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여래행적송 하권釋迦如來行蹟頌 下卷 4
‘세속의 인의仁義를 행한다’라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의仁義란 모든 선의 근본이니, 삼왕三王 오제五帝의 도가 이것을 벗어나지 않고, 공자와 맹자가 성현의 이름을 얻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세간법으로는 오상五常이라 하고, 출세간법으로는 오계五戒라 하니, 이름만 다르고 뜻은 같다. 그러므로 어진 왕과 법왕法王의 도는 모두 인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한다’라는 것도 인의일 뿐이니, 그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공경은 의義이고, 사랑은 인仁이다.
그러므로 중니仲尼132)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노인을 노인으로 섬겨서 남의 노인까지 미치고, 내 아이를 아이로서 사랑하여 남의 아이까지 미치면, 가히 천하를 손바닥에 놓고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133)
불교(內敎)에서도 그러하여 선덕先德을 공손히 섬겨 가르침을 받고, 후학을 사랑으로 길러 앞으로 나아가게 하며, 이와 같이 서로 전하는 것을 그치지 않으면, 온 천하의 백성이 도를 행할 수 있다.
『대지도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옛날에 가빈사라迦頻闍羅라는 이름의 새가 있었다. 그에게 두 친구가 있었으니, 하나는 큰 코끼리요, 하나는 원숭이였다. 그들이 함께 필발라畢跋羅(pippala) 나무 밑에 있다가 서로 묻기를, ‘우리들 중에 누가 어른이 되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코끼리는 ‘나는 옛날에 이 나무가 나의 배 밑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것으로 미뤄 보면 내가 어른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원숭이는 ‘내가 일찍이 땅에 걸터앉아 있을 때 이 나무 꼭대기를 손으로 잡은 적이 있는데, 그러니 내가 어른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새는 ‘내가 필발라 숲에서 이 나무 열매를 먹었는데, 그 씨앗이 똥을 따라 나와서 이 나무가 생겨났으니, 내가 가장 어른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새는 다시 말하기를, ‘먼저 태어난 이와 오래된 어른은 예로써 공양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즉시 큰 코끼리가 원숭이를 등에 업고, 새는 원숭이 위에 올라 앉아 두루 돌아다녔다. 모든 새와 짐승들이 보고 어찌하여 그러냐고 물으면, 어른을 공경하기 때문이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새와 짐승들이 교화되어 모두 예경하니, 백성의 밭을 침범하지 않고, 남의 목숨을 해치지 않았다. 나라 안의 사람들도 본받아 모두 예로써 공경하니, 옛날부터 지금까지 교화가 만세에 흘러 나라가 태평하였다. …….”134)
아! 새와 짐승에 있어서도 어른을 공경하고 예를 다하는데, 하물며 사람 축에 들고서 마음 쓰는 것을 멋대로 방일하게 할 수 있겠는가. 외서外書에서도 “자기를 바르게 한 뒤에야 천하가 바르게 된다.”135) 하였으니, 이를 두고 말한 것이리라.
‘모든 중생을 가엾이 여긴다’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보살의 만행에는 자비심이 그 시작이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 “중생에 대하여 대비심을 일으키고, 대비심으로 인하여 보리심을 일으키고, 보리심으로 인하여 정등정각正等正覺을 이룬다.”136)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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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람본경墮籃本經』에서는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1백의 벽지불에게 공양하더라도 한 부처님께 공양한 것만 못하고, 1백의 부처님께 공양한 것이 불탑을 세운 것만 못하다. 또 어떤 사람이 다만 발심하여 삼보에 귀의한 것은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선행보다 수승하다.” 하였고, “위에서 나열한 보시 등의 선행은 사람이 오계를 지니는 것만 못하고, 계를 지니는 것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꿈틀거리는 중생(愞動之類)을 가엾이 여기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제경잡요』137)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이 아승기阿僧祗만큼 많은 몸을 버려서 시방의 모든 불보살과 성문에게 공양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축생에게 한 모금 마실 것을 보시한 것만 못하다. 나아가 개미 등과 같은 자비의 복전에 보시한다면, 그 복이 가장 수승하다. 예컨대 사리불이 밥 한 그릇을 부처님께 올렸는데, 부처님께서 다시 개에게 주시고는, 사리불에게 묻기를, ‘너는 나에게 밥을 보시하였고, 나는 개에게 다시 보시하였다. 누가 보다 많은 복을 얻겠는가?’라고 하자, 사리불이 ‘부처님께서 개에게 보시하신 일이 보다 복이 많습니다’라고 대답한 것과 같다.”138)
『보적경寶積經』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묘장엄인세계妙莊嚴忍世界의 중생은 모두 다 일체의 안락을 갖추고 있는데, 어떤 중생이 그 국토에서 억백천 년 동안 모든 범행을 닦더라도, 이 사바세계에서 손가락 한번 튕기는 사이에 중생에 대하여 자비심을 일으켜 얻는 공덕은 그 공덕의 배가 넘는다.”139)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들판의 창고에 쥐와 참새가 많아서 곡식과 쌀을 많이 축내거든, ‘이 같은 쥐와 참새들이 나로 인해 살아갈 수 있구나’ 다만 이런 생각을 하고, 생각하고 나서는 기뻐하며 해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한량없는 복덕을 얻는다고 알아야 한다. …….”140)
무릇 불도佛道를 구하는 이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남의 선행을 따라 기뻐한다’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일체중생이 시작도 없는 그 옛날부터 육도 윤회에 묶여 한량없는 고통을 받으면서 해탈할 수 없는 것은, 다만 질투심이 강하여 다른 사람의 선행을 파괴하고 장애하기 때문이다. 비록 선업을 지어도 남을 앞서려는 마음 때문에 남과 나에 집착하는 마음이 불꽃처럼 타올라 쉬지 않으니, 해탈할 기약과 멀어진다. 만약 다른 사람의 선행을 따라 기뻐할 수 있다면, 질투의 장애가 곧 소멸하고 유순인柔順忍141)을 이루며 고통스러운 윤회의 바퀴를 쉽게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대품경大品經』에서는 말한다.
“터럭 하나를 백 갈래로 쪼개서 대천세계 바닷물을 한 방울씩 찍어내더라도 그 수를 알 수 있지만, 남의 공덕을 따라서 기뻐한 복은 그 수를 알 수 없다.”142)
『제경요집諸經要集』에서는 말한다.
“빈궁하고 박복한 사람이 티끌만큼도 보시할 물건이 없는데, 다른 이가 보시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마음을 내면, 그 복은 보시한 것과 다름이 없다. …….”143)
지혜로운 이는 서둘러 지난 잘못을 고치고 다가올 일을 닦아야 할 것이다.
‘겸손한 마음’이란, 아만의 병을 제거하는 묘약이다. 이러한 아만의 마음은 법 가운데 큰 장애가 된다. 비유한다면 세간의 수레는 높은 산 위에 오르지 못하듯이, 법의 수레도 그러하여 아만의 높은 산에는 구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불법을 배우는 이는 먼저 아만을 꺾고, 위로는 삼보를 공경하고, 중간으로는 어른들을 공경하고, 아래로는 범부들에게도 유순해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선한 사람이라 할 만하리라.
그런 까닭에 불경不輕보살은 항상 모두에게 절하면서, “그대를 가벼이 여기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보현普賢보살도 말하기를, “나는 일체중생을 갖가지로 섬기고 갖가지로 공양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듯이, 스승을 받들듯이, 나아가 여래와 동등하게 다를 바 없이 공경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근세의 법화法華 법사는 도행道行이 청정하여 대중의 공경을 받았는데, 다닐 때에는 땅만 보고 다니다가 그 길에 있는 작은 벌레라도 있는 것을 보면, ‘이 불제자가 나보다 먼저 도를 얻을지 뉘 알리오’라고 속으로 생각하고는 피해서 지나갔다. 배우는 이라면, 그와 같이 생각해 볼 만하지 않겠는가.
‘부드러운 말’이란, 중생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데 먼저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세간 사람들이 삼업의 죄를 짓는데 그중에서는 구업의 허물이 막중하고, 네 가지 구업 중에 욕설이 가장 심하다. 왜 그러한가. 자신의 마음에 성냄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한을 품게 하고, 이로 인해 지은 원한의 뿌리가 점점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 겁에서 저 겁까지 서로 해치면서 영원히 끝날 기약이 없다.
다른 사람과 말을 할 때 부드러운 음성을 내야 하는 것이 선행을 가르쳐 그를 기쁘게 하거나, 나아가 모든 축생에게 욕설을 하지 않는 것과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축생들은 비록 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성내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면 축생들이 보고 놀라기 때문에 죄업이 없지 않다. 죄업이 이루어지면 기필코 과보도 헛되지 않아서 그 자신이 겪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호구경護口經』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 삼장 비구가 한마디 욕설을 한 까닭에 그 과보로 백두어百頭魚가 되었고, 그 재앙이 어머니에게도 미쳐 측간의 벌레가 되었다. …….”144)
『대방편경大方便經』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 세상에서 화禍는 입으로부터 나온다. 그 재앙이 사나운 불보다 심하다. 사나운 불은 세간의 재물을 태워 버리지만, 욕설은 활활 타올라 칠성재七聖財145)를 태워 버린다. 입안의 혀는 몸을 쪼개는 도끼이며, 몸을 태우는 불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146)
위에서 보여 준 대로 보시와 인욕으로부터 겸손한 마음과 부드러운 말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가 성불의 원인 아닌 것이 없다. 만약 모두 행한다면 더 좋을 것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마음 가는 대로 한 가지만 닦아도 된다. 왜 그러한가. 『법화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한다.
若有衆生類 만일 어떤 중생들이
値諸過去佛 과거 부처님들을 만나서
若聞法布施 법문을 듣거나 보시하거나
或持戒忍辱 계를 지니거나 인욕을 닦거나
精進禪智等 정진하거나 선정과 지혜를 닦거나
若人善軟心 어떤 사람이 선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내어도
如是諸人等 이와 같은 사람들은
皆已成佛道 모두 이미 불도를 이룬 것일세.
諸佛滅度已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
供養舍利者 사리에 공양하는 사람은
起萬億種塔 만억 종류의 탑을 세우되
金銀及玻瓈 금·은·파려
玟瑰琉璃珠 옥돌과 유리구슬로
淸淨廣嚴飾 청정하게 널리 장엄하고
木櫁并餘材 목밀木蜜147)과 그 밖의 자재
甎瓦泥土等 벽돌과 진흙 등으로
若於曠野中 만일 광야에서
積土成佛廟 흙을 쌓아 불탑(佛廟)을 짓거나
乃至童子戱 나아가 아이들 장난으로
聚沙爲佛塔 모래를 쌓아 불탑을 지어도
如是諸人等 이와 같은 사람들은
皆已成佛道 모두 이미 불도를 이룬 것일세.
若人爲佛故 어떤 사람이 부처님을 위하여
建立諸形像 여러 형상을 세우거나
或以七寶成 칠보로 만들거나
鍮鉐赤白銅 놋쇠나 적백의 구리로
鐵木及與泥 무쇠나 나무나 진흙으로
或以膠漆布 아교나 옻칠을 바르거나
或彩畫佛像 불상을 채색하거나
自作若使人 자신이 하거나 남을 시키거나
乃童子戱 나아가 아이들 장난으로
若草木及筆 초목과 붓으로
或以指瓜甲 손가락과 손톱으로
而畫作佛像 부처님 형상을 그리더라도
如是諸人等 이와 같은 사람들은
皆已成佛道 모두 이미 불도를 이룬 것일세.
若人於塔廟 만일 어떤 사람이 탑묘에서
寶像及畫像 보배로 만든 불화와 불상에
以花香幡盖 꽃과 향과 당번과 일산으로
敬心而供養 공경하는 마음으로 공양한다면,
若使人作樂 만일 남을 시켜 악기를 연주하거나
擊皷吹角具 북을 치고 각패角貝를 불거나
簫笛琴箜篌 피리를 불고 공후箜篌를 뜯거나
琵琶饒銅鈸 비파를 튕기거나 동발을 흔들어서
如是衆妙音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오묘한 소리
盡持以供養 모두 가지고서 공양하거나
或以歡喜心 기뻐하는 마음으로
歌唄頌佛德 부처님 공덕을 노래하고 칭송하거나
乃至一小音 내지 작은 소리 한 번을 내더라도
皆已成佛道 모두 이미 불도를 이룬 것일세.
若人散亂心 만일 어떤 사람이 산란한 마음으로
乃至以一花 겨우 한 송이 꽃으로
供養於畫像 불화와 불상에 공양하더라도
漸見無量佛 점차 한량없는 부처님을 뵙고
自成無上道 스스로 무상도를 이뤄
廣度無數衆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을 널리 제도하리라.
或有人禮拜 어떤 사람이 절을 하거나
或復但合掌 혹은 합장만 하여도
乃至擧一手 내지 한 손을 들거나
或復小低頭 혹은 머리를 조금 숙이더라도
若人散亂心 어떤 사람이 산란한 마음으로
一稱南無佛 단 한 번 ‘나무불’을 부르더라도
如是諸人等 이와 같은 사람들은
皆已成佛道【云云】 모두 이미 불도를 이룬 것일세. …….148)
아! ‘모든 것이 불사 아닌 것이 없다’라는 말이 그르다면, 어찌 아이들이 장난으로 한 일과 산란한 마음으로 단 한번 ‘나무불’이라 부른 일, 그와 같이 미약한 일의 공덕으로 궁극의 지위에 도달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석존께서는 세상에 나오시어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자비심을 일으켜 교묘한 지혜 방편으로 그 근기가 좋아하는 바에 따라 혹은 좌선을 보이시고, 혹은 경전을 독송하라 하시고, 혹은 염불을 가르치시며, 나아가 보시와 지계 등 일체의 선법을 보이시어 그들이 닦고 익혀 불도에 들어감에 홀로 남겨진 자가 없게 하셨으나, 다만 일천제一闡提149)의 무리는 제외하셨다. 세간의 의사가 병에 따라 약을 주되, 목숨이 다한 자를 제외하고는 쾌차하지 않은 이가 없는 것과 같다.
혹 어떤 사람은 여래께서 방편으로 가르치신 뜻을 알지 못하고, 또 중생이 좋아하는 바를 알지 못하면서 각각 한쪽 끝만 집착하여 “이것이 수승하다.” 말한다. 또한 남에게 자신이 익힌 법을 가르치면서 “좌선이 최고다.”, “경을 독송하는 것이 제일이다.”, “염불이 으뜸이다.” 말하거나, 나아가 보시와 지계 등의 법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기 것이 옳다 하고, 다른 선법은 그르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자들이로다.
예를 들어 왕성王城에 들어가고자 하면, 팔문八門이 막혀 있지 않으니, 위치에 따라 인도하여 곧장 들어가야지, 어찌하여 기필코 동쪽에서 온 사람을 서문으로 인도하며, 서쪽에서 온 사람을 동문으로 인도하여 부질없는 수고를 시키는가. 문은 비록 여덟 개이지만 들어가면 다만 한 곳일 뿐이다. 여러 법문이 다르지만 모두 한 곳으로 돌아간다. 어찌하여 편벽되게 집착하여 다투는가. 이것을 두고 병의 근본은 살피지 않고 젖으로 만든 약(乳藥)150)만을 가르치는 무리라고 한다. 모든 수행자에게 권하노니, 이런 이치를 알아서 힘이 감당하는 바에 따라 어느 한 가지를 좇아 정진하여 물러섬이 없어야 할 것이다.
