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보서 4


왕과 신하가 왕생한 이야기1~41
王臣徃生類

 1. 오장국왕烏長國王169)은 나랏일 보는 여가에 평소 불법佛法을 신봉하였다. 일찍이 시봉하는 신하에게 말하기를 “내가 비록 국왕의 복락을 누리고 있으나 무상無常을 면치는 못한다. 듣자하니 서방정토가 있는데 정신을 깃들일 만한 곳이라 한다. 내 마땅히 저 극락에 나기를 발원하리라.” 하고 이때부터 밤낮으로 염불 수행하였다.
烏長國王。萬機之暇。雅好佛法。甞謂
侍臣曰。朕爲國王。雖享福樂。不免無
常。聞西方淨土。可以棲神。朕當發願。
求生彼國。于是六時行道念佛。

매번 부처님께 공양하고 승려들에게 음식을 대접할 때에는 왕과 왕비가 직접 음식을 만들었는데, 이를 30년 동안 그치지 않았다. 임종할 때에 얼굴빛이 기쁜 빛을 띠었으며 응화하신 부처님(아미타불)이 내려와 맞이하셨다. 상서로운 일이 하나둘이 아니었다.170)
每供佛飯僧。王及夫人。躬自行膳。三十年不
廢。臨崩。容色愉悅。化佛來迎。祥瑞不
一。

 2. 송宋 위세자魏世子의 부자父子 세 명은 함께 정토업을 닦았는데 오직 아내만이 닦지 않았다. 딸이 열네 살에 죽었다가 7일 만에 다시 살아나서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제가 서방 세계의 칠보七寶 연못을 보니 아버지와 오빠 세 분은 이미 연화 위에 있으니 돌아가시면 마땅히 극락세계에 날 것입니다. 오직 어머니만 자리가 없어 제가 어머니를 뵙고 알려드리려고 잠시 왔습니다. 부디 유념하소서.”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딸의 말에 느낀 바가 있어 바로 신심을 펴 염불에 힘썼다. 후에 목숨을 마칠 때 또한 안양安養에 왕생하였다고 한다.171)
宋魏世子父子三人。俱脩西方。惟妻不
脩。有女十四死。七日更生。啓母云。兒
見西方七寶池上。父兄三人。已有蓮華。
沒當生彼。母獨無。是以暫歸相告。幸
母留意。母感女言。頓發信心。念佛不
倦。後命終。亦生安養云。

 3. 진晉 장항張抗은 선행을 많이 한 분이다. 부처님께 대비심다라니大悲心陀羅尼를 매일같이 10만 번 외우겠다고 서원하여 서방에 왕생하고자 하였다. 60여 세에 병이 들어 누웠는데 한마음으로 염불하였다. 가족들에게 말하기를 “서방정토가 바로 집 서쪽 방안에 있다. 아미타 부처님이 연화 위에 앉아 계시고 옹아翁兒는 연화 연못 금모래 땅에서 예불을 드리며 즐겁게 놀고 있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조금 있다가 염불하면서 입적하였다. 옹아翁兒는 곧 세 살 때 숨진 장항의 손자 이름이다.172)
晋張抗。積善向佛。誓課大悲心陀羅尼
十萬徧。願生西方。年六十餘寢疾。一
心念佛。謂家人云。西方淨土。只在堂
屋西間之內。阿彌陀佛。坐蓮華上。翁
兒在蓮華池金沙地上。禮佛嬉戱。言訖
良久。念佛而逝。翁兒乃孫子名。方三
歲而亡矣。

 4. 당唐 마자운馬子雲은 효렴孝廉173)으로 천거되어 경읍涇邑의 읍위邑尉174)가 된 인물이다. 세곡稅穀을 감독하여 서울로 운송하던 중 풍랑으로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관아에 구속되었다. 이에 전일한 마음으로 염불하여 5년 만에 사면된 후 남릉南陵의 산사山寺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하루는 말하기를 “내가 일생 동안 염불에 힘써 서방의 업이 이루어졌으니 이제 안양에 왕생하려 한다.”고 하였다. 다음 날 목욕재계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단정히 앉아 합장하였다. 신이한 향기가 집안에 가득한 가운데 기뻐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나를 영접하신다.”하고는 말을 마치고 입적하였다.175)
唐馬子雲。擧孝廉爲淫邑尉。押租赴京。
遭風舟溺被繫。乃專心念佛。五年遇赦。
入南陵山寺隱居。一日謂人曰。吾一生
精勤念佛。今西方業成。行且徃生安養。
明日沐浴新衣。端坐合掌。異香滿戶。
喜曰佛來迎我。言已而逝。

 5. 당唐 백거이白居易는 관직이 중대부태자소부中大夫太子少傅에 이른 분이다. 집을 희사하여 향산사香山寺를 세우고 호를 향산 거사香山居士라 하였다. 녹봉으로 받은 3만 전을 내어 서방극락세계도西方極樂世界圖를 그리고 정례頂禮하고 발원하며 매일같이 그림을 향해 염불하였다. 게偈를 지어 찬송하였다.
唐白居易。官中大夫太子少傅。捨宅爲
香山寺。號香山居士。出俸錢三萬。繪
西方極樂世界圖。發願頂禮。日日向之
念佛。以偈賛曰。

極樂世界淸淨土     극락세계 청정한 국토는
無諸惡道及衆苦     모든 악도와 고통 없다네.
願如我身老病者     원하오니, 나처럼 늙고 병든 이들
同生無量壽佛所     무량수불 처소에 함께 나게 하소서.

또 다른 게偈를 지었다.

余年七十一       내 나이 칠십하나
不復事吟哦       다시는 시를 읊지 않으리.
看經費眼力       경전을 보는 데 안력 허비하고
作福畏奔波       복을 지음에 고생을 두려워한다면,
何以度心眼       무엇으로 마음의 눈을 헤아려서
一聲阿彌陀       한 번 소리 내어 아미타불 염불하리.
行也阿彌陀       걸을 때도 아미타불
坐也阿彌陀       앉아서도 아미타불
縱饒忙似箭       화살처럼 바쁠지라도
不廢阿彌陀       미타염불 그치지 않으리.

어떤 이인異人이 봉래산에 ‘낙천’이라는 이름이 있다고 전하자 공은 사양하며 게를 지었다.

海山不是吾歸處     바다에 있는 산은 나의 귀의처 아니니
歸即須歸兠率天     귀의한다면 반드시 도솔천에 귀의하리.
今復捨兠率而求生淨土  이제 다시 도솔천 버리고 정토에 나길 구하리니
豈所謂愈擇而愈精者耶  이는 가릴수록 더욱더 정밀해진다 함이로다.

