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보서 5


선비와 백성이 왕생한 이야기
士民徃生類

 1. 진晉 장야張野는 심양潯陽 사람으로 한학과 불경에 능통하였다. 또한 문장을 잘 써 무재茂才247)로 천거되어 여러 번 산기상시散騎常侍248)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한 번도 부임하지 않았고 여산廬山의 연사蓮社249)에 들어가 정토업을 닦았다. 의희義熈 14년(418년)에 가족과 작별하고 방에 들어가 가부좌한 채 세상을 떠났다.250)
晋張野。居潯陽。兼通華梵。尤善屬文。
擧茂才。屢徵散騎常侍。俱不就。入廬
山蓮社。修淨業。義熈十四年。與家人
別。入室端坐而逝。

 2. 진晉 궐공칙闕公則은 혜원慧遠 대사의 백련결사白蓮結社에 참여한 사람이다. 세상을 떠난 뒤에 친구가 동경東京의 백마사白馬寺에서 기제忌祭를 올려 주었는데 홀연히 나무숲과 전각이 모두 금색으로 변하고 공중에서는 “나는 궐공칙이오. 극락 보국 왕생의 기원이 이미 이루어졌소. 이를 알리러 온 것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말을 마치고는 사라졌다.251)
晋闕公則遠公。白蓮社中人。已亡友人
于東京白馬寺。爲作忌祭。忽林木殿宇
皆金色。空中有聲云。我是闕公則。所
祈徃生極樂寶國。今已達矣。故來相報。
言訖不見。


 3. 진晉 장전張銓은 장야張野의 조카로서 빼어난 성품으로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농사일을 하는 틈에도 경서를 놓지 않았으며 여러 번 발탁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유열庾悅252)은 그를 가난하다고 여겨
심양의 현령(潯陽令)으로 천거하였다. 그러나 그는 웃으며 “옛 사람은 무릎이나 넣을 만한 좁은 방도 편안히 여겼습니다. 뜻을 굽혀 벼슬길에 나가는 것이 무슨 영화로움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고는 바로 여산에 들어가 혜원 대사의 백련결사白蓮結社에 의지하였다. 경전을 깊이 탐구하였고 여러 번의 깨우침(悟入)253)이 있었다. 송 경평景平 원년(423년)에 병 없이 서쪽을 향하여 염불하며 편안히 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254)
晋張銓。野之族子也。高逸好學。耕鋤
間。帶經不釋。屢徵不就。庾悅以其貧。
擧爲潯陽令。笑曰古人以容膝爲安。屈
志就祿。奚榮之有。乃入廬山。依遠公
蓮社。硏窮內典。多有悟入。宋景平元
年。無疾西向念佛。安坐而卒。

 4. 송宋 주속지周續之는 안문鴈門 사람으로 12세에 오경五經과 오위五緯255)에 통달하여 십경동자十經童子라 불렸다. 뜻을 기르며 한가로이 살면서 공경이 차례로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여산의 혜원 법사를 모시고 백련결사에 참여하였다. 송 문제文帝가 왕위에 올라 그를 불러 소대召對256)하였을 때 명쾌하게 분석하니 왕이 매우 기뻐하였다. 어떤 이가 묻기를 “신분이 처사處士인데 자주 그렇게 궁중에 출입해도 됩니까?”라고 하자 그는 “마음이 조정에 있는 자는 몸이 강호에 있더라도 그곳이 굴레가 되며, 정과 이치(情致)가 다 사라진 자는 몸이 저자나 조정에 있더라도 그곳은 곧 바위 토굴일 뿐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때 통은 선생通隱先生이라 불렸으며 후에는 종산鍾山에 머물렀다. 염불에 전념했으며 나이가 들수록 더욱 매진하였다. 하루는 하늘을 보며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나를 영접하러 오신다.”라고 하며 합장한 채 입적하였다.257)
宋周續之。鴈門人。十二通五經五緯。
號十經童子。養志閒居。公卿交辟。皆
不就。事廬山遠法師。預蓮社。文帝踐
祚。召對辨析。帝大悅。或問身爲處士
時踐王庭可乎。答曰心馳魏闕者。以江
湖爲桎梏。情致兩亡者。市朝亦巖穴耳。
時稱通隱先生。後居鍾山。專心念佛。
愈老愈篤。一日向空云。佛來迎我。合
掌而逝。

 5. 양梁 유선庾銑은 신야新野 사람으로 무제武帝가 황문黃門의 시랑侍郎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밤낮으로 염불하였는데 어느 날 저녁 자칭 원공願公이라는 도인이 나타나 상행 선생上行先生이라 부르며 향을 주고 떠났다. 4년 뒤에 그 도인이 다시 나타나 드디어 세상을 떠났다. 공중에서 말하기를 “상행 선생은 이미 안양에 왕생하였다.”고 하였다.258)
梁庾銑。新野人。武帝召爲黃門侍郞。
不赴。六時念佛。一夕見道人。自稱願
公。呼銑爲上行先生。授香而去。後四
年。願復至。遂化去。空中言上行先生
已生安養矣。

 6. 양梁 고호상高浩象은 동평東平 사람이다. 문을 닫고 고요히 앉아 오로지 『무량수경無量壽經』만 독송하였다. 일찍이 관觀을 하던 중 자신이 연못의 붉은 연꽃에 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부처님이 보이지 않았는데 꽃 위로 나아가 마음을 다해 예불하며 멀리 부처님 상호를 떠올리자 광채가 멀리서 비쳤다. 어느 날 저녁 여러 보살들이 와서 맞이하는 것을 뵙고 바로 세상을 떠났다.259)
梁高浩象。東平人。杜門靜坐。專誦無
量壽經。嘗在觀中。覺自身泛紅蓮于池
面。初未見佛。乃即華上。傾心禮佛。遙
想金容。光輝遠映。一夕見衆菩薩來迎。
即時化去。

