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보서 3


정토과험
淨土果驗

스님이 왕생한 이야기1~46
沙門徃生類

 1.97) 진晉 혜영慧永은 하내河內 사람으로 12세에 출가하여 원공遠公98)과 함께 안安 법사에 의지하였다. 태원太元 초에 여산에 주석하였는데, 자사刺史 도범陶範이 집을 희사하여 서림사西林寺99)로 삼고 거처하며 속세에 뜻을 끊고 안양에 마음을 두었다. 후에 병을 보이고서 문득 옷을 여미고 신을 신으며 일어서려 하자 대중들이 놀라 그 이유를 물었다. 혜영은 “부처님께서 나를 맞이하러 오시기 때문이네.”라 하며 말을 마치고 입적하였다. 당 현종이 각적覺寂 대사라는 시호를 내렸다.100)
晋慧永。河內人。十二出家。旣而與遠公
同依安法師。太元初駐錫廬山。刺史陶
範。捨宅爲西林以居之。絕志塵囂。標
心安養。後示疾。忽歛衣求屣欲起。衆
驚問。荅曰佛來迎我。言訖而化。唐玄
宗。追謚覺寂大師。

晋遠法師。倡修淨土。嗣後徃生者。不一而足。至於叔季。世愈下
而徃愈寡。上代之徃生者。人或稔聞熟知故。十取二三。自宋以下。人皆寡聽故。十取其九云

 2. 송宋 담감曇鑒은 평소에 작은 선업을 행할 때마다 서방에 회향하며 부처님 뵙기를 서원하였다. 하루는 삼매 중에 아미타불을 뵈었는데 부처님이 담감의 낯에 물을 뿌리며 말하기를 “너의 번뇌(塵垢)를 털어내고 마음(心念)과 몸과 입(身口)의 업을 씻어 모두 엄정하고 정결케 하노라.” 하고 나서 병 속의 연꽃을 꺼내어 그에게 주었다.
宋曇鍳。平生片善。廻向西方。誓願見
佛。一日定中。見阿彌陀佛。水洒其面曰
滌汝塵垢。浴汝心念。及汝身口。皆悉
嚴淨。又于缾中出蓮花。授之。

선정에서 일어나 절의 스님들과 작별을 고하고 밤이 깊도록 홀로 행랑을 걸으며 염불하였다. 오경이 되자 염불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다음 날 제자가 평소처럼 문안드리러 와서 보니 이미 가부좌한 채 입적한 뒤였다.101)
定起。乃與寺僧叙別。夜深獨步廊下念佛。至五
鼓。其聲彌厲。及明弟子依常問訊。趺
坐已逝矣。

 3. 제齊 승유僧柔는 방등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을 배웠으나 정업淨業만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 입적하던 날 1천 좌의 응화불應化佛102)을 뵈었고, 방 안팎에서 모두 신이한 향기가 났다. 이에 서쪽을 향하여 예경하고 입적하였다.103)
齊僧柔。學方等諸經。惟以淨業爲懷。卒
之日。見化佛千數。室內外。俱聞異香。
向西敬禮而化。

 4. 수隋 법희法喜는 평소에 방등참법方等懺法104)을 행하였다. 어느 날 꿩 한 마리가 법희의 목숨을 빼앗으려 하자(索命) 어떤 신인神人이 꾸짖어 말하기를 “법사께서는 마땅히 정토에 왕생할 분인데, 어찌 너의 목숨을 대신하겠는가?”라고 하였다. 후에 병이 들어 발원하기를 “한평생 행한 업을 서방에 회향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여 불보살이 맞이하러 오는 것을 뵙고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105)
隋法喜。常行方等懴法。忽一雉索命。有
神人呵曰。法師當徃生淨土。豈償汝命
後病中發願。以一生行業。廻向西方
至心念佛。見佛菩薩來迎。端坐而化。

 5. 수隋 도유道喻는 아미타불을 염念하여 밤낮 그치지 않았다. 그가 불상을 만들었는데 겨우 세 마디에 지나지 않았다. 후에 선정에 들었을 때 부처님께서 물었다. “그대가 만든 나의 상은 왜 그리 작은가?” 대답하였다. “마음이 크면 불상도 크고, 마음이 작으면 불상도 작습니다.” 말을 마치고 부처님 몸을 보니 허공에 가득 차 있었다.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어서 깨끗이 씻어 청정하게 하라. 내일 새벽에 그대를 맞이하러 가겠다.”라고 하였다. 때가 되자 과연 부처님께서 오셔서 광명이 방에 가득하였다. 마침내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106)
隋道喩。念阿彌陀佛。日夜不廢。造像
僅三寸。後于㝎中。見佛謂曰。汝造我
像何小。喩曰心大即大。心小即小。言
訖。見像身。遍滿虛空。告曰汝當澡浴
淸淨。明晨我來迎汝。至時果見佛來
光明滿室。遂坐而化。

 6. 수隋 문주汶州 땅에 두 사미가 있어 염불에 뜻을 함께 하였다. 큰 사미가 갑자기 죽어 정토에 이르렀다. 부처님을 뵙고 말씀드리기를 “함께 정토업을 닦던 동생 사미가 있습니다. 함께 왕생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가 그대에게 권하였기 때문에 그대가 비로소 발심하였으니 돌아가서 더욱 정업에 힘쓰도록 하라. 3년 후에 마땅히 함께 이곳에 올 것이다.”라고 하였다. 기약한 날이 되어 두 사람은 함께 부처님께서 맞이하러 오시는 것을 뵈었다. 그때 대지가 진동했고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 둘은 같은 시간에 입적하였다.107)
隋汶州二沙彌。同志念佛。長者忽亡至
淨土。見佛白言。有小沙彌同修。可得
生否。佛言由彼勸汝。汝方發心。汝今
可歸。益勤淨業。三年之後。當同來此
至期。二人俱見佛來。地震雨華。一時
同化。