임종 시에 편안하게 앉아서 입적하였으니, 이는 왕생의 징조가 분명하다.176)
極樂世界淸淨土。無
諸惡道及衆苦。願如我身老病者。同生
無量壽佛所。又偈曰余年七十一。不復
事吟哦。看經費眼力。作福畏奔波。何
以度心眼。一聲阿彌陀。行也阿彌陀。
坐也阿彌陀。縱饒忙似箭。不廢阿彌陀。
有異人。傳蓬萊有樂天名。公辭以偈云
海山不是吾歸處。歸即須歸兠卛天。今
復捨兠卛而求生淨土。豈所謂愈擇而
愈精者耶。臨終。安然坐逝。徃生有明
驗矣。

 6. 송宋 장적張廸은 전당錢塘 사람으로 벼슬이 조교助教에 이르렀다. 원정 율사圓淨律師에게 보살계를 받았고 정토법문을 묻고는 돈독한 뜻으로 수지하여 안양에 나기를 서원하였다. 매번 염불할 때 소리를 높여 용맹하게 하였고, 목소리를 잃어버린 지경에 이르러서도 그치지 않았다. 하루는 원정 율사에게 이르기를 선정禪定에 들어 백색 가릉빈가가 앞에서 춤추며 날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3년 후 서쪽을 향하여 단정히 앉아 염불하고 입적하였다.177)
宋張迪。錢塘人。官助敎。從圓淨律師。
受菩薩戒。咨問淨業法門。篤志修持。
誓生安養。每念佛時。揚聲勇猛。至失
音猶不已。一日謂圓淨曰。㝎中見白色
頻伽鳥。飛舞於前。又三年。西向端坐。
念佛而化。

 7. 송宋 강공망江公望은 조대釣臺 사람으로 벼슬이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다. 질박한 음식을 먹으며 청정한 수행을 하였고, 『보리문菩提文』, 『염불방편문念佛方便文』을 저술하여 승속 간에 염불을 권하였다. 일찍 죽은 아들이 꿈에 나타나 말하였다. “아버지께서 도를 닦으셔서 공이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또 명부冥府에 금으로 새긴 편액이 있는데, ‘엄주부嚴州府에 사는 강공망은 몸은 간의대부로 있었으나 마음으로 불법을 사모하고 몸으로는 수행을 닦아 마음에 애욕이 없으며 행함에 불법을 어기지 않고, 말함에 있어서 불교의 종풍에 적절하게 부합하였다. 이름을 이미 염부제閻浮提에서 빼냈으니 몸은 반드시 정토에 돌아가리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선화宣和 연간 말에 광덕군廣德軍을 맡았다. 어느 날 아침 아픈 곳 없이 서쪽을 향하여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178)
宋江公望。釣臺人。官諫議。蔬食淸修。
述菩提文。念佛方便文。以勸道俗。有
子早亡。託夢云。大人修道。功業已成。
冥府有金字額題云。嚴州府江公望。身
居言責。志慕苦空。躬事熏修。心無愛
染。動靜不違佛法。語默時契宗風。名
已脫乎閻浮。身必歸于淨土。宣和末
知廣德軍。一旦無疾。面西端坐而化。

 8. 송宋 갈번葛繁은 징강澄江 사람이다. 소년에 등과하여 관직이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이르렀다. 관청에서나 집에서 반드시 정실淨室을 마련해 두고 불상을 안치하였다. 일찍이 입실하여 예송하는데 사리가 공중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다. 평소에는 정토업을 널리 권장하였는데 승속 간에 여러 사람들이 그의 교화를 받았다. 어떤 스님이 선정에 들어 정토에서 거닐다가 갈번이 그곳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후에 아픈 곳 없이 서쪽을 향하여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179)
宋葛繁。澄江人。少登科第。官朝散。凡
公署私居。必營淨室。設佛像。甞入室
禮誦。舍利從空而下。平時以淨業普勸
道俗多服其化。有僧㝎中。神遊淨土。
見繁在焉。後無疾面西。端坐而化。

 9. 송宋 왕일휴王日休는 용서龍舒 사람으로 벼슬이 국학國學의 진사進士에 이르렀다. 경전과 역사서에 매우 해박하였으나 하루는 이를 버리고서 말하기를 ‘이는 모두 업을 익히는 것일 뿐 궁극적인 법이 아니다. 내 장차 서방으로 돌아갈 업을 쌓으리라’ 하고 이때부터 염불에 정진하였다. 나이 60에 옷과 식사를 검소하게 하며 매일 천배를 하였고 밤중에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정토문」을 지어 격렬하고 간절하게 염불을 권하였다. 임종하려 할 때 홀연 아미타불을 큰 소리로 외쳤으며 “부처님께서 나를 영접하러 오신다.”고 하면서 서 있는 나무처럼 우뚝 서서 입적하였다. 집집마다 그의 초상을 그려 그 일을 숭상하였다고 한다. 승상丞相 익국공益國公인 주필대周必大가 찬을 지었고 장자호張子湖가 서문을 썼다.180)
宋王日休。龍舒人。國學進士。愽極經
史。一旦捐之曰。是皆業習。非究竟法。
吾其爲西方之歸。自是精進念佛。年六
十。布衣蔬食。日課千拜。夜分乃寢。作
淨土文。勸世激切懇到。將卒忽厲聲稱
阿彌陀佛。唱言佛來迎我。屹然立化
如植木矣。家家肖像崇事云。丞相益國
公周必大作賛。張子湖作序。

 10. 송宋 왕중회王仲回는 관직이 광주 사사 참군光州司士參軍에 이르렀다. 그가 무위자無為子 양공楊公에게 물었다.
“경전에는 정토에 왕생하기를 구하라 가르치는데, 조사들은 마음이 곧 정토니 다시 구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宋王仲回。官光州司士叅軍。問無爲子
楊公曰。經中敎人求生淨土。而祖師云
心是淨土。不必更求如何。

양공이 대답하였다.
“시험 삼아 헤아려보건대, 만약 부처의 경계에 있다면 정토도 없고 예토도 없나니 어찌 왕생하기를 구하겠느냐? 만약 중생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어찌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여 예토를 버리고 정토에 나기를 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楊公荅曰
試自忖量。若在佛境。則無淨無穢。何
用求生。若未出衆生境。安可不至心念
佛。舍穢土而求生淨土乎。

왕중회는 깨달은 바가 있어 뛸 듯이 기뻐하고 물러났다. 2년 후 양공이 단양丹陽의 태수로 있을 때 홀연 꿈에 왕중회가 나타나 말하기를 “그때 저에게 가르침을 주시어 이제 왕생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찾아와서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며칠 뒤 왕중회가 임종 7일 전에 미리 때가 이르렀음을 알고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한 후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가 전해졌다. 이는 꿈에 나타났던 바로 그때였다.181)
司士感悟 欣躍而去。後二年。楊公守丹陽。忽夢
司士云。向蒙指示。今已得生。特來致
謝。數日而訃至。言司士七日前。預知
時至。與宗黨言別而化。正感夢時也。

