 교수님이 대학생 시절 東海岸(동해안)에서 보았던 광경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黃布(황포) 돛단배가 항구로 한꺼번에 들어오는 광경은 정말 멋졌답니다. 동력이 발달하기 전이라 사람들이 밧줄로 배를 끌어올렸다는군요. 배에서 오징어를 내리면서 먹어보라고 주기에 받아서 먹고 있는데 바로 옆 배에서 시체 하나를 내리고 있더랍니다. 밤사이에 오징어를 잡으면서 시장해서 먹다가 急滯(급체)가 되었는데 고생하다가 그냥 숨을 거두었대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때 鍼을 배운 사람이 옆에만 있었더라도 몇 군데만 따주었으면 되었을 것을 하고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고 하셨습니다.
구당 선생님의 건강비법은 뜸
나는 버스 안에서 '스승의 은혜'를 마음속으로 불러보았습니다. 그런데 노래 가사가 스승의 은혜로 시작했는데 자꾸 어머니 은혜로 바뀌어 갔습니다. 스승에 대한 노래를 안 부르다 보니 어느새 그렇게 되었나 봅니다.
12시에 長城에 도착했습니다. 구당 선생님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방금 전에도 몸에 뜸을 뜨고 계셨답니다. 구당 선생님은 늘 말씀하셨지요. 본인의 건강비결은 뜸을 뜨는 것이라고요. 좋은 보약을 먹는 것도 아니고,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루에 한 번씩 뜸을 뜨는 것만이 건강비법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구당 선생님의 말씀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구당 선생님은 우리에게 뜸쑥을 만드는 공장도 구경시켜주셨고, 뜸쑥도 한 주먹씩 선물로 주셨습니다. 쑥은 우리나라, 日本, 中國 이렇게 동양 3國에서 난다. 일본은 세계에서 뜸을 제일 많이 했던 나라였는데 돈 잘 버는 길로 가다 보니 지금은 많이 안 하게 되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랑이 넘치는 뜸사랑
구당 선생님의 따님이 우리를 위해 토종닭 백숙과 녹두죽을 해 주셨습니다. 구당 선생님이 長城에 내려오던 그해에 담갔다는 3년 묵은 김장김치는 정말 입에서 살살 녹았습니다. 따님 말씀이 배추를 심고 약을 치지 않고 그대로 둔답니다. 벌레가 먼저 다 먹고 나면 그 후에 남은 것으로 김치를 담그신다는군요.
나는 그 말이 너무 좋았습니다. 지방에서 오신 여러교수님이 손수 준비해 오신 맛있는 떡도 있어서 뜸사랑은 역시 사랑이 많은 곳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회의실에서 조촐하게 스승의 날 날 행사를 했습니다. 꽃다발도 드리고 스승의 은혜 노래를 불렀습니다. 103세 선생님께 노래를 불러드릴 때 괜스레 가슴 뭉클했습니다. 나는 어떻게 뜸사랑을 만나서 이곳에 있을까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었습니다.
붕어빵을 기대하시는 구당 선생님
구당 선생님의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멍청이는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구당 자신도 멍이가 된 것 같답니다. 하도 사람들이 안 들어주니까 본인 주장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답니다. 환자들의 병을 고치고 신음을 없애는데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냐고 하셨습니다. 똑같은 붕어빵이 나와야 하는 데 간혹 눈 없는 것이 나오기도 하고 꼬리 없는 것이 있기도 해서 이런 강의를 하신답니다.
火傷鍼의 3가지 특징은 통증을 없애는 것, 빨리 낫게 하는 것, 흉터 없이 낫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피는 쇳가루인데 쇳가루가 흩어지기 때문에 血管으로 움직이는 것이고 뜸은 피를 만드는 것이고 鍼은 통하는 것, 氣가 통하는 것인데 電氣는 쇠가 있어야 통할 수 있답니다. 脈이란 살아있으면 수시로 變化가 있어서 잘 모를 수밖에 없대요.
또 옛날에는 "밤새 안녕하셨나?"라는 인사를 많이 했고 또한 측간 귀신을 제일 무섭다고 했는데 측간에서 쓰러지면 즉사했기 때문이랍니다. 대부분 혈압이 높은 사람이 변비도 있는데 쪼그리고 앉아 힘을 주다보니 쓰러질 수가 있었답니다. 그래서 측간에 가서 "에헴"하고 인기척을 했답니다. 특간 귀신에게 고하기 위해서요.
환자를 대하는 자세
디스크는 삔 것이라고 합니다. 흔히 하는 표현으로 무거운 것을 들다가 삐끗했다 하는데 즉, 삔 것을 말하는 거래요. 디스크가 재발했다고 하는데 또 삔 것이랍니다. 뼈마디는 언제든 삘 수 있고 또 삔답니다. 손가락 중 엄지가 아픈 것은 頸椎(경추)를 치료해야 하고 나머지 세 손가락이 아프면 胸椎(흉추)3, 4, 5를 치료해야 한대요. 씨를 운반하는 것이 전립선인데 오줌누는 것과 상관이 없답니다. 양의들이 전립선에 소변 얘기를 하는 것은 바른말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환자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어서 오세요."라고 환자에게 인사하는 대신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나요?" 이렇게 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진료카드에 환자의 署名(서명)을 꼭 받아야 하고 환자의 住所(주소)와 전화번호도 꼭 적어야 하는데 혹시 걱정되는 사람이 있을 때 다시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랍니다. 우리를 위해서 기록하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主호소증을 쓰고 소개자, 참고사항도 쓰고 현재 증상이 왜 생겼는지 다쳐서인지 병으로 온 것인지 약으로 온 것인지를 꼭 묻고 적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갈 데가 없어진 환자들이 찾는 침뜸
의학계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구당 선생님을 찾아옵니다. 얼마 전에도 돌아 엎드리지도 못하고 올라가지도 못하는 사람이 와서 치료를 받았는데 갈때는 휠체어를 안 타고 갔답니다. 그렇게 버리고 가는 휠체어가 꽤 된다고 하셨습니다.
장성 무극보양뜸센터에 암으로 오는 환자는 줄었다고 합니다. 서울역에서 하실 때는 10명 중 7명이 암 때문에 왔는데 이곳엔 12명 중 8명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예전엔 의사들이 유사한 것도 암이라고 했던 것이 조금 줄어든 것 같답니다. 암이라고 마구 말했던것을 의사들이 그만할 때도 되었답니다.
이제 환자들은 갈 데가 없어졌으니 그들은 우리 뜸이라고 했습니다. 2017년 4월 3일 한국정통침구학회 정통침뜸평생교육원이 인가를 획득한 것이 우리의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평생교육법으로 가르쳐도 된다고 나라에서 허락해준 것입니다. 이 법의 통과를 항의하는 기득권층에 법원에서는 못하게 하려면 못하게 하는 법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지요.
"배워서 남주자"라는 구당 선생님의 구호를 항상 간직해야 겠습니다. 구당 선생님이 환자들을 치료할 때 '20여 개 鍼 자리'를 쓰는데 害(해)된 사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편하려고 숫자를 덜 쓰면 안 된다고 하셨지요.
구당 선생님은 얼마 전에 광주의 대학에 계시는 분이 아드님을 데리고 왔는데 이빨 가는 게 걱정이어서 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문제도 아니라고 하셨지요. 구당 선생님은 열화의 같은 우리의 요청에 의하여 교수회장님을 모델로 하여 鍼 시범도 보여주셨습니다. 이빨 가는 데에는 下關(하관)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열심히 동영상을 촬영했는데 나중에 저장 공간이 부족하다고 없어져 버려 아쉬움이 컸습니다.
구당 선생님은 장성 뜸집에 회원기념비가 세워지게 된 것도 참 기뻤습니다. 1차 기념비가 세워지고 오천여 회원의 이름이 모두 새겨지는 그날이 곧 올 것으로 보입니다.
향기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
長城에서 구당 선생님을 뵙고 오면서 구당 선생님과 봉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봉사실이 생각났습니다.
여자 봉사자 한 분이 오늘은 유난히 냄새가 심한 분들이 자신의 침상으로 많이 와서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어떤 날은 중풍 환자만 계속 보기도 하고 어떤 날은 다리 아픈 분만 계속 보게 되더랍니다. 오늘은 여자 봉사자에게 그런 분들이 오는 날이었나 봅니다.
한 분은 젊은 분인데 정신이 온전치 못한 분이라 씻는 데 관심조차 없었고 한 분은 췌장암 말기 환자인데 살고자 하는 희망의 끈을 놓은 듯 했습니다. 내가 백회에 뜸뜨는 것을 돕기 위해 그분의 머리카락을 만지는데 하얀 비듬이 수북이 내 손등으로 떨어졌습니다. 우울증이나 치매 등 정신적인 부분을 앓고 있는 분들과 말기 암을 앓고 있는 환자분들 중에 그런 분들이 드물게 가끔 있는데 오늘은 그런 분들이 그 봉사자께 몰리는 날이었나 봅니다.
우리가 수다처럼 나눈 이야기를 지나가던 팀장님이 들으신 모양입니다. 종례시간에 한 말씀 하셨습니다. 성당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염을 해주는 봉사자들도 있는데 그분들은 돌아가신 분한테서 나는 냄새를 향기로 생각하고 염을 한답니다. 혹시 우리 봉사실에 오시는 분들이 조금 냄새나는 분일지라도 돌아가신 분들에게서 나는 냄새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냄새가 나더라도 우리는 그 냄새를 향기로 생각하고 봉사를 하자고 했습니다.
냄새란 무엇이고, 향기란 무엇일까
냄새란 무엇일까, 향기란 무엇일까 한참 생각을 했습니다. 우연히 김삿갓의 시를 읽다가 한 구절이 내 가슴에 풍덩 떨어졌습니다.
"落花入室老妻香(낙화입실노처향),
꽃잎 떨어져 방으로 들어오니 늙은 아내도 향기로워진다."
나는 감동으로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마침 꽃잎이 떨어지는 봄날이었고 내가 늙은 아내이기때문이겠지요. 손자를 돌보는 할머니이기도 하니까요.
나에게 날아 들어온 꽃잎은 어떤 것이 있을 까를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뜸사랑이 아닐까요. 구당 선생님은 거대한 나무로 무수히 많은 꽃을 피우셨습니다. 그중에 꽃잎 한 잎이 떨어져서 나에게로 왔기에 내가 뜸사랑을 알게 된 것이겠지요. 봉사실에 나오는 많은 봉사자들도 그 꽃잎을 하나씩 받은 분들이라 생각합니다.
뜸사랑에 있으면 우리 모두 香氣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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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10분이라도 글 써야 생각을 하게 돼"
조선일보 박승혁
입력 2017/06/05
#장면1
서울대가 지난 2~3월 자연과학대학 신입생 253명을 대상으로 글쓰기 능력 평가를 실시한 결과 98명(38.7%)이 100점 만점에 70점 미만을 받았다. 전체 응시자의 평균 점수는 C학점 수준인 73.7점이었다. 시험을 주관한 서울대 기초교육원은 "응시자 65명(25%)은 서울대의 글쓰기 정규 과목을 수강하기 어려울 정도로 글쓰기 능력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논제와 상관없는 내용을 쓰거나, 근거 없이 주장하고, 非文(비문)이 많았다는 것이다.
#장면2
미국 하버드大는 1872년부터 신입생 전원에게 '하버드 글쓰기 프로그램' 강좌를 146년간 하고 있다. 적어도 한 학기는 수강을 의무화했다. 매해 입학생 1700여명이 文·理科 전공에 관계없이 '학술적 글쓰기' 능력을 체득하는 것이다. 하버드대에 따르면, 이 수업을 들은 학생의 73%는 "글쓰기 능력 향상은 물론 대학 수업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다"고 했다.
하버드大 글쓰기 프로그램을 20년 동안 지휘해온 낸시 소머스 교수는 본지 인터뷰에서 “글을 써봐야 스스로 ‘질문’을 찾을 수 있고, 정해진 답이 아닌 ‘새로운 답’을 찾아낼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년간 하버드 글쓰기 프로그램을 이끌어온 낸시 소머스(66) 하버드대 교육대학원 교수는 지난 3일 본지와 전화 인터뷰에서 "대학 지식인은 글쓰기로 완성된다"며 한국 대학에서 글쓰기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강의 듣고 시험 잘 쳐서 대학 졸업할 수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평생 '학생' '관찰자' 위치를 벗어날 수 없다"면서 "졸업 후 자기 분야에서 진정한 프로가 되려면 글쓰기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말했다.
소머스 교수는 하버드 학생 422명을 대상으로 글쓰기 교육이 대학교 공부에 미치는 영향을 추적 조사한 연구로 유명하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글쓰기 교육을 받은 신입생 73%가 "수업에서 내 생각을 잘 표현할 수 있게 됐다"고 했고, 66%는 "전공과목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답했다. 실제 하버드에서는 1977년 이후 사회에 진출한 40대 졸업생 1600명을 대상으로 '현재 직장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는데, 90% 이상이 '글쓰기'라고 답변했다. 소머스 교수는 "시험만 잘 보는 학생은 '정해진 답'을 찾는 데 급급하지만 글을 잘 써야 '새로운 문제'를 찾아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공대생이든, 사회대생이든 글로 논리적인 주장을 펼 줄 알아야 논문도 쓰고 연구 결과를 인정받을 수 있다"면서 "하버드뿐 아니라 대학 교육의 근간은 글쓰기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모든 대학 교육은 기본적으로 글을 통해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방식으로 이뤄지며, 이를 장려하기 위해 하버드는 전공과 관계없이 글쓰기 교육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는 "처음엔 고교생 수준이었던 1학년의 글쓰기 실력이 리포트를 평균 12~16편 내면서 학기 말쯤엔 '學術人' 수준으로 향상된다"고 했다.
글쓰기 프로그램은 미국 대부분 대학에 도입돼 있다. 매사추세츠공대(MIT)는 과학자, 소설가 등 다양한 분야 인물들이 진행하는 글쓰기 수업을 운영한다. 예일, 컬럼비아大 역시 학부생에게 1대1 글쓰기 교습을 해준다. 반면 국내 대학가에선 이제서야 겨우 글쓰기 중요성을 감지하는 분위기다. 서울대는 올해 처음 치른 글쓰기 평가 결과가 좋지 않자 하버드대처럼 글쓰기를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글쓰기 지원센터' 설립을 추진하기로 했다.
소머스 교수는 학생들끼리 서로 글을 읽고 첨삭해주는 '동료 평가(peer edit)'가 글쓰기 실력 향상에 중요하다고 했다. "10여년 전 한국 방문 당시 고등학생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학생끼리 서로의 글을 읽고 고쳐주라고 했는데 '한 번도 해본 적 없다'고 해서 놀랐지요. 동료의 글을 최대한 많이 읽어보고 자기 글에 대한 평가를 받아봐야 비로소 내 글의 단점이 무엇인지, 어떻게 개선할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제시한 글쓰기 祕法 가운데 한 가지는 "짧은 글이라도 매일 써보라"는 것이다. "하루 10분이라도 매일 글을 써야 비로소 '생각'을 하게 되지요. 어릴 때부터 짧게라도 꾸준한 읽기와 쓰기를 해온 학생이 대학에서도 글을 잘 쓰더군요."
‘무릎 꿇기’ 자세가 가진 ‘수 많은 효과’
희망지성 편집부
입력 2016-05-27
[SOH] 무릎 꿇기 자세는 자리가 깔려 있는 땅바닥에 앉는 자세이다. 엉덩이는 복사뼈 쪽에 두고, 상반신은 쭉 펴고 양손은 무릎 위에 둔다. 또 가끔 정중함을 표현하기 위하여 엉덩이 부분이 발꿈치를 벗어난 것을 장궤라고 부르는데, ‘樂羊子妻(악양자처)’에서 婦人이 男便에게 “재물을 주워도 자기 것으로 탐내지 말라”고 당부할 때 이 자세를 취했다고 한다.
고대 武術을 하던 사람들은 왼쪽에 칼을 차고 다녔다. 그렇게 때문에 앉기 전에는 한 다리를 꿇어앉는 자세를 해야 했다. 그런 다음 무릎은 주먹이 하나 들어가는 폭으로 오른쪽 다리를 다시 굽혔다. 일어날 때는 오른쪽 다리를 먼저 일으키고 난 다음 왼쪽 다리를 일으켰다.
文人이 앉을 때는 우선 허리를 굽히고, 절하는 자세처럼 신체의 중심은 아래를 향하면서 양쪽 무릎이 땅에 닿는다. 앉은 후에는 여자와 같이 무릎을 모으고 양손을 앞에 둔다. 평소에는 전자의 방식으로 앉아도 되지만, 祭祀(제사)나 절을 할 경우에는 꼭 후자의 자세로 해야 한다.
고서에는 禮를 지켜 앉는 법에 대한 기술이 있다. 한 예로 西漢(서한)시대의 士大夫(사대부) 송총과 가의가 점쟁이에게 점을 볼 때의 逸話(일화)가 있다. 이 점쟁이는 학식이 매우 깊었는데, 당당하고 차분하며 조리있게 말을 했다. 그래서 이 두 학자는 숙연한 마음이 생겨 “엄숙하고 경건한 자세”를 하였다. 제복과 옷자락을 정리하고, 정자세로 앉아 이 점쟁이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 무릎을 꿇고 앉는 자세는 身心을 닦고 교양을 쌓는다
‘무릎을 꿇고 앉는 자세’는 심신을 수양 할 수 있다. 옛 사람은 모든 일에 대해 “正”과 中和之氣(중화지기)을 말했는데, 禮儀는 正이라 할 수 있고, 正을 시행해야 올바른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해 바른 자세로 앉아 있을 때 자신을 수양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릎 꿇고 앉는 자세는 기질을 높이고, 內外의 조합 및 화기로 자신을 보호하는 내면의 마음과 외면의 신체가 調和(조화)롭게 통일이 되는 수양을 중요시 하고 있다.
고대에서는 “군주는 禮로 신하를 보고, 신하는 忠誠心으로 정사를 본다.”라는 말이 있다. 이를 통해 임금과 신하의 사이에서도 禮儀(예의)를 굉장히 중요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하가 임금에게 人事를 올릴 때에도, 임금은 정숙한 정좌세로 받았는데 이는 서로 존중한다는 표현으로 예부터 단정하고 엄숙했던 中華人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약 정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대상을 존중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先秦(선진)시기에는 앉지 않거나 바른 자세로 앉지 않는 것을 예에 어긋나는 행위로 보았다. 孔子의 오랜 지기인 原壤(원양) 또한 바르지 않은 자세로 앉아 공자의 질책을 받았었다. 원양은 두 다리를 벌려 앉아 공자를 기다리다 공자에게 비판을 받았으며, 몸을 구부리고 지팡이로 종아리를 두드려 논어의 “原壤夷俟(원양이사)”라는 말이 나왔다.
● ‘무릎을 꿇고 앉는 자세’는 養生에 유익하다
무릎을 꿇고 앉는 자세는 수양에 좋을 뿐 아니라 나쁜 姿勢(자세)를 고치는 데에도 좋다. 이것은 신체에 많은 이로운 점이 있는데, 무릎을 꿇고 앉는 자세가 습관이 되면 등이 굽는 것을 줄여주고 무릎 관절염의 발생도 줄여준다.
中醫師는 무릎은 힘줄이 모여 있는 곳으로 힘줄이 숨어있는 방이며 거점지라 할 수 있다고 말했으며, “黃帝内經(황제내경)”에서도 肝主筋(간주근), 肝은 막힌 곳을 뚫어 준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무릎을 꿇는 것은 ‘肝을 보호하는 효과’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꿇는 자세는 인체의 胃經, 脾經 및 肝經을 자극 시켜 순환이 잘 되게 해준다. 이 경락의 부분은 인체 건강에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몸이 허약한 老人, 脾臟, 胃, 肝이 안 좋은 사람들 모두 이 꿇어앉는 자세로 건강을 회복 할 수 있다.
또 이러한 자세는 종아리의 胃經을 자극해 혈액이 족삼리 경혈의 부분을 충분히 통하게 한다. 족삼리는 인체의 첫 번째 혈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혈을 자극하면 養生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족삼리에 대해 민감하지 않지만 이것이 바로 중의학에서 말하는 血液이 통하지 않는 현상을 만드는 부분이다. 이러한 현상을 꿇어앉는 자세로 해결 할 수 있다.
● 매일 아침 30초 동안 꿇어 앉기를 하면 허리통증을 치료 할 수 있다
허리의 통증은 허리만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日本의 유도재활사이며 東京 정골원 원장이 20년동안 30만명을 치료하고 낸 “매일 아침 30초 동안 꿇어 앉기를 하면 허리통증을 치료 할 수 있다. (朝30秒の正座”で腰痛が治る)”라는 저서에서 놀라운 사실을 밝혔다.
허리통증은 크게 脊樞(척추)의 불균형, 발을 쓰는 방식, 혈액순환 불균형의 3가지 원인이 있는데, 매일 아침 30초씩 꿇어앉는 正姿勢(정자세)를 한 달 동안 하면 허리통증이 가라앉는 뚜렷한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 무릎 꿇고 걷기
양생방법 중의 또 하나는 무릎을 꿇고 걷는 방법이 있다. 두 다리를 비교적 두껍고 부드러운 쇼파나 매트 같은 물체 상에 구부린 다음에 무릎으로만 걷는 것이다. 무릎 아래의 내측과 외측에는 각각 움푹 들어간 부분이 있는데, 외측의 들어간 부분이 犊鼻穴(독비혈) 이다. 이것은 胃經상의 혈이며, 그 외에는 기혈이 왕성하고 강한 혈이다.
이 방법으로 무릎의 독비혈의 순환을 도와, 몸 안의 기혈을 아래 부분의 무릎으로 가게 한다. 무릎에 신선한 혈액이 많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굳어있는 무릎 관절을 매끄럽게 해주고, 무릎 관절의 마모를 줄여준다.
中醫師들은 흔히 “通하면 아프지 않고, 通하지 않으면 아프다”는 말을 자주한다. 위에서 소개한 방법은 血液을 통하게 해주므로 무릎관절의 潤滑油(윤활유)라고 할 수 있다. 행동이 편해지면, 통증도 줄어들게 되어 있다.
‘꿇어 앉기’에서 ‘의자에 앉기’로의 변화는 중국인의 精神과 마음의 氣質(기질)을 바꿔 놓았다. 송나라 이후, 꿇어앉기 자세는 점점 다른 것으로 대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자세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어서 고대의 꿇어앉는 자세는 日本에 전달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뜸사랑 봉사대원 대상, 구당의 특강과 시연(2017. 4. 21)
⚫구당 선생의 열정에 탄복
⚫막연하게 알던 구당 선생의 시연을 보고 감탄과 환희
⚫스승과 제자들의 아름다웠던 240분의 침뜸 사랑
지난 4월 21일 저녁, 서울 뜸사랑에서는 현재 봉사실에서 활동하고 있는 봉사자를 중심으로 灸堂 선생의 침뜸 강의와 취혈, 자침 시연이 있었다. 강의실은 가득 차고 넘쳐 구당 선생의 침뜸 시연에 목말라 있음이 입증되었는데 강의 내내 힘겹게 서있는 회원들도 있었지만.
봉사자들은 하나라도 놓칠새라 메모하고 사진과 동영상 촬영에 강의실은 후끈 달아올랐다. 구당 침뜸을 바로 알도록 이해를 돕기 위해 이날 있었던 구당 선생의 특강을 녹취 게재한다.
구당 선생은 4시간에 걸친 특강과 시연을 지친 기색하나 없이 열정적으로 이끌어 갔다. 삼십대 청년도 도저히 딸라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참석자들의 異口同聲이다. 그것도 100세를 훌쩍 넘긴 연륜에도 불구하고... 봉사자들은 진단과 치료에 관해 막연하게 알던 구당 선생의 시연을 보고 노스승에게 진정한 감사를 표했다.
● 구당 침뜸, 통합 의학의 초석
• 서양의학과 동양의학
서양의학은 기구를 통한 진단에는 뛰어나나 치료에는 약하다. 서양의학은 정상 아닌 것은 정상으로 만드는 치료는 하지 못한다. 반면 동양의학은 털 하나 손상시키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두며 치료한다.
