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5,6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떤 더벅머리 총각이 행복을 찾아 나섰다. 성은 한(韓)씨요, 이름은 복동(福童). ‘복동’이라는 이름은 ‘복’이라는 말과 인연이 깊은지, 어릴 때부터 ‘우리 복덩이, 우리 복덩이’라고 했던 것이 복동으로 변했다.
그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가?’ 심사숙고(深思熟考)하다가 어떤 때는 며칠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기도 하고, 어떤 때는 괴로움이나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여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하였으며, 또 어떤 때는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생사의 기로에서 고민하기도 하였다.
결론적으로 그는 잘 사는 사람, 행복한 사람을 직접 보고 장래 문제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어디로 갈까, 누구를 찾을까, 궁리끝에 행복은 사랑에서 올 것 같아서 주위에서 행복하다고 소문이 난 친구 집을 찾기로 하였다.
그 친구는 당시로서는 드물게도 대학까지 졸업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도 가졌다. 특히 친구들에게 부러움을 사고 있는 것은 고향의 예쁜 처녀와 결혼하여 잉꼬부부라고 할 정도로 금슬이 좋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슬하에는 예쁘고 똑똑한 아들, 딸 남매까지 둔 친구로서 누가 봐도 복이 많다는 친구였다.
그 친구 집에 가면 행복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잔뜩 기대에 차서 갔다. 대문을 막 들어서는데, ‘우당탕탕!’ 살림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뒤에 그 점잖은 친구의 입에서 막말이 터져 나오더니, 부인도 질세라 쌍소리를 하니 아이들은 죽을 것 같은 소리로 마구 울어댔다.
행복을 찾으러 갔던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설마 내 친구 아무개는 아니겠지’라는 생각까지도 했다. 그러나 분명히 친구 집이고, 친구의 목소리가 틀림없는 줄을 알고는 크게 실망하여 도망치듯 나오고 말았다. 너무 충격이 심하여 온 전신에 힘이 쭉 빠지고 걸음조차 제대로 걷기가 어려웠다.
친구 집에서 크게 실망한 ‘행복을 찾는 사람’은 비틀거리며 네거리까지 나왔다. 어디로 갈까... 여러 사람을 떠올렸다. 가장 믿었던, 가장 틀림이 없다고 생각한 친구에게서 행복을 느낄 수 없다면 가볼 곳이 막연했다. 얼마를 생각하다가 고을에서 제일 갑부인 변 부자댁을 찾기로 했다.
자수성가(自手成家)한 갑부로서 언제 보아도 당당하고, 무슨 일이든지 자신만만하고, 어떤 사람에게도 굽힘이 없이 큰소리 떵떵치는 의지와 노력의 사나이 변씨에게 가면 남다른 행복을 느낄 것 같았다.
사랑채에서 변부자를 찾으니, 변부자는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어떤 남자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하나밖에 없는 변부자의 동생이었다. 변부자는 3천석 꾼인데, 30석도 못하는 가난뱅이 동생한테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 두 마지기를 돌려주지 않는다고 볼 것 없이 나무라고 있었다. 그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만정이 뚝 떨어졌다. 허탈한 기분으로 그 집도 나오고 말았다.
‘행복을 찾는 사람’은 변부자 댁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또 어디로 가볼까 고민하다가 당대의 이름있는 정치가 댁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문지기에게 ‘정치가를 만날 수 있느냐’고 물으니 손님을 대하는 태도와 말이 불손하고 거칠었다. 집안에 들어서니 분위기가 쌀쌀하여 마치 범죄 집단 같은 곳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간신히 부인을 만나니 상전이 하인을 대하듯이 거만하고 딱딱하였다. 내키지 않았지만 이왕 어렵게 들어간 집안이라 ‘행복한 정치가를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부인이 말하기를 ‘행복은 무슨 말라비틀어진 말입니까? 그 양반은 행복의 ‘행幸’자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였다.
부인을 보니 알 것 같았다. 그렇게 거만하고 딱딱하고 험구이니 그런 여자의 남편이라면 행복과는 거리가 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봉건封建주의 시대 권문세도가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서 정작 정치가는 만나지도 않고 괴로운 심정으로 소슬 대문집을 나오고 말았다.
정녕 행복한 사람이 없단 말인가? 이제는 행복이라는 말도 싫어졌고, 행복한 사람을 만나겠다는 마음도 없어졌다. 비틀거리며 산속으로 올라가다가 길섶의 잔디 위에 쓰러졌다. 어느덧 밤이 되어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 빛났다.
문득 저 반짝이는 별들처럼 하늘로 올라가고 싶었다. 순간, 자살을 결심하였다. 굳이 살아야 할 이유도 없고, 의욕도 없었다. 자살을 결심하니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멀리 동쪽 하늘이 환해지는 것을 보고 잠이 들었다. 여러 날 제대로 자지 못한데다 피로가 겹쳐 깊은 잠에 빠졌다.
얼마를 잤을까, 눈을 뜨니 다음날 한낮이 지나서였다. 따뜻한 양지 바른 곳에서 실컷 자고 나니 지쳤던 몸도 완전히 풀리고, 행복을 찾겠다는 마음도 자살을 하겠다는 마음도 다 쉬고 나니 몸과 마음이 가볍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대단히 만족스럽고 기분이 좋았다. 순간 ‘이것이 행복이 아닌가.’ 하고 쾌재를 불렀다. 이 이상 어디에서 행복을 찾을 것인가. 그는 드디어 행복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뒤 그는 행복한 순간을 자세히 점검하기 시작하였다.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는 드디어 ‘행복은 마음에서 오는구나, 텅빈듯한 아무 생각도 없는 그런 마음에서 온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대로 몇 시간을 누워 있었다. 여전히 아무 생각도 없이 편안하고 기분이 좋았다.
어느덧 해가 기울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목탁木鐸소리가 들려왔다. 목탁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왔다. 그는 목탁소리가 나는 곳으로 갔다. 목탁치는 스님은 미치광이 같은 스님이었다.
스님은 일제시대 극장 선전원들이 사방에 영화 포스터를 붙인 통을 뒤집어쓰고 거리를 다니면서 선전했던 모습처럼 앞에도 나무아미타불, 뒤에도 나무아미타불, 옆에도 나무아미타불을 주렁주렁 써서 붙였고, 그것도 모자라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쓴 깃대를 등에 지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서 목탁을 쳤다.
그 스님은 하루 종일 그렇게 서울의 골목을 다니다가 해가 지니 삼각산 도선사(道詵寺)로 가는 중이었다. 스님은 그렇게 5년간이나 목탁을 치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다녔다. 스님께서 그렇게 요란하게 써 붙이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시내를 누비고 다니는 것은 귀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소리를 듣고, 눈으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글자를 보기만 하여도 그만큼 업장業障이 소멸하고 공덕이 쌓인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극락세계와 아미타불에 대한 법문을 들려주고, 때로는 염불로 업장을 참회懺悔하는 참회법도 가르쳐주는 거리의 보살이요 선지식이었다. 이 스님이 하담(荷潭) 스님이다. 스님의 세속 인연因緣은 알려진 것이 없고 다만 성이 황(黃)씨고 19세에 금강산 장안사(長安寺)로 출가하였다고 하였다.
은사스님께서 “너는 경전도 보지 말고 참선에도 관심을 갖지 말고 오직 아미타불만 일념으로 염해라.”는 말을 듣고 오직 아미타불만 했다. 가나오나, 앉으나 서나,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새벽에 눈 뜨자마자 밤에 잘 때까지 언제 어느 곳에서나 아미타불만 염하고 아미타불에 빠졌다.
처음에는 잘 안되더니 그렇게 지극하게 하여 3, 4개월이 지나니 자신이 생기고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쯤 지나니 더 잘 돼서 1, 2 시간 정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 무렵 장안사 극락전에 서울의 어느 신심있는 보살이 3·7일간 기도를 왔다. 주지 스님이 찾는다기에 주지실로 갔더니, “하담 수좌, 자네가 기도를 해주게.”하였다. 하담 스님은 주지스님의 말씀이 고맙기도 하고 처음으로 하는 사중 기도라 열심히 하였다. 공양하고 화장실 가고 극히 필요한 용무보는 일 이외에는 법당에 들어가 목탁을 쳤다.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할 정도로 최선을 다했고, 기도에 아예 몸뚱이를 바쳤다.
염불이 점점 잘 되는 것 같더니 몇 시간씩 일념에 들기도 하다가, 기도를 마칠 무렵에는 하루 반가량을 삼매에 들기도 하였다. 기도가 끝난 뒤에도 계속 열심히 하다가 입산한지 3년만인 어느 날 아미타불의 무량한 광명光明을 보게 되었다. 그 때 나이 30대 중반이었다.
그 무량한 빛과 오묘한 진리를 체험하는 순간 그 기분을 억제치 못하여 하루 종일 금강산金剛山을 망아지처럼 뛰어다녔다. 며칠을 미친 사람처럼 다니다가 이 기쁨을 나만 누릴 것이 아니라 중생衆生들에게 회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중생들에게 아미타불 네 글자를 보여주고, 귀에 넣어줌으로써 세세생생 지은 업장業障을 녹여주고 죄업을 소멸시켜주어 일체 중생이 왕생극락하리라’ 하는 큰 서원을 새우고 금강산에서 하산하여 서울로 갔다.
‘행복을 찾는 사람’은 서울 우이동 도선사 입구에서 목탁을 치면서 올라오는 하담스님을 보게 되었다. 스님을 보는 순간 환희심이 나고 존경심이 났다. 얼마를 따라가다가 자기도 스님의 목탁에 맞춰 아미타불을 부르고 있는 것을 알았다.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 어색하지 않고 친근감이 났다. 도선사에 도착하여 화담 스님을 따라 밤새도록 정근을 했다. 다음날 아침인데도 전혀 피로한 줄 모르고 아미타불을 불렀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목이 터져라 불렀다. 일주일이 지나니 몸은 가볍고 점점 기분은 더 좋았다. 그는 염불이 잘 될수록 하담스님이 장안사에서 아미타불에 빠지듯이 오직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일념에 들었다. ‘행복을 찾는 사람’은 염불을 할수록 진정한 행복, 참 행복은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에 있다는 것을 더 절실하게, 더 진하게 느끼며 미친 듯이 아미타불만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아미타불에 빠져 석불(石佛)만 보고 정근하고 있는데, 서울역에서 목탁을 치고 다니는 하담 스님이 보였다. 이상해서 옆을 보고 뒤를 돌아보아도 하담 스님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언제 하담 스님이 내려갔는지도 모르고 염불에만 빠져있었던 것이다.
하도 신기해서 하담 스님을 계속 주시했다. 하담 스님은 서울역전에서 얼마간 목탁을 치면서 다니더니 여러 사람들에게 설법을 하였다. 뒤에 남대문을 거쳐서 중앙청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날 저녁 청담(淸潭) 스님께서 외출하고 들어오셨기에 경계境界를 자상하게 이야기했더니, “그간 애썼다. 참으로 좋은 경험을 했다. 식(識)이 맑아지면 그럴 수도 있다. 천안통(天眼通)이 열렸다.” 하면서 “보이더라도 일체 신경을 쓰지 말고 아미타불 일념一念에만 빠져라.”하였다.
그 이후 예사롭게 서울 시내가 보이고 인천 앞바다까지 보였다. 그 때는 지나가는 사람만 보아도 그 사람에 대해 다 알 것 같았다. 도선사에서 3개월 가량 기도를 하던 어느날 하담 스님이 나타났다. 그는 하담 스님에게 묻지도 않고 사방에 나무아미타불이라 주렁주렁 매단 옷을 입고 따라나섰다.
그는 하담 스님의 목탁에 맞춰 아미타불을 목청껏 불렀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그는 가는 곳마다 아미타불을 느끼면서 목이 터져라 서울시민을 위하여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불렀다.
두 스님이 아미타불을 부르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우 모여들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멸시하기도 하고, 아이들은 구경거리처럼 따라 다니기도 하였다. 상가 앞을 지나면 탁발하려고 온 줄 알고 돈이나 먹을 것을 주기도 하고 어떤 음식점에서는 음식을 대접하기도 하였다.
동대문 시장이나 남대문 시장에서는 시장 상인이나 시장 보러 나온 사람들이 수십 명씩 따라다니기도 하였다. 그 때만 해도 시장 주변에 거지가 많았는데, 시장을 돌면서 돈이나 물건이 생기면 다 나누어 주곤 하였다.
스님은 정근하며 가다가 농번기에는 일손이 없는 농촌에 모도 심어주고 보리를 베어주기도 하였고, 어느 곳에서는 하루 종일 타작을 해주기도 하였다. 공사판을 지나가다 막노동꾼과 같이 힘든 일을 해주기도 했고, 어떤 읍에서는 우는 아이를 봐주기도 하였고, 환자가 있으면 간호도 해주고, 지나다가 노인정을 보면 절대로 무심히 지나가지 않았다. 어떤 시골 초등학교에서는 부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였다.
하담 스님은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보살행을 하고 또 거리를 다니면서 거리의 포교사가 되고 아미타불의 전달자가 되었다. 또한 스님은 자비하고 남에게 공경심이 대단하여 누구든지 부처님처럼 대하고 부처님처럼 모시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스님에게는 이 사람도 부처님, 저 사람도 부처님, 만나는 사람은 어떤 사람도 부처님처럼 대하여 스님에게는 가는 곳마다 부처님 세계요 극락정토였다. 그래서 스님과 한 번만 대화하거나 사귀면 평생 잊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게 다니다가 아미타불 일념에 들면 걸어가던 길이든, 절이든 세속 사람의 집이든 몇 시간씩 정근精勤을 하다가 가곤 하였다. 어느 해는 충청도 계룡산 근처를 지나다가 사흘이나 묵으면서 정근을 하니 신도안에 가던 이교도들이 몰려와 공양을 듬뿍 내서 인근 주민을 포식시킨 적도 있다.
어느 해 충청도 천안을 지나가다가 하담 스님이 문득 ‘행복을 찾는 사람’에게 말했다. “자네도 수계를 해야지?” “네, 저도 받고 싶습니다.” 하니 길가의 큰 능수버들아래 정좌하더니 “나에게 삼배를 하게”하여 삼배를 드렸더니 “불법을 잘 호지하게. 자네가 체험한 것이 정법일세. 그것을 호지護持하는 것이 계(戒)일세.”하였다. 그러면서 “오늘부터 법산(法山)이라 하겠네.”하여 법산 스님이 되었다.
하담 스님은 그렇게 전국을 다니면서 아미타불 정근을 하여 극락정토를 발원하고 수많은 사람에게 아미타불 인연을 맺어주고 갖가지 보살행으로 선근공덕을 쌓다가 말년에는 부산 범어사에 정착하였다. 법산스님도 줄곧 함께 수행하였다.
두 스님은 대중생활을 하지 않고 공양은 행자나 일꾼들과 같이 하고 잠은 부목 방에서 잤다. 아침 공양을 하고 주변 도량 청소가 끝나면 어김없이 부산 시내를 내려가 아미타불 정근을 하며 다니다가 저녁에는 들어왔다. 그러던 어느 날 하담 스님은 총무스님에게 말했다.
“내가 석 달 후에 가야 되겠소."
총무스님은 무심히 지나가는 말처럼 들었다. 가야 되겠다는 말도, 다른 곳으로 가신다는 말인지, 돌아가신다는 말인지 이해가 안 되었다. 가신다고 한 날 일주일 전에 총무스님을 방으로 불렀다.
때가 묻어 새카만 주머니에 꼬깃꼬깃 모은 10원 짜리와 100원짜리 돈 6만원을 주면서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네. 경책 한권도, 농짝 하나도 없네. 못난 중이라 옛 어른들처럼 땅 한 마지기도 부처님께 바치지 못하겠네. 적은 액수지만 사중에 보태쓰게.” 하면서 주고는 또 양말 속에 넣어두었던 3만원을 주면서 화장비로 써달라고 하였다.
하담 스님은 가시기 하루 전날 손수 향나무를 달인 물로 목욕을 하고, 미리 마련한 수의壽衣로 갈아입은 후, 깨끗한 장소에서 그간 입었던 더러운 옷을 깨끗하게 태운 후, 실로 남은 것이라고는 수건 하나, 양말 한 켤레도 없이 오직 수의와 가사 장삼뿐이었다.