 7. 수隋 송만宋滿은 상주常州 사람이다. 콩을 세며 염불하여 30석石을 쌓았다. 개황開皇 8년(588년) 9월에 반승飯僧을 마치고 가부좌한 채 세상을 떠났다. 당시에 사람들이 신이한 향기를 가득 풍기는 하늘 꽃이 허공을 날아 서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260)
隋宋滿。常州人。計荳念佛。積三十石。
開皇八年九月。飯僧畢。坐逝。人見天
華異香滿。乘空西去。

 8. 당唐 정목경鄭牧卿은 형양滎陽 사람으로 온 집안이 염불을 하였다. 개원開元 연간(713~741년)에 병세가 심해졌는데 생선이나 고기를 차려 올리면 결코 입에 대지 않았다. 향로를 붙잡고 왕생을 기원하였는데 홀연히 이상한 향이 가득했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외삼촌인 상서尚書 소정蘇頲의 꿈에 정목경이 보배 연못의 활짝 핀 연꽃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261)
唐鄭牧卿。榮陽人。擧家念佛。開元中。
病篤。有勸進魚肉者。確乎不許。手執
香爐。願求徃生。忽異香充蔚。奄然而
逝。舅尙書蘇頲。夢寶池蓮開。牧卿坐
其上。

 9. 당唐 장원상張元祥은 평소에 염불을 그치지 않았다. 하루는 가족들에게 재촉하며 말하기를 “서방의 성인께서 나를 기다리신다. 재를 마치고 함께 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재를 마친 후 분향하고 가부좌한 채 서쪽을 향하여 세상을 떠났다.262)
唐張元祥。居常念佛不輟。一日促家人
云。西方聖人待我。齋畢同徃。齋事訖。
焚香跏趺。面西而化。

 10. 당唐 원자재元子才는 윤주潤州 관음사觀音寺에 살면서 『미타경』을 독송하며 염불하였다. 갑자기 작은 병이 들었는데 밤에 공중에서 향기가 나고 풍악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마치 어떤 사람이 ‘거친 음악 소리가 지나가고 부드러운 가락이 이어 오면 그대는 떠나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염불하며 세상을 떠났는데 신이한 향내가 며칠 동안 흩어지지 않았다. 같은 절의 원자평元子平도 후에 공중의 음악 소리를 듣고 서쪽을 향하여 가부좌한 채 세상을 떠났다.263)
唐元子才。居潤州觀音寺。誦彌陀經念
佛。忽小疾。夜聞空中香氣樂音。似有
人言。粗樂已過。細樂續來。君當行矣。
念佛而化。異香數日不散。同寺元子平。
後亦聞空中音樂。即西向坐化。

 11. 당唐 이지요李知遙는 장안長安 사람으로 정토교를 좋게 여겨 오회염불五會念佛264)을 하였는데 대중들의 사범이 되었다. 후에 병이 들어 홀연히 “부처님께서 나를 맞이하러 오신다.”고 하면서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향로를 피우고 방을 나서며 정례하였는데 공중에서 게偈를 말하기를 “그대 이지요에게 이르노니, 염불한 공덕으로 내가 왔노라. 그대를 이끌어 정토에 나게 하고 금으로 된 다리(金橋)265)에 오르게 하리라.” 하였다. 침상에 나아가 단정히 앉아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이 다 신이한 향내를 맡았다.266)
唐李知遙。長安人。善淨土敎。五會念
佛。爲衆師範。後因疾。忽云佛來迎我。
洗漱更衣。索香壚。出堂頂禮。乃聞空
中說偈云。報汝李知遙。功成果自招。
引君生淨土。將爾上金橋。就牀端坐而
化。衆聞異香。

 12. 당唐 분양 노인汾陽老人은 법인산法忍山에서 방 한 칸을 빌려 살며 밤낮으로 염불하였다. 정관 5년(631년) 목숨을 마칠 때 커다란 빛이 나타나 두루 비추었고 서쪽을 향하여 세상을 떠났는데, 사람들은 그가 연화대를 타고 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267)
唐汾陽老人。于法忍山。借一空房止宿。
晝夜念佛。貞觀五年命終。時大光徧照。
面西而逝。人見乘蓮華臺云。

 13. 당唐 방저房翥가 갑자기 죽어 저승에 이르러 염라대왕을 만났다. 왕이 말하기를 “문서를 보니 그대가 일찍이 한 노인에게 염불을 권하여 이미 정토에 나게 했으니, 그대도 이 복을 따라 정토에 나는 것이 합당하다.”라고 하였다. 방저는 “먼저 『금강경』 만 권과 오대산을 순례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아직 왕생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응답하였다. 왕은 “순례하고 경을 독송하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지만 어서 빨리 정토에 나는 것만 못하다.”라 하였으나,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음을 알고 돌려보냈다. 이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염불을 닦도록 권하는 사람은 다만 왕생할 뿐만 아니라 저승까지도 감동시키는 것을 알 수 있다.268)
唐房翥。暴死至陰府。見閻羅王。王曰
據案簿。君曾勸一老人念佛。已生淨土。
君承此福。亦合生淨土。翥曰先許金剛
經萬卷。巡禮五臺。未欲徃生。王曰巡
禮誦經。固爲好事。不如早生淨土。王
知志不可奪。放還。以此知勸人修者。
非徒徃生。又感動幽冥也。