[187]
若願生安養 안양국安養國에 왕생하기를 원한다면
隨功生九蓮 공덕에 따라 구품연화대에 태어나리니
得見彌陁佛 아미타불을 만나 뵙고
聞法悟無生 법문을 들어 무생법인無生法忍 깨달으리라.
‘안양국安養國’은 극락이라고도 한다. 그 나라의 장엄과 즐거운 일에 대해서는 비유하거나 설명할 수가 없다. 『소미타경小彌陀經』151)에서는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10만억 불국토를 지나면 이 세계가 있다.” 하였고, 『무량수경無量壽經』에서는 “아미타불의 국토가 여기서 멀지 않다.” 하였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말은, 다만 근기에 따라 설한 것일 뿐, 멀고 가까움이 정해진 것은 아니다. 다만 중생의 한 생각 마음속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마음에 걸림이 없는데 어찌 동쪽과 서쪽, 멀고 가까움이 있겠는가.
‘아미타阿彌陀’는 여기 말로 무량광無量光 또는 무량수無量壽라 한다. 그러므로 경에서는 “그 부처님의 광명은 한량없어 10만억 국토를 비추고, 그 부처님의 수명은 한량없고 끝이 없는 아승기겁이다.……”라고 하였다.
‘구품연화대九品蓮花臺’는 그 부처님이 48원으로 정토를 장엄하시고 구품연화대를 시설하시어 시방의 인연 있는 중생들을 인도하시는 곳이다. 왜 그러한가? 중생의 근기와 성품에 차별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세속의 국왕과 적이 서로 싸울 때, 공을 세운 이들이 대체로 동등하지 않기 때문에 그 공에 따라 직책으로 상을 주되, 일품, 이품, 삼품, 사품, 오품, 나아가 팔품, 구품까지 하나도 빠뜨림이 없는 것과 같다. 부처님도 그와 같아서 중생들의 공과 업이 많고 적음에 따라 구품연화대에 모두 거두시되, 남김이 없다. 저 구품의 중생들이 구품에 태어나는 일을 이제 간략히 경문을 인용하여 설명하겠다.
『관무량수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품상생上品上生이란, 어떤 중생이 세 가지 마음을 내면 바로 그 국토에 태어나는데, 첫째 지극히 정성스러운 마음, 둘째 깊은 마음, 셋째 회향하여 발원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세 종류의 중생들이 왕생할 수 있는데, 첫째 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생하지 않고 모든 계행을 갖춘 자이고, 둘째 대승의 방등 경전을 독송하는 자이고, 셋째는 여섯 가지의 염(六念)을 수행하는 자이다.【불·법·승·계율·보시·하늘】 이러한 공덕을 갖추어 하루 낮 하루 밤 나아가 7일까지 행하면, 곧 왕생할 수 있다. 이 사람이 임종할 때 아미타불이 관음보살·대세지보살 등 한량없는 보살들과 함께 그의 앞에 나타나서 손을 잡고 영접하신다. 수행자가 보고서 뛸 듯이 기뻐하며 자기 몸이 금강대金剛臺를 타고 있음을 스스로 보게 되면, 부처님 뒤를 따라서 손가락 튕기는 사이에 그 국토에 왕생한다. 도착하고서는 부처님의 상호와 보살의 모습이 구족한 것을 보고, 빛나는 보배 숲이 오묘한 법을 연설하는 것을 듣고는 바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닫는다.
상품중생上品中生이란, 반드시 방등 경전을 수지하고 독송하지 않더라도 그 뜻을 잘 이해하여 제일의제第一義諦에 대하여 마음이 놀라거나 요동치지 않고 인과因果를 깊이 믿어 대승을 비방하지 않는 경우이다. 이 사람이 임종할 때 큰 성인이 내려와 영접하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수행자가 스스로 자금대紫金臺에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곧 칠보의 연못 가운데 왕생한다. 그 연꽃 줄기가 하루 밤을 묵으면 피어나고, 불보살들이 광명을 놓아 몸을 비추면 눈이 곧 밝게 열려서 1소겁이 지난 뒤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는다.
상품하생上品下生이란, 역시 인과를 믿어서 대승을 비방하지 않고 다만 위없이 높은 깨달음을 얻으려는 마음을 일으킨 경우이다. 이 사람이 임종할 때 여러 성인들이 와서 영접하니, 수행자가 스스로 금련대金蓮臺에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곧 보배의 연못에 왕생한다. 하루 낮 하루 밤이 지나 연꽃이 피어나고 7일 만에 부처님을 뵐 수 있다. 비록 부처님 몸을 보지만 여러 가지 상호에 대하여 마음으로 분명히 알지 못하다가 삼칠일이 지난 뒤에야 분명하게 보고서 3소겁이 지난 뒤 백법명문百法明門152)을 얻어 환희지歡喜地에 머문다.
중품상생中品上生이란, 어떤 중생이 오계를 수지하여 팔관재계八關齋戒를 지니며 모든 계율을 수행하고 오역죄를 짓지 않아서 허물이나 악행이 없는 경우이다. 이 사람이 임종할 때 성인들이 와서 영접하니, 수행자가 스스로 자기 몸이 연화대蓮花臺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 곧 그 국토에 왕생한다. 연꽃이 피어나고 여러 가지 음성이 사성제를 찬탄하는 소리를 듣고는 바로 그때 아라한도와 삼명육통을 얻고 팔해탈八解脫153)을 구족한다.
중품중생中品中生이란, 어떤 중생이 하루 낮 하루 밤 사미계沙彌戒를 지니거나 구족계具足戒를 지녀서 위의威儀에 결함이 없는 경우이다. 이 사람이 임종할 때 성인들이 와서 영접하니, 수행자가 스스로 연화대蓮花臺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연꽃이 오므라들고 부처님 뒤를 따라 보배 연못에 왕생한다. 7일이 지나 그 꽃이 다시 피면 눈을 뜨고 합장하며 부처님을 찬탄하고 법을 듣다가 반 겁이 지나 아라한이 된다.
중품하생中品下生이란, 어떤 중생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스승을 섬기며 세속의 인의仁義를 행한 경우이다. 이 사람이 임종할 때 선지식을 만나 그를 위해 아미타불 국토의 즐거움을 말해 주면 그 사실을 듣고서 곧 운명하여 그 국토에 왕생한다. 7일이 지나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만나 법을 듣고 기뻐하다가 수다원과須多洹果를 얻고서 1소겁이 지난 뒤 아라한이 된다.
하품상생下品上生이란, 어떤 중생이 온갖 악업을 지어서 비록 방등 경전을 비방하지는 않았지만 나쁜 법을 많이 짓고도 부끄러움이 없는 경우이다. 이 사람이 임종할 때 선지식을 만나 대승 12부의 경전 제목만이라도 찬탄해 주면, 이와 같은 경전들의 이름을 들은 까닭으로 천겁 동안 지은 막중한 악업을 소멸한다. 선지식이 또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도록 가르쳐 주면, 부처님 명호를 부른 까닭에 50억 겁 동안의 생사의 죄를 소멸한다. 그때 그 부처님이 곧 부처님 화신과 관세음보살 화신과 대세지보살 화신을 보내 수행자 앞에 이르러, ‘선남자여, 그대가 부처님 명호를 부른 까닭에 모든 죄가 소멸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와서 그대를 영접하노라’ 말씀하신다. 수행자는 화현불의 광명이 그 방안에 가득함을 보고 기뻐하다가 목숨을 마치면, 보련화대寶蓮花臺를 타고서 화현불의 뒤를 따라 보배 연못에 왕생한다. 49일이 지나 연꽃이 막 피어나면, 그때 관세음보살이 광명을 놓아 법을 설하는데, 이를 듣고서 믿고 이해하여 위없이 높은 깨달음을 얻으려는 마음을 일으키고 10소겁이 지난 뒤 초지初地에 들어간다.
하품중생下品中生이란, 어떤 중생이 오계·팔계·구족계를 범하거나, 승가의 물건을 훔치거나 현전승물現前僧物154)을 훔치거나 부정하게 설법하고도 부끄러움이 없는 경우이다. 이 사람이 임종할 때 지옥의 불길이 일시에 모두 닥쳐오는데, 선지식을 만나 아미타불의 광명과 위덕을 찬탄해 주면, 그 사람이 듣고서는 80억 겁 동안의 생사의 죄를 소멸한다. 지옥의 사나운 불길도 서늘한 바람으로 변하고, 하늘 꽃이 불어와 꽃 위에는 모든 불보살의 화신이 계시다가 이 사람을 영접한다. 한 생각 사이에 보배 연못의 연꽃 안에 태어나고, 대겁이 지난 뒤 연꽃이 피면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그를 위해 대승의 깊고 깊은 경전을 설하시니, 이 법을 듣고서 바로 무상도의 마음을 일으킨다.
하품하생下品下生이란, 어떤 중생이 오역죄·10악을 모두 짓고 선하지 못한 여러 가지 일들을 모두 지어서 그 사람이 악도에 떨어져 오랜 겁이 지나도록 끝없는 고통을 받는 경우이다. 이 사람이 임종할 때 선지식을 만나 오묘한 법을 설하여 염불하도록 가르쳐 주는데도 그 사람이 고통에 내몰려 염불할 경황이 없다면, 선지식은 ‘그대가 만약 염불할 수 없다면 무량수불께 귀의합니다만 칭념하라’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지극한 마음으로 소리내어 끊어지지 않으면 10념十念155)을 구족하여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부처님 명호를 부른 까닭에 명호를 부를 때마다 80억 겁 동안의 생사의 죄를 소멸한다. 목숨이 끊어진 뒤 해(日輪)와 같은 금연화대가 그 사람 앞에 머무는 것을 보면, 한 찰나 사이에 곧 그 국토에 왕생하여 연꽃 가운데 태어난다. 12대겁을 채운 뒤 연꽃이 막 피어날 때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와서 대비심의 음성으로 실제의 모습을 설하시어 죄를 소멸하게 하시니, 듣고서 기뻐하며 곧 위없이 높은 깨달음을 얻으려는 마음을 일으킨다. …….”156)
이것이 구품의 중생이 구품연화대에 태어나는 모습이다.
그리고 궁전에 태어나는 이도 있는데, 『무량수경無量壽經』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중생이 모든 공덕을 닦고서 그 국토에 태어나기를 서원하다가 뒤에 후회하는 마음과 의혹이 생겨서 그 불국토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고, 왕생하는 이가 있다는 것도 믿지 않고, 보시를 하면 복을 지어 후세에 복을 받는다는 것도 믿지 않는 경우이다. 그 사람이 비록 그러하여 계속되는 생각 속에 잠깐은 믿고 잠깐은 믿지 않으면서 의지는 머뭇거리고 오롯이 의지하는 바가 없더라도, 임종할 때 부처님께서는 그 몸을 나투시어 그의 눈으로 보게 하신다. 그 사람이 비록 말은 할 수 없어도 그 마음은 곧 기뻐서 선한 일 하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하고 잘못을 뉘우치기 때문에 또한 그 국토에 왕생한다. 다만 부처님 계신 곳에는 이르지 못하고 변두리에 들어가서 칠보의 성을 보고는 곧 그곳에 들어가 연꽃 속에 태어나 그 즐거움을 받는다. 마치 도리천 사람들이 5백 세가 지나도록 삼보의 이름조차 듣지 못하는 것과 같다. …….”157)
여러 경론에서 말하듯이, 무릇 어떤 중생이 그 국토의 이름과 그 부처님 명호를 듣고 그곳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면 한 사람도 왕생하지 못할 이가 없다. 예를 들면 『월장경月藏經』에서는 “나의 말법시대에는 수억의 많은 중생들이 도를 닦으려는 마음을 일으켜 행하지만 한 사람도 얻는 이가 없다. 오직 정토문淨土門 하나만이 통하는 길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말법시대에 정토를 구하지 않고 어찌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이 법문에 대하여 많은 의혹과 비방을 일으키고, 왕생을 구하는 이를 보면 비웃고 가로막는데, 자신도 그르치고 타인도 그르쳐 부처님과 원수가 되는 일이니, 슬프고 슬픈 일이로다.
[188]
不爾當來世 그렇지 않다면 장차 내세에
必逢慈氏尊 반드시 미륵보살을 만나
龍華三會上 용화의 세 차례 법회에서
自然皆證道 자연히 모두 도를 증득하리라.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염부제에 시두말翅頭末이라는 큰 성이 있고, 성안에 묘범妙梵이라는 대바라문이 있었다. 미륵이 그 집에 태어나 출가하던 날 바로 올바른 깨달음을 이루고 용화수龍華樹 아래에 앉자, 국왕·바라문·장자와 모든 백성이 모두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 모두 함께 출가하였다. 그때 미륵부처님께서는 많은 대중을 보시고 이렇게 생각하셨다.
‘이 모든 사람들은 석가모니부처님이 내게 부촉하여 보낸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있는 곳으로 온 것이다. 이 사람들은 석가모니부처님이 남기신 법 가운데 경·율·논 삼장을 독송하거나, 옷과 음식을 타인에게 보시하거나, 계를 지니고 지혜를 닦거나, 당번·일산·꽃·향으로 부처님께 공양하거나, 고통 받는 중생을 위하여 즐거움을 얻게 하거나, 인욕과 선정을 닦거나, 탑사를 세우고 사리에 공양하거나 이러한 공덕으로 내가 있는 곳으로 온 것이로다.’
이렇게 생각하시고는 사성제를 설해 주시니, 모든 사람들이 듣고서 동시에 열반의 도를 얻었다.”
『대지도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용화회상龍華會上 첫 번째 법회에서 99억의 성문들을 제도하고, 두 번째 법회에서 96억의 성문들을 제도하고, 세 번째 법회에서 93억의 성문들을 제도한다.”158
『보은경報恩經』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화림원華林園 세 번째158) 법회에서 93억의 사람들은 석가모니부처님이 남기신 법 가운데 ‘나무불’을 한 번이라도 부른 사람들이다.”
『미륵경彌勒經』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석가모니부처님의 말법시대에 좌선하고 독송하고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사람들은 첫 번째 법회 때 태어나고, 다만 삼귀의만 수지한 사람은 두 번째 법회 때 태어나고, 다만 부처님 명호만 들은 사람은 세 번째 법회 때 태어난다. …….”
이것으로 보건대 우리들이 비록 좌선이나 독송, 계를 지니거나 복을 닦는 일에 오롯이 힘을 쏟지 못하였더라도, 이미 부처님의 명호를 들었고, 일생을 살아오는 동안 분수에 따라 한 번은 불렀을 것이다. 어찌 없다고 하겠는가. 그렇다면 비록 첫 번째 법회나 두 번째 법회에 일찍이 참석하지는 못하더라도, 세 번째 법회에는 늦게나마 참석하여 법을 듣고 도를 깨달으리라는 것에 결코 의심이 없다.
지혜 있는 자들이여, 반드시 이 부처님 만나 뵙기를 발원해야만 한다. 만일 어긋난다면 부처님 만나 뵙는 일이 아득히 멀어지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이 현겁賢劫 동안 성成·주住·괴壞·공空 4겁이 있는데,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시는 일은 반드시 주겁住劫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겁에는 다시 20번의 증감겁이 있는데, 부처님이 출현하시는 일은 반드시 감겁減劫을 기다려야 한다.