서양의학의 진찰에는 엑스레이와 현미경을 사용한 보는 진찰, 청진기를 이용한 듣는 진찰이 있다. 치료를 위해 필요한 진찰이 아니라 죽이고 자르는 데 필요한 진찰이다. 대표적인 치료라고 하는게 癌 치료인데, 소위 항암제로 치료하다가 사람이 먼저 굶어서 죽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환자가 죽어도 의사의 잘못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서양의학은 傳染病(전염병) 치료를 했기 때문에 그나마 대우받고 있다. 만일 鎭痛劑(진통제)가 개발되지 않았다면 서양의학은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자르고 죽이는데 진통제가 없으면 치료가 가당하거나 하겠는가.
동양의학은 根本을 치료하기 때문에 털 하나도 손상시킬 필요가 없다. 털이 있는 곳에 뜸을 뜨면 더욱 잘 자란다. 단, 자르고 죽이는 것은 서양의학이 뛰어나므로 통합 치료가 되어야 한다. 醫는 하나이기 때문에 醫者에게 중요한 것은 동서양이 문제가 아니고, 환자의 고통을 없애는 것이다. 내 것 네 것 다툼으로 환자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서양의학과 특히 침뜸의학을 統合한 치료가 가장 우수한 치료 방법이 될 것이다.
• 침과 뜸의 원리
工學者로 인해 확실히 알게 된 것을 바탕으로 잘못된 치료를 없게 하려고 교육을 해왔다. 침뜸은 변함이 없는 것이고 어렵지 않다. 이제 침뜸이 쉬워져서 누구나 똑같이 쓸 수 있게 되었다. 침뜸 때문에 죽은 사람은 결코 없다. 침뜸이 위험하다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들 말고는 침뜸을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鍼은 몸속의 氣를 통하게 하는 쇠꼬챙이다. 몸속의 氣는 電氣이고, 전기는 쇠줄이어야만 통한다. 뜸은 피를 만드는 것이고, 피는 쇠가루이며, 뜸은 氣가 통하는 쇠줄을 만든다. 뜸은 쑥에서 빼낸 纖維(섬유)를 가지고 불을 이용해 상처를 내는 것이다.
몸 안의 발전소, 제약공장의 원료가 되는 게 뜸이다. 원료가 몸 안으로 흡수되어 피를 생성해 전깃줄을 만든다. 서양의학은 피를 만들어내지 못하므로 피가 필요하면 헌혈한 피를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
즉, 건선은 건조해서 생긴 병이고 습진은 아토피이다. 침뜸으로 좋은 피가 돌면 피부병은 자연히 치료된다. 약 성분 때문에 치료되는 게 아니다. 상처에 생긴 물질이 제약공장인 五臟六腑에 원료로 보내지면서 완전히 낫게 되는 것이다.
• 침뜸의 효과의 부작용
침뜸에는 부작용이 없다. 현재 鍼으로는 죽일 수도 병신을 만들 수도 없다.
과거에 사고가 있던 것은 침이 굵어서였다. 그런데도 그런 침을 쓰는 것은 가는 침 만드는 사람이 없어서였다. 현대는 0.1mm 침이 생산되고 있다. 그래서 죽이려 해도
죽일 수가 없다.
무극보양뜸을 창안하고 나서 누구나 쓸 수 있게 하려고 했으나, 자신이 창안했다고 주장하는 한의사가 있어 특허 등록을 하게 도었으며, 중국에서는 무극보양뜸국제연맹을 자신들이 만들어 나를 총재 자리에 앉혔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분은 잘 알 것이다. 또, 美國의 사우스베일로대학교에서는 구당 침뜸으로 博士課程(박사과정)을 개설해 교육하고 있어 내가 거기 가서 시연도 하곤 했는데 참으로 좋아하는 모습이 역력히 보였다. 그런데 유독 韓國에만 오면 뜸이 홀대받고 찬바람이 분다.
요즘은 침뜸을 한다고 한의사가 고발하거나 의사가 치료 방해를 하면 오히려 환자가 의사들을 혼내는 세상이 되었다. 환자들이 병에 대해 먼저 알아 병원에 안가게 된자 서양의학이 갈 곳이 없게 된 것이다. 환자들이 癌 진단을 받을까 무서워 병원을 찾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 갈 데가 없어진 환자가 뜸집으로 온다. 공짜여서 찾는게 아니라 효과가 있으니까 찾아온다.
● 대법원의 침뜸 교육 허용, 교육청의 평생교육시설 인정
우리 평생교육시설에서 침뜸을 교육해도 된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있었다. 이에 반발한 한의사들은 일부 의원들을 부추겨 평생교육시설에서 침뜸 교육을 금지하도록 평생교육법의 개정을 시도하고 있다.
지난 4월 서울특별시로부터 평생교육시설 신고중을 교부받아 정상적인 "정통침뜸평생교육"을 할 수 있는 평생교육시설로 인정되었다. 따라서 평생교육법 4조 4항에 따라 자격시험에 합격한 자에게 인증서를 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정회원 시험에서 앞으로는 자격시험으로 전환할 예정이다. 이미 정회원이 된 사람들은 재교육 등을 거쳐 資格證(자격증)을 발급받게 될 것이다.
● 診斷法(진단법) 다시 익히기
• 치료카드 작성
1. 인사: "어서 오세요" 하며 방문 목적을 들어보고, 항상 낮은 자세로 환자를 대해야 한다.
2. 치료카드 작성
1) 주소: 사는 곳, 거주지를 기록한다.
2) 주 호소: 제일 많이 아픈 곳을 기록한다.
3) 성명과 주민등록번호: 묻거나 직접 적는다.
4) 전화번호: 환자에게 연락하기 위해 기록혼다.
5) 직업: 일때문에 생긴 병인지 알고자 기록한다. 서양의학에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 처음 온 환자를 대하는 태도
환자에게 왜 왔는지, 어디가 아픈지 질문하면서 환자를 편안하게 해주어야 한다. 초창기 서양의사들은 우리보다 診察(진찰)을 자세히 했었다. 맥도 짚고, 두들기기도 하고... 그러나 지금은 이런 행동을 컴퓨터가 다한다.
우리 침뜸 의학을 하는 사람들은 겨울에도 봄가을과 같은 가운을 입어야 한다. 그것은 치료실의 상태를 알고, 환자가 추위에 노출되어 맥이 제대로 안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맥을 보는 이유는 보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心臟의 활동력을 알기 위해서이다.
• 보는 진찰, 만져보는 진찰
보는 진찰과 만져보는 진찰을 한다. 진찰을 통해 환자의 뜨겁고 차가움을 느껴야 한다. 진찰을 통해 正常과 정상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무릎이 아픈 환자는 양쪽 무릎을 만져 볼 수가 있는데 손이 무릎을 딱 덮도록 만져보면 상태가 다름을 알 수 있다. 만져보면 물주머니 2개가 잡힌다. 이 경우에는 알코올 솜뭉치를 왼손에 쥐고, 침놓을 자리를 잡고 內斜刺(내사자)한다. 가다가 막히면 잘 들어가는 쪽으로 천천히 넣어도 된다. 슬안에 침을 꽂아놓고 뜸을 뜬다.
무릎이 아픈 원인을 찾아야 한다. 처음에는 전체적으로 만져보고 맥을 짚는다. 허실을 위해 맥을 보는 것은 아니라 心臟의 활동을 보기 위해 맥을 짚는다. 심장에 피가 못 가면 피를 보내려 압력을 가하고, 열을 식히려 뜸을 내면 심장이 많이 뛰게 된다. 어디에 이상이 있어서 심장이 뛰는지 알아야 한다. 위쪽 두 손가락이 저리면 頸椎(경추)에, 아래쪽 세 손가락이 저리면 胸椎(흉추)에 이상이 있을 수 있다. 원인을 찾아서 치료해야 한다.
肝은 오른쪽에 위치하고, 이상이 있으면 딱딱해지고 통증이 있다. 脾臟은 왼쪽에 위치하고 갈빗대 밑에 만져진다. 胃는 중완에 딱딱한 게 만져진다. 心臟은 명치 밑에 만져진다. 肝이 안 좋으면 과거에 황달을 앓았는지도 알아봐야 한다.
● 좌골신경통 환자 취혈 자침 시연
• 주요 취혈 부위
족삼리는 다리에 힘이 없을 때 뜸뜨는 곳이다. 비골두소두를 만져서 수평으로 1치 올라가면 들어가는 곳 가장 높은 곳에서 밑으로 1치 또 뒤로 1치 되는 움푹한 자리에서 취한다.
곡지는 뜸자리 잡기 제일 좋은 곳이다. 주횡문과 손바닥을 아래로 했을 때의 가장 높은 능선이 만나는 곳이다.
중완은 기골 끝과 배꼽 한가운데의 중간을 잡는다. 한 번 뜸뜨면 백선이 확실히 나온다.
중극은 여자라면 누구든지 취한다. 배꼽 아래 4촌 곡골 위 1촌에서 취한다. 수도는 여자가 월경할 때만 주로 취한다. 월경을 안하면 천추에 취한다. 배꼽 아래 3촌인 관원에서 옆으로 2촌 나간 지점에서 취한다.
전중은 누운 자세에서 양 유두를 이은 선의 한가운데서 취한다.
천돌은 가래 많이 끓을 때, 에헴 하는 헛기침할 때 쓴다. 한 번만 뜨고 끝낸다. 흉골병 위로 0.5촌 올라간 오목한 곳에서 취한다.
신유는 양관을 먼저 잡고, 그다음 다음 마디를 잡는다. 제2요추 극돌기 아래에서 옆으로 1.5촌 되는 지점에서 취한다.
양관은 제4요추 극돌기 아래로 장골릉 위 수평선과 만나는 지점에서 약간 아래로 함몰되는 곳에서 취한다. 양관에 탈이 나면 좌골신경통이 온다.
환도는 환자가 무서워하지 않도록 환자가 모르게 침을 놓아야 한다. 침이 길기 때문에 양수법을 사용한다. 만져보면 한쪽 엉덩이가 높은 쪽에 대퇴골 대전자 뒤 위쪽 오목한 곳으로 대전자 최고점과 천골 밑의 요유혈을 이은 선의 밖 1/3 되는 지점에서 취한다.
폐유는 제3흉추 극돌기 아래 옆으로 1.5촌 되는 지점에서 취한다.
고황은 제4흉추극돌기 아래에서 옆으로 3촌 되는 지점에서 취한다.
백회는 전발제와 후발제의 한가운데서 앞으로 1촌 되는 곳에서 취한다. 전발제에서 5촌, 후발제에서 7촌되는 지점이다.
풍지는 후발제 위쪽 쑥 들어간 곳이다. 어지럽고 머리 아플 때 사용한다. 흉쇄유돌근과 승모근 사이의 오목하게 들어간 지점으로 풍부혈에서 수평으로 2.25촌 되는 부위에서 취한다.
견우는 어깨가 많이 아플 때 쓴다. 팔을 들었을 때 나타나는 어깨의 움푹한 곳 두 개 중 앞의 오목한 지점에서 취한다.
천주는 어지럽고 머리 아플 때 사용한다. 후발제에서 후정중선을 따라 수직 위로 0.5촌(아문), 다시 옆으로 1.3촌 되는 지점이 만나는 곳에서 취한다.
둔압은 다리, 허리 아플 때 사용한다. 엎드린 자세에서 천골과 미골의 접합부인 요유의 외방 2촌쯤 쑥 들어간 곳에 취한다.
• 발침할 때 주의점
침을 뺄 때는 침을 꼭 잡고 침 놓은 부위 양쪽 근육을 누르면서 빼야 피가 안 나온다. 뽑은 침은 왼손가락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고 계속해서 나머지 침을 뽑는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기회를 갖도록 하자.
500. 설레임(계간 구당 2017 여름) (0) | 2017.1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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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9. 스승님, 뜸향처럼(계간 구당 2017 여름) (0) | 2017.11.13 |
497. (권두언) 침과 뜸이 대체 무엇이기에...(계간 구당 2017 여름) (0) | 2017.10.02 |
496. 중국 조선족의 구당침뜸(계간 구당 2017 봄) (0) | 2017.09.26 |
495. 人生을 바꾼 침뜸 (0) | 2017.09.18 |
(권두언) 침과 뜸이 대체 무엇이기에...(계간 구당 2017 여름)
金 南 洙
본지 발행인, 한국정통침구학회 회장, 정통침뜸평생교육원장
"침뜸으로 百 年을 넘게 산 이 늙은이가 저 세상에 가기 전 간절한 바람이 있다. 국민의 대통령과 환자의 보건복지부 장관께서 [구당침술원]에 직접 오셨으면 하는 것이다."
自然은 하나다. 陰陽은 둘이다. 둘은 구분이다.
구분은 해와 달, 男子와 女子, 사람의 몸도 上下,
앞뒤, 左右 구분 상대이다.
구분은 바꿀 수가 없는 것.
바꿀 수가 없는 것이 하나 속에 둘이기 때문에
도로 하나인 것이다.
사람도 하나, 醫도 하나, 함께도 하나다.
침뜸은 죽이지 못하고, 자르지 못한다.
한의사가 醫療人일까?
서양의학은 죽이고 자르지만, 살리지 못한다.
서양의학이 醫學일까?
• 전기는 하나다.
음양 둘이 합하여 하나인 전기(氣)로 발전소에서 부터 스위치까지 하나의 전기다.
구당이 알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몸속에 전깃줄인 쇠줄이 있고, 쇠줄이 있다면 어떻게 해서 쇠줄이 形成하는지 확실하게 알고자 함이다.
인체 전기를 氣血이라고 하였다. 기혈은 끊임없이 通하는 것이다.
기혈을 통하게 하는 것이 침뜸인 것이다.
사람 몸속의 전기를 氣라고 하였다. 기를 통하게 하는 것이 鍼(침)이다.
전기는 金屬性인 쇠가 아니면 통하지 않는 것을 알려면 사람 몸통보다 더 큰 나무나 섬유를 줄로 하여 보아라, 전기인 기가 통하는가?
머리카락보다 더 가는 것이라도 금속의 쇠줄은 宇宙도 움직인다.
쇠줄이라고 해도 고체의 줄이 있고, 가루로 하여 연한 줄로 있으며, 소우주의 사람의 몸과 큰 우주인 지구는 금속성 가루인 쇠가루로 되어 있는 것이 기에 부딪침 없이 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본다.
• 이것을 알아보자.
고체인 쇠줄은 보여도, 가루인 쇠줄은 안 보여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멀리는 별과 달이고, 가깝게는 TV를 볼때 리모컨으로 한곳만 눌러주면 줄이 연결되어 조직되는 것으로 전깃줄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 줄이 맞지 않으면 조작이 안 되는 것으로 안 보여도 줄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줄, 쇠줄은 확실한 쇠가루인 것이다.
鍼이란 보이지 않는 전깃줄을 연결시키는데, 리모컨에서 목적인 자리를 누르면보이지 않는 줄이 이어지는 것과 같이 사람 몸속의 氣(전기)가 통하지 않을 때 통하게 하는 자리에 금속인 침을 찌르면 TV가 작동하는 것과 같이 보이지 않는 전깃줄을 연결시켜주는 것이 鍼이다.
• 뜸이란, 전깃줄을 만드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전기를 발전소에서 생산했어도 전깃줄 없으면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침뜸을 음양철학으로 말하면 虛實을 말한다.
작은 것, 즉 균형조절을 말하는 것으로 적으면 많게, 많으면 적게 해주는 손재주를 부리는 것을 鍼術이라고 하고 긴 세월 동안 형이상학적으로 실행하여 온 것이 부작용 없고 효과가 있었기에 전해져 사용되어 왔고, 다만 부작용이 없었다 하는 것은 침이었다.(당시엔 굵은 침을 사용했기 때문에 가는 신경이 끊어지거나 내출혈이 되는 부작용이 있었다)
침과 뜸만으로 가장 긴 세월 병이 있어도 병이 없어도 안 한 사람 없고, 안 간 곳도 없고, 안 만난 사람 없이 침뜸만으로 살아온 사람이 나 灸堂 하나뿐이고, 똑같이 6000명이라는 붕어빵들이 수백만 명에게 침뜸만을 하게 하여 침뜸이 건강 지킴이가 되면서 아직까지 손가락 하나 구부려 놓은 사람 없이 모두가 건강하며 죽을 때까지 걸림 없이 활동하는 것이 정통 침뜸으로 확인되었다.
• 2017년에 103세의 몸으로
하루도 쉼 없이 활동하면서 나 혼자만 그러하다면 침뜸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것이나 우리 뜸사랑 회원들은 고령의 남녀가 모두 하나 같아서 붕어빵이라고 한다.
침뜸을 하는데 어려운 허실보사 없이 鍼은 통하게 하고, 뜸은 뜸쑥에 불을 사용하여 피 만들어 전깃줄을 만들어 주는 것과 같다.
어려움 없이 생활로 쓸 수 있는 것을 누구나 할 수 있게 [정통침뜸평생교육]으로 온 세상 생명에게 알리는 것이다. 나 灸堂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후대에 남겨주고, 저 세상에 가서도 이 일로 살아보려 한다.
그리고, 침뜸으로 백 년을 넘게 산 이 늙은이가 저 세상에 가기 전 간절한 바람이 있다. 국민의 大統領과 환자의 보건복지부 長官께서 [구당침술원]에 직접 오셨으면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 오는 환자들의 아픔과 간절함을 직접 보시게 된다면 침과 뜸이 왜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하는지 아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17년 6월
499. 스승님, 뜸향처럼(계간 구당 2017 여름) (0) | 2017.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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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6. 중국 조선족의 구당침뜸(계간 구당 2017 봄) (0) | 2017.09.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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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조선족의 구당침뜸 - 한국에서 받은 최고의 선물
오ㅇㅇ(정회원 32기)
나는 꿈을 안고 2003년 한국에 온 중국 조선족이다. 이제는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중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10여 년의 한국생활을 돌이켜 보면, 지금은 별 문제 없이 무난히 생활하고 있는 내 몸을 보면서 참말 感悔(감회)가 깊다. 한국에서 뜸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요양 병원에 누워 고통스럽게 연명하고 있지 않을까?
• 어릴 때부터 허약했던 몸
나는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해 많은 잔병을 달고 살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이염을 앓았고 오른쪽 무릎이 아파 침을 맞았으며, 평생 설사를 안고 살았다. 처녀 때부터 요실금이 있었고, 허리늘 늘 시큰거리고 잘 삐곤 하였다.
겨울철만 되면 맑은 콧물이 줄줄 흘러 마스크를 쓰지 않고는 사람을 상대할 수가 없었다. 겨울은 물론 한여름에도 감기에 잘 걸렸으며 목에는 항상 이물질이 낀 것처럼 아프고 불편했다.
아랫배를 조금만 걸어도 가스가 팽팽 차면서 터질 것만 같았다.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되지 않아 머리가 터질 듯 아파 항상 중국산 개보린(去痛片)을 달고 살았다. 한국에 올때도 개보린을 한 보따리 사가지고 왔다.
• 한국 가정부 생활로 옮은 병
이런 몸으로 한국에 와서 가정부로 들어가 갓난아기를 돌보았다. 그럭저럭 아픈 몸을 지탱하면서 일하다가 2008년 내가 돌보던 아이가 폐렴에 걸리면서 나는 감염되어 중한 감기에 걸리게 되었다.
약을 일주일 먹고 낫는가 싶어 약을 끊었더니 재발이 되었다. 그 후로는 약을 먹어도 낫지 않고 코가 퉁퉁 부어오르며 피가 났다.
김치, 된장 같은 조금만 짜고 매운 것만 들어가도 목이 쓰리고 아팠다. 입안이 너무 마르고 침이 생기지 않아 목캔디를 달고 살아야 했다.
• 높은 백혈구 수치
눈도 모래알이 낀 것처럼 쓰리고 아프고 햇빛만 보면 눈물이 줄줄 흘렀다. 거기에다 방광염은 날이 멀다 하고 도지고 변비와 설사가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하곤 하였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날들이었다.
이비인후과와 비뇨기과를 반년 넘게 다녔는데 조금 나았다 싶어 약을 끊으면 또 다시 재발하곤 하였다. 6, 7개월 치료하다 의사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백혈구 수치가 너무 낮아서 그런다며 다른 방법을 써보라고 하셨다.
• 나는 침뜸으로 승부한다
이 상황에서 죽지도 않고 살기도 너무 고통스러운 나날을 절망 속에서 보내던 중 2008년 秋夕(추석)에 灸堂 金南洙(구당 김남수) 선생님께서 KBS 채널에 출연하시어 이틀 동안 침과 뜸에 대해 강의하시는 것을 들었다.
아! 이 방법 밖에 없구나. 나는 그 길로 서점에 가서 '나는 침과 뜸으로 승부한다' 등 구당 선생님의 책을 보이는 대로 몇 권 사가지고 왔다.
• 구당 선생님을 찾으러 나서다
책에 적혀진 번호대로 전화를 걸었는데 받는 이가 없었다. 그 후에도 열 번도 더 걸었지만 여전히 받는 이가 없었다. '남수침술원'을 어떻게 찾지? 초조한 마음으로 몇 달을 지내다가 어느 날 지하철을 타면서 우연히 "서울의 모든 것 120에 물어보세요"란 공익광고를 보게 되었다. 120에 전화를 걸었더니 찾아가는 길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그래서 일요일날 남편과 함께 淸凉里(청량리) '남수침술원'을 찾아갔다. 그런데 구당 선생님은 계시지 않았고 침술원은 진료도 못하고 있었다. 내가 중국에서 온 僑胞(교포)라고 하니 구당 선생님 아드님께서 동묘 봉사실을 알려주시면서 그곳에 가서 치료 받아보라고 하셨다.
• 동묘 봉사실에서 받은 치료
그 길로 동묘 봉사실에 찾아가 나의 정황을 말하고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봉사실 선생님께서 침을 놓고 뜸자리를 잡아주면 집에 돌아가 매일 한 번씩 꾸준히 뜸을 뜨고 일주일에 한 번씩 봉사실에 나와 침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그 날이 내 평생 잊지 못할 2009년 1월 18일이다. 내 건강의 길을 찾은 날이다.
침뜸 공부를 하고 난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무극보양뜸에 상성 신유 요추345 삼음교 대장유 천추 거궐 좌양문 등의 혈자리를 잡아주었던 것이다.
• 동생의 도움을 받아 뜸 뜨다
물이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방법 아니면 나의 몸은 다른 방도가 없다. 생각하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뜸을 떴다. 앞에는 나 혼자 뜨고, 등은 내가 보는 애를 유치원에 보내고 나서 버스 타고 동생한테 가서 떠달라고 했다. 하루라도 뜸을 뜨지 못하면 병이 원래대로 돌아갈까 봐 무서웠다.
• 4개월 만에 나타난 뜸의 효능
그렇게 끈질기게 4개월 남짓 떴을까? 하루는 일요일 휴무하고 일하는 집으로 가는데 그렇게 힘들던 오르막길이 예전처럼 힘들지 않고 다리가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아! 뜸의 효능이 드디어 나타나는구나! 나는 너무도 기뻤고 희망이 생겼다.
1년 남짓 뜨니까 불던 코가 점점 가라않고 피나는 것도 멎기 시작했다. 점차 김치, 된장도 먹을 수 있게 목도 좋아지며 입 안에 침이 생기기 시작했다. 눈에 모래알 낀 느낌도 없어졌으며 눈약을 넣지 않아도 되었다. 방광염도 도지지 않았다.
• 9년 동안 매일 뜸
나는 오늘날까지 9년째 매일 뜸으로 건강을 지키고 있다. 지금 나는 그렇게 잘 삐던 허리도 이제는 삐지 않고 시큰거리던 증상도 없어졌다. 겨울이 되어도 다시는 콧물이 흐르지 않는다.
긁어도 없어지지 않던 혀의 누런 태도 언제 없어졌는지 지금은 담홍색의 깨끗한 혀가 되었다.
소화가 되지 않아 머리가 터질 듯 아파 고생했던 위도 증상이 사라져 지금은 두통을 모르고 산다. 물론 중국에서 가지고 온 개보린을 모두 버렸다.
아랫배에 차던 가스도 언제 없어졌는지 지금은 몸이 가볍고 그렇게 많이 빠지던 머리카락도 빠지지 않는다.