 14. 송宋 손량孫良은 전당錢塘 사람으로 은거하며 대장경을 읽고 또한 화엄의 요지를 깨달았다. 대지 율사大智律師에게 보살계를 받고 매일 만 번씩 부처님 명호를 독송하기를 20년 동안 그치지 않았다. 어느 날 문득 가족들에게 스님을 모시고 염불로써 왕생을 도와달라고 청하자 스님들이 모여 염불하였다. 반나절쯤 하늘을 향해 합장한 후 말하기를 “부처님과 보살이 이미 강림하셨다.”라 하며 물러나 가부좌한 채 세상을 떠났다.269)
宋孫良。錢塘人。隱居大藏。尤得華
嚴之旨。依大智律師。受菩薩戒。日誦
佛萬聲。二十年不輟。忽一日。命家人。
請僧念佛。助徃生。僧集念佛。方半餉
望空合掌云。佛及菩薩。已荷降臨。退
坐而化。

 15. 송宋 왕전王闐은 사명四明 사람으로 호는 무공수(無功叟: 공 없는 늙은이라는 뜻)이다. 선종과 천태교에 다 통달하여 『정토자신록淨土自信錄』을 지었다. 만년에는 염불에만 마음을 써 서쪽을 향하여 가부좌한 채 세상을 떠났다. 신이한 향내가 자욱했으며 감실을 태울 때 콩알만한 사리 8개가 나왔다.270)
宋王闐。四明人。號無功叟。禪宗及台
敎。無不洞達。著淨土自信錄。晩年專
心念佛。西向坐化。異香芬郁。焚龕時。
獲舍利如菽者八粒。

 16. 송宋 범엄范儼은 인화仁和 사람이다. 세상일에 관심을 끊고 자식이 집안을 다스리지 않아도 돌보지 않았다. 그리고는 “나는 나그네일 뿐이다.”라 하면서 매일 『법화경』을 독송하고 마음을 집중하여 부지런히 아미타불을 염불하였다. 어느 날 문득 상아가 여섯 개 난 흰 코끼리(六牙白象)271)를 타고서 금색 빛을 발하는 보현보살을 뵈었다. 보살은 범엄에게 “내일 묘시(卯時: 새벽 5~7시)에 갈 것이다.”라 하였다. 하룻밤 지난 후 불보살이 와서 영접하자 나아가 앉아 합장하고 세상을 떠났다.272)
宋范儼。仁和人。絶心世務。子不治家。
儼不之顧。但云我是寄客耳。日誦法華。
念阿彌陀佛。專心不懈。忽見普賢乘六
牙白象。放金色光。報儼云。明日卯時
當行。越一夕。佛菩薩來迎。就坐合掌
而逝。

 17. 송宋 육원도陸沅道는 호가 성암 거사省菴居士로 명明의 횡계橫溪에 살았다. 새벽이면 일어나 향을 사르고 가부좌하였다. 눈을 조금도 다른 곳에 돌리지 않고 먼저 게를 읊었다.

盥手淸晨貝葉開  맑은 새벽 손 씻삽고 패엽경을 펼치오니
不求諸福不禳災  이 복 저 복 구하지 않고 재앙 물리치기 원치 않네.
世緣斷處從他斷  세상 인연 단절된 곳 그로부터 끊어지니
刼火光中舞一迴  겁화273)의 빛 속에서 춤추며 한 번 도네.

그 후 염송을 하되 느리지도 급하지도 않게 하였으며 소리는 마치 시를 읊는 것(貫珠) 같았다. 매일 『법화경』 한 편을 독송하고 미타 명호를 만 번 소리 내어 부르되 오로지 서방 왕생에만 뜻을 두었다. 85세가 되어 목욕하고 옷을 단정히 입고 세상을 떠났다. 염습할 때 홀연히 자욱한 연꽃 내음을 맡았으나 어디서 풍겨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가까이서 맡아 보고는 모두 입에서 나온 것을 알았다.274)
宋陸沅道。號省庵居士。住明之橫溪
晨起焚香趺坐。目不他瞬。首倡偈曰
盥手淸晨貝葉開。不求諸福不禳災。世
緣斷處從他斷。劫火光中舞一迴。然後
念誦不緩不急。聲如貫珠。每日法華一
徧。彌陀萬聲。一意西馳。年八十五。沐
浴整衣而逝。洎殮。忽聞蓮華馥郁之氣。
皆不知來處。近挹之。盖出自口中。

 18. 송宋 손충孫忠은 사명四明 사람으로 일찍이 서방을 연모하여 군성郡城 동쪽에 암자를 짓고 염불하였다. 후에 병이 들자 스님 백 명을 청하여 계념繫念275)을 하였다. 홀연히 하늘을 우러러 합장하면서 기쁜 표정으로 세상을 떠났다. 온 성 사람들이 하늘음악과 신이한 향기가 서쪽으로 향하여 사라지는 것을 들었다. 두 아들이 서로 이어 염불하였으며, 이들 역시 앉은 채 세상을 떠났다.276)
宋孫忠。四明人。早慕西方。于郡城東
築菴念佛。後因病。請僧百人。繫念。忽
仰空合掌。怡然而化。闔城聞天樂異香。
漸向西沒。二子相繼念佛。亦坐化。

 19. 송宋 심전沈銓은 전당錢塘에서 장가를 들었다. 아내 시씨施氏와 함께 오직 한마음으로 염불하였고 많은 선업을 닦아 모두 회향하였다. 아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임종할 때 모두 아미타 부처님께서 석장을 지니고 접인하는 것을 감응하고 세상을 떠났다.277)
 宋沈銓。家錢塘。同妻施氏。專心念佛
所脩諸善。悉用回向。及妻前後命終。
皆感化佛。持錫接引而去。

