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일본의 침술학교과정

 

 

세계 최고령 현역 침구사로 유명한 灸堂 金南洙(94). 기자는 지난 2월 29일부터 3월 6일까지 일주일 동안 구당 일행과 함께 일본 침구계 현장을 직접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前史가 있었다. 중국의 진우방 침구학회 부회장이 ‘한국의 華陀(화타)’로 칭송하고 한국의 박노해 시인이 ‘나눔의 聖者’로 노래한 구당을 기자가 처음 만난 것은 2004년.

당시 그는 1984년 10월부터 경북 성주군 대가면을 시발로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대대적인 의료봉사 활동을 실천해 왔던 터였다. 바로 그 의료봉사 20주년을 맞은 구당을 취재하게 된 것이 운명적인 만남의 계기가 됐다. 그런데 기자는 구당과의 몇 차례 만남을 통해 평소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주장을 접하게 됐다.

서양의학에서 醫師와 藥師가 분업체계를 이루고 있듯이 우리의 전통의학에서도 鍼灸醫(침구의)와 藥醫로 분리돼 있었다는 것(조선시대에 전자와 후자를 대표하던 인물이 ‘허임’과 ‘허준’이다), 이러한 전통은 일제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침구의와 약의가 각각 鍼灸師와 醫生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 그러나 해방 이후 약의와 의생의 맥을 이은 韓醫師를 제도권 의료로 수렴하면서 침구까지 독점하게 함으로써 침구를 한약 판매의 보조수단으로 전락시켰다는 것, 의료법을 만들면서 “면허된 이외의 의료행위를 할 수 없다”고 규정함으로써 전통의술과 현대의학이 상호 협력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했다는 것,

더욱이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의료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침구사 제도를 완전히 말살함으로써 수천년 동안 이어져온 전통의료의 한 축이 사라졌다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기자에게 매우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구당의 울분에 찬 절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침구사 부활을 위한 법안이 6대 국회부터 17대 국회까지 40여년 동안 총 12회에 걸쳐 제출됐지만 의사협회와 한의사협회 등 기득권 의료인집단의 조직적인 반발과 국회의원들의 소극적인 자세로 번번이 좌절됐다는 것,

국회의원들이 국회 내에 설치된 5개 종류의 진료실(내과, 치과, 임상병리실, 한방진료실, 침뜸진료실) 중에서 침뜸진료실을 가장 많이 애용하고 건강이 증진되는 효과까지 보고 있다고 공공연하게 고백하면서도 정작 침구사 부활을 위한 입법 활동에는 너무나 무심하고 무지하다는 것,

구당과 제자들이 의료봉사 활동을 통해 매년 약 15만명의 서민과 농민에게 침구 시술의 혜택을 주고 있지만 한의사들로부터 끊임없이 의료법 위반 행위로 고발을 당하고 있다는 것, 그러는 동안 일본과 중국은 물론이고 북한에서도 침구사를 대량으로 양성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고령화 사회에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다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일본 침구계 현황을 꼼꼼하게 파악하고 그 과정에서 ‘타산지석’의 교훈을 얻어 보기 위해서 기자는 구당 일행과 합류하기로 했다.

2월 29일

이날 정오에 김포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오후 2시경 하네다(羽田)공항에 도착했다. 도쿄의 근교에 있는 소도시 요코스카, 도쿄의 외곽에 위치한 병원인 이찌노에역전클리닉, 도쿄만 해저터널 건너편에 있는 지바현 가모가와시, 유서 깊은 고도(古都) 교토의 근교에 있는 명치침구대학 등 방문 예정지는 모두 네 곳이었다. 통역을 맡은 자연의학연구원 임윤숙 원장과 안내를 담당한 김경아 뜸사랑 사무국장이 비행기 안에서 방문 예정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요코스카에는 침구전문잡지 <醫道의 日本> 본사가 있다. 1941년 창간된 이 잡지는 일본 침구계에서 <네이처>와 <사이언스>에 비견될 정도로 높은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구당 선생의 활동을 수 차례 취재해서 보도한 인연도 있다. 이찌노에역전클리닉에선 구당 선생이 이틀 동안 일본 환자들을 진료하게 될 것이다. 가모가와는 ‘메디컬 투어’의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휴양지인데, 국내 적용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둘러볼 것이다. 1925년 개교한 명치침구대학은 일본 침구의 ‘메카’이자 ‘싱크탱크’로 불리고 있다.”