3개월 전에 가겠다고 했을 때 가볍게 들었던 총무스님은 하담 스님의 거동이 이상하게 느껴져 학인 승려 두 명으로 하여금 곁을 지키도록 하였다. 예언한 날 10시가 되자 하담 스님이 조용히 말하였다.
“이제 내가 가야 할 시간이 되었구나.”
그때 곁에 있던 젊은 스님이 말했다.
“스님, 10시는 부처님께 마지 올릴 시간입니다.”
“허, 듣고 보니 그 말도 옳구려.”
앉은 채로 열반(涅槃)에 들고자 했던 스님은 젊은 스님들의 부축을 받아 법당으로 올라갔다. 법당 옆에 단정히 앉아 사시 마지가 끝날 때를 기다렸다.
“이제는 가야겠구나. 나를 좀 눕혀다오.”
시내에서 정근하다가 황급히 올라온 법산 스님과 젊은 스님의 부축으로 반듯이 누운 하담 스님은 조용한 음성으로 발원하면서 가셨다.
“원컨대 법계法界의 모든 중생들이 일시에 성불하소서. 원컨대 법계의 모든 중생들이 일시에 성불하소서. 원컨대...”
하담 스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범어사 스님들은 큰 충격을 받고 슬픔에 빠졌다. 특히 범어사 총무스님은 땅을 치며 대성통곡하였다.
“아이구, 아이구... 진짜 도인 스님! 선지식을 옆에 두고 눈 어둡고 귀멀어 몰라보았으니 참으로 한탄스럽구나.”
장례는 스님의 삶처럼 간소하면서 여법하게 치러졌다. 법산 스님은 은사스님이 남긴 한줌의 재를 금정산(金井山)에 뿌리고 부산을 떠났다. 스님은 은사스님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보고 더욱 신심을 내고 발심하였다.
그 이후로는 더 큰 소리로 더 간절하게 염불하였다. 그렇게 전국을 3년가량 다니다가 발걸음을 멈춘 곳이 강원도 명주군의 어느 외딴 토굴이었다. 멀리 동해 바다가 보이는 산자락에 방 한 칸, 부엌 한 칸 조그마하고 보잘 것 없는 집에서 살았다.
이곳에서는 지금까지의 거리의 삶과는 전혀 달랐다. 거의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처음 몇 년간은 땔감을 구하기 위하여 산에 오른다던가, 양식이 떨어지면 탁발하기 위하여 외출도 하였다.
몇 년이 지나서는 누군가 땔감이 없으면 땔감을, 먹을 것이 없으면 먹을 것을 조달하여 주었다. 그는 하루 종일 아미타불에 빠졌다. 오직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로 눈을 뜨면 잘 때까지 나무아미타불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서 달이 가고 해가 지나서 10여년간 아미타불과 함께 세월을 보냈다.
그간 어떤 때는 너무 좋아 춤을 덩실덩실 추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는 남모를 소리를 내며 즐기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는 법열에 자신을 억제하기 어려워 동해안을 질주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는 뒷산 상봉인 오대산(五台山) 삼왕봉(三王峰)을 올라가 천하를 호령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는 밤중에 방광(放光)하여 마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또 어느 해는 강원도 산골에 앉아서 서울을 보며 정부의 나라 걱정을 하기도 하였고, 어느 여름에는 큰 비가 올 것을 예상하고 주민들을 대피시킨 일도 있고 언젠가는 동해안으로 상륙한 공비들 2명을 자수시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 그를 인근 마을 사람들은 ‘살아있는 아미타불’ ‘살아있는 부처님’이라고 하기도 하고, ‘도인 스님’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앞날을 내다보는 ‘신비한 스님‘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30년 가까이 부른 아미타불 속에서 진정한 희열을 느끼고, 그가 그토록 바라던 참 행복을 느끼다가 갔다. 그는 열반에 들 때도 아미타불 일념에 들어 법열을 느끼다가 얼굴에 미소를 지은 상태로 갔다.
정경남 처사는 6.25 사변의 1.4후퇴 때 20대 중반의 나이로 부모님을 북쪽 고향 땅에 남겨두고 홀로 남하하였다. 물론 그때만 하여도 휴전선이 가로막혀 오도가도 못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아버지 어머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모시러 올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곳으로 가시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이렇게 서울로 와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을 기다렸지만 그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그래도 20 여년 동안은 부모님께서 살아계실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온 지 30년이 되고 처사의 나이도 50대 중반에 이르자, 부모님이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크게 자리를 잡았다.
"지금쯤은 부모님도 세상을 떠났으리라. 하지만 임종하신 날조차 알 수가 없으니....... 그냥 9월 9일을 택하여 제사를 올려드려야지."
그해 9월 9일. 정경남 처사는 첫 제사를 지내면서 부모님의 천도薦度를 위한 기도도 함께 시작을 하였다. 새벽에 2시간 저녁에 2시간 하루 4시간씩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축원祝願하였다.
"아버님 어머님, 부디 괴로움의 나라를 벗어나 좋은 나라로 가옵소서".
정경남 처사는 참으로 부지런히 기도하였다. 아침에 기도를 하다가 밥 먹을 시간이 없으면 굶은 채 출근을 하였다. 늦게 퇴근하는 날 저녁기도를 하고 편한 잠자리에 들면 늦잠 때문에 다음날 새벽기도를 제대로 못하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옷을 입은 채 벽에 기대어 잠깐 눈을 붙쳤다가 새벽기도를 하고 출근하였다. 몹시 바쁠 때는 2시간을 1시간 30분 정도로 줄여서 한 적은 있었지만 그것도 몇 번에 불과하였다.
이렇게 정경남 처사는 10년 동안을 하루도 빠짐없이 부모님의 천도기도를 봉행하였다. 참으로 무섭도록 정성이 깊은 분이었다.
만 10년이 되던 해 초봄, 처사가 아미타불을 부르고 있을 때 눈앞에 큰 배가 나타났다.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물인지 육지인지 공중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배는 백 미터 가량 앞쪽에 있었다. 배 안에는 수갑과 족쇄를 차고 있는 이들이 수백 명이나 있는 듯하였고. 부모님의 모습도 어렴풋이 보였다.
정경남 처사는 부모님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미타불만 열심히 불렀고 약 10분가량 경과했을 때 배가 눈앞으로 다가왔으므로 배 안의 모습을 매우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부모님의 손과 발에 채워졌던 수갑과 족쇄가 풀어지면서 기쁨에 가득 찬 모습으로 두 분이 손을 잡고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것이었다.
곧이어 배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수갑과 족쇄도 풀어지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너울너울 날아가고.어떤 이는 걸어서 떠났다. 모두가 고통이 가득한 배에서 벗어나 동서남북 사방과 하늘로 흩어져 간 것이다.
이상의 이야기를 들려준 정경남 처사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에게 물었다.
"스님, 이제 우리 아버지 어머니께서 좋은 나라로 가셨다고 믿어도 되겠지요?"
정경남 처사의 부모님은 가장 좋은 나라인 극락세계로 가셨음이 틀림없다. 아미타불의 원력과 처사의 지극한 정성이 하나가 되었으니 어찌 천도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염불하는 사람은 공경恭敬, 지성심至誠心으로 자자구구字字句句 마음속으로 또렷이 염念하고 입으로 또렷이 염하여야 한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망념妄念이 전혀 없지는 않아도 망념은 그리 많지 않다. 매우 많은 사람들은 단지 빨리 많이 하려고만 하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읽기 때문에 효과가 없다. 마음을 거두어들일 수 있어야 진실한 염불하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대세지보살께서는 자식이 어머님을 생각함을 비유로 삼아 자식이 마음속으로 어머님을 생각하기만 하고, 그 나머지 경계는 모두 자기 마음속 일이 아닌 까닭에 감응도교할 수 있다 하셨다. ㅡ인광대사 문초 청화록 p143 비움과소통
세상의 혼란이 극에 달하여 사람들은 각자 다스리기를 바라지만, 그 근본을 알지못하고 헛되이 노력하는데, 근본이 어디에 있는지를 마땅히 알아야합니다. 가정에서 어머니가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어진 인재가 많이 나고 천하가 태평하게 되는 근본입니다. 여기(가정교육)에서 구하지않으면 어찌 잘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가르침의 첫째는 태교(胎敎)이며 태교는 곧 기질을 받는 시초입니다. 무릇 여인이 임신한 후에는 마음을 쓰고 일을 행하는데 있어 오직 진실하고 삼가야하며, 하나하나의 동작과 움직임[一擧一動]에서 바름을 잃지않아야합니다. 더욱 오랫동안 육식과 오신채를 끊고 매일 염불하면, 태아가 어머니의 정기(正氣)를 받게되며, 태어날 때 반드시 고통없이 안락할 것입니다. 태어나는 아들과 딸은 반드시 상모가 단엄하고 성정이 자비롭고 착하며 총명함을 타고 날 것입니다.
처음 지식을 배울 때 사람이 되는 도리를 가르쳐야합니다. 효도, 우애, 충성, 믿음, 예절, 의리, 청렴, 부끄러움 등과 삼세인과의 죄와 복, 육도윤회의 변화를 가르쳐 그의 마음속에서 항상 두려워함과 바라는 바를 가지게해야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을 염하고 관세음보살을 염하여 복을 증장시키고 수명을 늘리며 재난을 피하게하고, 거짓말을 하고 시비를 말하고 남을 때리고 욕하는 것을 하지못하게해야합니다. 글자가 쓰인 종이를 함부로 밟거나 못쓰게 망가뜨리지 않게하고, 오곡이나 일체의 물건을 못쓰게하는 행위를 금해야합니다.
음식물을 함부로 먹거나 아이들에게 유희를 하지못하게 합니다. 더 커서는 태상감응편, 문창음즐문, 관제각세경(關帝覺世經)을 읽게하여 그 내용을 본받게하고 지키게하여야할 것입니다. 자녀에게 이 책들의 대의를 자세히 설명하면 후에 학문을 배우는데 큰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항상 말해왔습니다. 자식을 잘 가르치는 것이 천하태평의 근본이며 딸을 잘 가르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어렸을 때는 오로지 어머니의 가르침에 의지하는데, 아버지는 항상 집안에 있을 수 없지만 어머니는 항상 자식을 떠나지않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어질고 지혜로우면 자식들의 언행이 법도에 맞고 견문이 성숙하여 마음에 규율이 있고, 게다가 항상 훈계하면 좋은 습관이 듭니다. 마치 쇠를 녹여 기물을 만드는 것과 같이 거푸집이 좋으면 기물은 절대로 좋지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딸을 잘 가르치는 것이 아들을 잘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현명한 어머니는 현명한 여자로부터 나는데, 만약 현명한 여자가 없으면 어찌 현명한 어머니가 나오겠습니까? 현명한 어머니가 없으면 어찌 현명한 자녀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매우 평범한 도리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정토 법문은 이치는 지극히 높고 심오하지만, 그 일은 몹시 간단하고 쉽다오. 그래서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지견이 탁월한 사람들은, 정토 법문을 그저 어리석은 범부 중생의 일로 깔보고 수행하려 들지 않소. 정토 법문이 시방 삼세 모든 부처님께서, 위로 불도를 성취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는, 맨 처음이자 맨 끝인 궁극 법문인 줄은 그들이 어떻게 알겠소?
어리석은 범부 중생도 닦을 수 있다고 정토 법문을 깔보는데, 그렇다면 화엄경은 어찌 보지 않는단 말이오? 보현보살과 같이 이미 증득한 경지가 부처님이나 다를바 없는 보살들도, 오히려 십대원왕(十大願王)으로 서방 극락세계 왕생을 회향하여 부처님 과위를 원만히 성취하려고 발원하지 않소? 정토 법문을 깔보고 닦으려 하지 않는 자들은 화엄경의 이 내용을 또 어떻게 간주할지 궁금하오. 역시 깔볼 것이오? 아니면 존중할 것이오?
이는 다름이 아니라, 보통 법문과 특별 법문의 차이, 자력(自力)수행과 불력(佛力 : 他力)수행의 규모 및 난이도를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초래된 결과라오. 그 차이를 상세히 알고 나서도 화장해중(華藏海衆)의 행렬에 끼어 함께 극락 왕생의 길에 나서지 않을 수 있겠소?
나는 일찍이 머리를 묶고 글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한유ㆍ구양수(歐陽修)ㆍ정자ㆍ주자가 강렬히 주장한 벽불론(闢佛論 : 척불론)의 해독을 심하게 받았소. 다행히 내게는 한유ㆍ구양수ㆍ정자ㆍ주자같은 재주가 없었소. 만약 조금이라도 그들을 따라갈 만한 재주가 있었던들, 틀림없이 자신과 남들을 함께 망치고, 살아생전에 아비지옥에 빠져 들었을 것이오. 십사오 세 때부터 질병으로 몇 년간 심하게 고생했는데, 그때부터 고금의 뭇 경전들을 두루 펼쳐 보면서, 비로소 한유ㆍ구양수ㆍ정자ㆍ주자가 이러한 벽불론을 주장한 것이 순전히 특정 문중(파벌)의 지견에 불과하고, 성현의 심오한 중용의 도에 입실(入室)한 경지가 절대로 아님을 알아차렸소.
약관(弱冠 : 스무 살)의 이듬해 출가하여 스님이 된 뒤, 오로지 정토 법문수행에 전념했소. 그리고 이 한평생 다하도록 스스로 생사를 끝마치는 사나이(自了漢)가 될 뿐, 문중을 세워 제자와 신도를 널리 불러 모으는 짓은 하지 않기로 서원했소. 후세의 법자손(法子孫)들이 불법을 파괴하면, (스승의 연대 책임으로) 나까지 아비지옥에 끌려들어가 함께 고통을 받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오.
광서(光緖) 19년(1893) 보타산(寶陀山 : 관세음보살의 도량으로 유명함) 법우사(法雨寺) 화문(化聞) 화상이 북경에 들어가 대장경을 청하면서, 나에게 조사해 인쇄하라고 분부했소. 일이 끝난 뒤 그의 요청으로 함께 보타산에 왔는데, 내가 일하기 좋아하지 않는 줄 알고는, 작고 한가한 방에 머물며 내 뜻대로 수행하라고 배려해 주어, 지금까지 벌써 35년을 지냈소. 산에 오래 있다 보니 더러 붓으로 글 쓰는 일을 부탁받긴 했지만, 인광(印光)이란 이름자는 절대로 쓴 적이 없소. 설사 반드시 자기 서명을 해야 할 경우가 있더라도, 단지 아무렇게나 두 글자를 썼을 따름이오. 그래서 20년 동안은 나를 방문하는 객이나 서신 왕래 같은 번거로움이 전혀 없었소.
중화민국 기원이 시작되면서, 고학년(高鶴年) 거사가 내 글 몇 편을 가지고 가서 불학총보(佛學叢報)에 실었는데, 그 때도 인광이란 이름은 감히 쓰지 않았소. 내가 늘상 ‘항상 부끄러운 중(常慚愧僧)’ 이라고 스스로 불렀기 때문에, 그냥 ‘常慚’ 이라고만 썼소. 서울여(徐蔚如) 거사와 주맹유(周孟由) 거사가 내게 대단한 식견이 있는 줄로 착각하여 3~4년간 연락했지만, 전혀 아는 사람이 없었소.
그 뒤 주맹유가 산에 찾아와 인사하며 내게 귀의하겠다고 원하며, 못쓸 원고 몇 편을 가져다가 서울여 거사에게 보내, 북경에서 인쇄하여 인광법사문초(印光法師文鈔)로 출판했다오. 그래서 군자들의 우아한 눈을 널리 자극하게 되어 부끄러움만 더욱 늘어났는데, 그 때까 민국 7년(1918)이었소.
이듬해 또 약간의 글을 모아 속편을 만들고, 초판과 함께 인쇄했소. 민국 9년 상해상무인서관(上海商務印書館)에서 두 책으로 조판한 뒤, 이듬해 봄 책이 나왔소. 내가 또 양주(揚州)에서 9년 조판한 글을 4책으로 인쇄했소. 민국 11년 다시 상무인서관에서 4책으로 찍었는데, 당시 여러 거사들이 2만부나 인수해 갔으며, 상무인서관에서 판매한 책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소. 민국 14년 다시 중화서국에서 증보서판을 역시 4책으로 찍었는데, 전보다 백쪽 남짓 늘어났소.