 7. 당唐 선주善胄는 무덕武德 3년(620년)에 병이 깊어져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생을 바르게 믿었으니 정토에 틀림없이 날 것을 믿는다.”라고 하였다. 곧 방을 청결하게 하고 향을 피워 엄정하게 기다렸다. 병이 오래되어 누워 있다가(委臥) 갑자기 일어나 합장하며 시자에게 말하기를 “세존께서 앉으실 자리를 마련하라.” 하였고, 또 스스로 참회의 말을 하였다. 잠시 후 “세존께서 떠나신다.”고 하며 몸을 낮춰 보내는 것처럼 하였다. 그리고 다시 누워 “방금 전에 아미타불께서 오셨는데 너희들도 보았느냐? 머지않아 나는 마땅히 떠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금 후에 입적하였다.108)
唐善胄。武德三年。病草。謂門人曰。吾
一生正信。不慮淨土不生。即令拂拭房
宇。燒香嚴待。病久委臥。忽起合掌。語
侍人曰。安置世尊令坐。又自陳懺悔。
良久曰。世尊去矣。低身似送。因臥曰
向者阿彌陀佛來。汝等還見否。不久
吾當去耳。少頃而逝。

 8. 당唐 유안惟岸은 병주并州 사람으로 오로지 십육관十六觀법을 닦았다. 이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공중에 출현하여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유안은 정례頂禮하며 눈물을 빗물처럼 흘리며 탄식하기를 “요행히 육안으로 성인의 얼굴(聖容)을 뵈었으나 후세에 전할 길이 없음이 한스럽다.”라고 하였다. 홀연히 화공畵工이라 자칭하는 두 사람이 나타나 순식간에 성인의 형상을 다 그리고 마친 뒤에 사라졌다.
唐惟岸。并州人。專修十六觀。因出見
觀音勢至二菩薩。現于空中。良久不滅。
岸頂禮雨淚而嘆曰。幸以肉眼。得見聖
容。所恨後世無傳。忽有二人。自稱畫
工。未展臂間。聖相克就。已而人亦不
見。

제자가 이상하게 생각하여 이에 대해 여쭈었다. 유안이 말하였다.
“이분들이 어찌 화공이겠느냐. 나는 지금 왕생하노라. 누가 함께 가겠느냐?”
작은 동자가 말하였다.
“스님을 따라 왕생하고 싶습니다.”
유안이 말하였다.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말씀드려라.”
弟子怪問之。岸曰此豈畫工哉。又
曰吾今徃生。誰偕行者。小童云。願從
師徃。岸曰可歸告父母。

그 부모는 이를 듣고서 비웃으며 아이를 꾸짖었다. 동자는 절로 돌아와 향탕香湯에 목욕하여 아미타불상 앞에 결가부좌한 채 세상을 떠났다. 유안은 등을 어루만지며 “어린아이가 어찌 먼저 가노?”라고 한 후 분향하고 보살 그림 앞에서 게송을 썼다.
父母聞而笑罵之。童乃歸寺。香湯沐浴。于彌陀像前。
趺坐而化。岸撫其背曰。小子何乃先去
遂焚香。向所畫菩薩前。書偈云。

觀音助遠接。勢至輔遙迎。寶缾冠上顯。化
佛頂前明。俱遊十方刹。持華候九生。
願以慈悲手。提奬共西行。

觀音助遠接    관세음보살은 미타님 도와 멀리 오셔서 접인하고
勢至輔遙迎    대세지보살은 미타님 도와 멀리 오셔서 영접하네.
寶瓶冠上顯    보배로 수놓은 병109)은 관冠 위에 드러나고
化佛頂前明    화현하신 부처님110)은 머리맡에 빛나네.
俱遊十方剎    모두 시방의 국토에 노닐며
持華候九生    꽃 들고 구생九生111)을 구제하시네.
願以慈悲手    바라옵나니 자비로운 손길로
提獎共西行    서방으로 함께 가자 이끌어 주시길.

드디어 제자들에게 조성염불助聲念佛112)을 하도록 하였고, 눈을 들어 서쪽을 보며 입적하였다.113)
遂令弟子 助聲念佛。仰目西顧而亡。

 9. 당唐 대행大行은 보현참법普賢懺法을 닦았는데 3년 만에 보현보살이 현신하는 것을 감득感得하였다. 늦은 나이에 대장각大藏閣에 들어가 서원을 말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골라 『아미타경』을 얻었다.
唐大行。修普賢懺法。三年感大士現身。
晩歲入大藏陳願。隨手取卷。得彌陀經。

밤낮 외우고 읊기를 21일 동안 하여 유리지琉璃地 위에 계신 부처님과 두 보살의 현신을 보았다. 희종 황제僖宗皇帝가 그 이야기를 듣고 궁궐에 들어오라 하여 상정진보살常精進菩薩이라는 호를 내렸다. 1년 후 유리지琉璃地가 다시 나타났고 그날 바로 입적하니 이채로운 향기가 열흘 넘게 났고 육신은 썩지 않았다.114)
晝夜誦咏。至三七日。覩琉璃地上。佛
及二大士現身。僖宗聞其事。詔入內
賜號常精進菩薩。後一年。琉璃地復現
即日而終。異香經旬。肉身不壞。

 10. 송宋 오은晤恩은 13세에 『미타경』 외우는 소리를 듣고 출가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 하루 한 끼만 먹고 옷과 발우를 항상 지니고 있었으며 재물 보화를 쌓아 두지 않았다. 누울 땐 반드시 오른쪽으로 누웠으며 앉을 때는 반드시 결가부좌하였다. 언제나 사람들에게 서방의 정토업을 닦을 것을 가르쳤다. 옹희雍熙 2년(985년) 8월 초하룻날 밤에 밝은 빛이 우물에서 나왔다. 문인들에게 “나는 장차 떠나련다.” 하고 곡기를 끊은 채 말을 하지 않았다. 일심으로 염불하여 25일에 이르러 설법을 마치고 자리에 앉아 입적하였다. 사람들이 요령과 목탁 소리가 공중에서 낭랑하게 울리는 것을 들었다.115)
宋晤恩。年十三聞誦彌陀經。遂求出家。
終日一食。不離衣鉢。不畜財寶。臥必
右脅。坐必跏趺。徧誨人以西方淨業。
雍熙二年八月朔日。夜覩白光。自井而
出。謂門人曰。吾將逝矣。絶粒禁言。一
心念佛。至二十五日。說法畢。端坐而
化。人聞鈴鐸之音。嘹喨空中。

 11. 송宋 본여本如는 호가 신조神照로서 동산東山 승천사承天寺에 주석하면서 군수 장순張郇과 결사를 결성하였다. 하루는 법석에 올라 설법할 때 대중들과 결별을 고한 뒤 물러나 앉아서 입적하였다. 이때 강가의 어부가 구름 끝으로 한 스님이 서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이듬해 탑을 열었는데 얼굴과 모습이 살아 있는 것 같았고 연꽃이 탑 앞에서 솟아났다.116)
宋本如。號神照。住東山承天寺。與郡
守張郇結社。一日升座說法。與衆訣別。
退而坐逝。時江上漁人見雲端。有僧西
去。明年啓塔。顏䫉如生。蓮生塔前。

