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에 여인왕국이 있었다?


안 영 배 동아일보 신동아부 기자
【신동아 1997년 9월호】


경북 안동의 한 산골마을에 「이상한」유적들이 발견됐다. 한국 최대의 돌거북상 6개와 6각형 모양의 주춧돌, 인공축대 등이 지금도 방치돼 있다. 누가 무엇 때문에 외진 산자락에 「소왕국」을 건설했을까? 이 유적지를 처음 발견한 이는 전설의 여인왕궁터라고 주장하는데….


지난 8월초 대전에 사는 한 기공사로 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경북 안동에 왕궁터가 발견되었는데 같이 가서 확인해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의 「전공」과는 별관계가 없을 법한 전혀 엉뚱한 제안이었지만 귀가 솔깃해졌다. 평소 빈말을 하지 않는 그의 성격을 아는지라 왕궁터는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무언가 역사적 의미가 담긴 것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일 이어지는 서울의 찜통 무더위 속에서 반은 피서 삼아, 반은 문화유적 답사 삼아 주말 동행을 약속했다.


전화의 주인공은 올해로 26년째 기공사로 활약, 우리나라 기공계의 선구자격이라고 할 수 있는 金炅甫씨(김경보·49). 대전의 약속 지점에서 그를 만난 뒤 바로 안동으로 직행했다. 경북 영주에서 안동으로 가는 5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광평리(안동시 서후면)로 접어들어 10분 남짓 달렸을까, 「가야」라는 팻말이 서 있는 마을 입구가 오른쪽에 나타났다. 차를 바로 꺾어 10m쯤 진입했더니 오른편 논 한가운데에서 버티고 앉아 있는 아기거북 두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주 잘 생긴 돌 거북상이다. 초록빛 벼이삭 틈에 웅크려 있는 모습이 매우 자연스럽다. 이 논의 주인은 거북을 옮기기가 귀찮았던지, 아니면 거북상을 신령스럽게 생각했던지 논에 그대로 모셔두고 있었다.


『왕국의 번영을 기원하던 거북들이지요. 여기 말고도 왕궁터 입구 곳곳에 아기 거북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김씨는 씩 웃는다. 아예 우리 일행이 가는 목적지가 왕궁터라고 단정하고 있는 말투다. 아기거북을 만난 곳에서부터 다시 5분여 겨우 차 한대 통과할 정도의 시멘트 도로를 달리는데, 차창 좌우로는 산쪽으로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전형적인 두메산골 풍경만이 펼쳐진다. 이런 외진 곳에 무슨 왕궁터 같은 것이 있으랴 하는 의심이 부쩍 들었다.


그러나 좁은 도로 하나만을 가운데에 남겨두고 정면을 가로막고 있는 야산을 통과하자마자 경치가 갑자기 달라져버렸다. 순식간에 5만평 정도 되는 평지가 나타난 것이다. 도로가 난 출입구를 제외하고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분지형이었다. 아기 거북상이 있는 마을 입구에서조차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내부 풍경이다. 김경보씨는 평지에 들어서자 차에서 내린 다음 아담한 규모의 콩밭 너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가 손짓하는 곳에는 산자락 아래에 파묻힐 듯 웅크리고 있는 바위 덩어리가 있었다.


6개의 돌거북과 6각형의 왕궁터

김경보씨는 또 거든다.
『지금 거북바위가 앉아 있는 산은 왕국 사람들이 천신제(天神祭)를 지내던 곳이고, 거북바위는 왕국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또 산 자체가 6각형 구조로 인공적으로 조성된 것입니다. 거북바위도 모두 6면을 따라 6개가 있었지요. 이곳에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여의주(둥그런 돌)를 잃어버린 거북바위가 1개 더 있고, 또 그 밑으로는 논에 잔해가 흩어져 있는 거북바위가 있습니다. 나머지 3개의 거북바위도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의 말은 척척 맞아떨어졌다. 김씨는 이미 완벽하게 사전답사를 해두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산자락 아래로 산을 둘러싸듯이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다른 거북바위가 있는 곳으로 옮기는 동안 의외의 수확을 거두었다. 수풀 속에 살짝 숨어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 인공축대였다. 축대는 김경보씨도 미처 챙겨보지 못했던지 신기해했다. 그것은 3~4단으로 축성된 바위들이 산 둘레를 2백m쯤 둘러싼 형태였다.


누가, 왜 그랬을까? 사방이 산으로 둘어싸인 외진 산골 마을에서 유독 이 산에 돌거북상을 만들고 축대를 쌓았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부여돼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면 이 산 자체가 왕궁터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왕궁 터는 지금 논으로 변한 이쪽 평지입니다. 이곳저곳에 돌무더기들이 보이지요. 그것이 왕궁의 주춧돌입니다. 그런데 널려진 주춧돌들도 그 선을 따라가다보면 역시 6각형 구조입니다』


주춧돌은 여름 태양을 한껏 받아 푸르게 자란 벼이삭들에 가려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드문드문 흩어져 있었다. 너무 방대하게 흩어져 있어 6각형인지는 잘 알 수 없었으나, 김씨는 논이 텅 빈 겨울에 와서 보면 분명히 나타난다고 말했다. 6자가 들어가는 이상한 모양의 구조물들은 아직까지 우리나라 고고학계에서는 보고된 바가 없다. 결국 호기심 삼아 김씨를 따라 나섰다가 의외로 수수께끼의 문화유적 현장을 만난 셈이다. 마치 고고학자가 최초로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유적지를 발견해냈을 때 느끼는 희열감까지 들었다.


이곳 유적지에서 마치 고대에 살아본 적이 있다는 듯이 말하는 김씨의 「일방적인」 해설은 일단 접어두고 마을촌로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행정지명으로는 광평 1리와 2리, 일명 제전부락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50호 정도가 사는 아담한 산골마을. 먼저 노인회관을 찾았다. 마침 이곳에서 토박이로 살아온 유건기씨(68.광평2리)를 만났다. 거북바위에 대해서 물어봤더니 대뜸 『아, 그 용바우(바위)요? 그것은 아마 땅 생기면서부터 있었지요』하면서 매우 오래됐다고 말한다. 그는 거북 입에 들어 있는 여의주 때문에 금구상을 용상으로 본 모양이었다. 마을 사람들도 다 「용바우」라고 부른단다.


『용바우 밑에는 거북바우도 있었어요. 그런데 77년도쯤에 새마을 사업을 한다고 길을 내면서 바우들이 깨져버렸습니다. 깨진 돌들이 아직 거기에 남아 있어요』


유씨는 논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바위들이 거북바위였다는 것만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들의 아주 먼 옛날 조상 때부터 있어 왔다고도 증언했다. 다른 마을사람들도 대개 비슷한 대답을 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터전이 그 옛날 왕궁터였다는 얘기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듯했다.


미스터리 고대사

이곳이 왕궁터든 아니든 누가 이 첩첩산중에 어마어마한 거북상을 세우고, 산에다 인공적인 축대를 쌓고, 들에다가는 주춧돌로 건물을 세웠단 말인가. 그것도 마을 입구에서도 전혀 보이지 않도록 아주 은밀한 곳에 감추듯이 말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대 한반도의 왕궁은 대부분 평지에 세워졌다. 신라의 경주가 그렇고, 백제나 고구려의 수도도 마찬가지였다. 왕족과 신하들이 있고 일반 백성들이 모여 살기 위해서는 당연히 평지가 적격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김경보씨의 주장과는 달리 다른 용도로 쓰인 유적지일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나라 역사서 혹은 문헌 중에서 경상북도 안동과 관련해 어떠한 왕국이 존재했었다는 기록은 아직까지 보고된 바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서는 지금으로부터 2천여년 전 경상북도를 중심으로 신라가 일어나고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백제가 태어나고, 한강 이북에 고구려가 있었고, 그 후에 경상남도 쪽에 가야가 있었다고 기록한다. 그 시기에 안동에 어떤 왕국이 있었다면 우리나라 최고의 고대 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그 흔적이나마 기록해두었을 텐데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기원후 7세기에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이후 이어지는 고려와 조선왕조의 역사에서 찾는다는 것은 더 무리한 일이다.


오히려 가능성이 있다면 고구려 백제 신라 이전의 역사, 고고학적 용어로는 「원삼국시대」때의 일이 아닐까. 실제로 김경보씨도 이 유적지의 건설은 한반도에 신라와 백제가 들어서기 이전인 BC 100년 전후의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김경보씨를 「심문」할 차례였다. 그는 어떻게 해서 왕궁이라고 주장하는 이곳의 유적지를 손금 보듯 훤히 알고 있으며, 그 존재했던 연대를 원삼국시대라고 단호하게 주장하고 있는가. 그는 고고학의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던 아마추어 아닌가.


김씨는 먼저 일부러 이곳을 안내한 것에 대해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양해를 구한 다음 장황하게 그 배경을 설명했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몇해전 박모라는 청년이 「심령 기치료사」로 소문난 김씨를 찾아왔다. 박씨는 단전(배꼽 밑의 경혈) 아래 부분에 심한 습진이 생겨 낫지 않는 데다가 밤만 되면 악몽에 시달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다고 호소했다. 병원을 찾아도 그의 습진과 악몽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는 것. 게다가 박씨에게는 남에게 털어놓지 못할 고민도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자신은 원래 여자로 태어나야 했는데 남자로 태어났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여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해 유년시절에는 여자아이처럼 소꿉놀이를 해왔고, 철이 들어서는 여성들의 소지품을 수집해 몰래 간직하는 것으로 여인이 되지 못한 한을 풀어왔다. 그런 한편 자신의 이런 모습을 극복해보려고 일부러 해병대에 자원 입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호된 기합과 훈련 속에서도 박씨의 내면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는 결국 『내 팔자는 여성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구나』하고 체념하고 마지막으로 돈을 모아 성전환수술을 받으려고 하던 차에 습진이 생긴 것이다.


본론은 지금부터다. 찾아온 박씨를 처음 본 순간 김경보씨는 박씨가 여왕의 후생(後生)이라는 것을 투시(초능력의 일종)로 알아냈다.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2천년도 훨씬 넘은 오랜 옛날 한반도 땅에서 남자들에게 핍박받는 여인들을 구해 그들만의 왕국을 세운 「사라」라는 여왕이었다. 박씨가 여인이 되고 싶어했던 것도 전생의 기억이 현생의 잠재의식까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박씨는 여인 왕국을 건설하면서 당시 수많은 남자들을 죽인 업으로 인해 현생에 태어나서는 질병과 악몽으로 고통받고 있었던 것. 김씨는 자신의 기로써 박씨의 압성습진은 물론 악몽까지 말끔히 고쳐냈다.


과거를 투시해 찾아낸 역사유적?

김씨로부터 치료를 받은 후 박씨는 자신의 전생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어졌고 그런 능력을 배우고 싶어했다. 김씨는 그가 자질이 있어 보여 「자동서기」라는 영능력 개발 훈련을 시킨다. 자동서기는 외국 말로 「아캬샤 레코드(akasha record)」라고 하는데 미국의 유명한 예언가 에드가 케이시와 프랑스의 노스트라다무스가 이 방법으로 수많은 예언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이 기술은 한마디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서 날아오는 과거 혹은 미래의 메시지를 영적으로 수신해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놓는 것. 이리하여 박씨는 자신의 전생의 역사, 곧 여인 왕국의 역사를 자동서기로 기술해나간다.


그러는 한편으로 김씨는 전생에 여인 왕국과 관련된 환자들의 방문을 받는다. 대표적인 예가 울산에 사는 황명숙씨. 수년 전 갑상선암으로 수술을 받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임파선에 암이 재발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 황씨는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김씨를 만난다. 황씨는 김씨로부터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말을 듣게 된다.