올 여름 발행하는데 노동운동 등으로 가격이 몹시 비싸져, 단지 2천부 밖에 못 찍었소. 원래 4부의 지판(紙版 : 원판 지형)을 만들어, 2부는 서국에서 보존하고 2부는 내게 주기로 했소. 그래서 내가 항주(杭州) 절강인쇄공사(浙江印刷公司)에 우선 1만부를 인쇄하라고 부탁하고, 이후 추가 인쇄는 모두 인연에 맡기기로 하였소.
원정(圓淨) 거사 리영상(李榮祥)이 근래 몇 년간 불학에 전념하여, 기신론ㆍ능엄경ㆍ원각경 등에 소해((疎解 : 주석 해설)를 달았소.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했소.
“젊은 사람이 우선 실용적인 염불 공부에 착수하여, 업장이 말끔히 해소되고 지혜가 밝아지며 복덕이 높아질 때를 기다린 다음 발휘해야, 부처님의 뜻을 저절로 밝게 이해하고 우주에 널리 전파할 수 있소.”
당시에 그는 아직 내 말을 옳게 믿지 않았소. 나중에 마음을 지나치게 써서 몸과 정신이 날로 쇠약해지자, 비로소 내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오. 그리고는 나의 문초(文鈔)를 상세히 열람한 뒤, 환희심을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중요한 내용만 간추려 부문별로 분류하여 1책을 편지하였소. 우선 신문용지로 1천책을 인쇄하여 시급히 바로 귀의했는데, 8월에 책이 나와 얼마 안 되어 모두 증명하였소.
편지로 책을 요구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마침내 조하경감옥서(漕河涇監獄署)에서 다시 조판하도록 했소. 진적주(陳荻注) 거사가 조판을 맡고 4부 지판 비용과 2천부 인쇄비용을 부담하겠다고 나섰소. 그렇게 인수한 책이 2만부 가까이 되었소.
간추린 내용의 출처는 몇 권 몇 쪽까지 일일이 기재하여, 문초의 원문과 서로 대조할 수 있게 하였소. 여러 글 가운데 중요 내용만 간추려 한데 모은 것이라, 내용이 좀 비슷해도 삭제하지 않았으므로, 독자에게 반복해서 권장하는 이점이 있겠소. 그 자리에서 의심을 끊고 믿음을 일으키길 바라오.
또 문초는 좀 번잡하고 많아서, 초심자에게 쉽게 이해되고 근기에 맞는 내용을 가려 주기가 어려운 점이 있소. 그래서 먼저 입문처를 찾아 주고, 거기서부터 착실히 수행에 정진해 나가도록 도와주면, 처음부터 손댈 곳도 몰라 망연자실하고 물러서는 폐단이 훨씬 줄어들 것이오. 이러한 연유를 간단히 적어 독자들이 함께 참고하길 바라오.
소원이 있으니, 보고 듣는 사람들이 내용상 너무 평범하고 일상적이다고 내팽개치며, 고상하고 심오하며 미묘한 것만 찾으려 하지 말라는 점이오, 요순의 도는 효도와 우애일 뿐이며, 여래의 도는 계율과 선정과 지혜일 따름이오.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을 착실히 행하여 지극해지면, 고상하고 심오하며 미묘한 이치를 따로 구할 필요가 없소. 그렇지 않으면 고상하고 심오하며 미묘한 이치가 구두선(口頭禪)에 불과하고, 생사(生死)가 닥칠 때 조금도 쓸모없게 되오.
일단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을 함께 갖추었으면, 이제 염불의 기본 수행을 닦아야 하오. 믿음과 발원을 선행 안내자로 삼고, 염불을 기본 수행으로 삼는 것이오. 믿음과 발원과 수행, 이 세 가지가 염불 법문의 필수요건이라오. 수행이 있어도 믿음과 발원이 없으면 왕생할 수 없고, 반대로 믿음과 발원만 가지고 수행을 안 하면 역시 왕생할 수 없소.
믿음(信)과 발원(願)과 염불 수행(行) 세 요건이 솥발처럼 (삼위일체로) 빠짐없이 함께 갖추어져야, 극락왕생이 틀림없이 결정되오. 왕생할 수 있는지 여부는 온전히 믿음과 발원의 유무에 달려 있고, 연화의 품위(品位) 고하는 전적으로 부처님 명호를 염송한 깊이에 달려 있소.
염불의 기본 수행(正行)은 각자 자기의 신분에 따라 정하며, 어떤 특정의 방법 하나에 집착해서는 안 되오. 자신에게 특별한 일이나 부담이 없는 사람 같으면, 마땅히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시 저녁부터 아침까지, 앉고, 눕고, 서고, 말하고, 옷 입고, 밥 먹고, 대소변 보건 간에, 모든 때와 모든 장소에서, ‘나무아미타불’ 이라는 한 구절 위대하고 거룩한 명호를 항상 마음과 입에서 떠나지 않도록 염송하는 것이오.
손과 입을 깨끗이 씻고 의복을 단정히 입었으며 장소가 청결하기만 하면, 소리 내어 낭송하든 조용히 묵송하든 어떻게 해도 괜찮소. 그러나 잠자리에 들었거나, 옷을 벗고 있거나, 목욕하거나, 또는 대소변 보는 때 및 더럽고 지저분한 곳에서는 소리 내어서는 안 되고, 단지 묵송하는 것이 좋소. 이런 경우에 묵송해도 염불공덕은 한 가지이며, 소리를 내면 부처님께 공경스럽지 못한 게 되오. 그렇지만 이러한 때와 장소에서는 염불할 수 없다고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되오. 단지 소리 내어 염불할 수 없다는 것뿐임을 염두에 두시오. 특히 잠자리에 들어 소리를 낼 것 같으면, 단지 공경스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기(氣)를 손상시킬 수 있으니 꼭 유념해야 하오.
또 염불은 장기간 끊임없이 지속해야 하오.
새벽에 부처님을 향해 예배(禮拜)를 드리고, 먼저 아미타경 한 번과 왕생주(往生呪) 세 번을 독송하오. 그런 뒤 ‘아미타불신금색(阿彌陀佛身金色)’으로 시작되는 8구절의 찬불게(讚佛偈)를 염송하고, ‘나무서방정토극락세계대자대비 아미타불’을 한 번 염송한 뒤, 이어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 명호만 1천 번 또는 5백 번을 염송하오. 염불할 때는 주위를 돌면서 하되, 돌기가 불편하면 꿇거나 앉거나 서거나 모두 괜찮소. 염불이 끝날 때는 다시 본 자리로 돌아와 꿇어앉아,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과 청정대해중보살(淸淨大海衆菩薩)을 각각 세 번씩 염송한 다음, 정토문(淨土文)을 염송하며 극락왕생을 발원 회향하면 되오.
정토문을 염송하는 것은, 글의 뜻에 따라 마음을 내자는 것이오. 만약 마음이 글의 뜻에 따라 서원을 일으키지 않으면, 내용 없는 빈껍데기 글이 되고 말아, 실질 이익을 얻을 수 없소. 정토문 염송이 끝나면, 삼귀의를 염송하고 부처님께 예배드린 뒤 물러 나오는데, 이것이 아침 공과(朝時功課)라오. 저녁때도 이와 똑같이 하면 되오.
만약 예배(禮拜)를 많이 하고 싶은 경우에는, 염불을 마치고 제자리에 돌아올 때 부처님께 마음껏 절을 올리고, 세 보살을 세 번씩 염송하며 아홉 번 예배드린 뒤 회향하면 되오. 아니면 공과(功課)가 모두 끝난 뒤, 자기 형편껏 예배(절)하는 것도 괜찮소. 단지 간절하고 지성스럽게 해야 하오. 그저 대충 해대거나 방석을 너무 높이 깔면 공경스럽지 못하게 되오.
만약 일이 많고 바빠서 한가한 여유가 없는 경우에는, 새벽에 세수와 양치질을 한 뒤, 부처님 계시면 세 번 예배드린 다음, 몸을 단정히 하고 공경스럽게 합장하여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시오. 이때 한 번 호흡(一口氣)이 다하는 동안을 한 번의 염불로 하여 열 번 호흡까지 반복하고, 짧은 정토문을 염하거나 ‘원생서방정토중(願生西方淨土中)’의 4구 게송을 염송한 다음, 부처님께 세 번 예배드리고 마치면 되오. 부처님이 안 계시면 서쪽을 향해 정중히 문안드린 다음, 앞에서 말한 대로 염불하면 되오.
이것이 바로 십념법(十念法)인데, 송나라 때 자운참주(慈雲懺主)가 국왕가 대신 등 정무(政務)가 번잡하여 수행할 겨를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특별히 세운 방편이라오. 어째서 한 호흡이 다하도록 염불을 시키는가 하면, 중생들의 마음이 산만하여 전념(專念)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라오. 이렇게 염불할 때는 호흡(氣)을 빌려 마음을 추스르므로,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을 수 있소.
그러나 각자 호흡의 장단에 따라 자연스럽게 해야지, 억지로 호흡을 길게 늘여가며 염불을 많이 하면 절대 안 되오. 억지로 하면 기(氣)를 손상시키기 때문이오. 또 십념에서 그쳐야지, 이십념, 삼십념까지 너무 많이 해도, 기를 손상시키기 쉽소. 산만한 마음으로 염불하면 왕생하기 어렵다오. 이 염불법은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킬 수 있어서, 일심으로 염불하여 결정코 왕생하자는 뜻이오. 염불의 횟수는 비록 적지만, 그 공덕은 자못 깊소. 아주 한가하거나 몹시 바쁜 경우에 각각의 염불법이 제시되었으니, 반쯤 한가하고 반쯤 바쁜 사람은 스스로 자기 형편에 맞춰 적당한 수행 방법을 마련하면 될 것이오.
염불법문은 세속 티끌을 등지고 깨달음을 향하여, 본래 근원 자리로 되돌아가는 최고 제일의 미묘한 법이오. 특히 재가 거사 신분에게 더욱 친밀하고 절실하다오. 재가 불자나는 몸이 세간 그물 안에 있으면서 수많은 사무에 시달리기 때문에, 마음을 가라앉혀 참선을 하거나 고요한 방에서 독경을 할 시간과 정신력의 여유가 거의 없소.
오직 염불법문만이 가장 편리하고 적합하다오. 아침 저녁으로 부처님 앞에 자기 분수와 능력에 따라 예배 드리고 염불하며 회향 발원하면 되오. 이밖에 길을 다니거나, 머무르거나, 앉거나, 눕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옷을 입거나, 밥을 먹거나, 모든 때와 모든 장소에서 구애받지 않고 염불하기가 좋소.
늙은 여인이 말하였다. “사람의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색(色)이나, 아픔이나 가려움이나, 상(想)이나, 행(行)이나, 식(識)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눈․귀․코․혀․몸․마음(眼耳鼻舌身心)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땅․물․불․바람․허공(地水火風空)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老母言:‘人生、老、病、死從何所來,去至何所;色、痛痒(통양)、思想、行、識從何所來,去至何所;眼、耳、鼻、舌、身、心從何所來,去至何所;地、水、火、風、空從何所來,去至何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의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다. 색(色)이나, 아픔이나, 상(想), 행(行)․식(識)은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다. 눈․귀․코․혀․몸․마음(眼耳鼻舌身心)은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다. 땅․물․불․바람․허공(地水火風空)은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느니라.” ’佛言:‘人生、老、病、死無所從來,去亦無所至;色、痛、想、行識無所從來,去亦無所至;眼、耳、鼻、舌、身心無所從來,去亦無所至;地、水、火、風、空無所從來,去亦無所至。
이어서 말씀하셨다. “모든 법이 이와 같나니, 비유하면 두 나무를 서로 문질러 불을 내면, 불은 도리어 나무를 태우며, 나무가 다 타면 불은 곧 꺼지는 것과 같다.” ’佛言:‘諸法亦如是,譬如兩木相鑽(찬)出火,火還燒(소)木,木盡火便(편)滅。
늙은 여인은 대답하였다. “인(因)과 연(緣)이 모여 불이 일어났고, 인과 연이 흩어져서 불이 꺼졌습니다.” ’老母報佛言:‘因緣合會便得火,因緣離散火卽滅。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법이 이와 같아서, 인연이 모여서 이루어지고, 인연이 흩어져서 없어지는 것이며, 모든 법은 또한 온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으니, ’佛言:‘諸法亦如是,因緣合會乃成,因緣離散卽滅,諸法亦無所從來,去亦無所至。
눈으로 좋은 색(色)을 보면, 곧 마음[意]이요, 眼見好色,卽是意。
마음은 곧 색이니, 두 가지가 모두 공한 것이요, 이루어질 것이 없으며, 없어짐도 또한 이와 같다. 意卽是色,是二者俱空,無所有成,滅亦如是,
모든 법은 비유하면 북(鼓)이, 한 가지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사람이 북채를 가지고 북을 쳐야, 소리가 나는 것 같나니, 諸法譬如鼓(고),不用一事成,有人持捊捶(지부추)鼓,鼓便有聲。
북소리, 또한 공한 것이다. 미래의 소리도 공하고, 과거의 소리도 역시 공한 것이다. 이 소리는 또한 나무나 가죽이나 북채에서 나옴도 아니요, 사람의 손에서 나옴도 아니며, 여러 가지가 모여서 비로소 북소리를 이룬 것이다. 소리는 공에서 나와서 공으로 사라지는 것이며, 是鼓聲,亦空. 當來聲亦空,過去聲亦空,是聲亦不從木革捊(혁부)人手出,合會諸物乃成鼓聲,聲從空盡空。
온갖 만물도 모두 이와 같으니라. 또한 우리들의(我, 人) 수명도 이와 같아서, 본래는 (모두) 깨끗하여 가진 것이 없으며, 나아가서 법을 만들 인(因)이 있는 것도 아니며, 법도 또한 있는 데가 없나니, 諸所有萬物一切亦如是,我、人、壽命,亦如是,本際皆(제개)淨無所有,從無所有因作法,法亦無所有。
비유하면 구름이 일고, 캄캄해지면 곧 비가 오는데, 비는 용의 몸에서 나온 것도 아니요, 또한 용의 마음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모두가 용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이 비가 만들어진 것인 것과 같다. 譬如雲起,陰冥(명)便雨。雨亦不從龍身出,亦不從龍心出,皆龍因緣所作,乃致(치)是雨。
모든 법은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나니, 諸法無所從來,去亦無所至。
비유하면 화가가, 먼저 판부터 희게 하고, 그 뒤에 여러 가지 물감을 조화하여, 만드는 것과 같으니, 이 그림은 흰 판이나 물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뜻에 따라서, (다) 이루어진 것이다. 譬如畫師,先治板素,卻(각)後調和衆彩(채),便在所作,是畫亦不從板素彩出,隨(수)其意所爲,悉(실)成。
나고 죽음도 또한 이와 같나니, 제각기 다른 무리인 지옥이나, 짐승이나, 아귀나, 천상이나, 세간도 또한 그러하다. 生死亦如是,各各異類地獄、禽獸、餓鬼、天上、世閒亦爾(이)。
이 지혜를 이해하는 이는, 모름지기 유(有)에 집착되지 않느니라.” 有解是慧者,不著(저)著便有。
늙은 여인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크게 기뻐하면서, 혼자 말하였다. “하늘 중의 하늘의 은혜를 입고, 법안(法眼)을 얻었으니, 몸은 비록 늙고 쇠했지만, 이제야 편안함을 얻었구나.” 老母聞佛言大歡喜,卽自說言:蒙(몽)天中天恩,得法眼,雖(수)身老羸(리),今得安隱(은)。
아난은 옷을 여미고, 앞에 나가 길게 꿇어앉아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 늙은 여인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곧 해탈하였는데, 무슨 인연으로 지혜가 이렇습니까?” 阿難正衣服,前長跪(궤)白佛言:‘是老母聞佛言卽解,何因緣智慧乃爾?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큰 덕이 높고 높아서 그 때문에, 곧 해탈하였느니라. 이 늙은 여인은, 곧 전생에 내가, 보살의 마음을 내었을 때, 나의 어머니였느니라.” ’佛言:‘大德巍(외)巍,以是故而卽解。是老母者,是我前世、發菩薩意時,母。
아난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의 전생 때의 어머니라면, 무슨 인연으로 고달프고 가난하기가 이와 같습니까?” ’阿難白佛言:‘佛前世時母,何因困苦貧窮如是?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옛적 구류진(拘樓秦)부처님 때에, 내가 보살도(菩薩道)를 위하여, 사문이 되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사랑[恩愛] 때문에, 내가 사문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佛言:‘乃昔(석)拘樓秦佛時,我爲菩薩道意,欲作沙門,母以恩愛故,不聽我作沙門。
나는 근심하며 하루 동안 먹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전생과 후생과 내생의 세간에서, 5백 세(世) 동안 이와 같이 곤액을 당하느니라.” 我憂愁(수)不食一日,以是故前後來生世閒,五百世遭厄(조액)如是.