• 요실금 수술 후 10년
10년 전에 나는 한국 적십자병원에서 무료로 요실금 수술을 했고, 그 후에는 하지정맥류 수술도 했다. 이 두 가지 병 모두 시간이 지나면 재발하기 쉽다고 하는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재발 없이 편히 지내고 있다. 나는 이것을 중극, 수도 등에 놓았던 뜸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뜸은 나는 큰 돈도 들이지 않고 그 지극한 공통에서 탈출시켜 주었다. 지금 나는 만성병에는 뜸이 최고라는 말을 크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 가족 건강 위한 침뜸 공부
중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 좋은 의술을 공부하여 최소한 우리 가족의 건강이라도 지켜야겠다고 생각하며 2014년 10월부터 침뜸공부를 시작한다.
이 공부를 하면서 내가 왜 그렇게 잔병이 많았는지 알게 되었다. 원래 나는 선천적으로 오장육부를 허약하게 가지고 태어났던 것이다.
腎氣가 약해 중이염과 요실금을 앓았으며, 허리가 시큰거리고 잘 삐었던 것이다. 脾氣가 약해 설사를 달고 살았고, 胃氣가 소화가 되지 않았으며, 肺氣가 약해 코와 목이 아팠고, 心氣가 약해 하지정맥류와 고혈얍을 앓았던 것이다. 정말 이 공부를 잘 했다고 생각한다.
• 남편 습진 치료
나는 이 공부를 하면서 한국에 와서 몇 년 동안 고생하게 만든 남편의 濕疹(습진)도 치료했다. 무극보양뜸에 비유 신유 대장유 삼음교 축빈 혈해 견우 여구 등 혈자리를 취해 4~5개월 뜸을 떴다. 그렇게 몇 년간 약을 먹고 바르고 해도 근치가 되지 않던 습진이 진물이 서서히 마르면서 깨뜻이 치료가 되었다.
불로 살을 태워서 무슨 병을 고치냐며 의심하던 남편은 이제 적극적으로 뜸을 떠다라고 한다.
남편의 가족은 치매 가족력이 있다길래 몹시 걱정했는데 뜸이 치매, 중풍, 암까지 豫防(예방)한다니 이 보다 더 좋은 의술이 어디 있겠는가? 지금 나와 남편은 짬만 나면 서로 뜸을 떠주면서 노년의 건강한 삶을 지키고 있다.
• 한국에서 얻은 갚진 보물, 구당 침뜸
14년 전 나는 돈 벌러 한국에 왔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한국에서 얻은 수확은 돈이 아니다. 그 보다 몇 곱이나 값진 침뜸을 만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건강을 찾았다.
그 醫術(의술)을 기초 지식이나마 배웠다는 것이 최고의 수확이고 한국에서 받은 최고의 선물이다. 나는 침뜸 덕분에 體質(체질)을 개선시켰고 건강을 찾았다.
구당 선생님의 책 이름과 같이 이제 뜸은 정말 내 사랑이 되었다.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나와 나의 가족은 뜸으로 건강을 지킬 것이며, 또 많은 사람들에게 뜸을 널리 전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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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바꾼 구당 침뜸
최ㅇㅇ(정회원 31기)
• 위내시경 검사, 조직 검사
2010년 4월경 몸에 이상 증세가 시작되었다. 등에서는 전기가 오듯이 저릿저릿한 증상이 계속 되고,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면 밤새도록 뱃속에서 나는 꾸룩꾸룩 소리에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았다.
회사에서 하는 건강검진은 아직 날짜가 더 있어야 했다. 내 돈을 들여 병원을 가자니 아까워 6개월초까지 기다리던 중 별안간 몸무게가 3kg 빠졌다. 그래도 6월 검진까지 버틴 끝에 검사를 하게 되었다.
내시경 검사 도중 의사가 나에게 위장을 절제하면 많이 불편하니 약 좀 먹고 관리 좀 하라는 충고를 하며 위에서 조직을 떼어 냈다. 나는 별일 아니겠지 하며 한 귀로 흘려버렸다.
• 암 진단을 받다
일주일 후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빨리 방문하란다. 나는 다음날 방문하기로 하고 이유를 물었다. 병원 쪽에서는 암이란다.
난 잠시 멍해졌다. 집사람이 왜 그러냐고 묻는데 대답할 수가 없었다. 조그만 목소리로 "암이래
!"했다. 순간 아내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다. 다음날 병원에서 달려가 검사 결과를 들었다. 결과는 胃癌 初期라 하였다.
믿을 수 없어 검사 결과가 담긴 CD를 가지고 큰 병원을 찾기로 했다. 일산에 있는 국립암센터를 찾아가 다시 검진을 받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좋은 방법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위장을 전부 절제해야 한다는 진단이 나왔다.
• 무책임한 위장절제 수술
TV에 나왔던 유명하신 의사가 나에게 위장을 절제해도 정상인 사람과 똑같이 먹을 수 있고 사는 데 불편함이 없다고 안심을 시켰다. 수술을 결심하고 병원에서 제일 첨단 수술인 로봇 수술을 하자고 하니 의사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좋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실수였다.
보통 복강경이나 절개수술은 2시간 정도면 끝나는데 의사의 실수로 인하여 6시간 30분이나 걸려 수술이 끝났다. 그럼에도 의사는 나나 내 아내에게 한 마디 설명도 없었다. 수술이 끝나고 떼어낸 암덩이도 보호자에게 보여줘야 하는데 의사는 한 마디도 안 했다. 다음날 학회를 핑계로 내 앞에 나타나질 않았다. 그러더니 퇴원 전날 나타나 수술이 잘됐다는 얘기만 하고 사라졌다.
퇴원 후 저혈압으로 119에 실려 갔다. 병원에 가서 CT를 찍으니 수술을 두 번 했냐고 이곳 의사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충격을 받았지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니 잊자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 주말 약초꾼, 오지 어르신 위해 침뜸 공부
암 수술 후 더 열심히 藥草를 찾으러 산으로 들로 주말이면 다녔다. 그러던 중 어느 오지 마을에 갔더니 어르신들만 계셨는데 모든 아픈 분들이었다.
이곳 강원도 오지는 면소재지라도 병원이 없는 곳이 있어 몸이 아프면 약초를 먹거나 민간요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것이 안타까워 도움이 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찾아 이곳저곳 알아보던 중 TV에서 灸堂(구당) 선생님을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침뜸을 배워 의료 혜택을 못 받는 오지의 어르신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고 일요반 접수를 하였다.
• 원주 무료진료실, 주말 오지 무료진료
졸업 후에도 무료진료실을 나가긴 해도 직장인이라 평일 무료진료는 한계가 있었다. 회사에 매주 휴가를 내기도 어려웠다. 주말에 오지로 산행을 가서 그곳 이장님께 침뜸 무료진료 한다 말씀 드리면 마을 회관으로 아픈 환자들 오시라는 방송을 하셨다.
토요일 하루는 무료진료하고 일요일은 약초 산행을 하였다. 물론 지금도 종종 하고 있는데 마을에서 인기가 좋아 다른 마을의 환자들도 치료를 받으러 찾아오신다.
• 동기들과 함께 무료진료, 임상실험 나눔
원주 무료진료실을 자주 못 가던 차 원주 무료진료실을 만든 우리 선배이신 김창수 신부님께서 충북 제천 백운성당으로 부임하여 가시며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백운성당에 무료진료실을 마련할 테니 일요일무료진료가 가능하냐고 말씀을 하시기에 난 두말없이 감사하고 고맙다고 인사를 드렸다. 2016년 10월 2일 제천 백운성당 무료진료실 개원을 하게 되었다.
• 제천 백운성당 무료진료실
제천 백운면에는 병원이 없다. 아프면 제천 시내나 원주로 가야 하는 불편 때문에 이곳에서도 무료진료실은 인기가 좋다. 아프신 분들도 아무 의심 없이 우리 무료진료자들을 받아들여 치료 효과도 매우 빠른 편이다. 이곳의 여성 신도들이 뜸뜨는 것을 배워 동네를 매일 돌며 우리 무료진료자들이 자리 잡은 환자들의 뜸자리에 뜸을 떠드리니 이곳의 환자분들은 많은 효과를 보고 있다. 김창수 신부님의 사랑과 헌신으로 이곳 백운 무료진료실도 침상 두 개로 시작하여 지금은 4개가 되었고 무료진료하시는 선생님도 소현 선배님과 나 포함 4명이다.
• 침뜸으로 요통, 비염 치료
침뜸을 배우고 나서 나에게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은 변화가 찾아온다.
나는 암환자란 생각으로 늘 불안한 마음이 있었고 삶에 대한 애착은 많았는데 자신이 없었다. 늘 재발에 대한 남모르는 두려움이 있었다. 침뜸을 배우기 전에 건강검진을 하면 요산수치도 높고 비염 때문에 호산구수치도 높게 나왔으며 요통도 25년 동안 앓고있었다.
비염 때문에 냄새를 맡지 못한지도 몇 년 되었다.
위가 없으니 다른 사람에 비해 많이 깡말랐다. 수업시간에 혈자리 잡기가 다른 사람보다 좋다고 모델로 많이 나가서 교수님들께 아픈 곳에 뜸자리도 잡고 치료도 많이 받았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뜸을 떴다.
어느 날부터인가 코에서 냄새가 맡아지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나 건강검진을 받고 결과를 보니 모든 수치들이 정상으로 나왔다. 특히 지긋지긋한 요통에서 해방되었다.
• 회사 동료 침뜸 치료
나는 한 직장에서 30년 이상을 다니고 있다.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회사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꽤 알려진 회사다.
이곳 원주에는 1500명 정도가 근무 하는데 침뜸을 배우며 회사동료들에게 임상실습도 많이 한다. 근골계 질환이 심한 직원들이 많아 치료도 많이 한다. 회사의 윗분들도 아프면 나를 찾아온다.
• 원형탈모 후배 치료
한번은 머리에 500원짜리 만한 원형탈모가 10개정도 있는 후배가 한방대학병원을 3년 다녔는데 돈만 수억 버리고 효과가 없다고 나를 찾아왔다.
그 친구에게 집으로 오라하여 배운 대로 진단과 변증을 하여 치료를 시작하였다. 이틀에 한 번씩 집으로 오라고 했다. 스트레스로 인한 문제로 水昇火降이 안 되어 생긴 것으로 판단되었다. 무극보양뜸을 기본으로, 침과 뜸으로 火氣는 내리고 원형탈모가 있는 곳에는 쌀알 크기로 뜸을 떴다. 10일 정도 지나자 조금씩 머리카락이 나기 시작하더니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다.
약 3개월 15일 후 그 친구는 원형탈모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었다. 그 친구의 원형탈모도 치료했지만 精神的인 문제도 함께 치료했던게 치료의 핵심이었다. 술자는 환자의 마음도 헤아리며 치료를 해야 기간도 짧아지고 효과도 아주 좋아짐을 늘 느낀다.
• 지인 장인 변비 치료
또 한 번은 지인의 장인이 평생 변비로 고생하시는데 아주 심할 땐 장갑을 끼고 파내신다고 들었다. 나 보고 혹시 변비도 치료하느냐고 묻기에 한번 만나나 보자며 지인 집으로 찾아가 그 어르신을 만났다. 어르신께 그 동안 변비로 고생한 이야기를 듣고 무극보양뜸과 황유 대장유 신유 이신문 그리고 변이 만져지는 변비점과 요안에 뜸을 5장씩 해드렸다. 그 어르신 따님에게 매일 뜸을 해드리라고 하고는 돌아왔다.
다음날 저녁 지인에게서 집으로 급히 오라는 연락이 왔다. 갔더니 그 어르신이 너무 반갑게 맞으시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변을 시원하게 보았다며 아주 고마워하셨다. 꾸준히 뜸을 뜨시면 완쾌도 가능하다고 하니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셨다.
• 백운성당에 오신 다리 저는 할머니
오늘도 백운성당 무료진료실에 다녀왔다. 75세 된 여자 어르신 두 달 째 오시는데 처음에 오실 때 절룩거리며 몇 걸음 못 걸으셨으며 겨우 무료진료실에 들어오셨다.
온몸이 아프다며 고통을 호소하셨으며 다리는 퉁퉁 부어 있었다. 뜸자리를 잡고 침과 같이 뜸을 정성껏 해드리고 집에 가셔셔도 매일 뜸을 하시라 말씀드렸다. 꼭 그러마 답을 하시고 돌아가셨다.
오늘은 오시더니 여기오기 전 병원에 다니신 이야기를 해 주셨다. 외과, 한의원을 15년 동안 다녔는데도 효과가 없었는데 백운 무료진료실에 와서 큰 효과를 보셨다고 칭찬을 하시고는 점심을 사주신다고 같이 나가시자고 하셨다. 무료진료자 모두가 점심 대신 아픈 환자분들 많이 모시고 오라 부탁 드렸더니 많이 아쉬워하셨다.
• 초심을 생각하며 공부, 노력
나는 늘 初心을 생각하며 공부를 하고 노력한다. 침뜸은 내 아픈 육체와 오지에서 살아 아파도 치료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배운 것이다.
초심으로 돌아가자. 훌륭하고 우수한 구당 선생님의 침뜸을 배웠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음지에서라도 열심히 무료진료하고 우리 제자들이 한 마음 한뜻으로 뭉쳐 싸우다 보면 곧 밝은 양지로 활짝 웃으며 나을 수 있을 거라 나는 확신한다.
나는 이제껏 살며 잘 한 것이 3개 정도 있는데 하나는 현재 직장에 취직하여 열심히 일하여 처자식을 먹여살린 것이고, 두 번째는 아내와 결혼한 것이고, 세 번째로 잘한 것은 구당 침뜸을 배운 것이다. 살아가며 내 손으로 아픈 사람을 위해 무료진료할 수 있다는 것에 정말 자랑스럽다.
정년이 4년 정도 남았다. 정년퇴직후의 내 인생은 어느 누구보다도 침과 뜸이 있기에 행복할 거라 믿고 있다. 나는 구당 침뜸이 있기에 누구보다 더 건강할 수 있었다고 자신할 수 있다. 내는 내가 무료진료한 모든 환자들이 구당 침뜸이 있기에 건강할 수 있었다고 자신한다.
497. (권두언) 침과 뜸이 대체 무엇이기에...(계간 구당 2017 여름) (0) | 2017.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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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6. 중국 조선족의 구당침뜸(계간 구당 2017 봄) (0) | 2017.09.26 |
494. 뜸, 20년 어지러움 치료(계간 구당 2017 봄) (0) | 2017.09.05 |
492. 구당침뜸, 시작(계간 구당 2017 봄) (0) | 2017.08.28 |
무극보양뜸 목록 (0) | 2017.08.28 |
한의학고전DB서적목록 (76권)
2015년 (공개 완료)
●1. 동의보감(원문/번역문/영문)
검요(원문/번역문)
단곡경험방(원문/번역문)
별초단방(원문/번역문)
●5. 본초유함요령(원문/번역문)
본초정화(원문/번역문)
사의경험방(원문/번역문)
석곡산고(원문/번역문)
석곡심서(원문/번역문)
●10. 소문대요(원문/번역문)
수세비결(원문/번역문)
수진경험신방(원문/번역문)
식의심감(원문/번역문)
신간의가필용(원문/번역문)
●15. 신기천험(원문/번역문)
실험단방(원문/번역문)
약산호고종방촬요(원문/번역문)
양무신편(원문/번역문)
연소천지문답(원문/번역문)
●20. 요략(원문/번역문)
우잠만고(원문/번역문)
우잠잡저(원문/번역문)
의가비결_유의소변술(원문/번역문)
의감중마_목판본(원문/번역문)
●25. 의감중마_필사본(원문/번역문)
의방합부_의방합편(원문/번역문)
의본(원문/번역문)
의원거강(원문/번역문)
의휘(원문/번역문)
●30. 이석간경험방(원문/번역문)
주촌신방_연인본(원문/번역문)
주촌신방_필사본(원문/번역문)
진양신방(원문/번역문)
진우신방(원문/번역문)
●35. 춘감록(원문/번역문)
치종방(원문/번역문)
치종비방(원문/번역문)
치종지남(원문/번역문)
침구경험방(원문/번역문)
●40. 포상기문(원문/번역문)
2016년 (공개 완료)
경악전서(원문/번역문)
사암침구요결(원문/번역문)
의종금감_외과심법요결(원문/번역문)
상한경험방요촬(원문/번역문)
●45. 군중의약(원문/번역문)
은해정미(원문/번역문)
금궤요략(원문/번역문)
남양활인서(원문/번역문)
본경소증(원문/번역문)
●50. 동의사상신편(원문/번역문/영문)
2016년 (예정)
황제내경_소문(원문/번역문)
2017년 (예정)
본초강목(원문/번역문)
향약집성방(원문/번역문)
침구극비전(원문/번역문)
●55. 단방비요경험신편(원문/번역문)
침구택일편집(원문/번역문)
증보단방신편(원문/번역문)
상한창화훈지집(원문/번역문)
소문입식운기론오(원문/번역문)
●60. 산보명의방론(원문/번역문)
급유방(원문/번역문)
의종손익(원문/번역문)
광제비급(원문/번역문)
2018년 이후 (예정)
황제내경_영추(원문/번역문)
●65. 임증지남의안(원문/번역문)
중국의적고(원문/번역문)
의학입문(원문/번역문)
방약합편(원문/번역문/영어)
제세보감(원문/번역문)
●70. 지사공유사(원문/번역문)
명의경험방(원문/번역문)
경험방_고려대(원문/번역문)
신응경(원문/번역문)
산실청총규(원문/번역문)
찬도방론맥결집성(원문)
●76. 의학강목(원문)
한국한의학연구원(Korea Institute of Oriental Medicine)
무극보양뜸, 20년 어지러움증 해방되다
신ㅇㅇ(뜸사랑 정회원 31기)
• 이명과 함께 시작된 어지러움증
작년까지만 해도 나의 가장 큰 고통은 20년 동안 나를 괴롭혀온 심각한 어지러움증이었다. 30대 후반이었던 90년도 후반부터 耳鳴(이명)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단 이명이 생기고 나면 그것이 어지러움증으로 이어지는데, 오장육부가 뒤집어지는 듯한 구토를 동반했다. 응급실에 가서 진정제를 맞아도 몇 시간은 고통을 겪어야 진정이 되곤 했다.('환장한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처음 몇 년은 일 년에 서너 번 오던 것이 2012년경부터는 수시로, 때로는 일주일에 두세 번까지도 이런 증상이 생겼다. 한번 어지럼증이 찾아오면 바로 옆에 있는 물컵도 들 수 없을 정도로 중심을 잡을 수 없었고, 온 세상이 빙빙 도는 증상이 몇 시간씩 지속되었다.
• 불가능해진 일상생활
처음엔 '이명'이라는 전조증상이라도 있어서 외출을 자제하는 등 조심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병이 진행될수록 이명은 항상 따라다녔고, 심한 증상이 언제올지 가늠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10여 초 사이에 시야가 거꾸로 뒤집히며 위와 같은 증세가 나타나곤 했다.
한 번은 운전 중에 증상이 와서 대형사고로 이어질 뻔했기 때문에, 이후로는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감에 운전도 할 수가 없었다. 더 심해져서는 잠을 자다가도 새벽녘에 어지러움이 생기곤 하였는데, '사람이 이렇게 죽기도 하겠구나'싶었다.
한번 이 증상이 오면 장이 뒤집어질 만큼 토하기 때문에 일주일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후유증으로 누어있어야 해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했고, 체중도 1년 사이에 약 7kg 정도 줄었다. 또 이명이 있는 왼쪽 귀는 청력도 저하되어 전화도 받을 수가 없었다.
• 뚜렷한 답을 못 주는 병원 진료
이비인후과 진단도 받아봤고, 이런 증상이 올 때마다 병원 진단도 받았다. 한의원에서는 화병이다, 또는 기력이 쇠했다 하고, 이비인후과에선 이석증 또는 메니에르병, 양방에선 히스테리발작증세라기도 하고, 어떤 곳은 두고봐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그중 내가 가장 신뢰하는 단골 내과선생님께서는 "장과 위의 연동운동이 맞지 않아서 오는 증상이지만, 이 어지러움증이라는 것이, 수십 가지나 되는 원인 중 몇 가지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조합을 완전히 찾기 어렵다. 더 이상 검사해봐야 별 소득이 없을 거다."라며, 증상이 올 때마다, 진정제를 미리 조제 해두었다가 먹는 방법이 나을 거라고 하셨다. 그나마 이곳 내과 선생님이 가장 양심적인 셈이다.
• 검사는 하되 치료는 못하는 병원
다른 곳은 이 검사 저 검사로 한번 가면 몇 십 만원 병원비가 나와도, 귀를 검사해 보고는, "아무 이상이 없네요... . 피검사에도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한다. 초음파로 들여다보고는, "여기엔 특별한 증후가 없습니다." 한다. 혹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병명을 내놓기는 하는데, 그 진단이 맞다면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하면 병이 나아야 하지 않는가. 한의원을 다니든 양방병원을 다니든 병은 더 심해져 가고만 있었다.
나중엔, '도대체 뭘 알고 하는 건가. 그냥 병원 수입올릴려고 여기저기 찔러보기 식으로 잡아두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어서, 병원에는 더 이상 가지 않게 되었다. 내과에서 조제해준 진정제를 먹고 버텼지만, 나중에는 진정제마저 듣지 않게 되었다.
가족들은 병원에서 가서 좀 더 정밀검사를 하자고 했지만, 그동안 병원에서 이렇다 할 효과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더 이상 기대감이 없었다.
• 신문기사로 만난 구당 선생
2008년인가, 신문에 배우 장진영 씨가 구당 선생님께 치료를 받고 있는데, 구당 선생님의 자격증 문제로 논란이 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그때는, 불법이라기보다는, 뜸은 우리의 소중한 전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뭔가 좀 특별한 생각이 들었는데, '이 분이 연세가 많으신데 돌아가시기 전에 이걸 배워둘 순 없을까...'하는 바램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아직 어지러움증이 일상생활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고, 그저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정도였다. 또 사라지는 유산을 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지 침뜸이 내 병을 치료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 면역글로블린 주사
그러다 2012년부터 증상이 심해져서 일하는 도중에도 몇 번씩 쓰러졌고, 2013년부터는 하던 일도 내려놓게 되었다.
극심한 고통을 겪는 와중에 집안에 큰일까지 겹쳤다. 주변 소개로 면역글로블린이라는 주사를 일주일 간격으로 맞으며 버틸 수 있었다.(지금 생각하면 진액 보충 정도가 아니었을까... .) 하지만 이것도 끊으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니 근본적인 치료는 되지 않았다.
• 지식으로만 배워두려던 뜸
어쨌거나 더 이상 하는 일도 없겠다 남는게 시간이라, 전에 신문에서 봤던 구당 선생님을 떠올리고는, 인터넷을 뒤져서, 2014년 5월에 335차 초급반을 등록하게 되었다.
처음엔 뜸만 뜨는 간단한 과정인줄 알았는데 1년 과정인 걸 알고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초급반 3개월만 투자해서 뜸뜨는 것만 배우려는 생각이었는데, 동기 선생님들이 밀어주고 당겨주셔서 1년 과정을 다 수료하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뜸은 옛날부터 민간에서 전해지던 것이라 생각했기에, 상식차원에서 배워두면 좋겠다 싶은 것이지, 내 병을 고칠 것이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몸에 화상자리가 남는 것도 싫고, 더구나 머리털을 태워가면서 백회 자리 남는 것도 꺼려졌다. 강의 내용은 음양오행도 따지는데, 동양사상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음양오행이란 점이나 수주팔자를 보는 데에 쓰이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기에 이해도 잘 되지 않았고, 개념 정리가 안 되어 있어 강의가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 쓰러지는 바람에 무료진료실에서 치료 받다
이런 이유로, 뜸사랑 교육원에 등록한 초기에는 지식으로 배워두긴 하되, 내 몸에 뜸을 뜰 생각은 없었다. 몸이 냉해서 삼복더위에도 핫팩을 윗배 아랫배에 두 개씩 붙이고 다니면서도... .
그러다 어느날 또 쓰러져 집에 누워있는데 짝꿍선생님이 우연히 안부 전화를 주셨다. 내 상황을 아시고는 놀라셔서 당시 담당교수님이신 김모 교수님과 연결해 주셨다.
마침 월요일이라 동묘 무료진료실에 가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교수님께 혹시 누가 될까 심명은 밝히지 않는다) 그 꺼려지던 화상 자리도 십여 군데 나고... .
몸이 너무 쇠약하여 침도 잘 못 맞겠다며 뜸이나 열심히 뜨라고 하셨다.