하네다공학에서 곧바로 버스와 전철을 이용해 요코스카로 이동했다. 50분 정도가 흐른 뒤 한 작은 역에 도착했고, 마중 나온 <의도의 일본> 야마구치 야스히로 전무이사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의 안내로 도베 신이치로(戶部 愼一郞) 사장의 자택을 방문했다. 일본에서 손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다. 구당을 염두에 둔 최대의 의전인 셈인데, 구당은 이 잡지를 창간호부터 구독해온 애독자이기도 하다.

“94세라고 해서 휠체어를 타고 오실 줄 알았는데, 이렇게 정정하시다니!” 도베 사장은 물론이고 본사를 방문해 만난 직원들이 구당을 보며 내뱉었던 말이다. 구당은 “나 자신 매일 침과 뜸으로 건강을 관리한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침구와 관련해 일본을 주목해야 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 2가지가 있다. 첫째, 일본은 민간의술과 서양의술, 전통의학과 현대의학의 합리적인 조화와 결합을 모색해 왔다. 구당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일본에서는 양의(洋醫)를 비롯한 의사들도 침구학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실제로 면허시험 과목에는 동양의학개론, 경락경혈학, 침구학 등이 포함돼 있다. 동시에 침구사들도 교육과정에서부터 현대의학에 대한 충분한 학습을 받고 있다.”

둘째, 고령화 사회에 가장 탁월하게 대비할 수 있는 의술이 바로 침구이다. 침구는 비용이 저렴한 반면 치료 효과는 탁월하다. 의료사고 같은 부작용이나 후유증도 거의 없다. 그렇다면 일본은 침구를 어떻게 제도권으로 수용했던 것일까. 다시 구당의 설명을 들어보자.

“일본에선 1911년 근대적 의미에서의 침구에 관한 첫 법령이 제정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문명이 침투하면서 잠시 침체기를 거쳤지만 1947년 안마사, 마사지사, 지압사, 침사, 구사 등에 관한 법률(일명 아하기법)이 제정됐다. 이 법률에 따라 도도부현(都道府縣)과 같은 지방정부에서 자격시험을 실시하여 침구사를 배출해 왔다. 이 시험에 통과한 사람은 침구원이나 일반 병원에 침구사로 취업할 수도 있고, 독립해서 침구원을 개업할 수도 있게 됐다.”

그런데 이 법령은 1988년과 1993년 잇따라 개정됐다고 한다. 지방정부에서 실시하던 시험을 중앙정부로 이관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침구사의 자질을 향상시킨다는 목적이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일본 정부는 고령화에 대비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한 의술이 침구라고 판단했다. 실제로 침구사 국가시험 주관기관인 동양요법시험연수재단의 설립취지문을 보면 고령화에 대한 대책을 동양의학(침, 뜸, 안마, 지압)에서 찾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어서 1999년 법률 개정이 다시 한 번 진행됐다.

“21세기를 눈앞에 둔 1999년 일본에서는 침구사 양성시설에 관한 규제 사항을 완화하면서 침구사를 수적으로 크게 확산시키는 계기를 마련한다. 고령화와 질병구조의 변화에 따른 질 높은 의료 서비스를 광범위하게 제공하도록 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요구에 따라 침구사 양성기관의 수와 정원을 대폭 늘리는 정책을 발표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의도의 일본> 2007년 10월호에 실린 특집 기사는 단연 눈길을 끈다. ‘침구사 대량배출 시대가 왔다’라는 제목이 달린 이 기사에는 몇 가지 통계 자료가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1999년까지 25개였던 침구사 양성학교가 2006년 현재 83개로 급증했다. 덩달아 수험자 수도 늘어났다.