부처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셨다. “이 늙은 여인은 수명이 끝나면 아미타(阿彌陀)부처님 나라에 태어나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할 것이며, 그런 뒤 68억 겁이 지나면,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니, 이름은 부파건(扶波健)이고, 나라 이름은 화작(化作)이며, 옷이나, 음식은, 도리천의 것과 같을 것이고, 그 나라의 인민은, 모두 1겁(劫)을 살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경을 설해 마치시자, 늙은 여인과 아난 등 보살과, 비구승과, 여러 하늘․용․귀신․아수라 등이, 모두 크게 기뻐하며, 나아가 머리와 얼굴을 땅에 대어, 부처님께 절하고 떠나갔다. ’佛說經已,老母及阿難等菩薩、比丘僧、諸天、龍、鬼神、阿須倫,皆大歡喜,前以頭面著(저)地,爲佛作禮而去。
3. 마음 닦고 염불하는 수행의 요령 .. 119 1) 염불은 어떻게 하는가? .. 119 2) 업습의 기운[習氣]을 다스리는 방법 .. 131 3) 마음가짐과 품격 세움[存心立品] .. 157 4) 각 수행 방법에 대한 평가 .. 170 5) 수행인들이여, 힘써 노력하세! .. 185
4. 생사(生死) 해탈을 위한 보리심 .. 192 1) 사람 목숨 덧없음을 경책함 .. 192 2) 오로지 부처님 힘에 의지하길 권함 .. 194 3) 임종이 몹시 중요하고 절실함을 알림 .. 205 4) 임종에 갖추어야 할 지혜로운 배와 노[臨終舟楫] .. 215
5. 수행인의 마음가짐은 오직 정성과 공경! .. 221
6.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 240 1) 인과응보의 사실 .. 240 2) 인과응보의 이치 .. 247 3) 운명을 바꾸려는 노력이 진정한 수행 .. 257 4) 채식은 지계와 수행의 밑바탕 .. 263 5) 재앙의 연유를 아는가? .. 279
7. 염불과 참선은 본디 둘이 아니건만 .. 287 1) 영명(永明) 선사의 사료간(四料簡) .. 287 2) 참선과 염불의 관계 .. 303
9. 재가 수행 정진하여 거사 불교 꽃 피우세 .. 411 1) 유교와 불교의 윤리강상(倫理綱常) .. 411 2) 가정교육은 인생의 기초 .. 415 3) 집에서 불법을 잘 펼치세[處家弘法] .. 427 4) 홍진 속에서 도를 닦세[居塵學道] .. 433 5) 재가 불자를 위한 삼귀의와 오계·십선 .. 439
10. 극락왕생에 요긴한 나침반(경전)들 .. 448
11. 부록 .. 458 1) ‘시야우(柴也愚)’의 뜻을 밝힘 .. 458 2) 유혜욱(兪慧郁)·진혜창(陳慧昶) 거사에 대한 답신 .. 460 3) 우승(愚僧) 거사에 대한 답신 .. 464 4) 소혜원(邵慧圓) 거사에 대한 답신 .. 467 5) 왕심선(王心禪) 거사에 대한 답신 .. 468 6) 양기(楊?)의 등잔은 천추를 밝히고, 보수(寶壽)의 생강은 만고에 맵도다 .. 469 7) 인광(印光) 대사의 간략한 전기 .. 480
『화두 놓고 염불하세』는 그동안 화두선 일변도인 한국불교의 풍토에 염불수행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염불 수행의 요체를 총체적으로 밝힌 뛰어난 염불 법문집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문장을 더 다듬고 번역자의 내용 설명을 더욱 보충하여 독자들에게 새롭게 선보이게 되었다. 『화두 놓고 염불하세』에 실린 한 편 한 편의 글마다, 생사(生死)를 위해 보리심(菩提心: 求道心)을 내고, 믿음과 발원으로 염불하여 서방 극락 정토에 왕생하는 넓고 평탄한 길을 가르쳐 주었다. 아울러 절실하게 실천하여 평범함을 뛰어 넘고 성현의 경지에 들어가는[超凡入聖] 지름길로 닦아가라는 인광 대사의 간곡한 당부가 마음을 울린다.
책 속으로
염불할 때 마음이 하나로 잘 모아지지 않으면, 마땅히 마음을 추스르고[攝心] 생각을 절실하게 하오. 그러면 마음이 저절로 통일될 것이오. 마음을 추스르는 방법은, 지성과 간절보다 더 나은 게 없소. 마음이 지성스럽지 않으면, 추스르려 해도 별 도리가 없소. 지성을 다하는데도 마음이 순수하게 통일되지[純一] 않으면, 귀를 기울여 잘 듣도록 하시오. 소리를 내든 내지 않든, 염불은 모두 모름지기 생각이 마음에서 일어나, 소리가 입으로 나오고, 그 소리가 다시 귀로 들어가야 하오. 묵송의 경우 비록 입을 움직이지는 않지만, 생각의 차원[意地]에서는 이미 그 소리의 모습[相]이 있기 마련이오.
마음과 입으로 또렷또렷하게 염송하고, 귀로 또렷또렷하게 듣는다면, 마음이 오롯이 추슬러지면서, 잡념 망상이 저절로 사라지게 되오. 그런데도 더러 망상의 물결이 용솟음쳐 오르거든, 십념법(十念法)으로 횟수를 세어 보시오. 이렇게 온 마음의 힘을 고스란히 부처님 명호 염송하는 소리 하나에 갖다 바치면, 비록 망상을 일으키고 싶어도 여력이 없을 것이오. 이것이 마음을 추슬러 염불하는 궁극의 미묘 법문이오. - 본문 124쪽에서
염불은 그 자체가 정기(正氣)를 함양하고 정신을 조절하는 방법이자, 본래 진면목을 참구하는 법문이기도 하오. 왜 그렇게 말하겠소? 우리들 마음은 평상시에 어지럽게 흩어지는데, 만약 지성으로 염불을 하면, 일체의 잡념 망상이 모두 점차 사라지게 되오. 그러면 마음이 저절로 집중 통일되고, 정신과 원기가 자연히 충만해지고 조절된다오.
보통 우리는 염불이 잡념 망상을 쓰러뜨리는 줄 잘 모르오. 게다가 염불을 좀 해보면, 마음속에 온갖 잡념 망상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오. 그러나 오래도록 염불을 지속하면, 이러한 잡념 망상이 저절로 없어지게 된다오. 맨 처음 단계에 잡념 망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마음속에 파묻혀 숨어 있던 잡념 망상이 바로 염불하는 힘 때문에 비로소 고개를 쳐드는 거라오. 염불하지 않으면 나타날 리가 없다오. - 본문 135쪽~136쪽에서
예불이나 경전 독송, 주문(진언), 염불 등의 각종 수행은, 모름지기 모두 정성과 공경을 위주로 해야 하오. 경전에서 설한 공덕이 설령 범부 중생의 지위에서 원만히 얻어질 수 없을지라도, 만약 정성과 공경만 지극하다면, 그로 말미암아 얻는 공덕만도 이미 생각하고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크다오.
그러나 정성과 공경이 없다면, 배우가 노래 부르고 연극하는 것과 같을 뿐이오. 배우의 희로애락은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허위와 가식에 속하지 않소? 마찬가지로 정성과 공경이 없으면, 설령 공덕을 쌓더라도 인간과 천상의 바보스런 복덕[人天癡福]에 불과하게 되오. 이 바보스런 복덕은 반드시 악업을 짓는 원인이 되어, 장래 그칠 기약 없는 고통의 씨를 뿌리게 된다오. - 본문 223쪽에서
실행[行]이란 가르침에 따라 진실하게 행동해 나가는 것이오. 『능엄경(楞嚴經)』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염불삼매장(念佛三昧章)에 보면, “육근(六根: 눈·귀·코·혀·몸·뜻)을 모두 추슬러 깨끗한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져 삼매(선정)를 얻으면, 이것이 바로 제일입니다[都攝六根, 淨念相繼, 得三摩地, 斯爲第一.].”라는 말씀이 나온다오. 여기 보면, 염불 법문은 마땅히 육근을 모두 추슬러야 함이 잘 나타나오. 육근을 모두 추스르기 전에, 특히 두세 근만 우선 추스를 필요가 있소. 그 두세 근이란 바로 귀[耳]와 입[口]과 마음[心]을 가리키오.
‘나무 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여섯 글자 한 구절을 매 구절 매 글자마다 입안에서 또렷또렷[明明白白] 염송하면서, 마음속으로도 또렷또렷 염송하고, 그 염송 소리를 귓속에서도 또렷또렷 듣는 것이오. 조금이라도 또렷하지 않은 데가 있다면, 이는 곧 진실하고 간절한 염불이 못 되며, 잡념망상이 비집고 생겨나는 틈을 주게 되오. 단지 입으로 염송만 하고 귀로 듣지 않으면, 잡념 망상이 생기기 쉽다오. 그래서 염불은 매 구절 매 글자마다 또렷하고 분명해야 하며, (의미나 논리를 따지는) 사색을 해서는 안 되오. 그 밖에 간경(看經: 독경) 또한 마찬가지라오. 절대로 경전을 보면서, 다른 한편으로 분별하지 마시오. 분별하면 감정과 생각만 많아질 뿐, 얻는 게 적어지기 때문이오 - 본문 299쪽에서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참선보다는 정토 염불 수행에 전념하는 것이 마땅한 방법이오. 한 티끌도 물들지 아니한 마음 가운데서, 만 가지 공덕을 두루 갖춘 위대하고 거룩한 나무 아미타불의 명호(名號)를 지송(持誦)하는 것이오. 더러 소리 내어 염송하기도 하고, 더러 소리 없이 조용히 암송하기도 하되, 끊어짐이나 잡념 망상이 없도록 하오. 반드시 생각[念]이 마음에서 일어나, 소리가 자기 귀로 들어가면서 한 글자 한 글자가 또렷또렷 살아...
출판사서평
정토종 13대 조사이자 대세지보살로 추앙받는 인광 대사의 정토왕생을 위한 염불수행에 대한 간곡한 가르침
인광(印光) 대사(1861~1940)는 태허(太虛) 대사, 허운(虛雲) 대사 및 홍일(弘一) 대사와 더불어 근대 중국을 대표하는 4대 고승 중 한 분으로 꼽힌다. 근대 중국은 청나라 말엽에서부터 중화민국 초기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는데, 이 당시 중국은 극도로 혼란하고 불법(佛法)의 쇠퇴가 극심한 상황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염불수행법을 널리 전하면서 혼란기의 중국인들에게 마음의 평화와 위안을 주었던 인광 대사는 중국 정토종의 13대 조사이자 대세지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았다.
인광 대사는 평생 출가제자는 한 명도 받지 않고, 재가신자들에게 주로 서신으로 설법하였는데, 한결같이 믿음과 발원으로 극락왕생을 구하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대사를 따르는 재가자들이 대사의 서간문과 잡지 기고문을 모아 『인광대사문초』로 엮어 널리 보시하였는데 이 중에서 중요한 내용만 간추려 부문별로 분류하여 『인광대사가언록(印光大師嘉言錄)』을 편집하여 대중들에게 보시하였다. 『문초』는 초심자가 쉽게 이해하고 근기에 맞는 내용을 찾기 어렵지만, 『가언록』은 염불수행에 입문하는 사람에게는 입문처를 찾아주며 착실하게 수행정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수행을 오래 한 사람에게는 자칫 잊어버리기 쉬운, 수행법의 핵심을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불심 깊은 정토염불 수행자인 보적 김지수 교수님의 신심(信心)을 북돋우는 부드러운 번역과 상세한 내용 해설
인광 대사의 법문 중 핵심적인 내용을 간추린 『인광대사가언록』은 불심(佛心) 깊은 정토염불 수행자인 보적 김지수 교수님의 번역으로 2000년에 처음 한국 불자들에게 소개되어, 1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홉 번이나 거듭 인쇄하며 정토염불 수행을 널리 알려왔다. 『화두 놓고 염불하세』는 『가언록』을 번역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국의 불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중요한 교리나 용어를 상세히 해설하는 각주를 더하고 있다. 초판에서는 『실용불학사전(實用佛學辭典)』과 『사해(辭海: 上海辭書出版社, 1979년)』와 『실용대자전(實用大字典: 中華書局, 1982년)』을 참고하였고, 이번 개정판에서는 대만(臺灣) 불광산출판사(佛光山出版社)에서 발행한 불광대사전(佛光大辭典)의 전자본(電子本)을 활용하여 기존 각주를 보충하며 새로운 해설 각주를 더하였다.
『화두 놓고 염불하세』는 그동안 화두선 일변도인 한국불교의 풍토에 염불수행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염불 수행의 요체를 총체적으로 밝힌 뛰어난 염불 법문집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문장을 더 다듬고 번역자의 내용 설명을 더욱 보충하여 독자들에게 새롭게 선보이게 되었다.
『화두 놓고 염불하세』에 실린 한 편 한 편의 글마다, 생사(生死)를 위해 보리심(菩提心: 求道心)을 내고, 믿음과 발원으로 염불하여 서방 극락 정토에 왕생하는 넓고 평탄한 길을 가르쳐 주었다. 아울러 절실하게 실천하여 평범함을 뛰어 넘고 성현의 경지에 들어가는[超凡入聖] 지름길로 닦아가라는 인광 대사의 간곡한 당부가 마음을 울린다.
고향이 거제예요. 저의 부모님이, 아버지가 어부였어요, 배를 타고. 그래서 배를 타러 가면 3년 만에 한 번씩 오는 어부인데, 제가 태어난 그곳은 산과 들과 바다가 있는 아주 아름다운 곳이에요. 앞에 가면 바다 있고, 우리 살고 있는 넓은 들이 있고, 뒤에는 아주 아름다운 산이 있고. 마을 구성이, 동네가 가구수가 되게 많았는데, 가족공동체로 할아버지, 할머니, 다른 집도 할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뭐 이렇게 대가족 속에서 태어나서 그 동네도 하나의 가족공동체 구성으로 이렇게 살았던 거 같아요. 그래서 이 집 애도 이 집 애고, 이 집 애도 이 집 애라. 서로서로 봐주고 이렇게 다함께 공유 하고 분담하고. 이런 구조 속에서 제가 태어났어요.
우리 할아버지는 침을 놓는데, 소에게도 침을 놓고 사람에게도 침을 놓아서 고치는 할아버지였는데. 제 기억속의 할아버지는 갓을쓰고 하얀도포를입고, 어디를 갔다 오시기도 하고. 침을 놓으러 갔다 오셨던 거 같애, 침통을 들고. 그 다음에 아침 저녁에는 밭에서나 논에서 일을 하셨어. 일을 엄청 많이 하는 우리 할아버지였어. 우리 할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는 다 만주로 가셨답니다, 독립운동하러.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부터 홀로 컸대요, 동생들이랑. 그래서 늘 우리 할아버지는 집안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어요. 아버지 어머니가 만주로, 당신 아버지 따라 어머니가 만주로 갔지만, 독립운동을 하러 갔다고 생각해서 굉장히 긍지심을 가진….
저는 부모가 결혼하고 좀 늦게 태어났어요. 저가 맏이인데, 6년인가 있다가 태어 났대요, 굉장히 많이 바랬는데. 그렇게 태어났는데, 저희 할아버지가 제 태몽 꿈을 꾸신 거예요. 당신 생각에는 아들이라 보셨던 거 같애. 그 꿈이 매우 상서롭고 훌륭한 인재가 태어나는 꿈이었다고 당신이 인제 생각하신 거 같애.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가 태교를 너무 잘 하신 거예요, 며느리에게. 얘기를 들어보면 시골에서 농사도 짓고 막 이래야 되잖아요, 밭도 매고. 그런데 할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입태를 했다는, 들은, 알고 난 순간부터는 그다음 부터 안 시켰대. 김도 매러 나오지 마라, 개울도 여기서 여기로 펄떡 뛰어 건너지 마라. 태교를 잘했대요. 모든 손자손녀에게 다 그런 건 아니고, 당신이 태몽을 꿨기 때문에 이 아이는 필시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당신이 투자한 거죠, 그죠. 우리 집안을 이 아이가 살릴 거다. 항상 집안을 중요시 했는데, 거기서 우리 할아버지 생각에 ‘하, 뭣이 하나 태어나서 집안을 다시 세울라나’ 이렇게 생각을 하시고 투자를 하신 거 같애.