앞의 여덟 번의 증감겁에는 부처님 없이 그냥 흘러가고, 아홉 번째 감겁에 이르러 네 분 부처님이 출현하시니, 인간 수명이 6만 세일 때 구류손불拘留孫佛이 출현하시고, 4만 세일 때 구나함불拘那含佛이 출현하시고, 2만 세일 때 가섭불迦葉佛이 출현하시고, 1백 세일 때 석가모니불이 출현하신다.
석가모니부처님 법이 사라졌다가 인간 수명이 다시 늘어 8만 4천 세가 되었다가 다시 줄어 4천 세가 될 때 미륵부처님이 출현하신다. 석가모니부처님 입멸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계산하면 60억 년이니, 열 번째 감겁이다. 열한 번째, 열두 번째, 열세 번째, 열네 번째 이와 같은 4겁 동안은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시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정진하여 미륵부처님과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 열다섯 번째 감겁에 이르러 995부처님이 차례로 출현하여 교화하시고, 마지막 누지불樓至佛이 출현하여 이후 다섯 겁 동안 교화하신다.
[189]
向說諸善因 앞서 말한 모든 선한 인연은
俱通大小乘 대승과 소승 모두에 통하지만,
凡夫根性異 범부의 근기와 성품이 다르니
迴向亦不一 회향하는 방법도 같지 않네.
[190]
或望人天樂 어떤 이는 인간 세상과 천상의 즐거움을 바라고
或求四聖果 어떤 이는 네 가지 성인의 과위를 구하지만,
雖是善果報 비록 모두 선한 수행의 과보라 해도
成佛大遲緩 성불하기에는 크게 더딘 길이라네.
[191]
中間無量劫 중간의 한량없는 겁 동안
徒勞處受苦 헛되이 괴로움만 받으리니,
若欲速離苦 만일 속히 괴로움을 여의려거든
應迴向大乘 반드시 대승에 회향해야 하리.
[192]
所作大小善 지어 놓은 크고 작은 선행을
當迴向三處 세 곳으로 회향해야만 하나니,
先四恩三有 먼저 네 가지 은혜와 삼유三有159)
及法界有情 법계의 유정이니라.
[193]
次佛果菩提 다음에는 불과佛果의 깨달음이요,
後眞如實際 마지막은 진여의 실제이니,
若如是迴向 만일 이와 같이 회향한다면
毫善等虛空 터럭만 한 선행도 허공과 같으리라.
[194]
譬如一滴水 비유한다면 한 방울의 물을
投之於大海 큰 바다에 던지면
與海成一體 바다와 한 몸이 되어
深廣無涯底 깊고 넓어 밑도 끝도 없는 것과 같다네.
위에서 보인 선법들은 대승과 소승의 수행자에게 모두 통하는 것이지만, 다만 중생의 근기와 좋아하는 것이 같지 않고 수행하는 인행因行160)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얻는 과보도 1만 가지에 이른다.
어떤 중생은 세간의 즐거움을 구하여 모든 선업을 닦으니, 열등한 이는 인간 세상에 태어나고, 수승한 이는 천상에 태어나 분수에 따라 즐거움을 받는다.
어떤 중생은 삼계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의 즐거움을 구하여 홀로 있기를 좋아하고, 고요함에 능숙하여 여러 가지 선정과 지혜를 닦으니, 둔한 이는 성문이 되고, 예리한 이는 벽지불이 된다. 이것을 고조해탈孤調解脫161)이라 하는데 모든 부처님이 꾸짖으셨던 바이다.
어떤 중생은 자신이 비록 제도되지 못했더라도 먼저 타인을 제도하고자 하여 부지런히 정진하여 일체지一切智를 구하니, 이를 대승이라 한다. 이들은 이미 성인의 태胎가 이루어진 자들이다.
그리고 인간 세상과 천상이란, 우선 삼악도에 대비하여 즐거운 곳이라 하는 것이지 실제로 즐거운 곳은 아니다. 왜 그러한가. 인간 세상에서는 현세에 팔고八苦에 볶이고, 이후 삼악도의 참기 어려운 고통을 받는다. 천상 역시 다섯 가지 시드는 고통(五衰之苦)이 있고, 과보가 끝나면 다시 삼악도에 떨어지니, 그 괴로운 일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육취에 윤회하면서 벗어날 기약이 없는데, 누가 즐거움이라 하겠는가.
이승의 사람은 비록 분단생사分段生死162)의 고통은 여의었으나 변역생사變易生死163)의 고통을 면하지 못하였으므로 타향을 유랑하며 옷과 음식을 구걸하되, 먹고 사는 것이 어려워서 적은 것을 얻고 만족하게 여기며 자재함을 얻지 못한다. 하물며 다시 멀고 굽은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올 날이 멀기만 한데, 미진겁微塵劫164) 동안 고행하는 일을 어찌 즐겁다고 하겠는가.
보살마하살 같은 사람은 처음 발심할 때부터 일체중생을 가엾게 여겨 자비와 지혜를 쌍으로 운용하여 크고 바른 길에 올라서서 가는 곳마다 머무름이 없으니, 머지않은 날에 집에 이르러 아버지를 만나 진귀한 보배 창고를 얻고 받아 쓰는 것이 자재하여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와 같아야 참다운 즐거움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영명 연수永明延壽 선사는 경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만일 10선十善으로 사람을 교화한다면, 마치 독약으로 사람을 치료하는 것과 같다. 비록 일시적으로 인간 세계와 천상 세계의 배부름을 누리지만 생사生死의 독이 일어나는 것을 면하지 못하여 종국에는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도리어 악업의 때만 더하기 때문이다.
만일 소승으로 교화한다면, 이는 대승의 원수이며 해탈의 깊은 구덩이이니,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경에서도 ‘차라리 여우와 이리와 야간野干165)의 마음을 일으킬지언정 성문과 벽지불의 마음은 일으키지 말라’ 하였다.”
이 말씀을 살펴보건대 지혜 있는 자라면 어찌 소승을 버리고 대승을 따르지 않겠는가.
‘지어 놓은 여러 가지 선행들’이란, 좌선과 독송, 예경과 염불, 보시와 지계 등을 말한다. 비록 이와 같은 선행들을 지어 놓고도 회향하지 않으면 마치 굽지 않은 질그릇과 같아서 헛수고일 뿐 이익이 없다. 무릇 회향하고자 하는 사람은 인간 세상이나 천상, 이승의 과보에 회향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세 곳에 회향해야만 한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중생에 회향하는 것이다. “원컨대 지금 닦는 이 선근을 일체중생에게 베풀게 하여지이다.”라고 서원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불과에 회향하는 것이다. “원컨대 지금 닦는 이 공덕이 일체에게 미쳐서 모두 함께 불도를 이루게 하여지이다.”라고 서원하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실제에 회향하는 것이다. “원컨대 지금 닦는 이 선근이 광대하기가 법성과 같이 【끝이 없고,】 구경에 이르는 것이 허공과 같이 【다함이 없게】 하여지이다.”라고 서원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세 곳에 회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자신을 돌려 타인을 향하고, 원인을 돌려 결과를 향하고, 현상을 돌려 이치를 향한다.”라고 하였는데, 이것도 앞의 것과 같은 의미이리라.
‘네 가지 은혜(四恩)’란 다음과 같다.
첫째는 국왕의 은혜이니, 백성들이 한 번 마시고 한 번 먹는 것도 국왕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미 국왕의 백성이어서 마땅히 국왕의 일에 부역해야 하고, 해마다 황실에 조세를 바쳐 국왕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거늘, 도망쳐서 머리를 깎고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편안하며 근심 없이 자고 먹고 있으니, 국왕의 은혜가 실로 막대하다.
둘째는 스승의 은혜이니, 나의 어리석음을 일깨워서 악한 일을 경계하고 착한 일을 권장하며, 세속의 그물에서 벗어나 불가佛家에 들도록 인도하니, 스승의 은혜가 실로 막중하다.
셋째는 부모의 은혜이니, 처음 임신하였을 때부터 열 달 동안 마음을 방일하게 하지 않고, 나아가 출산할 때 고통이 끝이 없으나 출산하고 나면 그 고통을 잊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서 품에 안아 젖을 먹여 기르고 더러운 것을 씻어 주며, 성장한 뒤에는 봉양받기를 잊고서 사랑하는 마음을 끊어 놓아주고 스승에게 귀의하여 출가하게 하고, 출세간의 업을 닦게 하니, 부모의 은혜가 가장 깊다.
넷째는 시주자의 은혜이니, 우리들 비구가 산림에 누워서 밭을 갈지 않아도 먹고, 누에치지 않아도 옷을 입는 것은, 모두가 시방의 시주자(檀越)의 은혜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은혜를 비교한다면, 시주자의 은혜가 가장 다급한 것이리라. 왜 그러한가. 사람은 항상 하루 두 때 먹어야 하고, 한 끼라도 거르면 마음의 예봉이 꺾여 버려서 하는 일마다 모두 여의치 않을 것인데, 하물며 모든 끼니를 거른다면 어떠하겠는가. 하물며 이틀 사흘 나아가 이레까지 거른다면 어떠하겠는가. 그렇다면 몸이나 목숨도 오히려 보존하기 어려울 터, 하물며 도업을 닦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시주자의 은혜가 가장 다급하고, 국왕과 스승의 은혜가 다음, 그 다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까닭으로 모든 비구들은 이런 뜻을 마땅히 잘 알아야 한다. 절 한번 하거나 염불 한 번 하거나 향 한 조각 태우거나 등 하나를 밝히거나 꽃 한 송이 올리거나 탑을 청소하거나 마당을 쓸거나 털끝만 한 한 가지 선업을 행하더라도, 반드시 네 가지 은혜에 회향하여 복을 받들고 난 후에야 일체중생에게 널리 공덕을 입혀 줄 수 있다.
[195]
雖未完戒品 비록 계품戒品이 온전하지 못하고
亦未修諸善 여러 가지 선법을 닦지 못했더라도
但結大乘緣 다만 대승과 인연을 맺기만 하면
功倍餘衆善 그 공은 다른 모든 선행의 배倍가 되리라.
[196]
大乘義云何 대승의 의미는 무엇인가.
諸法實相是 제법실상이 그것이니
聞此實相理 이러한 실상의 이치를 듣고서
其心不驚動 그 마음이 놀라 요동치지 않고서
[197]
暫生一念信 잠시라도 한 생각을 일으켜 믿는다면
福德已無量 그 복덕은 이미 한량이 없고
因發菩提心 보리심을 일으켰으므로
已具悲智願 이미 자비·지혜·서원을 갖추리라.
[198]
即爲世間眼 곧바로 세간의 안목이 되어
當作天人師 반드시 천인天人의 스승이 되리니
雖在凡夫地 비록 범부의 경지에 있다 해도
功超二果聖 그 공덕은 이승의 과위를 넘어서리라.
[199]
是名眞佛子 이런 사람을 참 불자라 하니
能報諸佛恩 모든 부처님의 은혜 능히 갚으리.
欲入如來室 여래의 방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斯門其舍諸 이 문이 어찌 그를 버리겠는가.166)
‘제법실상諸法實相’에 대하여 『법화경』에서는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모든 법의 실상을 모두 궁구한다.”, “일체 세간의 살림살이와 산업이 모두 제법실상과 어긋나지 않는다.” 하였다. 조사가 해석하여 이르기를, “생멸 하나하나, 살생과 도둑질 하나하나, 사도팔사四倒八邪와 오역십악五逆十惡 모두가 다 실상이니라.” 하였다. 이러한 일은 분명하게 드러나서 있는 곳마다 진실하고 항상한 것이니, 누군들 갖추지 않았으며, 어떤 법인들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경에서 “세간의 모습은 항상 머문다.” 하였으니, 이 오묘한 이치를 깨달으면 부처라 하고, 어리석으면 중생이라 한다. 그 어리석음과 깨달음으로 인하여 우선 높고 낮음을 나누지만 본래 다른 것이 아니다. 마치 얼음과 물처럼, 비유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정명경』에서 “평등한 진법계에서는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하는 일이 없다.……”라고 말한 것이다. 만일 어떤 중생이 이 법을 듣고서 한순간이라도 믿고 이해하는 마음을 낸다면 그 공덕은 무학無學의 공덕을 능가하리니, 이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법화경』에서 “이 경은 지니기 어려우니, 만일 잠시라도 지닌다면 내가 기뻐할 것이고, 모든 부처님도 그러하리라. 이 사람을 계를 지니고 두타頭陀를 행하는 자라 하니, 모든 천인과 세간의 안목이 되리라.……” 하였다.
그리고 대승 경전에서 말하는 ‘대승’이란 말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다.”, “모든 부처님과 중생은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번뇌가 곧 보리요, 생사가 곧 열반이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말들은 비록 다르지만 의미는 같아서 모두가 제법실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무릇 대승의 공력이란 믿으면 찰나에 성불하고, 비방하면 곧바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죄 받는 것을 마치고 다시 이 법을 들으면 문득 도를 깨닫는다.
예컨대 『문수경文殊經』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이 반야의 가르침을 듣고 비방하는 마음을 일으켜 믿지 않으면 곧바로 지옥에 떨어지지만, 그것은 갠지스 강 모래알 수만큼 많은 부처님께 공양한 것보다 수승하다. 왜 그러한가. 갠지스 강 모래알 수만큼 많은 부처님께 공양한 것은, 다만 인간 세상과 천상에서 생멸하는 복을 얻을 뿐이다. 하지만 반야의 가르침을 듣고서 비방하여 지옥에 떨어져도 가르침을 비방한 죄를 다 받고 나면, 이미 반야의 가르침을 들은 것이 종자가 되었으므로 이후에 반야의 가르침을 설하는 것을 듣자마자 문득 마음이 열려 찰나에 성불하기 때문이다.”
『무행경無行經』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옛날에 어떤 청정한 위의威儀를 지닌 법사가 있었는데, 중생을 가엾이 여겨 교화하고 위없이 높고 올바른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내게 하였다. 또 어떤 위의를 지닌 비구가 있었는데, 비록 계를 지키지만 보살이 행하는 도에는 능숙하지 못했다. 훗날 청정한 위의를 지닌 법사가 위의를 지닌 비구가 있는 곳을 지나다가 대승의 계를 믿지 않고 비방하면 지옥에 들어가지만 지옥의 죄가 끝나고 나면 이 법을 들은 것으로 인하여 도를 깨닫는 인연이 된다는 것을 알고서 억지로 게송 하나를 설해 주었다.
貪欲即是道 탐욕 그대로 도道이고
瞋癡亦復然 성냄과 어리석음도 그러하다네.
如是三法中 이와 같은 세 가지 법 가운데
具一切佛法 모든 불법佛法 다 갖추어져 있다네.