• 일 년간만 꾸준히 뜸하기로 마음먹다
그 꺼려지던 화상 자리도 생겼겠다, 교수님께서 그토록 낫는다고 권하시니, 기왕에 어차피 이리된 거 일단 한 일 년은 거르지 말고 최선을 다해보고 난 후에 차도가 없으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끊어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뜸자리는 무극보양뜸+좌천추, 우양문, 신유, 두유, 완골이었다. 뒤쪽은 일주일에 두 번 강의 나오는 날에 동료 선생님들이 떠주였고, 앞쪽과 백회는 매일 떴다. 남의 손을 의지하면 매일 지속적으로 할 수 없을 것 같아, 폐유까지는 혼자 뜨신다는 교수님의 말씀에 도전을 받아, 백회는 혼자 뜨는 연습을 해서 터득하게 되었다.
• 계속 쓰러졌지만 희망은 뜸
그렇지만 처음 얼마간은 차도가 없었다. 여전히 시도 때도 없이 쓰러졌다. 그나마 다행히 뜸사랑 교육원 가는 날은 비켜가는 바람에 총 28회 수업 중 7번 결석으로 턱걸이로 중급반에 올라갈 수 있었다.
어느 날은 수업에 가려고 집에서 나오다가 쓰러져 집에 놀러 앉고, 수업 가는 도중에 전철 안에서 어지럼증이 와서 집에 돌아간 날도 있었다.
위는 돌처럼 굳어 죽조차 하루 한끼도 못 먹고, 수시로 찾아오는 늑골 밑 담 결림과 다리와 발에 쥐가 나는 현상 등이 있었다. 그래도 1년은 최선을 다해보고 결론을 내리자. 어차피 화상흉터 난 거... .'라며 스스로 다랬다.
• 3개월 지나 증상 호전
한 3개월 지나니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이후 1년 반이 지나고, 정회원 시험을 치를 때까지도 여전히 불안한 상태였다. 토하는 횟수가 줄어들긴 했어도 여전히 아주 없어지진 않았다.
그나마 좀 희망적이었던 것은, 이전처럼 증상이 끝까지 가지는 않고 도중에 멈추는 일도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전엔 일단 어지러우면 몇 시간씩 토하고, 몇 시간씩 어지러움증이 계속되고, 이후로도 1주일은 누어서 지내야 했다.)
• 만 삼 년 만에 99% 치료
2017년 6월이면 무극보양뜸을 시작한지 이제 만 삼년이 되는데, 이젠 90% 치료가 되었다. 치료된 증상은 다음과 같다.
- 2016년 1월 이후 2017년 2월 중순까지 일 년간 한 번도 증상이 찾아오지 않았다.
- 위장도 회복되어 아무거나 잘 먹을 수 있다.(단, 찬 것은 될 수 있으면 피하고 따뜻하게 데워 먹는다.)
- 뜸 뜬지 2년 정도 지나니 이명이 사라졌다.
- 2년 8개월이 되는 요즘, 청력도 회복되어 왼쪽 귀로 전화도 받을 수 있다.
- 늘 얼음장 같던 손발이 조금씩 따뜻해졌다.
- 쥐가 나거나 담 결림도 거의 사라졌다.(아주 없어진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남들도 겪는 일반적 수준이 아닐까 싶다.)
• 주변 사람들 뜸자리 잡기
하도 요란하게 아팠기 때문에, 무극보양뜸이 어떤것인지 설명할 필요도, 불법이냐 아니냐를 따질 필요도 없었다. 나 자신이 멀쩡히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교회나 친구 가족들에게 무극보양뜸의 효능을 입증하는 셈이 되었다.
며칠 전 큰 딸이 뜸을 떠 주면서, "구당 선생님이 우리 엄마에겐 은인이시오. 참 고마운 분."이라고 했다. 작년 봄에 지인 중에, 시동생이 평소에 기침을 심하게 하는데 뜸자리를 잡아달라고 부탁해서, 만나서 뜸 자리를 잡아준 적이 있다.
시동생의 딸(5학년)도 심한 아토피로 스테로이드의 약을 바르고 복용하고 있다면서 팔다리에 딱지가 심한 채로 아빠를 따라왔다. 아이 아빠인 시동생은 무극보양뜸+ 신유를 잡아주었고, 딸아이는 폐유, 중완, 곡지, 축빈, 여구, 대장유를 잡아주었다. 몇 달 후 만나니, 아이도 아빠도 깨끗해졌다고 인사를 했다. 시동생이 꼼꼼해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뜸을 떴다고 한다.
• 3개월간 집중 교육
정회원 시험 합격 후 현재 무료진료실에 나가고 있다. 초기에는, 수료는 했으나 실전은 자신이 없었다. 적극적인 동기 선생님의 수고로 남 교수님께 우리의 심정을 말씀드렸다. 배우고자 하는 우리의 맘을 어여삐 봐주신 교수님께서 조건없이, 약 3개월간 집중교육을 해주였다.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이 기회를 빌려 치료해 주시고 가르쳐주신 두 분 교수님께 특별히 감사를 드린다.
무료진료실이 있어서 참 좋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손을 놓으면 잊어버리게 되는데 일주일에 한 번 정기적으로 무료진료함으로 관심을 꾸준히 가질 수 있고, 앞서 배우신 선배 선생님께 지도 받을 수 있음도 참 감사하다. 이 모든 무엇보다 앞서, 무극보양뜸을 개발하시고 전수해주신 구다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 시술 금지시 무료진료실 운영
개인적으로 뜸사랑 무료진료실 운영에 대해 소박한 바람이 있다. 무료진료실에 다니다 보면 외부와의 분쟁으로 시술 금지를 가끔 격는다. 문제는 이런 조치가 아무 예고도 없이 갑자기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담이나 중풍 등 꼭 시술이 필요한 환자들이 있지만, 이런 시기엔 그분들께도 도움을 드릴 수가 없다.
물론 외부로부터의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급하게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뜸사랑 내부의 결정으로 시술이 금지되는 경우가 있는데, 두 번째의 경우엔 약간의 배려가 아쉽다.
환자는 대부분 연령대가 60~80대이시고, 1인 가구이다. 이곳을 찾느라 새벽부터 홀로 일어나 힘든 몸을 이끌고 오신다. 몸이 불편하니 옷을 챙겨 입는 것부터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것 까지 어느 것 하나 쉽지 않다.
멀게는 3시간 넘게 걸리는 곳에서 오시는 분들도 있다. 그렇게 힘들여 왔는데 어느날 갑자기 시술계획이 변경되었다는 일방적 설명을 들으면 그처럼 허탈한 일이 없으실 것이다.
• 마음의 치료도 함께하는 무료진료
더구나 무료진료실에 오시는 분들은 생활보호 대상자다. 그나마 뜸사랑 무료진료실이 그 분들에겐 큰 의지가 되는데, 여기서 도움을 못 받게 되니 사정하시는 분들께 우리도 안타깝지만 도리가 없다.
아무리 무료진료라지만 그 분들을 존중해 드리고는 차원에서 한 주 정도의 예고기간을 두어, 변경된 시술 조치에 대해 내원할지 말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드렸으면 좋겠다.
의술이란 몸 치료뿐 아니라 마음의 치료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되는데, 여기에는 배려 받고 존중 받고 사랑 받는다는 느낌도 포함된다. 어차피 좋은 것을 나누려 시작한 무료진료실인데, 조금만 더 배려한다면 금상첨화이지 않을까 싶다.
• 20년 된 병, 완치되려면 꾸준한 노력
그동안 잘 지냈는데, 약 보름 전부터 머리가 띵해지고 귀에서도 약간의 바람소리가 생기고 있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는다. 내 병은 20년 된 병이다. 3년 동안 이만큼 진척을 본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다. 오래 된 병이니만큼, 완치까지는 좀 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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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침뜸, 내인생의 새로운 시작
조ㅇㅇ(412차)
팀원들에게뜸을받다가 생긴 배움의 욕구
구당 침뜸과 因緣은 5년 전으로 올라간다. 당시에 나는 문화단체에서 인터넷신문 記者로 일하고 있었다. 우리 단체에서는 문화행사팀과 인터넷 신문팀이 있었는데, 나는 글을 쓴 경력이 있어서 인터넷 신문팀에 들어갔다.
기자는 現場을 찾아가서 기본적인 寫眞을 찍고 記事를 올리는 일로 빡빡한 일정 속에서 쉼 없이 돌아가는 나날을 살아간다. 그때 당시 우리 단체에서는 유행을 타듯이 시간이 되는 사람들은 구당 침뜸 기본교육을 받고 있었다.
가끔 교육을 받은 팀원들에게 뜸을 받아보면, 처음엔 뜨거웠지만 갈수록 몸이 시원하고 原氣를 얻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배우고 싶은 의욕이 있었다.
'구당 선생님과 이상호 기자의 강연' 취재
2011년 1월에 대한출판문화회관에서 MBC 이상호 기자, 구당 김남수 옹과 함께하는 특별한 만남'이라는 주제로 灸堂 선생님과 이상호 기자의 강연이 있었다. 나는 '이때다!' 싶어, 데스크에 취재를 자청하였다. 당일, 조금 일찍 갔다고 생각했는데도 계단에서부터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앞자리에는 갈 수 없었고 뒷자리에서 촬영 각도를 잡고 녹음기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구당 선생님을 멀리서나마 직접 뵈었다. 물론 이상호 기자도 보았는데, 당시 인터넷 신문사에 입문한지 얼마 안 된 신입기자로서 이상호 기자는 그야말로 大記者였다. 이상호 기자의 자본주의 세계관에 대한 열렬한 비판에 "역시, 이상호 기자야!"라는 말이 여기저기 들여왔다.
자본주의 의료체계의 대안, 구당 침뜸
그리고 자본주의 의료체계의 대안이라고 할 수 있는 구당 선생님의 구당 침뜸을 역설하는 장면은 설득력이 있었고 모두에게 잔잔한 감동을 일으켜주었다. 강연이 끝나고 이상호 기자는 질문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몇몇 안 되는 기자들에게 이 대열에 함께 하자는 의미의 제안을 하였다. 당시에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 제안에 선뜻 나서는 기자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뒤편에서 취재하고 있는 나를 계속 바라다보았다.
물론 나도 함께 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신입기자로서 업무를 익히기에 바빴을 뿐만 아니라, 함께하자는 말에 기자로서의 고단함을 각오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 날의 강연은 사진을 찍고 기사를 올리는 일만으로 마무리지었지만, 마음속엔 이상호 기자의 눈빛이 계속 아른 거렸다.
침뜸 교육, 시간 문제로 중도 포기
그렇게 시간은 지나갔고 우리 단체 직원들이 교육을 받았듯 나에게도 구당 침뜸 교육을 받을 기회가 왔다. 당시 초급 교육을 받으면서 새로운 동양의학과 우리의 신비한 鍼灸에 매료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공부에만 전념하고 싶었으나, 직장인으로서 시간을 쪼개면서 다니는 것이라 쉽지가 않았다. 그런데 애로사항이 생기기 시작했다.
기자의 업무상, 갑작스런 取材를 하고 밤늦게까지 記事를 써야했기에 잠을 못 자서 수업시간에 조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빠지는 날도 하루 이틀 생기다보니 진도 따라가기가 어려워졌다. 그것은 수업시간에 모르는 것이 많아지는 것으로 연결되었고, 겉핥기식 공부가 되어버려 스스로도 싫증이 나는 지경까지 가게 되었다.
당시에 같이 공부하던 선생님들도 공부 시간 여건이 넉넉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중급으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이렇게 해서는 올라가도 큰 진전이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동료 선생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초급시험만 통과하고는 중급과정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일상의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
망막박리로 컴퓨터일 못하게 됨
몇 년 후, 회사는 재정적인 여건으로 문화행사팀 하나로 합쳐지게 되었고, 나는 사진과 영상, 홈페이지 관리를 맡게 되었다. 사진과 영상, 홈페이지를 다루는 일이라 하루 종일 모니터를 보아야 하기 때문에, 눈이 피곤하고 허리도 조금씩 휘어지게 되었다. 작년 말에는 눈에 망막박리 현상이 일어나 급 수술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되어 시력은 회복되었지만 며칠만 늦었어도 시력을 상실할 뻔했다.
원래 망막박리는 눈이 많이 나쁜 고도근시에서 발생한다고 하는데, 수술 후에도 시력은 원래처럼 회복되지 않고 더 나빠진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시력도 더욱 나빠지게 되었고 평상시처럼 모니터를 볼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시력저하와 눈의 급격한 피로증상 때문에 컴퓨터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미래의 직업을 위해 침뜸 다시 공부
현대에 필수적인 보조기계 컴퓨터뿐만 아니라 핸드폰을 오래도록 볼 수 없는 상황에 처하니, 미래의 직업데 대한 과감한 변화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래의 직업군에 대한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가급적이면 컴퓨터 일을 하지 않는 업종으로, 선택한 것을 몇 가지로 좁힌 결과, 실버산업과 관련된 업종과 헬스케어에 관련된 업종이었다.
그래서 구당 침뜸을 다시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처음 직업군을 조사할 때 업종을 단기, 중기, 장기로 나누어 선택하였는데 구당 침뜸은 장기적인 관점으로 선택하였다. 마흔 후반이 되어 직업을 다시 선택한다는 것은 인생의 후반을 준비한다는 것이었고 승부수를 띄워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했기에, 나의 적성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여건, 가족에 대한 생각, 노후의 삶의 여정, 올바른 인생관과 세계관을 펼칠 수 있는 업종, 그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중도에 그만 두지 않기 위한 노력
그렇게 해서 교육원의 문을 다시 두드리게 되었고, 예전과 같이 스스로 그만 두는 결과를 얻지 않기 위해서 등록하기 한 달 전부터 도서관을 다니기 시작했다. 인체에 대한 醫術은 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오하기 그지없고, 또한 그 펼쳐짐은 신비로울 정도로 인간의 영역 너머에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기에 겸손하면서도 정확하게 그리고 꾸준히 공부하려는 의도였다.
서양 의술, 동양 의술 상생의 길
서구 유럽과 중국, 기타 국가들은 서양의술뿐만 아니라 자연요법, 침법, 구법, 마사지, 기공 등 다양한 의료 방법들을 오픈하고 연구하여 경제적 효과를 얻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여기저기 얽히고 설킨 제약이 너무 많아, 先祖로부터 물려받은 엄청난 보물과 지혜들을 사장시켜 가고 있는 현실이다. 참으로 안타깝다.
짧은 지식이지만 감히 말해본다면, 서양의 의술보다 東北亞 지역의 醫術들이 이미 앞서 존재해 있었고 게다가 서구의술의 원조가 우리 동양의술인 것이 많은데다 그 치료효과도 우리 것이 훨씬 탁월하다. 현실처럼 약화된 원인은 19세기부터 시작된 서양제국주의의 동양지배 논리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지금은 자본주의 시장논리가 팽배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시장논리를 정치적 논리로 해결
그래서 작게 보면 한의사들의 반대의견도 그 내막엔 생존논리에 기반한 것이기에,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정치적인 논리로서 풀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한의도 살고 鍼灸도 살 수 있는 정치력, 더 크게는 서구의료와 동양의료 그리고 대체의료들이 서로서로 상생해서 국민들도 혜택을 볼 수 있는 정치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서구에서는 아니, 우리나라를 제외한 아시아의 나라들은 그렇게 가고 있는데 우리만 지체되는 까닭은 크게 볼 수 있는 정치력의 부재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이런 현상도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라 본다. 인터넷을 통해 보는 눈들이 있고 국민들의 열망이 있다. 비단 의료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깨어 있는 意識들이 많다는 것이다.
인술의 논리가 승리할 것
말이 길어졌다. 季節의 변화가 자연의 섭리인 것처럼, 나는 구당 선생님의 仁術의 논리가 승리할 것이라 생각한다. 구당 선생님의 삶의 역정과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찾아온 환자에게 손수 고개 숙이며 뜸을 놓아드렸다는 여담을 들으면서 가슴에서 올라오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구당 선생님의 침구를 배우는 제자들은 선생님의 큰 뜻을 새기고, 의술을 갈고 닦는데 정진하면서 의술이 오래도록 후대에 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된다고 본다.
침뜸, 구급활명에 보탬
자신의 평생에 걸친 임상경험을 후대 사람들이 널리 활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선 침구 전문서의 효시인 '침구경험방'을 저술한 허임 선생의 서문 내용 발췌로 마무리하겠다.
"이제는 늙어서 그나마 올바른 법이 전해지지 못할까 근심하고 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궁리해서 구급활명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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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만) 시간을 투자해 보세요
조갑제닷컴 엄상익
입력 2017-03-23
'요즈음은 이제 남은 노년의 인생에서 어디에다 萬 시간을 투자해서 행복하게 지낼까 궁리하고 있다.'
얼마 전 고려대학교를 함께 다닌 고교 동기들이 모였다. 불판에 고기를 구우면서 소주잔을 나누는 모임이었다. 還甲 고개를 넘기고서는 각자 나머지 노년의 인생을 어떻게 살까가 話頭였다. 각자들 비가 뿌리는 인생 山脈들을 잘도 넘어온 것 같다.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난 색소폰을 배우고 싶기도 하고 외국어를 하나 마스터하고 싶기도 해. 그런데 어떤 걸 잡든지 전문가급으로 진입하려면 기본적으로 萬 시간을 투자해야 한대. 하루에 10시간씩 하면 꼬박 2년7개월 정도 걸리고 5시간이면 5년5개월이지.”
나이 60에 처음 시작해도 70까지는 전문가급으로 갈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 말을 들으니까 비로소 理解되는 것들이 있었다. 英語를 너무 어렵다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공부를 한 時間이 얼마 되지 않았다. 하나에 집중해서 萬 시간을 투자한다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忍耐와 끈기를 요구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참으며 反復할 수 있는 것도 재능이다.
유치원에 다니는 꼬마들의 재능을 테스트하는 얘기를 들었다. 하얀 도화지 위에 일정한 크기의 동그라미를 채우라고 宿題를 준다는 것이다. 어떤 아이는 동그라미를 몇 개 그리다가 지겨워지면 네모를 그리기도 하고 동그라미가 무성의한 세모로 바뀌기도 한다고 했다. 도화지의 일부만 채우고 집어치우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심지어 아예 그리지 않고 도화지를 동그랗게 말아 다른 아이들의 머리를 때리고 다니는 아이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재능이 있는 아이는 인내하면서 도화지 안에 정확한 규격으로 동그라미를 꽉 채운다고 했다.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들의 人生이 그런지도 모른다. 같은 일을 끝없이 反復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쿨'이란 그룹의 이재훈이란 가수가 사무실을 찾아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노래를 하나 받으면 일단 千 번을 반복해 부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보고 노래 하나를 골라 百 번쯤 불러보라고 했다. 힘들다는 얘기였다. 그는 춤 연습도 학교 실내운동장을 빌려 밤새껏 스텝을 밟으면 운동화가 금방 닳아서 떨어진다고 했다. 춤추고 노래하는 건달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어려서부터 그 방면에 數萬 시간을 투자했다고 했다.
가수 전인권 씨와도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친척 형이 치던 통기타를 보고 반해 평생 음악에 미쳐 살았다고 했다. 단칸셋방에서도 생활비를 벌 생각보다 기타연습을 했다. 장인이 준 월세 보증금으로 악기를 사서 연주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비 오는 날 감옥 안에서 지은 노래가사를 편지에 담아 보내면서 나보고 봐달라고 했었다.
유명화가인 오승윤 씨도 변호사를 하면서 알게 된 인물이다. 그는 광주 변두리의 세 칸짜리 초가의 중간 방에서 밤중에도 붓을 들고 그림을 그렸다. 손이 굳지 않게 하기 위해 어디서나 드로잉을 반복했다.
소설가 정을병 씨가 살아있을 때 소송의뢰를 받으면서 그와 친해졌었다. 이십대 시절 그는 문학을 神으로 삼고 殉敎할 각오를 세웠다고 했다. 서대문도서관이 그의 학교였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가서 하루 종일 소설만 읽었다. 글쟁이에게 가난이라는 운명이 따르던 시절이었다. 그는 쌀과 김치 그리고 연탄만 있으면 생존한다고 생각하고 생활비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食事도 하루에 한 끼만 먹기로 맹세했다. 칠십대 중반까지 그는 만 시간이 아니라 그 열 배 이상을 문학에 투자했다.
그러나 시간을 투자한다고 꼭 성공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소설가 정을병 씨는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보면서 절망한다고 했다. 그들에 비교하면 자신은 4류나 5류소설가라고 했다. 그렇지만 스스로 선택한 인생이니까 5류작가로라도 죽을 때까지 작품을 계속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내게 고민을 털어놓았었다.
가수 전인권도 마찬가지였다. 국내에서는 남들이 이름을 기억하는 뮤지션이지만 뉴욕에 가보니까 그곳 3류 밴드보다도 자신이 못하더라고 고백했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 나온 모차르트처럼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가진 사람이 더러 있는 것 같다. 며칠 전 로만킴이라는 바이올리니스트의 리사이틀에 갔었다. 줄리어드를 나온 음대교수가 사회자로 나와 이런 말을 했다.
“로만킴은 러시아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했던 韓國人의 3세입니다. 그는 지금 23세에 불과합니다. 저도 30년간 바이올린을 연주했습니다만 로만킴은 파가니니 이후 100년 만에 나온 天才라고 생각합니다.”
소개하는 음대교수는 눈이 붉어지더니 무대 위에서 눈물을 흘렸다. 예술가로서 천재에게 진심으로 감동한 눈물이고 동시에 좌절감의 표현인 것 같기도 했다. 로만킴의 바이올린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현에서는 멜로디가 아니라 수많은 아우성들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보통사람은 천재를 이해하기 힘든 것 같았다. 차라리 나는 30년 연주했다는 보통사람이 더 좋은 것 같다. 타고난 재능이 없어도 살아가면서 자기가 선택한 몇 가지에 萬 시간씩을 들이면 나름대로 윤택한 인생을 보낸 게 아닐까. 나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재산인 시간을 어디다 투자했었나 돌이켜 본다. 고시공부를 할 때 깊은 山 암자의 뒷방에서 또 얼어붙은 강가 방갈로에서 법서 안에 萬 시간 이상을 쏟아 부은 것 같다. 신산스런 이십대의 시간을 그렇게 변호사 자격증과 바꾸었다.
개인법률사무소를 차린 후 나는 ‘믿음을 가진 작가 변호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변호사가 되기 위해 이미 萬 시간은 썼으니까 이제 믿음에 萬 시간 그리고 작가가 되는데 萬 시간을 기본적으로 사용해야 했다. 믿음이란 배의 바닥짐 같이 내 인생의 中心을 잡아주는 역할이었다. 하나님이 믿음을 거저 던져줄 것 같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聖經 안에 가장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다.
30대 중반쯤부터 고시공부하듯 매일 일정시간 성경을 읽었다. 이제 거의 30년 세월 가까이 萬 시간대는 통과한 것 같다. 예배와 기도 시간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성경공부에 자격증은 없었다. 대신 성경구절의 상당부분이 녹아서 핏속을 돌아다니고 있는 느낌이다. 靈魂이 조금은 변화되지 않았을까 하고 정산해 본다.
글을 써 보기로 결심을 하고 30대 말쯤 수필원고 한 편을 써 가지고 월간조선 편집장이던 趙甲濟 씨를 찾아갔었다. 그는 내 원고를 거절하면서 일단 시중에 나와 있는 수필집들을 구해서 다 읽고 원고지로 키만큼 글을 써 본 다음에 다시 보자고 했다. 그만큼 時間을 투자하라는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글쓰기와 독서가 시작됐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읽고 썼다. 그리고 대충 萬 시간의 벽은 통과한 것 같다. 소설가로 등단을 하고 문인협회 회원, 소설가협회 회원이 됐다. 컬럼니스트란 인정도 받았다. 고위관직을 해보지는 못했어도 또 부자는 아니어도 나의 작은 소망이었던 ‘믿음을 가진 작가 변호사’에는 접근한 셈인지도 모른다. 물론 아직 미숙한 신앙의 단계다. 작가로서도 변호사로서도 3류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1류가 못되는 건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한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요즈음은 이제 남은 노년의 인생에서 어디에다 萬 시간을 투자해서 행복하게 지낼까 궁리하고 있다. 즐거움만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기로 마음먹었다. 첫째가 일하는 즐거움이다. 노인 변호사로서 영업방침을 바꾸었다. 여태까지는 품삯을 위해 일을 했다면 앞으로는 즐겁기 위해 일을 할 것이다. 어제는 컬럼을 보고 찾아온 70대 노인의 얘기를 한 시간 동안 들으면서 慰勞해 주었다. 위로받은 그의 얼굴에서 환한 빛이 솟아오르는 걸 보고 오히려 내가 즐거웠다. 그런 즐거움들이 萬 시간 정도 있었으면 좋겠다.