태교를 아주 잘 했대요. 어머니도 굉장히 정적이시고 해서. 제가 안전한 환경, 좋은 환경, 어머니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그런 안락한 환경에서 제가 잘 자랐고. 그 다음에 인제 거기가 바닷가니까, 그때 당시에 이런 시골이나 산골마을에는 먹을 게 없었다 그래요. 보리 뭐 이런 거 밖에는. 거기는 생선도 많고, 쌀, 보리, 산도 있으니까. 모든 게 다 풍요로워서, 그런 섭생이 매우 좋았던 거 같애요. 제가 정말 건강한 몸을 가지고 태어났거든요. 지금은 일을 하도 많이 해서 인제 이렇게 늙고 야위고 이랬지만, 굉장히 제가 팔도 엄청 굵고 건강한 몸으로 태어났는데. 태교를 정말 잘, 할아버지가,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해주셨고. 그 다음에 제가 태어나서 (아들이 아니라서) 많이 실망하셨지만, 그 이후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한테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고. 그러고 한 열 살 때까지는 정말 좋은 환경에서 제가 아주 잘 자랐어요.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올바르게 잘 컸어요. 스님이 아주 부지런하고 똘똘했대요. 심부름을 잘했대요. 담배 사와라 이런 것도 참 잘 사다주고. 그런 거 잘했대요. 그래서 동네사람들에게도 많이 귀여움을 받았던 거 같애.
할아버지의 한마디 스님이 성이 여가예요. 속가의 성이 여가인데, 우리 할아버지가 한 내가 여덟살 때나 되었을 때 우리 혈통에 대해서 말해줬어요. 여가는 중국 성이래요. 시조가 진시황인거야. 여불위1 아들이 진시황이잖아요. 우리 할아버지가 어린 나를 데리고 앉아서, “너는 황족의 피를 받았어, 니가 혈통을 잘 알고 살아야 해. 그러니까 공부도 잘해야 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돼, 착한 사람이 되어야 돼,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 해.” 그런 이야기를 한 거예요. 이 이야기가 끄트머리는 나중에 생각한 거고, 다른 건 다 없어지고, 사라지고, 딱 하나 남은 게. “너 혈통이 황족이다.” 이렇게 말한 게, 엄청난 자존감과 자긍심이 만들어 졌어요. 나 어른 되어서는 진짜 맞는지 족보를 막 이렇게 역사적으로 찾은 적이 있어요. 중국의 영화를 비디오로 다 갖다 빌려보면서 진짜 맞나, 여불위가 어떤 사람이고, 진시황이 어떤 사람인가 막 이렇게 찾아보려 애썼던 적이 있어요. 우리 할아버지 했던 말이 정말 맞나. 지금 가만 살펴보면, 아, 근거가 없는 얘기는 아니었고, 우리 할아버지가 왜 나에게 손자가 엄청 많은데 그런 얘길 했을까. 당신의 꿈이 이뤄지지 못한 상실감에 대해서 나한테 그렇게라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그때는 뭔 말인지 몰랐고, 어리니까. 아무 경위 없이 내 할아버지가 심각하게 했던, 그 진지하게 말했던 그 말씀을 제가 기억하고 그 단어자체만 가지고 스스로, 아, 나는 남과 다른 사람이구나. 딱 고 한 마디만 남아서, 이 거친 세상을 안 넘어지고 잘 살 수 있었던 거 같아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자빠져도 다시 일어나고. 그때 만들어진 자존감과 자긍심이 지금까지 내가 세상을 사는데, 그게 바탕이 돼요. 많은 사람들 사랑하게 되고, 돕게 되고. 그들의 고통을 통해서, 그들이 고통에서 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저들이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는 원초적인 바탕이 할아버지의 한마디가 아니었을까.
열 살 가장 「그 시절엔 왜 그리 먹을 게 부족했을까. 산천에 쑥이 자랄 때쯤엔 동무들과 산과 들을 분주하게 오갔다. 학교에 갔다 와서 주린 배를 안고 땔감을 하러 산에 가면 이 산 저 산에 창꽃이 피어 있었다. 낫도 팽개치고 창꽃을 한입 가득 따먹었다. 그러다 목이 마르면 옹달샘 물을 두 손 가득 채워 벌컥벌컥 들이켰다」 제가 열 살 때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학창시절에 가끔 선생님들이 너는 소설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해준 선생님이 한분 계시긴 해요. 그 선생님이 그리 말했다고 내가 소설가 되는가. 소설가가 뭔지도 모르는데 뭐. 꿈이 있었던 거 같진 않고, 그냥 아버지가 아팠기 때문에 나는 간호장교가 되고 싶었던 꿈은 있었어요. 간호 장교가 되고 싶다. 질병과 무관하진 않아요, 아버지가 아픔으로 해서. 그러나 인제 그런 간호장교의 꿈은 이루지 못했고.
열 살이 지나면서 아버지가 배를 타셨는데 사고가 나서 다쳤어요. 3년인가 4년 동안 아버지 투병을 하시게 되었는데, 그때 제가 가장 노릇을 했던 거 같애. 우리 할아버지 사는 집이 여기 있으면, 우리 아버지 둘째네 이쯤에 살아요. 여기서 한 십분 거리쯤에 살고, 또 작은집 있고. 큰집엔 할머니 할아버지 식구가 많고, 우리 집에는 분가를 해가지고 집을 짓고 아버지, 어머니, 나, 동생들 둘 이렇게 살았는데. 어머니가 아버지 간병을 하러 가야 되잖아요. 그때 제가 동생들 두 명 하고 저하고 셋이 이렇게 남게 되었는데. 할아버지가 가르쳐주는 대로 할머니가 가르쳐주는 대로 동생들도 키우고, 집도 관리하고, 동생 학교도 보내고, 저도 학교 가고. 저희가 밭이나 이런 게 많았어요. 어머니가 막 농사 짓다가 갔으니까. 그런 것 거두어들이고. 어머니가 키우던 소, 돼지도 키우고. 이런 거를 척척척 하면서 컸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학교 갔다 오는데, 그때는 공동우물에서 물을 먹었어요, 우물을 지나 가는데 동네 어른들이, “금이는”, 제 이름이 금이에요, 동네 금이에요,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거예요, “금이는 못하는 일이 없어, 쟤는, 뭐든지 잘해” 이렇게 말했어요. 제가 들으면서 지나가면서 기분이 엄청 좋았어요. 그때부터 나는 못하는 게 없고, 뭐든지 잘하려고 엄청 노력하는 사람이 됐어요, 그 말 한마디에. 어릴 때 말 한마디가 너무 중요한데.
어린 시절의 그런 부분들, 앞에가 탁 트인 바다와, 뒤에는 푸른 산과 넓은 들. 그런 환경적 구조도 제 영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어요. 제가 한 3~4년 동안 동생들하고 살면서 이렇게 동네 어른들이 다 도와주셨어요. 동네 어른들하고 살아가는 방법도 제가 배웠고, 소통하는 방법도 배웠고, 생존,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지도 배우고.
제가 중요하다 여기고 역할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어린아이들을, 젊은 사람들이 잘 낳지 않지 않습니까. 아기들 많이 낳으라고 권해드리고 싶고. 태교를 저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요. 태교를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미래지향적으로 잘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했던 입태와 열 살 때까지의 그 환경이 아무리 척박하고 어려운 환경에 놓여도 무너지지 않고 오뚝이처럼 끝없이 일어나서 이거를 풀어야지, 했던 배경이 됐어요. 어떤 아동심리학자가 열 살까지 그때 그렇게만 키워주면 그 다음부턴 지가 알아서, 자기 가져온 까르마에 따라서 자기 생을 개척해나간다, 이렇게 얘기했는데, 거기에 100% 공감을 하면서. 또 입태 시기에, 태어났을 때에 고통 받았던 아이들, 그래서 어른이 된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불행하거든요. 엄청 미약하고, 유약하고, 하여튼 장애가 많은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정말 태교가 너무 중요해. 어린 시절의 환경, 대상, 너무 중요해. 이런 것을 깨닫게 되죠. 그래서 지금은 그게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많이 말해줄려고 해요.
살아볼수록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제가 만나지 않습니까. 그럴 때 그 고통의 원인은 어디서 왔을까. 원인을 분석을 해봅니다. 이 고통의, 고통의 시작은 어디서부터 되었나. 그 다음 단계, 이 고통이 어떻게 무엇으로 인해서 확장 되었는가에 대해서 관찰 하고 분석하고 사유해보죠. 그랬을 때, 어릴 때 엄마 뱃속에 입태되는 순간부터 태어날 때 그 환경이 너무 중요했고, 그다음에 두 번째로 중요한 환경이 태어나서부터 열 살 때까지의 환경이 매우 중요했다. 이게 1차 단계, 1단계라 한다면. 2단계가 열 살에서 스무 살 때까지. 단계가 있는 거예요, 입태가 0살에서 태어날 때까지 그때가 우리가 불가에서 생유라 합니다, 생유. 입태에서부터 생유, 태어나서부터 열 살 때까지 딱 10년 보는 거예요, 만 10년 이잖아요. 이때가 한 인간에게는 너무나 이 인간이 행복해지는지 불행해지는지 그 삶의 방향, 질, 결, 모양, 형태가 거진 다 결정이 된다고 보면 될 거 같아. 그것은 뭘 근거로 얘기 해줄 수 있느냐면, 수많은 사람들을 상담하고 그들의 고통을 보면서 ‘아! 정말 중요하구나’ 알게 됐어요.
예배당 가는 길 만난 불교음악 「그 봄도 어제 같고, 그 여름도 어제 같다. 서른이 다 되어갈 무렵 그 봄날, 거리에는 연등이 달려 있었고, 나는 교회를 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초파일 연등이었다. 문득 레코드 가게에서 들리는 소리가 내 폐부에 박혔다. 처음 듣는 소리에 온몸이 전율했다. 교회에 갔지만 목사님 설교도 귀에 들리지 않고 오직 그 소리만 귓전을 울렸다」 집안 종교는 기독교였어요. 지금도 제 바로 밑에 동생은 목사고, 부인도 목사예요. 전생의 인연이라고 봐야죠.. 전생에 내가 아마, 전생에도 출가자였던 거 같아요. 근데 환경이 불교를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어서 접하지 못하다가, 처음으로 불교라고 하는 환경을 찰라 시간에 접한 거죠. 과거 생의 습기, 습관이 탁 재생된 거죠. 아무도 말 못했어요. 그땐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안 계셨지만, 제 출가에 대해서 아무도 저를 막을 수가 없었어요. 제가 너무 단호했기 때문에, 아무도. 저는 스스럼없이 거침없이 이 길을 갔어요. 지금까지 한 번도 뒤를 돌아보거나 옆을 돌아본 적이 없어요. 다음 생에도 이 길을 갈 거예요.
그 힘이, 그 토대가, 할아버지인 거예요. 할아버지 그 한 마디. 그 자긍심과 자부심. 한 마디가 어떻게 승화됐나 보니까. 내가 출가하면서 더 승화가 된 거예요. 일체중생들이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내가 힘이 되어주어야 하고, 내가 무언가 해주어야 된다는 이 사명감이 엄청 커진 거예요. 어떠한 역경이 있어도 이 길을 가야 되는 거예요. 안 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어린 아이들에게 부모가 주변에서 한마디가 그렇게 중요 하다는 것, 제가 새삼 느낍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만약 우리 할아버지가 그런 말을 안 했으면 나는 어떻게 이 고통을 극복했을까, 안 죽고 살 수 있었을까.
2. 길 위에서
소록도와 꽃동네 내가 출가하자마자, 내가 세상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실제로, 고통 속에 죽는 사람을 만나보게 되었어요. 내가 그때 되기 전에 할아버지 할머니 돌아가셨는데, 그분들은 그냥 연세가 다해서 자연스럽게 돌아가신 거고. 고통 받다 죽는 사람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고, 고통이 무엇인지, 그 다음에, 어떻게 하면 죽는 건지, 이런 거에 대해서 뭐랄까 객기가 발동했다 해야 되나, 이거를. 아니면 호기심이 발동했다 캐야 되나. 뭐 어떻게 말해야 될까. 그걸 너무 알고 싶었어요. 죽음이 뭔가, 어떻게 하면 죽을까, 얼마나 사람이 아프면 죽는지. 그래서 소록도를 갔는데. 정확하게 말하면은 그들이 나를 돌봤지, 그 환자들이. 사랑스런 눈빛으로, 화사한 미소로, 일그러지고 찢어져도 그 속에서 스님이라 고 얼마나 잘 보살피고 보호를 하는지. 거기서 알았어요. 인간은, 인간이 행복을 만들어 내는 데에서는 환경과 조건이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구나. 마음가짐이 중요하구나, 마음가짐이…. 그들이 뭐가 행복하겠어요. 그래도 한없이 그 삶을, 그 삶 안에서 행복을 만들어내고, 미소를 만들어내고, 사랑을 만들어내더란 말이지. 죽음은 그곳에서 잘 몰랐어요. 그곳에서는 행복에 대해서 알게 되었어요, 마음에 대해서 알게 되었어요. 아, 진짜 일체가 유심조4 구나. 원효스님이 말씀했던 것처럼. 그래, 마음이 이 세상을 창조하네, 사랑을 창조하고. 그것을 어렴풋이 알게 됐고.
꽃동네에 가서, 천주교 재단의 꽃동네에 가서 환자들을 만나게 됐고, 거기서 죽음을 알게 됐어요. 거기서는, 매우 경건하고 엄숙한 죽음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천주교 수사님 이나 신부님, 수녀님이 너무나 그쪽으로 잘 돌보는 모습들, 굉장히 엄숙하고 경건한 죽음, 존엄한 죽음을 만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인제 거기서 나와서, 암환자들을 만나게 되면서 저는 그때부터 지옥을 만나게 되지요. 암환자들을 돌보게 되면서, 호스피스를 시작하게 되면서, 이 세상에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있구나. 역부족인, 인간의 힘으로는 버틸 수 없는, 역부족인 고통이, 괴로움이 있구나. 그때는 스님이 한 서른 여섯, 일곱 살쯤이 됐는데, 그때부터 인생의 진한 맛을 보게 된 거죠. 말 그대로 똑 부러진 배를 타고 바다 한 가운데서 폭풍을 만난 거죠. 어떻게 안 빠져죽고 살아남았는지. 그때부터, 그때는, 마약도 많이 발달 안 하고, 암환자 치료법도 그렇게 개발이 별로 안 됐을 때라서 환자들이 고스란히 통증을 다 안고 죽었어야 하는 때예요. 그때가 1996년, 97년, 98년 이때거든요. 그때부터 시작이지, 그때부터.
생과 사의 기로를 지나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 안기듯 환자가 내 품에서 가만히 숨을 고른다. 스님 없는 동안에 혼자서 죽으면 어쩌나 너무 두려웠다는 말과 함께……. (중략) 아들의 죽음을 기다리는 어머니와, 홀로 자녀들을 챙기며 살아가야 할 아내……. 한 사람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의 삶이 내 마음을 이리저리 솓아놓았다」 5 「그들의 고통 앞에 어떻게 초연해질 수 있겠는가. 세월이 가면 갈수록 그들의 고통과 아픔의 늪 속에서 나는 함께 허우적거리며 울고 아프고 위로하고, 간호하고 동반자가 되어주며 허허 웃을 뿐이다」 2000년도에 청주에 정토마을 만들었는데, 정토마을 호스피스 센터를 만들었는데, 1년이면 백 명 이상 환자가 돌아가셨어요. 백 명이면 그 역사가 백 개예요. 그 [환자] 가족이 다섯이면, 그 역사가 다섯 개이면, 백 명이면 오백 개의 역사를 내가 만나는 거예요. 그 역사 속에서, 그 역사 책을 들여다보고 느끼는, 정말 정말 다차원적인 고뇌와 고통과 갈등과 번민들. 그때는 이렇게 분석하고 분류할 줄도 몰라, 온통 다 뒤집어쓰고, 같이 함께 아파하고 뒹굴면서,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섭섭하게[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라는 책이에요. 그것도 천분의 일이나 될까, 그 속에 담긴 것들이. 그냥 그 속에서 사는 거지, 그럭하고. 그때는 이들에게, 이들이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도와야 한다, 그 사명감으로 그걸 할 수 있었죠. 내가 곁에 있는 게 도움이 된다니까, 힘이 된다니까, 덜 무섭다니까.