위의를 지닌 비구는 듣자마자 비방하고는 목숨을 마친 뒤 아비지옥에 떨어져 90백천억 겁 동안 온갖 고통을 받다가 지옥에서 벗어나 63만 세 동안 항상 비방한 죄를 받았는데, 그 죄가 차츰 얇아져 뒤에 비구가 되었다. 32만 세 동안 출가한 뒤 이 업을 인연으로 하여 도를 등지고 세속에 들어가 한량없는 천만 세 동안 모든 감관이 어둡고 둔하게 되었다. 이때의 위의를 지닌 비구가 어찌 다른 사람이겠는가. 내가 바로 그이다. 나는 이러한 대승법을 듣고서 믿지 않고 비방하여 지옥에 떨어졌지만, 그 죄를 받는 것이 끝나고 대승법을 들었던 까닭에 곧 부처가 될 수 있었다. …….”167)
모든 경론의 말씀을 살펴보건대 계를 견고하게 지키던 일은 상법시대 초기였으니, 그때는 성인이 가신 지 오래되지 않았고, 사람들 성품이 조금 순해서 계를 지니기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도 계를 지니는 이는 적고 범하는 이는 많았다. 하물며 지금의 말법시대는 성인이 가신 지 더욱 멀고 아득하며 사람들 근기도 하열하여 견실함이 없는데, 계의 부낭浮囊에 어찌 결함이 없겠는가. 부낭이 온전하지 못하면 생사의 바다를 건널 수 있겠는가. 따라서 계를 지키지 못하더라도 다만 대승의 종자와 인연을 맺기만 한다면 그 공덕은 반드시 배가 되리라.
그러므로 천태 대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여 설법하시던 때 승乘과 계戒168) 모두를 서두르는 이는 인간과 천인의 몸으로 법을 듣고 도를 깨닫는다. 승은 서두르나 계가 느슨한 사람은 삼악도에 태어난 몸으로 법을 듣고 도를 깨닫는다. 승은 느슨하나 계를 서두르는 사람은 인간 세상과 천상의 즐거움에 탐착하여 법회에 참석하지 못한다. 승과 계 모두 느슨한 사람은 이미 악도에 빠져서 대도에서 더욱 멀어진다. …….”169)
이것으로 보건대 차라리 계를 느슨하게 할지언정 승을 느슨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보리심’이라고 한 것은, 위로는 불도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마음을 말한다. 이는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찬탄하시는 바이다. 그러므로 『열반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발심發心과 필경심畢竟心 둘은 차별이 없지만, 이와 같은 두 마음에서 앞의 마음인 발심이 더 어렵다. 자신은 제도되지 못했어도 남을 먼저 제도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초발심자에게 예배하노라.”170)
『화엄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꽃구름(花雲)과 장식 구름(鬘雲), 천상의 음악과 천상의 갖가지 향을 공양하거나 갖가지 등을 밝히되, 하나하나 등불 심지는 수미산과 같이 하고, 하나하나 등불 기름은 바닷물과 같이 하여, 이와 같은 모든 공양구로 항상 불가설불가설不可說不可說171) 불국토의 극히 작은 티끌 수와 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여 얻은 공덕은 보리심으로 공양하는 한순간 공덕의 백분의 일, 천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우파니사타분優婆尼沙陀分172)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173)
‘부처님 은혜를 갚는다’라는 것에 대하여 『자비참법경慈悲懺法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중생 생각하기를 부모보다 더 하신다. 부모의 자식 생각은 그 자비가 한 생에 그치지만, 부처님의 중생 생각은 그 자비심이 끝이 없다. 그리고 부모는 자식이 은혜를 등지고 의리에 어긋나는 것을 보면, 성내고 한스러운 마음이 생겨나서 자비심이 옅어지지만, 부처님들은 그렇지 않다. 모든 중생들이 경의 가르침을 믿지 않는 것을 보면 자비심이 더욱 두터워져서 심지어 무간지옥까지 들어가 중생의 고통을 대신 받는다.”174)
이와 같은 큰 은혜를 어찌 갚을 수 있단 말인가. 만일 탑묘와 정사를 세우고 등촉을 밝히고 당번과 일산, 꽃과 향, 침구 등 갖가지로 공양하면, 장차 내세에 스스로 그 복을 받을 뿐이지만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아니다. 보리심을 내어 정토행을 닦아야 지혜 있는 자라고 이름하며, 부처님 은혜를 갚을 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승이 비록 과위의 경지에 머물더라도, 초발심한 범부 보살이 지닌 공덕의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대지도론』에는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다.
“ 아라한과 벽지불은 탐욕을 여읜 사람인데, 어떤 범부가 다만 보리심을 냈다고 해서 어찌 그들보다 수승할 수 있는가?
보살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모든 바라밀을 행하는 자이고, 둘째는 다만 은밀히 발심하여 보살도를 행하는 자이다. 비록 완성되지 못했더라도 이승보다 수승하니, 왜 그러한가. 비유컨대 태자가 아직 즉위하지 않았더라도 모든 대신이나 부귀한 자보다 수승한 것과 같다.”175)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출가한 사람이 보리심을 내는 일은 어렵지 않지만, 재가의 사람이 보리심을 내는 것은 진실로 어렵다. 왜 그러한가. 여러 가지 나쁜 인연에 얽매여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보리심을 내면 천인들이 모두 기뻐하며, ‘우리는 이제 천인의 스승을 얻었다’라고 이와 같이 말한다.”176)
『비니경毘尼經』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 대승을 닦아서 보살계를 행할 때 새벽에 범한 것이 있다면 마땅히 죄를 지은 것이 되겠지만, 낮에 범한 것이 있더라도, 만약 보리심이 잠깐도 끊어지지 않는다면, 계의 공덕(戒聚)이 성취되어 범한 것이 없게 된다. 나아가 중야中夜에 범한 것이 있어도, 후야後夜에 범한 것이 있어도 보리심이 잠깐도 끊어지지 않는다면 계의 공덕이 성취된 것이다.”
『보적경寶積經』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이 대천세계의 중생들을 때리고 절단하더라도, 악한 마음으로 보리심을 낸 사람을 괴롭히는 자가 있다면 그 죄가 더욱 크다.”
[200]
常樂住蘭若 항상 아란야에 머물기를 좋아하라.
不然隨衆居 그렇지 않으면 대중을 따라 살지니
群居須愼口 여럿이 살 때는 입을 삼가고
獨處要防心 혼자 있을 때는 반드시 마음을 지켜라.
[201]
遠離惡知識 나쁜 벗(惡知識)을 멀리 여의고
當從善友敎 좋은 벗(善友)의 가르침을 따라서
身不離袈裟 몸에서는 가사를 여의지 말고
食當須應器 먹을 때는 반드시 발우(應器)177)에 하라.
[202]
手不釋黃卷 손에서는 황권黃卷을 놓지 말고
不樂看外書 외서外書 보기를 즐겨 하지 말며
目不視女人 눈으로는 여인을 쳐다보지 말고
見之猶毒蛇 보더라도 독사같이 보아라.
[203]
非病晝不卧 병들지 않았거든 낮에는 눕지 말고
卧則須右脇 눕는다면 반드시 오른쪽 옆구리로 누워라.
非飢不餘食 배고프지 않거든 군음식 먹지 말고
食則須節量 먹을 때는 반드시 양을 조절하라.
[204]
寢不敷茵蓐 잠잘 때는 이부자리 펴지 말고
眠亦不放恣 잠들어도 함부로 하지 말라.
坐必不背西 앉을 때는 반드시 서쪽을 등지지 말고
行時但視地 걸을 때는 다만 땅만 쳐다보아라.
[205]
語常離戱笑 말할 때는 항상 장난웃음 없애고
取要不應多 요점을 취하여 많은 말 하지 말라.
受嚫作三分 시주 받을 때는 셋으로 나눠야지
不冝全受破 혼자 받아 화합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
[206]
勿得畜物多 물건을 많이 쌓아 두어
以作障道緣 도를 장애하는 인연을 짓지 말라.
亦勿繁眷屬 권속에 얽매이지 말라.
增長憍瞋慢 교만과 성냄과 업신여김이 늘어날지니.
[207]
如是若干事 이와 같은 몇 가지 일은
沙門急先務 사문이 다급하게 먼저 해야 할 일이니
苟不能如是 만일 이와 같이 할 수 없다면
豈得名浮圖 어찌 불교도(浮圖)178)라는 이름을 얻겠는가.
[208]
雖受四事供 비록 네 가지 공양을 받더라도
猶如呑餌魚 먹이를 삼킨 물고기같이 여기라.
當來必償債 내세에 반드시 빚을 갚아야
得無慙且懼 부끄럽고 두려운 일 없으리라.
‘아란야阿蘭若(araṇya)’란 여기 말로 ‘시끄러움이 없는 곳(無憒閙處)’을 말한다. 아란야에 머물면 삼업이 저절로 청정해져 곧 한량없는 공덕을 갖추게 되며, 도를 얻기가 어렵지 않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는 “아란야에 머무는 자는 청정한 위의를 성취하며, 모든 감관이 산란하지 않음을 성취하며, 정법이 눈앞에 나타남을 성취한다.……”179)라고 하였다.
무릇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빨리 얻고자 한다면, 어찌 아란야에 기꺼이 머물지 않겠는가. 만약 그렇지 못하면 반드시 가람伽藍에 참석하여 대중들 속에 머물러야 한다. 이렇게 하면 본래 자신이 게을러서 자신의 힘으로 오롯이 도를 닦지 못하더라도, 남들이 정진하는 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며 본받아서 감히 방일하지 못할 것이며, 움직이거나 활동하거나 나아가 아침이나 낮에 죽이나 밥을 먹을 때에도 한결같이 모두 대중을 좇아 일찍이 법규를 어기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도행道行이 자연스럽게 더러움을 멀리하고 불제자의 수에 들어갈 것이니, ‘쑥이 삼밭에 생겨나면 붙들어 주지 않아도 저절로 곧아진다’라는 속담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게으른 사람은 대중을 따르는 것만 한 것이 없으니, 산과 들에 한가로이 노닐며 멋대로 악한 일을 하고서 헛되이 세월만 보내고, 훗날 후회할 인연을 절대로 짓지 말라. 그리고 편안함을 구하고 배부름을 구하여 마을 개울가나 어촌의 해안가에서 풀을 엮어 암자를 짓고 머물며 살아가서는 안 된다. 용렬한 속인의 무리와 사귀면서 동무삼아 형·아우라 부르거나, 아버지·어머니라 부르면서 짓지 않는 나쁜 짓이 없다면, 자기 수행만 잃을 뿐 아니라 청정한 불교도까지 더럽히게 될 것이니, 그 죄가 적지 않을 것이다.
‘좋은 벗(善友)’에 대하여 『비나야』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기를, ‘선지식은 범행梵行의 반쪽입니다. 모든 수행자는 선우의 힘으로 인해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선지식은 범행의 전부이니라. 만일 좋은 도반을 얻어 그와 함께 머물면, 열반에 이르도록 이뤄지지 않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범행의 전부라고 말한다’라고 말씀하셨다.”180)
그리고 『불설패경佛說孛經』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벗에는 네 종류가 있다. 첫째는 꽃과 같은 벗이니, 좋을 때는 머리에 꽂고 시들 때는 땅에 버리듯이, 부귀한 것을 보면 달라붙고 빈곤하면 버리는 벗이다. 둘째는 저울과 같은 벗이니, 물건이 무거우면 머리 숙이고 물건이 가벼우면 올라가듯이, 주는 것이 있으면 공경하고 주는 것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벗이다. 셋째는 산과 같은 벗이니, 금으로 된 산에 새와 짐승이 모여들면 깃과 털이 광채를 띠듯이, 고귀함이 사람을 영화롭게 해 주고 부유함과 즐거움을 함께 기뻐하는 벗이다. 넷째는 땅과 같은 벗이니, 온갖 곡식과 재물 일체를 우러르듯이 베풀어 주고 보호하되, 은혜가 두터워도 자신의 덕으로 여기지 않는 벗이다.”181)
『인과경因果經』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바라문 우타이優陁夷는 총명하고 지혜가 많아서 정반왕이 태자의 벗이 되어 줄 것을 명하였다. 그가 태자에게 말하기를, ‘벗에는 세 가지 필요한 법이 있습니다. 첫째 잘못하는 것을 보거든 바로 타일러 간하는 것이며, 둘째 좋은 일을 보거든 깊은 곳에서 생겨나는 마음으로 기뻐하는 것이며, 셋째 고통스러운 곳에 있거든 버려 두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182)
『사분율四分律』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일곱 가지 법을 갖추어야 비로소 친한 벗이라 한다. 첫째는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것, 둘째는 주기 어려운 것을 주는 것, 셋째는 참기 어려운 것을 참는 것, 넷째는 비밀스러운 일을 서로 알려 주는 것, 다섯째는 잘못을 서로 덮고 감춰 주는 것, 여섯째는 고난을 만나도 버리지 않는 것, 일곱째는 가난해도 가벼이 여기지 않는 것이다.”183)
『시가라월경尸迦羅越經』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벗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나쁜 일 하는 것을 보면 가려진 곳에 데려가서 타일러 고치도록 말하고, 꾸짖어서 그만두게 하는 것이다. 둘째는 급한 일이 있거든 반드시 달려가 구호하는 것이다. 셋째는 비밀스런 말이 있거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다. 넷째는 항상 서로 공경하고 찬탄해 주는 것이다. 다섯째는 좋은 일은 반드시 많든 적든 나누어 주는 것이다.”184)
만일 항상 질투와 교만을 품어 마음에 절도와 삼가는 것이 없거나, 입에는 법다운 말을 담지 못하고 악인을 벗으로 삼으면, 이를 용렬한 사람이라고 한다.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부처님께서 난타와 함께 생선가게에 이르렀을 때, 부처님께서 난타에게 생선을 늘어놓았던 풀을 조금 가져오게 하여 손에 잠시 쥐었다가 놓게 하고서 손에서 나는 냄새를 맡아 보게 하셨다. 난타는 ‘비린내가 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는 향 가게에 이르렀을 때, 향을 쌌던 종이를 가져오게 하여 잠시 쥐었다가 놓게 하고서 다시 난타에게 물으시니, ‘향내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난타에게 ‘좋은 벗과 나쁜 벗에 물들여지는 것도 이와 같다. 착한 벗을 가까이하면 반드시 광대한 명성을 얻으리라.……’ 말씀하시었다.”185)
‘나쁜 벗(惡知識)’이란, 나를 향하여 헐뜯고 욕하며 때리고 꾸짖는 자가 아니라, 내가 나쁜 일을 하는 것을 보고도 고치도록 말하지 않고 기뻐하며 찬양하여 선하지 못한 업을 자라나게 하거나, 나아가 나를 존경하고 공양하는 이까지 모두가 나쁜 벗이다.
그러므로 남악南岳 대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세간의 도속道俗이 우러르고 공양하며 간절히 법문을 청하는 것들은 모두가 악마가 시키는 일이지, 선지식이 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악지식은 마치 원수가 속여 친척이라 하는 것과 같다. 괴롭고 괴롭구나. 모든 왕과 찰제리(刹利, 크샤트리아 계급)도 그러하니, 가리고 가리고 또 가려야만 한다.”186)
‘가사袈裟’란 색깔을 따라 붙인 이름이다. 여기 말로는 ‘괴색壞色’187)이라 한다. 『범망경』에서는 “청·황·적·흑·자색을 섞어 만들면 모두 괴색이라 한다.”188) 하였고, 그 주석에서는 “본래 백색인 것을 무너뜨리는 것은 애착하는 마음을 떠나가게 하려는 것이다.”189)라고 하였다.