 11. 송宋 이병李秉은 소흥紹興의 중관中官182)으로 어약원御藥院183)을 관할하였다. 처음에는 정자 휘공淨慈輝公에게 선을 배워 깨달음을 얻었고 만년에는 『용서정토문龍舒淨土文』을 읽어 부처님 명호 외기를 일과로 하였다. 각장閣長184)인 원미元美와 전장殿長인 임사문林師文 등 수십 명과 더불어 전법사傳法寺에서 정토회淨土會를 결사하였다. 홀연히 앓다가 아미타 부처님이 금빛 원광을 머리에 이고 있는 광경을 꿈꾸었다. 7일이 지나자 또한 금빛이 방안에 가득 차오르는 것을 보고 친속들을 불러 작별을 고하고 바르게 앉아 수인手印을 맺고 입적하였다.185)
宋李秉。紹興中官也。領御藥院。初學
禪于淨慈輝公。有省。晩閱龍舒淨土文。
遂日課佛號。與閣長元美殿長林師文
等數十人。結淨會于傳法寺。忽有疾
夢阿彌陀佛。以金圓光。戴其首。越七
日。又見金光滿房。乃囑別親屬。端坐
結印而終。

 12. 송宋 호인胡闉은 관직이 선의宣義에 이른 분으로 평소에 비록 불교를 믿었으나 정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하였다. 84세에 병이 위급해지자 그 아들이 청조 율사清照律師를 맞이하여 가르침을 청하였다.
宋胡闉。官宣義。平日雖信佛乘。而未
諳淨土。年八十四疾革。其子迎淸照律
師。乞垂誨示。

청조 율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를 알고 있는가?”
호인이 답하였다.
“마음이 청정하면 불국토가 청정합니다.”
청조 율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스스로 생각해 보라. 지금까지 마음에 잡념으로 더럽혀진 때가 있었는가?”
호인이 답하였다.
“이미 이 세상에 살면서 어찌 잡념이 없을 수 있겠습니 까?”
청조 율사가 말하였다.
“이와 같으니, 어찌 마음이 청정하여 국토가 청정한 경지 를 얻을 수 있겠는가?”
호인이 여쭈었다.
“한 번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것으로 어떻게 80억 겁이나 되는 생사의 무거운 죄를 멸할 수 있겠습니까?”
청조 율사가 답하였다.
“아미타불은 널리 서원하신 신통력이 있어 한 번 그 명호 를 부르기만 해도 능히 한량없는 죄를 소멸하시니 이는 마치 빛나는 태양이 눈서리를 녹이는 것과 같다. 이를 어찌 의심할 수 있겠는가?”
照謂闉曰。公知安身立
命處否。闉曰心淨則佛土淨。照曰公自
度。平昔時中。有雜念染汚否。闉曰旣
處世間。寧無雜念。照曰如是則安得心
淨土淨。闉曰一稱佛名。云何能滅八十
億劫生死重罪。照曰阿彌陀佛。有弘誓
神力。是以一稱其名。滅無量罪。猶如
赫日。消於霜雪。復何疑哉。

호인이 드디어 깨닫고는 그날로 바로 스님을 초대해 염불 하였다. 다음 날 청조 율사가 다시 오자 호인이 여쭈었다.
“스님께서 어찌 이리 늦게 오셨는지요? 두 보살께서 강림 하신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청조 율사는 이에 대중을 이끌어 소리 높여 염불하도록 하였다. 호인은 이에 합장한 채 입적하였다.
호인의 왕생에 대해 살펴보면 청조 율사를 알고 모신 이는 아들이니 어찌 큰 효도가 아니겠는가. 세상에서 작은 애정에 집착하여 어버이가 재계齋戒하는 것을 깨뜨리는 자는 잘못이 더욱 크다.186)
闉遂省悟 即日延僧念佛。次日照復至。闉曰師來
何暮。二大士降臨已久。照於是率衆厲
聲念佛。闉乃合掌而逝。按闉徃生。得
於淸照。而迎淸照者。子也。豈非大孝歟。
世有執小愛。而破親齋戒者。誤亦甚矣。

 13. 송宋 문로공文潞公의 휘는 언박彥愽이다. 낙양의 태수로 있을 때 일찍이 재를 올리려고 용산사龍山寺에 갔다. 공이 예불하려고 법당에 들어갈 때 홀연 불상이 무너져 땅에 떨어지자 소홀히 하고 예경을 드리지 않았다. 어떤 스님이 예경하지 않는다고 질책하자 “불상이 이미 부서졌는데 우러러본들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스님은 말하기를 “불상은 새롭거나 낡은 것이 없고 도道는 생겨남도 사라짐도(生滅)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이 말을 듣고 깨닫고는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그는 발원할 때마다 말하기를 “원하오니, 늘 정진하여 일체의 선을 부지런히 닦으리. 원하오니, 심종心宗을 요달하여 모든 중생(含識)187)을 널리 제도하리라.” 하며 매번 사람들을 볼 때마다 염불을 권하였다. 후에 정엄 법사淨嚴法師를 찾아뵙고 십만 명을 모아 정토회를 열어 널리 염불을 권하였다. 여여 거사如如居士가 찬을 지어 이를 기렸다.
宋文潞公。諱彥愽。守洛陽日。甞致齋
徃龍山寺。禮佛入殿。忽見像壞墜地
略不加敬。有僧詰之。公曰像旣壞矣
瞻望何益。僧云像無新故。道不生滅
公聞之有省。作禮而出。每發願曰。願
我甞精進。勤修一切善。願我了心宗
廣度諸含識。每見一切人。則勸以念佛
後叅淨嚴法師。集十萬人。爲淨土會
普勸念佛。如如居士。有頌賛曰。

知公膽氣大如天  그대의 담력과 기상, 크기가 하늘 같으니
願結西方十萬緣  원을 세워 십만 명이 서방 왕생하는 인연 맺게 했네.
不爲一身作活計  제 한 몸 위해 살 궁리 마련하지 않고
大家齊上渡頭舩  수많은 중생들을 모두 배에 실어 건네주었네.