「어떤 가르침을 얻게 하려고 이런 경험을 하게 하셨을까? 내 자신이 죽음의 문턱 까지 다녀온 다음에서야 비로소 환자와 가족들의 심정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의사의 한마디가 환자의 투병생활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2003년도에, 그때는 스님이 암환자만 돌봤던 게 아니고 에이즈 환자도 돌봤어요. 에이즈가 마지막에 굉장한 고통을 호소해요, 면역체계가 다 무너지면서 결핵부터 시작 해서 온갖 병이 다 생겨요. 그런 상태에서 고통이 너무 심하니까, 주사를 놓으려고 간호사랑 둘이서 어리버리하다가 같이 동시에 바늘에 찔렸어요. 그럼 50일 동안 약을 먹어야 돼요. 그 약을 먹으면서 나는 간이 많이 상했어요, 약이 너무 독해서. 간 때문에 생사가 좀 오고 갔죠. 50일 있다가 검사하니까, 에이즈에 걸리지 않은 걸로 판명이 나서, 그 이후에 계속 그 약 때문에 간이 많이 힘들어졌고. 한 2년 정도 걸렸어요, 회복하는 데. 지금도 많이 피곤하고 힘들면 간 수치가 좀 올라가고. 보호자들의 심정, 환자들의 심정, 그런 것들을 실질적으로 내가 경험, 내 문제로 경험하면서 깊이 체득해서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 좀 더 깊어졌죠.
「이곳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어 더욱 감사한 순간들이다. 오십이 넘은 지금에서야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이 선물로 다가온다. 그 고통이 무엇이든 내 작은 가슴으로 품어 안을 때마다 내 속에 있는 아픔까지 치유받는 느낌이다」 어떤 때는 내 삶 자체를 압도시킬 때가 있어요, 죽음이. 이런 죽음들. 내 삶을 그냥 잡아먹을 거 같은 압도적인 죽음. 내 삶을 압도시킬 만큼 강렬한 어떤 감정적인 부분들, 상황적인 부분들, 이런 부분들이, 발생할 때. 아마 다른 사람보다는 많이, 다른 사람이 열 번이면 나는 아마 삼십 번 될 거 같은데. 그렇게 어느 한시도 고요하고 조용할 날이 없을 만큼 이 복잡다단한 이 삶 속에서 그러한 일이 발생할 때, 그걸 저는 제 안으로 갖고 와서,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이 안에서 승화해내는 거 같아요, 그거를. 우리가 밥을 먹어서 몸에 자양분을 보내듯이 그걸 내 안으로 갖고 와서, 내 안에서 그것을 썩혀서 발효시켜서 긍정적인 부분으로 승화시켜내는 거 같아요. 이겨낸다, 견뎌낸다라고 하기 보다는, 승화시켜낸다. 감정에 빠질 때는 푸욱 빠지고, 빠진 줄 알고 퍼뜩 벗어나야죠. 슬퍼할 때는 온전히 슬퍼하고, 아파할 때는 온전하게 아파하되, 온전하게 경험하고 짧게. 그 다음에 인제 정리해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게 참 쉽지 않죠. 참 어려워요, 그죠. 우리가 상황에 압도되어 버리니까.
종교적인 측면도 없지는 않겠지만, ‘인간의 고통, 인간이 겪은 괴로움들을 보고 관찰하고 그것을 분석하고 이러면서 이 부분들을 누가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그것을 승화시켜내는 수밖에 없다. 억압해서 참아도 문제가 되고, 이것을 밖으로 드러내도 문제가 되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 안에서 이 폭탄을 터뜨 리지 않고, 잘 분해해가지고, 본래대로 회복시키는 게 가장 적합한 방법이다’ 라고 나 스스로 결정한 거 같애요. 수많은 고통을 보고 느끼며 경험하면서. 수많은 다차원적인 고통들을 실제로 경험하면서 얻은 답이 그것. 그 길만이 오직 살길이다. 이 고통을 벗어 나는 길이다. 표현을 한다 해도 파편이 튀고, 억누르고 억압한다고 해도 내가 심리적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 받을 것이기 때문에. 버리지도 못하고 가질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하나의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 뭐 때문에 이게 발생했는지 원인을 분석하고, 이것이 실질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분석해보고, 그 다음에 여기에서 버릴 것과 취할 것을 분류합니다. 분류해서, 버릴 것 버리고, 취할 것의 기준을 너도 좋고 나도 좋은 것을, 선택하는 거죠.
마하보디 교육원과 자재(自在)병원 「스님의 임종을 준비하던 중 뜻밖의 유언을 받아 쥐게 되었다. 나에게 병원을 지어 달라셨다. 숨을 몰아쉬며 피 같은 땀을 떨구면서도 스님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 (중략) “원력만 세워요, 내가 죽어서라도 도울게. 혼자 하게 두지 않고 내가 도울게. 시님아, 중이 이래 죽어서 되겄소. 노무 뱅원에서 (고개를 뒤로 젖혀 십자가를 보면서) 이래 죽어서 되겄소. 나는 이래 가지만 다른 시님들은 이러면 되겄소. 다른 시님은 몰라도 시님이라면 할 수 있다.”」
「앞으로 이 병원을 통해 ‘죽음의 문화 바로세우기’ 운동을 전개할 생각이다. 죽음에 대한 사회의 영적 돌봄이 어떤 것인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우리 인간을 얼마나 가치 있게 하는지, 그것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리고 싶다」 내가 병원까지 짓는 것은, 센터를 짓는 것은 엄두도 못냈는데. 그 스님의 간절한 부탁과, 또 우리 불교계에 너무 필요한 시설이고 그래서, 어쩌다보니 총대를 내가 메게 된 거지. 마하보디교육원은 섭섭하게 책 팔아가지고 [만들었어요]. 하하. 책이 정말 많이 팔렸는데, 사람들은 다 병원을 짓자고 했는데, 저는 병원을 짓지 않고 이 교육원을 지었어요. 2007년에 이걸 지었어요. 정말 의견이 많았습니다, 비난과 비판이 막. 그래도 이걸 지었어요. 왜냐면 저들을 돌볼려고 하면 여기[마하보디교육원]서 그에 알맞은 교육을 시켜서 알맞은 영성을 갖추어줘야 저기[자재요양병원] 누워있는 사람들의 삶의 질이 높아지는 거지, 대책도 없이, 사람도 없는데 병원만 지으면 누가 사람을 돌봐요. 환자를 돌보는 건 사람인데. 그래서 사람다운 사람을 만들어서, 전인적인 아름다운 사람을 만들 어서 저기에 투입하겠다. 매우 전략적이죠. [여기 의사분들, 간호사분들] 다 교육받고 해요. 지금 만약 입사한다면, 여기서 교육 받으면서 일을 해요. 또 스님들도 계시고, 다양한 사람들이 와서 다양한 차원의 교육들을 받아요. 영적 돌봄가이신 스님들 다 여기서 교육 받아 나가서, 다 그런 존재들이 되어서 전국 각지 병원으로 가고.
명상심리대학원 석사과정이 있고, 사람의 영성과 고통을 돌보는 전문가를 배출 하는 CPEE라는 교육 프로그램도 있고, 그 다음에 인제, 호스피스 교육도 있고.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기도교육도 있고. 죽음, 임종의식 교육. 굉장히 많아요. 생사의 장이라고 5박 6일짜리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게 고통을 다루는 법이거든요. 고통을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해소하고, 집에 가서도 고통이 생길 때 덜어낼 줄 아는 방법을 배우는 프로그램인데, 올해 23년째 하고 있어요. 그 프로그램을 하고나면 많은 사람들의 삶의 변화가 오고, 관점의 변화가 오고, 건강도 좋아지고.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도 알게 되고, 죽음은 무엇인지,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도 알게 하는 교육이 생사의 장입니다. 5박 6일, 그 안에서 그거를 돌출해낸다는 건 대단한 거죠. 저번에 학생들도 중국에서, 미국에 서도 오고 이랬던데, 생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지 궁금해서 다 온 거예요. 누구에게나 다 필요해요. 아이들은 더 좋아요. 아이들은 절대 자살하지 않아요, 이런 교육 받으면. 떠나가는 사람은 잘 떠나가도록 도와야 하고, 떠나보내는 사람은 잘 떠나보내도록 준비 해야 하고. 떠나간 뒤의 그 빈자리, 그 아픈 자리에서 새 살이 차오를 때까지 우리가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는 거죠. 그러지 않으면 보내놓고 그 빈 자리에 빠져 죽어요. 얼마나 중요해요. 삶.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이 무엇인가. 스스로 발견해요. 죽음.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죽음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 답을 찾아요. 그 다음 에 길을 가는 거예요. 그때부터는 너무 잘 사는 거예요. 이거를 몇 마디 언어로서 스님이 여러분에게 설명해줄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그게 궁금하고 알고 싶은 사람은 생사의 장에서 공부를 하란 거예요. 울산시에 이런 아름다운 곳에 멋진 교육장소가 있잖아요. 최고로 공부 안 하는 사람이 울산 시민입니다. 최고로 자기 발전, 자기 번영, 자기 행복을 위해 투자 안 하는 동네가 울산광역시라고. 정말… 어디다 가치를 두고 사는지 몰라.
「완화의료를 전문으로 하는 자제병원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교과서가 되어주는 공간이 될 것이다. 죽음의 끝까지 배움의 여정으로 함께 가고, 또 더 높은 차원의 영적인 존재로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 곳, 모두가 희망을 얻어가는 곳. 언양에 뿌리내릴 자제병원은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공간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 언제가는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겠지만, 간접적인 경험도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자비로서 누군가를 건네준다’라고 처음에 이름을 그렇게[자제(慈濟)병원이라고] 지었는데, 그게 너무 오만한 이름인 거 같애. 난 내 자비로 단 한 사람도 건네줄 수 있는 게 없어. 스스로 건너도록, 스스로. 스스로 자유롭고, 스스로 죽음과 삶에서 자유로워지도록 내가 도울 뿐이지 내가 건네주는 게 아니었다, 라는 데서 이름을 스스로 자(自)자에다가 있을 재(在)자를 써서 스스로 건넌다, 단지 나는 징검다리에 불과하다, 내가 건네주는 게 아니고, 이 징검다리를 놓아주면 건너가기만 하면 되는 거지. 정토마을은 그저 힘이 되어 줄 뿐이다. 스스로 가야 한다. 그 말은 니가 스스로 수행해야 하고, 스스로 착한 마음 먹어야 하고, 착한 일 해야 되고, 마음씨도 잘 써야 돼, 이건 거예요. 책임을 개인에게 다 돌렸어요. 하하.
상북면 땅을 보고 여기다 싶었어요. 왜냐면 이 아름다운 산들과 이런 구조가 환자 들에게 많은 위안과 위로가 될 거 같고, 보호자들에게도. 실제 그래요. 우리 보호자들은 여기서 가슴이 턱턱 막히다가도 밖에 나오면 호흡을 하고 숨을 쉬어요. “하… 숨이 쉬어 진다” 이렇게. 호스피스라는 것은 환자뿐 아니라 보호자까지, 또 의사, 간호사 모두가 다 포함이 돼요. 한 사람을 돌보는 데, 모두가 다 그 스트레스에 놓이게 돼요. 한 사람 빠지는 사람 없어요, 다. 그들에게 이 공간이, 치유의 공간, 휴식의 공간, 숨을 쉬는 공간이고.
건립할 때 최고 어려웠던 점은,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여기가 기부를 받고 모금하는 단체잖아요. 모금하는 것도 힘들지만, 모금되어진 돈을 적절하고 적합하게 잘 쓴다는 게 저에게는 너무 어렵고 힘들었어요. 돈 하나가, 내 돈이 아니잖아요. 남의 돈을 써준다는 게, 그게 정말 엄청난 부담이고, 어려움이고 힘들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이 병원은 전 국민과 전 세계에 있는 교포들이 낸 돈으로 이게 지어진 거예요. 수를 헤아릴 수가 없어요. 이거 짓는 데 150억이 들었는데, 그 150억이 어떤 사람은 백 원 에서부터, 천 원에서부터 시작해서 수없는 돈들이 모여서 이게 만들어진 거예요. 돈이 많은 사람이 자기 돈 갖고 지은 게 아니라,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이걸 만든 거예요. 정말 가치 있는 거예요.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모금해서 이 병원이 울산 광역시에 섰다는 게 얼마나 기뻐요, 얼마나 좋아요. 울산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특히 환자들이게, 이게 기여했으면 좋겠어요. 저희 병원이 정말, 우리나라가 인정할만한 아름다운 병원이에요. 저 안에 있는 사람들도 아름다고. 저기 입원하는 환자들은 정말 복이 있는 거다.
서사와 대안이 필요한 울산 여러 교육을 하면서 제가 울산 사람들을 접하고 하면서 ‘아, 이분들은 어떻구나. 아,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구나. 울산 사람들은 그냥, 돈을 벌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에 주의가 너무 집중되어 있다. 지금은 1960년대 아니고, 80년대 아니기 때문에 벗어나서 조금 더 자유롭고 행복하고 또 단란한 삶을 추구할 수 있는데 너무나 사는 데 급급한 것이, 그것에만 욕망이 계속 활성화 되고 있다. 욕망이 중재가 안 되고 있다.’ 욕망이 절제되는 이슈가 이제는 필요할 거 같아요. 우리나라 경제는 10년 전에도 불경기, 20년 전에도 불경기였어요. 한번도 호황이었던 때가 없었어요. 우리가 어디에 기준을 두고 사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예요. 울산이 살기가 얼마나 좋아요. 바다, 산, 대숲, 태화강, 장미 공원….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데. 우리가 정말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 이 관점만 바꾸면 얼마든지 행복하고 질 높은 삶을 살 수 있는 울산 시민입니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얼마든지 즐기고, 가족이 단란하게, 행복하게, 너무 돈 추구하지 않아도 좀 아끼고 살면 되는데, 욕망이 절제되지 않다보니 이 갈애심이 끝없이 활성화 되다보니 끝이 없어요. 그래서 자폭하게 되는 거예요. 영적으로 폐허가 되는 거죠. 이혼하고, 별거하고, 이런 식으로 가정이 무너지죠. 울산시는 돈은 많은 도시인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인간이 행복한 도시일까. 특히 여성이 행복한 도시가 맞나. 여성이 행복한 도시 아닌 거 같아요. 돈도 벌고, 삶의 질도 올라가면 좋은데 이게 뭔가 어딘가 펑크가 났어. 돈은 많은데 이게, 삶의 질은 바닥을 쳐요. 여기서 다양한 결핍이 있는데 아동, 청소년, 노인,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정의 엄마가 행복해야 됩니다.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엄마가 과연, 울산광역시에 살고 있는 엄마들은 행복한가. 우리가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지도 서로가 머리를 맞대보고, 그게 해결이 되어야 아동 [문제]도 해결이 되고 노인[문제]도 해결될 수 있어요. 다문화 가정도 참 손 쓸 데가 많은데, 한국 가정의 모델을 보고 그들이 그대로 따라하기 때문에. 한국 가정이 바로 서야 다문화 가정도 바로 섭니다. 그런 철학을 가지고 우리도 행복한가? 행복하려면 뭘 해야 하지? 서사도 해보고 대안을 세워야 합니다.