황씨의 전생은 여인 왕국 시절의 여자 무사. 이 여자에게 무예를 가르친 스승이 바로 김씨 자신이었다는 것. 말하자면 전생의 스승과 제자가 현세에서 기공사와 환자로 만나게 된 셈이다. 어쨌든 전생의 여자 무사는 다른 검객들과 검술겨루기를 무척 좋아해 사람들을 수도 없이 살상했다. 그 벌로 황씨는 현생에 태어나 고통을 받게 됐다. 재미있는 현상은 황씨는 언제나 목부위와 배부위에 묵직한 통증을 느껴왔는데, 김씨는 황씨가 묻기도 전에 전생에 검으로 남의 목과 배를 많이 갈라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현상은 황씨가 김씨로부터 기치료와 기운동을 받으면서 나타났다. 황씨는 치료를 받아 몸이 좋아지자 기운동 시간을 차츰 늘려갔는데,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무술동작이 나왔다. 평소 춤이나 노래 같은 것에는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고 운동이라고는 아무 것도 해보지 않았던 전업주부인 황씨에게서 놀랄만한 전통 무예동작이 나타난 것. 처음엔 가족들도 믿지 않았으나 그녀가 무술 시범을 보이자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암에서 완전히 벗어난 황씨는 지금도 김씨와 함께 기수련을 하고 있다.


이외에도 김씨가 병원에서 치료를 포기한 간 질환자 등을 고쳐내면서 여인왕국과 관련된 희한한 얘기는 적지 않지만 대략 이 정도로 그치기로 하자.


『제 자신이 여인 왕국과 무관하지 않은 사람인지, 환자들도 여인왕국과 인연깊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게다가 얼마전에 박씨가 자동기술로 밝혀낸 우리 고대 역사를 마무리해 책(무린바타 전4권, 행림출판)으로 엮어 냈습니다. 여인들의 왕궁 터도 책의 무대가 되는 장소를 사진으로 찍기 위해 박씨와 함께 안동 일대를 다니면서 찾아낸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고대사에서 잃어버린 역사를 햇볕속으로 끄집어낼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김씨는 공상 과학소설보다도 더 앞서 나가는 논리를 가지고 매우 신념에 차 얘기한다. 김씨가 밝힌 환자들을 만나 확인해봤지만 역시 김씨의 「비상식적인」 말에 깊이 동조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찌됐건 김씨로 인해 자신의 건강을 되찾은 것을 최대의 증거로 여기고 있었다.


게다가 김씨는 안동의 왕궁터를 눈앞에 들이밀고 있다. 김씨는 왕궁터가 타인 소유라서 파헤칠 수 없지만, 이 왕궁터를 발굴하면 훨씬 더 구체적인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게 돼 있다고 확신한다.


아마추어들의 세계적 발굴기

하긴 고고학자만이 문화유적 발굴을 전담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 고고학 발굴사에서 유명한 발굴들은 전문가보다도 비전문가의 손에 의한 것이 더 많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성경에서 무려 1백52번이나 등장하는 고대의 대제국 앗시리아는 1843년 봄까지는 단순히 전설상의 나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프랑스의 의사 출신인 보타와 영국의 빈털터리 여행자 레이아드가 앗시리아 제국의 왕궁터를 발굴함으로써, 그때까지 고대 이집트 문화가 인류 문명의 발상지라고 하던 인류사를 다시 쓰게 되었다. 고고학자가 아닌 보타와 레이아드의 땅파기는 현대 고고학 발굴의 효시가 되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나오는 전설의 도시 트로야와 미케네를 찾아낸 실리만 역시 고고학자가 아닌 사업가였다. 고고학자들은 전설만을 믿고 주먹구구식으로 땅을 파헤치는 실리만을 정신병자라고 비웃었지만, 이후 그가 발굴한 터에서 유물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밀림속에 버려진 마야제국의 유적지를 처음 발굴한 스티븐스는 법률가 출신이었고, 캄보디아에서 사라진 크메르왕국을 찾아낸 뷰우오는 가톨릭 신부였다.


외국뿐이랴. 지난 76년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동양 최고(最古)의 유물선과 유물을 처음 발견하고 이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들 역시 고고학과는 상관없는 아마추어들이었다.


그러니 기공사라고 해서 자신의 독특한 「비법」을 가지고 역사투영을 통해 유물을 발견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실제로 김씨는 이 방법을 통해 지금까지 세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흔적을 찾아내지 않았는가. 문제는 이것이 과연 사료에서 나타나는지, 직접적인 증거가 있는지 여부다. 김씨의 확신대로 땅속 깊숙이 묻혀 있을 유물들이 발굴된다면 여인왕국의 이야기도 전설이 아닌 실화로 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여기서는 남겨두자. 그것은 학자들의 몫일 것이다.


남은 것은 앞으로 이곳을 정식으로 발굴할 누군가를 위해서 참고삼아 여인 왕국 등장에 관한 역사적 배경을 들어보기로 하자. 물론 이것은 문헌에 나온 역사가 아닌 박씨가 받은 「소설 같은」 자동서기를 통해서다.


한반도의 아마조네스 왕국

때는 고조선 시대. 한반도 북쪽 땅에서 충성을 다하다 반대파에 억울한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최후에 환멸을 느낀 「용장」이란 장수가 만삭의 몸으로 병든 아내와, 딸 「시애」을 데리고 사람이 살 만한 땅을 찾아 남하한다. 그러나 도중에 아내를 잃고 아버지와 딸이 정착한 곳이 지금의 안동 일대. 이후 용장은 딸인 시애를 통해 자손을 퍼뜨리게 되고, 후손들은 점점 번창해 「알신」과 「공명」이라는 씨족 집단으로 성장한다. 이들 집단은 철저하게 여성을 존대하는 모계 중심사회를 유지한다. 그것은 시조 용장의 유언 때문이었다.


이 씨족 사회가 바깥으로도 알려지면서 외부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인구가 점점 늘어난다. 그러나 알신과 공명 집단은 외부인의 정착은 허락했으되 혼인은 거부하는 등 순수한 혈통만을 고집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날아온 돌이 박힌 돌 뺀다는 격으로 유입인구가 씨족들보다 훨씬 많아지자,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지도자를 뽑아 부족국을 형성한다. 물론 그들은 남성 중심의 사회를 형성했다. 이렇게 해서 경북 일대에 6부족 사회가 형성된다.


그런데 여성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살아야 하는 알신과 공명 집단의 남성들은 이웃부족의 남성들과 자신들을 비교해보고는 크게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육체적으로도 남성이 우월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잠자리에서까지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여성들을 상전처럼 모시며 기죽어 사는 것이 억울했던 것이다. 마침내 쌓이고 쌓인 불만이 행동으로 터져 나왔다. 그들은 몽둥이를 앞세워 여성들을 무력으로 굴복시킨 다음 남성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어낸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듯이,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심한 매질과 구박은 물론 「살파」라는 집단농장을 만들어 여성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가 하면, 「미루나기」라는 젊은 여인들의 수용시설을 만들어 여자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기도 했다. 심한 경우 여자들을 인신매매하기도 했다. 이제는 짐승과 비슷한 대우을 받는 여성들은 자신들을 구해줄 메시아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다가 여인들의 집단농장을 탈출한 한 여인이 이웃나라로 도망쳐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는다. 이때가 BC 126년의 일. 그 아이가 후에 진녀라는, 여인국의 여왕이 된다. 진녀는 당대 최고 검객이자 선비인 기른장으로부터 10년 동안 문무를 익히며 20세 처녀로 자란다. 진녀의 출현에 용기 백배한 여인들은 그녀의 휘하로 모여들고, 그들만의 왕국을 건설할 꿈을 꾼다.


그러나 수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남성들보다 열세일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진녀는 우선 잘 생긴 젊은 여인들을 골라 요즘 말로 하자면 미인계를 써서 남성들이 지배하는 6부족에 침투시킨다. 그리하여 소수의 정예 부대를 이끌고 기습작전을 펴 부족들을 하나씩 무너뜨린다. 진녀 부대가 6부족 등을 멸망시키면서 규합한 여성은 30만명에 이른다. 이들은 처음에 숲속에 숨어서 이른바 게릴라전을 폈으나 이제 두려워할 것이 없게 되자 「서현」(지금의 안동 왕궁터)에다 왕궁을 건설한다. BC 106년의 일이다.


이 왕궁터는 출입구를 제외한 4면이 거의 험한 산으로 둘러싸이다시피 한 천연의 요새였다. 여인들은 마치 벌집을 연상케 하는 6각형의 3층 목조건물을 짓는다. 그리고 산꼭대기에 저수장을 만들고 그 물로 반 수세식 통나무 소변기를 사용할 만큼 문명한 생활을 한다. 여인들은 또 왕궁 입구에다 아기 거북을 만들어 세우고, 궁궐 옆에는 수호신이자 남성을 상징하는 거대한 돌거북 6개를 세운다. 왕궁터 북쪽의 가장 신령하다고 믿은 언덕에는 국정자문위원격인 「상라여신」이 기거하며 여왕의 스승 노릇을 했다. 왕궁 안의 모든 길은 꽃으로 단장하고 뜰에는 금잔디를 가꾸었다.


여인들은 포로로 잡아온 남자들을 이용해 성욕을 해결한다. 만약 임신이 돼 여자 아기가 태어나면 전사로 키워내고 남자 아기는 왕궁에서 30~40리 떨어진 「월전」이란 곳에 버려서 굶어죽게 만드는 잔혹성도 보인다. 깊을대로 깊은 남성에 대한 증오심이 모성애를 가렸던 것이다


신라 박혁거세의 정체

여왕 진녀가 왕궁을 산속 깊은 곳에 세운 데는 이유가 있었다. 6부족국을 무너뜨려 나라를 세웠지만 주변의 남성이 통치하는 나라들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약한 상태여서 일단은 여인왕국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여인국 주위로는 소백산 남서쪽에 자리잡은 동인국(후의 한반도 백제)이 있었다. 동인국이라는 이름은 서해바다 건너 중국 대륙에 서인국(후의 대륙 백제)이라는 나라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동인국은 몇 차례 여인왕국에 기습을 시도하지만 여인국의 미인계를 이용한 첩보전과 수기(手旗)를 이용한 신속한 연락망, 고도로 훈련된 여인 기마병 앞에서 맥을 못추고 퇴각했다.


여인국 남쪽으로는 일찍부터 중국대륙에서 한반도에 진출한 6가야가 있었다. 6가야 세력은 어쩌다 여인왕국이 큰 위기를 맞을라 치면 번번히 도와주어 위기를 모면한다. 가야인들은 북쪽세력(후에 고구려)과 서쪽세력(백제)의 방어기지인 여인국이 무너지면 자신들도 위험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인왕국이 개국한 지 30여년만에 여왕 진녀는 죽고 후에는 「울멍」이라는 장수에 의해 여인국은 문을 닫게 된다. 이때가 기원전 56년경.
이후 여인국의 여성중 일부는 각지로 뿔뿔이 흩어지고, 남은 여성들은 남성들에 대한 증오심을 잊기로 하고 남성사회인 사로 6촌과 더불어 새로운 나라를 일으키기로 결정한다. 그것이 바로 BC 54년 박혁거세와 여인국 출신 알영이 합의해 세운 신라인 것이다.


여기까지가 자동서기로 기록한 여인왕국의 역사다. 김경보씨와 함께 안동의 여인 왕궁터에서 마지막 여정으로 경주를 향했다. 김씨의 주장에 의하면 남성과 여성들을 화해케 하고 그 공로로 신라의 초대왕이 된 박혁거세는 첫 도읍지로 지금의 황룡사 터를 잡았다는 것. 현재 복원처리를 한 황룡사 터를 밟으면서 먼먼 과거로 눈을 돌려본다.