 12. 송宋 기 법사基法師는 보운寶雲 스님에게 배웠으며 염불에 정성을 다하였다. 하루는 몸이 편찮았는데 제자를 위해 설법하던 중 대중들이 문득 서방에 빛이 나는 것을 보았고 공중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었다. 대사가 말씀하기를 아미타 부처님과 두 보살께서 모두 오셨다 하였고, 곧 오른쪽 옆구리를 서쪽을 향하여 돌아가셨다. 문인들 중에는 꿈에 아미타 부처님께서 수기하여 초세여래超世如來로 삼는 것을 본 사람도 있었고, 또 꿈에 대사께서 청연화대靑蓮花臺에 앉아 있는 것을 본 사람도 있었다.117)
宋基法師。學于寶雲。精意念佛。一日
示疾。爲弟子說法。衆忽見西方現光
空中奏樂。師曰阿彌陀佛。與二大士俱
至。即右脇向西而化。門人夢阿彌陀佛
授記爲超世如來。又夢師坐靑蓮華臺
上。

 13. 송宋 약우若愚는 운천雲川 선담仙潭에 살았다. 무량수불각을 세우고 승속을 막론하고 염불을 권장하기를 30년이나 하였다. 도잠道潛과 칙장則章 두 대사를 벗으로 사귀었는데 도잠은 시에 능하여 이름이 났다. 약우는 칙장과 함께 오직 진실한 수행(實行)에 힘썼다.
宋若愚。居雲川仚潭。建無量壽佛閣。
勸道俗念佛。精勤三十年。與道潜則章
二師爲友。潜能詩近名。愚與章。惟務

입적할 때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말하기를 “너의 동학 칙장이 보현행원普賢行願 삼매를 얻어 이미 정토에 나서 바로 자네를 기다리고 있다.”라고 하였다. 약우는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대중에게 『관무량수경』을 외우도록 하였고, 단정히 앉아 말없이 있다가 갑자기 “정토가 눈앞에 펼쳐지니 나는 지금 가야겠다.”라고 하였다. 게를 쓰고 입적하였는데 게는 이렇다.
實行。將順世。夢神人告曰。汝同學則
章。得普賢行願三昧。已生淨土。彼正
待汝。愚沐浴更衣。命衆諷觀經。端坐
默然。忽云淨土現前。吾當行矣。書偈
而化。

偈曰空裡千華羅網。夢中七寶蓮
池。踏得西方路穩。更無一點狐疑。

空裏千華羅網   허공 속엔 천 송이 꽃 비단 그물 있고
夢中七寶蓮池   꿈속에선 칠보로 된 연못 보았네.
踏得西方路穩   밟아 나가면 서방의 길 평탄해지리니
更無一點狐疑   다시 한 점의 의심도 하지 말기를.118)

 14. 송宋 수진守眞은 영흥永興 사람으로 『기신론起信論』 법계관法界觀을 강의하였다. 항상 한밤중에 무량수불왕생비밀인無量壽佛往生秘密印을 맺고 서방에 생각을 집중하였다. 어느 날 저녁 하늘이 밝아지더니 스스로 몸이 정토에 오르는 것을 깨닫고 눈을 들어 부처님을 보았다. 이에 부처님 앞에 엎드려 말하기를 “48대원으로 능히 나를 제도하실 분이시여!”라고 하였다. 이에 향과 꽃을 잡고 전殿에 들어가 공양하였는데 앉자마자 입적하였다.119)
宋守眞。永興人。講起信論法界觀。常於
中夜。結無量壽佛徃生秘密印。繋念西
方。一夕天曉。自覺身登淨土。擧目見
佛。因伏像前。忽曰四十八願。能度我
者。乃持香華。入殿供養。就坐而化。

 15. 송宋 유엄有嚴은 숭선사崇善寺에 주석하신 분으로 신조神照 대사에 의지하여 천태교天台教를 배웠다. 만년에 명자나무 아래 띠집을 얽어 호를 사암樝菴이라 했다. 평소에 독실하게 정토를 닦아 「안양 고향을 그리는 시懷安養故鄉詩」를 남겼고 당시에 널리 전해졌다. 임종할 때 보배 연못의 큰 연꽃과, 하늘 음악을 네 줄로 서서 연주하는 것을 보고 「정토에 돌아가며 전별하는 시餞歸淨土詩」를 지어 대중에게 보였다. 7일 뒤에 결가부좌한 채 열반하였다. 탑 위에 달같이 환한 빛이 나타나 사흘 뒤에야 사라졌다.120)
宋有嚴。住崇善寺。依神照。學天台敎
晩年結茆樝木之下。號曰樝菴。平生篤
修淨土。有懷安養故鄕詩。爲時所傳
將終。見寶池大蓮華。天樂四列。乃作
餞歸淨土詩示衆。後七日跏趺而化。塔
上有光如月。三夕方隱。

 16. 송宋 사찬師贊은 옹주雍州 사람으로 어린 나이에 스님이 되었다. 14세에 염불을 그치지 않았는데 병이 들어 갑자기 죽었다. 조금 후에 다시 소생하여 스승과 부모에게 말씀드리기를 “아미타 부처님이 여기에 오셔서 저는 따라가려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웃 사람들이 공중에 보배 장식의 좌대와 오색의 이채로운 빛이 서쪽을 향하여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121)
宋師賛。雍州人。爲僧童年。十四念佛
不絶。忽遇疾暴亡。俄而復甦。謂師及
父母曰。阿彌陀佛來此。兒當隨行。隣
人見空中寶臺。五色異光。向西而沒。

 17. 송宋 지례知禮의 호는 법지法智이다. 『묘종초妙宗鈔』라는 책을 저술하여 관심觀心과 관불觀佛의 요지를 크게 현창하였다. 매해 2월 보름에 염불시계회念佛施戒會를 열었는데 항상 만 명이 넘었다. 후에 새해 첫날에는 광명참光明懺을 열었는데 5일에 이르러 대중 설법 중에 부처님 명호를 수백 번이나 한꺼번에 소리 내어 부르다 갑자기 입적하였다. 청헌공淸獻公 조변趙抃이 그 탑에 명銘을 썼다.122)
宋知禮。號法智。述妙宗鈔。大彰觀心
觀佛之旨。每歲二月望日。建念佛施戒
會。動逾萬人。後於歲旦。建光明懺。至
五日。召大衆說法。驟稱佛號數百聲。
奄然坐逝。淸獻公趙抃。銘其塔。