다시 보는 聖經 속에 지난 시절 理性으로 보던 때 안 보이던 게 자주 나타난다. 靈的세계가 바로 내 옆에 그리고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껍데기 신앙이 아니라 진짜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한 萬 시간의 추가투자는 어떨까. 주기적으로 중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이 배인 정독도서관을 찾아가 독서를 한다. 수험서를 놓고 쫓기며 공부하는 이들 옆에서 小說과 詩를 읽는 나의 모습은 젊어서부터 꿈꾸던 즐거움이다. 죽기 전날까지 읽고 쓰는 일을 그만두지 않을 작정이다.
해가 질 무렵 이따금씩 한강의 서래섬을 산책한다. 회백색의 한강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다가 어둠이 내리면 검은 강물 위에 도심의 네온불빛들이 화려한 추상을 만들어낸다. 그 순간 황홀경에 빠지기도 한다. 산책을 하고 길거리 모퉁이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고 바둑을 두면서 또 萬 시간을 향해 가면 흑자인생이 아닐까.
엄상익(변호사)
"大麻는 대체 불가능한 치료제이다"
시사IN 이오성
입력 2017.08.26
강성석 목사는 大麻 합법화를 주장한다. '大麻가 사회적으로 해롭지 않다'는 논리가 아니다. '의료용' 大麻가 뇌전증(간질), 알츠하이머(치매) 등에 특효가 있으니 허가하자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에서 大麻 합법화를 요구하는 이들의 논지는 ‘大麻가 사회적으로 해롭지 않다’였다. 술·담배보다 폐해가 덜하니 법으로 처벌하지 말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2005년 배우 김부선씨가 제기한 헌법소원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大麻 사용에 대한 규제가 법 감정과 시대적 상황에 맞지 않을 정도로 비합리적이라고 볼 수 없다”라며 합헌 결정을 내렸다. 그 후 12년 동안 관련 논의는 멈춰 있었다. 미국·우루과이·네덜란드 등이 잇따라 대마에 대한 빗장을 푸는 현실은 그저 남의 나라 일이었다.
프레임이 바뀌었다. 大麻가 ‘해롭지 않다’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시민단체가 등장했다. 6월29일 창립한 ‘의료용 大麻 합법화 운동본부’가 그 주인공이다. ‘의료용’ 大麻가 뇌전증(간질), 알츠하이머(치매) 등에 특효인 만큼 합법화해달라는 요구다. 大麻 합법화 관련 상설 시민단체가 설립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표를 맡은 강성석 목사는 지역에서 이주노동자 등을 상대로 활동을 펼쳐온 젊은 목회자다.
단체 출범 이후 반응은 어떤가?
대학생부터 치매를 염려하는 80대 노인까지 다양한 분들이 함께하고 있다. 한 달 만에 1300만원이나 되는 후원금이 답지했다. 특히 뇌전증 자녀를 둔 父母의 문의가 끊이지 않는다. 국내에 40만명이나 되는 뇌전증 환자 사이에선 大麻가 뇌전증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게 常識이다.
의료용 大麻가 어떤 효능을 가지고 있나?
주로 진통제, 안정제 등으로 쓰이는데 腦 질환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알츠하이머의 경우 의료용 大麻를 복용한 지 몇 분 만에 증세가 호전된다. 뇌전증은 발작 횟수가 절반가량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가 2015년 미국뇌전증학회(American Epilepsy Society) 연례회의에서 발표됐다. 부작용도 없다.
외국에 탁월한 치료제가 존재하는데 국내법에 막혀 구할 수 없는 건가?
아니다. 구할 수는 있다. 뇌전증에 쓰이는 의료용 大麻 치료제가 ‘CBD 오일(Cannabidiol Oil)’이라는 건데, 이걸 ‘해외 직구’로 구입할 수 있다. 문제는 이게 불법이라, 이를 주문한 가정이 얼마 후 검찰로부터 압수수색을 받는다는 점이다. 뇌전증 가족들이 범죄자가 되는 걸 감수하고 수입하고 있는 셈이다. 의아한 건 치매를 앓는 반려동물을 위한 CBD 오일은 수입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관련법이 없어서다. 동물에게는 사용할 수 있는데, 사람에게는 사용할 수 없다.
의료용 大麻 합법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재작년에 이주민센터에서 일할 때 쌀 포대를 나르다 허리디스크가 파열돼 석 달 동안 보조기를 차고 지내야 했다. 병원에 있는 동안 목이나 허리를 다친 환자들이 아편 계열인 모르핀을 맞으며 고통스럽게 견디는 걸 보았다. 모르핀은 중독성이 커서 자주 투여할 수 없다. 그때 의문이 들었다. 왜 한국에서 아편(모르핀)은 되는데, 오히려 중독성이 떨어지는 大麻는 안 되나. 퇴원한 뒤 관련 논문과 학술자료를 읽어보며 의료용 大麻가 얼마나 효과적이고 안전한지 알게 되었다.
의료용 大麻에 아무런 부작용이 없나?
大麻는 불로 태워 연기를 흡입하는 게 가장 효과가 빠른데, 大麻에도 담배에 포함된 정도의 타르가 있다. 미국에서도 불로 태우는 것에 거부감 있는 이들을 위해 연고, 패치, 드링크, 알약 등이 다양하게 나와 있다.
환각 증상을 보인다는 이야기도 있다. 大麻를 복용하고 운전하면 위험하다는 지적도 있고.
진정 작용 때문이다. 실제로 大麻가 교통사고와 관계있다는 근거는 없다. 感氣藥(감기약)을 먹고 운전하면 위험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보면 된다. 大麻를 복용하고 운전할 수 없도록 단속하면 좋겠지만, 大麻 성분은 오랫동안 체내에 머물기 때문에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환각 효과는 아스피린에도 있다.
大麻가 더 심각한 마약 복용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된다는 ‘관문 이론’도 만만치 않게 제기된다.
베트남 전쟁 때 미국 닉슨 대통령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내놓은 이론이다. 당시 반전 시위 참가자들이 大麻를 즐겨 피웠다. 大麻를 접하게 되면 헤로인이나 코카인으로 발전한다는 건데, 그 주장이 나오자마자 반박이 잇따랐다.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더 좋은 와인을 원할 뿐, 만취하기 위해 위스키를 마시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네덜란드는 大麻 합법화 이후 오히려 마약 투약자가 줄어들었다. 大麻에는 강력한 睡眠(수면) 유도 효과가 있다. 상당수는 그냥 잠든다.
2005년 헌법재판소 판결 이후 大麻 관련 논의가 사실상 전무했다. 지금 합법화 운동이 필요하다고 본 이유는?
정권이 바뀐 것도 있고(웃음). 촛불집회 이후 한 단계 더 나아간 운동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다. 우리가 ‘모두를 위한 의료용 大麻’라는 구호를 외치는 이유가 60세 이상 1000만명 시대라는 점 때문이다. 치매 환자가 75만명이다. 문재인 정부 제1호 공약이 ‘치매 국가책임제’였다. 치매 환자들에게 大麻는 대체 불가능한 치료제다.
합법화 흐름 이후 미국에서는 大麻 산업이 각광받고 있다.
지난해 마이크로소프트가 大麻 유통 관리 소프트웨어 개발 사업에 뛰어들었다. 국내 상장 미국 기업인 뉴프라이드도 미국 네바다 주 대마 재배 사업에 투자했다. 大麻가 합법화되면 술·담배 소비가 주는 게 일반적인 추세다. 미국 콜로라도는 2014년 합법화 이후 범죄율은 줄고 세수는 늘었다.
갈 길이 멀어 보이는데, 어떻게 활동할 건가?
20대 국회에서 마약류관리법 개정안을 제출하도록 청원할 생각이다. 간단하다. 제2조 4항 ‘大麻’ 항목에 ‘의약품은 제외한다’라고만 넣으면 된다. 아편(모르핀)은 이미 의약품으로 허용되고 있다. 또 국내에는 大麻와 관련한 임상시험 사례가 전무하다. 중독성, 환각 증세 여부, 치료 효과 등에 대해 연구가 이뤄지고 나면 시선이 달라질 것이다. 노인요양병원 등을 지정해서 실제 大麻가 어떤 치료 효과를 보이는지 임상시험을 해보자는 캠페인을 실시할 것이다.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사회적 인식이 바뀌도록 할 생각이다.
이오성 기자 dodash@sisain.co.kr
'무극보양뜸'(머리말)
구당 김남수
(목동균 교수 정리)
"인류의 영원한 보물인 '무극보양뜸'을 펴내며"
내 人生에서 침뜸을 빼면 할 말이 별로 없다. 침뜸에 쏙 빠져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살아왔다.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침뜸으로환자 치료를 하면서 보람을 얻었고, 醫者로서 봉사하는 기쁨도 누렸다. 또한, 환자의 신음을 없애는데 침뜸이 최고의 의학이라는 확신도 얻었다. 그 사이 머리는 하얗게 세었고, 나이는 100살이 되었다. 지나고 보면 刹那인데 제법 긴 세월을 산 것이다.
사람들은 아직도 침술원에서 환자 치료에 바쁜 나를 보고 '現業에 가장 오래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얘기하면서 뒤따라 '그 비결이 뭐냐?'고 묻는다. 나는 주저 없이 '뜸 뜨면' 이라고 대답해준다. 사실이 그렇다. 뜸은 정말 최고의 건강장수 비법이자, 우리나라의 의료비 대란을 잠재울 최고의 의술이다. 특히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우리나라는 노인 인구가 12%에 이르고 老人 진료비는 무려 35%까지 치솟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하면 병이 있거나 없거나 효과가 뛰어난 뜸이야 말로 최적의 突破口가 아닐 수 없다. 한의사들이 하는 營利 목적의 뜸 시술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전해온 뜸을 국민 누구나 쉽고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規制를 풀어야 한다. 아직 當國은 뜸의 가치를 모른다. 뜸사랑에서 '뜸 시술 자율화'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정책제안서를 제출했지만, 일부 이익 단체의 방해공작에 아직도 결정을 못내리고 戰戰兢兢하고 있을 뿐이다.
서양의학은 주사기와 메스로 상징되는 죽이고 자르는 의술이기 때문에 法에 의한 규제가 필요하다. 그래서 '고친다'라기 보다 '없앤다'라고 해야 올바른 표현이다.
반대로 침과 뜸으로 대변되는 동양의학은 살리는 醫術이다. 털 하나 손상 없이 치료를 하므로, '고친다'라는 표현을 쓸 수 있으며, 수천 년의 세월이 흘러도 규제할 필요가 없었다.
세계에서 뜸을 규제하고 있는 나라는 韓國과 日本밖에 없다. 1962년 군사정부가 침구사 제도를 없앨 때 일본 군국주의의 망령이 의료 현장까지 침투한 것으로 이러한 과도한 규제는 하루빨리 혁파되어야 한다. 쑥에서 빼낸 섬유를 이용해 예방과 치료를 하는 뜸은 부작용이 전혀 없으므로 규제 대상도 아니다.
뜸 시술이 자율화되면 누구나 아주 쉽고 편하게 익히고 이용하게 될 것이며, 행복권과 건강 선택권을 국민이 다시 갖게 되어 국민 복지에 엄청난 효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일찍 깨닫고, '뜸사랑'을 만들어 뜸 보급을 시작했다.
돈도 거의 들지 않고, 예방과 치료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세계 최초이자 최후의 의학인 뜸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 없다는 절박감에 좌고우면 하지 않고 정통으로 뜸 교육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 가혹했다. 구당을 찾는 환자들이 줄을 서자 한의사들은 鍼師 자격으로 뜸을 뜨면 안 된다며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구당은 뜸을 떠도 된다'라며 나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것도 8인의 헌재 재판관 중 7명이 위헌결정을 내렸다.(2008헌마627)
이렇게 우여곡절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았던 뜸사랑의 뜸 교육은 벌써 정회원 제자만 해도 5천 명이 넘게 배출 되었다. 이들은 지금 세계 각지에서 뜸 치료사로 봉사자로 환자를 돌보며 '무극보양뜸'을 전파하고 있다.
'무극보양뜸'은 小宇宙인 인체의 기혈과 음양오행의 평형 원리를 조화시킨 8개 경혈에 뜸을 뜨는 免疫(면역)요법이다. 병이 있고 없고를 떠나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한 예방과 치료의 뜸 요법이다. 나는 그동안 국내외에서 제자들과 함께 150만 명에 이르는 환자들에게 무료로 '무극보양뜸'을 시술해 왔다. 그러나 일부 한의사들의 잘못된 판단과는 반대로 단 한 명의 환자들고 부작용이 발생하지 않았다. 반면에 병이 완치되거나 호전된 사례는 너무 많아 열거할 수도 없다.
지금도 내가 시술하는 '구당침술원'에서 병을 치료하려는 환자들로 인터넷 예약 사이트는 늘 폭주 상태다. 진료 예약이 너무 힘들다는 환자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국가에서 뜸 시술 자율화를 단행하면 누구나 쉽게 배워 가족과 이웃의 건강을 보살 필 수 있는데... .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모든 국민이 '무극보양뜸'을 배워 국민 건강과 경제 그리고 일자리 창출까지 해결하는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지금 내 나이 100세를 넘긴 노구임에도 내 손에 뜸 뜨기를 바라는 무수한 환자가 줄을 서고 있다는 것은 바로 '무극보양뜸'의 신묘한 효과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로 내가 창안해 오랫동안 시술해온 '무극보양뜸'을 책으로 펴내 우리국민을 비롯한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보급하고자 하며, 특히 의사들이 병원에서 꼭 시술하기를 바라는 마음 절실하다. 또한, 나를 만나지 못해도 이 책을 통해 같은 효험을 얻기 바라는 마음이며, 건강을 지키는 밑거름이 되리라 확신한다.
맨 처음 족삼리에서 시작한 '무극보양뜸'을 환자치료에 적용한지 실로 60여 년 만의 일이니 기쁠 법도 하지만 가슴에는 회한이 적지 않다. 지금 중국, 미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무극보양뜸'을 받아들여 보급을 서두르고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돈 한 푼 받지 않고 '무극보양뜸'으로 봉사하는 봉사자들을 중죄인 취급하듯 수갑 채워 잡아가기도 하니 참으로 한심하고 황당하기 짝이 없다.
이제 우리나라도 현실을 직시하고 뜸 보급에 국가가 앞장서야 한다. 이렇게 좋은 뜸을 외면할 이유가 전혀 없다. 국민을 진정으로 위한다면 晩時之歎이지만 '늦었다 할 때가 빠른 것이다'라는 평범한 진리처럼 뜸 시술 자율화를 단행해 모든 국민이 뜸으로 건강을 지킬 수 있게 해야 한다.
'무극보양뜸'은 인류에게 永遠히 남을 보물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도서 발간을 준비해 왔고,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아 세상에 내놓게 되었어다. 특히 본서가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적극 도와준 정통침뜸교육원 목동균 교수의 11대조 睦性善 (목성선)공은 1644년(인조22년) 전라도 관찰사로서 조선 최고의 침의인 허임 선생의 '침구경험방'을 刊行하여 가난한 백성들이 스스로 집에서 치료 할 수 있도록 했다. 이제 37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나의 '무극보양뜸'이 모든 家庭의 무병장수를 위한 醫書가 될 수 있도록 정리했으니 목 씨와 침뜸 의술 간의 인연도 범상치가 않은 것 같다.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무극보양뜸'을 이용해 치료와 봉사를 해온 뜸사랑 회원을 비롯한 모든 분에게 경의를 표하고, 병없는 세상, 의사없는 세상을 꿈꾸며 이 책을 드린다.
2014년 5월
장성 무극전에서
灸堂 金 南 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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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鍼 강의(총론, 저자 金廣浩)
목차
1부. 총론
1. 鍼의 기본
1.1 한의서에 대한 믿음
1.2 한의적 기본원리에 충실해야 한다
1.3 환자의 말을 중시한다
1.4 기본원리를 환자의 증상을 통하여 연상한다
1.5 환자의 말이나, 호소하는 증상에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
1.6 鍼, 또는 처방을 원방대로 해야 한다
1.7 병인과 증상의 변화에 따라 치료방법을 바꾼다
2. 취혈법
2.1 혈위의 느낌
2.2 득기 또는 기감
2.3 취혈시 느낌
2.4 압통점을 찾는 방법
2.5 경혈의 크기와 취혈방법
3. 자침법
3.1 자침시의 5단계 검증
3.2 자침의 속도
3.3 자침의 방향
3.4 자침의 자세
3.5 침의 모양
3.6 침의 효과 확인
1부 총론
1. 鍼의 기본
경희대 한의대를 들어간 이후 지금까지 오로지 동의보감만 봤지요. 동의보감만 보고 공부하다 보니가 책에 대해 나름대로 全體的인 관점이 생기더군요.
자신이 없으면 공부를 해서 자신감을 키워야합니다. 환자에게 끌려다니지 말고 주관을 가지고 확실하게 환자를 대하세요. '오늘은 이것만 치료합니다' 라고 얘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신 환자가 말한 내용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그 사람이 아픈 것을 내 몸이 아픈 것처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환자는 무조건 늘어나게 돼 있습니다.
항상 공부하는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자신의 실력을 알 수 있는 기준은 家族에게 시술해 보는 겁니다. 시술해 본 후에도, 가족들이 아플 때마다 자신을 찾으면 그건 실력을 인정 받은 가로고 볼 수 있죠. 자기 실력을 판가름한 후 부족하다 싶으면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患者가 더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알아요. 대부분 환자들은 다 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醫書를 너무 잡다하게 보지 않았으면 하는 겁니다. 臨床에서 헷갈리는게 많은 것 같아요. 저는 저 혼자 공부했습니다. 동의보감이나 의학입문 등 의서 중에서 한 가지 책을 확실히 보는 것이 훨씬 더 임상에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總論을 계속 반복해서 봐야 해요. 오늘 이야기하는 내용은 돌아가셔도 매일 반복해서 읽고 숙독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일침을 쓸 수 있어요. 중요한 건 '허리가 아픈데 그 原因이 무엇이냐' 라고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요. 다시 말해 가장 한의학 적인 이론이 제일 중요합니다.
1.1 한의서에 대한 믿음
1. 고전 한의서에 나온 내용은 모두 맞는 것이다. 한의서의 내용대로 시술하였는데 질병이 치유되지 않을 경우에는, 모두 변증이나 자침이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우선 한의학 책을 믿어야 합니다. 저는 동의보감만 보았으니까 동의보감이 얼마나 정교하고 얼마나 질서정연하게 배열 되어 있는지 확신할 수 있어요.
2. 한의서를 충분히 공부하지 않고 내용을 비판하는 자세를 가지면 일침요법을 응용할 수 없다
실제로 鍼도 의사가 신념을 가지고 시술해야 효과가 있는 법이에요.
1.2 한의적 기본원리에 충실해야 한다
1. 한의적 상식을 중시 해야 한다. 양진한치의 사고방식은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방을 찾는 원장이나 양진한치를 주장하는 원장들이 많은데 제가 생각할 때 그런 분들보다 자기 나름대로 한의학적으로 파고드는 원장들이 오히려 치료 효과율이 매우 높은 것 같아요.
2. 병증, 병명에 따른 비방은 없다. 한의학적 변증에 따라 치료 방법을 결정해야 한다
저는 한의학적으로만 생각하는데 치료는 오히려 더 잘 됩니다. 어느 날 제 친구가 제 한의원에 와서 환자들을 보더니, 대학병원 응급실에 있는 환자들보다 증상이 더 심한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저는 뭐 L 몇번 어디가 어떻게 되는지 그런 거 전혀 몰라도 치료하는 데는 전혀 이상이 없어요. 양진한치를 주장하려면 한의학적으로 확실하게 먼저 알아야 해요.
1.3 환자의 말을 중시한다
디스크 환자. 우리는 한의사이기 때문에 한의학적인 변증을 해야합니다. 그게 한의학의 기본 원리에요. 드스크 환자들은 대부분 허리에 뭐가 달라붙은 것 같아요, 허리가 무거워요, 몸이 천근만근이다, 전신이 쑤시며 아프다, 비가 오려면 더욱 심하게 아프다, 쉽게 이야기하면 나는 기상대가 이렇게 말들 합니다. 환자는 지금 내 병의 원인이 濕이요 라고 얘기를 해주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허리에 뭐 달아놓은 것같이 무겁거나 전신이 아픈 사람은 관절통이든 신통이든 濕이 있는 겁니다. 관절이 불리 하고 날씨가 굳거나 비가 오려 하면 통증이 심하다고 하는 사람은 濕腰痛이 있는 거예요.
족태양방광경. 곤륜. 火穴이기 때문에 화혈을 補해주면 그 濕이 말라요. 그러니까 중요한 건 濕이라는 개념이 뭔가를 알아야 해요. 만약 濕腰痛, 즉 濕하고 요통이나 각통, 배통이 왔을 경우 곤륜을 보하면 상당히 좋습니다.
그리고 환자가 돌아눕기 힘들었는데 핫팩을 하고 나니 허리가 가볍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환자는 寒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해야 해요. 寒을 결코 쉬운게 아닙니다. 다시 말해 濕熱腰痛으로 오는 환자들은 핫팩을 해주면 도리어 악화가 되지요. 이 환자들을 통해 기본적인 원리, 상식적인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1.4 기본원리를 환자의 증상을 통하여 연상한다
왼쪽이 아팠다가 오른쪽이 아프고 또 굴신이 불능하고 땡긴다고 하는 환자들이 있잖습니까? 그 환자는 몹시 땡긴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거예요. 일반적으로 다른 요통에서 올 때는 땡긴다는 소리를 강하게 안 해요. 환자들이 강하게 땡긴다거나, 왼쪽이 아팠다가 오른쪽이 아프다고 하면 風을 생각해야 해요. 풍은 移動하잖아요. 실제로 左右로 움직여요. 그래서 환자들에게 침을 놓으면 분명 좋아졌는데도 좋아진 건 얘기 한하고 또 땡긴다고 날리를 치지요. 그 환자는 지금 자기 자신이 風腰痛이라고 얘기 하고 있는 거예요.
어떤 환자들을 보면 허리가 아팠다 등이 아팠다 하면서 오르락 내리락 하잖아요. 그런 환자는 痰飮腰痛인 거예요.
1. 한의학적 기본이론을 암기한 이후에 환자의 증상을 구체적으로 대입한다
담음요통일 때는 궁하탕이나 이진탕을 써야 해요.
그리고 어떤 환자들은 느닷없이 한밤중에 통증이 와 완전히 죽는 줄 알았다고 얘기하는데 이는 주경야중입니다. 또 어떤 환자는 아픈 부위가 固定되어 있는데 이건 모두 다 瘀血腰痛이에요. 허리가 아픈 환자가 어혈요통이라고 한다면 동의보감에 나와 있는 천궁육계탕을 쓰세요. 그게 습요통하고 어혈요통에 상당히 잘 듣습니다. 어혈은 혀를 보면 알수 있습니다. 어혈이 심한 환자는 혀가 청자색이거든요.
병이 중병이고 오래 되었는데 어떠한 수단을 써도 안 듣는다 할 때는 혀를 반드시 확인하고 혀가 청자색이나 자흑색이면 어혈침을 쓰십시요. 어혈침은 태백보 곡지사입니다.
그 다음 누워 있으면 허리가 더 아프다고 하는 환자는 식적이라고 나와요. 그때는 식적에 대한 평위산도 좋고 동의보감에 보면 식적요통에 사물에 이진탕 가감하는게 있는데 찾아보세요. 즉 토수혈이나 해계사, 또는 내정사 중에서 선택하면 되죠. 오래돼서 중완까지 아프면 위정격을 쓰면 되고, 위정격 중에서는 해계보가 주혈이에요.
요점은 허리가 아픈 환자나 디스크 환자가 왔을 때 가볍게 생각하지 말고 환자가 말하는 증상이 五臟六腑의 어디에 해당하는가를 잘 살펴야 해요. 原因이 어딘가, 식적인가 痰飮인가 어혈인가 아니면 五臟六腑로 봤을 때 어느쪽의 虛냐 實이냐 寒이냐 熱이냐를 살펴야 해요. 허실한열은 여러분이 치료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반드시 구별하세요. 한열허실은 진짜 중요한 내용입니다.