1999년 당시에는 2000명이 응시했지만 2006년에는 5000명을 돌파, 합격자 수도 4000명이나 됐다. 침구를 생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2006년 말 현재 침사 8만1361명, 구사 7만9932명이었다. 침구원 수는 1만7794개소(2006년)로 집계됐다(안마, 마사지, 지압까지 합치면 3만4517개소가 된다). 특히 침구원 수는 2년 동안 18.7%나 증가했다.

“내가 15년 전에 일본에 왔을 때만 해도 침구사 양성학교가 7~8개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10년 내외 기간 동안에 10배나 증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침구사도 무려 16만명이 넘는다는 말이 되는데, 국내 한의사가 채 2만명이 될까 말까하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엄청난 숫자다. 자국 내의 고령화 시대에 철저히 대비하는 한편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의료개방이 진행될 경우 외국에도 수출(?)하겠다는 전략으로 읽혀진다.”

일본의 고령화 문제는 심각하다. 예컨대 고령화율(전체 인구 대비 65세 이상 노인의 비율)이 2006년 20.9%에 이르고 있는데, 이런 추세대로 간다면 2050년에는 35.7%에 달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더 이상 ‘강 건너 불구경’이 될 수 없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최근 발표한 한 보고서에서 이렇게 경고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어 중장기적으로 재정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대처가 늦을수록 성장률 하락, 정부채무 급증, 재정 건전성 악화 등의 부작용이 커질 것이다.”(동아일보 2월 11일자 기사에서 재인용)

실제로 한국은 생산가능인구(15~64세) 대비 65세 이상 노인의 비율이 2005년 13%였지만 2050년이 되면 65%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2005년에는 생산가능인구 7.7명이 고령자 1명을 부양하면 됐지만 2050년이 되면 1.5명이 1명을 부양해야 한다는 ‘끔찍한’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3월 1일

숙소가 있는 동신주쿠에서 전철을 타고 40분 정도 달리다 환승해서 도착한 곳은 이찌노에역전(一之江驛前)클리닉. 오키나와에서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퇴직한 니시에 히로시(西江 弘) 원장이 도쿄로 진출해서 개원한 내과와 정형외과 전문 병원이다.

구당은 이곳에서 오늘 20명의 환자들을 진료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오전 10시부터 진료가 시작됐다. 실내에는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흘렀다. 환자가 누울 수 있는 침상은 3개인데, 침상마다 사방에는 밝은 빛의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예약 시간에 맞춰 환자들이 한두 명씩 도착했다. 환자 1인당 배정된 진료 시간은 40여분. 진료가 계속되는 동안 “곤니찌와(안녕하세요)”, “아리가도 고자이마스(고맙습니다)” 등의 나지막한 인사말이 쉴 새 없이 오갔다. 병원 입구의 로비에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구당 소개 홍보물이 붙어 있었다.

“한국 침구계의 제1인자, 카리스마 침구사 김남수 선생이 일본을 방문해 우리 병원에서 침구 시술을 합니다.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진료를 희망하는 환자는 예약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과나 정형외과와 관련된 것은 물론이고 어떤 질환이라도 상담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구당이 몽골에 갔을 때는 ‘솔롱고스에서 온 산신령’으로 불린 바 있다. 20명의 환자를 성별, 연령별, 병명별로 분류해 보니 다음과 같았다.

△성별(여 13명, 남 7명)

△연령별(20대 1명, 30대 3명, 40대 4명, 50대 3명, 60대 4명, 70대 4명, 80대 1명)

△병명별(요통, 요추 헤르니아, 경견완 증후군, 좌골신경통, 추간반증, 변형성 경추증, 척추관 협착증, 불임증, 족관절염좌, 변형성 슬관절증, 당뇨병, 고혈증, 심장병, 난청, 골다공증, 식도 역류증….)

진료실 벽에는 침과 뜸으로 효과를 볼 수 있는 질병의 종류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붙어 있었다. “요통, 어깨 결림, 견관절통, 족통, 완통, 족통, 슬통, 근육통, 두통, 운동마비, 안면마비, 눈의 피로, 어지러움, 식욕부진, 냉증, 변비, 설사, 월경이상, 천식, 불면증, 피로, 아토피, 내과적 질환, 기타 질환에도 효과.”