그리고 가사란 삼의三衣의 통칭이기도 하다. 삼의란, 첫째 5조條로 된 안타회安陁會, 둘째 7조로 된 울다라승鬱多羅僧, 셋째 9조로 된 승가리僧伽黎를 말한다. 또 11조 나아가 25조까지 있는데, 그중에 길거나 짧게, 넓거나 좁게 바느질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장복의章服儀』190)와 『육물도六物圖』191)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과 같다.
『비화경悲華經』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석가여래께서 보장불寶藏佛이 계신 곳에서 발원하시기를, ‘원컨대 내가 성불할 때 나의 가사에 다섯 가지 공덕이 있게 하소서. 첫째, 나의 법 가운데 들어와서 중죄를 지었거나 사견을 지닌 사부대중이 한 생각만이라도 공경하는 마음으로 존중한다면 반드시 삼승의 법 안에서 수기를 받을 것입니다. 둘째, 천룡과 인간과 귀신이 이 가사를 조금이라도 공경한다면 삼승에서 물러나지 않는 법을 얻을 것입니다. 셋째, 어떤 귀신이나 여러 사람들이 가사를 조각내어 4촌寸만 지니더라도 먹을 것이 충족할 것입니다. 넷째, 어떤 중생이 서로 어기고 배반할 때 가사의 힘을 생각하면 곧 자비심을 일으킬 것입니다. 다섯째, 전쟁터에 있을 때 조그마한 가사 조각이라도 공경하고 존중하면 항상 적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나의 가사에 이러한 다섯 가지 힘이 없다면, 10만 부처님을 속이는 일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시었다.”192)
어디선가 말하기를, “용이 가사의 실오라기 하나를 얻어서 그 문 위에 걸어 두면 금시조金翅鳥193)의 환란을 면한다.” 하였고, 『대비경大悲經』에서는 “가사를 입은 사람은 미륵불이나 누지불樓至佛이 계신 곳에서 열반에 들어가게 되리니, 들어가지 못하고 남겨지는 이가 없다.”라고 하였다.
영명 연수永明延壽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가사는 해탈의 깃발이라고 한다. 시방의 부처님들이 그것에 의지하여 도과道果를 얻고, 사부대중과 사람 아닌 것들이 그것을 지니면 편안함을 얻나니, 맑고 한가로움을 나타내고, 뜨거움의 번뇌를 없애 주기 때문이다. 번뇌의 티끌을 여읜 최상의 옷이 아니라면, 어찌 미혹의 길에서 구제할 수 있겠는가. 그 공이 헛되지 않으리니, 이루 다 찬탄할 수가 없다. …….”
‘발우(應器)’란, 범어로 발다라鉢多羅(pātra)이다. 부처님께서 계율을 제정하실 때 질그릇과 철 그릇이 수승하다 하셨다. 그 바탕과 양의 크고 작음과 공덕의 우열은 『육물도』에서 인용하여 설명하는 것과 같다. 비구의 18가지 물건 가운데 가사와 발우가 가장 긴요한 것이다. 마치 새의 두 날개나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하나라도 빠뜨리면 안 된다.
『사분율』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비구가 가사와 발우가 없이 타인의 공양을 받는다면, 천겁 동안 소의 머리를 벤 죄에 준한다. 그러므로 비구는 가사와 발우를 항상 그 몸에 지녀 잠시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
‘황권黃卷’은 불경을 말한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한나라 명제 때 불경과 도경을 함께 태워 시험할 적에 도경은 재가 되었으나 불경은 타지 않고 다만 연기에 그을려 누런빛이 되었을 뿐이다. 그 뒤로 경을 만드는 사람은 이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종이를 모두 황색으로 물들이게 되었다.
무릇 한가할 때 스승과 벗이 되는 것으로는 불서佛書만 한 것이 없나니, 그중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모두 불보살들이 깨달음의 원인(因)을 행하고 과보(果)를 얻는 무량한 공덕과, 중생들로 하여금 악을 금하고 선을 행하며 삿된 일을 버리고 바른 것으로 돌아가게 하는 갖가지 인연과, 진실한 말씀들이다. 글을 읽고 의미를 살펴 성현을 우러러 사모하고 스스로 감동하고 타인을 가엾이 여기게 된다. 이와 같이 마음을 조절하여 몇 날이 지나면 여러 인연들이 차츰 그치고, 몸과 마음이 저절로 맑아져서 현묘한 경계에 오를 수 있으리니, 한가로이 노닐며 허송세월하지 말라.
자기 혼자서 경을 볼 수 없다면, 마땅히 아는 사람에게 물어서 분수에 따라 배우라. 하루 한 구절이라도 좋다. 그렇게 하면 이틀이면 두 구절, 열흘이면 열 구절, 백 일이면 백 구절을 배울 것이니, 이와 같은 일과를 빠뜨리지 않으면 그 식견이 넓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예컨대 이 공부에 더디 젖어서 한 번 듣고 깨닫지 못하는 자일지라도, 두 번 듣고 세 번 듣고 열 번까지 듣는다면 무엇인들 통달하지 못하겠는가. 비록 그윽하고 깊은 의미를 끝까지 통달하지 못하더라도, 완전히 어리석었던 지난날과 어찌 다르지 않겠는가. 이런 까닭에 차츰차츰 배워서 오묘한 이치를 통달하고 감로의 문에 들어가니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아는 것 없이 새처럼 중얼거리는 공허하고 눈먼 선(無知鳥空盲禪)보다 오히려 수승하리라. 종일토록 헛된 말로 웃고 떠드는 무리보다 어찌 현명하지 않겠는가. 다만 게으르고 마음이 없을 뿐이니, 힘써 부지런히 배우는데도 통달하지 못할 자 없으리로다.
‘외서外書’란, 베다(韋陁, veda)의 전적과 여러 사상가들의 문서를 편집한 것 등으로서, 사람을 그르치게 하는 헛된 말을 말한다. 그러므로 『법화경』에서는 “세속의 시문을 짓거나 외서를 찬탄하고 읊조리는 이와 같은 사람은 모두들 가까이하지 말라.”194) 하였다.
『대지도론』에서는 “외전外典을 익히는 것은 칼로 진흙을 자르는 것 같아서 진흙은 이뤄지는 것이 없거니와 칼만 날로 무디어진다.” 하였고, “외전을 읽는 것은 마치 햇빛을 쳐다볼 때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지관보행기止觀輔行記』에서는 “『춘추春秋』를 읽거나 『좌전左傳』을 암송하여 종일토록 마음이 전쟁터에 노닐고 입으로는 삿된 음모만을 연출하니, 불법에 도움이 되는 일과는 거리가 멀구나.……”195)라고 하였다. 장자·노자·공자·맹자의 도는 비록 구경의 말은 아니지만, 그 문장이 인의仁義를 널리 펴고 있기 때문에 새로 배우는 이에게는 도에 들어가는 문이 되는 것 역시 때때로 볼 수 있다. 왜 그러한가.
『비나야』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이 외도의 논서 배우는 것을 허락하시되, 하루를 셋으로 나누어 처음과 중간 두 부분에는 불경을 독송하고, 마지막에는 외서를 읽으라 하셨다. 그러므로 기원정사에 있는 서원에 대천세계 안의 문서들을 모두 배치하셨다. 이처럼 부처님께서 비구들이 두루 읽는 것을 허락하신 것은 외도를 항복시키기 위함이지, 그 견해에 의지하는 것을 허락하신 것은 아니다. 그리고 외서를 좋아하여 도 닦는 일을 그만둬서는 안 된다.”
‘눈으로는 여인을 쳐다보지 말라(目不視女人)’라는 것은, 여인은 세간과 출세간에 장애가 생겨나게 하는 근본이기 때문이다. 세간의 장애란, 천자의 지위에서도 그로 인해 나라가 어지럽게 되고, 공경대부公卿大夫도 그로 인해 집안을 다스리지 못하고, 사대부와 서민들도 그로 인해 자기 몸을 잃나니, 하물며 세간을 벗어나려 하는 자가 두려워하고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중생의 번뇌는 탐욕이 근본이니, 만일 여색을 보고 음심이 홀연히 일어나면, 그 불길을 막을 수 없고, 이로 인해 여러 방편을 만들어도 끝내 범하여 접촉하게 되고, 한 번 접촉한 연후에는 마음에 만족하거나 싫증내는 일이 없어 물리치거나 버릴 생각이 없게 된다. 마치 나비가 불에 뛰어들듯 억제하지 못하고, 마치 쇠망치를 진흙 속에 던지듯 끝내 벗어날 기약이 없다. 모든 환란이 이것으로 인해 생겨나서 한량없는 겁 동안 생사를 윤회하며 도의 문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 부처님께서는 모든 경전의 가르침에서 간절하게 꾸짖으셨고, 역대 조사의 논서와 전기에서도 그러하였다. 그중 『화엄경』에서 위덕주 태자威德主太子의 꾸짖는 말이 가장 간절하다.196)
이런 까닭으로 애욕의 강을 건너려면 반드시 모든 여인으로부터 멀리 벗어나야 한다. 만일 인연이 있어 부득이 만나야 한다면, 독사를 보듯이, 불구덩이를 피하듯이 해야 한다. 옛적에 청량淸凉 조사는 휘장을 사이에 두고서 어머니를 만났거늘, 하물며 여인들을 바로 보았겠는가.
‘낮에 눕는다(晝臥)’라는 것은, 모든 방일함 중에서 가장 옳지 못한 것이다. 여래께서는 비구들에게 밤에도 눕지 말라고 경계하셨거늘 어떻게 하물며 낮에 눕겠는가. 세간의 도에서도 옳지 않다. 때문에 공자께서 재여宰予를 꾸짖으시며,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다.197) 만일 질병이 있어 누워야만 한다면 반드시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누워야지 시체처럼 반듯하게 누워서는 안 된다.
‘군음식(餘食)’이란, 여래께서 처음에 비구들에게 1일 1식을 계율로 제정하셨는데, 뒤에 라후라羅睺羅가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배고프다고 우니, 부처님께서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아침 죽을 허락하셨다. 훗날 비구는 이렇게 문을 여신 것을 보고 아침 죽과 낮의 밥을 항상 행하는 의식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이 두 끼니 음식 이외의 모든 것은 군음식이 된다. 만일 아침과 점심을 놓치고서 때 아닌 때에 음식을 얻는다면, 먹지 않으면 좋겠지만 먹어도 무방하다. 왜 그러한가. 굶주려서 기력이 없으면 도업을 이루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관론止觀論』에서는 “음식을 조절하지 않으면 병이 나기 쉽다.” 하였고, 『박물지博物志』198)에서는 “잡식을 하는 것에서 백 가지 질병과 삿된 일이 모이게 되나니, 먹는 것이 적을수록 마음은 더욱 맑아지고, 먹는 것이 많을수록 몸은 더욱 손상된다. 그러므로 먹는 것이 지나치면 안 된다.”199)라고 하였다.
‘잠잘 때 이부자리 펴지 말라’라는 것은, 무릇 수도하는 사람이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수면의 마구니(睡眠魔)에 휘둘리기 때문이다. 비록 얼음으로 된 침상에서 눈(雪)을 덮고 있어도 모르는 사이에 찾아와서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데, 하물며 두터운 이부자리를 펴고 다리 쭉 뻗고 큰 대大 자로 누우면 어찌 물리칠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으로 깊이 잠들어 혼침에 빠지면,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밤이 새는지 날이 저무는지 알지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마음을 다잡아 공부를 하겠는가. 그러므로 비구가 잠이 들 때에는 다만 옷자락을 펴고 팔을 베개 삼을 뿐 흐트러지지 말라. 잠깐 사이 쉬고는 곧 일어나 세수하고 양치하고서 자기가 하는 바에 따라 좌선이나 독송, 예불이나 염불을 하여 때를 놓치지 말고 종신토록 그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도를 이루지 못했더라도 훌륭한 수행자(善士)라 부를 것이다.
‘앉을 때 서쪽을 등지지 말라’라는 것에 있어서 옛날 신라의 의상 조사는 오로지 안양국에 태어나기를 희구하여 평생토록 앉을 때 서쪽을 등지지 않았다. 그의 문도 가운데 죄를 범한 한 비구가 있어 법대로 그를 내쫓았다. 그 비구는 대중을 떠나 다른 곳을 유행하였는데, 그 스승을 우러러 흠모하여 형상을 만들어 짊어지고 다녔다. 조사께서 이를 듣고 불러들여 말씀하시기를, “네가 실로 나를 기억하였다면 내가 평생 동안 앉을 때 서쪽을 등지지 않았으니 형상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형상을 서쪽을 등지게 앉혔는데, 앉은 형상이 스스로 몸을 돌려 서쪽을 향해 앉았다. 조사께서는 “훌륭하도다.” 하시고는 죄를 사하여 다시 거두어 주셨다. 그러므로 서방정토를 구할 때는 반드시 우러러 본받아야 한다.
‘걸을 때는 다만 땅만 쳐다보라’라는 것은, 일심으로 염불을 하며 걸을 것이지 좌우로 눈을 돌려 산란한 마음으로 광대처럼 다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물며 봄·여름·가을 세 계절엔 작은 벌레들을 밟아서 죽이게 되니, 까닭 없이 죄를 지어서야 되겠는가.
그리고 타인과 이야기할 때에는 장난치며 웃거나 큰 소리로 망발을 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 요점만을 취하여 번잡스럽지 않게 말해야 한다. 외전外典에서도 “군자는 말이 적어야 한다.” 하였으니, 말을 하려거든 세 번 생각한 뒤에 말해야 말에 곁가지가 없다.
‘시주 받을 때는 셋으로 나누라’라는 것에 대하여 『비나야』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어떤 비구가 보시를 받거든 반드시 셋으로 나누어서 하나는 삼보에 올리고, 하나는 동행자나 가난하고 병든 이에게 주고, 하나는 자신이 받아 써야 한다.”
이렇게 하면 자비와 공경 두 가지 마음이 갖추어져 시주자의 은혜를 갚고 진정한 출가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비구는 많은 물건을 쌓아 둘 수 없다. 만일 재물이 많이 있다면 밤낮으로 계산하여 이자 늘릴 것을 도모하거나, 타인이 도둑질할까 두려워하거나, 국왕이 빼앗을까 두려워하거나, 물이나 불에 잃어버리지 않을까 걱정한다. 이런 것들이 마음을 묶어서 잠시도 잊지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염불하고 독경하겠는가. 비록 독경하고 염불하더라도, 다른 반연이 교차하여 마음이 전일하지 못하여 공부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비구들에게 삼의三衣 이외의 다른 물건은 쌓아 두지 않도록 경계하신 것이다.
또한 권속을 많이 갖지 말아야 한다. 아직 도를 얻기 전에 권속이 있으면 자기에게 많은 손해가 될 뿐 조그마한 이익도 없다. 왜 그러한가. 교만하고 성내고 업신여기는 마음이 이로 인해 자라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마음은 법 가운데 큰 장애이므로, 경에서는 “마음을 닦는 사람은 항상 멀리 떨어져서 혼자 고요한 곳에 머무는 것을 좋아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만일 권속을 많이 두고자 하면 반드시 마업魔業이 될 것이다.