또 습통과 서병의 차이는 痛症의 有無에 있어요. 濕病은 통증이 있고 暑病은 통증이 없습니다.
더위 먹은 환자의 증세는 감기와 비슷한데 머리가 아프냐 안 아프탸로 구별 할 수 있죠. 환자가 왔을 때 오한발열 등을 호소할 때 頭痛에 대해 확실하게 물어보세요. 순간적으로 감기라고 착각할 수도 있거든요.
그 다음 아까 말한 습병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變形이 된 것은 다 濕病입니다. 인체의 關節이 다 뒤틀려 있는 것도 濕이 지나갔거나 현재 지나가는 중이라고 생각하셔야 돼요.
파킨슨병. 저는 우선 파킨슨병 환자가 어떤 증상을 나타내는가를 봅니다. 파킨슨병 환자는 우선 머리를 떨더군요. 손도 떨어요. 저는 다른 건 잘 모르지만 그냥 그것만 보고 기본적으로 肝이구나 생각해요. 그래서 그 환자에게 책을 펴놓고 일단 虛症에 대해 물어요 그래서 없다고 하면 實症에 관해 물어요. 이때 있으면 肝實症으로 판단을 합니다. 머리를 떠는 환자는 대부분 肝이구나 그렇게 보고 치료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손만 떠는 파킨슨병 환자는 肝일 수도 있고 또 心臟일 수도 있어요.
그럼 心臟하고 관련된 내용을 물어보는 거예요. 아주 간단해요. 그리고 또 痰飮일 수도 있어요. 여러분은 파킨슨병의 원인이 이러하니 痰飮으로 봤을 때 이게 좋은 거 같더라, 침은 이게 좋은 것 같더라 그렇게 얘기해야 합니다.
저는 癌 환자도 고치는데 완치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고치다보면 엄청나게 좋아져요.
제통양창 개속어심. 통증, 가려움, 종기.
아픈것, 가려운것, 종기 모두 심병이라는 거예요. 심아라는 말에는 화라는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모든 통증질환과 염증, 종양, 가려운데는 이 화혈을 사하는게 가장 좋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기본적으로 그 아픈 부분의 흐르는 경락에 화혈을 사해주면 반드시 통증이 감소합니다. 전신관절이나 류머티즘관절에도 소부사가 가장 강합니다.
모델이나 텔런트같이 키가 크고 늘씬하며 마른 환자가 왔을 때 중기 부족이라는 걸 머리 속에 무조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이상이 이오면 위장질환이나 허리질환 가운데 중기 보족밖에 없어요. 기본적으로 그렇게 생각해야만 침이 비정격으로 간다든지 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 사람은 허리가 아프다고 해도 그걸 생각해야 해요. 한의학의 기본을 자꾸 연상해야 합니다.
담음. 몸이 뚱뚱하거나 얼굴이 검고 지저분한 환자들 있죠. 몸이 뚱뚱하데 얼굴을 보면 뭔가 모르게 지저분해요. 환자가 세수를 하고 왔는데도 지저분한 느낌이 들면 그런 사람은 다 담음이에요. 다만 그 사람이 뚱뚱하다면 습담이라고 봐야합니다. 담이 있으면 무얼 봐야 합니까? 여자분은 냉을 봐야죠. 냉이 담입니다. 냉 처방을 보면 이진탕 들어가는게 상당히 많아요.
1.5 환자의 말이나, 호소하는 증상에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
열궐이니까 손바닥, 발바닥이 뜨거운다. 열궐이 뭐냐. 심화하고 신수하고 싸움에, 화가 엄청나게 수를 누르는 거예요. 소부사. 한방적인 원인만 알아내려고 노력해요.
한궐. 한궐은 손바닥, 발바닥이 얼음장 같이 차다고 얘기할 수 있어요. 한궐은 토가 원래 토극수가 돼야 하는데 수가 너무 강한거예요. 수모토. 그러니까 음곡사. 수의 수인 음곡을 사하고 토의 토인 태백을 보.
무릎도 아프고 다리에 힘이 없으며, 걸어다닐 때 휘청휘청한다면 그 원인은 한궐이예요. 그때 저는 해준 게 음곡을 사해주고, 태백을 보해 줬어요.
한의학적인 원인과 증상, 맥 침 약은 반드시 일치가 돼야 합니다. 저는 약을 쓸 때 고민이 되면 일단 침 한두개를 먼저 꽂아 봐요. 실증과 허증에 있어서 차이가 나는 경거 같은 곳에 놔보면서 반응을 보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훨씬 편해요.
1.6 침, 또는 처방을 원방대로 해야 한다
1. 불필요한 침을 추가 하면 효과가 떨어진다.
약과 침을 원방으로 써야 한다는 겁니다. 침도 한개만 써보기로 했죠. 간정격이면 간정격. 담정격을 쓰면 어떤게 낫고 담정격을 뭐가 낫는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 수 있어요. 또 담허증 같은 기본적인 것만 낫는 것이 아니라 디스크 같은 것도 나아요. 심하고 담 차이점이 뭔지 아는 분이 있어요? 중복되는 것도 다른 점도 있어요. 구별이 확실하게 된다구요. 한의학이 지금까지 발전 못한 첫 번째 원인이 자기도 모른면서 쓸데없는 말을 떠들어 결국 후배들이 더 헷갈리는 거예요. 본인이 확실히 알려면 원방을 써 경험을 해야 해요.
침은 과녁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1.7 병인과 증상의 변화에 따라 치료방법을 바꾼다
간정격. 어느날 부터 반응이 없고 계속 낫지 않는다고 불평을 해요. 그건 바로 그 사람의 병의 원인이 바뀌었다는 겁니다.
저는 공부할 때 환자한테 무슨 침을 놨는지 기록을 하지 않았어요. 그때그때 환자를 보고 순간적으로 판단하고 침을 놓았어요. 또 악화됐을 경우에는 무조건 그 침을 바꾸세요.
2. 취혈법
2.1 혈위의 느낌
1. 혈. 말 그대로 구멍입니다. 살을 만졌을 때 부드러운 느낌도 있고 함몰된 느낌과 딱딱한 느낌도 있어요.
2. 모양은 대개 동그란데 직사각형도 있고 정사각하여도 있습니다.
3. 혈자리는 뼈와 근육, 인대, 혈관에 있어요.
2.2 득기 또는 기감
중병환자들은 혈자리 크기 자체가 아주큽니다.
2.3 취혈시 느낌
침관을 사용해도 되지만 침관은 일반적으로 혈자리에 대한 느낌이 미비하니까 손가락을 사용하는게 좋습니다.
2.4 압통점을 찾는 방법
침을 톡톡 칠 때 느낌이 두부에 찌르는 느낌이에요. 부드럽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죠. 대부분 혈은 다 마찬가지에요. 방향은 대개 피부하고 직각인 경우가 좋습니다.
2.5 경혈의 크기와 취혈방법
3. 자침법
3.1 刺鍼시의 5단계 검증
1. 손가락 끝으로 혈위를 느낌
혈위에서는 반드시 기가 아래에서 위로 솟아 올라오거나, 빨아들이는 느낌이 든다. 그러한 느낌으로 혈위의 입구를 확인한다.
2. 鍼管을 혈위에 댈 때의 느낌
자침을 하기 위해 피부에 침관을 대었을 때, 환자가 움찔하는 경우에는 혈위를 잘못 선택한 것이다.
3. 침을 刺入하기 위해 톡톡 치면서 확인
침을 톡톡 칠 때, 마치 두부에 자침하는 느낌이 들거나, 침이 부드럽게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있어야 된다.
4. 자입시 침을 돌리면서 확인
자입시 침을 돌릴 때, 처음부터 빽빽한 느낌이 들면, 취혈이 잘못된 경우이다. 처음에는 부드러웠지만 자입되면서 점점 뻑뻑한 느낌이 드는 경우에는 혈위의 입구는 맞았는데 자침의 방향이 틀린 경우이다.
5. 자침 후 確認
자침후, 침 주위의 피부가 도톰하게 올라와 있는 경우는 잘못 자입한 것이다. 침을 살짝 빼보아 피부가 침을 따라서 딸려 올라오는 경우에도 자침이 잘 못된 것이다.
위의 5가지 자침시 확인법을 숙지하고, 자침시 마다 확인하여야 한다.
3.2 자침의 速度
일정하고 빠른 속도로 자입해야 피부표면의 저항을 최소화하여 통증이 없다
자침할 때 아프지 않다는 것은 피부의 저항이 작다는 것과 똑같은 얘기다. 그러므로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 좀 빠르게 찌르는 것이 좋다.
3.3 자침의 方向
사암침이나 경락에 침을 놓을 때 얘기이다. 경락이라는 것은 물이 흐르는 곳이다. 경락은 고정된게 아니라 흐르는 곳이기 때문에 침을 놓을 때 그 정가운데에 정확히 찔러야 한다. 그런데 그게 어려우면 경략이 흐르는 방향으로 사자를 하라는 것이다. 영수보사가 아니라 방향을 직자보다 약간 사자를 하라는 것이다.
3.4 자침의 姿勢
침을 놓을 때 제일 중요한 건 의사가 편한 자세가 아니라 환자가 가장 편한 자세일 때 침을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환자가 편안해야만 그 사람 기의 흐름이 가장 완벽한 것이다.
3.5 침의 모양
침을 놓았을 때 모양이 일정하면서 상하 좌우 均衡이 잡혀 있으면 완벽한 침이라고 할 수 있다. 잘 모르면 경혈학을 다시 보면서 처음부터 침을 놓아보라. 최소한 오수혈이라도 경락 따라서 한 번 쫙 놓아보라. 간경 환자이면 간경에 대한 오수혈을 놓은 후 삐뚤삐뚤 하면 그건 잘못 놓은 것이다. 방향도 일정하고 모양도 좋아야 맞는 것이다.
3.6 침의 효과 확인
1. 중병 환자의 불편한 통증이나 증상이 즉각적으로 소실되야 한다.
침의 효과는 처음에는 즉각적인 통증의 소실이다.
2. 맥의 변화
1)경증환자는 통증이 먼저 감소하고 그 다음에 맥이 변화한다.
2) 중증의 환자는 맥이 먼저 변하고 증상은 그 다음에 변화한다.
일반적으로 가장 빨리 변하는 게 遲(지)맥이 평맥으로 변한다. 지맥이나 삭맥이 평맥으로 돌아온다.
癌
그러니까 중요한 거는 암 환자들이 와도 한방식으로 보면 된다. 한의 기준으로 딱 봐가지고 아, 이 사람은 이게 간병이다 신장이다 라고, 하여튼 중병은 다 臟病이다. 여러분들이 볼 때 진짜 특이한 병이다 싶으면 五臟에서 찾으면 된다.
환자 들이 어떤 데이터를 가져오면 그건 전혀 안 본다. 그건 안 보고 뭐를 보냐 하면 이런 병을 가지고 있는 사라들이 어떠한 症狀을 발현하는가. 그러니까 그 증상들을 잘 보면 아 이사람이 어떠한 병이구나 알게 된다. 그러니까 증상에 대한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한다.
한의학 원론. 가장 기초적인 한의학 책이 가장 중요한 책이다. 그 기초만 알아도 웬만한 병은 다 고칠 수 있다. 너무 수준 높은 학문을 탐구하다 보니까 基礎를 망각해서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것 같은데, 한의학 原論이나 한의학 辭典 같은 걸 주욱 훝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3. 침의 효과 확인
1) 통증 및 기타증상의 즉각적인 소실
2) 맥의 변화
3) 暈鍼(훈침)
훈침이 발생한 이후 환자의 몸이 가볍고 증상이 호전되면 그 훈침은 명현반응이다. 환자의 상태를 살펴서 좋지 않은 느낌일 경우에는 즉시 발침하여야 한다.
4) 자침 후 환자의 느낌이 변화
기감이 일정 통로를 통과해서 흘러가는 느낌, 시원한 바람이 환부에 불어오는 느낌, 시린 증상이 손발 끝으로 빠져나가는 느낌, 따뜻한 바람이 몰려오는 느낌, 박하향기가 퍼지는 느낌.
脈. 일반적으로 한의원에 오는 환자들은 그 맥을 보면 浮해 있든지 中해 있는든지 沈해 있든지, 이렇게 水平되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 遲數이 상당히 중요하다. 한의학에서 제일 중요한게 뭡니까 라고 물으면 나는 虛實寒熱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이게 팔강에도 보면 陰陽表裏寒熱虛實 아닌가?
五行鍼에 12경맥이면 60개. 虛實寒熱이 조합되면 240가지로 변해버린다.
그 遲數을 제일 중요시 여기는 것은 그 寒熱을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28맥. 나는 그냥 아무것도 안 보고 이게 遲냐 平이냐 數이냐, 이것 만 보는 거다. 그것만 계속 보니까 그거는 좀 感이 잡히더라.
부중침 첫 번째가 遲數을 가지고 寒熱을 구별하는 것이고, 그다음이 浮中沈을 보는 것이다. 이게 浮맥이냐 中맥이냐 沈맥이냐, 이게 바로 表병이냐 裏병이냐 그걸 이야기해주는 것 아닌가. 그 다음에 有력하냐 無력하냐를 보는 거다. 유력, 무력 그게 뭐냐 하면 虛實을 보는 것 아니가. 그러니까 저는 다른 거 안 보고 처음에 딱 遲數 보고, 그 다음에 浮中沈 보고, 마지막으로 有력 無력만 구별해요. 그냥 구별만으로 아, 이사람은 肝병이다라고 알죠. 그리고 그 다음 다시 현맥 홍맥 활맥 3가지를 봐요.
그런데 이 3가지만 보고도 치료율이 상당히 높아요. 왜 그런가 보니까 한의원에 오는 환자들 상당수가 肝 아니면 心臟 아니면 담음 치료를 요하는 환자예요. 뭐 십중팔구는 담음이다 이런 말도 있잖아요. 현은 肝맥이고 홍은 心맥이므로 담음맥은 활맥이다만 구별하고, 그 다음은 거기에 맞추어서 들어가요.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만약에 맥에 대해서 전혀 자신이 없다면 제가 해본 식으로 처음에 遲數 먼저 보고, 그 다음에 부중침 보고, 그 다음으로 유력 무력을 본 다음에 현홍활을 구별하고, 그 다음에 촌관척 어디에 해당하는가를 보는데, 하나하나씩 그러니까 하나가 완성되면 그 다음에 두 개로 넘어가는 거예요.
中風에서도 제일 많은게 肝중풍, 心중풍, 담음이에요. 그러니까 그곳과 관련되는 부분을 찌르라는 말이에요.
환자가 고통스러운게 아니라 좋게 느끼는 느낌이 득기입니다.
제게, 어떤 환자는 문제없겠다고 느끼고 어떤 사람은 침이 잘 못되었다고 느끼는 기준이 뭐냐하면, 침을 딱 놓고 어떤 이상이 왔을 때 환자가 불편하다고 하면 이건 내 침이 잘 못되었구나 생각하면 되는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꼭 물어봐야 되요.
가슴이 답답하거나 두근거리는 환자들이 있는데, 그건 환자에게는 척택혈을 방혈해요. 심장이 왼쪽에 있으니까 대체로 저는 오른쪽 척택을 방혈합니다.
목에 목혈, 대돈이라든가 화에 화혈, 소부 이런 것들이 제일 중요하다 그랬죠? 토에 태백이나 그런거 하고 화혈과 수혈이 상당히 중요하다 그랬어요.
4. 혈위의 이동
기억해야 할 것이 혈은 이동한다는 거예요.
5. 골도법
항상 원칙에 입각해서 잡으라는 거예요. 어저께 침을 놓은 자리는 아무 의미가 없다라는 거죠.
그리고 곡천하고 음곡을 잡을 때 무릎을 구부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다 펴고 해요.
이제 제일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겁니다. 골도법. 풍시를 찔러보라니까 거짓말 하나 안 보태서 정말 손바닥 하나만큼 차이가 나요. 그래서 골도법이 중요한 겁니다. 제가 생각해낸게 뭐냐하면 골도법을 분할법으로 보는 거예요. 어떤 것을 기준으로 잡느냐 하면 자기 손에 무늬 있잖아요. 그것을 기준으로 해 가지고 재는 거예요. 그러니까 침을 놓을 때는 이렇게 딱딱딱 손을 놓아서 이런 식으로 만져 가지고 그걸 보고 아 이게 몇 개니까 이렇게 한다는 식으로 접근해 가야 하는 거예요.
간병.
어지럽다거나 눈이 침침하다, 속이 미식거리고 구역질을 한다, 그 다음에 대변이 안 좋다, 또 여자들은 생리가 안 좋다, 머리가 정수리가 아니라 두정통 가운데 부분이 아프다, 간염이 있다, 그 다음에 피로를 많이 느낀다 등등. 이런 경우에는 간병으로 보는 겁니다. '어제 밤새 일을 했더니 허리가 아파요' 이러는 사람은 '나는 간병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니까 간에 대한 침을 놓아주어야 하는 거예요.
간에 이상이 있는 사람들은 특히 간암이나 간경변 쪽으로 가는 사람들은 대체로 변비가 극도로 심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약을 먹어도 안들어요. 그래서 저는 간에 대한 병을 의심할 때는 대변 상황을 예의주시하는데, 그런 경우 간에 대한 약을 쓰면 변비가 풀려요. 제가 제일 많이 쓰는게 세간산
(洗肝散)이라는 건데, 동의보감 원본 140페이지 오장육부 간문에 보면 나와요. 그래서 간암이나 간경변 간염이 오래된 사람들 한테는 그 변비가 풀릴 때까지 그 세간산을 써요. 그리고 변비가 풀리면 다른 처방으로 들어가거나 그 처방 그대로 주거나. 그러는 거죠.
소아 혈나고 체한것. 소상 방혈.
특히 아이들이 왔을 때는 소상을 방혈해주는게 좋습니다. 기본적으로 소상 방혈이 좋은 이유는 체한 것도 내려주면서 열도 내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해열제를 먹였는데 열이 안 내려가는 아이들은 반드시 체기가 있는거예요. 이건 애든 어른이든 마찬가지예요. 방혈을 하는 부분을 밑으로 내려뜨려 이쪽에서부터 주욱 훝어준 다음에 따고 피를 쫙 뽑아주는 거예요. 방혈을 많이 할 수 록 좋습니다. 랜싯 알맹이 껍질을 빼고 꾹눌렀다가 잠시 후에 빼버려요. 그러면 피가 줄줄줄 흘러요.
코막힘, 비염.
사마 방혈. 동시혈.
(펌)일본의 침술학교과정
세계 최고령 현역 침구사로 유명한 灸堂 金南洙(94). 기자는 지난 2월 29일부터 3월 6일까지 일주일 동안 구당 일행과 함께 일본 침구계 현장을 직접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前史가 있었다. 중국의 진우방 침구학회 부회장이 ‘한국의 華陀(화타)’로 칭송하고 한국의 박노해 시인이 ‘나눔의 聖者’로 노래한 구당을 기자가 처음 만난 것은 2004년.
당시 그는 1984년 10월부터 경북 성주군 대가면을 시발로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대대적인 의료봉사 활동을 실천해 왔던 터였다. 바로 그 의료봉사 20주년을 맞은 구당을 취재하게 된 것이 운명적인 만남의 계기가 됐다. 그런데 기자는 구당과의 몇 차례 만남을 통해 평소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주장을 접하게 됐다.
서양의학에서 醫師와 藥師가 분업체계를 이루고 있듯이 우리의 전통의학에서도 鍼灸醫(침구의)와 藥醫로 분리돼 있었다는 것(조선시대에 전자와 후자를 대표하던 인물이 ‘허임’과 ‘허준’이다), 이러한 전통은 일제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침구의와 약의가 각각 鍼灸師와 醫生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 그러나 해방 이후 약의와 의생의 맥을 이은 韓醫師를 제도권 의료로 수렴하면서 침구까지 독점하게 함으로써 침구를 한약 판매의 보조수단으로 전락시켰다는 것, 의료법을 만들면서 “면허된 이외의 의료행위를 할 수 없다”고 규정함으로써 전통의술과 현대의학이 상호 협력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했다는 것,
더욱이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의료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침구사 제도를 완전히 말살함으로써 수천년 동안 이어져온 전통의료의 한 축이 사라졌다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기자에게 매우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구당의 울분에 찬 절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침구사 부활을 위한 법안이 6대 국회부터 17대 국회까지 40여년 동안 총 12회에 걸쳐 제출됐지만 의사협회와 한의사협회 등 기득권 의료인집단의 조직적인 반발과 국회의원들의 소극적인 자세로 번번이 좌절됐다는 것,
국회의원들이 국회 내에 설치된 5개 종류의 진료실(내과, 치과, 임상병리실, 한방진료실, 침뜸진료실) 중에서 침뜸진료실을 가장 많이 애용하고 건강이 증진되는 효과까지 보고 있다고 공공연하게 고백하면서도 정작 침구사 부활을 위한 입법 활동에는 너무나 무심하고 무지하다는 것,
구당과 제자들이 의료봉사 활동을 통해 매년 약 15만명의 서민과 농민에게 침구 시술의 혜택을 주고 있지만 한의사들로부터 끊임없이 의료법 위반 행위로 고발을 당하고 있다는 것, 그러는 동안 일본과 중국은 물론이고 북한에서도 침구사를 대량으로 양성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고령화 사회에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다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일본 침구계 현황을 꼼꼼하게 파악하고 그 과정에서 ‘타산지석’의 교훈을 얻어 보기 위해서 기자는 구당 일행과 합류하기로 했다.
2월 29일
이날 정오에 김포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오후 2시경 하네다(羽田)공항에 도착했다. 도쿄의 근교에 있는 소도시 요코스카, 도쿄의 외곽에 위치한 병원인 이찌노에역전클리닉, 도쿄만 해저터널 건너편에 있는 지바현 가모가와시, 유서 깊은 고도(古都) 교토의 근교에 있는 명치침구대학 등 방문 예정지는 모두 네 곳이었다. 통역을 맡은 자연의학연구원 임윤숙 원장과 안내를 담당한 김경아 뜸사랑 사무국장이 비행기 안에서 방문 예정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요코스카에는 침구전문잡지 <醫道의 日本> 본사가 있다. 1941년 창간된 이 잡지는 일본 침구계에서 <네이처>와 <사이언스>에 비견될 정도로 높은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구당 선생의 활동을 수 차례 취재해서 보도한 인연도 있다. 이찌노에역전클리닉에선 구당 선생이 이틀 동안 일본 환자들을 진료하게 될 것이다. 가모가와는 ‘메디컬 투어’의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휴양지인데, 국내 적용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둘러볼 것이다. 1925년 개교한 명치침구대학은 일본 침구의 ‘메카’이자 ‘싱크탱크’로 불리고 있다.”
하네다공학에서 곧바로 버스와 전철을 이용해 요코스카로 이동했다. 50분 정도가 흐른 뒤 한 작은 역에 도착했고, 마중 나온 <의도의 일본> 야마구치 야스히로 전무이사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의 안내로 도베 신이치로(戶部 愼一郞) 사장의 자택을 방문했다. 일본에서 손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다. 구당을 염두에 둔 최대의 의전인 셈인데, 구당은 이 잡지를 창간호부터 구독해온 애독자이기도 하다.
“94세라고 해서 휠체어를 타고 오실 줄 알았는데, 이렇게 정정하시다니!” 도베 사장은 물론이고 본사를 방문해 만난 직원들이 구당을 보며 내뱉었던 말이다. 구당은 “나 자신 매일 침과 뜸으로 건강을 관리한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침구와 관련해 일본을 주목해야 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 2가지가 있다. 첫째, 일본은 민간의술과 서양의술, 전통의학과 현대의학의 합리적인 조화와 결합을 모색해 왔다. 구당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일본에서는 양의(洋醫)를 비롯한 의사들도 침구학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실제로 면허시험 과목에는 동양의학개론, 경락경혈학, 침구학 등이 포함돼 있다. 동시에 침구사들도 교육과정에서부터 현대의학에 대한 충분한 학습을 받고 있다.”