임종할 때는 편안하게 염불하며 입적하였다.188)
知公膽氣大如天。願結西方十萬緣。不爲一
身作活計。大家齊上渡頭舩。臨終安然。
念佛而化。

 14. 송宋 마우馬圩의 자는 동옥東玉이며 시랑189)을 역임하였다. 원풍元豊 연간(1078~1085년)에 광익廣益 스님이 『천태십의론天台十疑論』을 건네주자 공은 매우 기뻐 말하기를 “종지宗旨로 삼을 만한 것을 얻었다.”라고 하였다. 조부 충숙공忠肅公이 항주 태수로 있을 때 자운 참주慈雲懺主190)가 염불을 권하여 온 집안이 받들어 행하였고, 마우도 지극한 마음으로 25년간 염불하였다. 숭녕崇寧 연간(1102~1106년)에 작은 병이 있어 옷을 갈아입고 앉은 채 입적하였는데 이때 푸른 덮개 같은 기운이 창에서 나와 하늘로 날아갔다. 집안사람들이 모두 마우가 상품上品에 왕생하는 꿈을 꾸었다.191)
宋馬圩。字東玉。歷官侍郞。元豊中。僧
廣益。授以天台十疑論。公大喜曰。得
所宗矣。厥祖忠肅公。守杭日。慈雲懺
主。敎令念佛。擧家宗奉。圩至心念佛
二十五年。崇寧中小疾。易衣坐逝。有
氣如靑盖。出戶騰空而去。家人皆夢圩
徃生上品。

 15. 송宋 종리근鍾離瑾은 함평咸平 3년(1000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용도각龍圖閣 대제待制192)에 이르렀다. 절서성浙西省에 제형提刑 안찰사로 있을 때 자운 참주慈雲懺主를 만나 정토를 독실하게 신봉하였다. 후에 개봉開封을 맡았을 때 나가서는 나랏일에 힘을 다하고 집에 들어와서는 잠을 자지 않고 염불하였다. 어느 날 밤 문득 가족을 깨워 일어나게 한 후 머리를 감고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앉은 채 입적하였다. 종리근이 푸른 연화를 타고 있고 하늘음악(仙樂)이 영접하여 서방으로 가는 것을 온 가족이 보았다.193)
宋鍾離瑾。咸平三年登第。官至龍圖閣
待制。提刑浙西日。遇慈雲懺主。遂篤
信淨土。後知開封。出則盡瘁國事。入
則不寐念佛。忽夜促家人起。索浴更衣
坐逝。擧家見瑾。乘靑蓮華。仙樂迎引
西去。

 16. 송宋 염방영閻邦榮은 지주池州 사람으로 20년 동안 왕생주往生呪를 지송하고 염불하였다. 임종할 때 가족들이 꿈에 부처님이 빛을 발하시며(放光) 영접하는 것을 보았다. 다음 날 아침 염방영은 서쪽을 향하여 가부좌하였다가 홀연히 일어나 몇 걸음 가서 말하기를 “나는 간다.”라고 하고 미소를 지으며 우뚝 섰다. 아내가 놀라 그를 부축하였으나 바로 입적하였다.194)
宋閻邦榮。池州人。二十年。持徃生呪
念佛。將終。家人夢佛放光迎榮。及曉。
榮西向趺坐。忽起行數步曰。我去也。
微笑而立。妻驚扶之。逝矣。

 17. 송宋 왕충王衷은 가화嘉禾 사람이다. 서호西湖에서 결사를 하였는데 지식이 있건 없건 신분이 높건 낮건 승속을 가리지 않고 왕생을 원하는 이가 있으면 결사에 들어오도록 널리 청하였다. 그가 지은 『권수문勸修文』이 세상에 유행하였다. 후에 아픈 곳 없이 서쪽을 향해 앉아서 입적하였다.195)
宋王衷。嘉禾人。結社西湖。不問賢愚
貴賤僧俗。但願徃生者。普請入社。有
勸修文。行世。後無疾。西向坐化焉。

18. 송宋 종리 경융鍾離景融은 관직이 조청대부朝請大夫에 이른 분으로 항상 『관무량수경』을 외우며 염불을 그치지 않았다. 관직을 물러나서는 의진儀眞의 동원東園 곁에 띠집을 짓고 항상 말하기를 “미타를 알지 못할 때 미타는 서방 저편에 계셨으나 미타를 알고 나니 미타는 다만 우리 집에 있도다.”라고 하였다. 어느 날 저녁에 묘응妙應 스님에게 「보현행원품」을 외우도록 하고서 향을 사르며 경청하다가 두 손으로 인印을 맺고 입적하였다.196)
宋鍾離景融。官朝請大夫。常誦觀經。
念佛不輟。掛冠。結茅儀眞東園側。嘗
曰不識彌陀。彌陀更在西方外。識得彌
陀。彌陀秪在自己家。一夕命僧妙應。
誦普賢行願品。炷香敬聽。兩手作印而
化。

 19. 송宋 전상조錢象祖는 호가 지암止菴으로 금릉金陵의 태수로 있을 때 정토를 진실하게 닦을 것을 염원하였다. 일찍이 향주鄉州에서 접대하는 곳 열 곳을 세우고 모두 ‘정토’ ‘극락’ 등의 명칭으로 이름하였다. 지암고승료止菴高僧寮를 세워서는 스님을 초대하여 도를 이야기하는 곳으로 삼았다. 좌승상에서 물러난 뒤에는 정토업에 더욱 나아갔다.
宋錢象祖。號止菴。守金陵日。以淨土
眞修爲念。嘗于鄕州。建接待十處。皆
以淨土極樂等名之。創止菴高僧寮。爲
延僧談道之所。自左相。辭歸。益進淨
業。嘉定四年二月。微疾書偈曰。菡蓞
香從佛國來。琉璃池上絶纖埃。我心淸
淨超于彼。今日遙知一朶開。

가정嘉定 4년(1211년) 2월 경미하게 앓던 중 게를 썼다.

菡蓞香從佛國來  연꽃 향낸 불국토에서 풍겨 나오고
琉璃池上絶纖埃  유리 연못 위엔 티끌 하나 없네.
我心淸淨超于彼  내 마음 청정하여 저 극락에 태어나리니
今日遙知一朶開  오늘 한 송이 꽃 피어남을 멀리서 알겠네.