상생(아스콘 공장 대표에게) 교레미콘은 안 들어오게 됐고, 아스콘 공장은 들어오게 됐다가, 건립 불허가 났는데. 어찌 보면, 개인적으로 보면 너무 미안해요. 그들에게는 가족이 있고 직원들이 있고 이런 측면에서 보면 정말 미안해요, 마음이 아프고. 얼마나 상심하고 힘들까, 이렇게. 또 다른 차원에서 보면,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이곳이 적합하지 않다라는 거예요. 산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 높은 산에, 그 미세먼지가 넘어가겠습니까, 못 넘어가죠. 그러면 내 수십 명이 돈을 벌어먹고 살기 위해서 수천 명이 자자손손 대대로 고통을 받을 거 아닙니까. 여기 사는 주민들의 고통을 예방하고, 완화하기 위해서 여기다 그거를 지으면 안된다라는 거예요. 한편으론 미안하고, 참 걱정이 되는 마음이 있어요. 얼마나 그들의 삶이 힘들까. 레미콘은 안 그런데, 아스콘에 대해서는 좀, 영세업자라서 마음이 가고, 아프고 미안하고. 얼마나 고민하고 고뇌할까. 정말 잘 되기를. 적합하고 적당한 땅이 나와서 그 사업이 정말 잘 되기를 바래요. 그렇지만, 나는 그 사업주가 크게 마음을 먹고 여기에 칠천 오백명이 살고 요 밑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그 사람들을 생각해서 좀만 더 양보하고 적당한 부지를 찾았으면 좋겠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또 사람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에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또 그게 되도록 울주군도 많이 도와주고 해서, 사업이 망하게 하는 게 아니라, 사업을 하되 안정적으로 할 수 있고, 인간도 서로 안정적 으로 살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그런 차원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만날 수 있으면 꼭 한번 만나보고 싶고, 이런 얘기 해주고 싶어요. 힘내어서 정말 적당한 부지가 생겼으면 좋겠고, 그런 부지에서 계속 사업을 잘 이루어갈 수 잇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꼭 해 주고 싶어요. 정말 지지해주고 싶고, 격려해주고 싶고, 기도해주고 싶어요, 잘 되길. 그럼 왜 이곳엔 안 되냐고 반문한다면, 너무 많은 사람이 살지 않냐, 그리고 젊은 아이들 이나 노약자들이 이 미세먼지 때문에 병에 걸리면 그에 대한 고통과 괴로움이 너무나 크다. 그 업을, 그 죄를, 그 사람이 다 받을 건데, 너무 가혹하다. 그래서 적당한 .. 적당하고 적합한 땅을, 내가 군수님한테 이야기 했어요, 적합하고 적당한 땅을 군에서도 찾아줘서 정말 성공적으로 사업을 잘 풀어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도 가족이 있고, 그 직원들은 또 다른 가족들이 있는데, 스님 어찌 그 생각을 안 하겠어요,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 [그러나] 요 언저리 사는 7,500명 주민들, 그리고 상북면 밑으로 언양 까지 그 많은 주민들의 생명의 고귀함을 생각한다면, 사장님께서 너그럽게 배려하고 내 생명이나 그 생명이나 차이가 없으니까, 소중함에는, 정말 좋은 마음을 가지면 좋은 땅이 좋은 곳에 나타나지 않을까. 그러기를 기도해요.
3. 기도
그 자체로도 기도 잖니 「깊고 깊은 산속을 그리며 청아한 자연과 샘물같이 맑은 영혼으로 걸림 없이 살아 가는 사문(沙門)의 꿈을 안고 출가를 하였다. 출가를 하고나서 몇 년이 지난 후 나를 돌아보니 깊은 산도 아니요, 너른 들도 아닌 사람들이 죽어가는 고통의 늪 중심에 서 있었다. 은사스님께서는 나에게 사문으로서 공부에 전념하기를 바라 셨지만 그 뜻을 따르지 못하고 나는 늘 환자들 곁에 있었다」 마흔한두 살 때까지는 늘 공부를 해야 된다고, 갈애심이, 늘 갈증이 있었어요. 어느 순간부터 ‘이 자체가 공부고, 이게 수행이고, 이게 전부다’ 라고 딱 알아진 순간, 깨닫게 된 순간에 그런 허기가, 갈증이 싹 없어졌어요. 이게 그 어떤 수행보다도 가치 있고, 그 어떤 수행보다도 더…. 원효스님이 해골의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를 깨달았듯이, 이 임상에서 끝없이 죽고, 죽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들의 역사를 통해서 내가 보고 듣고 배우고 깨달은 이것. 그래서 더 많은 연민과 더 깊은 사랑을 만들어내는 나.
이것이 더 훨씬 팔팔하게 살아있는, 살아있는 수행이에요, 돌아보니까. 모두가 다 이런 수행을 하고 싶어서 저런 수행을 하고 있는 거더라고요. 그 사람들 그렇게 수행하고 있는 것은, 이런 수행을 하고 싶어서, 이런 보살행을 하고 싶어서 그런 수행을 하고 있는 거더라고요. “스님 저는 기도할 시간도 없고 맨날 일만 하고 어떡해요” 이랬더니 어떤 스님이 “그 자체가 기도잖니, 그 자체가 수행이잖니, 거기서 뭘 더 바라냐. 너 삶 전체가 다 그냥 기도고 수행인데” [말씀하셨어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정말 새로운 세상을 발견 했어요. 내가 그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걸 몰랐구나.
다음 생 「죽음을 맞이하는 이가 다음 생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발원할 수 있도록 돕는 일도 불교 호스피스의 중요한 소임 가운데 하나다.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다음 생을 맞이하고 싶은지, 그러기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옆에서 조언해주고 지켜봐준다. (중략) 윤회는 선택이다. 다음 생에 어떤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일으키는 순간, 자신이 살아온 업성에 따라 그대로 이 세상에 재현되는 것이다. 어떤 삶의 주체로 태어나고 싶은가는 이생의 업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윤회의 삶도 그 연장 선상에 놓일 수밖에 없다」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는 부분에 대해서 한 5년 동안 고민 중에 있는데, 요 근간에는 이제 좀, 사실 태어나는 걸로 확정이 거진 90% 되어가고 있는 중이에요. 다시 태어나는 걸로. 이 고통 많은 세상에 그때는 다른 비전을 갖고 와서 인류에 기여하고 싶어요. 인류의 평화와 공존을 위해서. [다시 태어날지 아닐지는] 당연히 제가 정해야죠. 내 인생인데. [중생들도] 당연히 결정해야 되겠지. 결정 안 해서 그렇지. 스님 글에 보면, 대책 없이 살다가, 대책 없이 죽으면, 대책 없이 태어난다. 그래서 또 대책 없이 살다가 또 대책 없이 죽는다[는 내용이 있어요]. 응, 이게 업의 사슬이에요. 까르마의 사슬이에요.
죽을 때 말하는 건 이미 늦은 거예요. 늦어서 말빨이 안 서, 말의 힘이 없어. 지금 부터 건강할 때, 이 순간부터 다음 생 어떡할 건가 계획을 짜고 전략을 잘 세워서 성공적 으로 이끌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거예요. 안 그러면 대책 없이 또 흘러가잖아요. 그러니까 이 생도 삶이고 다음 생도 삶이기 때문에. 삶이란 이 자체는 현대어로 말하면 경영이라, 경영. 공장을 세워 돈을 벌려면 공장 세우기 전에 기획을 잘 하고 전략을 잘 짜야 되잖아요. 그리고 내 분수에 맞는 적합한 전략을 짜야 되겠죠. 분수는 항상 변화해. 어떻게 변하냐. 내 마음이, 마음 씀이 변하면 모든 게 다 변해요. 마음 씀이 변하면 마음 씨가 변하고, 마음 씨가 변하면 삶이 변하는 거예요.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는 거 같애, 그 어떤 것도 정해진 게 없더라. 찰나 찰나에 일어나고 경험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경험하고 사라지고 하는 것뿐이지. 정해진 것이 없어서 매우 희망적이지 않아요? 좀 불안하기도 하지만. 마음을 잘 써서, 마음 씨를 잘 만들면, 그게 아주 긍정적으로 변하겠죠. 희망적이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면 어떡하겠어요. 변합니다. 흘러가고, 다시 만들어 지고, 다시 경험하고, 흘러가고.
잘 살아야 잘 죽는다 「임종이 다가오면 지수화풍地水火風이 차례대로 무너진다.임종은 사람마다 다르다. 각자 지어온 업력에 따라, 그리고 마지막 종착역에서 어떤 마음으로 죽음을 대하는 가에 따라 죽음의 질은 천차만별이다. 잘 살아야 잘 죽는다. 그렇다면 어떤 삶이 잘 사는 삶일까?」
「천차만별의 다양한 죽음의 과정을 보며 ‘아! 잘 살아야 잘 죽는구나!’ 삶의 흔적들이 보여주는 진실은 죽음의 과정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많은 죽음을 보며 이제는 ‘어떻게 하면 잘 죽을까?’가 아닌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하루의 삶을 늘 챙기게 된다. ‘오늘 하루 아쉬움이나 후회는 없는가?’ 살피며 살게 된다. 진정으로 오늘 하루 잘 사는 것이야말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죽음의 근원이 됨을 알았기 때문이다」 잘 산다는 것의 기준이 없잖아요. 기준을 꼭 잡아야 한다면, 스님은,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이로운 삶이 잘 사는 삶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죽어야 잘 죽는 거냐 하면, 일단은 죽음의 과정에서 최소한, 고통이 최소화되어야 한다, 고통이. 심리적, 정신적, 영적, 사회적, 육체적 이 다섯 가지 고통이 최소화되어야 된다. 그런 환경과 그런 상황이 만들어 지는 게, 그게 정말 잘 죽어갈 수 있는 사항이에요. 그리고 마지막까지, 정말 죽을 때까지도 걱정과 근심과 고통과 괴로움에 시달리지 않고 편안하게 숨 쉬다가, 숨이 마감되는 그 순간까지 숨을 쉬면서 여유롭게 머물다 갔으면 좋겠다. 이게 내 생각에는 정말 잘 죽는 죽음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다양한 측면에서 죽음의 원인 주어지기 때문에, 그럴 때, 좀 더 나의 마지막이 안전하고, 존중되고, 존엄한 공간, 존엄한 환경에서 내가 여유 있게, 또 숨을 쉬면서 죽을 수 있었으면 죽겠어, 숨을 쉬면서. 숨을 쉴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는 죽음. 살다가, 숨이, 목숨이 다하면 어쩔 수가 없는 거죠. 숨이 끊어질 때 끊어지더라도, 그 전까지는 숨을 좀 잘 쉬고 살았으면 좋겠어, 숨 쉬다가 죽었으면 좋겠어요, 끝까지.
「저 멀리에서는 무정하게도 죽음의 열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급히 보따리를 싸야 한다면 정성을 다해 싸는 일을 도와주는 것이 호스피스의 사명이다. 장례식 장소는 사람들이 많이 올 수 있는 곳으로, 장례식은 최소한 간소하게, 기간은 상황에 맞추어, 그리고 최대한 빨리 상복 벗기. 이와 같은 새로운 죽음의 문화와 정서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 다음에 인제, 그렇게 숨이 심장이 멎었다고 죽은 것이 아니다. 그 이후에도 우리는 몸과 의식이 분리되는 시간을 그 사람에게 공급, 제공해주어야 되고, 기다려줘야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를 도와서 몸과 신체와 의식이. 인제. 처음에는 우리가 이렇게 의식과 몸이 붙어 있잖아요. 같이 활동하잖아요. 죽게 되면 몸이 못쓰게 되잖아요. 그러면 못쓰게 된 몸과 의식이 분리, 나누어져야 된다. 그래서 몸과 의식이 나누어질 수 있는 시간을, 이걸 사회적인, 대한민국의 그 어떤 죽음의 문화와도 연결되어 있는데. 우리가 불과 15년 20년 전에도 그렇게 가능했거든요.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아파트 문화가 생기면서 이 문화가 없어지기 시작했는데, 이건 너무나 중요한 거예요. 몸이 다 식고, 좀 기다려줘서, 적어도 24시간 기다려줘서 깨어나지 않을 때 그리고 몸과 의식이 분리되어버렸을 때, 그때 우리는 죽었다 라고 정의하고 그 다음 단계에 나아 가야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지금 숨이 딱 끊어지면 무조건 영안실, 냉장고에 딱 집어 넣는다. 그러고 길면 60시간 이내 우리 존재는 영원히 사라진다. 그래서 그 죽음 이후의 존재에 대한 존엄성이나 가치, 의미, 이것이 너무 없는 거예요. 급하강, 급하강하고 있어요. 그거는, 그 의식은 다음 생과도 무척 관련이 있어요. 그 전에는 우리는, 우리나라는, 유교 불교 뭐 다차원적으로 종교가 있지만 그것 상관없이 무조건 사람이 죽으면 당신이 죽은 방에다 병풍을 치고 홑이불을 덮어서 24시간을 기다렸어요. 그러고 안 깨어나면 지붕 위에 올라가서 옷을 흔드는, 초혼, 영혼을 부르는 의식을 했어요. 그래도 안 깨어나면 그때 입관을 해서 보통 기본 5일장을 치렀어요. 천천히 천천히. 지금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 문화가, 한국의 그 아름답고 고귀하고 가치있던 죽음의 문화가 우리 스스로 다 상실시켜 버렸어, 상실. 우리가 다 제거했어요. 우리 다음 생의 질이 엄청나게 떨어지고 있어요. 미국도 그리 하지 않고, 중국도 그리 하지 않고, 전 세계가 그리 하지 않아요, 우리나라 만큼 그리 하지 않아요. 일본이 좀 그런 경향이 조금 있긴 한데,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이렇지는 않죠.
소박한 즐거움 울산 시내에 열 번도 안 나가봤는데 [울산 온 지] 벌써 13년이 되었어요. 한 네 다섯 번 나갔던 거 같은데. 태화강 축제에 한 세 번 정도 나가본 것 같고, 그 다음에는 시장을 보러 두 번 나가고. 다섯 번 갔네.
「나의 가장 큰 취미와 즐거움은 환자돌보기요, 그 다음은 장보기다. 한 달에 두어 번씩 강연료를 모아들고 시장에 가서 환자들과 가족들을 위해 장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좋은 것을 요즘은 한 달에 한 번도 못 한다. 시간이 없어서다」 역시 그게 즐거운데, 환자 보는 건 마 그냥 가면 되는데, 시장 보는 즐거움이 없어 졌어요. 갈 새가 없어. 한 번씩 제가 마트에 가면 정말 즐기거든요, 시장 보는 걸. 환자들 에게 주고 싶은 것, 해주고 싶은 것, 이런 거 저런 거 막 이렇게 사서 뭔가 해주는 게 정말 즐거웠어요. 지금도 가면, 우리 이쪽 사무실에 뭐 사다주고 저쪽 사무실에 뭐 사다주고 챙기는 게 너무 즐거운데, 시간이 없어. 대신에, 일 년에 두 번은 하네. 추석 전날 내가 시장을 가요. 가서 이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에게 추석날 아침에 아침 식사를 스님이 해줘, 다. 설날에 시장 가요. 가서 사다가, 설날 아침에 여기 사는 모든 직원들이랑 밥 먹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양해줘요. 그거는 계속 하고 있어요. 스님 요리… 나는 잘한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도 긍정해요, “맞아요” 이렇게 해줘요. 야채 볶는 거. 저 정말 잘하는데, 할 시간이 없어요. 장 봐다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직원들이랑, 함께하는 사람들, 애쓰는 사람들에게.
완전히 뻗어버릴 때가 있죠. 그냥, 완전히 지쳐서 파김치가 되어 뻗어요. 그럴 때는 뻗어지는 대로, 뻗어서 하루 정도는 가만히 쉬어요, 멈춰요. 그리 하든지, 아니면 스님 그림을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데 그냥 물감을 풀어놓고 무언가를 그리든지, 마음대로. 「이 순간」 책갈피에 있는 그림, 제가 그린 그림이에요. 제가 쓴 책 중에 이 책 참 좋아 해요. 이거 바다예요, 바다. 응. 하늘이고 바다예요. 근데 이게 별인데, 별이 바다에 떠 있는 거. 요새는 그림을 안 그려가지고. 이때는 한창 너무 고통스러웠나봐. 이런 그림. 색 돌아가는 대로 그냥 그대로 그리거든요. 큰 붓으로 노랗게 묻혀서 막 돌리는 거야 이렇게. 어떨 때 내가 그림을 그리는가 보니까 고통스러울 때, 심신이 지칠 때, 이럴 때 이렇게 막 그림을 그리는데. 사람을 그리거나 그러진 않아.
이루어지이다 일과가, 보통 네 시 정도 일어나면 12시 정도까지 뭔가를 해야 해요. 목표가 여섯 시간 자는 건데 잘 안 되네. [제가 하는 일들은] 그게 전부 다 연결을 해보면, 생명과 생명 끼리의 공생과 공존, 존엄이 거기에 다 연결되어 있어요. 다 한 맥이에요. 한 나무에서 난 가지라, 그냥.