둘째, 고령화 사회에 가장 탁월하게 대비할 수 있는 의술이 바로 침구이다. 침구는 비용이 저렴한 반면 치료 효과는 탁월하다. 의료사고 같은 부작용이나 후유증도 거의 없다. 그렇다면 일본은 침구를 어떻게 제도권으로 수용했던 것일까. 다시 구당의 설명을 들어보자.
“일본에선 1911년 근대적 의미에서의 침구에 관한 첫 법령이 제정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문명이 침투하면서 잠시 침체기를 거쳤지만 1947년 안마사, 마사지사, 지압사, 침사, 구사 등에 관한 법률(일명 아하기법)이 제정됐다. 이 법률에 따라 도도부현(都道府縣)과 같은 지방정부에서 자격시험을 실시하여 침구사를 배출해 왔다. 이 시험에 통과한 사람은 침구원이나 일반 병원에 침구사로 취업할 수도 있고, 독립해서 침구원을 개업할 수도 있게 됐다.”
그런데 이 법령은 1988년과 1993년 잇따라 개정됐다고 한다. 지방정부에서 실시하던 시험을 중앙정부로 이관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침구사의 자질을 향상시킨다는 목적이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일본 정부는 고령화에 대비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한 의술이 침구라고 판단했다. 실제로 침구사 국가시험 주관기관인 동양요법시험연수재단의 설립취지문을 보면 고령화에 대한 대책을 동양의학(침, 뜸, 안마, 지압)에서 찾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어서 1999년 법률 개정이 다시 한 번 진행됐다.
“21세기를 눈앞에 둔 1999년 일본에서는 침구사 양성시설에 관한 규제 사항을 완화하면서 침구사를 수적으로 크게 확산시키는 계기를 마련한다. 고령화와 질병구조의 변화에 따른 질 높은 의료 서비스를 광범위하게 제공하도록 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요구에 따라 침구사 양성기관의 수와 정원을 대폭 늘리는 정책을 발표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의도의 일본> 2007년 10월호에 실린 특집 기사는 단연 눈길을 끈다. ‘침구사 대량배출 시대가 왔다’라는 제목이 달린 이 기사에는 몇 가지 통계 자료가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1999년까지 25개였던 침구사 양성학교가 2006년 현재 83개로 급증했다. 덩달아 수험자 수도 늘어났다.
1999년 당시에는 2000명이 응시했지만 2006년에는 5000명을 돌파, 합격자 수도 4000명이나 됐다. 침구를 생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2006년 말 현재 침사 8만1361명, 구사 7만9932명이었다. 침구원 수는 1만7794개소(2006년)로 집계됐다(안마, 마사지, 지압까지 합치면 3만4517개소가 된다). 특히 침구원 수는 2년 동안 18.7%나 증가했다.
“내가 15년 전에 일본에 왔을 때만 해도 침구사 양성학교가 7~8개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10년 내외 기간 동안에 10배나 증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침구사도 무려 16만명이 넘는다는 말이 되는데, 국내 한의사가 채 2만명이 될까 말까하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엄청난 숫자다. 자국 내의 고령화 시대에 철저히 대비하는 한편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의료개방이 진행될 경우 외국에도 수출(?)하겠다는 전략으로 읽혀진다.”
일본의 고령화 문제는 심각하다. 예컨대 고령화율(전체 인구 대비 65세 이상 노인의 비율)이 2006년 20.9%에 이르고 있는데, 이런 추세대로 간다면 2050년에는 35.7%에 달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더 이상 ‘강 건너 불구경’이 될 수 없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최근 발표한 한 보고서에서 이렇게 경고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어 중장기적으로 재정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대처가 늦을수록 성장률 하락, 정부채무 급증, 재정 건전성 악화 등의 부작용이 커질 것이다.”(동아일보 2월 11일자 기사에서 재인용)
실제로 한국은 생산가능인구(15~64세) 대비 65세 이상 노인의 비율이 2005년 13%였지만 2050년이 되면 65%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2005년에는 생산가능인구 7.7명이 고령자 1명을 부양하면 됐지만 2050년이 되면 1.5명이 1명을 부양해야 한다는 ‘끔찍한’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3월 1일
숙소가 있는 동신주쿠에서 전철을 타고 40분 정도 달리다 환승해서 도착한 곳은 이찌노에역전(一之江驛前)클리닉. 오키나와에서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퇴직한 니시에 히로시(西江 弘) 원장이 도쿄로 진출해서 개원한 내과와 정형외과 전문 병원이다.
구당은 이곳에서 오늘 20명의 환자들을 진료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오전 10시부터 진료가 시작됐다. 실내에는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흘렀다. 환자가 누울 수 있는 침상은 3개인데, 침상마다 사방에는 밝은 빛의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예약 시간에 맞춰 환자들이 한두 명씩 도착했다. 환자 1인당 배정된 진료 시간은 40여분. 진료가 계속되는 동안 “곤니찌와(안녕하세요)”, “아리가도 고자이마스(고맙습니다)” 등의 나지막한 인사말이 쉴 새 없이 오갔다. 병원 입구의 로비에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구당 소개 홍보물이 붙어 있었다.
“한국 침구계의 제1인자, 카리스마 침구사 김남수 선생이 일본을 방문해 우리 병원에서 침구 시술을 합니다.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진료를 희망하는 환자는 예약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과나 정형외과와 관련된 것은 물론이고 어떤 질환이라도 상담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구당이 몽골에 갔을 때는 ‘솔롱고스에서 온 산신령’으로 불린 바 있다. 20명의 환자를 성별, 연령별, 병명별로 분류해 보니 다음과 같았다.
△성별(여 13명, 남 7명)
△연령별(20대 1명, 30대 3명, 40대 4명, 50대 3명, 60대 4명, 70대 4명, 80대 1명)
△병명별(요통, 요추 헤르니아, 경견완 증후군, 좌골신경통, 추간반증, 변형성 경추증, 척추관 협착증, 불임증, 족관절염좌, 변형성 슬관절증, 당뇨병, 고혈증, 심장병, 난청, 골다공증, 식도 역류증….)
진료실 벽에는 침과 뜸으로 효과를 볼 수 있는 질병의 종류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붙어 있었다. “요통, 어깨 결림, 견관절통, 족통, 완통, 족통, 슬통, 근육통, 두통, 운동마비, 안면마비, 눈의 피로, 어지러움, 식욕부진, 냉증, 변비, 설사, 월경이상, 천식, 불면증, 피로, 아토피, 내과적 질환, 기타 질환에도 효과.”
주부, 회사원, 중학교 교사, 집배원, 요리사 등 환자들의 직업도 다양했다. 기자는 진료를 받으며 환자들이 보였던 반응을 살폈다. 42세의 주부인 기무라 노부코(木村信子) 씨는 “요통이 발작해 침뜸 치료를 계속하고 있다. 요즘에는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2주에 한 번씩 병원에 와서 치료받고 있다”고 말했다. 29세의 여 회사원 고까다 지나(小荷田 知奈)는 이렇게 말했다.
“평소 머리가 심하게 흔들리는 증세가 있었다. 마치 배를 타고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찾아간 병원에서 심장의 동맥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는 의사의 진단도 받았다. 침뜸 치료를 한 이후 머리 흔들림이 많이 나았다. 하루에 두세 번 심장이 조여드는 것처럼 아파서 의사의 처방에 따라 ‘니도로글리세린’이라는 약을 복용하면서 침뜸 치료를 받았다. 요즘 뜸은 매일 하고 있다.”
이 병원의 침구사는 2명. 그 중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 교포인 조경순(趙慶順) 씨이다. 구당을 이 병원으로 초청한 주인공이기도 한 그녀는 경남 마산이 고향이다. 양의인 니시에 원장도 손을 쓰지 못하는 환자들을 침과 뜸으로 ‘귀신 같이’ 낫게 하는 실력을 보여 주자 병원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니시에 원장이 병원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아파트까지 얻어준 상태이다.
조 씨는 1993년 일본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1995년 침구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교육기관인 도쿄의료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당시만 해도 이 학교의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았기에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머리에 원형탈모증 증세가 생겨날 정도로 집중해서 공부했다. 워낙 경쟁이 심하다 보니 중도 포기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전문학교 3학년을 마치면 국가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진다. 조 씨도 1998년 국가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당시 후생성 장관이었던 고이즈미 전 총리의 명의로 된 합격증을 받았다고 한다.
“학과는 침, 뜸, 마사지 3개인데, 각각 13과목이 있다. 위생학, 생리학, 병리학, 해부학 등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을 동시에 공부했다. 인체의 신경과 근육의 이름을 달달 외우느라 애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국가시험을 대비하다 보니 학교에서 주로 이론 교육에 치중했던 것이 늘 아쉬웠다. 임상 실습, 특히 뛰어난 스승에게 의술을 배우고 싶다는 강렬한 갈증을 느꼈다.”
시험에 합격한 조 씨가 3년 전 한국을 찾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한국에서 잘 알려진 구당 김남수 선생을 찾아가 사사를 자청했다. 3개월 동안 구당 선생 곁에서 배우면서 무의촌 도서 등지로 의료봉사도 함께 다녔다. 이 기간에 실력이 눈부시게 늘었다. 실제로 일본으로 돌아가 환자 치료를 시작하자 탁월한 결과가 발휘되기 시작했다.
“어느 날 허리가 굽어서 들어온 환자에게 구당 선생에게 배운 대로 침과 뜸으로 시술을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그 환자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멀쩡한 모습으로 걸어 나간 것이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양의인 니시에 원장 선생님이었다. 더욱이 입 소문이 나면서 환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니시에 원장 선생님은 그런 경우를 몇 차례 목격한 뒤로는 나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주고 있다.”
실제로 이날 니시에 원장은 침구 진료실로 직접 찾아와 조경순 침구사에게 예약하지 않은 몇몇 환자의 진료를 부탁하기도 했다. 점심 시간에 기자와 만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의료계에선 (양의들이) 환자를 치료하는 방편 중 하나로 침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나아가 침구를 전문으로 하는 대학이나 학교 등이 앞장서서 침구의 효능을 과학적으로 논증하거나 보좌한다. 실제로 침이나 뜸이 사람의 면역성을 강화시키고 엔돌핀을 촉진한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상태다.”
다음날에는 조 씨의 학교 스승인 이나바 교수가 이 병원을 방문했다. 침구사인 그는 전날 있었던 상황을 전해 듣고는 이렇게 말했다.
“의사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존재한다. 한국에서도 양의와 침구가 협력해 환자를 치료할 수 있도록 법이 바뀌어야 한다. 다른 분야는 잘 따라 하면서 왜 침구는 외면하려고 하는지 답답하다.”
이나바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침구사는 요즘 일본에서 ‘뜨는 직종’이라고 한다. 젊은 학생들에게는 ‘돈 잘 버는 직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도 의료 영역 간 갈등이 존재한다. 이나바 교수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유사의료 영역인 접골원에서는 X레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는 암묵적으로 사용해 왔다. 그런데 최근 접골원을 찾는 환자가 많아지자 정형외과 의사들이 X레이 사용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불법이니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다. 일종의 ‘밥 그릇 싸움’인 셈이다. 그러나 접골사들의 위상과 자세도 많이 바뀌었다. 옛날 같으면 물러났을 텐데 이번에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였다. 환자를 위해 X레이를 자유롭게 사용하게 해 달라는 헌법소원을 낸 것이다.”
3월 4일
메디칼 투어 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지바현의 가모가와시를 둘러본 뒤 일행은 교토로 향했다. 가모가와에서 도쿄까지 열차로 달려간 도쿄역에서 신간선으로 갈아탔다.
1925년 개교한 명치침구대학은 교토에서 전철로 1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침구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4년제 대학으로는 이곳이 일본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전교생은 약 900명. 침구학과, 간호학과, 유도정복(柔道整復)학과(접골학과라고 보면 된다) 등 3개의 학과로 구성돼 있다. 얼마 전에는 대학원 박사과정이 개설됐다.
이곳에서 제일 먼저 기자의 눈길을 잡아 끈 것은 명치침구대학의 커리큘럼이었다. 우선 1년차부터 4년차까지의 커리큘럼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년차
△인간과학(커뮤니케이션입문, 동양의학의 역사와 철학, 침구와 사회, 인간발달의 과학, 필드워크 실습) △언어와 정보(영어, 중국어, 정보과학), 침구의학(동양의학개론, 경락경혈학, 침구기술학총론, 침기술학실습, 구기술학실습) △자연과학(물질과 자연의 과학, 생물의 과학, 물질의 반응, 실험관찰법, 데이터해석법) △현대의학(인체의 구조․실습, 인체의 기능, 공중위생학, 병원미생물학, 보건영양학) △의학교양(건강과학, 의학개론, 의학영어)
2년차
△침구의학(경락경혈학․실습, 체표(體表)관찰실습, 침구생체기능조절학․실습, 침기술학실습, 구기술학실습, 침구진단학․실습) △현대의학(인체의 구조, 인체의 기능․실습, 기능학특론, 질병의 병인과 병태․실습, 생체방어학실습, 면역학, 생화학, 임상의학총론, 임상의학각론, 멘탈헬스케어론, 스포츠의학기초) △의학교양(의료윤리학, 의사(醫事)법학, 의학영어, 노년․복지론, 침구경영론, 동양의학고전특론)
3년차
△침구의학(경락경혈학․실습, 침구생체기능조절학, 침구진단학연습, 임상침구학․실습, 스포츠침구학․실습, 건강침구학․실습, 노년침구학․실습, 침구진찰법실습, 부속침구센터실습, 침구의학종합연습) △현대의학(형태학특론, 바이오메카닉스, 임상의학각론, 물리치료의학, 약물료법학, 스포츠의학응용, 산업의학개론)
4년차
△침구의학(첨단침구과학, 전통침구의학특론, 응용침구학특론, 스포츠침구학특론, 건강침구학특론, 노년침구학특론, 부속침구센터실습, 종합침구임상실습, 노년케어실습) △현대의학(분자유전학, 임상의학각론, 개호기술론, 응급․구급법, 의용기기개론, 최신의학특론, 통합의학개론, 동서의학종합세미나, 부속병원실습) △의학교양(의료정보학, 의료통계학, 의료사회학, 외서강독, 실험계획법, 한방의학, 한방약학)
물론 이곳에서도 3년차가 끝나면 국가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 받는다. 그런데 기자는 도리어 어떤 과목보다 앞서 공부하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입문’과 ‘침구와 사회’ 등의 인문과학 분야 과목이라는 것이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그것은 앞에서 소개한 <의도의 일본> 2007년 10월호에 실렸던 한 기고문과 연결된다. 사단법인 동양요법학교협회 고도 슈지 감사가 기고한 이 글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침구학교의 급증으로 본래는 입학이 되지 못하는 즉 학력이 모자라는 학생들도 침구학교에 들어올 수 있게 되어 결국 침구사의 질이 떨어졌다는 비판을 많이 듣습니다만 그것은 다른 전문직 의료인들도 마찬가지로서 침구사만이 아닌 일본 전체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시대이므로 더욱 더 우리 교육자들의 근본적인 것을 되물을 때가 아닌가라고 느껴집니다. 교사는 성적이 좋은 학생만 상대하면 편합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지나왔는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성적이 특별하게 좋지 않아도 침구사로서 좋은 자질이 있는 학생, 여러 가지 타입의 학생을 프로의 침구사로 연마시켜내는 것이 앞으로의 교육이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학생들이 졸업하고 난 뒤를 쫓아보면 반드시 입학시험 때의 성적과 상관되어 있지 않습니다. 기초학력이 없는 것은 문제 밖의 것이지만 침구사로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물을 보는 힘이 정확할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인 침구원에서는 보통의 대화만으로는 안 되는 환자가 제법 많습니다. 그런 분들도 대화가 깔끔하게 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많은 양질의 침구사를 세상에 배출하는가라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후진들을 길러내야 되겠다는 의욕이 적은 업계는 결국 쇠퇴하게 됩니다.”
실제로 베테랑 침구사로 활동하는 조경순 씨도 환자들과의 교감과 대화가 치료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바 있다. 일본의 침구사 양성이 단순한 의료인이 아니라 전인적 사회인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명치유신, 문화혁명
무지와 자학이 낳은 한·중·일 침구의 수난사
한국, 중국, 일본은 침구의 종주국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세 나라 모두 그런 정체성과 자부심은 모두
잊어버린 채 침과 뜸을 부인하는 자학의 시절을 보낸 적이 있다.
일본은 명치유신 당시 침구의 암흑기를 보내야 했다. 서구 문명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자아를 상실했는데,
침과 뜸도 예외가 아니었다. 탈아입구(脫亞入歐)에 탐닉하던 일본은 서양의학을 적극 수용하는 한편
전통의학은 홀대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장기화되면서 침과 뜸의 진가가 드러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945년 종전과 함께 시작된 맥아더 군정은 침구 시술이 야만적이라는 이유로 전부
금지시켰다.
“전쟁 시기에 미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일본 군인들이 의약품이 부족한 가운데 침구 시술로 질병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고 이를 고문의 일종으로 간주하여 침구 시술을 한 군인들을 전범으로 처단한 전례에
따른 것이었다.”(<김남수의 침뜸 이야기> 140쪽)
그렇다면 일본은 그 탄압을 뚫고 어떻게 침구의술을 현대의학과 접목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침구사들은 미군정의 침구 시술 금지 조치에 항의하면서 전국적인 반대캠페인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운동에 대하여 몇몇 현대의학을 공부한 학자들이 침구의 과학적 효과를 입증하여 주었다.”(앞의 책)
중국에서는 문화혁명 당시 중의학이 위기를 겪었다. 문화혁명 동안 ‘인재를 낭비하고 폐습을 부활시킨다’는
주장으로 인해 중의학과 중의사들은 고역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중국인의 대다수는 전통의학의
우수성을 의심하지 않았고 중의학에 의존했다. 특히 개혁과 개방 바람이 불면서 중의학은 중국의
잠재적 가치로 부상했다. 닉슨 미국 대통령의 방중 때 침으로 환자를 마취하여 수술하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전 세계에 침술 태풍이 불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펌)"허준도 신뢰한 허임 .. 朝鮮침술 그의 손에서 더 발전"
문화일보 엄주엽
입력 2017.08.03
손중양 대표는 지난 1일 문화일보 사옥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우리 현대사에서 鍼灸師 제도가 명맥을 잇지 못하면서, 허임을 비롯한 탁월한 名鍼들도 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조선 최고의 명의 許浚(허준)과 침의 許任(허임)이 함께 등장하는 선조실록의 부분. 허준이 “소신은 침놓는 법을 모릅니다”(붉은 선)고 선조에게 아뢰고 있다.
일대기 ‘명불허전…’ 펴낸 손중양 기념사업회 대표
“鍼醫(침의)들은 항상 말하기를 ‘반드시 鍼을 놓아 熱氣를 해소한 다음에야 痛症이 감소된다’고 합니다. 小臣은 鍼놓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마는 그들의 말이 이러하기 때문에 아뢰는 것입니다.”(선조실록 1604년 9월 23일) 실록에 기록된 御醫(어의)허준의 말이다. 초저녁에 편두통이 생긴 선조가 의관들을 불러 ‘鍼을 놓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니, 어의 중에도 가장 높은 首醫(수의)인 허준은 이렇게 아뢴 뒤 “許任(허임)도 평소에 말하기를 ‘經脈을 이끌어낸 뒤에 阿是穴에 鍼을 놓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이 일리가 있는 듯합니다”라고 덧붙인다. 실록은 이어 “許任이 鍼을 놓았다”고 적고 있다.
짧은 기록 속에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다. ‘동의보감’을 지은 조선의 醫聖 허준이 거명하는 許任(허임)은 누구일까. 許任의 일대기를 복원한 ‘명불허전! 許任-조선의 침구사’를 최근 펴낸 손중양(59) ㈔허임기념사업회 대표는 지난 1일 문화일보와 만나 “許任은 천민으로 태어나 조선 최고의 ‘鍼醫(침의)’로 성장해 선조부터 3대(代) 임금을 모셨고, 나중에는 백성들 가운데 살며 인술을 펼치고 후학을 기르며 ‘神醫’로 일컬어졌으며, ‘침구경험방’을 저술해 日本과 中國에까지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고 요약했다. ‘시민의 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손 대표는 저명한 침구사 灸堂 金南洙(김남수) 선생을 인터뷰한 것을 계기로 침뜸에 관심을 갖게 돼 20년 가까이 침뜸살리기 시민운동을 해왔고, 2005년부터 각종 자료 조사와 탐사를 통해 許任의 일대기 복원에 힘써왔다.
독자들은 ‘설마 許浚(허준)이 鍼놓는 법을 몰랐을까’라고 의아해할 것 같다. 손 대표는 “許浚의 언급을 통해서, 조선 최고의 名醫지만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넉넉하고 훌륭한 인품을 엿볼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단지 겸양해서 한 말은 아니다”고 말한다. 그는 “이 기록에서, 許浚은 평소 鍼醫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있었고, 鍼醫들과의 역할 분담에 대해 익숙한 모습을 볼 수 있다”며 “대략 60대 중반에 이른 許浚과 30대의 許任이지만, 許浚이 鍼에 관해 許任의 이론을 존중하고 신뢰를 나타내는 게 이를 뒷받침한다”고 설명했다. 실제 조선은 초기부터 鍼醫(침구의·鍼灸醫)를 분리해 따로 의과고시를 실시했고, 이 제도는 경국대전 등에 성문화돼 있다. 지금처럼 침구사가 의료체계의 아웃사이더가 아니었던 것이다. 손 대표는 “許浚이 鍼을 놓은 기록은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
1592년 壬辰倭亂 발발 이후 鍼醫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고 鍼術이 크게 발전했는데, 許任은 그 시기에 활동한 인물이다. 아버지 허억봉은 官奴(관노) 출신이지만 궁중 掌樂院(장악원)의 樂師(악사)를 지냈고, 어머니는 재상 집의 종이었다. 허억봉은 여러 기록에 언급될 만큼 音樂에 타고난 능력을 보였다. 손 대표는 “동양음악에서 五行에 배속된 五音이 인체의 五臟에 대응되고, 12율려는 인체의 12경락에 대응된다”며 “‘악학궤범’을 끼고 살다시피 했을 허억봉이 체득한 음악이론이 아들 許任이 醫術에 눈을 뜨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기록에 보면, 許任은 父母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의원집에서 일해주며 醫術에 눈을 떴고, 뛰어난 鍼術로 일찍 이름을 알려 壬辰倭亂(임진왜란) 중에는 鍼醫로서 광해군을 수행하며 신뢰를 얻어 내의원 鍼醫로 천거됐다. 선조의 편두통을 침술로 치료한 허임은 일약 堂上官(당상관)에 올랐다. 중년이 지나서 공주에 정착해 백성들을 고치고 제자를 길렀다. 그가 늙어서 평생의 의술을 정리한 ‘침구경험방’은 17세기 말 조선에 유학 왔던 일본 의사 山川淳菴(야마카와 준안)이 일본으로 전했는데, 그 서문에 “朝鮮이야말로 鍼術이 가장 뛰어난 나라이며, 모두 許任의 경험방을 배워서 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손 대표는 “오늘날로 표현하면 어의 許浚이 한의사라면, 鍼醫 許任은 鍼灸師인 셈”이라며 “국내 의료인에서 鍼灸師가 배제돼, 가장 뛰어났던 朝鮮의 鍼灸術이 나날이 발전하는 일본과 중국에 밀리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한편 tvN은 조선과 현대를 오가며 許任의 일생을 다룬 드라마 ‘명불허전’을 오는 12일부터 16부작으로 방송한다.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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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향토명의 中風鍼 달인 金安欽(김안흠) 翁(취재일: 1991년 5월 10일)
제목: "내가 용헌 게 아니고 뻔헌 걸 못 고치는 요즘 醫學이 문제여"
• 7년 중풍 환자 1달 간 침 맞고 회복
• 와사풍 환자 침 맞고 그 자리에서 완치
• 生脈과 死脈 구별하여 五行원리로 조절
• 수술환자는 名鍼이라도 血脈 뚫기 어려워
예로부터 一針·二灸·三藥이란 말이 있듯이, 오래 전부터 우리 선조들은 鍼을 질병치료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아왔다. 이 鍼은 동양의 고대 의서인 <黃帝內徑素問(황제내경소문 )>에 "돌침은 東方으로부터 왔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볼 때 우리 民族이 독창적으로 개발하여 中國이나 日本에 전해 주었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鍼의 질병 치료원리는 동양철학이 우주의 순행원리를 調和(조화 )에서 찾듯이, 인체의 氣血흐름을 조화롭게 해주는 데 있다. 그 결과 인체 내의 자연치유력을 회복시켜 질병을 퇴치하는 방법이다.