 18. 송宋 지렴智廉은 화도사化度寺에 주석하였다. 젊었을 때는 종문宗門123)을 참구하다가 만년에는 오로지 서방정토에만 뜻을 두었다. 경원慶元 연간(1195~1200년)에 대중과 작별하며 말하였다. “꿈에 아미타 부처님이 대중 가운데 설법하시는 것을 보았는데, 부처님 말씀하시기를 ‘여러 선인들이여, 마땅히 정토업 닦는 데 전념하여 나의 국토에 왕생토록 하라’고 하셨다. 나는 아미타불의 빼어난 모습을 보았으니 왕생은 틀림없을 것이다.”라 하면서 게를 썼다.

雁過長空     기러기 너른 창공 지나갈 때
影沉寒水     그림자 늦가을 강물에 빠져드누나.
無滅無生     소멸도 없고 태어남도 없으리
蓮華國裏     연화국 안에서는.

게를 다 쓴 후 서쪽으로 몸을 돌려 수인手印을 맺고 입적하였다.124)
宋智廉。居化度寺。初叅宗門。晩節一
意西方。慶元中別衆曰。我夢中見阿彌
陀佛。大衆圍遶說法。佛云諸善人等
當須專心淨業。來生我國。我見勝相
徃生必矣。乃書偈曰。鴈過長空。影沉
寒水。無滅無生。蓮華國裡。書畢回身
向西。結印而逝。

 19. 송宋 처겸處謙은 정토를 정성으로 닦은 분이다. 어느 날 저녁에 『미타경』을 다 외우고 정토를 찬미하며 대중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무생법인無生法印으로써 정토에 왕생한다.” 하고는 선정에 들어간 듯이 홀연히 입적하였다.125)
宋處謙。精修淨土。一夕誦彌陀經畢
稱讃淨土。告衆曰。吾以無生而生淨土
如入禪定。奄然而化。

 20. 송宋 회의懷義는 온주溫州 악청樂淸 사람이다. 아버지는 어부였다. 어렸을 때 뱃고물에 앉아 아버지가 고기를 잡으면 몰래 물속에 던져 살려 주었다. 아버지가 화를 내고 회초리를 때려도 후회하지 않았고 결국엔 부모를 하직하고 출가하였다. 천성天聖 연간(1022~1031년)에 경전시험을 보아 도첩度牒을 얻었고 취봉翠峰 선사에게 법을 전해 받았다. 모두 다섯 번 도량에 머무르며 오직 대중에게 염불을 권하여 『권수정토설勸修淨土說』을 남겼다. 입적하던 날 저녁에 지재智才라는 문도가 “탑 쌓는 것은 이미 마쳤습니다. 어떤 것이 필경의 일입니까?”라고 물었다. 대사는 주먹을 세워 보이고 베개를 밀치고 입적하였다.126)
宋懷義。溫州樂淸人。父業漁。義穉時。
坐船尾。隨父得魚。私投水中。父怒。受
撻無悔。遂辭親出家。天聖中。試經得
度。禀法于翠峰。凡五住道場。唯化衆
念佛。有勸修淨土說。示寂之夕。其徒
智才。問壘塔已畢。如何是畢竟事。師
竪拳示之。推枕而逝。

 21. 송宋 원조 율사元照律師는 영지사靈芝寺에 주석한 분으로 율학律學을 널리 폈고 정토업에 돈독한 뜻을 두어 염불을 그치지 않았다. 하루는 제자에게 『관무량수경』과 「보현행원품」을 외우라고 한 후에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서호의 어부들이 모두 공중에서 풍악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127)
宋元照律師。住靈芝。弘律學。篤意淨
業。念佛不輟。一日令弟子。諷觀經及
普賢行願品。趺坐而化。西湖漁人。皆
聞空中樂聲。

 22. 송宋 희담晞湛은 산음山陰 사람이다. 어려서는 유생儒生이었는데 홀연히 세상에 싫증을 내어 출가하였다. 형행瑩行 사람과 함께 완두阮杜에 무량수불전을 짓고 오로지 정토업을 닦았다. 앉을 때에는 서쪽을 등지는 일이 없었고, 관불삼매를 오래도록 하여 항상 부처님과 두 보살의 상호를 보았다. 어느 날 저녁 서쪽을 향하여 염불하고 입적하였다.128)
宋睎湛。山陰人。少爲儒生。忽厭世出
家。與瑩行人。建無量壽佛殿于阮杜。
專修淨業。坐不背西。久之常見佛及二
菩薩相。一夕面西。念佛而化。

 23. 송宋 승장僧藏은 분주汾州 사람으로 일생 동안 승속 간에 예법에 따른 인사를 받지 않고 오로지 정토업만 닦았다. 임종할 때 하늘 음악이 울려 퍼지면서 보살들이 차례로 내려와 맞이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서방 부처님이 이르러서야 대중과 작별하고 입적하였다.129)
宋僧藏。汾州人。一生不受道俗禮拜。
專修淨土。將終。天樂。次苐來迎。皆不
赴。及西方佛至。別衆而化。

 24. 송宋 지원智圓은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서 주석하였다. 여러 경전에 널리 능통하였으나 정토를 마음에 새겨 『미타소彌陀疏』와 『서자초西資鈔』를 지었고 이를 통해 왕생하는 마음을 일으키도록 권하였다. 임종할 때 무덤에 도기陶器를 묻었는데 15년 뒤 장맛비에 산이 무너졌다. 도기를 열어 보니 용모가 옛 모습 그대로였고 손톱과 터럭이 길게 자라 있었다.130)
宋智圓。居西湖孤山。廣解諸經。刻心
淨土。造彌陀䟽及西資鈔。勸發徃生。
將終。以陶哭合瘞。後十五年。積雨山
頽。啓視陶哭。形質儼然。爪髮俱長。