사람들은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하면 대개 알에서 나온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설화나 금 바구니에서 출현한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 전설을 머리에 떠올리는 게 보통이다. 그만큼 신화시대로 여긴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은 바로 그 2천년 전에 한반도에서는 신화시대가 아닌 역사시대로 활발한 문화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는 것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다.


지난 88년 발굴된 경남 창원 다호리 고분군에서는 2천년 전의 유물인 붓과 부채, 목제 칠기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붓은 당시 우리 민족이 문자생활을 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이고, 동양 특유의 공예품인 칠기는 문명의 발달 정도를 가늠하는 잣대였다. 또 최근에 발굴이 완료된 전남 광주 신창동 유적지에서는 높은 문화수준을 나태내주는 가야금과 가죽신의 신발골, 베틀의 부속기구 등이 출토됐다. 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 이전에 높은 문화를 유지한 집단들이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다.


바로 그 시기에 진녀의 여인왕국은 50년간이라는 짧은 역사를 누리다가 신라에 자리를 물려주고 무대에서 사라져간 것이다. 과연 여인 왕국은 존재했을까, 그리고 안동의 유적지는 과연 여인 왕국의 근거지였을까. 왕궁터를 발굴한다면 과연 어떤 유물이 쏟아져 나올 것인가.


만일 여인왕국의 존재가 밝혀진다면 우리 고대사는 그만큼 풍성해질 것이고, 그것이 한 기공사의 상상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쳐도 재미있는 소설 읽기 정도는 되지 않을까.

『역사가는 과거를 복원하는 훌륭한 추리작가』라고 누군가 말한 것이 생각난다.
[기고] 안동의 여인왕국女人王國 이야기


김휘태(안동시 공무원)
입력 2017. 12. 29


‘BC57년에서 BC24년경 30여 년간 안동에 여인왕국이 있었고, 진녀 여왕이 울멍에 망하고 남은 여인들이 경주로 가서 다른 부족들과 신라를 건국하였다.’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있다.

그 여인왕국의 위치는 천등산 봉정사 동쪽 개목사 아래 산야에 펼쳐진 서후면 광평(가야)리이며, 실제로 고대국가로 추정해볼 수도 있는 돌거북상 6개와 6각형 주춧돌과 인공축대 등 여인왕국을 뒷받침할만한 유물들이 들판과 마을입구 등에서 발견되고 있다. 지금은 재미있는 전설이지만 만약에 2천여 년 전의 여인왕국으로 증명이 된다면 대한민국 역사를 다시 써야하는 어마어마한 스토리텔링이 될 수도 있다는데 주목해봐야 할 것 같다.

필자가 지역 언론인 친구와 호기심에 몇 번이나 현장을 둘러보니 마을주변으로 인공석축이 쌓여있고, 개목사 아래 계곡으로 생활용수를 저장하여 이용할 수 있는 저수지 같은 구릉지대가 층층이 있고, 가야리 들판 중앙에서 궁궐터로 볼 수도 있는 솔밭과 거북바위와 육각형 받침대 등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고대유적 전문가가 아닌 일반상식으로 보기에는 호기심이 극에 달하였지만 여인들만의 왕국이었다는 증거유물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아직까지는 이야기 거리로만 남겨둘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보물창고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1997년 신동아 9월호(안영배 동아일보 기자)에 실린 이 이야기는 과연 누가 어떻게 시작한 걸까? 행림출판사에서 1989년부터 1999년까지 4권을 출간한 국내 최초의 자동서기(akasha record 자기도 모르게 영감으로 쓰여 지는 현상)로 쓰인 이 책은 여인왕국, 혹은 무린바타 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으나 그 이후에 출판이 중단되어 완결이 나오지 않은지 20년이 지났다. 그러면 여인왕국 이야기의 줄거리를 발췌해본다.


때는 고조선 시대. 한반도 북쪽 땅에서 충성을 다하다 반대파에 억울한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최후에 환멸을 느낀 ‘용장‘이란 장수가 만삭의 몸으로 병든 아내와, 딸 '시애'를 데리고 사람이 살 만한 땅을 찾아 남하한다. 그러나 도중에 아내를 잃고 아버지와 딸이 정착한 곳이 지금의 안동 일대. 이후 용장은 딸인 '시애'를 통해 자손을 퍼뜨리게 되고, 후손들은 점점 번창해 '알신'과 '공명'이라는 씨족 집단으로 성장한다. 이들 집단은 시조 '용장'의 유언으로 철저하게 여성을 존대하는 모계 중심사회를 유지했다.


이 씨족 사회가 바깥으로도 알려지면서 외부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인구가 점점 늘어나 남성 중심의 부족국가를 형성했다. 이렇게 해서 경북 일대에 6부족 사회가 형성된다. 그런데 여성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살아야 하는 '알신'과 '공명' 집단의 남성들은 이웃부족의 남성들과 자신들을 비교해보고는 크게 불만을 품고 여성들을 무력으로 굴복시킨 다음 남성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고 여성들에게 심한 매질과 구박은 물론 '살파'라는 집단농장을 만들어 여성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가 하면, '미루나기'라는 젊은 여인들의 수용시설을 만들어 여자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기도 했다. 이제는 짐승과 비슷한 대우를 받는 여성들은 자신들을 구해줄 메시아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다가 여인들의 집단농장을 탈출한 한 여인이 이웃나라로 도망쳐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는다. 이때가 BC 126년의 일. 그 아이가 후에 '진녀'라는 여인국의 여왕이 된다. ‘진녀’는 당대 최고 검객이자 선비인 기른장으로부터 10년 동안 문무를 익히며 20세 처녀로 자란다. ‘진녀’의 출현에 용기백배한 여인들은 그녀의 휘하로 모여들고, 그들만의 왕국을 건설하고 미인계를 써서 남성들이 지배하는 6부족을 멸망시키면서 규합한 여성들이 30만 명에 이른다. 이들은 처음에 숲속에 숨어서 이른바 게릴라전을 폈으나 이제 두려워할 것이 없게 되자 ‘서현’(지금의 안동 왕궁터)에다 왕궁을 건설한다. BC 106년의 일이다.


여왕 ‘진녀’가 왕궁을 산속 깊은 곳에 세운 데는 이유가 있었다. 6부족국을 무너뜨려 나라를 세웠지만 주변의 남성이 통치하는 나라들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약한 상태여서 일단은 여인왕국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여인국 주위로는 소백산 남서쪽에 자리잡은 ‘동인국’(후의 한반도 백제)이 있었다. ‘동인국’이라는 이름은 서해바다 건너 중국 대륙에 ‘서인국’(후의 대륙 백제)이라는 나라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동인국’은 몇 차례 여인왕국에 기습을 시도하지만 여인국의 미인계를 이용한 첩보전과 수기(手旗)를 이용한 신속한 연락망, 고도로 훈련된 여인 기마병 앞에서 맥을 못추고 퇴각했다. 여인국 남쪽으로는 일찍부터 중국대륙에서 한반도에 진출한 6가야가 있었다. 6가야 세력은 어쩌다 여인왕국이 큰 위기를 맞을라 치면 번번히 도와주어 위기를 모면한다. 가야인들은 북쪽세력(후에 고구려)과 서쪽세력(백제)의 방어기지인 여인국이 무너지면 자신들도 위험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인왕국이 개국한 지 30여 년만에 여왕 ‘진녀’는 죽고 후에는 ‘울멍’ 이라는 장수에 의해 여인국은 문을 닫게 된다. 이때가 기원전 56년경. 이후 여인국의 여성들 일부는 각지로 뿔뿔이 흩어지고, 남은 여성들은 남성들에 대한 증오심을 잊기로 하고 남성사회인 사로 6촌과 더불어 새로운 나라를 일으키기로 결정한다. 그것이 바로 BC 54년 ‘박혁거세’와 여인국 출신 ‘알영’이 합의해 세운 신라인 것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만 2018년 새해에는 2천 년 전 여인왕국의 주인공 진녀가 천등산자락에 백마를 타고 바람같이 나타나기를 기대해본다.

● 여인왕국 무린바타 저자(박충원)의 말

(전생에 여인왕국의 여왕 진녀였다고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어떠한 사서(史書)나 유물 및 야사(野史)에서 박혁거세가 신라를 건국하기 이전 경북 안동지역에 여인들만 모여 살았던 여인왕국이 있었다는 기록이나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다.


그러나 실재했던 여인왕국의 여인들은 38여 년 동안 왕국을 지탱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동백제와 대규모 전쟁을 치르기도 하고, 가야(伽倻)로부터 빼어난 토기술과 기하학 및 천문, 지리 등을 전수받아 왕국의 번영을 누렸었다. 이것이 훗날 신라문명의 모태가 된다.


왕국을 지탱하기 위한 가냘픈 여인들의 피나는 노력과 그 역사를 기록한 이 글은 우주 속에 기억되어진 기록을 고도의 정신수행을 통한 자동서기(自動書記)·자동기술(自動記述)에 의해 씌어진 것이다. 흔히 자동서기를 아카식 레코드〔akasha record〕라 부른다. 서양에도 이 방법으로 기록된 실례가 많이 있다.


성경의 일부와 리바이 도링(Levi DowLing)이 받아 적은 보병궁 복음서(예수의 12세부터 30세까지 18년간의 드러나지 않은 생을 적은 것).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를 비롯한 각종 예언서들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카식 레코드를 전문적으로 교육시키는 단체까지 있다. 그러나 역사부분을 기록한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자동서기는 받아 쓰는 이의 인격적인 자질에 따라서 보다 진실에 가까운 진술이 되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할 것이다. 이 글을 자동서기한 필자 역시 진실된 기록을 하느라 노력했던 그 많은 시간들이 꿈만 같다.


평소 아둔한 머리로 중등교육을 마친 뒤 학문과는 담을 쌓고 살았고, 편지 한두 장 쓰는 것도 골머리를 썩여가며 끙끙거리던 필자였다. 또한 어릴 적부터 자폐적인 데가 있어 남과 어울리는 일이 쉽지 않았었다.


나름대로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정신수행을 하던 중, 1986년 우연히 어떤 형을 만나게 되면서부터 책이나 또는 옛 정신수행자들 사이에 비밀리 전해져 내려오는 자동기술의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되어 각고의 고난 끝에 이 글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어쩌면 나는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는 여인왕국의 역사를 사실 그대로 진실되게 현세에 밝혀야 하는 사명을 띠고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현실에 살고 있는 우리들 또한 지난날 역사의 주인공들이 현세에 다시 태어나 오늘의 문명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하다면 우리는 지난날의 기억을 재조명하고 양심이라는 진실 속에 비추어 잘못된 지난날을 거울삼아 미래의 흐름을 밝은 길로 설계해야 될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진실을 외면한 채,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나 국가라는 차원에서까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오도시켜 거짓이 난무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 살아왔다.


그러나 거짓은 영원할 수 없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힘의 논리에 따라 힘있는 자들을 중심으로 역사의 물길이 흘러왔으나, 우주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사실을 관조(觀照)한다면 진실이란 어느 때고 말없이 그대로 흐르고 있을 뿐이다.


이 글은 1990년에 《여인왕국(1·2·3》이라는 제목으로 발표가 됐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여의치 않은 사정으로 인하여 중간(重刊)을 하지 않고 있다가 글을 더 다듬고 재구성하여 이제 다시 출간하는 것이다.


지금은 시대적인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전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이상하게 바라보던 사회적 분위기가, 이제는 중·고등학교 학생들 사이에 관심의 제일 항목이 전생 이야기이다.