주부, 회사원, 중학교 교사, 집배원, 요리사 등 환자들의 직업도 다양했다. 기자는 진료를 받으며 환자들이 보였던 반응을 살폈다. 42세의 주부인 기무라 노부코(木村信子) 씨는 “요통이 발작해 침뜸 치료를 계속하고 있다. 요즘에는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2주에 한 번씩 병원에 와서 치료받고 있다”고 말했다. 29세의 여 회사원 고까다 지나(小荷田 知奈)는 이렇게 말했다.

“평소 머리가 심하게 흔들리는 증세가 있었다. 마치 배를 타고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찾아간 병원에서 심장의 동맥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는 의사의 진단도 받았다. 침뜸 치료를 한 이후 머리 흔들림이 많이 나았다. 하루에 두세 번 심장이 조여드는 것처럼 아파서 의사의 처방에 따라 ‘니도로글리세린’이라는 약을 복용하면서 침뜸 치료를 받았다. 요즘 뜸은 매일 하고 있다.”

이 병원의 침구사는 2명. 그 중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 교포인 조경순(趙慶順) 씨이다. 구당을 이 병원으로 초청한 주인공이기도 한 그녀는 경남 마산이 고향이다. 양의인 니시에 원장도 손을 쓰지 못하는 환자들을 침과 뜸으로 ‘귀신 같이’ 낫게 하는 실력을 보여 주자 병원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니시에 원장이 병원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아파트까지 얻어준 상태이다.

조 씨는 1993년 일본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1995년 침구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교육기관인 도쿄의료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당시만 해도 이 학교의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았기에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머리에 원형탈모증 증세가 생겨날 정도로 집중해서 공부했다. 워낙 경쟁이 심하다 보니 중도 포기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전문학교 3학년을 마치면 국가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진다. 조 씨도 1998년 국가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당시 후생성 장관이었던 고이즈미 전 총리의 명의로 된 합격증을 받았다고 한다.

“학과는 침, 뜸, 마사지 3개인데, 각각 13과목이 있다. 위생학, 생리학, 병리학, 해부학 등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을 동시에 공부했다. 인체의 신경과 근육의 이름을 달달 외우느라 애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국가시험을 대비하다 보니 학교에서 주로 이론 교육에 치중했던 것이 늘 아쉬웠다. 임상 실습, 특히 뛰어난 스승에게 의술을 배우고 싶다는 강렬한 갈증을 느꼈다.”

시험에 합격한 조 씨가 3년 전 한국을 찾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한국에서 잘 알려진 구당 김남수 선생을 찾아가 사사를 자청했다. 3개월 동안 구당 선생 곁에서 배우면서 무의촌 도서 등지로 의료봉사도 함께 다녔다. 이 기간에 실력이 눈부시게 늘었다. 실제로 일본으로 돌아가 환자 치료를 시작하자 탁월한 결과가 발휘되기 시작했다.

“어느 날 허리가 굽어서 들어온 환자에게 구당 선생에게 배운 대로 침과 뜸으로 시술을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그 환자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멀쩡한 모습으로 걸어 나간 것이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양의인 니시에 원장 선생님이었다. 더욱이 입 소문이 나면서 환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니시에 원장 선생님은 그런 경우를 몇 차례 목격한 뒤로는 나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주고 있다.”

실제로 이날 니시에 원장은 침구 진료실로 직접 찾아와 조경순 침구사에게 예약하지 않은 몇몇 환자의 진료를 부탁하기도 했다. 점심 시간에 기자와 만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의료계에선 (양의들이) 환자를 치료하는 방편 중 하나로 침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나아가 침구를 전문으로 하는 대학이나 학교 등이 앞장서서 침구의 효능을 과학적으로 논증하거나 보좌한다. 실제로 침이나 뜸이 사람의 면역성을 강화시키고 엔돌핀을 촉진한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상태다.”