‘네 가지 공양’이란, 음식·의복·와구·의약을 말한다. 그것들을 시주하는 것은 복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과 처자의 몫을 줄여 승가에 보시하는 데 쓴 것인데, 승려가 만일 계행과 위의가 모자라고 좌선·독송·예불·염불도 모자란다면, 신심 있는 보시물도 오히려 소비할 수 없거늘 하물며 복을 준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미래세에 반드시 그 빚을 갚아야 할 것이니,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빚을 갚는 일과 은혜를 갚는 일에는 여러 가지 방도가 있으므로 정해서 말할 수 없지만, 이제 경에 의거하여 간략히 세 가지로 설명하겠다. 이를테면 가벼운 것(輕), 무거운 것(重), 중간 것(中)이 그것이다.
무엇을 ‘가벼운 것’이라 하는가. 어떤 승려가 비록 인과는 알지만 위의를 갖추고 있지 못하고 여법하게 마음을 조절하여 수행하지 못하여 시주자의 뜻과 어긋나고 일이 이치에 걸맞지 않는 것이다. 이후에 시주 집의 노비나 하인이 되어 집안일을 맡아 하되, 마음에 싫증이나 권태가 없으리라.
무엇을 ‘중간 것’이라 하는가. 어떤 승려가 입으로만 인과를 말하면서 마음으로는 부합하지 못하여 시주하는 사람, 시주받는 사람, 시주하는 물건에 대하여 마음대로 나와 남을 헤아리고, 옳고 그름을 따지며, 한 생각도 은혜 갚을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다. 이후에 낙타·나귀·소·말 등이 되어서 수레를 끌고 밭을 갈거나 짐을 싣고 운반하되, 굶주리고 목마르며 채찍을 맞아도 고생스러움을 꺼리지 않으리라.
무엇을 ‘무거운 것’이라 하는가. 어떤 승려가 인과를 알지 못하고 항상 탐내는 마음을 일으키며, 시주자가 1천 냥의 재물을 보시하거나 1백 가지 음식과 갖가지 공양구를 갖추어 진설하더라도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마치 바다가 강을 받아들이듯 하는 것이다. 이후에 돼지·양·거위·오리 등이 되어서 몸으로 공양하게 되리라.
이것이 세 등급으로 시주의 은혜를 갚는 것이다. 이와 같이 빚을 갚는 것은 한 생에 그치지 않고, 그가 받은 은혜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가깝게는 2생, 3생, 나아가 10생, 백천만 생까지 지나는 것이므로 지정해서 논할 수 없다. 이러한 인과는 마치 형상과 그림자가 서로 따르듯 반드시 털끝만큼도 차이가 없다. 예를 들면 운광 법사雲光法師는 소로 태어나는 과보를 면하지 못했고, 신라의 한 비구는 버섯으로 변해 버렸다. 이러한 징험이 나타나는 사례를 다 기록할 수 없으니, 자세한 것은 『법원주림法苑珠林』과 『이궤조전李詭祖傳』의 내용과 같다.
그러므로 『열반경』과 『범망경』에서는 부처님께서 여러 보살들에게 경계하시기를, “차라리 백개 천개의 칼과 창으로 몸을 베고 찌를지언정, 끝내 파계한 입으로 신심 있는 시주자가 베푸는 의복을 받지 말며, 차라리 백겁 천겁 동안 뜨거운 쇠구슬을 삼킬지언정 끝내 파계한 입으로 신심 있는 시주자가 베푸는 음식을 받지 말라.”200)라고 하시었다.
아! 이처럼 경계하는 말씀을 살펴보건대, 우리들처럼 계를 지키지 않는 머리 깎은 이(秃人)들이 생각과 마음을 방자하게 하여 신심 있는 시주자의 보시를 받아서야 되겠는가. 그러므로 밥을 먹을 때는 반드시 이 음식이 온 곳을 헤아리고, 자신의 덕행이 공양을 받기에 온전한지 부족한지 헤아리고, 마음을 잘 지키고 허물을 없애는 데는 탐·진·치 등이 근본이라 생각하고, 진실로 몸이 마르는 것을 치료하기 위한 좋은 약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도업을 이루기 위해 이 음식을 받아야 한다. 또한 생각하기를, ‘내 입은 아궁이가 전단나무나 마른똥을 오는 대로 태우듯이 맛있는 것을 좋아하거나 거친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라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장로 화상長蘆和尙은 “음식에 대한 사치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해탈의 기약이 어찌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또한 의복에 대해서도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다만 추한 몸을 가리는 데 필요할 뿐, 몸을 꾸며 아름답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찌하여 꼭 섬세하고 가벼운 것만 취하고 스스로 거칠고 무거운 것은 버리겠는가.’
그러므로 상근기로서 도에 뜻을 둔 수행자들은 입을 거리 먹을거리를 잊어버리고 다만 명아주를 삶아 배고픔을 충당하고, 가는 풀로 몸을 가릴 뿐이다. 중근기의 사람은 항상 걸식을 하고 옷은 다만 백 번 기운(百衲) 세 벌뿐이다. 하근기의 사람은 이렇게 할 수 없어서 반드시 시주자의 인연을 빌어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그 시주자의 은혜가 막중하니, 반드시 분량을 조절해서 받아야 한다. 성근 싸라기밥도 소비하기 어렵거늘, 옥같이 부드러운 쌀밥을 온전하게 공양 받지 말라. 성근 베옷도 좋거늘 어찌 비단(絹帛)과 능라綾羅이어야만 하겠는가. 왜 그러한가. 맛있는 진수성찬은 수명을 재촉하고, 값비싸고 화려한 옷은 복을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수명과 복이 온전하지 못하면 도업을 어찌 성취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능인대각能仁大覺이신 우리 부처님께서는 금륜金輪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 다만 보리 한 알 삼씨 한 알을 잡수셨을 뿐이고, 옷도 사슴가죽과 거친 베옷뿐이었다. 이와 같이 행하기 어려운 고행을 겪고서야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신 것이다.
널리 고하노니, 새로 배우는 이들이여, 본사本師이신 우리 부처님의 높으신 절개를 흠모하여 몸과 입의 봉양에 집착하지 말라. 부지런히 선정과 지혜 공부를 닦아 빨리 해탈의 문에 오르라. 은혜 받은 이를 먼저 제도하면, 이것을 ‘은혜를 알아 보답하는 것’이라 하리니, 어찌 빚 갚는 수고로움을 근심하겠는가.
[209]
如上許多事 위와 같은 허다한 일들이
散在諸經論 여러 경론에 흩어져 있어
今集成略頌 이제 모아 간략히 송頌을 만드니
一代義鍾玆 일대시교의 뜻이 여기에 모였네.
[210]
如海一滴水 마치 한 방울의 바닷물이
具含百川味 온갖 시냇물의 맛 모두 머금고 있듯이
一甞知衆味 한 방울만 맛보아도 여러 가지 맛을 알지니
諸生莫輕忽 중생들이여, 소홀히 여기지 말라.
지금 나 무기無寄는 비록 승가에 몸담고 있지만, 행한 바를 미루어 보건대, 계戒도 모자라고 선정도 모자라고 염불도 모자라고 예참도 모자라고 보시도 모자라고, 나아가 작은 선 하나도 닦은 것이 없으며, 악한 일들은 하나라도 짓지 않은 것이 없으니, 어찌 부처님이나 하늘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정명경淨名經』에서는 “자기 병을 구제하지 못하고서 병든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을까?”라고 하였다. 이 말을 살펴본다면, 자기 허물은 숨겨 두고 남의 허물을 고치려는 자 역시 부끄러워할 만한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은 득도하지 못했지만, 먼저 남을 제도한다는 의미를 취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여러 산야에 노닐고 도성까지 두루 살펴보니, 머리 깎고 먹물 옷 입은 자가 대밭보다, 갈대밭보다 많은데, 중근기와 상근기를 제외한 나머지 하근기의 어리석은 무리들은 하는 짓이 참으로 부끄럽도다.
어떤 비구는 세속의 글도 오히려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불경의 의미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전생에 지은 복이 없으므로 금생에 가난하여 살아가기 어려우니 먹을거리 입을 거리를 걱정한다. 불사를 빙자하여 둘씩 다섯씩 마을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구구하게 구걸하되, 오직 많이 얻을 생각만 하니, 어찌 남을 복되게 할 생각을 하겠는가. 이미 모아 놓고서는 호용互用201)하여 절도가 없으면서 장한 일을 한다고 말한다.【이는 아귀의 업이 된다.】
어떤 비구는 문자를 거칠게 기억하여 겨우 한두 가지 경을 알고서 문장을 따라 독송하니, 그 의미에는 어둡기만 하다. 석존의 일대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 본 적 없으면서 자칭 법사法師라 말하고, 부정하게 설법하여 대중들을 속이고 미혹시키며, 외람되게 믿음 있는 시주자의 보시를 받고서도 부끄러움이 없다.【이는 축생의 업이 된다.】
또 어떤 이름뿐인 선승(禪和子)은 가사·누더기 옷·주장자·표주박·발우 등으로 겉모양은 물욕을 잊은 듯하지만, 속으로는 진실한 덕이 없어서 좌선 공부를 마치지 못하고, 다만 옛사람의 공안만을 잡고서 대승 경전을 그르다고 질책한다.【이는 아비지옥의 업이 된다.】
어떤 이는 선禪과 교敎에 의지해서 출가하여 도를 닦는다고 하면서 겨우 문 안(門庭)에 들자마자 선과 교의 심오한 뜻은 궁구하지 않고 제각각 망령된 집착을 일으켜 서로서로 헐뜯고 파괴한다.【이는 쟁론지옥의 업이 된다.】
어떤 비구는 부처님께서 금하신 법을 어기고 이자 늘리는 일을 경영하여 많은 재산을 갖고 있기도 하고, 또 어떤 비구는 왕공이나 대신의 세도에 빌붙어 자신의 부강함을 과시하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능멸하면서 음행을 탐하고 술 먹기를 좋아한다. 어떤 이는 외서를 찬탄하여 읊조리고, 속인들과 친구가 되어서 서로 소리 높여 노래하며, 어떤 이는 바둑이나 장기 등의 잡기와 금슬을 타거나 피리를 부는 등 온갖 불선법不善法을 좋아하며, 이와 같이 방자한 마음으로 짓지 않는 악이 없다.【이는 삼악도의 업이 된다.】
아! 이들이 어찌 선업과 악업의 과보를 알지 못하겠는가. 이양利養을 구하는 마음이 강한 까닭에 멋대로 했을 뿐이로다. 외서에서도 “고의로 지은 죄의 형벌에는 아무리 작아도 작은 것이 없으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산야에서도 농부의 비방을 면하지 못하고, 도성에 노닐 때도 선비의 비방을 받는 일이 많다. 이 때문에 불법을 위태롭게 하는 모습을 눈뜨고 볼 수가 없다.
무릇 법이란 저절로 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퍼지게 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다. 사람이 하지 못하면 불법이 어찌 오래 머물겠는가. 옛날 위魏나라 황제가 불법을 파멸시킨 것은, 대개 그 당시 사문들이 부처님의 계율을 어기고 방만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그 재앙을 부른 뒤에 왕이 폐불을 가했을 뿐이니, 거울 삼을 만하지 아니한가. 지금의 형세를 살펴보건대 그 당시에 가까우니, 위태롭고 위태롭구나.
소승이 비록 영민하지는 못하지만 두렵고 두려워서 이런 미친 말을 하노니, 바라건대 어진 이들이여, 미친 사람 말이니 믿지 못하겠다 말하지 말고, 저렇듯 밝은 거울로 삼아 제각기 뜻을 가다듬고 해진 법의 배를 수선하여 생사의 바다를 건너되, 자기도 건너고 타인도 건네주어 차례차례 이어져 법이 끊어지지 않게 한다면, 그 이익이 넓으리로다.
옛사람은 법을 중히 여기고 사람에 집착하지 않았으니, 예컨대 천제天帝는 축생에게 절을 하여 스승으로 삼았고, 설산 동자는 아귀에게 게송을 청하였다. 만일 한마디 한 구절이라도 자기에게 이로움이 있다면 스승으로 삼았으니, 그의 허물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마치 냄새 나는 주머니에 들어 있는 금과 같아서 주머니가 냄새 난다고 하여 금을 버리지는 않는다. 하물며 지금 기록한 것들은 억측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모두 부처님과 조사의 말씀이니, 후학들은 상세히 살펴보아라.
외전外傳에 “봉황을 아는 데는 깃털 하나로 족하고, 비단을 아는 데는 무늬 하나로 족하다.” 하였고, “아름드리나무도 털끝처럼 작은 것에서 나오고, 천 리 길도 발밑에서부터 시작된다.”라고 하였다. 불법을 배우는 이도 그러하니, 이 게송들을 본다면 이미 부처님께서 평생 설하신 가르침에 손가락을 물들인 것이고, 또한 오위五位202)의 수행에 첫발을 디딘 것이다. 지혜로운 이는 이 점을 생각에 두어 가벼이 여기지 말고 소홀히 여기지 말지어다.
석가여래행적송 하권 끝
■ 백련사 사문 기豈의 발문(白蓮社沙門豈跋)
천태종의 시조 용수 대사龍樹大士는 “많이 듣기만 하고 지혜가 없으면 실상을 알지 못한다. 비유하면 짙은 어둠 속에서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지혜만 있고 많이 들은 것이 없어도 실상을 알지 못한다. 비유하면 아주 밝은 곳에서 등불이 있어도 비추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많이 듣기도 하고 지혜도 있으면 설하는 것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이다. 많이 들은 것도 없고 지혜도 없으면 사람 몸을 한 소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지금 부암 장로浮庵長老 무기無寄는 일찍이 백련사 제4세 진정 국사眞淨國師의 적자였던 석교釋敎 도승통都僧統 각해 원명覺海圓明 불인 정조佛印靜照 대선사 이안而安의 문하에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니, 법명은 운묵雲默이다.
학문이 일가一家의 문장과 이치를 두루 통달하여 과거장에 나아가 상상과上上科에 급제하였다. 굴암사窟嵓寺 주지의 칭호를 얻어 명성의 가도를 높이 거닐었으나, 하루아침에 마치 헌신짝 버리듯 던져 버리고, 금강산과 오대산 등의 명산과 명승지를 유력하였다. 마침내 시흥산始興山에 이르러 암자 하나를 세우고 머물면서 『법화경』을 독송하고 아미타불을 염송하며, 불화 그리기와 경전쓰기를 일과로 삼은 것이 20년에 가까웠다. 여력으로 불교 전적과 조사의 문장을 찾아 본사本師 석가모니의 행적송과 아울러 주석을 찬술하니, 두 권이 되었는데, 어린 후학들을 일깨우는 데 이보다 더 큰 이로움이 없을 것이다.
아! 사바세계가 성·주·괴·공을 겪는 겁수의 길고 짧음, 삼계·오취에서 누리는 수명과 복덕의 우열과 고락의 차별, 여래께서 방편으로 부류에 따라 나타내 보이신 네 가지 국토와 세 가지 몸(四土三身), 오시설법의 연월과 차례, 모든 경전 안의 반자교와 만자교, 편벽된 가르침과 원만한 가르침, 본문과 적문, 권교와 실교, 나아가 열반 이후 남기신 법이 흘러들어 융성함과 쇠퇴함, 멀고 가까움, 그리고 후진 학자들이 수행하여 도에 들어가는 방편의 규범까지 마치 밝은 거울이 경대에 걸려 있는 듯 터럭 하나만큼도 차이가 없다. 진실로 우리 조사께서 말씀하신바 ‘설하는 것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임에 분명하다. 장하도다. 일찍이 없었던 일이로다. 그 문장의 격조는 내가 흠모하여 옷깃을 여밀 뿐, 간여할 곳이 없구나.