책이 나오기까지 너무나 많은 분들로부터 은혜를 입었기에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리며, 특히나 행림출판사 사장님께서 잊지 않으시고 다시 빛을 볼 수 있게끔 성심을 아끼지 않으신 데 대하여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교열·교정을 남다른 성의를 가지고 보아준 권광숙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럼 다 함께 과거라는 열차를 타고 우리들이 살아온 지난 날의 삶으로 들어가 보자. (1996년 )



● 무린바타 들어가는 말 ---감수자 故 김경보 선생의 글
(전생에 진녀 여왕의 스승 기른장으로 알려져 있다)


1986년 초여름으로 기억된다.


박군이 처음 찾아왔을 때, 난 첫눈에 그가 심한 영적인 장애로 시달림을 받고 있으며, 앞으로 인생고가 모질겠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인격수양을 잘만 한다면 나름대로 뜻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닌가 하여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그러나 박군은, 벌써 몇 년째 밤마다 망령들의 환영에 시달려 잠을 이룰 수 없어 미칠 지경이며, 좌반골이 항시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마비증세와 함께 쑤시고 아프고, 특히 몸의 중요한 부위가 심한 습진으로 짓물러 갖은 치료를 다 해보지만 좋아지지 않아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보니 심한 영적인 장애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분명했다.


나는 박군에게 제령(除靈)시술과 체질개선시술을 1년이상 수시로 시행해 주었다. 평소 한 사람에게 길어도 1주일이면 끝내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는데, 1년 이상 박군에게 정력을 쏟았다는 것은 기이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시술을 받는 동안 박군의 정성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가 1시간용 '옴'경문 테이프를 만들어 달라고 떼를 써서 만들어주었더니, 그는 밥 먹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헤드폰을 이용하여 항시 듣고 따라 외며, 7년 가까이 끌어온 지긋지긋한 습진도 자기 나름대로 연구하여 완치시켰다. 일반연고제에 24시간 옴경문을 들려준 후 그 약을 발랐더니 3일 만에 깨끗이 나았다고 자랑하며 그 부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더욱 놀랄 일은, 박군의 문장력이 엄청나게 향상되었다는 사실이다. 박군은 평소 2장의 편지를 쓰려면 1주일 정도 진땀을 흘리며 고심해야 형편없는 솜씨로 겨우 편지지를 메꾸는 정도였다. 그런데 시술과정에서 박군이 자동서기에 호기심을 보이기에 그를 보호하고 있는 수호령들의 의식수준을 높여주었더니, 독자들이 생각하기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결과가 생겼다.


우리나라에서는 야사(野史)에서 조차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전설적인 여인왕국에 대한 이야기를 불과 1년 만에 200자 원고지 6천 매가 넘는 분량으로 자동기술한 것이 아닌가!


어찌 생각하면 박군이 필자를 찾아온 것이나, 필자가 박군에게 정성을 기울였던 것은 전생의 어떤 약속 때문이 아닌가 한다. 또한 박군도 필자도 여인왕국의 역사를 현세에 밝혀야 하는 사명을 하늘로부터 받고 세상에 태어났다고 생각된다.


박군이 여인왕국의 역사를 완성하는 동안 받은 고통을 필설로는 다 표현할 길이 없다. 전쟁하는 장면이 나오면 창이나 칼에 찔려 죽는 고통을 수천 번도 더 겪어야 했으며, 여인들이 모진 수난을 겪는 장면에서는 박군도 모진 고문에 시달리는 영적 파동에 싸여 몸부림쳐야 했다.


특히나 사대사학자(事大史學者)들의 영혼이 대거 몰려와 위협과 공갈로 괴롭히는 파동에 젖어 싸워야 했으며, 또한 밤과 낮이 뒤바뀌어 1년 동안 밤잠을 자지 못하였으니, 그간 혈변을 쏟은 적도 부지기수였다.


나는 1988년 2월 말경 여인왕국의 옛 왕국터를 찾기 위하여 안동(安東)이라는 지명만 알고서 동료6명과 함께 무작정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이때 옛 사벌터(상주군 사벌면)에 도착하자 여인왕국 존재 당시 지박령(地搏靈)이 되어 2천 년 이상 머물고 있던 수많은 원령(怨靈)들이 자기들을 구해 달라고 발악을 하여 천도해 주었다.


그리고 예천(醴泉)·풍산(豊山)을 거쳐 안동에 도착하였을 때 멀쩡하던 내 육신에 풍산골 원령들이 대거 몰려왔다. 용광로의 쇳물이 녹아내리듯 삭신이 내려않는 것 같은 고통과 함께, 머리는 곧 터져나갈 것만 같은 압박감에 쓰러질 듯한 몸을 겨우겨우 지탱하며 첩첩산중을 헤매이다 늦은 시각에 민박을 하게 되었다.


동료들은 험한 시골길을 트럭에 짐짝 취급받으며 달렸던지라 피곤을 풀고자 술잔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평소 술이라면 마다않던 나 자신은 애석하게도 5시간 이상을 의식불명이 되어야 했다. 안동에 도착하기까지 사이에 여인왕국 존재 당시에 죽은 수많은 원령들이 악상념(惡想念)이 집단으로 몰려오니, 육신을 가진 의식으로서는 도저히 이들을 감당할 수 있는 재주가 없었다.


몸은 압축기에 죄여 피가 빠져나가듯 싸늘히 식어갔고, 그와 함께 몽롱한 의식이 사라졌다. 나는 내 영혼과 함께 원령들까지 육신 밖으로 끌어내어, 이들을 저승길로 안내해주고 다시 육신으로 영혼이 빨려들어가니 곧바로 정상적인 원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믿지 못할 사실이 있다. 왕궁터를 찾기 위해 천등산(天燈山)에 올랐을 때, 몇 킬로미터 밖에서 바라본 나의 눈에 왕궁 둘레가 황금빛으로 피어오르는 것을 뚜렷이 영시(靈視)한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여인왕국의 존재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렇게 지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글을 쓸 수 있는 소양이 전혀 없던 사람이 자동서기로써 책 6권 분량을 1년 만에 완성하였다면 믿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라시대 이전 6부족시대에 여인왕국이 존재하였다고 한다면 누구나 코방귀를 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미친놈 발작하는 기분으로' 오랫동안 망설이다 이 글을 세상에 발표하기로 했다. 이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역사는 시간이 흐르면 사회나 국가적인 이권(利權)과 자존심으로 인하여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변질될 소지가 많으나, 하늘은 가장 공평하게 모든 사실을 간직하고 있기에 앞으로 자동서기 형식으로 역사를 밝힐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자 함이다.


선군(단군) 이전의 신시 개천시대(한웅시대)나 한인 시대와 같은 '초인국'의 역사는 자동서기나 마음의 문이 열린 자가 아니면 밝힐 수 있는 뚜렷한 방법이 없을 뿐 아니라, 만 년 이전의 유물이나 유골을 놓고, 그 시대를 평한다는 것은 그 시대의 마음을 읽을 수 없기에 신빙성이 희박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둘째, 여인들의 한을 풀어주고 남녀가 진실된 사랑으로 화합할 때 인류는 구제받을 수 있으며, 남녀의 근원을 파고들어가면 한 생명의 가지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함이다. 앞으로는 남녀간에 우주적인 사랑의 문이 열려 조화를 되찾는 시대가 도래하리라 믿는다.


셋째, 왜곡과 가식으로 점철된 것이 우리의 역사이다. 개인의 주인이 마음이듯, 역사란 국가의 혼이다. 역사가 올바르지 못하여 교육이나 정치·문화·사상뿐 아니라 인간의 심상마저 뒤틀려 도덕성이 땅에 딩구는 현실이다. 원시발본(原始拔本)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으니, 앞으로 참다운 인재가 드러나 잃어버린 옛기억을 되살려 인류사상사에 큰 획을 긋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넷째, 우리 민족의 잠재의식 깊숙이 잠자고 있는 '한'의식을 일깨워 인류의 큰 흐름을 이끌어갈 수 있는 깨우친 자신들의 집단이 우리 한민족이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함이다.


다섯째, 인류에게 공포의 질병으로 번지고 있는 AIDS도 그 근원적인 뿌리를 알아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나오리라 보는데, 염려스러운 것은 앞으로 다른 병균과 합체될 위험성 마저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폐결핵이나 장티푸스·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속에 길모(AIDS바이러스)가 합체하여 예상치 못한 질병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모든 사물을 물질적인 관념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서구사상은, 미안하지만 별세계에서 온 신적 존재인 길모를 결코 파악해 낼 수 없다. AIDS바이러스도 인간과 동등한 신적인 존재이므로 인간과 공존공생할 수 있는 길을 현대과학과 정신문명이 협력하여 찾을 때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리라고 본다.


주지해야 할 것은, 인간의 악한 상념이 거대하게 쌓일 때 공간에 존재하는 수동체적인 미생물이 악(惡) 생명체로 돌연변이를 일으켜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병원체가 되는 것이며, 우리 몸속에 있는 미생물도 그 자체는 해를 끼치지 않으나 인간의 마음이 변이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화로운 마음으로 자신을 다스려야 할 것이다.


나는 15년 이상 의학적인 차원을 벗어나 뇌성마비나 암 등 각종 난치병을 기공(氣功)으로 치유한 경험이 많다. 서양의학이 인류에 공헌한 점이 많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동양의 비물질적(非物質的)인 정신과학과 화합될 때 더욱더 빛나리라.


여섯째, 앞으로 자동서기를 받을 수 있는 많은 인재들이 쏟아져나와 역사·종교·의학·과학 등 각 분야의 미비점을 보완할 때 인류는 급격한 진화를 할 것이며, 또한 모든 학문의 뿌리는 하나라는 사실을 진실로 깨닫게 될 것이다.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뜻있는 사학자들께서 여인왕국의 역사적인 고증을 밝히는 데 힘써주시면 고맙겠다. 유물은 필자에게 심증(心證)이 가는 곳이 있으나 아직은 밝힐 때가 아니라고 본다.


이제 독자들께서는 모든 면에서 부정적인 시각을 버리고, 있을 수도 있는 일이구나 하며 믿는 마음으로 이 글을 읽어가다 보면 여인들의 심정을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지난날의 잘못된 점을 거울삼아 개선할 때 밝은 미래가 펼쳐지리라.


모쪼록 인류에 사랑이 넘쳐흘러 아름다운 지구동산이 되고, 무궁토록 빛나길 기원하며 끝을 맺는다.


(심령감수자 김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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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국의 발자취
 
일러두기: '우르국의 발자취'는 [여인왕국(무린바타)] 제4권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드디어 유림 보살의 말문이 열렸다. 오래 전부터 시작된 지구성의 역사로부터 시작하여 애틀란티스, 무우, 레무리아 대륙의 이야기와 함께 그들이 어떻게 멸망하고, 그 후 한인들의 사회와 가야인의 발자취에 관하여 들려주었다. 이것은 흘러간 역사로서 실상을 모르는 우리 인간이 얼마나 우매한가를 보여주는 역사였다.
자비의 마음으로 진녀에게 들려주는 고귀한 유림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시베리아 대륙과 만주 강역, 그리고 중원의 대륙에서 어지러운 역사가 펼쳐지고 있을 무렵, 12연방의 하나인 우르국도 가시밭길을 헤치는 고난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미 왕검시대 이전에 티벳으로 자리를 옮겨갔던 우르인들...... 종족은 한 종족이었으나 그 파는 세 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가이야파와 샤카파, 그리고 우르그파로 나뉘게 되었다. 이들이 세 파로 나뉜 것은 한인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우르국의 어느 스승 가문에 3남매가 탄생하여 성장하였다. 셋 모두 20세 이전에 영혼의 스승이 되어 있었다. 당시 우르인들은 3개의 큰 도시에 나뉘어 살고 있었는데, 이들 3남매는 우르인들의 추앙을 받고 있었던지라 각각 세 도시의 스승으로 가게 되었다. 첫째가 가이야로서 북내 마을로 갔다. 둘째가 샤카로서 연인이었는데, 검은 머릿결과 아름다운 눈을 가진 그녀는 어느 곳보다도 여인들이 많이 며여 사는 남내 마을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우르그는 붉은빛이 도는 머릿결을 갖고 태어난 예쁜 모습의 남아로 서내 마을로 가게 되었다. 이 세 사람은 우르인들이 자신들을 필요로 하므로 한웅시대가 되기 직전까지 우르인들과 함께 살았다.
 