 25. 송宋 사정思淨은 성은 유喻씨이고 자호는 정토자淨土子다. 일찍이 영 법사瑛法師를 시봉하였으며 『법화경』을 강의하였다. 후에는 염불에만 오롯이 마음을 두었다. 틈만 나면 불상을 그렸는데 그림을 그릴 때면 반드시 깨끗한 방에서 삼매에 들어가 미타의 광명을 뵙고서야 그리기 시작하였다. 소흥紹興 정사년(1137년)에 7일을 단정히 앉아 있다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염불하고 입적하였다.131)
宋思淨。喩姓。自號淨土子。早侍瑛法
師。講法華。後專心念佛。暇則畫佛像
凡畫。必于淨室寂想。見佛光時。乃下
筆。紹興丁巳。端坐七日。一心念佛而
化。

 26. 송宋 태미太微는 전당錢塘의 안 법사安法師를 따라 출가한 분이다. 처음에 『미타경』을 전수받았는데 외우기를 잘했다. 구족계를 받고서는 문을 닫고 틀어박혀 부지런히 염불에 정진하였다. 항상 뒷산 산보하기를 즐겼는데 홀연히 들려오는 피리소리를 듣고 시원하게 깨우쳤다. 이때부터 그는 피리 하나를 지니고 다니며 스스로 즐겨 하였다.
宋太微。投錢塘安法師出家。初授彌陀
經。便能背誦。及受具。扃門念佛。精進
不怠。常縱步後山。忽聞笛聲。豁然開
悟。因畜一笛。自娛。

능감부凌監簿라는 이가 정토업에 뜻을 같이하였는데 그는 태미를 정토향의 어른이라 불렀다. 하루는 문을 두드리며 “정토향의 아우가 형님을 뵙고 싶습니다.”라고 하자 태미는 “내일 정토에서 만나려면 지금은 열심히 염불을 해야 한다.”라고 대답하였다.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이 대사가 미음을 먹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가서 보니 피리와 발우와 의자를 불사르고 땅바닥에 가부좌한 채 열반해 있었다.132)
有凌監簿者。同志淨業。稱微爲淨土鄕長。一日叩門曰
淨土鄕弟相見。微曰明當相見于淨土。
今誦佛正冗耳。翌朝人怪其不赴粥。徃
視之。見笛鉢禪椅已焚。跏趺地上而化。

 27. 송宋 형가瑩珂는 삽천霅川 요산瑤山에게 수업한 분이다. 술과 고기를 가리지 않고 먹었는데 문득 계율을 지키지 않아 윤회 유전할까 두려워하여 계주 선사戒珠禪師가 펴낸 『왕생전往生傳』을 읽었다. 『왕생전』 한 편을 읽으면 머리를 한 번 끄덕였다.
宋瑩珂。受業霅川瑤山。酒炙無擇。忽
自念梵行虧缺。恐從流轉。取戒珠禪師
徃生傳讀之。讀一傳。一首肯。

방안에서 서쪽을 향해 참선하는 의자에 앉아 음식을 끊고 염불하였다. 사흘째가 되자 꿈에 부처님이 말하기를 “너는 10년을 더 살 것이니 마땅히 스스로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형가는 말하기를 “더 일찍 안양 땅에 나서 여러 성인들을 받들어 모시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의 뜻이 이와 같으니 사흘 후에 너를 맞이하겠노라.”고 하였다. 기약한 날에 이르러 곧 말하기를 “부처님이 오셨다.”라고 하고 조용히 입적하였다.133)
室中面西。設禪椅。絶食念佛。越三日。夢佛告
曰。汝尙壽十年。且當自勉。珂曰願早
生安養。奉事衆聖。佛言汝志如是。後
三日迎汝。至期乃曰。佛來。寂然而化。

 28. 원元 선주善住의 자는 운옥雲屋으로 소주蘇州 사람이다. 하루 종일 문을 잠그고 염불하였다. 오랜 병에도 이를 바꾸지 않아 임종할 때 이채로운 향기가 방에 가득하였다. 『안양전安養傳』과 『곡향집谷響集』이 세상에 전한다.134)
元善住。字雲屋。蘇州人。掩關六時念
佛。病久不易。終時。異香滿室。有安養
傳。谷響集。行世云。

 29. 원元 묘문妙文은 아홉 살에 출가하였다. 30세에 처음으로 세상에 나가 자유자재로 설법함에 걸림이 없었으니 마치 산골짜기 물이 거꾸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후에 오로지 염불삼매를 닦아 임종 시에는 때가 이르렀음을 미리 알고 여러 제자들에게 아미타불을 소리 높여 부르도록 하고서 서쪽을 향하여 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135)
元妙文。九歲出家。三十始出世。縱無
礙辯。若峽倒川奔。後專修念佛三昧。
臨預知時至。命諸弟子。高稱阿彌陀
佛。面西趺坐而蛻。

 30. 원元 반곡盤谷은 용모는 볼품이 없었으나 뜻과 기상이 활달하고 호방하였다. 산수를 좋아하여 항상 말하기를 “나의 발자취는 세상의 반을 밟을 것이요, 시의 명성은 세상에 가득하리라.”고 하였다. 당시에 고려 심왕瀋王136)이 대사의 덕망을 듣고 초빙하여 『화엄경』을 강의하도록 하였다. 모든 승려와 신도들이 진심으로 감복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후에 송군(松郡: 개경)에 이르러 정사精舍를 짓고 정토업에 힘썼다. 염불을 일과로 삼았고 70년을 질병 없이 살다가 떠날 때를 예고하고 단정히 앉아서 입적하였다.137)
元盤谷。狀貌不揚。而志氣超邁。性耽
山水。甞云足跡半天下。詩名滿世間。
時高麗瀋王。聞師德望。聘講華嚴。七
衆傾服。王大悅。後至松郡。搆精舍。勤
修淨業。日倮念佛。年七十無疾。預告
以時。端坐而寂。

 31. 원元 천여 유칙天如惟則은 중봉中峰 화상의 법을 이은 분으로 신묘한 깨달음이 남달랐다. 소성蘇城에 사자림보리정종사師子林菩提正宗寺를 지었는데 와설당臥雪堂과 입설당立雪堂 두 거처가 있어 매일 그곳에서 염불하였다. 『정토혹문淨土或問』을 지어 사람들에게 권장하였는데, 임종할 때 상서로운 감응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138)
元天如惟則。得法中峰。妙悟出人。建
師子林菩提正宗寺于蘇城。有臥雪立
雪二室。日坐其中念佛。又著淨土或問
勸人。終時瑞應非一。