천력天歷 3년 경오庚午(1330) 2월 8일 만덕산 백련사 사문 기豈의 발문.
융경隆慶 5년 신미辛未(1571) 3월 일 두류산 금화 도인 의천義天이 쓰다.
■ 계음 호연桂陰浩然의 발문(桂陰浩然跋)
우리 여래께서 연설하신 장경의 판본은 해동의 여러 사찰이 있는 곳마다 거의 많이 있지만, 행적에 관한 판본은 거의 없다. 혹 있다고 해도 세월이 오래되고 해가 깊어지면서 닳고 썩는 병폐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안타까운 일이로다. 대장경의 강령綱領이며 승가의 지극한 보배가 거의 땅을 쓸어버리듯 사라졌으니, 이는 마치 뭇 별들은 주워 모으면서 해와 달을 빠뜨리는 것과 같다.
이렇듯 불자가 해야 할 일을 빠뜨린 지 오래되었는데, 다행히 조영 대사祖英大師가 무하無何에서 와서 소매에서 한 권의 여래 행적을 내게 보여 주며 이렇게 당부하였다.
“이처럼 보배로운 책이 비록 있다고는 하지만, 그 판본이 지금 어느 사찰에도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으니, 후생들이 멍해져서 어찌해 볼 수 없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대사께서 이 일을 염두에 두시어 본사本寺에 알려 주신다면, 사내 대중의 생각이 반드시 기꺼이 따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만 여래의 행적이 사라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총림의 법보 또한 더욱 빛나게 될 터이니, 대사께서 힘써 주십시오.”
나는 승낙하고는 이에 이 뜻을 본사에 청하였다.
“우리 본사는 식량에 여유가 있는데, 그것을 잘못 쓰면 시주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남은 식량을 덜어 이 책을 판각함이 옳을 듯합니다.
게다가 시주자의 아름다운 이름을 이 판목에 옮겨 새기면 수많은 시주의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을 터인데, 대중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대중들은 모두 흔쾌히 좋다고 하였다.
이 불사의 감독을 허락해 주도록 본사의 전 주지이신 뇌협 대사雷冾大士에게 간절히 청하였다. 대사는 우리 대중 가운데 신망 있는 분이셨는데, 사양 끝에 큰 신심을 일으켜 중책을 맡으셨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불사를 성공시켰으니, 이보다 큰 공은 없을 것이다. 가상하고 가상한 일이로다.
무릇 우리 큰 성인의 신령하고 기이한 행적에 대하여 이 책을 보는 자는 자세히 알 것이니, 내가 어찌 군더더기 말을 그 사이에 덧붙이겠는가. 지금 내가 기록하는 것은 다만 판에 새긴 때의 일만을 기록하기 위함이로다.
숭정崇禎 기원후 81년(숙종 35) 기축己丑(1709) 여름
조계 노한曺溪老漢 침굉枕肱의 문인 계음 호연桂陰浩然 삼가 뒤에 발문을 쓰다.
1)
상권 각주 70 참조.
2)
축법란竺法蘭 : 동한東漢의 승려. 중인도 사람. 영평 10년 대월지국의 승려 가섭마등과 함께 중국의 낙양에 와서 불교를 널리 전한다. 백마사에 주석하면서 『사십이장경』·『불본행집경』 등 5부를 번역하였다. 낙양에서 입적, 세수 60세.
3)
통사사인通事舍人 : 궁 안에서 임금을 알현하는 일이나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맡았던 벼슬 이름.
4)
부의傅毅 : 후한 무릉茂陵 사람. 자는 무중武仲. 박학하고 문장에 능하여 명제의 부름을 받아 영사令史·낭중郞中·주기실主記室·대장군大將軍·사마司馬 등을 지냈다.
5)
국자박사國子博士 : 국자감·국자학과 같은 국립교육기관에서 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하던 벼슬.
6)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 중국에서 번역된 최초의 불교 경전으로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공동으로 번역하였다. 불교의 요지를 42장으로 나누어 간명하게 말하였기 때문에 『사십이장경』이라 한다.
7)
옥황상제(元皇) : 당 태종이 노자에게 내린 시호. 옥황상제는 도가에서 흔히 하느님을 나타내는 말이다.
8)
방술方術 : 도사가 행하는 신선의 술법. 즉 몸을 조련하는 방법과 기술.
9)
약이藥餌 : 약을 만들어 먹는 기술. 주로 신선이 되는 약과 음식을 만드는 방법.
10)
장락궁長樂宮 : 한나라의 궁궐 이름. 황제의 어머니가 기거하는 궁전을 말한다.
11)
한漢 영평永平부터 진晋 영가永嘉까지 : 한漢 영평 원년은 58년이며, 서진西晋 영가는 307~313년이므로 약 250여 년에 해당하는 기간을 말한다.
12)
일대시교一代時敎 : 부처님이 한평생 설하신 성스러운 모든 가르침.
13)
나한보살(羅漢闓士) : 대승 보살을 말한다. ‘나한羅漢’은 아라한(ⓢ arahat), ‘개사闓士’는 보살(ⓢ bodhisattva)의 음역.
14)
삼장 비구(三藏除饉) : 소승 비구를 말한다. ‘삼장’은 경·율·논 삼장에 통달한 승려, ‘제근除饉’은 비구(ⓢ bhikṣu)를 번역한 것.
15)
북위北魏의 태무제太武帝(408~452) : 중국 북위의 3대 황제. 성은 탁발拓跋, 이름은 도燾, 시호는 태무太武. 명明 원제元帝의 맏아들. 외몽골의 유연柔然을 쳐서 큰 타격을 준 뒤, 하夏·북연北燕을 멸망시켜 북위의 화북통일을 완성하였다. 동서 교통의 요지인 간쑤성 지방을 확보하여 사마르칸트·페르가나 등 서역에서 공물을 바치는 나라가 20여 국에 이르렀다. 450년 송나라 정벌에 나서 병력 백만을 이끌고 황허 강을 건너 송나라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이에 송나라는 큰 타격을 받아 그 뒤 멸망하였다. 그는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탄압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삼무일종三武一宗의 사대 법난 가운데 하나이다. 446년 칙서를 내려 사탑과 불상을 파괴하였고, 승려들을 묻어 죽인 일을 말한다.
16)
사도司徒 : 주나라 때 교육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벼슬. 한나라 때는 대사도大司徒라 하여 대사마大司馬·대사공大司空과 함께 삼공三公에 나열되었다. 북위에서는 재상으로 국가 정책을 좌우하는 최고의 지위였다.
17)
최호崔浩(381~450) : 북위의 재상. 청하淸河 동무東武 사람. 자는 백연伯淵. 아버지 최굉崔宏에게 경전과 역사, 백가百家의 학문을 두루 배웠다. 유교의 정치 이념을 사회에 실현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아 도가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하였다.
18)
오복五服 : 왕이 다스리는 땅(王畿)을 중심으로 천하를 순차적으로 다섯으로 나누어 전복前服·후복後服·수복綏服·요복要服·황복荒服이라 한다. 한 복服은 5백 리를 말한다.
19)
북주北周의 무제武帝(543~578) : 중국 남북조 북주의 제3대 황제. 이름은 옹邕, 우문태의 넷째 아들. 형인 명제明帝의 뒤를 이어 즉위, 숙부인 우문호의 집정을 배제하고 정권을 회복하였다. 나중에는 유교에 기초를 두고 불교와 도교를 탄압하여 574년 불경과 불상을 파괴하고 승려와 도사를 환속시켰다. 이러한 불교 탄압은 삼무일종三武一宗인 사대 법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20)
혜원慧遠(523~592) : 수나라 때 승려. 돈황 사람. 속성은 이씨. 13세에 출가하여 현곡사賢谷寺의 승사僧思에게 교를 배우고, 16세에 담 율사湛律師에게 대승과 소승의 경전을 두루 섭렵하고, 대은 율사大隱律師에게 『사분율』을 배우고, 20세에 상통上統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정영사淨影寺에 주석하며 강설하였으므로 ‘정영사 혜원’이라 불러 ‘여산 혜원’과 구별한다. 그의 저서 『대승의장大乘義章』은 불교의 백과전서라 일컬을 만하고, 수·당의 불교 연구에 미친 영향이 매우 크다.
21)
삼황三皇 : 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세 명의 임금. 천황씨天皇氏·지황씨地皇氏·인황씨人皇氏로 보는 설과 수인씨燧人氏·복희씨伏羲氏·신농씨神農氏로 보는 설이 있으며, 복희씨伏羲氏·신농씨神農氏·황제씨黃帝氏로 보는 설도 있다.
22)
오상五常 : 유교에서 말하는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의 다섯 가지 덕목, 즉 사람이 항상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
23)
소목昭穆 : 종묘나 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 왼쪽 줄을 소昭라 하고, 오른쪽 줄을 목穆이라 한다. 천자天子는 태조를 중앙에 모시고, 2세·4세·6세는 왼쪽인 소昭에 모시고, 3세·5세·7세는 오른쪽인 목穆에 모시므로 삼소·삼목의 칠묘가 된다. 제후諸侯는 이소·이목의 오묘가 되며, 대부大夫는 일소·일목의 삼묘가 된다.
24)
목련이 신통력을 얻은 뒤 부모를 찾아보니 돌아가신 어머니가 아귀도에 태어나 굶주림의 고통을 받고 있으므로 걸식을 하여 공양한 것을 말한다. 『우란분경』(T16, 779a~c).
25)
정반왕이 세상을 뜨자 아난과 난다 등이 정반왕의 관을 멜 것을 희망하였으나, 부처님은 중생에게 예법을 펴기 위해 몸소 부왕의 관을 메셨다. 『정반왕열반경』(T14, 782c).
26)
천원황제天元皇帝 : 북주北周의 선제宣帝를 말한다. 578년 즉위하였으며, 1년 만에 태자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천원황제라 자칭하였다. 부왕인 무제는 불교를 폐지하였으나, 선제는 즉위하자 불교를 다시 부흥시켰다.
27)
경조京兆 : 경조윤京兆尹의 약칭으로 수도 장관을 말한다.
28)
위원숭衛元崇 : 북주 시대 익주益州 사천四川 성도成都 사람. 천화년(566~571) 중에 불교를 헐뜯는 상소를 도사 장빈張賓과 함께 무제에게 올려 불법을 폐지하게 하였다.
29)
대수大隋의 천자 : 수나라 문제文帝를 말한다.
30)
당唐 무종武宗(814~846) : 당나라 제15대 황제. 성명은 이염李炎. 목종의 다섯째 아들이며, 문종의 동생으로 어머니는 선의왕후宣懿皇后 위씨韋氏이다. 밖으로는 침입한 위구르족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안으로는 도교를 믿어 불교·경교·마니교·조로아스터교를 탄압하였다. 845년 회창의 폐불을 단행하여 사찰 4천6백 곳을 헐고, 26만의 승려를 환속시켰다.
31)
염철사鹽鐵使 : 전매청의 관리를 말한다.
32)
탁지부度支部 : 정부의 재무를 담당하는 관청.
33)
후주後周의 세종世宗(921~959) : 중국 오대의 후주 제2대 황제. 이름은 시영柴榮. 태조가 죽은 뒤 34세에 즉위하였으며, 오대의 황제 중에서 가장 걸출하였다고 한다. 직속 상비군인 전전사殿前司 및 시위사侍衛司를 강화하고, 여러 왕조의 통일 사업에 착수하여 양쯔 강 이북을 거의 통일하였고, 북방의 요나라를 위협하였다. 농정에 유의하여 권농에 힘쓰는 한편, 균세법을 시행하여 조세 부담의 공평성을 도모하였다. 불교를 탄압하여 마음대로 승려가 되지 못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즉위 6년 만에 병사하였다.
34)
『천태지관론보주天台止觀論補註』 : 형계 담연荊溪湛然(711~782)이 지은 『지관보행전홍결止觀輔行傳弘決』을 말한다. 모두 40권으로 『마하지관』 1부 10권에 대한 주석서이다.
35)
당唐과 우虞의 시절 : 요순시대를 말한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이상적인 태평 시대로 꼽힌다.
36)
이승의 5부 경전(二乘五典) : 소승 5부 경전으로 남방불교에서는 장부長部(ⓢ dīgha nikāya)·중부中部(ⓢ majjhima nikāya)·상응부相應部(ⓢ saṃyutta nikāya)·증지부增支部(ⓢ aṅguttara nikāya)·소부小部(ⓢ khuddaka nikāya) 등의 5부 경전이 전하고, 북방불교에서는 『잡아함경』·『중아함경』·『장아함경』·『증일아함경』 등의 4아함이 전한다. 대승 경전으로는 『화엄경』·『대집경』·『대품반야경』·『법화경』·『열반경』이 전한다.
37)
삼강三綱 : 사원의 일들을 관리하고 통솔하는 소임을 맡은 세 승려. 즉 상좌上座·사주寺主·유나維那를 말한다. 상좌는 법랍 높고 덕망 있는 자가 그 임무를 맡아 대중을 통솔한다. 사주는 절의 관리를 맡는다. 유나는 사규를 바로잡는 일을 맡는다.
38)
부혁傅奕(554~639) : 수에서 당에 걸쳐 활약한 도사. 북주의 폐불 때 통도관通道觀 학사가 되었고, 후에 도사가 되었다. 무덕武德 4년(621)에 「사탑승니사태십일조寺塔僧尼沙汰十一條」를 올려 국가와 국민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사탑과 승니를 삭감해야 한다고 진언했을 때, 고조가 듣지 않자 표를 써서 널리 배포하고 이후에도 상소를 계속 올렸다. 더욱이 불교를 배척한 25인의 전기를 모아 출간하여 폐불의 분위기를 조장하기도 하였다.
39)
『명보기冥報記』(T51, 796b~c)에 보인다.
40)
도안道安(314~385) : 동진東晋 시대의 승려. 속성은 위씨魏氏. 조실부모하고 12세에 출가. 불도징佛圖澄을 스승으로 섬기고, 법제法濟·지담支曇 등에게 수학하였다. 중국의 불교는 주로 인도와 서역에서 온 승려에 의하여 개척되었는데, 도안 때부터 중국인에 의하여 중국 불교가 일어났다고 말하여진다. 경전을 해석하는 데 서분·정종분·유통분의 3분 과목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진秦 건원 21년, 72세로 입적하였다.
41)
『법원주림法苑珠林』 권13(T53, 384b~c).
42)
한유韓愈(768~824) : 당나라의 문학자·사상가. 자는 퇴지退之, 시호는 문공文公, 회주懷州 수무현修武縣 출생, 792년 진사에 등과, 지방 절도사를 거쳐 803년 감찰어사가 되었을 때, 수도의 장관을 탄핵하였다가 도리어 양산현 현령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소환된 후로는 주로 국자감에서 근무하였으며, 817년 오원제의 반란 평정에 공을 세워 형부시랑이 되었으나, 819년 헌종황제가 불골佛骨을 모시는 것을 간하다가 조주 자사刺史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헌종 사후에 소환되어 이부시랑까지 올랐다. 유가의 사상을 존중하고 도교·불교를 배격하였다.