충북 음성군 소이면 金安欽(김안흠, 취재 당시 95세) 翁은 이런 침술의 심오한 원리를 터득해, 지난 50년 간 많은 병자를 구료해 오며 살아오고 있는 재야의 침술명의이다. 金 翁이 사는 마을은 소이면 갈마절. 음성 市外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괴산쪽으로 10여 분 달리면 다다를 수 있는 곳이다. 김 옹의 집은 택시기사에게 "鍼 잘 놓는 할아버지 댁에 가자"는 말 한 마디만으로도 쉽게 찾아 갈 수 있었다. 그만큼 김 옹의 명성은 인근에 널리 퍼져 있었고, 찾아가는 사람이 많았다.
마을에 들어서니 '민박됩니다' '식사됨'이라고 써붙인 집들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이런 진풍경에 대해 마을어귀에서 만난 金씨라고만 밝힌 한 민박집 여인은, 金 翁의 침을 맞기 위해 하루에도 1백~2백 명의 患者가 찾아오는데, 外地에서 모여드는 사람들이 宿食을 원하는 통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제 隣近(인근) 10여 가구가 한 집에 5~6명씩 외지 사람들을 둔 민박집 겸 식당이 아닌 곳이 없다고 한다. 金 翁의 집 앞은 忠北·京畿·서울·釜山 등의 번호판을 단 차량이 주차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늘어서 있었다. 그중에는 단체로 타고 온 듯한 봉고차도 여러 대 눈에 띄었다.
그리고 지팡이나 주위 사람에 의지해 뻣뻣해진 몸을 겨우 움직이는 7~8명의 환자가 金 翁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또 20평 남짓한 金 翁의 허름한 시골집 마당에는 휠체어를 탄 사람, 뒤틀어진 몸을 추스려 평상에 걸터 앉아 있는 사람 등 30여 명의 환자로 가득하였다.
이렇게 밀려드는 사람들이 오는 순서대로 치료하기 위해 金 翁의 맏아들 김홍익(취재 당시 68세) 씨는 번호표를 나누어 주고 있는데,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임에도 순번이 벌써 80번을 넘어서 있었다. 환자들이 밀려드는 바람에 아침 6시부터 오후 5시까지 점심시간 10분을 제외하곤 숨돌릴 틈도 없이 鍼을 놓고 있지만, 하루에 다 鍼을 놓아주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90 고령의 金 翁에게는 불가능한 중노동이지만 "이것도 求世의 방법이니 하는 것"이란 말로 모든 勞苦(노고)를 아끼지 않는다고 맏아들 金씨는 들려준다.
金 翁을 찾아오는 사람은 대개 中風 환자들은 몸이 비틀어지고 팔다리가 뻣뻣해지고, 혀가 굳어져 말문이 막히고, 입이 돌아가고, 허리나 손발이 저려오는 사람 등이다. 이런 사람도 여기저기 전전하다 病院이 두 손 들어 버린 다음에야 온 경우가 많아 상태가 아주 重症이었다. 이런 환자를 金 翁은 침 하나로 치료해내고 있었다. 같은 동네의 金씨라고만 밝힌 한 여인은 찾아오는 사람이 전부 나아서 가는 것은 아니지만, 옆에서 살면서 본 결과 움직이지도 못하여 업혀온 중년부인이 2~3개월 치료 끝에 걸어서 나가기도 하고, 하반신이 마비돼 휠체어 신세를 지던 중학생이 金 翁의 침술치료를 받은 끝에 버젓이 걸어 다니고 있다고 말한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부인(취재 당시 55세)을 업고 온 노흥태(취재 당시 57세, 서울 강동구 둔촌동) 씨도 부인이 이틀에 한 번씩 지난 한 달 간 金 翁의 鍼術을 받은 결과, 입이 돌아간 게 바로 잡아지고 어느 정도 말을 하게 되었다고 들려 주었다. 그의 부인은 中風으로 쓰러져 지난 7년 간 말도 못하고, 飮食을 삼키지도 못하였다고 한다. 또 大田에서 온 최재명(취재 당시 25세 남자) 씨는 올해 63세인 부친이 자다가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고 한다. 3개월째 大田 모 양방병원에 입원하여 약물치료를 받았으나,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金 翁의 침을 2주째 맞았는데, 이제는 말을 할 수 있게 되고 마비가 어느 정도 풀렸다고 한다.
또 30년 넘게 糖尿를 앓아 눈이 어둡고 기력을 추스리지 못했다는 天安에서 온 60대 남자는 金 翁의 鍼을 3번 맞은 결과 조갈증과 빈뇨증상이 덜하다고 들려주었다. 이밖에 필자가 직접적으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金 翁의 구료일화 중에는 舊 야당 원로인 신도환 씨의 부인이 中風 1달만에 완치되어 갔다든지, 前 문교장관 ㅇ씨의 부인이 신경통을 나았다든지, 前 국회의원 ㅎ씨가 中風을 고쳤다든지 등 유명인사도 꽤 포함돼 있었다.
金 翁의 방에 들어서니 두세 평 남짓한 공간에 10여 명의 환자로 가득 차 있었다. 첨단장비를 자랑하는 양방병원에서도 못 고치는 重症의 병을 고치는 곳이라 바짝 긴장하고 옆에서 앉아서 지켜보았지만, 어디를 보아도 평범한 할아버지요, 치료기구라곤 침통에 꽂혀 있는 銅鍼(동침) 몇 개뿐이었다. 단지 특이한 게 있다면 아흔 살 넘은 노인답지 않게 눈과 귀가 전혀 어둡지 않고, 그 많은 환자를 꼿꼿이 앉아 대하는 모습이었다.
"3년 전에 무거운 것을 들다 허리를 삐끗해는데, 그 뒤로 허리가 저려와 죽겠어요."
"걱정 허지마. 鍼 맞으면 나아. 고질병이 어렵지 허리통은 병도 아녀."
金 翁은 허리 통증이 심해 제대로 서지도 앉지도 못하여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는 麗水(여수)에서 왔다는 중년 부인의 근심을 달래며 이내 능숙하게 穴(혈)자리 여기저기에 銅鍼( 동침)으로 쿡쿡 찌르면서 훑어나갔다. 그러더니 허리를 살살 돌려보라고 하였다. 그녀는 허리를 살살 돌려보더니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상해요. 허리 통증이 없어요."
"맥힌 혈을 뚫어 놓았으니, 이제는 아픈 게 없을 거여. "
중년 부인은 자신에게 통증이 이내 없어진 게 몹시 신기했던지 연신 허리를 움직이었다. 3년 묵은 허리통이 鍼 한 번에 낫다니?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半信半疑 (반신반의) 하고 있는데, 놀라운 광경은 바로 이어졌다. 구안와사풍으로 온 40대의 남자의 얼굴을 신중히 살핀 김 옹이 地倉(지창)과 承漿(승장)에 鍼을 하였는데, 그 남자의 비뚤어졌던 입이 그 자리에서 바로 되었던 것이다. 참으로 어안이 벙벙한 일이었다. 그 40대 남자는 서울의 제일 큰 양방병원과 한방병원을 다 전전해도 낫지 못하고 6년 째 고생했는데, 鍼 단 2대에 나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고맙다고 절을 백배하다시피 하고 나가는 그를 뒤로 하고 金 翁은 서울 목동에서 온 30대 후반의 여인에게 鍼을 놓기 시작했다.
"病院엘 가면 다발성 전신 관절염이라고 그래요. 완치는 불가능하니 악화되는 것만이라도 방지하자고 해요."
"병원에 갔으면 병원에서 고쳐야지 왜 나헌티 왔어. 病을 키워 가지고 와서 고쳐 달라고 허니 문제여. 병원 에선 치료허지 못허면 허리통도 죄다 관절염이라 그러지. 鍼 맞으면 아픈 게 없을 거여."
그녀는 5년 전 애를 낫고 산후풍이 악화되는 바람에 다발성 전신 관절염이 생겼는데, 양방병원에선 류머티스 관절염이라면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하였다고 한다. 그후 병원을 다니긴 했지만, 뚜렷한 치료를 하지 못하면서 지내왔다고 한다. 그런데 金 翁에게 가끔 와서 2달 간 맞은 결과, 목·다리·엉덩이·허리의 '질질' 매던 통증이 많이 가셨다고 한다.
오늘의 의학이 束手無策(속수무책)으로 손을 들어버린 中風을 고쳐내고, 디스크·신경통·관절염 등을 쉬운 병으로 취급하는 金 翁은 침술경지가 과연 어느 정도이기에 그러는 걸까. 유심히 金 翁이 症狀別(증상별)로 鍼을 하는 穴자리를
관찰하였다.
먼저 金 翁은 팔이 올라가지 않는 50대 여인에게 견우·곡지·수삼리에 침을 하였다. 요추통이 심한 麗水(여수)에서 온 여인에게는 척택·위중·인중·곡지·태연·태백에 鍼을 하였다. 구안와사풍 환자에게는 승장과 지창과 함께, 말을 못한다고 하니 혀 밑에 있는 혈인 금진과 옥액에 鍼을 추가로 하였다. 또 척추 아프다는 50대 남자에게는 항문 부위의 장강, 발바닥 중앙의 용천, 오금 부위의 위중에 鍼을 하였다. 不眠症(불면증) 환자에는 백회·천주 등에 鍼을 하였고, 全身이 시리고 아프다는 환자에게는 양릉천·내정·태충·곤륜 등에 鍼을 하였다. 이밖에 오금이 저리다는 환자에게는 족삼리에, 허리가 저리다는 환자에게는 용천혈 한 군데에만 鍼을 하였다. 그러면서 용천혈은 40여 穴 통괄하고, 단전은 일신의 정액이 다 모인 곳이라고 했다. 전체적으로는 左痛右鍼(좌통우침) 右痛左鍼(우통좌침)의 침법에 따라 오른쪽에 병이 있으면 왼쪽에 鍼을 하고, 왼쪽에 병이 있으면 오른쪽에 鍼을 하였다.
이렇게 鍼을 하는 것은 다른 데서 침을 하는 것과 다른 게 없는 듯이 보이기도 했고, 鍼을 하는 것을 부분적으로 보아서는 어떤 原理에 기준하여 鍼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따라서 그날 환자치료가 다 끝난 후에 金 翁에게 궁금증을 물어 보았다.
"내 침술이 묘헌 게 아니라 치료가 뻔헌 걸 치료 못혀내는 오늘날의 의학이 문제여. 내 보기엔 쉬운 걸 병원에선 치료를 못혀내니 나는 병원이란 데를 병 치료원리를 모르는 곳이라고 봐. 단지 환자를 놓고 이렇게 저렇게 實驗(실험)이나 하는 곳일 뿐이여. 우리나라의 뛰어난 전통의술이 발전하지 못허고 막힌 걸 한탄헐 뿐이지."
金 翁은 中風 등을 치료해내는 '祕法'이 무엇이냐는 필자의 질문에, 대뜸 자신의 침술에는 특별난 게 없다고 답변하였다. 그리고 모든 비결은 전래하는 의술 속에 다 담겨져 있는데, 이것이 단절되어 모든 사람이 치료방법을 모르고 있는 게 안타까을 뿐이라고 말하였다.
"중풍 발병의 근본원인은 空骨生風 (공골생풍)이라. 뼈가 비었으니 바람이 차 올라와 병이 나는 게지. 인체의 氣와 피는 穴脈(혈맥)을 타고 흐르고, 혈맥이 맥히면 자연히 痲痺(마비)가 오는 법이지. 그러니 맥힌 혈을 鍼으로 자극해 氣와 피를 통허게 허면 자연히 바람찬 것이 빠지고 병은 낫게 돼 있지. 아무리 의학박사래두 병의 이런 根本을 깨닫지 못 허고 치료방법에 어두워 있으니 병을 못 고칠 수 밖에."
그래도 鍼 하나로 뼈 속에 차오른 바람을 빼내고 中風을 치료할 수 있는 金 翁 나름대로의 비결이 있을 듯 하여 그 原理를 재차 물어 보았다.
"세상의 이치는 陰陽(음양)의 조화여. 五行의 相生相剋(상생상극)에 의해 움직이고 인체도 마찬가지라. 음양의 조화가 무너지면 병은 오기 마련이니, 陰이 강하면 陽을 補(보)해주고, 불이 강하면 물을 보해주어 야지. 또 같은 병이라도 사람의 근본 체질에 따라 그 원인은 다른 법이니 형상과 체질을 살펴(觀形察色) 차거움 으로 온 병은 덥혀주고, 건조해서 생긴 병은 적셔주어야지."
김 옹은 자신의 침법체계는 陰陽五行(음양오행)의 원리에 입각해 있다고 들려준다. 그리고 산세가 죽고 사는 게 있듯 이, 병 든 사람에게도 死脈 生脈이 있다고 한다. 이것을 아는 게 鍼術을 할 때 중요하다고 한다.
"내가 원래 음성 일대에 유명헌 地官(지관)이었지. 오랫동안 지관 공부를 허게 되니 자연히 山을 보면 저 脈이 살었는지 죽었는지 눈에 보여. 그러다 보니 病이 들어서 오는 환자를 觀形察色(관형찰색)허면 어느 脈이 죽어서 병이 왔는지도 눈에 보여. 모든 건 原理를 알면 똑 같은 일이여. 그제야 난치병을 고쳐내는 金 翁의 침술비결이 어느 정도 풀렸다.
그것은 바로 환자의 생맥과 사맥을 짚어 내는 金 翁의 혜안이며, 이것을 음양오행의 원리에 의해 기혈 흐름의 균형을 되찾아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金 翁은 환자의 생맥과 사맥을 구별하는 법이나 그에 따른 구체적인 취혈법(取穴法)은, 상황에 따라 너무 다양할 뿐더러 이젠 기억력이나 기운이 달려 일일이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리고 설령 자신이 설명했다
해도 그 근본 원리는 오랜 經驗(경험)을 하여 스스로 터득해야지, 原理도 모른 채 남이 한 걸 그대로 따라 해보았자 소용이 없는 일이라고 한다.
"鍼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그렇지, 제대로만 알면 모든 병을 다 고칠 수 있어. 그렇다고 침구책을 외운다고 되는 것은 아녀. 내 침구경험방을 주어도 요즘 사람 모를 겨. 스스로 原理부터 깨우쳐야 되고 經驗이 있어야 되지. 藥도 어떤 약은 무슨 性質이 있고, 그 약을 쓰면 어디에 소용이 된다는 것이 있잖여. 그렇듯이 침도 어떤 穴을 찌르면 어디로 통허고, 어디가 좋아지고, 인체의 조화가 어떻게 찾아질 것이란 걸 경험을 통해 스스로 깨우쳐야지. 그걸 깨우치지 못허면 환자에 따라 적합한 鍼을 놓을 수가 없어. 내가 환자에 따라 놓을 수 있는 中風침술만도 2백 가지가 넘어. 그걸 어떻게 일일이 따라 헐 수 있것어. 原理를 알아야 허는 게지. 鍼이란 原理를 모르고 함부로 하는 게 아녀. 잘못 놓으면 혈의 흐름이 역류하여 터져 죽을 수도 있어."
그리고 金 翁은 병은 명의가 고쳐주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병을 고치기 위해선 무엇보다 환자가 올바른 몸과 마음의 자세를 가지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酒色(주색)을 경계하고, 돼지고기·닭고기·밀가루음식 등 잡다한 걸 禁(금)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한다. 金 翁이 鍼術을 배운 것은 50여 년 전인 40세 무렵. 日帝 말기인 당시에 그는 마을회관에 나가 친구들과 바둑이나 장기를 두면서 자주 나라의 앞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나라가 日本으로부터 광복되면 선조들 마냥 동네에서 鍼術을 베풀어 보자고 우연히 이야기를 꺼낸 게 鍼術을 배우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나는 13살에서 14살 때꺼정 서당교육을 받아 한문서적은 제법 읽을 줄 알았어. 당시에 조선의 운세를 적어 놓은 秘書(비서)들이 여럿 있었어. 그런디 그 책을 보면 '朝鮮이 庚戌年에 日本에 합병되고, 1945년 광복된다'는 말 등, 나라의 운세가 암호처럼 풀어서 적혀 있어. 그걸 보고 친구들과 마을회관에서 자주 만나 한담처럼 이야기를 나누었지. 그러다 우연히 나라가 광복되면 鍼術을 해보자는 말이 나온 게지. 일본의 통치를 받기 전인 우리 아버지 때꺼지만 혀도 동네마다 鍼 잘 놓는 사람이 있어 병을 쉽게 고쳐주었다고 들었어. 일본이 의사 면허
제도를 만들어 동네에서 면허없이 침을 놓으면 모두 잡아가는 바람에 없어졌지만, 나라가 광복되면 다시 동네에서 鍼術을 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허고 鍼術을 배웠지."
그때부터 金 翁은 한의학 서적을 통해 전통침술을 익히고 나름대로 침술체계를 세웠는데, 당시에 주로 보았던 책들은 許浚의 <동의보감>이나 許任의 <침구경험방>, 李濟馬의 <동의수세보원> 등이라 한다. 그런데 金 翁은 40세 이전까지는 음성 일원에 꽤 알려진 地官으로 農事를 지으며 틈틈이 이웃의 묘자리를 보아주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이 風水地理를 보는 눈은 그의 집에 16년 간에 걸쳐 둔 여러 地官의 영향이 컸는 데, 이렇게 金 翁이 집에 지관을 두었던 까닭은 객사한 그의 生父에게 좋은 묘자리라도 써주어야겠다는 생각때문이었다.
金 翁의 고향은 京畿道 양평으로 그는 3형제 중 둘째이었다. 그런데 가난했던 그의 생부는 그가 13살 때 집은 부유하나, 자식이 없는 먼 친척뻘 아저씨 댁에 그를 입적시켰다. 그후 그는 양부를 따라 현재의 음성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20살 때 그의 生父가 邑(읍)에 나갔다 객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金 翁은 객사한 선친에게 좋은 묘자리라도 써주기 위해 여러 지관들과 10여 년을 두고 묘자리를 보러 다니 면서 자연히 산세와 땅의 혈을 보는 것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은 나중에는 남의 묘자리를 보아주는 음성 일원의 유명한 地官이 되었다고 한다. 金 翁은 지금도 유명했던 지관답게 李承晩 대통령과 朴正熙 대통령의 묘가 혈이 아닌 데 써졌다고 말한다. 이런 風水地理를 보는 눈이 결국은 鍼術의 원리를 쉽게 터득하게 된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術士(술사)는 묘헌 데 入身허면 통헐 수 있고, 통허면 매양 한 가지여. 宇宙도 볼 수 있고, 地理도 볼 수 있고, 세상도 고칠 수 있고, 병도 고칠 수 있지. 山에 산세가 있고 穴도 있듯이, 인체에도 脈이 있고 穴이 있지. 原理를 통하면 모든 건 한 가지고, 鍼 놓는 혈도 만 가지 증상에 따라 나름대로 가감헐 수 있게 되지. 옛 醫書를 보면 병에 따라 鍼을 놓는 혈을 밝혀 놓은 책들이 많이 있어. 그렇다고 내 鍼術은 어느 방서에도 나와 있지 않아. 여러 의서를 읽고 그 原理를 깨달아 내 나름대로 鍼法을 세우고 침구책을 엮은 게지."
한편 金 翁은 자신이 風水地理를 알고 鍼術의 심오한 原理를 깨쳤지만 배워서 알 뿐, 결코 異人(이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여러 가지 秘書(비서)를 보고 앞으로 나라에 큰 혼란이 있을 거란 정도는 알고 있으나, 자신은 모르기 때문에 지껄일 뿐이라고 한다. 진정으로 天機(천기)를 알고 通(통)한 사람은 결코 함부로 지껄이지도 않을뿐더러, 아직은 때가 아니라서 산중에 묻혀 있다고 말한다.
현재 金 翁에게 전국에서 찾아오는 中風 등 난치병 환자 수는 하루에 1백~2백 명 정도. 이렇게 많은 환자가 몰리는 건 최근 3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지난 50년 동안은 농사일을 하며 동네나 인근에서 가끔 찾아오는 사람에게 鍼을 놔주는 동네의사 노릇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음성에 名鍼이 있고 급체환자나 中風 환자들이 신통하게 나았다'는 소문이 퍼지는 바람에 환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최근과 같이 많은 환자가 찾아오는 건 예전에 없던 일로 肉食을 많이 하고, 공해가 심해지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만성병 환자가 급증했기 때문이라
고 金 翁은 진단한다. 이렇게 설명을 마친 金 翁은 만성병을 치료하는데 있어 手術은 절대 금물이라고 강조한다.
"나는 병원을 實驗室(실험실) 정도로 밖에 안봐. 만성병을 치료허는 방법을 모르니 물리치료 정도를 허거나 걸핏허면 수술을 혀. 사람의 몸에는 精(정)이 있고 神(신)이 있는디, 神은 털구멍을 통해 往來(왕래)허지. 그런데 수술을 허면 털구멍이 잘라지고, 아물어도 제대로 통허지 않아. 아무리 名鍼이래두 수술 환자는 더 이상 치료헐 수 없게 되지."
한편 金 翁의 침술을 받고 난치병을 고친 많은 사람들은 金 翁의 鍼術이 뛰어남에도 면허가 없다는 이유로 의료계에서 외면 당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면허가 있고 없음을 떠나 국민건강을 위해서라도 金 翁의 鍼術이 하루 빨리 학술적으로 연구 개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金 翁의 맏아들 김홍익 씨는 뜻만 있지 金 翁의 鍼術을 보존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라 고 안타까워 한다.
작년에 金 翁으로부터 中風 치료를 받고 半身不隨(반신불수) 된 부인의 몸을 고친 舊 야당 원로인 신도환 씨 등 많은 사람이, 金 翁의 鍼術의 맥이 끊기지 않는 방안을 모색해 보았으나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한국에선 면허없는 사람이 제도적으로 후학을 양성하거나 학술적으로 보존할 방안을 찾기란 힘들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라고 한다. 다만 최근에 모 대학 한의과 교수가 개인적으로 찾아와 金 翁의 침술법과 혈맥법을 배우고 있는 형편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 의료법을 보면 "의료인이라 함은 보건사회부 장관의 면허를 받은 의사(양의사를 말함)·치과의사·한의사·조산사 및 간호사를 말하며, 의료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학위를 받은 다음 보건사회부 장관이 시행하는 국가시험에 합격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외의 사람이 의료행위를 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백 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 이런 제도 아래서는 의료면허가 없을 경우 의술을 밝히는 길은 고사하고, 그 의술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사람을 살려주는 행위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의술이라 함은 병을 고치고 인명을 구하는 게 목적이다. 도예과 교수보다는 비록 無學일지라도 수십 년 간 도자기를 빚어온 도공이 명품 만들어내듯, 사람을 살리는 능력도 학식과 면허가 있고 없슴으로만 따질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옛부터 학식이 풍부하고 인격이 고매한 儒學者(유학자)들이 지역 사람들에게 의술을 베풀고, 동양철학에 근거하여 나름대로 의술을 발전시켜온 아름다운 풍속을 지녀왔다. 또 학식은 없더라도 자신이 체득한 병을 고치는 법을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아름다운 풍속이 있었다. 그리고 의술은 仁術이라 하여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당연히 아픈 이웃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어떤 사람이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베풀어야 하는 수단으로 여겨 왔다.
그런데 일제시대 때 일제는 민족문화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의료법과 면허제도를 제정하여 서양의학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모든 의술은 소멸시키기 시작했다. 결국 민족의 독창적인 의술을 펴던 향토명의는 불법화 됐으니, 재야의 뛰어난 의료인을 없애려는 처사는 일제시대 이래 계속되고 있는 악습의 잔재라 하겠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오늘날까지 의술은 국민의 생명을 구하는 기준보다는, 면허를 가진 의료인의 경제적 이익과 독점권을 보장하는 기준으로 왜곡되어 왔다. 의술이 뛰어남에도, 또 어디에서도 못 고치는 난치병을 고쳐주고도 의료제도에서 밀려나 서있는 金安欽(김안흠)翁은 바로 그런 실상을 극명히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일제의 나쁜 잔재가 하루빨리 청산되길 기대하며 金 翁의 집을 나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