다음날에는 조 씨의 학교 스승인 이나바 교수가 이 병원을 방문했다. 침구사인 그는 전날 있었던 상황을 전해 듣고는 이렇게 말했다.

“의사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존재한다. 한국에서도 양의와 침구가 협력해 환자를 치료할 수 있도록 법이 바뀌어야 한다. 다른 분야는 잘 따라 하면서 왜 침구는 외면하려고 하는지 답답하다.”

이나바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침구사는 요즘 일본에서 ‘뜨는 직종’이라고 한다. 젊은 학생들에게는 ‘돈 잘 버는 직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도 의료 영역 간 갈등이 존재한다. 이나바 교수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유사의료 영역인 접골원에서는 X레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는 암묵적으로 사용해 왔다. 그런데 최근 접골원을 찾는 환자가 많아지자 정형외과 의사들이 X레이 사용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불법이니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다. 일종의 ‘밥 그릇 싸움’인 셈이다. 그러나 접골사들의 위상과 자세도 많이 바뀌었다. 옛날 같으면 물러났을 텐데 이번에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였다. 환자를 위해 X레이를 자유롭게 사용하게 해 달라는 헌법소원을 낸 것이다.”

3월 4일

메디칼 투어 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지바현의 가모가와시를 둘러본 뒤 일행은 교토로 향했다. 가모가와에서 도쿄까지 열차로 달려간 도쿄역에서 신간선으로 갈아탔다.

1925년 개교한 명치침구대학은 교토에서 전철로 1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침구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4년제 대학으로는 이곳이 일본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전교생은 약 900명. 침구학과, 간호학과, 유도정복(柔道整復)학과(접골학과라고 보면 된다) 등 3개의 학과로 구성돼 있다. 얼마 전에는 대학원 박사과정이 개설됐다.

이곳에서 제일 먼저 기자의 눈길을 잡아 끈 것은 명치침구대학의 커리큘럼이었다. 우선 1년차부터 4년차까지의 커리큘럼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년차

 

△인간과학(커뮤니케이션입문, 동양의학의 역사와 철학, 침구와 사회, 인간발달의 과학, 필드워크 실습) △언어와 정보(영어, 중국어, 정보과학), 침구의학(동양의학개론, 경락경혈학, 침구기술학총론, 침기술학실습, 구기술학실습) △자연과학(물질과 자연의 과학, 생물의 과학, 물질의 반응, 실험관찰법, 데이터해석법) △현대의학(인체의 구조․실습, 인체의 기능, 공중위생학, 병원미생물학, 보건영양학) △의학교양(건강과학, 의학개론, 의학영어)

2년차

 

△침구의학(경락경혈학․실습, 체표(體表)관찰실습, 침구생체기능조절학․실습, 침기술학실습, 구기술학실습, 침구진단학․실습) △현대의학(인체의 구조, 인체의 기능․실습, 기능학특론, 질병의 병인과 병태․실습, 생체방어학실습, 면역학, 생화학, 임상의학총론, 임상의학각론, 멘탈헬스케어론, 스포츠의학기초) △의학교양(의료윤리학, 의사(醫事)법학, 의학영어, 노년․복지론, 침구경영론, 동양의학고전특론)

3년차

 

△침구의학(경락경혈학․실습, 침구생체기능조절학, 침구진단학연습, 임상침구학․실습, 스포츠침구학․실습, 건강침구학․실습, 노년침구학․실습, 침구진찰법실습, 부속침구센터실습, 침구의학종합연습) △현대의학(형태학특론, 바이오메카닉스, 임상의학각론, 물리치료의학, 약물료법학, 스포츠의학응용, 산업의학개론)

4년차

 

△침구의학(첨단침구과학, 전통침구의학특론, 응용침구학특론, 스포츠침구학특론, 건강침구학특론, 노년침구학특론, 부속침구센터실습, 종합침구임상실습, 노년케어실습) △현대의학(분자유전학, 임상의학각론, 개호기술론, 응급․구급법, 의용기기개론, 최신의학특론, 통합의학개론, 동서의학종합세미나, 부속병원실습) △의학교양(의료정보학, 의료통계학, 의료사회학, 외서강독, 실험계획법, 한방의학, 한방약학)