20. 송宋 당세량唐世良은 회계會稽 사람이다. 계율을 잘 지키고 염불에 힘썼다. 나이 들고 병이 났어도 눕지 않고 『미타경』 십만 편을 독송하였다. 어느 날 가족들에게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나를 맞이하러 오신다.”라 하고 말을 마친 후 예불하고 바로 앉아서 세상을 떠났다.278) 이利라고 하는 행인이 당시 도미산道味山에 있다가 꿈을 꾸었는데, 서방에서 이상한 빛이 나고 화려한 기가 펄럭이고 하늘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공중에서 ‘당세량은 이미 정토에 갔다’라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宋唐世良。會稽人。持戒念佛。年老疾
病。猶不就枕。誦彌陀經十萬遍。謂家
人云。佛來接我。言訖作禮。即便坐逝。
利行人。時在道味山。夜夢西方異光。
旛華天樂空中聲云。唐世良。已歸淨土。

 21. 송宋 계공計公은 동전을 만드는 장인인데 70세에 눈을 잃었다. 마을 사람 구학유咎學諭279)는 벽과도擘窠圖280)를 찍어 널리 배포하고 염불을 권하였다. 계공은 처음에 그림 하나를 완성하면서 36만 번이나 소리 내어 염불하였다. 이렇게 염불하여 그림 네 개가 완성되었을 때 두 눈이 밝아졌다. 이와 같이 하여 3년이 지나자 그림이 17개가 되었다. 하루는 염불하다가 갑자기 숨을 거두었는데, 반나절 후 다시 깨어나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그림 여섯 개를 나누어 구학유에게 주라고 하셨다. 그는 염불을 권장한 첫 번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림 하나는 이이공李二公에게 주도록 하셨다. 그는 그림을 나누어 준 사람이기 때문이다.”라 하며 아들을 시켜 찾아가서 사례하도록 하였다. 말을 마치고 목욕한 후 서쪽을 향하여 세상을 떠났다.281)
宋計公。錢工也。年七十喪明。里中咎
學諭。以擘窠啚。印施勸人念佛。計公
初授一圖。念滿三十六萬聲。念至四圖。
兩目瞭然。如是三載。念滿十七圖。一
日念佛。忽氣絶。半日復蘇曰。佛令分
六圖。與咎學諭。是勸導之首。分一圖
與李二公。是俵圖之人。囑其子徃謝之。
言訖沐浴。向西而化。

 22. 송宋 심삼랑沈三郎은 만년에 회심하여 염불하였다. 병이 들자 스님을 청하여 『미타경』을 염송하도록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무릎을 오므리고 일어서려는 자세로 숨을 거두었다. 두 아들이 유교(名敎)282)에 구애받은 탓에 감실로 바꾸는 것을 어렵게 여겨 정강이를 끌어당겨 반듯하게 폈다. 심삼랑은 염습할 때 홀연 머리를 수의 밖으로 내더니 갑자기 나와 앉았다. 온 집안이 크게 놀라고 두 아들은 서둘러 앞에서 부축하고 팔꿈치로 받치게 했다. 아들이 말하기를 “좌탈坐脫하도록 도울 뿐이다.”라 하였다. 마침내 가부좌한 채 세상을 떠났다. 다비할 때 백학 29마리가 구름 밖으로 울며 날다가 한참 후에 서쪽으로 갔다.283)
宋沈三郞。晩歲回心念佛。因病請僧。
念彌陀經。易衣而終。縮膝欲起。二子
局于名敎。以易龕爲難。曳其脛直之。
將入殮。忽擧首出衣被。矍然而坐。擧
家大驚。二子急前扶衛。乃以肘節捶之
子曰助父坐脫耳。竟坐逝。茶毘。有白
鶴二十九隻。飛鳴雲表。久之西去。

 23. 송宋 육준陸俊은 전당錢塘 사람으로 젊어서 관청에서 일하였다. 오래 지나서는 관직을 그만두고 정토를 업으로 삼아 매일 부처님께 참회하며 크게 울었다. 도반들을 만나면 정토 인연을 이야기하였는데 겨우 열 마디만 해도 문득 슬피 울며 느꺼워하였다. 임종할 때 원정 율사圓淨律師에게 서방 세계를 보여 주기를 청하였다. 율사가 『관무량수경』을 염송하다가 상품上品을 설명한 부분에 이르러 “이제 떠날 만하다.”고 하자 그는 “여러 성인들께서 아직 준비가 안 되었으니 잠시 기다립시다.”라고 하였다. 잠시 후에 갑자기 일어나 대나무 침상에 나아가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은 채 세상을 떠났다.284)
宋陸俊。錢塘人。少事公門。久之棄去。
以淨土爲業。每對佛懺悔。垂淚交頥。
道友相見。說淨土因緣。纔十餘句。便
悲咽感歎。臨終請圓淨律師。開示西方
諷觀經至上品。淨曰可以行矣。俊曰衆
聖未齊。姑待之。少頃忽起就竹牀。面
西端坐而逝。

 24. 송宋 서육공徐六公은 가흥嘉興 사람으로 농사일에 힘썼다. 부부가 함께 채식을 하였고 40년을 정성스레 염불에 전념하였다. 미리 감실 하나를 만들어 놓고 임종할 때 베옷으로 갈아입고 짚신을 신고 그 안에 들어가 단정히 앉았다. 조금 지난 후 “부처님께서 맞이하러 오신다.” 하고는 바로 세상을 떠났다.285)
宋徐六公者。嘉興人。務農爲業。夫婦
蔬食。精勤念佛四十年。預作一龕。臨
終易布衣草履。入龕端坐。頃之曰。佛
來迎我。即化去。