3일 후 한 스님이 안부를 묻자 대답하기를 “나는 사는 것을 욕심내지 않으니 죽음도 두렵지 않다. 하늘에 나지도 않고 사람이 되지도 않으리라. 오직 정토에 나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한 후 말을 마치고 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후에 어떤 사람의 꿈에 공중에서 “전상조 승상께서 이미 서방의 연궁蓮宮에 왕생하셔서 자제보살慈濟菩薩이 되셨다.”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197)
後三日僧有問疾者。公曰我不貪生。不怖死。
不生天。不爲人。惟求生淨土耳。言訖
跏趺而逝。後有人夢。空中云。錢丞相
已生西方蓮宮。爲慈濟菩薩。

 20. 송宋 구정국咎定國의 호는 성재省齋로 고을의 학유學諭198)를 지냈다. 항상 염불을 하였고 정토에 관한 여러 경전을 읽었다. 매월 24일에는 승속을 모아 소리 내어 경을 외고 염불을 하였다. 가정嘉定 4년(1211년)에 꿈속에서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나타나 “부처님께서 당신을 불러오라 하십니다. 3일 후면 저 극락에 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기약한 날이 되자 목욕을 한 후 옷을 갈아입고 서쪽을 향하여 염불하며 앉은 채 입적하였다.199)
宋咎㝎國。號省齋。爲州學諭。常念佛
讀淨土諸經。每月三八。集僧俗諷經念
佛。嘉定四年。夢靑衣童告曰。佛令召
君。三日當生彼國。至日沐浴更衣。念
佛向西坐化。

 21. 송宋 풍즙馮檝은 호가 제천濟川으로 수령遂寧 사람이다. 태학太學에 급제한 이후 처음에는 선림禪林에서 도를 찾다가 만년에는 오로지 정토업을 숭상하여 「서방문西方文」과 「미타참의彌陀懺儀」를 지었다. 후에 급사중給事中200)으로서 노남瀘南 지방에 군사를 거느리고 출동해서는 승속을 모아 계념회繫念會를 만들었다. 공주邛州를 맡아서는 뒤쪽 청사에 높은 자리를 만들고 대궐을 향해 정중하게 절한 후(肅拜)201) 승복 차림으로 자리에 올라 관리들에게 사직 인사하고 주장자를 비껴 잡고 무릎 위에 놓고 입적하였다.202)
宋馮檝。號濟川。遂寧人。由太學登第。
初訪道禪林。晩年專崇淨業。作西方文
彌陀懺儀。後以給事中。出帥瀘南。率
道俗作繫念會。及知邛州。于後廳設高
坐。望闕肅拜。着僧衣。登座謝官吏。橫
柱杖按膝而化。

 22. 송宋 왕고王古의 자는 민중敏仲인데, 동도東都 사람으로 예부시랑禮部侍郎을 지냈다. 사람됨이 자애롭고 인자하여 만물을 사랑함이 선禪의 종지에 깊이 계합하였다. 또한 정토법문이 뛰어남을 깨닫고 『직지정토결의집直指淨土決疑集』 3권을 지었다. 평소에 염불을 정성껏 했으며 염주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움직이고 머물고 앉고 눕는 모든 일상에서 서방정관西方淨觀203)으로 불사佛事를 삼았다. 어떤 스님이 선정에 들어 정토에서 거닐다가 왕고가 갈번葛繁204)과 함께 그곳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니, 이는 분명 왕생의 징조인 것이다.205)
宋王古。字敏仲。東都人。官禮部侍郞。
慈仁愛物。深契禪宗。又悟淨土法門之
勝。著直指淨土決疑集三卷。平生精勤
念佛。數珠未嘗去手。行住坐臥。悉以
西方淨觀。爲佛事。有僧神遊淨土。見
古與葛繁同在焉。徃生有明驗矣。

 23. 송宋 소식蘇軾의 호는 동파東坡이며, 관직은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남으로 좌천될 때(南遷) 아미타상 한 축軸을 그려서 항상 곁에 차고 다녔다. 남들이 물어보면 답하기를 “이는 내가 서방에 왕생하는 공적인 증거물이다.”라 하였다. 어머니 정程씨가 돌아가시자 호석胡錫이라고 하는 공인工人에게 유물인 비녀와 귀고리에 미타상을 그리도록 하여 왕생천도往生遷度 하였다. 또한 동파의 부친인 노천老泉은 일찍이 극락원極樂院에 장육보살상(丈六菩薩像)을 조성하였다.206) 소식 집안사람들이 삼보에 귀의하는 마음이 이처럼 정성스러웠다.207)
宋蘇軾。號東坡。官翰林學士。南遷日
畫彌陀象一軸。行且佩帶。人問之。荅
曰此軾生西方公據也。母夫人程氏歿
以簮珥遺貲。命工胡錫。繪彌陀像。以
薦徃生。又老泉。曾於極樂院。造六菩
薩像。盖蘇氏之歸心三寶。素矣。

 24. 송宋 위문진韋文晉은 행동거지가 맑고 지조가 있어208)정업도량淨業道場을 세우고 널리 중생을 제도하였다. 6월 어느 날 홀연히 서쪽을 향하여 가부좌하고 합장 염불하면서 입적하였다. 신이한 향기가 안팎에서 풍겨났다.209)
宋韋文晋。立行孤潔。建淨業道場。普
度含識。六月某日。忽面西跏趺合掌
念佛而化。異香內外皆聞。

 25. 송宋 가순인賈純仁은 삽천霅川 사람으로 관직이 영주郢州 수령에 이르렀다. 정토업에 마음을 쏟아 늘 재계하고 염불하였다. 병을 조금 앓다가 서쪽을 향하여 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머리 위로 밝은 원상圓相이 빛났고 신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했으며 밤이 지나도록 흩어지지 않았다.210)
宋賈純仁。霅川人。官郢州倅。潜心淨
業。長齋念佛。因微疾。西向宴坐而逝。
頂上白光圓相。異香滿室。經宿不散。

 26. 송宋 오자재吳子才의 자는 신수信叟이다. 벼슬을 그만두고 미리 관 하나를 만들어 밤에 그 안에 들어가 누웠다. 동자에게는 관을 치며 “오신수는 돌아가리라. 삼계가 평안치 않으니 머물 수 없도다. 서방정토에 연태蓮胎211)가 있으니 때가 되면 머리 돌려 돌아가리라.”라는 가사를 노래 부르도록 하였고 자신도 이를 따라 불렀다. 인연이 익었을 때212) 병색 없이 입적하였다.213)
宋吳子才。字信叟。致仕之後。預作一
棺。夜臥其中。令童子擊棺而歌曰。吳
信叟歸去來。三界無安不可住。西方淨
土有蓮胎。及早回頭歸去來。自亦從而
和之。緣熟時。無疾而化。

 27. 송宋 장유張揄는 관직이 양절兩浙의 도총관都總官에 이르렀다. 정토에 왕생하기를 서원하여 각고의 노력으로 염불하였고 온 집안의 어른이나 아이들이 모두 따라해서 교화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못을 파서 연꽃을 심었고, 매일 처자를 거느리고 부처님 명호를 만 번 부르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효종孝宗 황제가 친히 ‘연사蓮社’ 두 글자를 써서 하사하셨다.214)
宋張揄。官兩浙都緫管。期生淨土。刻
勵念佛。闔門長幼。靡不從化 池栽
蓮。日率妻子。課佛萬徧。孝宗皇帝。親
書蓮社二字賜焉。