그러나 한웅시대가 시작되면서 이 스승들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우르인들은 그 어느 종족보다도 스승에 대한 존경과 믿음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한웅시대가 시작되면서 그들의 마음을 쓰다듬어주고 기댈 수 있는 영혼의 스승이 그들 곁을 떠나자 모두들 가슴 아파했다. 아, 영혼의 스승이여! 우르인들은 진리가 화현된 모습을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그러나 자신들의 몸과 마음을 맡길 수 있는 스승이 그들 곁에서 사라져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우르인들은 더이상 그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영혼의 스승을 바라는 것 못지않게 우르의 피와 전통을 먼 후세에까지 지켜야 한다는 불타는 사명감을 가진 종족이었다. 그리하여 먼 대륙으로 이동하여 그들만의 은둔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르인들이 서로 헤어져 살기 시작한것은 '안부련' 천황때부터이다. 이제까지 살던 터전에서 샤카족이 맨 먼저 지금의 티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가이야족이 뒤따라 티벳으로 옮겨왔다. 우르그족만이 옛 조상의 땅을 지키면서 살아갔다.
 
한웅시대에 12연방국 전체에 스승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한인시대 때처럼 스승이 많지 않았고, 사회 분위기가 사뭇 달랐던 것이다. 우르인들의 스승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은 어느 연방국보다도 크고 깊었다. 그중에서도 샤카족은 더욱 그러하였다. 한인시대에 그 아름다웠던 여스승, 그리고 그 자비를 샤카인들은 결코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샤카족과 가이야족은 연방국을 멀리한 채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며 티벳의 고원지대에서 은둔생활을 계속했다. 언젠가는 스승이 나타날 것을 기대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두 종족이 모여 산 것은 불과 70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세월이었다. 가이야족은 오랜 전통을 계승하기 위한 일에 더욱 비중을 두는 종족이었다. 따라서 한인시대의 전통을 지키고 싶어했다. 변하지 않고 변할 수도 없는 우르의 문화, 우르의 것만을 고집하며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마음은 숭고하기까지 하였다.
 
반면, 샤카족은 모든 문화전통이란 한낱 물거품일 뿐, 잘못하다가는 물질욕에 사로잡히고 만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우르그족은 두 종족과는 반대로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식과 지혜를 먼 곳의 이민족들에게까지 전해야 한다고 생각 하고 있었다.
 
우르그, 샤카, 가이야족들은 이렇듯 생각하는 바가 서로 달랐다. 이들의 생각이 이렇게 틀려진 것은 한인시대 때의 세 분의 스승이 각 도시에서 각자 자기 식의 얼을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우르그족을 남겨둔 채 티벳으로 이동한 샤카족과 가이야족 사이에는 같은 민족이요 같은 형제라 할지라도 서로가 추구하는 이상이 같지 않았기에 깊은 조화를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불과 70년 만에 헤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14만의 샤카족은 가이야족을 티벳 고원에 남겨둔 채 높은 히말라야를 넘어 천축국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인도에 이르러 푸른 초원이 드넓게 깔려 있는 기름진 땅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뒤를 이어 수메르인들이 찾아오고 또 양운국인들도 찾아들었다.
 
샤카족 모두의 스승에게로 향하는 믿음과 기다림이란 너무도 간절하였다. 그 그리움이란 풀 한 포기 없는 열사의 사막에서 물을 찾아 헤매는 이들의 심정이나 매한가지였다. 샤카족은 새로운 스승이 찾아오길 간절하게 기다렸다.(원주: 샤캬족의 마지막 성자가 '석가모니'이다.)
 
그러나 티벳의 우르그족이나 가이야족은 샤카족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가이야의 나이 먹은 이들은 새로 태어나는 어린 가이야들에게 전통을 계승시키며 이민족의 접근을 막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우르그족은 서아시아로 떠난 수메르인의 뒤를 따라나섰다. 이것은 모험이었다. 한인의 피가, 우르인의 피가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를 미지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통보다도 영혼의 불멸성을 믿으며 후세에 깨우친 존재가 자신들 앞에 나타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모험에 대한 두러움은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르국의 우르그족의 뒤를 이어서 소수의 선비족도 따라갔다. 수메르인이 이동하여 머물던 곳이 바빌론이었다. 우르인, 그리고 선비인까지 찾아와 바빌로니아시대가 이루어졌고, 서아시아 민족들의 정신과 문화를 일깨우게 되었다.
 
우르국인들이 셋으로 분열되었듯, 수메르인들도 한인들의 터전 위에서 살아갈 적에 셋으로 분열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는 바빌로니아로 이동하였고, 또 하나는 인도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선군시대까지 히브리족을 수호하며 지냈다. 히브리인들이 오늘날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수메르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을 위하여 수메르인들인 행했던 그 많은 노력을 히브리인들은 모르리라.
 
 
세월이 흘렀다. 모든 이들의 마음은 바람결에 따라 갈대가 춤을 추듯 흔들리며 분열과 전쟁과 탐욕의 늪으로 빠져들어갔다.
한웅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소도의 세계도 조금씩 변모했다. 그러나 소도의 세계는 결코 억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한인들 모두가 영혼의 스승이 존재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샤카족이 기다리는 영혼의 스승은 인종과 이념, 사상은 물론 우리 인간의 것을 초월한, 오직 자비만이 흘러넘치는 스승이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옛 스승이었던 샤카는 지극히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태어나 우르인의 마음에 자비를 심어주었던 위대한 스승이었다.
 
한편, 샤카족이 떠나간 이후 티벳의 가이야족은 오로지 전통계승에만 힘을 기울이며, 훗날 중화족의 습격을 받아 청구인의 도움으로 그들을 물리치기 전까지는 샤카족과 서로 왕래하면서 외롭지 않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엄청난 숫자의 중화인들의 기습을 받은 후 가이야족은 두 패로 나뉘게 되었다. 하나는 샤카족이 있는 천축땅으로 가자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남으로 이동하여 고요한 밀림속으로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샤카족이 있는 천축으로 가자는 쪽의 주장은 한인사회에서 어리석은 무리들과 어울려 다투며 사는 일은 더이상 자신들의 삶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동하여 밀림 속으로 들어가자는 쪽은 아직도 오랜 전통을 이어가야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들 가이야족이 이같은 일을 겪는 것은, 중화인들의 기습으로 38만여에 달하던 순수 가이야족이 16만여라는 반도 안되는 숫자로 줄어든 엄청난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은 단순히 희생이랄 수가 없었다. 그저 억울한 개죽음이었을 뿐이다. 결국 10만여의 가이야족은 히말라야를 넘어 샤카족이 살고 있는 곳으로 찾아가고, 6만여 명은 지금의 라오스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가이야족의 수난의 세월이 시작된다. 가이야족은 오랜 세월,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몸부림쳐왔었다. 눈물겨운 가이야족의 역사, 그러나 그들은 전통을 지킬 수 있었던 것으로 만족했다. 그들로서는 조상때부터 이어져내려온 값진 문화를, 그리고 온갖 진귀한 기록을 보존한다면 그것으로써 소임을 다한 것이었다.
 
그들이 지닌 전통 가운데는 눈부시고 값진 보석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기록은 하지 않았다. 물건이라면 그것을 만드는 방법을 정확히 계승시켰고, 글이라면 모두 외워 암기하도록 했으며, 수리라면 모두 풀어 이해시키며 전하였다.
 
가이야족은 밀림 속으로 이동하면서 더이상 어질게만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고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가이야족은 전통을 계승키 위하여 지금의 라오스에서 태국으로, 미얀마로, 그리고 다시 라오스에서 베트남으로 이동하는 매우 고생스럽고 고난스러운 세월을 이어갔다. 가이야족이 밀림 속에서 이렇게 자주 이동한 이유는 밀림 속엑지 중화인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혹 중화족을 만나 농경법을 가르쳐주기도 하였지만, 그들과는 근본적으로 같이 사는 것을 피했다. 결코 중화족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싸움이 싫었고, 무엇보다도 희생당하기 싫어서였다.
 
가이야족은 이렇듯 고생을 자처한 종족이었다. 이들의 마음이 지극히 낮아서 이토록 간절히 전통을 이어가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가이야족은 어느 종족보다도 깨다음의 길을 알고 있었고, 그 깊은 뜻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옛 모습 그대로, 가이야의 피를 그대로 간직한 채 머나면 미래에까지 계승시키자는 것뿐이었다.
 
선군(단군)시대가 시작되면서 우르인들은 밀림의 이곳저곳을 이동하며 여러 곳을 개척해 나갔다. 야수들의 위협 속에서 독충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우르인의 피를 지키며 전통을 계승하려는 저 가이야인들의 노력...... 그것은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가이야인들이 밀림 속에서 농사를 짓고 경작하는 모습을 오랜 세월 지켜보던 중화인들이 차츰 가이야인들 주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가이야인들은 그들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농경법을 가르쳐주고 되도록이면 싸움은 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과 가까이 하는 것은 가이야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일이었으므로, 가이야인들은 부득이 자신들이 닦아놓은 터전을 중화족에게 내주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가이야족(가야)의 이동
가이야인들이 밀림 속에서 나오려고 하던 때는 히브리인들이 수메르인들과 헤어지면서 인도로 들어가던 선군 한율시대와 비슷한 시기였다.
그러나 이동이 문제였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 어디로 이동을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이 가이야인들의 숙제였다.
그런데 기묘한 일이었다. 티벳에서 밀림으로 들어온 지 1천 년이 지나도록 인구는 제자리 걸음이었다. 더 늘어남도 줄어듦도 없이 그대로 6만여를 유지한 채 지금껏 이어져온 것이다. 그들은 매우 신비롭고 오묘한 존재들이었기에 밀림속을 이동하면서도 이렇게 지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고도의 지혜를 지닌 가이야인들은 이미 남아와 여아를 가려서 임신하는 법과 인구가 늘고 줄어드는 이치를 알고 있었다. 아니, 그들은 이미 그 이론을 정립시켜놓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의 수를 알맞게 조절하여 태어나게 하였다. 부족함도 더함도 없었다. 그것이 인륜의 법칙에 위배되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행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것이 훗날 가이야인들이 암울진 역사를 이어가는 업이 되었다. 지극히 자연스러워야할 역사의 흐름을 위배하였으니 그 죄과를 받는 것이었다. 가이야인들은 미래를 알고 있었다. 머나면 미래를 알고 있었기에 미래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전통을 지키고 싶은 것이었다.
 
히말라야 산맥을 너머 푸른 숲을 열며 살아가는 샤카족, 그들은 갠지스강을 사랑하였다. 그것은 모성이 깃들인 어머니의 젖줄이었다. 샤카족이 갠지스강을 사랑하듯 가이야족들도 메콩강에 대하여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다. 습한 밀림속을 멀없이 흐르는 아름다운 메콩강, 식물은 우거지고 그속에 동물들이 뛰어놀았다. 인간을 해치는 독충들이 있어도 자연의 한 부분이었고, 범과 사자 그리고 뱀과 같은 무리들이 있다 하여도 그것마저 함께 공존하는 자연의 부분이었다.
 