43)
삼달지三達智 : 과거·현재·미래를 다 아는 지혜. 아라한에게 있는 것을 ‘삼명三明’이라 하고, 부처님에게 있는 것을 ‘삼달三達’이라 한다.
44)
정수正受 : 삼마지三摩地(ⓢ samāpatti)·삼매三昧(ⓢ samādhi)에 상응하는 말. 사심邪心과 산란심散亂心을 여읜 것을 ‘정正’이라 하고, 무념무상의 경계에서 법을 받아들여 마음에 두는 것을 ‘수受’라 한다.
45)
삼달영지三達靈智 : 삼달지三達智와 같은 뜻.
46)
『선견비바사론善見毘婆娑論』(T24, 796c~797a).
47)
상권 주 260 참조.
48)
『법화경』 「보현보살권발품」(T9, 61a~b).
49)
『대방등대집경』 「월장분」을 말한다. T13, 363a~b에 유사한 내용이 보인다.
50)
『아난칠몽경』(T14, 758a).
51)
『능엄경楞嚴經』(T19, 151b).
52)
사람 아닌 것(非人) : 천룡팔부·아귀 등을 말한다. 혹은 천룡팔부 가운데 긴나라緊那羅(kinnara)를 의미하기도 한다. 긴나라는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며 춤추는 신으로, 사람의 머리에 새의 몸을 하거나 말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하는 등 그 형상이 일정하지 않다.
53)
『유가사지론』(T30, 285c~286a).
54)
아리륵과阿梨勒果 : ⓢ harītakī. 하리륵訶梨勒이라고도 한다. 인도의 과실수 이름. 잎은 길쭉한 타원형, 꽃은 흰색, 초가을에 열매를 맺는다. 열매는 달걀형의 청황색으로 쓴맛이 나며, 약용으로 쓰인다.
55)
『아비달마대비바사론』(T27, 693b).
56)
화광동진和光同塵 : 『노자』 제56장에 나오는 구절로, 자기의 지혜와 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인과 어울려 지내면서 참된 자아를 보여 준다는 뜻.
57)
『출요경出曜經』(T4, 616b, 621c).
58)
『빈두로위우타연왕설법경賓頭盧爲優陀延王說法經』(T32, 787a~b).
59)
궤지軌持 : ‘궤범주지軌範住持’의 줄임말. ‘궤범’은 본보기가 되는 것이고, ‘주지’는 자신의 성품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60)
생공生空 : 아공我空을 말한다. 즉 실아實我가 없다는 것. 일반적으로 ‘나’라고 하는 것은, 오온이 임시로 화합한 것이어서 참다운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뜻. 인공人空·인무아人無我라고도 한다. 대승에서는 아공我空(ātma śūnyatā)과 법공法空(dharma śūnyatā), 즉 두 가지 공의 가르침을 깨달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61)
사과四果 : 예류과(須陀洹)·일래과(斯陀含)·불환과(阿那含)·아라한과(阿羅漢)를 말한다.
62)
오품제자위五品弟子位 : 10신十信 이전의 5종 단계. 상권 주 178 참조.
63)
칠방편위七方便位 : 견도에 들기 전 삼현위와 사선근위의 일곱 가지 지위. 삼현위는 오정심관五停心觀·별상념주別相念住·총상념주總相念住를 말하고, 사선근은 난暖·정頂·인忍·세제일법世第一法을 말한다.
64)
『대방편불보은경大方便佛報恩經』(T3, 156b).
65)
불퇴전의 경지(阿惟越致) : ⓢ avaivartya, avaivartika. 다시 물러섬이 없는 경지를 말한다.
66)
『구잡비유경舊雜譬喩經』(T4, 521c~522b)에 보인다.
67)
여섯 가지 짐승(六畜) : 집에서 기르는 여섯 가지 가축. 즉 소·말·양·돼지·개·닭 등을 말한다.
68)
따로 초청함(別請) : 재가인이 승려들 가운데 특별히 지명하여 초청해서 공양하는 것. 공양에 초청 받을 때에는 수계한 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참석하도록 계율로 정하고 있다. 이런 규정을 어기고 특별히 별청을 받는 것은 계율상으로 금지하며, 이것을 범하면 바라이제가 된다.
69)
두타행頭陀行 : ⓢ dhūta. 번뇌의 때를 벗고 의·식·주에 대한 탐욕을 갖지 않고, 불도를 깨닫기 위하여 심신을 수련하는 고행. 두타행에는 아란야에 머무는 것, 항상 걸식하는 것, 가난한 집과 부잣집을 가리지 않고 순서대로 탁발하는 것, 한 자리에서 먹고 거듭 먹지 않는 것, 식사량을 절제하는 것, 정오가 지나면 과실즙·석밀石蜜 따위도 마시지 않는 것, 헌 옷을 빨아 기워 입는 것, 삼의三衣 이외에 다른 옷을 쌓아 두지 않는 것, 무덤 곁에서 무상관을 닦는 것, 나무 아래에 머물러서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애착을 없애는 것, 나무 아래에서 자면, 습기·새똥·독충의 해가 있으므로 노지露地에 앉는 것, 항상 앉아 있고 눕지 않는 것 등 열두 가지가 있다.
70)
양지楊枝 : ⓢ dantakāṣṭa. 본래는 작은 버들가지를 씹어 이빨을 닦는 것을 말한다. 불교도들에게 버들가지로 이를 깨끗이 하도록 한 데서 이름한 것.
71)
조두藻頭 : 대두大豆와 소두小豆의 분말로서, 손을 씻는 비누.
72)
삼의三衣 : 출가 수행하는 비구가 입는 의복 세 가지. 승가리僧伽黎(saṃgāti)는 설법할 때, 마을에 들어가 걸식할 때, 궁중에 들어갈 때 입고, 대의大衣라고 한다. 울다라승鬱多羅僧(uttarāsaṅga)은 예불·독경·청강·포살 등을 할 때 입고, 상의上衣라고 한다. 안타회安陀會(antarvāsa)는 절 안에서 작업할 때 입고, 내의內衣라고 한다.
73)
석장錫杖 : ⓢ khakkhara. 지팡이의 일종으로 길을 다닐 때 독사 등의 해충을 막고, 걸식을 할 때 이것에 달린 쇠고리를 흔들어 시주자에게 비구가 온 것을 알린다.
74)
녹수낭漉水囊 : ⓢ parisrāvaṇa. 발리살라벌나鉢里薩羅伐拏라고 음역. 물을 먹을 때 물속에 있는 작은 벌레를 죽이지 않기 위해서, 또는 티끌 같은 것을 없애기 위하여 물을 거르던 주머니.
75)
무근無根 : 남자나 여자에게 성기가 없는 것.
76)
이근二根 : 남녀의 성기를 한 몸에 갖추고 있는 것.
77)
칠차칠역죄七遮七逆罪 :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게 하는 것, 부친을 살해하는 것, 모친을 살해하는 것, 스님을 살해하는 것, 아사리를 살해하는 것, 교단을 분열시키고 활동을 방해하는 것, 성인을 살해하는 것 등을 말한다. 이것을 범한 사람에게는 수계가 허용되지 않으므로 칠차죄七遮罪라고 하며, 간단히 칠역죄七逆罪라고도 한다.
78)
사부 제자四部弟子 : 불교 교단을 구성하는 네 부류의 사람, 즉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를 말한다. 혹은 법회에 참석하는 네 부류의 사람, 즉 비구·비구니·사미·사미니를 가리키기도 한다.
79)
『범망경』(T24, 1005b~1009b).
80)
위의계威儀戒 : 비구가 일상생활에서 준수해야 할 250계를 행行·주住·좌坐·와臥 사위의에 배대하면 1천 계가 되고, 다시 이 1천 계를 과거·현재·미래세에 배대하거나, 혹은 삼취정계에 배대하면 모두 3천의 위의계가 된다.
81)
세행계細行戒 : 비구가 일상생활에서 항상 주의해야 할 규범을 배열하여 8만 4천의 수를 이룬 것.
82)
중품중위中品中位 : 구품정토왕생의 하나. 소승하선小乘下善의 범부가 1주야晝夜 동안 계를 지닌 공덕으로 왕생하는 정토. 죽을 때에 불보살의 영접을 받고 왕생하여 반 겁 뒤에 아라한과를 얻는다고 한다.
83)
『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T12, 345b).
84)
다섯 가지 두려움(五怖) : 진리를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는 다섯 가지의 큰 두려움이 있다. 생활에 대한 두려움(不活畏), 명예를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惡名畏), 죽음에 대한 두려움(死畏), 악도에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惡道畏), 자신이 없어 대중 앞에 나서지 못하는 두려움(大衆威德畏)이 그것이다.
85)
『대지도론大智度論』(T25, 153c).
86)
『화엄경』(T10, 68b).
87)
제6심 : 보살이 수행하는 과정을 52단계로 나누고, 그 가운데 제11위부터 제20주까지를 10주十住라 하는데, 그 가운데 제6위인 정심주위正心住位를 말한다. 제6 반야바라밀을 성취하여 모습뿐만 아니라 마음 씀씀이까지도 부처님처럼 바른 계위이다.
88)
『잡보장경雜寶藏經』(T4, 467b~468a).
89)
『불설마하가섭도빈모경佛說摩訶迦葉度貧母經』(T14, 761c~762b).
90)
『금강경』(T8, 750c, 754c).
91)
『잡아함경』(T2, 89b~c).
92)
영가永嘉(665~713) : 당나라 현각 선사玄覺禪師. 진각 대사眞覺大師·일숙각 화상一宿覺和尙이라고도 한다. 자는 명도明道, 본성은 대戴. 어려서 출가하여 삼장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천태지관에 정통하였다. 저술로는 『증도가』·『영가집』이 있다.
93)
『영가증도가永嘉證道歌』(T48, 396a).
94)
육묘문六妙門 : 천태종에서 세운 여섯 가지 선관禪觀. 열반에 들어가는 문이 되므로 묘문妙門이라 한다. 호흡의 출입을 셈하는 것(隨息門), 숨의 출입을 자연스럽게 따르는 것(隨門), 생각을 그치는 것(止門), 대상을 밝게 관찰하는 것(觀門), 살피는 생각마저 집착하지 않는 것(還門), 마음이 청정하여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淨門) 등을 말한다.
95)
16특승十六特勝 : 호흡을 세어 마음의 산란을 더는 정신 통일법으로, 수식관을 많은 종류로 세분하여 확충한 것이다. 내용과 세부 항목에 있어서 경론마다 내용이 다르다. 『성실론』에서는 짧은 호흡을 짧다고 아는 것(念息短), 긴 호흡을 길다고 아는 것(念息長), 호흡이 온몸에 두루 퍼짐을 아는 것(念息遍身), 몸의 작용을 없애는 것(除身行), 마음이 기쁨에 도달하는 것(覺喜), 신체가 안락에 이르는 것(覺樂), 기뻐하는 마음에서 탐내는 마음의 화가 이끌려 나오는 것을 아는 것(覺心行), 마음의 작용을 없애는 것(除心行),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들뜨지 않는 것을 지각하는 것(覺心), 마음이 기쁨을 내게 하는 것(令心喜), 마음이 들뜨면 다잡아 적정하게 만드는 것(令心攝), 마음이 해탈하게 하는 것(令心解脫), 일체가 무상함을 아는 것(無常行), 번뇌를 끊는 것(斷行), 염리하는 마음을 내는 것(離行), 일체를 소멸하는 것(滅行) 등 16가지를 말한다. 『석가여래행적송사기』(도서출판 불천, 2005, p.231) 참조.
96)
통명通明 : 아라한 등의 성자가 사선정·사무색정·멸진정 등 구차제정九次第定을 닦을 때 호흡(息)·물질(色)·마음(心) 세 가지를 관하는 선법. 세 가지를 꿰뚫어 관하여 걸림이 없게 하는 까닭에 통명通明이라 한다. 또한 육통과 삼명을 얻게 되므로 이와 같이 부르기도 한다.
97)
삼명육통三明六通 : ‘삼명’이란 자타의 과거세를 밝게 아는 지혜인 숙명명宿命明, 미래세 중생의 생사를 밝게 아는 지혜인 천안명天眼明, 불교의 진리를 밝게 증득하고 번뇌를 단멸하는 지혜인 누진명漏盡明 등을 말한다. ‘육통’이란 신족통·천안통·천이통·타심통·숙명통·누진통을 말한다.
98)
무생지無生智 : ⓢ anutpādajñāna. 일체법이 무생無生인 것을 아는 지혜. 일체 번뇌를 멸진하여 생멸 변화를 멀리 떠난 궁극의 지혜.
99)
결結 : ⓢ bandhana, saṃyojana. 결사結使라고도 하며, 계박한다는 뜻이다. 번뇌가 중생을 계박하여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100)
『금강경』(T8, 749b, 753c).
101)
평등한 진법계에서는~일이 없다(平等眞法界。 佛不度衆生。) : 이 구절은 『정명경淨名經』에는 일치하는 구절이 없다. 주석서인 『유마의기』(T38, 480b)·『유마경략소』(T38, 630b)에 보인다.
102)
『묘법연화경』(T9, 8a), 『첨품묘법연화경』(T9, 140c).
103)
융통도태融通淘汰 : 융통融通이란 다른 것과 융화하여 장애가 없는 것을 말하고, 도태淘汰란 골라내는 것을 말한다. 천태종에서는 오시 가운데 반야시를 ‘융통도태’라 부르고 있다.
104)
당기중當機衆 : 부처님의 설법 회상에서 그 가르침을 듣고 바르게 깨달음을 얻는 중생. 사부대중의 하나.
105)
다섯 가지 수행(五種行) : 5종 법사의 수행. 『법화경』 「법사품」에 따르면, 수지 법사受持法師·독송讀經 법사·송경誦經 법사·서사書寫 법사·해설解說 법사 등을 5종 법사라 한다.
106)
『정토십의론淨土十疑論』(T47, 78b).
107)
오정심법五停心法 : 오정심관五停心觀을 말한다. 육체의 부정한 모습을 관하여 탐욕을 그치는 부정관不淨觀, 일체중생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내어 성냄을 그치는 자비관慈悲觀, 모든 인연이 생기는 도리를 관하여 어리석음을 그치는 인연관因緣觀, 18계의 모든 법이 지·수·화·풍·공·식의 화합에 지나지 않는다고 관하여 아견을 그치는 계분별관界分別觀, 호흡을 세어 산란한 마음을 가지런히 하는 수식관數息觀을 말한다. 계분별관 대신에 부처님을 염하는 염불관念佛觀을 넣기도 한다.
108)
묘과妙果 : 뛰어난 결과. 묘인妙因과 묘행妙行으로 얻는 증과證果, 즉 불과佛果를 말한다.
109)
『아비담비바사론』(T28, 319a~c).
110)
『현우경賢愚經』(T4, 440c~441b).
111)
『백연경百緣經』(T4, 234b~235a).
112)
『법구비유경法句譬喩經』(T4, 590b~c).
113)
『불설우전왕경佛說優塡王經』을 말하는 듯하다. 『우타연왕경』은 『대보적경』 「우타연왕회優陀延王會」의 다른 번역이다. 아마도 무기無寄 스님은 “우전왕이 불상을 조성했다.”라는 내용을 인용하면서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