 28. 명明 만력萬曆 연간(1573~1620년)의 고공 보당顧公寶幢의 휘는 원源으로 정토업을 닦는 데 뜻을 두었다. 병세가 위독해지자 승속을 다 모아 놓고 아미타불을 열 번 염송하도록 하였다. 염불 소리가 이어지는 매우 짧은 시간에 신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 차올랐다. 공은 자신의 몸이 연꽃 속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고,
明萬曆間。顧公寶幢。諱源。志修淨業
疾篤集僧俗。十念阿彌陀佛。唱和相續。
須臾間。衆忽聞異香滿室。公自見身坐
蓮華中。

아들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공이 타이르기를 “너희들은 내가 어느 곳으로 간다고 생각하느냐. 어느 곳이 곧 이곳이니라. 제불諸佛이 나를 맞이하여 삼경(밤11~1시)에 나를 데리고 가실 것이다. 나의 서원은 이미 이루어졌고, 너희들의 서원도 위무해 주실 것이다.”라고 하였다. 기약한 시간이 되자 미소를 머금고 입적하였다. 소종백少宗伯215) 은추명殷秋溟공이 전傳을 지었다.
諸子悲戀不勝。諭曰汝等謂我
徃何處。何處即此處。諸佛迎我。三鼓
啓行。我願旣遂。汝等之願。亦慰矣。至
期含笑而去。少宗伯殷秋溟公。作傳。

연화 대사蓮華大師는 말한다. 몸이 연꽃 속에 앉아 있다는 것은 새로 태어났으되 반드시 왕생극락하였다는 것이요, 어느 곳이 곧 이곳이라고 한 것은 떠나갔으되 실제로는 떠나가지 않았음을 말한 것이다. 이는 근래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니 눈 밝은 사람은 참작하기 바란다.216)
蓮華大師曰。身坐蓮華中。生則決㝎生
也。何處即此處。去則實不去也。此近
時實事。明眼人叅之。

 29. 명明 해염海鹽의 주원정朱元正이 제생諸生217)으로 있을 때 공맹孔孟의 학문을 강의하였는데 단정하고 방정하며 구차하지 않은 성품(端方不苟)을 지니고 있었다. 60세가 넘어서는 선정의 즐거움(禪悅)에 깊이 들어 집 뒤에 세 칸짜리 허름한 집을 지어 놓고 문을 잠그고 집안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문 위에는 ‘내가 이미 죽은 것으로 생각하라譬如我已死了’라는 여섯 글자를 써서 붙였다. 매일 공과功課로 오전에 『법화경』을 한 권 외고 오후에는 천 번을 소리 내어 염불하였다.
明海鹽朱元正。爲諸生時。講孔孟之學
端方不苟。六十後。深入禪悅。于宅後
敝屋三楹。閉關不與家事。門上題。譬
如我已死了六字。每日功課。午前諷法
華經一卷。午後念佛千聲。

경신년 7월에 아픈 곳이 없었는데 홀연 아들에게 말하기를 “여기서는 더 이상 아무 일이 없으니 떠나야겠다.”라고 하였다. 아들이 어느 곳으로 가는지 묻자 서방으로 간다고 하였다. 아들과 손자가 강하게 만류하자 허락하여 머물렀다.
庚申七月無疾。忽謂子曰。吾在此無事。可行矣。子
問何處去。曰西方去。子及孫固留。許
之。

섣달 초하루에 병을 보이고 음식을 먹지 않았다. 가족들이 놀라고 당황하여 장례 준비를 하자(治後事)218) 공은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달 8일 밤중에 가족에게 미리 경계하기를 “갈 때가 되었으니 부녀자는 오지 못하게 하고, 두세 시간이 지나서 오게 하라. 또한 곡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때가 되자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 이때 자유자재로 왕래함이 이와 같았다.219)
至臘月朔。示疾不食。家人倉皇治
後事。公曰勿忙。此臘八半夜事也。預
誡家人。臨行時。勿令婦女來。過二三
時來。亦勿哭。及期端坐而逝。爾時來
去自由。如此。

 30. 명明 대백호戴百戶와 도백호陶百戶는 판사辦事로서 순무巡撫220)의 휘하에 있었다. 이때 전당강錢塘江에 만강홍滿江紅이라는 살인을 일삼는 큰 도적이 있었다. 그 무리의 세력이 매우 강성해서 관리들이 감히 체포하지 못하자 순무가 두 사람을 몰래 불러 직접 패牌 하나를 주면서 만강홍을 체포하도록 명하였다. 두 사람은 몸을 던져 도적 떼에 들어가 여러 방법으로 꾀어 잡아왔다. 만강홍은 형벌을 당할 때 두 사람을 통렬하게 원망하면서 반드시 목을 베어 버리겠다고 맹세하였다.
明戴百戶。與陶百戶。共辦事巡撫麾下。
時錢塘江。有殺人巨盜。號滿江紅者。
黨勢熾盛。官吏不敢捕。巡撫潜召二人
手給一牌。令捕滿江紅。二人身入賊。
多方誘致。臨刑痛恨二人。誓必索命。

두 사람은 두려워하여 관직을 그만두고 재계하며 경을 외고 염불하여 맺힌 원한을 풀어 주었다. 대백호는 친척들과 미리 작별하고 때가 이르자 앉아서 입적하였다. 조금 있다가 깨어나 말하기를 “도형(백호)이 임종할 때에221) 정념正念이 한 번 어긋나 길가로 내달렸기 때문에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 주러 왔을 뿐이오. 나는 내일 떠날 것이오.”라고 하였다. 다음 날 일찍 다시 앉아서 입적하였는데, 코에서 옥주玉柱222)가 나오고 신이한 향이 방에 가득 차 흩어지지 않았다.223)
二人懼。棄職持齋。誦經念佛。以解此
寃結。戴百戶。忽豫別親屬。至期坐脫。
良久又醒。謂曰陶凡臨時。正念差錯走
路頭。故我來與汝等說耳。明日我當去。
次早復坐脫。鼻垂玉柱。異香滿室不散。

 31. 명明 정명등丁明登은 호가 검홍劍虹으로 강포江浦 사람이다. 만력萬曆 기유년(1609년)에 운서 대사雲棲大師에게 귀의하여 정토법문을 독실하게 믿고 호를 연려蓮侶라 고쳤다. 만력 병진년(1616년)에 등과하였고 온릉溫陵에서 벼슬을 할 때 언제나 출세대사出世大事224)를 말하여 승속을 교화하니 감동하고 깨우친 이가 많았다.
明丁明登。號釼虹。江浦人。萬曆己酉。
歸依雲棲大師。篤信淨土法門。改號蓮
侶。萬曆丙辰登第。宦遊溫陵。每以出
世大事。開化緇素。感悟甚多。