갠지스강은 말없이 그리고 고요하게 흐른다. 그러기에 그 강을 '어머니의 강'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갠지스강을 어머니의 강이라 한다면 메콩강은 바로 '여인의 강'이었다. 순결한 여인의 모습처럼 우거진 밀림 속을 흐르는 메콩강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러나 가이야족은 이 아름다운 메콩강을 잊 버리고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두고 떠나는 나그네의 심정과도 같은 가이야인들, 그들은 남아 있고 싶었다. 이 아름다운 곳을 두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러나 더나야 했다. 우르의 피를 먼 후세에까지 지키기 위해서는 민족들이 살지 않는 곳으로 떠나야 한다. 가이야인만이 살아갈 수 있는 더욱더 울창한 숲속으로 떠나야 했다.
 
가이야인들은 머나먼 미래를 예견하였다. 자신들이 들어가 살아야 할 터전이 동쪽의 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곳은 미래의 시대를 열기 위하여 한인들이 잠시 머무는 곳이었다. 아니 그곳은 가이야인뿐만이 아니라 한인들 모두가 살아가야 할 터전이었다. 산과 계곡이 많으며 울창한 숲으로 뒤덮인 곳이었다. 그곳은 한인들의 맥을 이을 수가 있는 곳이었다. 산이 많기에 끊없는 지기가 한인의 몸을 감쌀것이며 '기'가 머문 곳이기에 오랜 세월 한인들을 보살필 수가 있을 것이다. 여인의 기가 흐르고 남인의 정기가 머물고 있기에 시련이 찾아와도 먼 미래에 까지 한인의 맥을 이을 수가 있을 것이고, 가이야의 맥을 이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가이야의 장로들은 한인들의 맥이 동쪽의 끝으로 옮겨지기 전에 먼저 도착하려고 장구한 계획을 꾸미기 시작했다.
 
가이야의 인구는 모두가 6만여 명이었다. 6만여의 가이야인들은 모두 여섯 파로 나뉘어 앞으로 1천 년의 세월이 흐르는 기간 동안 이동에 이동을 거듭하여 어느 방향으로든 동쪽 끝으로 가자고 약속했다. 어느 경로를 거치든 동쪽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만나 함께 가이야국을 건설한다는 계획이었다. 여서스로 분열하여 1천 년의 기간이 흐른다 하여도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는 지극히 어렵고도 모험적인 이 계획...... 그것은 가이야인들을 절벽 사이로 걷게 하는 계획이었다.
 
이들의 계획이 이루어진 것은, 마침내 여섯 파로 나뉘어 떠나게 된 것은 선군(단군) 고불새대였다. 이것이 훗날날 6가이야가 된 원인이었다. 여섯 파의 이름은 장로들의 이름을 따서 '뉴릉파', '소파', '시아파', '차요나파', '수르파', '금파'로 나뉘었고, 각 파마다 1만 명의 인원이었다.
 
가이야인들은 헤어지면서 서로간에 약속을 하였다. 마치 보물지도를 6장으로 나누어 보관하였다가 후세에 만나 다시 짜맞추자는 것과 같은 약속이었다. 가이야인들만의 전통이었던 깊은 학문, 그것은 주역의 다른 모습이었고 천부경의 다른 모습이었다. 인간의 모습이 서로 다르듯 이같은 수리에 있어서도 그 색깔을 달리하였다. 본래의 뜻은 같을 지라도 가이야인들만의 전통이 있었다. 심오한 비전들, 그것을 모두 열거할 수는 없다.(원주: 이러한 비전을 현대인에게 맞게 밝힐 인재가 많이 드러나 옛 선인들의 지혜를 배우는 시대가 오리라.)
가이야인들만이 그 심오한 '맥'을 6등분하였다.
 
그들이 헤어지기 전에는 여섯 파 모두가 가이야 맥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약속하기를, 헤어진 후 각 파는 그들의 지녀들이 대를 이어갈 때 정해 놓은 것만을 가르치자는 약속이었다. 그리고 1천 년 후에 가이야인들이 동쪽 끝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우면 그때 여섯 파들은 조상 때부터 이어내려온 맥을 각자 제시한다는 것이었다. 6등분의 맥이 만나 하나로 완성되면 비로소 가이야는 머나면 미래에 까지 이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이들은 굳게 믿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선군(단군)고불에 이르러 가이야는 헤어졌다.
 
아름다운 여인의 강 메콩강을 멀리한 채 가이야의 여섯 파는 차례대로 떠나갔다. 그들은 참으로 지혜로웠다. 여섯 파들은 헤어졌지만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 서로 떨어져 있었을 뿐 실제로는 메콩강을 떠나지 않았다. 인구를 급격히 줄여 떠나려는 것이었다. 이른바 산아제한을 하여 한 파에 1만명의 인원을 10분의 1로 줄이고, 그것을 다시 10분의 1로 줄여 불과 100여 명에 이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최소규모가 되었을 때에 이동하는 것이었다.
 
6부족 모두가 100여 명으로 축소되어 실제로 메콩강을 떠날 때까지는 300여 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들은 목적지에 정착하여 1천 년이 되는 해에 또다시 1만여의 불어난 인구가 되어 만나려는 것이었다. 가이야인들이 인구를 축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구가 적어야 이동이 용이하며, 언제 어느 때라도 빠르게 도적들로부터 숨어버릴 수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가이야인들은 이렇게 스스로의 운명을 시험과 모험 속에서 오직 전통계승의 목표만을 위하여 움직였다. 이제 100여명이라는 극소의 인원으로 축소된 가이야인들은 길을 떠났다. 6가이야 모두가 100여 명씩으로 변하였으니 전원이 600여 명이었다.
 
동쪽 끝(한반도)을 향하여 바람따라 물결따라 흘러가는 시냇물처럼 삶을 영위해 가면서 이동민족들처럼 이동하여 갔다. 6가이야인들의 이동경로를 보면, 뉴릉파와 소파는 해상경로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차요나파, 시아파, 수르파는 티벳을 거쳐 옛 우르국을 지나 시베리아로까지 이동하여 바이칼호 북쪽 너머로 길을 택해 떠났다. 그리고 금파만이 티벳으로부터 동으로 이동하여 중화대륙을 통과하여 조선국에 이르고, 또다시 만주에 이른 후에 백두산을 거쳐 반도로 들어오게 되었다. 따라서 금파는 어느 파보다도 일찍 들어오게 되었고, 1천 년 후에 다시 만났을 때에는 인구가 5천이 더 추가 되어 1만 5천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금파는 순수 우르인의 피를 보존하질 못하였다. 금파는 훗날 금관 가이야가 되어 가다리고 있었지만, 나머지 5가이야인들은 이를 인정치 않았다. 아니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토록 우르의 것을 지키려 하였건만 정말 애석하였다. 금파를 제외한 다섯 파 모두는 정구한 1천 년이라는 세월 동안을 한치도 어김없이 우르의 맥을 지켰었다. 그런데 금파만이 지키질 못한 것이다. 이것이 가이야가 오늘날까지 순순하게 남아 있지 못하게 된 이유가 된다.
 
그렇다면 과연 가이야의 맥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가이야의 맥이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열쇠도 가이야의 맥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방법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시시각각으로 변해 가는 인간의 삶, 과거 현재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수리로 이루어진 신비의 학문, 그것은 가이야인들만의 학문이었다.
 
이미 12연방에서 9나라가 된 지금 가이야만이 갖고 있는 이같은 전통은 변질되었다. 순수한 것은 남아 있지 않았고, 깨달은 이들은 미래를 위하여 현실세계에서 모두 없애버린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나 가이야인들만이 비기로써 이를 지키기 위하여 헌신의 노력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 6가이야인들은 헤어지기 전 서로간에 약속하기를, 피를 지키지 못한다면 가이야는 그것으로 끝이라고 굳게 약속하였던 것이다.
 
 
아ㅡ 아ㅡ 가이야인이여! 가이야인이여! 그들이 우르국에서부터 티벳을 거친 후 메콩강에서의 삶, 그리고 또다시 나뉘어 1천 년 동안을 이동하면서 고유의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겪어야 했던 그 어려운 삶의 투쟁들...... 이 어찌 말로 다할 수가 있겠는가? 가이야의 정신,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지키려던 우르의 맥! 과연 그들의 행위는 옳은 것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일일까? 무엇 때문에 그들은 지키려 하는 것일까? 아니, 지켜야 할 필연적인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그 험난한 길...... 그것은 한마디로 피 흘리는 삶의 투쟁사였다.
 
우르의 영혼들이여! 아루좌의 영혼들이여! 찬란한 그 빛, 그리고 그들의 사랑, 비록 육체인간의 모습으로 남자와 여인의 모습을 취하고는 있어도 그들은 분명 아루좌의 여신들이었다.
1천 년의 세월은 그들의 투쟁어린 삶과 함께 어우러졌다. 저 드넓은 시베리아 벌판에서, 그리고 바다를 낀 섬과 해안에서, 또한 소수의 집단을 이루며 국경 사이에서 온갖 고생을 사서 하며 살아가는 가이야인의 서글픈 삶...... 드넓은, 그리고 매서운 추위의 강풍이 몰아치는 시베리아에서 이민족들에게 몇 번이나 멸망당할 뻔했던 그 아슬아슬한 순단들...... .
 
 
언제였던가 수르파에서의 일이었다. 부족 전원이 투르크인에게 전멸당하고 어느 한 가족만 남게 되는 일도 겪었다. 아버지와 두 딸만이 남아 그 핏줄을 이어야만 하였다. 시아파에서는 어느 어머니와 아들만이 스키타이족에게서 탈출헤 성공하여 핏줄이 이어진 때도 있었다. 차요나파에서는 어린 미소년 하나에 이미 수태를 할 수 없는 여인들만 남아 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여인의 극적인 임신으로 차요나의 핏줄은 이어질 수 있었다.
 
육상경로에서 살아가던 이들 못지않게 해상경로에서 살아가던 뉴릉파와 소파 역시 엄청난 시련을 겪으며 살아왔다.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이들의 슬픔, 그 순간들...... 해상에서 풍랑을 만나 전멸 직전에 극적으로 살아남았던 수많은 일들, 그리고 떠돌이 해적선과의 쫓고 쫓기는 아슬아슬한 순간들...... .
 
그러나 가이야인이라는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고난의 연속이 그들을 괴롭히면 괴롭힐 수록 가이야인들은 더욱 강인해졌다.
가이야인들은 어느 곳이든 오랫동안 정착하는 법이 없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위치가 외부에 알려지면 언제고 그 즉시 이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동으로 동으로 이동하여 가이야인 전원이 반도에 도착한 것은 200여 년 후의 일이었으니, 어느덧 종족간의 헤어짐이 있은지 5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가이야족(가야)의 이동 경로
 
드디어 가이야인들은 미래를 위한 한인들의 터전에 도착하였다. 대륙에서는 선군(단군) 아홀시대가 열리고 있을 때에 6가이야인들은 모두 한반도로 들어가 깊은 숲속으로 잠적해 버렸다.
 
뉴릉파와 소파는 반도의 남해안으로 상륙하였는데, 이는 부족국의 시조 용장이 들어오기 훨씬 이전이었다. 그러나 뉴릉가이야, 소가이야보다 먼저 들어온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금관가이야인들었다. 시아가이야는 지금의 황해도에 숨어 살았고, 차요나가이야는 함경도에. 그리고 수르가이야는 강원도의 깊은 숲속을 골라서 잠적해 버렸다.
해상을 통하여 들어온 뉴릉가이야와 소가이야는 금관가이야가 머문 김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살아가고 있었지만, 이들은 서로간에 왕래는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 1천 년이 흐르지 않았고 인구도 늘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때에 금관가이야인들만 1천 명의 인구로 불어나 있었고, 나머지 5가이야인들은 300내외의 인구였다.
 