 25. 송宋 황공黃公은 담주潭州 사람이다. 본래 군인이었는데 대장간 일로 생업을 꾸려 갔다. 매번 항쇄와 철퇴를 만들 때마다 입에서 염불이 떠나지 않았다. 하루는 이웃 사람에게 게송을 적어 달라고 하며 부르기를 “땅땅땅땅 쇠를 오래 불려 강철 되네. 태평나라 가까워지니 나 서방에 왕생하리라.” 하고는 병이 없었는데 입적하였다. 이 노래가 호남지방에 널리 전파되어 염불하는 이가 많았다.286)
宋黃公。潭州人。本軍伍。以打鐵爲生。
每鉗鎚時。念佛不輟口。一日無疾。託
鄰人爲寫頌云。叮叮噹噹。久鍊成鋼。
太平將近。我徃西方。即化去。其頌盛
傳湖南。人多念佛。

 26. 원元 하담적何曇迹은 18세에 보살계를 수지하고 염불하였다. 어느 날 사경(새벽 1~3시)에 일어나자마자 염송하였다. 사람들이 너무 이르지 않느냐고 묻자 이에 “금빛 상호의 부처님께서 일산을 쓰고 와 맞이하시는 것을 뵈었다.”라고 대답하고는 세상을 떠났다.287)
元何曇迹。年十八。持菩薩戒念佛。一
霄四鼓。即起念誦。人云太早。答云見
佛金相。旛華來迎。遂脫去。

 27. 명明 화華 거사는 강간江干 사람으로 순박하고 거짓이 없었으나 남들과 다정하게 어울리지는 않았다. 중년의 나이에 가업을 아들에게 맡기고 혼자 방에 틀어박혀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고 온종일 부지런히 염불만 하였다. 후에 임종할 때에는 때가 이르렀음을 스스로 알고 의관을 바로잡고 단정히 앉아 대중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에 아들이 만든 관이 있었는데 이를 감실로 바꾸어 스님들이 입적할 때 하는 것과 같이 했다. 상여 나가는 날에 구경하는 이가 담장처럼 늘어섰으며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존경해 마지 않았다.288)
明華居士。江干人。醇朴無僞。與人不
款曲。中年屬業諸子。獨處一室。不涉
世事。朝暮惟孜孜念佛而已。後將卒
自知時至。更衣正冠。端坐別衆而逝。
其子先已作棺。于是易龕。如沙門故事。
擧龕之日。觀者如堵。遠近嚮慕焉。

 28. 명明 연화태공蓮華太公은 월越 지방 사람이다. 일생을 소박하게 살았는데 오직 밤낮으로 염불을 그치지 않았다. 세상을 떠난 후 관에서 연꽃 한 줄기가 홀연히 피어나니 마을 사람들이 경탄해 마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이름을 연화태공이라 불렀다 한다.289)
明蓮華太公者。越人。一生拙朴。惟晝
夜念佛不絶。命終之後。棺上忽生蓮華
一枝。親里驚歎。因號蓮華太公云。

 29. 명明 곽대림郭大林은 탕음湯陰 사람이다. 평소 단아하고 정갈한 성품으로 세상에서 벗어날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염불을 가르치는 스님을 만나 일심으로 정토업을 닦았다. 76세 때 하루는 아픈 곳이 없었는데도 자식들에게 “내일 정오에 떠난다.” 하며 작별하고 때가 되자 앉아서 입적하였다.290)
明郭大林。湯陰人。平生端潔雅素。出
世爲懷。遇僧敎以念佛。遂一心淨土。
年七十六。一日無疾。與子別云。明午
當去。至時坐脫。

 30. 명明 당담糖擔291) 노인은 항성杭城 안에 살면서 설탕을 팔아 생업을 유지했는데 입에서 염불이 끊이지 않았다. 하루는 설탕을 짊어지고 나가서 사람들에게 “어서 빨리 이 설탕을 가져다 잡수시오. 저는 곧 돌아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몇몇 아는 사람 집에 가서는 “미안하지만 내일 와서 내 관을 들어 주시오. 저는 돌아가려 합니다.”라고 하였다. 지인들이 의아하게 여겨 반신반의하였다. 다음 날 아침 아내에게 음식을 준비하고 손님을 대접하라고 하였다. 식사 때에 지인들이 모두 오자 노인은 관을 들고 집에 오도록 하였다. 그리고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사람들에게 절하며 “내가 스스로 관속에서 잠들어 여러분을 수고스럽게 하지 않을 것이오.”라 하면서 관에 들어가 앉은 후 기쁜 표정으로 잠들어 결국 먼 길을 떠났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신기해 했다.292)
明糖擔老人。住杭。賣糖爲生。口中念
佛不絕。忽一日。挑糖擔。出見人便曰
汝早喫我糖。我當歸去也。更至數相識
家。約曰煩你。明日來擡我棺。我要歸
去。識者訝之。且信且疑。次早謂其妻
曰。可偹飮食。以待來人。餉時。識者皆
至。老人引令擡棺到家。沐浴更衣。拱
手語衆曰。我當自寢于棺。不勞汝等
將身坐棺中。怡然就寢。遂長徃矣。衆
咸驚異。

31. 명明 유통지劉通志는 서울 사람으로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염불을 하였는데, 52세에 병환을 얻게 되자 더욱 절실하게 염불하였다. 이웃에 사는 이백재李白齋가 먼저 죽었는데, 통지도 숨을 거두었다가 정오가 되어 다시 살아났다. 가족에게 말하기를 “마침 정토로 가는 배 한 척을 보았단다. 배에는 서른여섯 명이 타고 있었는데 이백재도 있었지.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고. 그런데 내 옷이 깨끗하지 못하고 게다가 염주를 가져가는 것을 잊어버려서 다시 왔단다. 옷을 갈아입고 염주를 가져오라는 명을 받고서. 지금 배가 나를 기다리고 있어.”라고 하였다. 가족들이 급하게 옷을 갈아입히고 목에 염주를 걸어 주자 통지는 잠시 후에 세상을 떠났다.293)
明劉通志。京都人。精懇念佛。年五十
二。得疾念益切。鄰人李白齋先卒。通
志氣絕。自旦至午復甦。謂家人曰。適
見一舟。云徃淨土。乘舟三十六人。白
齋與焉。我亦一數。但衣未鮮潔。又忘
帶念珠。命我易衣取珠。舟艤相待。家
人急爲易衣。珠掛其項。須臾而逝。