 32. 원元 조휘祖輝는 사명군四明郡 성불각城佛閣에 거주한 분으로 사람들을 만나면
다만 ‘아미타불설역설부득阿彌陀佛說亦說不得’이라 하여 사람들이 호를 ‘설부득說不得 화상’이라 하였다. 은현鄞縣의 위왕尉王 용향用享 부부가 공경으로 대하였다. 하루는 집에 가면서 특별히 말하기를 “내일 떠난다.”고 하였는데 다음 날 정말로 세상을 떠났다.139)
元祖輝。住四明郡城佛閣。逢人俱云
阿彌陀佛。說亦說不得。人因號說不得
和尙。鄞縣尉王用享夫婦。敬事之。一
日詣其家。別云吾明日行矣。及明果化

 33. 명明 초기楚琦는 촉蜀 사람으로 서방극락을 독실하게 믿은 분이다. 연경燕京에 이르러 누각에서 치는 북소리를 듣고 크게 깨우쳤다. 후에 집을 지어 당호를 서재西齋라 하고 정토업淨土業에 전일하게 뜻을 두었다. 일찍이 큰 연꽃이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미타불이 중앙에 계시고 여러 성인들이 둘러싸고 있는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돌아가실 때에 임종게를 써서 대중에게 보이고 입적하였다.140)
明楚琦。蜀人。篤信西方。因抵燕京。聞
樓鼓聲大徹。後築室號西齋。一意淨業
甞見大蓮華。充滿世界。彌陀在中。衆
聖圍繞。將示寂。書偈示衆而逝。

 34. 명明 보주寶珠는 일찍이 항군杭郡 가화嘉禾 근처에서 떠돌이로 지냈다. 더우나 추우나 한 벌 옷으로 지냈으며 걸식으로 살아갔고 일정한 거처가 없었다. 다만 평소에 염불 소리가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 남들이 부를 때 잠깐 응대할 뿐 곧바로 염불 소리를 이어 냈고 다시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하루는 대중에게 알리기를 “나는 가노라.” 하고 삭발과 목욕을 마친 후에 입적하였다.141)
明寶珠。常遊杭郡嘉禾間。冬夏一衲。
乞食自活。宿無恒居。平時惟念佛不絶
口。人喚之。纔應對。即連聲念佛。更無
雜語。一日告衆曰。吾行矣。索浴畢。化
去。

 35. 명明 혜일慧日의 호는 동명東溟이요, 성은 가賈씨다. 송나라 재상 가사도賈似道의 손자이다. 가사도가 귀양 갔을 때 대사는 아직 어렸으나 출가에 뜻을 두었다. 지정至正 연간에 하천축사下天竺寺142)에 화재가 나 중신重臣인 고납린高納麟이 대사에게 중건하도록 청하였다. 홍무 2년(1369년)에 봉천전奉天殿에서 임금을 알현하였는데 붉은 얼굴 흰 눈썹으로 갖추어 말하는 바가 임금의 뜻에 잘 들어맞았다.
明慧日。號東溟。姓賈氏。即宋相似道
之諸孫。似道謫戌時。師尙幼。志求出
家。至正間。下天笁災。元臣高納麟。請
師新之。至洪武二年。上召見奉天殿。
朱顏白眉。備奏稱旨。

태조가 주변의 여러 승려들에게 말하기를 “여러분들은 어찌하여 여러 불경의 깊은 뜻을 백미 법사白眉法師에게 물어보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임금에게 알현할 때에는 백미 대사로 불렸다. 그 후 상축사에 돌아와 날마다 미타참彌陀懺을 닦아 정토업을 지극하게 닦았다. 어느 날 저녁에 푸른 연꽃이 네모난 땅143)에서 피어나는 꿈을 꾸고 깨어서 대중에게 말하기를 “내가 정토에 나는 상서로운 광경을 보았다.”고 하였다. 나흘 후 합장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144)
大祖顧謂衆僧曰
爾等何不質諸經奧義於白眉法師。嗣
後召見。但以白眉呼之。後歸上笁。日
修彌陀懺。以臻淨業。一夕夢靑蓮生方
地中。寤告衆曰。吾生淨土之祥見矣。
後四日。合爪趺坐而化。

 36. 명明 진청眞青은 십구 세에 출가하여 무자無字 화두를 참구하다가 배가 나루에 닿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후에는 화정華頂 천주봉天柱峯으로 옮겨 대·소미타참大小彌陀懺을 닦아 꿈에 서방의 세 성인을 보았다. 만력 계사년(1593년) 정월에 임종을 고하였는데 이때 대중들이 묻기를 “스님은 어느 품에 왕생하시겠습니까?”라고 하자 답하기를 “계율의 향만 쐬었기 때문에(戒香145)所熏) 중품中品에 그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씀을 마치고는 바로 열반하였다.146)
明眞靑。十九出家。叅無字語。聞舟觸
岸聲。有省。後遷華頂天柱峯。修大小
彌陀懺。夢見西方三聖。萬曆癸巳正月
告終。衆曰和尙徃生何品。曰中品中生
也。胡不上品生耶。曰吾戒香所熏。位
止中品。言畢而化。

 37. 명明 조향祖香은 강서江西 신유인新喻人으로 산동山東 용담사龍潭寺에서 정토업을 정성으로 닦았다. 왕걸王傑이라는 거사가 절을 짓고 대사를 초빙하였는데 얼마 있다가는 “몇 월 며칠에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중들이 간곡히 만류하였으나 조향은 “안양의 집으로 돌아갈 뿐이다.”라고 하였다. 기약한 날에 자리를 펴고 서쪽을 향하여 앉은 채 숨을 거두었다. 관을 들고 산에 들어가자 혼불이 저절로 몸을 태웠다.147)
明祖香。江西新喩人。於山東龍潭寺。
精修淨業。有居士王傑。築庵延之。未
幾語傑云。某日當歸家。衆苦留。香云
歸安養家耳。及期敷座西向坐逝。擧龕
入山。化火自焚。

 38. 명明 연지 대사蓮池大師의 휘는 주굉袾宏이고 자는 불혜佛慧이며 항주杭州 심沈씨이다. 약관의 나이에 불법(佛乘)에 뜻을 두어 가정嘉靖 연간 병인년(1566년)에 무문 성천無門性天을 은사로 하여 머리를 깎았다. 얼마 후에 구족계를 받았고 바리때 한 벌과 신발 한 켤레로 선지식들을 두루 찾아다녔다.
明蓮池大師。諱袾宏。字佛慧。杭州沈
氏。弱冠棲心佛乘。嘉靖丙寅。依無門
性天薙染。尋具戒。單瓢隻履。遍歷知
識。