처음에 천주泉州의 사리司理225)로 부임하여, 법에 따라 죄를 가리고 문책(憲批枷責)226)함에 있어서 공정하게 법을 세웠다. 쌀을 내어 죄를 대신하려는 자의 청을 들어주어 그 쌀을 가지고 굶주린 죄수를 넉넉하게 먹였으며 의원을 불러 병을 돌보도록 하였다. 또한 염주 백십 관을 사서 죄수들에게 나누어 주고 염불하도록 하며 항상 말하기를 “사람이 환난 중에 처하면 발심하는 이가 많다. 나는 그러한 회한悔恨을 틈타서 염불을 권장하는 것이니 다행히 감옥에서 나가거든 선량한 백성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또한 집안의 부녀자들이 불법을 듣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선사禪師를 초빙해 대승大乘을 연설하도록 하고 휘장 안에서 듣도록 하였다. 가족들 중 동시에 삭발 출가한 이가 네 명이나 되었다.
初任泉州司理。憲批枷責。公立法。願納米者
聽。用以贍獄貧。擇醫視病。更買素珠
百十串。散衆囚使念佛。恒語人曰。人
在患難。發心者多。吾乘其悔恨。導之
念佛。幸而出獄。爲良民矣。憫念室中
閨流。不聞佛法。請禪師。演說大乘。令
于幃內聽之。眷屬一時披剃者四人。

을유년(1645년) 겨울에 병이 심하여 11월 초하룻날 소疏를 갖추고 부처님께 고하면서 정토에 왕생하기를 간구하였다. 그렇게 매일 소疏 하나를 태우고 10일째 되는 날, 음식은 보통 때처럼 먹었고 얼굴은 빛과 윤기가 났으며 간절하게 함께 서방에 왕생하자고 친지들에게 널리 권하고서 탑상 끝에 잠시 눕는 듯하더니 조용히 입적하였다. 『고향소식故鄉消息』, 『연루청음蓮漏清音』, 『담화淡話』 등의 책을 펴냈는데 모두 정토에 관한 중요한 책들이다.227)
乙酉冬病劇。十一月朔。具䟽告佛。決意
願求徃生。日焚一䟽。至十日。粥飮如
常。面色光潤。諄諄以同生西方。普勸
親知。就榻稍臥。寂爾長徃。輯有故鄕
消息。蓮漏淸音。淡話等。皆淨土要書
也。

 32. 만력萬曆 연간(1573~1620년)에 변융 선사辨融禪師는 근거 없이 떠도는 말로 인해 감옥에 들어갔다. 옥졸이 대사의 명성이 높아 금이 많은 줄 알고 잘 봐주는 대가로 많은 돈을 요구하였으나 변공은 절집 어디에서 돈이 나오겠냐고 말하였다.
萬曆間辨融禪師。以蜚語下獄。獄卒以
師名重。必多金。厚索其酬。辨公曰。
僧家何處得錢。

옥졸은 갑상匣床228)을 꺼내 그를 가두었다. 변공이 공중을 향해 “대방광불화엄경”을 부르자 화엄회상 불보살이 갑상匣床 가득히 시끄럽게 메아리를 울려 자물쇠가 끊어지고 갑상이 부서졌다. 소문이 감옥(提牢)을 넘어 결국 임금에게까지 들렸고 임금은 조서를 내어 출옥하도록 하였다.229)
獄卒以强盜匣床。匣之
辨公向空唱云。大方廣佛華嚴經。華嚴
會上佛菩薩。滿匣床。聒聒作响。鎻斷
床碎。事聞提牢。遂達御前。奉詔請出。

 33. 숭정崇禎 연간(1628~1644년)에 대로大老230)들 중에 하옥된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가령 국경(封疆)231)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은 죽음(大辟)232)을 면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때 산동山東지방 순무군巡撫軍 여집생余集生 대성大成이 옥에서 먼저 큰소리로 염불을 하면 따라 염불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처결할 기한이 되어 서로 모여 염불하고 밤낮 그치지 않았다. 홀연히 벽 가득찬 불상을 보았는데 빛이 번쩍번쩍 빛나 대중들이 모두 놀라 예경하였다. 이에 곧 감형하라는 조서를 받게 되었다. 여집생余集生과 심언위沈彦威는 둘 다 국경을 담당한 이들로서 참수되려다가 모두 수자리 하는 처분을 받고 출옥하였다.233)
崇禎間。大老下獄甚多。若事關封彊
無有免于大辟者。時山東撫軍余集生
大成在獄。首唱念佛。諸公多從之。處
決届期。相聚念佛。晝夜不絶。滿壁忽
覩佛像。光明閃爍。衆悉驚禮。旋奉恩
詔末減。余集生沈彥威。皆以封彊擬斬
俱獲遣戌出獄。

 34. 순치順治 6년(1649년)에 각랑 선사覺浪禪師는 판에 글을 새기다가 맡은 일을 그르쳐서 태평太平의 감옥에 하옥되었다. 각랑 선사는 옥중의 사람들에게 염불을 하게 하고 권선의 말로 교화하였다. 옥졸들은 회심하여 재계하고 염불하였다. 매일 초경(7~9시)에 선사는 작은 북채를 잡고 옥졸들은 장향長香을 쥐고서 ‘대중들은 일심으로 염불하라’고 외치면 죄수들이 모두 울먹이며 염불하였다. 사람들이 보시를 하면 모두 가난한 이들을 위해 베풀어 주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상관이 태평부에 이르러 감옥에 출두하여 몸소 선사를 석방하였다. 이로 인하여 감옥의 죄인을 잘 다스려 죄를 덜어 석방되는 이가 많았다.234)
順治六年覺浪禪師。因刻書忤當事。下
太平獄。浪公敎獄中人念佛。善言勸化
獄卒回心。亦持齋念佛。每至一更。浪
執小擊。獄卒執長香。呼云大衆一心念
佛。犯人莫不號泣念佛。人餽布施。悉
周貧乏。不數月。上官臨太平府。入獄
躬釋浪公。因之淸理監犯。輕罪多得宥
放。

 35. 명明 당의지唐宜之의 휘는 시時로 호주湖州 사람이다. 연지 대사蓮池大師를 찾아뵙고 정토업을 부지런히 닦았다. 처음에 명경明經235)과에 급제하여 수양壽陽 땅에서 별가別駕236)를 역임하였고 이어서 양국襄國을 보좌하였다. 온 집안이 모두 삼보에 귀의하여 새벽이면 각자 경문經文을 수지 독송하였고 저녁이면 함께 모여 염불을 하였다.
숭정崇禎 신사辛巳년(1641년) 2월에 이자성의 반란군(闖賊)237)이 양양襄陽을 격파하자 공은 단례문端禮門 왼쪽 우물에 투신하였다.
明唐宜之。諱時。湖州人。叅蓮池師。勤
修淨業。初以明經。別駕壽陽。繼輔襄
國。擧家眷屬。悉歸三寶。晨則各持經
文。夕則同集念佛。崇禎幸巳仲春。闖
賊破襄陽。公投端禮門左井中。