 32. 명明 당정임唐廷任은 난계蘭溪 사람으로 호는 체여 거사體如居士이다. 효성스럽고 우애하며 또한 성실하였는데 다 천성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소년 시절 학교에 다닐 때에는 명성이 자자했으나 이윽고 세상의 무상無常함을 깨닫고 오직 한마음으로 도에 이르고자 하였다. 운서雲棲 대사에게 나아가 염불삼매를 배워 힘을 다해 수행하였다. 13년을 하루같이 독실하게 서방에 뜻을 두었다. 만력 계묘(1603년) 11월, 60세 되는 날 아침 홀연히 자식들에게 이르기를 “내년 봄 11일에 나는 돌아갈 것이다.”라 하였다. 예정한 날로부터 수일 전에는 평소와 같이 예송하였다. 그날이 되자 손을 씻고 양치하고 옷을 단정히 입은 후 앉아 손으로 인을 맺으며 부처님 명호를 부르고 미소를 머금고 세상을 떠났는데, 마치 선정에 든 것 같았다.294)
明唐延任。蘭溪人。號體如居士。孝友
醇慤。出自天性。少遊黌校。有聲。已而
覺世無常。傾心至道。叅雲棲。受念佛
三昧。遂力行之。凡十三年。如一日。篤
志西方。萬曆癸卯仲冬。六十壽旦。忽
謂諸子曰。新春十一日。吾歸矣。數日
前。禮誦如平時。至期盥漱整衣。端坐
手結印。口稱佛名。含笑而逝。如入禪
定。

 33. 명明 양가위楊嘉禕295)는 자가 방화邦華로 태화泰和 사람이며 세가世家296)의 자제이다. 열세 살에 불살계不殺戒를 지켜 벼룩과 이도 죽이지 않았다. 23세에 남옹南雍297)에서 수업하였는데 갑자기 병이 나서 만력 을사년(1605년)에 숨을 거두었다. 죽기에 앞서 지옥 명부전에서 지장보살을 만나는 꿈을 꾸었는데,
꿈을 깬 후 살아 있는 것을 모두 방생했으며 스님을 초빙해 불경을 독송하고 염불하였다.
明楊嘉禕。字邦華。泰和人。世家子也。
年十三。持不殺戒。蚤風無所傷。二十
三肄業南雍。俄疾作。以萬曆乙巳卒
卒之先夢遊地獄。見地藏大士于冥陽
殿。覺而放諸生命。延僧誦經念佛。

그리고 사람들에게 “나는 곧 떠날 것이다. 청련화가 내 앞에 보이니 어찌 정토의 광경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하면서 드디어 밤낮으로 염불을 그치지 않았다. 또 촛불을 끄도록 하고는 “여러분들은 촛불이 있어야 밝힐 수 있지만 나는 촛불이 없어도 항상 광명 가운데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중들이 무엇이 보이냐고 묻자 네 가지 색깔의 연꽃이 보인다고 하였고, 미타를 뵈었는지 묻자 천 길 몸으로 현신한 미타불을 뵈었다고 하였으며, 관음보살을 뵈었는지 묻자 현신이 미타와 똑같다고 하였다. 대세지보살을 묻자 뵙지 못했다고 하였다.
謂人曰。吾將逝矣。靑蓮華現吾前。得非
淨土境乎。遂晝夜念佛不輟。命息燭曰
汝軰假燭爲明。吾不須燭。常在光明中
耳。問何所見。曰蓮開四色。問見彌陀
否。曰見彌陀現千丈身。問觀音。曰身
與彌陀等。問勢至。曰不見也。

말을 마치고 갑자기 뛸 듯이 일어서서 향을 집고 이어 말하기를 “『미타경』의 공덕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난 벌써 상품上品 왕생했다.”라 하면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둘째 형인 가조嘉祚는 이 일을 전하면서 “맹세코 내 말이 거짓이라면 발설지옥298)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바로 그 겪은 것이 진실하고, 전하는 말이 절실한 것 아니겠는가. 정토를 믿지 않는 자들은 생각해 볼 따름이다.299)
言訖忽躍起拈香。連聲語曰。彌陀經功德。不
可說不可說不可說。吾已得上品矣。寂
然而逝。仲兄嘉祚。傳其事而矢之曰
予所誑語。墮拔舌獄。其亦見之眞而言
之切與。不信淨土者。可思已。

 34. 명明 학희재郝熈載는 전당錢塘 사람이다. 평소에 마음이 올곧고 진실하여 덕행으로 학교에서 이름이 났다. 만년에 불교에 귀의해 경전을 지송하여 아침저녁으로 게으르지 않았다. 만력 신해년(1611년) 봄에 병이 들었는데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내가 꿈에 산에서 부처님을 뵙고자 했는데 부처님은 뵙지 못하고 무수한 새들이 모여 있는 것만 보았다.”라고 하였다. 이후에도 같은 말을 며칠간 하였는데 27일째에는 공양 시에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면서 아들 세한에게 말하기를 “오늘 작별함이 하나의 운명(乾坤)이로다.”라고 하였다. 삼경이 되자 홀연 “동자가 와서 맞이하는구나. 연화대에 앉으신 부처님께서 내 앞에 현전하셨으니 나는 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부좌(吉祥)300)하여 세상을 떠났다.301)
明郝熈載。錢塘人。生平忠信不欺。以
德行稱于黌校。晩歸佛持誦。夙夜匪懈。
萬曆辛亥春。得疾每睡覺云。吾夢於山
中。求見佛。佛未見。見百鳥叢集。如是
累日。至二十七。食時忽擧首視窓外。
謂其子世翰曰。今日別是一乾坤矣。三
鼓忽云。有童子來迎。佛坐蓮華臺。現
吾前。吾徃矣。吉祥而逝。