당시에 판융辨融 대사와 소암笑巖 대사가 선종禪宗에서 가장 이름이 났는데 나아가 참구하자 서로 맞아떨어지는 바가 많았다. 북쪽으로는 오대산에 유람하여 문수보살이 방광放光하는 것을 감응하였다. 신미년(1571년)에는 운서산雲棲山의 풍광이 깊고 고요한 것을 보고 띠집을 지어 마칠 때까지 머물렀다. 온 산에 호랑이에게 물려 가는 일이 많았는데 대사가 경을 읽어 시식施食하자 그런 일이 사라졌다. 가뭄이 든 해에는 밭을 돌며 염불하였는데 발길이 닿는 데를 따라서 때마침 비가 내려 적셨다. 이때부터 교화가 널리 퍼졌다.
時辨融笑巖兩禪宗最著。就叅多
所契合。北遊五臺。感文殊放光。辛未
見雲棲山水幽寂。遂結茆終焉。環山多
虎災。師爲諷經施食。虎患以寧。歲旱
循田念佛。隨足所至。時雨添澍。自此
化道大行。

대사는 홀로 염불 정토문을 열었는데, 삼장三藏을 두루 융회하여 일심으로 돌아가도록 지도하였다. 사방의 승속들이 예를 표하여 도를 들으러 왔고, 이름난 벼슬아치들도 마음으로 감복하여 귀의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또한 성 안팎의 모든 산에 방생하는 연못을 만들어 놓았다. 자성태후慈聖太后가 환관을 보내 불법을 묻고 자주색 가사148)와 황금을 하사하였다. 사자가 돌아가자 금은 상주물常住物149)로 보내 버리고 가사는 높은 누각에 모셔 두고는 한 번도 몸에 걸치지 않았다.
師獨闢念佛一門。融會三藏。
指歸一心。四方緇白。頂禮聞道。名公
巨卿。靡不心折歸依。又城內外山中
俱置放生池。慈聖太后。遣中貴詢法
賜紫衣黃金。使者出。金歸常住。衣奉
高閣。未甞掛體。

염불삼매로써 삼근三根150)을 널리 아울렀으며 『미타소초彌陀疏鈔』와 『운서법휘雲棲法彚』 등 20여 종을 남겼다. 임종하기 보름 전에 성에 들어가 친구와 제자들에게 “나는 곧 그곳에 왕생한다.” 하며 작별하였고 산을 돌며 대중들과 마찬가지로 작별을 고하였으나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헤아리지 못하였다. 때가 되자 서쪽을 향하여 염불하였고 단정히 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세상에서는 그를 연종蓮宗의 8대조151)라 부른다.152)
以念佛三昧。普攝三
根。著彌陀䟽鈔。雲棲法彙二十餘種
行世。臨終半月前。入城別故舊弟子等
曰。吾將他徃。還山與衆詬別。亦如之。
衆皆莫測。至期面西念佛。端坐而逝。
世稱蓮宗八祖云。

 39. 명明 불석佛石의 별호는 법우 노인法雨老人이다. 어머니가 한 스님이 가사(伽黎)로 몸을 덮는 태몽을 꾼 후 태어났다. 어릴 때는 생선 비린내 맡기를 싫어하였고 열네 살에 출가하여 열여덟 살에 연지 대사蓮池大師에게 구족계를 받았으며 30세에 금릉에서 자백 선사紫栢禪師를 뵙고 친히 수기授記를 받았다.
대사는 고고(孤卓)한 품성을 지녔으며 세상 인연을 맺지 않았다. 만년에는 손님과 응대하지 않고 이를 피해 무림봉의 정상으로 거처를 옮겨 방 한 칸을 얽고 구덩이를 하나 파고 말하기를 “살았을 제 가히 지낼 만하고 죽을 제 가히 묻을 만하구나.”라 하였다. 오랜 후에 병색을 드러내었다. 제자가 게송을 청하자 대사가 휘둘러 쓰기를,
明佛石。別號法雨老人。母夢僧以伽黎
覆體而生。幼時惡聞腥羶。十四剃染。
十八受具於蓮池大師。三十謁紫栢禪
師於金陵。親承授記。師性孤卓。不事
世緣。晩歲謝客。避居於武林峰頂。搆
一室開一壙曰。吾生可棲。死可葬。旣
久示疾。弟子請留偈。師走筆書曰。

一句彌陀五十年  ‘미타불’ 한 구절로 오십 년을 살았으니
分明掘地討靑天  분명히 땅을 뚫고 하늘을 쳤겠구나.
而今好箇眞消息  지금 이 한 구절 참다운 소식이니
半夜鍾聲到客船  한밤의 종소리 여객선에 이르도다.

하고 붓을 던진 후 입적하였다.153)
一句彌陀五十年。分明掘地討靑天。而今
好箇眞消息。半夜鍾聲到客船。投筆而
逝。

 40. 명 황주黃州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승려가 있었다. 그는 아미타불에 전념하여 밤낮 그치지 않았고 눈으로 보는 것마다 모두 아미타불이라 불렀다. 숭정 연간(1628~1644년)에 황주의 총융總戎인 정鼎이 황주성을 지키는데 대사가 염불하는 소리가 길에 시끄럽게 들리자 그를 붙잡아 두었다. 마침 장헌충張獻忠이 황주를 공격할 때 대사 역시 성 위에 머물러 있다가 야간에 염불하여 자주 시끄럽게 잠을 깨우자 군사들이 매우 싫어하여 묶어서 성 아래로 던져 버렸다. 그러나 조금 후에 다시 성위에서 염불하기를 네 차례나 반복하자 총융이 비로소 예로써 공경하였다.
明黃州。有無名僧。專念阿彌陀佛。晝
夜不撤。隨其所見。皆稱阿彌陀佛。崇
禎間。黃總戎鼎。守郡城。師大聲念佛
衝其道。執之。適張獻忠。攻黃州。師亦
留城上。夜間念佛。且頻呼醒睡。軍士
恨之。縛投城下。未幾復在城上念佛。
如是四次。總戎始敬禮焉。