저희 재단이 두 가지 사업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하나는 교육이고 하나는 의료 사업이에요. 우리 불교계에서 이런 병원이 없어 좀 그랬지만, 사실 우리 한국은 굉장히 좋은 병원이 많지 않습니까. 저희가 복지의료사업부가 있거든요. 복지의료사업부는 이 병원 짓자마자 실행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우선 동남아시아쪽 중심으로 해서 가난한 나라에 작은 진료소를 지어준다거나, 또 의료봉사를 가서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거나 이런 사업들을 하고 있죠. 만약 예를 들면 우리가 네팔에 병원을 하나 지어주겠다고 하면 프로젝트를 실행해요. 스님들도 다 도네이션을 하는 거라 거기다가. 이거 하는 데 3억 든다 하면 3억을 도네이션 받아, 들어가서 거기다 지어주고, 이렇게. 프로젝트 당 한 개씩 해가지고 하고나면 또 다른 거 해주고. [의료봉사] 도네이션 하면 그걸 갖고 약을 삽니다. [재단 홈페이지] 들어가면 도네이션하게 되어 있거든요. 여러분이 보내주신 돈으로 거기 필요한 약을 사서 의사들이랑 함께 가요. 병원에는 내과 의사, 가정의학과 의사, 한방의사 해서 의사가 네 명. 행동대원들 사십 명. 환자 옮겨주고, 처리해주고, 식사도 우리가 다 해줘야 되거든요. 식사도 해주고, 그리고 약을 가져가기 위해서 우리가 사람이 많이 필요해요. 약이 어마어마해요. 한국 약이 좋아요, 아주 좋아요.
계획은, 계속 외국에 조만한 진료소를 만들어주는 일을 추진해갈 거고, 그 다음에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곳에 그런 병원을 비롯하여 그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고민하게 될 거고, 그 고민이 실행되어질 거예요. 아마, 그중에 가장 유력한 게 병원을 지어주거나 진료소를 지어주고 지원해주는 거. 그렇게 해서 케어할 거고.
그 다음에 인제 소원이 하나 있는데, 그 소원은 부산, 대구, 서울 지역에 누가 자기 건물을 도네이션 해주면 스님 거기다가 너무 아름다운 호스피스 병원을, 조그마한 병원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서울 지역, 대구 중간 지역, 부산 지역에 사람들의 죽음의 질을 높이 는 데 기여해주고 싶어요. 죽고나면, 자식에게 남겨줘도 3년 안 가거든요. 자식에게 물려 준 재산이 3년 안 가니까 굳이 물려주려 애쓰지 말고, 죽기 전에 내가 좀 많이 가졌다면 그런 것들을 도네이션 해주면, 서울 지역, 대구 지역, 부산 지역에 임종을 전문으로 돌봐 주는 병원을 만들고 싶다, 자재병원보다 더 아름다운 병원으로. 얼마나 그 사람의 공백이 무량하겠어요. 얼마나 돈 멋지게 쓰는 거잖아요. 나는 힘들겠지만 그 사람은 멋지게 쓰는 거지. (합장하며) 이루어지이다.
/ 각주
1. 여불위는 원래 양책(陽翟:河南)의 대상인(大商人)이었다.
2. 「이 순간」 p.132
3. 「이 순간」 p.229
4.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임을 뜻하는 불교용어이다.
5. 「이 순간」 p.26-28
6.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p.130
7. 「이 순간」 p.163
8. 「이 순간」 p.175
9. 「이 순간」 p.234
10. 「이 순간」 p.256
11. 마하보디교육원은 울산시 울주군에 위치한 불교 의료복지 전문인력 양성기관으로 불교호스피스 교육, 영적치유 에너지 강화 훈련, 승려연수 불교호스피스 영적돌봄, 직무연수교육 등을 실시하고 있으며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을 운영 중이다.
12. 「이 순간」 p.256
13. 2018년 6월 11일 능행스님을 상임대표로 한 울산불교환경연대와 상북면 주민들은 울산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울주군 상북면 길천산업단지 내 유해업체 아스콘 공장 설립 반대를 주장했다.
14. 「이 순간」 p230
15. 「이 순간」 p.194
16.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p.95
17.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p.238
18.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p.56
19. 「이 순간」 p.153
20. 「이 순간」 p.274
구술자 능행스님과의 만남
구술자 능행스님은 1960년 거제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그를 잉태했을 때 상서로운 태몽을 꾼 할아버지께서 태교를 매우 중히 여겼다. 구술자는 자존감과, 긍정,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의 근원에는 안전하고 아름다운 태교에서부터 열 살 때까지의 환경, 자긍심을 심어준 할아버지의 교육이 있었다고 말한다. ‘예배당 가는 길 들은 불경 소리’에 이끌려 삼십대에 출가를 결심하였다. 소록도, 꽃동네, 암환자 병동 등에서 호스피스 돌봄을 하다가 2000년에 충북 청주에서 정토마을 호스피스 센터를 건립하였다. 2003년 생사를 오가는 경험 끝에 죽음을 사유하고 환자와 보호자의 입장에 더욱 다가갈 수 있었다. 불교 호스피스병원 건립을 발원하여 십시일반의 모금으로 2005년 울산 울주군에 자재요양 병원 부지를 매입해 2년 후 불교 의료복지 전문인력 양성기관인 ‘마하보디교육원’을 개원하였고, 2009년에는 불교호스피스협회를 창립하였으며, 2014년에 자재요양병원을 개원하였다. 2018년에는 울산불교환경연대를 창립하여 자연과 인간이 상생하는 울산을 만들고자 힘쓰고 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의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게 전부 다 연결을 해보면, 생명과 생명끼리의 공생과 공존, 존엄이 거기에 다 연결되어 있어요. 다 한 맥이 에요. 한 나무에서 난 가지라, 그냥.”
2018년 8월 두 번째 방문에서 자재요양병원의 직원들과 구술자는 사랑하는 동료의 사고사 소식으로 큰 충격과 비탄에 빠져있었다. 만남을 취소하고 돌아가려는 기록자를 다시 자리에 앉힌 것은 그의 슬픔이 묻어나는 깊은 목소리였다. 두 번째 만남 녹취록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어떤 때는 내 삶 자체를 압도시킬 때가 있어요, 죽음이. 이런 죽음들. 내 삶을 그냥 잡아먹을 거 같은 압도적인 죽음.” 그는 8월 어느 날의 일기에 쓴다. ‘이 삶이 참 힘겹다.’ 그리고 또 쓴다. ‘삶은 매일 피는 꽃을 닮았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하루의 시작. 삶이 너와 나를 깜짝 놀라게 하도록 허락해야 하는 이 아침을 선물로 받았다. 밤이 주는 잠에 어제가 깨끗이 지나고 다시 맞는 아침. 모든 일은 정확히 일어나야 하는 대로 일어날 그날. 이 닦고, 세수하고, 선선한 바람을 만나면서 신선한 바람 속으로 걸어 나가는 것보다 더 고귀하거나 영적이거나 숭고한 일은 없음을 알게 하는 아침이다. 이해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이지만 그래도 깊은 수용으로 허락해보면서 매일, 매 시간, 매 순간을 그때가 언제나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 마지막 순간임을 성찰하는 아침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날이 또한 최초의 날이며 마지막 순간이 최초의 순간임을 일깨우는 아침이다. 모든 작은 것들 하나 하나 안에서 현존을 보이는 우주를 만나는 아침. 이 아침을 나는 찬미한다.’
“우리는 죽음 앞에 너무나 천진난만 합니다. 그게 너무 안타까워요.”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이사장 능행스님이 담담하게 말했다. 3일에 한번 꼴로 타인의 죽음을 품어 안는 삶, 호스피스 활동에 있어서 불모지나 다름없던 불교계에서 누구보다 발 빠르게 현장 속에 뛰어들어 새 길을 열었던 스님이다. 탁발로 후원금을 모으기 시작해 지금은 어엿한 불교 대표 호스피스 병원 이사장으로 굵게 새긴 직함에도 스님은 “아직 한참 부족하다” 말했다. 씁쓸한 미소가 돌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죽음에서 버둥대는 이들의 손을 잡아주고 싶다 말하는 눈빛, 30년 전 열정이 출렁였다. 춘삼월을 앞두고 전국적으로 봄비가 내리던 3월1일, 울주 상북면에 있는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에서 능행스님을 만났다.
능행스님은 교계 보다 일반에 더 알려져 있다. 2003년 출간한 가 일약 베스트셀러로 떠오르며 강한 인상을 남긴 덕이다. 50만부 이상이 팔렸다. 지금이야 ‘웰다잉’이 익숙한 언어가 됐지만 그때만 해도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 시한부 삶이라는 것이 막연하게만 다가오던 시절이었다. 스님은 지난 30여 년 간 호스피스 현장 곳곳을 다니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죽음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돌이켜보면 시절인연이 그리 된 것 같아요. 출가도 호스피스 활동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으니까요.” 처음부터 호스피스 활동을 하고자 마음먹었던 것은 아니었다. 출가 수행자로서의 삶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것처럼 인연은 불현듯 다가왔다.
청소년기를 개신교 문화 속에서 보낸 능행스님은 스물일곱까지 출가 수행자를 만나본 적도 사찰에 가 본 적도 없었다. 그때만 해도 몰랐다. 우연히 듣게 된 독송 소리, 운명처럼 만난 법정스님 책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줄은. “부처님오신날 즈음이었던 것 같아요. 1990년대 만해도 도로변에 레코드 가게가 많았거든요. 우연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염불 소리를 들었어요. 태어나서 처음 듣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끌리더라구요. 그 때 딱 멈췄던 것 같아요. 제가 살아온 삶 자체가.”
경전 독송 소리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불교라는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완전히 빠져들었다. 불교신문을 받아봤다. 신문 기사에 실린 책 광고를 보며 법정스님, 성철스님, 효봉스님 등 당대 스님들도 알게 됐다. 스님들이 쓴 책이란 책은 모두 사서 읽었다. 지금까지 알았던 종교와는 너무 달랐다. 정적이면서도 동적인 삶,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삶, 출가 수행자는 모두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출가를 해야만 하는 줄 알았다.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이사장 능행스님을 3월1일 만났다. 3일에 한번꼴로 죽음을 마주한다는 스님은 말기 환자의 경우 치료에 집착하기 보다 홀가분하게 삶의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이사장 능행스님을 3월1일 만났다. 3일에 한번꼴로 죽음을 마주한다는 스님은 말기 환자의 경우 치료에 집착하기 보다 홀가분하게 삶의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때만 해도 출가를 하면 선원으로 향하는 추세가 강했다. 능행스님도 진로에 대한 고민을 안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지인의 병문안을 하러 천주교 병원에 들렀다가 말기암 환자들을 봤다. “충격이었어요. 폐가 부풀어 오르고 주사 바늘을 꽂은 모습으로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듯한 모습을 한 환자 8명이 한 방에 누워있는데 제가 다 고통스러웠어요. 사람이 죽어가는 걸 그 때 처음 본거에요. 태어나서 가장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충격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황에서 능행스님은 병원을 도망치듯 나왔다. 스님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있던 불자들이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하던 때였다. 천주교 병원으로 병문안을 다니며 불자들을 위한 별도의 배려가 없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죽음만 기다리는 환자, 그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가족들이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스님은 승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고 했다. “무서웠다. 어떻게 해야할 줄 몰랐으니까. 그 때가 내 사문유관(四門遊觀)이었던 것 같다”고.
“그 때 처음 본 것 같아요.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죽는지. 불과 3개월 전만해도 멀쩡했을 텐데 그런 모습은 하나도 없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구요. 그 때부터 죽음 속에 스며들 듯 살았던 것 같아요.”
아프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들었다. 부산 소록도, 행려 병동, 충북 음성 꽃동네 등 곳곳으로 갔다. 독실한 불자들이 타종교로 개종하는 모습도 그 때 많이 봤다. 심한 경우 개종을 조건으로 내 건 병원도 있을 때였다. “불도 부산에서도 개종을 엄청 했을 때였어요. 이유는 간단했죠. 죽을만큼 아프니까. 가장 힘들 때 불교 보다 그들이 가까이 있으니까.”
무방비로 방치된 불자들을 보며 스님은 시설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시설이 어렵다면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시스템이라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절실한 마음은 행동으로 옮겨졌다. 1997년 호스피스 센터 건립을 위한 모금을 시작했다. 정토마을을 처음 세운 청주 땅이 그 때의 활동으로 마련된 것이다. 그 때만 해도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능행스님은 “급한 마음에 맨 땅에 천막을 치고 환자들을 들이기도 했다”며 “2000년이 되어서야 어느 정도 시설이 갖춘 호스피스센터를 운영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5병상으로 시작한 호스피스 센터, 입원을 원하는 환자는 종교 상관없이 받았다. 병원비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조립식 벽으로 지어진 탓에 신음 소리가 방에서 방으로 전해지는 상황이 이어졌다. 죽음의 질을 높이기 위해 센터를 지었는데 소음으로 또 다시 고통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콘크리트 벽으로 된 병원을 다시 지어야겠다.”
생각한 스님은 다시 모금을 시작했다. 땅을 사는 데만 3년, 건물 짓는 데만 또 5년이 걸렸다. 그 긴 시간을 감내한 끝에 세운 것이 지금의 울산시 울주군에 세운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이다. 140여 개 병동이 들어서 있다.
수많은 시행착오, 열악한 무관심 속에서도 능행스님은 30년 세월을 주저 없이 굵은 궤적을 그려왔다. 스님을 버티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능행스님은 질문으로 답했다. “죽음이 아주 가까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없지요? 당장 오늘밤 죽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있나요? 3시간 뒤에 죽는다고 생각해보세요. 무엇부터 할 겁니까?”
“먹고 살기 바빠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서 한번도 죽음을 생각해 본 적 없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선상에 들어오면 한없이 무너집니다. 죽을 준비가 다 됐다고 하는 사람조차 실제로 그 안에 들어오면 준비돼 있는 게 없어요. 시한부 삶을 선고 받고 대책 없이 들어와서 1~2달 내에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50~60년 인생을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정리 할 수 있을까요. 물리적으로도 너무 부족합니다.”
살고 싶다 살려야 한다. 몸부림치는 모습들을 보며 능행스님을 여전히 안타까움을 느낀다. “죽음의 고통은 생각하는 것보다 상상을 훨씬 넘어서요. 그래서 그 순간을 품위 있게 잘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해두어야 합니다. 당장 오늘밤에도 죽을 수 있다 생각하면 그때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이 달라집니다. 오늘을 실속 있게 살아야 다음 생도 실속 있게 살아지는 거에요. 코로나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나는 아닐거라고 생각하잖아요. 죽을 수 있는 이유가 살 수 있는 이유보다 많습니다.”
병원 운영 외에도 호스피스 교육기관인 ‘마하보디 교육원’, 구호 활동을 펼치고 있는 ‘국경없는 민들레’ 등으로 외연을 넓히는 이유다. “삶이 소중하면 죽음도 소중한 겁니다. 오로지 사는 것에만 가치를 두니 죽음에는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불자라면 더 잘 알거에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결국 사라진다는 것을. 죽음을 생각해야 하기 시작하면 늘 좋은 생각을 갖게 되고 욕망이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삶이 심플해져요. 다른 차원의 삶이 열려요. 간소하게 되니 많은 것을 소유하기 보다 나누게 됩니다. 그런 태도가 삶의 질을 한 차원 높일 겁니다. 불자들이 보다 많은 준비를 해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길, 스님들도 조금 더 호스피스에 관심을 가져주길, 그래서 모두가 아등바등 살기보다 지금 이 순간 보다 의미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능행스님은...
1994년 세종 학림사에서 수환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95년 불교 봉사자 15명으로 구성된 ‘자비회’를 창립, 1997년부터 정토마을 호스피스센터 모금 운동을 추진해 2000년 충북 청원군에 15병상 규모의 불교계 최초로 독립형 호스피스 시설인 정토마을을 세웠다. 2003년부터 완화 의료 전문 시설인 자재병원 건립을 위한 천일기도를 시작으로 2005년 울산시 울주군에 부지를 마련, 기금을 모아 2013년 200여 개 병동의 자재병원을 개원해 운영해오고 있다. 불교 전문 호스피스 교육을 위한 ‘마하보디 교육원’, 미얀마 등에서 구호 활동을 펼치고 있는 ‘국경없는 민들레’ 등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대한불교진흥원 대원상 단체부문 대상, 보건복지부장관 표창, 영축문화대상 등을 수상했으며 저서로는 산문집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임상전문서적 〈불교 임상기도집〉, 산문집 〈이 순간〉 등이 있다.
울산=이경민 기자 kylee@ibulgyo.com 유지호 부산울산지사장 kbulgyo@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