가이야인들은 숨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미래를 위한 터전이랄 수 있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강산 위에는 언제부터인가 도적들이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이야인들이 반도로 들어오기 전 선군 색불우가 진한의 병사들로 하여금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이게 한 적이 있다. 도적떼로 인하여 지기를 어지럽히지 않기 위한 조치기도 하지만, 우선은 가이야인들보다 먼저 들어와 살던 이들의 요청이 있어서 진한의 병사들이 대대적으로 움직였던 것이다.
 
순수한 12연방의 후예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조선국의 고로들은 말하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천부경의 수리를 풀어서 스스로 모두가 알고 있었다. 12연방의 맥이 조선으로 이루어지고, 조선의 맥은 어느 날 그들의 후예가 반도로 들어와 어느 위치에 정착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이미 그렇게 결정되어 있는 일이었다. 이미 수리의 법칙속에 나와 있지 않은가?
그런 뜻에서 가이야인들이 머물러야 하는 곳은 바로 지금의 경남지역이었다. 억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옛날 모든 고로들은 이렇게 철리가 깊었고 하늘의 뜻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고있는 이 땅, 얼마나 비좁은 땅인가? 그러나 이 땅은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의 모든 토지와 그 맥이 이루어진 곳이요, 지기의 중심인 것이다. 그렇기에 12연방의 후예들, 그리고 조선 9나라가 망하면서 그들의 숨은 맥이 모두 이 땅으로 모인 것이다. 12연방 때부터 각 나라에서 그 나라만이 지니고 있던 수리 속에 이미 아득한 세월의 좌표들이 나열되어 있었고, 한인들은 이를 어김없이 지키며 살아갔다. 지금 이 장에서 가이야인들이 들어와 살아가던 지금의 경남지역 외의 다른 곳은 밝힐 수 없다. 아마도 현실세계에서는 그것을 확실히 밝힐 수 없으리라. 그대들 모두가 알아차렸을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하늘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6가이야인들은 그들이 약속한 것보다 500여 년을 먼저 들어와 고요한 숲속에서 조용히 살아갔다. 어느 땅보다도 풍부한 지기로 감싸여 있는 땅 위에서 서서히 인구를 늘려가며 조상들로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 들은 문화유산을 키우면서 보전해 나갔다. 이 땅은 지구라는 둥근 모습의 생명체의 중심이었다. 지맥의 흐름도 하늘의 기운도 이곳으로 부터 지작되고, 운명의 열쇠도 이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사계절이 어느 곳보다도 뚜렷한 곳이었고 험준하며 생명체의 골격을 갖춘 듯한 이 땅은 분명 끝없는 인맥이 이어지기에 충분한 땅이었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땅이던가! 그대는 이 아름다운 강산을 아는가? 산이 많다 불평하는 그대는 누구인가? 보배로운 이 땅이 있었기에 한인의 맥은 이렇게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삶의 역사 속에서 우리 한인들처럼 이렇듯 상상을 초월한 강성한 역사를 이룩한 것부터 최약소국으로 전락한 순간까지 면면히 이어져온 민족은 일찍이 없었다.
우리 반도는 산이 많기에 그 어느 나라보다도 산신들이 많다. 인간이 전쟁을 할 때 신들도 함께 춤을 추게 되는 것, 산이 많은 반도에 머문 한인들은 많은 산신들의 가호 속에서 살아 숨쉬었던 것이다. 망함이 있으면 흥함이 있고, 흥함이 있으면 망함이 있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 한인들은 망해 본 일은 없었다.
 
우리 한인의 역사는 흥망의 삶이 아니었다. 초월의 역사 바로 그것이었다. 한인들 모두는 그 옛날 이미 한의 의식에 까지 이르렀던 존재였기에 감히, 그리고 떳떳이 힘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깊고 깊은 그윽한 애정이 없었다면 지구성의 맥이 연결된 아름다운 이 강산 속에서 수없는 눈물의 삶이 이어질 수가 있었겠는가?
그대들은 이제 한인들의 엣 의식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대들이 받아야 했던 값진 희생의 역사, 눈물의 역사에서 이제 깨어나야만 할 것이다. 한없이 움츠려야만 했던 지난세월의 역사, 그것은 정말 값진 희생의 역사였다.
 
이 순간 한인들 모두는 깨달은 존재가 돼 있어야 할 존재들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깨달음의 순간을 포기한 채 또다시 중생의 삶 속에 뛰어들어야 했던 우리 한인들...... 가이야는 이렇게 미래를 위하여, 희생의 역사를 치르기 위하여 이 땅에 들어온 것이다. 신은 분명 가이야인들에게 축복의 빛을 보낼 것이다.
 
세월은 말없이 흘렀다. 500여 년의 세월은 이렇게 말없이 흘러갔다. 맑고 드높은 저 푸른 하늘에는 산새가 울며 날아가고, 들에는 곡식이 춤을 추며 맑은 시냇물 소리는 정겨운 소리로 흐르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산하 어디에나 가이야들의 숫자는 늘어가고 있었고, 어느덧 만나야 할 세월은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나 고생스러웠던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6가이야의 세월들...... 그러나 그들은 견디어냈고, 이제 만나야 할 순간이 임박해 옴에 따라서 모두가 서서히 남하하기 시작했다.
 
1천 년 만의 재회, 보고픈 얼굴들, 얼마나 서로들 변해 있을까? 가이야인들은 부푼 꿈을 안고서 숲을 거닐었다. 그간에 가이야인들도 많이 변하였다. 이동민족들이 살아남기 위해 공격적으로 변하고 용맹스럽게 변할 수밖에 없었듯, 그간에 가이야인들도 살아남기 위하여 변해 있었다. 하지만 가이야인의 심성 그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변치 않은 그들의 심성, 그것은 고귀한 것이었다.
 
가이야인들은 그들만의 변치 않은 심성을 지닌채 1천 년 만의 재회를 가졌다. 이때가 선군 사벌 때였으니, 한인의 역사의 흐름이 피를 나타내는 시기였다. 1천 년 만의 재회, 모두가 끌어안고 통곡과 오열 속에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이 기쁨, 반가움...... 어떻게 이것을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가이야인들은 드디어 모였다. 기나긴 방랑의 세월, 전멸직전 까지 갔던 순간들이 있었던 세월...... 그러나 가이야는 멸망히지 않고 이어져왔다. 비록 금관가이야는 변질되어 있었지만 전부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금관가이야 내에서도 순수혈통과 피가 섞인 사람과는 분리되어 있었다.
 
대륙의 중앙으로 통과하였던 금관가이야, 이들 또한 어느 가이야 못지 않게 시련의 세월을 살아왔다. 설사 순수하게 지키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맥은 지켜지고 있었다. 금관가이야로 인하여 5가이야는 재회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얼마나 안타까워하였던가?
 
그로 인해 가이야의 사회에서는 실로 오랜 세월에 걸쳐 금관가이야를 인정하느냐 마느냐를 놓고서 고심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결국 인정은 하게 되었지만 가이야인들은 슬픔을 금치 못하였다. 얼마나 그들의 피를 지키려고 노력하였던가? 하지만 피는 지키지 못하였어도 가이야의 맥은 이어질수가 있었다. 여섯으로 나뉘었던 맥이 하나가 되었으니 가이야는 비로소 완성이 되었고, 완성된 즉시 어딘가 모를 깊은 곳으로 가이야의 맥을 감추게 되었다.
 
머나먼 미래를 위하여 그 값지고 고귀한 가이야의 맥은 잠시 현실의 세계에서 사라져버렸다. 그와 함께 가이야인들은 절규 속에서 순수혈통을 지켜야 하는 일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여! 기이야의 세월이여! 이들의 기나긴 삶의 투쟁사여! 정말 슬프고 안타까웠다. 그토록 오랜 세월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역경의 세월을 믿음과 사랑을 지닌 채 지키려고 애써왔던 기나긴 가이야의 역사...... .
 
그러나 끝내 지키지 못한 것은 어쩌면 하늘의 뜻이 아니었을까?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인고의 세월을 감내하며 지키려고 몸부림치며 살아왔지만 결국 지키지 못하고 말았던 것은 머나먼 미래를 위하여 신의 뜻이 그렇게 흘러간 것이이라. 머나먼 미래...... 가이야인들이 혈통을 지켰고, 그래서 한인들 모두가 대륙에서 반도로 들어와 역사적 은둔생활을 하기 위해 새로운 삶의 역사를 시작했을 때 이미 가이야인들이 거대한, 그리고 강력한 순수혈통으로 이루어진 국가가 형성되어 완벽하게 독립적인 위치에 있었다면 이곳 반도의 역사는 예상 밖의 흐름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하늘의 뜻이 가이야인을 버리건 버리지 않건, 또한 그것이 하늘의 뜻이건 아니건 어쨌든 가이야인들만의 힘으로 왕국이 이루어졌다면 역사는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가이야의 값진 전통은 어느 나라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병법가도 가이야인들을 능가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 어떤 주술인들도 가이야인들을 능가할 수는 없었고, 뛰어난 예술인이라 하여도 가이야인들보다 더 뛰어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가이야인들이 금관가이야로 인하여 선언해야 했던 그 슬픔의 선언...... 이를 그 옛날 '모가에테' 의식처럼 '모지스'선언이라 부르게 되었다. 모지스 선언, 가이야인들은 이를 슬픔의 선언이라 불렀다. 한인시대부터 이어져내려온 그 엄청나게 값진 고서들이 모두 소각되었고, 값진 예술품도 필요치 않은 것은 더이상 만들지 않기로 하였다. 실로 눈부신 가이야 역사가 사라져가는 것이었다. 가이야 역사가 사라져 갈 때에 가장 값진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가이야의 예언서일 것이다.
 
 
여인왕국 당시의 가이야(가야)
 
가이야의 예언서는 한치의 오치도 없는 세월의 흐름을 적어놓은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소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그 속에는 이런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그것은 한인들의 머나먼 미래사를 말한 것이리라.
 

 
어느 구절엔가이렇게 씌어져 있었다. 한인이 가슴속에는 이렇게 스승을 향한 믿음이 깊었던 것이다. 샤카인들의 간절한 바람이이루어져 어느 날 스승이 내려오신 것과 같이 히브리인들에게도 그들의 간절한 희망과 바람 속에 스승(예수)이 강림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한인들은 미래를 위하여 수많은 인고의 세월을 참아 왔다. 간절하게 찾았지만 한인들은 미래를 위하여 잠시 동안은 망각해야만하였다.
 
모지스 선언 이후 가이야 역사는 순수혈통마저 사라진 슬픔 속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고귀한 문화를 간직하였건만 살아 숨쉬는 역사도 망각한 채 반도 남쪽의 깊은 산중에 숨어 역사를 영위했다. 더이상 아름다운 춤을 추는 일도 없었다. 가이야인이 머물러야 할 곳, 그곳은 인간의 척추였다. 매우 중요하며, 자칫 잘못하였다가는 영영 한인들의 맥이 끊어져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힘의 근원점에서 살아가고자 한 것이다.
 