물론 이곳에서도 3년차가 끝나면 국가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 받는다. 그런데 기자는 도리어 어떤 과목보다 앞서 공부하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입문’과 ‘침구와 사회’ 등의 인문과학 분야 과목이라는 것이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그것은 앞에서 소개한 <의도의 일본> 2007년 10월호에 실렸던 한 기고문과 연결된다. 사단법인 동양요법학교협회 고도 슈지 감사가 기고한 이 글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침구학교의 급증으로 본래는 입학이 되지 못하는 즉 학력이 모자라는 학생들도 침구학교에 들어올 수 있게 되어 결국 침구사의 질이 떨어졌다는 비판을 많이 듣습니다만 그것은 다른 전문직 의료인들도 마찬가지로서 침구사만이 아닌 일본 전체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시대이므로 더욱 더 우리 교육자들의 근본적인 것을 되물을 때가 아닌가라고 느껴집니다. 교사는 성적이 좋은 학생만 상대하면 편합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지나왔는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성적이 특별하게 좋지 않아도 침구사로서 좋은 자질이 있는 학생, 여러 가지 타입의 학생을 프로의 침구사로 연마시켜내는 것이 앞으로의 교육이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학생들이 졸업하고 난 뒤를 쫓아보면 반드시 입학시험 때의 성적과 상관되어 있지 않습니다. 기초학력이 없는 것은 문제 밖의 것이지만 침구사로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물을 보는 힘이 정확할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인 침구원에서는 보통의 대화만으로는 안 되는 환자가 제법 많습니다. 그런 분들도 대화가 깔끔하게 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많은 양질의 침구사를 세상에 배출하는가라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후진들을 길러내야 되겠다는 의욕이 적은 업계는 결국 쇠퇴하게 됩니다.”

실제로 베테랑 침구사로 활동하는 조경순 씨도 환자들과의 교감과 대화가 치료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바 있다. 일본의 침구사 양성이 단순한 의료인이 아니라 전인적 사회인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명치유신, 문화혁명

 

무지와 자학이 낳은 한·중·일 침구의 수난사

한국, 중국, 일본은 침구의 종주국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세 나라 모두 그런 정체성과 자부심은 모두

잊어버린 채 침과 뜸을 부인하는 자학의 시절을 보낸 적이 있다.

일본은 명치유신 당시 침구의 암흑기를 보내야 했다. 서구 문명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자아를 상실했는데,

침과 뜸도 예외가 아니었다. 탈아입구(脫亞入歐)에 탐닉하던 일본은 서양의학을 적극 수용하는 한편

전통의학은 홀대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장기화되면서 침과 뜸의 진가가 드러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945년 종전과 함께 시작된 맥아더 군정은 침구 시술이 야만적이라는 이유로 전부

금지시켰다.

“전쟁 시기에 미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일본 군인들이 의약품이 부족한 가운데 침구 시술로 질병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고 이를 고문의 일종으로 간주하여 침구 시술을 한 군인들을 전범으로 처단한 전례에

따른 것이었다.”(<김남수의 침뜸 이야기> 140쪽)

그렇다면 일본은 그 탄압을 뚫고 어떻게 침구의술을 현대의학과 접목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침구사들은 미군정의 침구 시술 금지 조치에 항의하면서 전국적인 반대캠페인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운동에 대하여 몇몇 현대의학을 공부한 학자들이 침구의 과학적 효과를 입증하여 주었다.”(앞의 책)

중국에서는 문화혁명 당시 중의학이 위기를 겪었다. 문화혁명 동안 ‘인재를 낭비하고 폐습을 부활시킨다’는

주장으로 인해 중의학과 중의사들은 고역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중국인의 대다수는 전통의학의

우수성을 의심하지 않았고 중의학에 의존했다. 특히 개혁과 개방 바람이 불면서 중의학은 중국의

잠재적 가치로 부상했다. 닉슨 미국 대통령의 방중 때 침으로 환자를 마취하여 수술하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전 세계에 침술 태풍이 불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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