 35. 명明 과이안戈以安의 법명은 광태廣泰로 전당錢塘 사람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평소 선행을 쌓았으나 깊이 스스로 감추어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정성껏 불법을 신봉하여 현소玄素 스님과 함께 봄가을로 결사를 맺어 염불하고 경을 독송하였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죽을 날이 장차 이를 것이니 마땅히 서방으로 돌아가는 양식을 마련해야겠다.”라고 하고 드디어 홀로 방에서 일과로 염송하기를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섣달 21일로 돌아갈 기한을 미리 정하였는데, 이틀 전 저녁에 부인과 자식들이 빙 둘러 앉아 슬피 흐느꼈다. 거사는 웃으며 말하기를 “태어나는 것은 반드시 죽는 것이거늘 어찌 슬퍼하리오. 내 바야흐로 정신을 정토에 맺어서 직접 아미타 부처님을 뵈올 것이니 그대들은 정애情愛로 나의 정념正念을 어지럽히지 마시오.”라고 하며 간곡하게 현소 스님에게 조념염불助念念佛302)을 당부하고 다른 말이 섞이지 않도록 하였다. 기한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303)
明戈以安。法名廣泰。錢塘人。性至孝。
素積善行。而深自韜晦。不求人知。晩
歲精誠奉佛。與僧玄素。結春秋二社。
念佛誦經。忽謂人曰。吾大限將至。當
爲西歸資粮。遂自室課誦。昕夕不輟。
預定歸期于臘月二十一。前二夕。母子
環視悲哽。居士笑曰。生必有滅。奚悲
爲。吾方凝神淨域。面覲彌陀。若等愼
勿以情愛。亂我正念。諄諄囑玄素助念
無間雜語。至期而逝。

 36. 명明 손숙자孫叔子는 법명이 대우大玗로 어릴 적부터 민첩하고 단정하고 굳세었다. 열두 살에 부친 경오공鏡吾公을 따라 사십팔 대서원을 세운 미타상을 모셨다. 운서雲棲 대사의 문하에 들어가 오계를 받았고 돌아와서는 오신채五愼菜와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친구들과의 왕래도 끊었으며 잡담도 그치고 오직 염불에만 뜻을 두었다. 그리고 금대金臺에 오르기를 맹세하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부지런히 노력하였다. 어느 날 갑자기 두 비구가 연꽃을 쥐고 있는 모습을 보았으니, 일심으로 정토에 마음을 두고 있음을 인가한 것이었다. 다시 화인化人304)을 보았고, 『금강경』을 하루 밤낮 독송하다가 깜짝 놀라(矍然)305) 일어나 말하기를 “미타와 관음보살이 함께 나를 맞이하러 오신다.”라 하고 아미타불을 몇 번 크게 소리 내어 부르면서 담담하게(泊然) 입적하였다. 때는 만력 신해(1611년) 11월 11일이었다. 「정토십이시가淨土十二時歌」가 있어 세상에 전한다.306)
明孫叔子。法名大玗。自幼警敏端確。
年十二。隨父鏡吾公。奉四十八願彌陀
像。入雲棲。因受五戒。歸斷葷血。息交
遊罷呫嗶。矢志念佛。誓取金臺。勤苦
不惜身命。俄見兩比丘。持蓮華。以一
心淨土印可。復見化人。誦金剛經一晝
夜。乃矍然起坐曰。彌陀觀音。皆來迎
我。大呼阿彌陀佛數聲。泊然而寂。時
萬曆辛亥仲冬十一日。有淨土十二時
歌。傳世。

 37. 청清 한승산韓承山은 평호현平湖縣 사람이다. 사람됨이 정성스럽고 소박하였으며, 농업과 잠업에 힘써 가업을 쌓았다. 밭과 과수원으로 천여 금을 모았으나 평소에 오직 계율을 지키고(持齋)307) 염불을 할 따름이었다. 81세 때인 강희 원년(1662년) 4월에 문득 아들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일 친족들을 두루 청하여 오라. 작별인사를 해야겠다.”라고 하였다. 아들이 시킨 대로 청하여 오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저는 다만 칠 일 간 세상에 머물 뿐이오. 일부러 여러분과 함께 작별하고자 불렀소.”라고 하였다. 기약한 날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단정히 앉아 자녀들에게 모두 둘러 앉아 염불하도록 하고 자신도 염불하였다. 한참을 움직이지 않아 가까이 가서 보니 이미 세상을 떠난(委蛻)308) 뒤였다.309)
太淸韓承山。平湖縣人。爲人誠朴。力
務農桑。積累家業。田園約千餘金。居
恒惟持齋念佛而已。年八十一。康熈元
年四月。忽謂子曰。明日汝可徧請親族
來。我欲與之話別。子依敎請至。對衆
曰。我止有七日住世。特與汝等作別。
至期沐浴更衣端坐。悉令子女。環坐念
佛。自亦念佛。良久不動。近視之。
已委蛻矣。