가이야인들은 알고 있었다. 미래의 저 현란한 불빛을 알고 있었기에 아름다운 이 강산을, 그리고 지맥을 더욱 견고히 다져나갔다.
선군(단군) 사벌시대에 들어와서의 가이야인들의 희생과 노력...... 어찌 말과 글로써 다 설명할 수 있으랴! 몇 세대를 거치면서 가이야인들이 행했던 고귀한 일들...... 가이야인들의 이같은 역사가 없었다면 우리 한인들은 헤아릴 수 없는 그 많은 외부세력에 의해 나라가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이때 가이야인들은 산세와 지세의 형상을 보면서 그 값진 일을 행하였던 것이다.
 
이 장에서 가이야인들이 행한 일을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이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인들을 위하여 값진 일을 하였다. 한인들의 허리는 힘이 차 있다. 그리고 가이야인의 노력에 의해 우리의 터전인 아름다운 금수강산의 척추는 지금 힘에 충전되어 있다. 아니, 그것은 신비스런 모습 그대로를 간지한 채 아직도 건재한 모습 그대로이다. 척추의 힘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흘러야 했던 가이야인의 눈물, 가이야인의 정성스런 노력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그 후 300년 지속되었다.
바로 그 시대에, 가이야인들이 아름다운 이 강산,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았는 모습의 척추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숨은 노력을 하고 있을때에 저 드넓은 마한의 관경에서는 북방의 이동민족과 진한과의 치열한 싸움이 끊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상상을 초월한 싸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반도에서의 한인의 역사는 슬픔의 연속이었지만 결코 일어서지 않았다. 바로 허리를 보호하기 위하여일 어서지 못하게 하였고 미래를 위하여 힘을 축적것이다.
하루하루 수많은 나날을 보내면서 여인은 앉아서 당하기만 하였다. 앉아 있는 여인은 당하는 법, 그러나 허리와 다리의 힘은 충전되는 법. 가이야인들은 이렇게 여인의 허리에 보이지 않는 줄로 여인의 여인의 허리를 바닥에 묶어버렸다. 미래를 위하여 함부로 일어설 수 없도록 그렇게 묶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때 가이야만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의 모든 나라에는 예언서가 있었고, 그 예언서를 추종하던 소수의 사람들은 이미 들어와서 가아야인들처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희생적인 일을 하고있었다. 어느 민족이 들어와 짓밟는다 하여도 짓밟히지 않는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행하였던 것이다. 그렇게기에 아름다운 여인은 아직까지 더럽혀진 적이 없다. 영원히 그 맥이 끊어질 수 없는 역사이리라. 앉아 있었기에 순결할 수 있었고, 어느 민족도 여인을 더럽힐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여인을갖고 싶어하는 것은 사내의 근성이리라. 사랑이 충만된 여인, 아픔을 씻어줄 수 있는 여인은 미래를 위하여 잠시 잠을 청했다. 잠자는 여인의 모습은 아름다운 것, 허리가 묶인채 잠자는 여인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수많은 세력들은 앞을 다투어 여인을 취하려 하였지만 성공할 수가 없었다.
여인은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깨달은 존재가 되어 잠에서 깨어나 진리의 칼을 들고 일어설 것이다. 그때 가아야인들도 태어나 여인의 허리를 묶었던 끈을 풀어버릴 것이다.
 
가아야인들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미래를 내다보면서 6가이야는 사벌시대 이후 여러 지방을 전전하다가 선군(단군) 음차시대에 이르러 드디어 정착하니 가이야의 새로운 삶이 이루어졌다. 가이야인들은 언제나 강을 끼고 살아갔다. 여인의 강으로 불리는 메콩강 유역에서처럼 가이야인들은 강을 사랑하였다. 강은 곧 여인의 젖줄이기 때문이었다. 목마른이에게 목을 적셔줄 수 있는 곳이기에 가이야인들은 강을 여인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여인의 젖줄을 끼고 시들어가는 가이야인의 흔적을 남기기 위하여 작은 문명을 일으켰다. 그러나 서쪽에서는 동백제의 전초가 되는 부족국가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북에서는 용장의 후예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조용한 문명이 시작되었다.
금관가이야인들은 갯벌과 바다가 교차되는 낙동가하류에서 쇠물을 다루는 문화를 일으켰다.
그리고 남으로는 바다와 동으로는 금관가이야와 인접해있는 고령가이야는 학문의 꽃을 피웠다. 고령에서는 강 유역의 기름진 옥토를 중심으로농사를 주관하며 '자기' 문화를일으켰다.
가이야산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성산인들은 가이야산을 어머니의 산이라 믿었고 성스러운 산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늘 제사를 올렸다. 가이야인들은 그 산을 바라보면서 천문, 지리, 의술을 비롯하여 주술 등 주로 영적인 차원의 삶을 추구했다.
 
지금의 경주를 중심으로 하여 펼쳐 살았던 아라인들, 그들은 음악과 미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었다.
또한 남으로 삼천포를 중심으로 여러 섬으로 나뉘어 살았던 소가이야인들은 유일하게 나라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섬들을 제후국들로 하였고 고성의 장로를 황제로 여기며 살아갔다.
대가이야는 지리산을 끼고 동백제를 견제하면서 무술과 무예를 단련하며 살아갔다. 이것이 최초로 선군(단군) 음차시대에 정착한 모습이었고,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이었다.
 
가이야인들은 욕심이 없었다. 쓸데없이 남의 땅을 침범하는 그런 민족이 아니었다. 조용한 침묵을 지키면서 가이야인들은 작은 사회를 이루며 꽃 피워나갔다. 서로가 부족한 것은 배워나갔고 서로간에 유학을 하는 아름다운 가이야의 사회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원주: 天(힘)에도 음과 양이 있으니, 陽이 고구려이며 陰이 발해이다. 地(지혜)에도 음양이 있으니, 陽이 동백제요 陰이 서백제이다. 人(사랑)에도 음양이 있으니, 신라가 陽이요 가이야가 陰이다.)
 
 
유림의 긴 이야기는 마침내 끝을 맺었다. 7일에 걸쳐 인류의 역사를 집약하여 진녀에게 들려준 것이다. 얻기 위해서는 싸워야 하고 죽여야 하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악해져야 하는 삶의 역사를 들려준 것이다.
그러나 진녀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이해의 차원을 넘어선 역사 이야기였다.
그저 놀랍기만 했다. 유림의 이야기 속에 나타난 엄청난 역사의 흐름을 놓고 볼 때, 자신의 현재 위치와 자신이 일생을 걸고 행하고자 했던 왕국의 역사가 단지 선군(단군)의 나라 한쪽 구석 한 부락 정도에 지나지 않으며, 그 동안 잠 못이루며 고심하고 고봉들과 함께 부족의 사내들을 죽이고 여인 통일을 하려 꾀했던 모든 일들이 보잘것없는 작은 분쟁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실망과 함께 회의도 느껴졌다.
 
진녀의 꿈은 인간이 머물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가 되었든 남과 여를 완전히 분리하여 여인통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림의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그 꿈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스승 기른장에게서도 선군의 나라의 단편적인 역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다. 진녀는 그때마다 세상 어느 곳이건 여인들이 살아가는 곳이면 여인통일을 시키리라고 다짐했었다. 저 먼 곳 서쪽의 대지에서 살아간다는 노란머리의 백인과 검은 피부의 흑인들까지도 언젠가는 자신의 뜻대로 여인통일을 시키겠다는 엄청난 꿈이었다. 그런데 유림 보살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의 꿈이 얼마나 허황된 일인가를 깨닫게 된 것이다.
 
생각해 볼수록 유림을 만나기 전까지의 자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몽매했던 연인들의 지도자였다. 자신의 생각은 우물안 개구리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비좁은 골짜기만을 헤매며 드넓은 세상을 너무도 모른 결과였다. 무엇보다도 그간 듣고 보아온 것이 부족국 여인들의 비참함과 남자들의 피를 거꾸로 솟게 하는 횡포가 전부였다. 그 결과 남자들에 대한 미움이 앞서 있었으니 세상을 높게, 그리고 멀리 볼 수가 없었던 탓이다. 나이도 이제 20을 넘긴 지 만 2년밖에 안 된 어린 나이다.
 
진녀의 거대한 꿈은 유림으로 인하여 깨어져버렸지만, 그러나 진녀는 정말 많을 것을 배웠다. 지금껏 생각해 왔던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일깨우게 만든 것이다.
 
[
한국의 脈
 
 
한국인이여!
하늘의 뜻을 알리나니
오랜 인고의 세월 속에서
지금까지 견디어낸 '한'인들이여!
 
 
인류 역사의 맥은 한국이나니
한국이라 말하니 이가 한이 아니던가?
그대들 개개인의 마음먹은 생각이
인류의 흐름을 좌지우지하고 있음을
그대들은 아는가, 모르는가?
 
 
한국이라 함은 하나일지니
마음속 하나에도 음양이 있듯
이 땅 위의 하나에도 음양이 있음을
'한'인들은 어찌하여 모르고 있는가?
 
 
아득한 신시시대(桓雄時代)의 역사를 지나
선군(檀君)의 시대로 들어섬이란
인륜의 법칙이 이행되던 시대요
그로부터 삼국이 이룩되었으니
이가 힘과 지혜와 사랑의
高句麗, 百濟, 新羅이니라
 
 
김춘추로 인하여 하나의 뜻은
渤海(발해)와 日本, 統一新羅로 이어지니
이도 힘과 지혜와 사랑이노라.
그러나 타국의 힘을 빌어
'한'인은 '한'인을 피로 물들게 하였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 아니요
땅의 뜻도 아닐지며
오직 인간의 뜻으로 이루어진 일이니라.
 
 
그로부터 하늘의 뜻은 인간을 거부케 하였으니
발해는 멸망하게 되었고
땅의 뜻도 인간을 거부하게 되었으니
백제의 맥을 이어받은 일본은
철저한 '한'인의 적이 되었음이니라.
 
 
그 후 '한'인의 역사는
하늘과 땅이 없음 속에서 보내게 되었으니
하나의 깊은 뜻은 사랑만을 지닌 채
인간으로서 고통스런
인욕의 세월을 걷게 되었음이니라.
 
 
고려의 역사는 하늘의 뜻을 속죄하는 역사이며
조선의 역사는 땅의 뜻을 속죄하는 역사였으니
그 아픔의 세월을 무엇으로 감당하리오.
 
 
인고의 세월을 지나
하늘과 땅에 대한 속죄가 끝맺게 되었으니
이것이 8.15 광복을 말함이요.
하늘의 뜻과 땅의 뜻이 풀림을 뜻하니
이가 곧 해방이 아니던가?
 
 
그러나 해방과 함께 맞은 분단은 무엇인가?
6. 25의 깊은 뜻은
天, 地, 人의 피로 인하여
인류 멸망을 구제하기 위한
하늘의 公事였음을 한인들이여!
아는가, 모르는가?
 
 
인류를 대신한 피의 흘림은
이제 축복으로 변하여
이 땅 위에서 인종의 합창이 이루어지니
天, 地, 人을 축복하기 위한
88올림픽이 아니던가?
 
 
한국의 분단은 선악의 대립이요
음양의 대립이니
인류의 선악을 대신하여 똑같이 피를 흘렸거늘
어찌하여 인류의 축복은 선에게만 갈 수 있단 말인가?
이 땅의 선악의 대립이 모두를 인정할 때에
선악이 된 '한'인들은 깨우침을 얻을 것이며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하나로 뭉쳐지리니.
 
 
하늘의 丹田이요
땅의 丹田인 천지를 되찾아야
새로운 인류의 역사가 이루어질지니
축복이 거부된 악의 마음을 무엇으로 달래어
天池를 되찾는단 말인가?
 
 
한국인이여!
한국인이여!
하나 될지어라.
하나 될지어라.
 
 
ㅡ1989, 神界에서
 
 
 
출처: 여인왕국(무린바타), 박충원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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