가족들이 겨드랑이를 잡아 구출하였는데 숨이 이미 끊어졌다가 다시 살아났다. 임금의 명에 따라 자세히 조사를 받은 후 관대하게 처분되었다. 곧바로 휴가를 청하여 마을로 돌아왔는데 양양이 12월 5일에 다시 도적들에게 포위되었다. 처음에는 도적들에게 죽음을 당하지 않았고 이어 우물에 빠졌어도 죽지 않았으며 마침내는 법으로도 죽음을 당하지 않았으니, 이 어찌 대자대비께서 남모르게 도와주신 불가사의한 공덕이 아니겠는가? 공은 스스로 말하기를 몇 년 동안 부처님과의 감응(感應道交)238)이 있었다고 하였다.
家人掖之而出。氣已絕復甦。奉旨提究。得從
寬典。旋請假歸里。而襄陽季冬五日
再圍矣。初不死于寇。繼不死于井。終
亦不死于法。豈非慈悲默祐。功德不可
思議者耶。公自述數年來。感應道交

정해년(1647년) 12월 8일 장간사長干寺에서 염불하며 불탑에 예배하다가 탑의 광채 속에서 부처님 상호를 뵈었는데, 불상은 황금색이요 그 빛은 백설이나 얼음이나 깨끗한 거울과 같았다고 한다. 무자년(1648년) 7월 5일에는 선당禪堂에서 염불하다가 창문을 여는 순간 문득 종산鍾山이 큰 바다 위에 떠 있는 광경을 보았다. 금빛 부처님이 우뚝 서 있고 상서로운 빛이 찬란하게 타오르고 있는데, 지붕과 담장, 큰 나무(喬木)와 숲(叢林)은 모두 텅 비어 보이지 않았다.239)
丁亥臘八。於長干寺。念佛禮塔。見佛
相於塔光。佛黃金色。光則如雪。如氷
如明鏡。戊子七月五日。念佛于禪堂。
開䆫忽見鍾山浮巨海中。金佛巍巍。祥
光燐爍。瓦礫墻垣。喬木叢林。盡空不
見。

무릇240) 보통사람들은 서방 극락세계가 10만억 불국토를 지나서 있다는 말을 듣고 문득 멀다고 생각하는데, 이제 확인한 것으로 볼 때 10만억 불국토는 곧 눈앞 바로 그 자리에 있다. 목숨을 마치면 아주 잠깐 사이에 왕생하나니 어찌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주극복周克復241)이 말하기를, 거사로서 불지견佛知見242)을 증득한 이는 근세에 오직 당의지 한 사람뿐이라고 하였다.
夫恒人見說西方極樂。過十萬億佛
土。輒以爲遠。今由所見觀之。十萬億
佛土。即在目前。畢命彈指而生。詎非
生于方寸心哉。周克復曰。以居士而證
佛知見者。近世惟公一人而已。

 36. 청清 김광전金光前은 병사 출신(起身戎伍)243)으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이었으나 옳은 일이면 반드시 마음을 집중하여 행하였다. 아내 공龔씨는 여주廬州 효렴孝廉244) 집안의 딸로 전해지는데 가족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혼란스러운 때를 만난 것을 애통하게 여겨 서방에 귀의하였다. 또 경서나 역사서를 대략 읽을 줄 알았고 무릇 불경을 보면 아침저녁으로 지송持誦하였다. 광전은 아내의 행위에 감동하여 독실하게 믿게 되었다.
太淸金光前。起身戎伍。目不識字。然
見有義之事。則必銳意爲之。其妻龔氏。
傳是盧州孝廉之女。痛遭離亂。歸心西
方。且粗知書史。凡遇梵典。晨夕持誦。
光前爲之感動而篤信焉。

순치順治 계사년(1653년) 겨울 정벌을 명 받고 집에도 들르지 않고 부부가 함께 민閩땅에 가게 되었다. 무림武林을 나설 때에 구덕 화상이 영은사에서 설법한다는 말을 듣고 함께 가서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았다. 이로부터 염불에 더욱 간절하고 굳은 뜻을 가졌다.
順治癸巳冬。奉討不庭。相攜入閩。道出武林。聞具
德和尙。說法靈隱。同徃叅問。親承開
示。自此潜心念佛。愈切愈堅。

신축년(1661년) 여름에 서울로 돌아와 전당錢塘 강간江干에 주둔할 때(駐節) 김공이 갑자기 병이 들자 아내는 의원을 부르려 했으나 광전이 말리며 말하기를 “내가 예전에 당신과 함께 영은사에 갔었고, 이제 바로 여기에서 몸을 바꾸는 활계(轉身之活計)245)를 이루어 화상이 설법하신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을 따름이오. 어찌 약을 쓰겠소?”라고 하였다. 아내는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당신이 이 정도의 경지에 이를 줄 몰랐습니다.”라 하고 드디어 거처를 옮겨 숭성암崇聖菴으로 들어갔으니 남편이 세상을 떠날 장소를 얻으려 한 것이다.
辛丑夏。還京。駐節錢塘江干。金忽示疾。龔爲
延醫。光前止之曰。我昔與汝。親叩靈
隱。今正欲于此。作轉身之活計。求和
尙一證明耳。何以藥爲。龔大笑曰。不
意光前。亦得到此田地。遂徙帳入崇聖
菴。盖欲夫死得其所也。

암자에 10일 머물다가 아내는 관 두 개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저와 남편이 함께 갈 것입니다만, 돌아보건대 공을 위해서 뒷일을 할 사람이 없으니 저는 뒷일을 마친 후 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광전이 이 말을 듣고 기쁜 빛을 띠며 입적하였다. 아내는 일을 마친 후 하루 종일 먹지도 않고 눕지도 않고 일심으로 염불하였다. 하루는 몸이 점점 피곤함을 느끼고 관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잠시 후에 깨어나서 “때가 되었다.”라 말하고 단정하게 입적하였다. 얼굴빛이 생기가 있었다.246)
菴居旬日。龔造二棺。謂人曰。妾與金公偕行矣。顧
無人爲公畢後事耳。事畢我當徃矣。光
前聞之。即怡然長逝。龔事畢屏絶飮食
晝夜不臥。一心念佛。一日覺身稍倦
倚棺而眠。少頃醒曰。時至矣。端然趨
寂。顏色如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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