 38. 청淸 교충아喬忠我는 장흥長興 사람이다. 대그릇을 팔아 생업으로 삼았는데, 두 손으로 대나무를 다듬을 때마다 입으로 염불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오첨 보문烏瞻普聞 화상을 예경하여 매번 첨산瞻山에서 결제結制할 때마다 선당에 들어갔다. 강희 원년(1662년) 3일 전 친구와 자녀들에게 미리 말하기를 “나는 곧 돌아가리라.” 하였다. 10월 초하루가 되자 옷을 갈아입고 서쪽을 향하여 단정히 앉아 염불하였는데,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염불하여 왕생을 돕도록(助念) 부탁하였다. 같은 도를 닦는 스님들에게는 “여러분과 오늘은 헤어지지만 연지蓮池에서 꼭 다시 만날 것입니다.”라 하였고 말을 마치자 조용히 입적하였다.310)
太淸喬忠我。長興人。鬻竹器爲生。兩
手削竹。口中念佛不輟。禮烏瞻普聞和
尙。每瞻山結制。亦入禪堂。康熈元年
三日前。預告親朋子女曰。我將歸去
至十月朔。更衣向西。正坐念佛。有來
視者。令念佛相助。對同道師僧曰。而
今一別。當于蓮池中相會也。言訖悠然
而逝。

 39. 청清 적몽리翟夢鯉의 법명은 정진淨震으로 임강臨江 사람이다. 평소에 행실이 성실하고 꾸밈이 없어 정토를 독실하게 믿어 열 번 염불(十念)하는 것을 거스르지 않았고 『금강경』을 독송하였다. 70세가 넘어도 정신은 또렷(矍鑠)311)하였다. 강희 무신년(1668년) 7월에 문득 병세를 드러내었다. 8월 13일에 승속의 친구들이 모두 병문안을 하러 왔다. 말하기를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感蒙垂顧).312) 꼭 염불하여 나의 왕생을 도와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손으로는 혼자서 염주를 돌리고 있었고 조금도 힘들어하는 표정이 없었다. 잠깐 있다가 “내일 아침 떠납니다.”라고 하였다. 약속한 날이 되어 염불하고 입적하였다.313)
太淸翟夢鯉。法名淨震。臨江人。素行
誠樸。篤信淨土。七十念無違。兼誦金
剛。年踰古希。精神矍鑠。康熈戊申七
月。忽示疾。至八月十三日。緇素親友
皆來探視。乃謂衆曰。感蒙垂顧。須念
佛助。我徃生。手自輪珠。毫無倦意。頃
云明早去矣。届期念佛而逝。

 40. 청清 심양소沈養素의 법명은 지은智恩으로 임강臨江 사람이다. 오로지 정업淨業을 닦아 더울 때나 추울 때에도 쉬지 않았다. 76세가 되어도 험한 곳을 평지처럼 지나다녔다. 항상 부처님 명호를 불렀으며 『금강경』을 독송하였고 일찍이 『법화경』 30여 부를 펴냈다. 강희 무신년(1668년) 8월 작은 병환이 있어 말하기를 “내 마땅히 적몽리翟夢鯉를 뒤따라가리라.” 하고, 아들에게는 “9월 15일에 돌아간다.”고 하였다.
太淸沈養素。法名智恩。臨江人。耑脩
淨業。寒暑靡間。年登七十六。涉險如
夷。時稱佛號。誦金剛。嘗展法華三十
餘部。康熙戊申八月。偶抱小恙曰。我
當追蹤翟夢鯉也。謂子曰。九月十五
我歸去矣。

아들이 “15일은 길일이 아니니 16일이 좋겠습니다.”라 하자 성난 목소리로 “차라리 앞으로 당길지언정 뒤로 물리지 말라.” 하였다. 14일이 되자 염불하며 입적하였는데 몸에서 신이한 향내가 나 며칠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적몽리와 함께 한 마을에서 수행(熏修)314)하였는데, 이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가서 가고 머무름을 자유롭게 하였으니, 이와 같은 사람들은 참 보기 드문 경우라 할 것이다.315)
子云十五欠利。十六好。厲
聲曰。寧可上前。莫使退後。至十四日
念佛而逝。身有異香。數日不散。此與
翟公。同里熏脩。今乃前後接踵。去留
自由。若此之流。甚爲希有也。

41. 청清 대동자戴童子의 이름은 공렬公烈이며 휴읍休邑 사람이다. 당서塘棲 진수鎮水의 북쪽 변방에 옮겨 살았다. 유학자의 집에서 태어났으나 두 살 때 모친을 잃었다. 어린 시절 놀 때에도 예법을 어기지 않았다. 열두 살에 과거공부(擧子業)316)를 시작하여 빼어나게 두각을 나타냈고, 13세에는 더욱 영민하여 하는 행동이 어른 같았다.
그러나 타고난 체질이 맑고 약해서 홍역을 치료하다 그만 위가 상하고 말았다. 오문吳門에게 치료 받으러 갔는데 머물던 곳에 연지 대사의 『죽창수필竹窗隨筆』 몇 종種이 있어 매번 그 책을 가져다가 여러 번 자세히 읽었는데 마치 마음에 부합하는 바가 있는 것 같았다.
太淸戴童子。名公烈。休邑人。流寓塘
棲鎭水北界。生自儒門。週齡失母。爲
兒戱時。不踰禮法。年十二。始習擧子
業。英英露頴。十三益聦敏。動止類成
人。然賦質淸弱。因醫㿀疹。致傷胃氣。
乃就醫吳門。寓所有蓮池大師竹窓隨
筆數種。每取其書。反覆細閱。若有會
心。

7월 6일 홀연히 단정히 앉아 할아버지에게 이르기를 “저를 도와 염불해 주세요.”라고 하고 마침내 낭랑하게 부처님 명호를 소리 내어 불렀다. 할아버지도 이를 따라 했다. 처음엔 소리가 높았으나 점점 소리가 낮아져 마침내는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입술은 움직였는데 조금 후에는 입술도 움직이지 않았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때는 강희康熙 계축년(1673년)이었다.317)
七月初六。忽端坐。謂其祖曰。助我
念佛。遂朗稱佛號。其祖和之始則聲高
漸至聲低。終乃無聲。尙見唇動。頃之
唇亦不動。兀然而化。時康熙癸丑歲也。
須臾緩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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