이때 황주에 큰 기근이 있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사가 성 밖으로 나가자 굶주린 백성들이 칼을 들고 대사의 몸을 희사하기를 요구하였다. 대사는 옷을 벗어 대중에게 보여 주며 말하기를 “내가 염불을 천 번 할 동안 기다린 후에 나를 먹으시오.”라고 하였다. 염불을 3백 번 정도 했을 때 대중들이 갑자기 칼로 베고자 하였다. 이때 불현듯 병마兵馬가 공중에서 내려와 굶주린 사람들이 놀라 흩어졌는데 대사는 이미 성안에 들어와 있었다.
時黃州大飢人相食。師出城外。飢民持刀。乞師捨
身。師解衣示云。俟我念佛千聲。即食
我。念至三百聲。衆急欲加刃。忽有兵
馬。從空中來。飢民驚散。而師已在城
中矣。

산속에 사냥꾼이 큰 호랑이 한 마리를 잡았다. 대사는 이를 사들여 방생하려 하였다. 사냥꾼이 30금을 달라 하였으나 대사는 넉 돈의 금만 가지고 있었다. 사냥꾼이 말하기를 “스님께서 호랑이 귀를 잡고 세 바퀴 돌리되 호랑이가 스님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 호랑이를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사는 마침내 호랑이에게 수기授記를 주고 귀를 잡아 세 번 돌리고 달아나게 하였다. 그러나 호랑이는 대사에게 귀의하여 떠나가지 않아 둘이 함께 황마산黃麻山 금강동金剛洞에 머물렀다.
山中獵人。得一大虎。師募之放
生。獵人索三十金。師止得四金。獵人
云。汝能執虎耳三匝。而不傷汝。則與
汝虎。師遂授記虎。執虎耳三匝。縱之
逸。虎歸依師不去。師與虎。同住黃麻
山金剛洞中。

내상內相154) 노구덕盧九德이 병사들을 감독하러 황주를 지날 때 산에 이르러 호랑이를 보고자 하였다. 대사는 호랑이에게 다만 머리만 밖으로 내보이도록 하였으나, 노구덕이 호랑이 전신을 보려 하자 호랑이는 크게 소리 지르며 뛰쳐나갔다. 노구덕 역시 불법佛法에 귀의하였다.
內相盧九德。督兵過黃州
詣山欲見虎。師令虎。止出頭于外。廬
欲見全身。虎大呌躍出。盧亦歸依焉。

대사가 하루는 거리를 걷던 중에 닭 한 마리를 보고 고성으로 염불하자 닭 역시 그 소리를 따라 염불하였다. 신이하기가 이와 같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경인년(1650년)에155) 대사가 무림武林으로 가다가 길에서 전공錢公을 만났는데 대사에게 수행의 요체를 알려달라고 간청하였다. 대사는 마음을 하나로 모아 아미타불을 외우라고 하며 다시 말하기를 “내가 떠난 후에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각랑覺浪에게 물어보라. 그 사람은 눈이 밝은 사람(明眼人)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염불하고 앉아 입적하였다.156)
師一日行街中。見一鷄。高聲念佛。雞
亦隨聲而念。神異如是非一。唐寅師之
武林。道遇錢公。公懇示修行之要。師
云一心念彌陀。復云我行後。有所疑
問覺浪。此明眼人也。後念佛坐化。

 41. 청淸 구종具宗 스님은 무석無錫 사람이다. 염불삼매로 대중을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았다. 순치順治 기해년(1659년)에 병색을 보이다가 스스로 기약한 시간에 목욕하고 한쪽 신만 신었는데, 이는 외짝 신발로 서쪽으로 돌아가는 뜻(隻履西歸)157)을 은근히 드러낸 것이다. 『미타경』을 다 염송하고 아미타불을 열 번 소리 내어 염불하였으며, 큰 글씨로 ‘공허하고 신령스럽게 텅 비어(廓落靈虛) 갈 곳도 없고 올 곳도 없다(無往來處)’라고 쓴 후 붓을 던지고 입적하였다.158)
太淸釋具宗。無錫人。以念佛三昧。誨
人不倦。順治己亥。示疾約時沐浴。但
著一履。密表隻履歸西之意。誦彌陀經
畢。念阿彌陀佛十聲。擧筆書大字云
廓落靈虗。無徃來處。擲筆而化。

 42. 청淸 신심新心의 휘는 대진大眞이다. 어려서 무림武林 연거암蓮居菴에 출가한 분으로 소각紹覺 대사의 법을 이어 반주삼매般舟三昧159)를 행하였다. 임종할 때에 여러 제자들이 같은 꿈을 꾸었는데 허공에 가득한 천신이 향과 꽃을 들고 말하기를 “신심 대사가 서방에 태어날 것이므로 맞이하러 왔다.”고 하였다. 아침이 되자 제자들이 모여 안부를 물었는데, 몸 건강히 염불하고 있는 대사의 모습이 전과 다름없었다. 사흘이 지난 후 홀연히 앉은 채 입적하였다.160)
太淸新諱大眞。童身出家武林蓮居
庵。受紹覺師之法。行般舟三昧。終時
諸弟子。同夢見滿空天神。執持香華
唱云迎新大師。生西方。及旦。弟子
聚而候之。師身康念佛。相見如常。
過三日。忽坐化。

 43. 청淸 임곡林谷은 소흥紹興 사람으로 나산羅山의 서쪽에 주석하였다. 해진 가사와 미투리 차림으로 남들에게 염불을 권하는 것을 제일 중요한 일로 생각하였다. 임종할 때에 흰 구름 위에 서 계신 부처님이 오셔서 영접하는 것을 뵙고 입적하였다. 그곳 사람들이 그 암자를 고쳐 백운암이라 하였다.161)
太淸林谷。紹興人。住羅山之西界。破
衲麻鞋。唯勸人念佛。爲要務。至終時。
見白雲立佛來迎而化。土人改其菴曰
白雲。

 44. 청淸 도추道樞는 인화仁和 사람으로 언제나 사람들에게 염불을 길잡이(前茅)162)로 삼도록 하였다. 평소에 염불에 용맹 정진하였고 세상 인연에 얽매이지 않았다. 순치順治 을미년(1655년)에 신령한 스님과 함께 옥병봉 정상에 오르는 꿈을 꾸었다. 병신년(1656년) 6월에 병색을 보였다. 26일 아침 대중들에게 말하기를 “지난밤 꿈에 신령한 스님이 나를 맞으러 오셨는데 아마도 옛날 옥병봉에 같이 올라갔던 분이 아닌가 싶다.”라고 하였다. 술시(오후 7~9시)에 홀연 일산이 하늘에 가득하고 연꽃이 땅에 뿌려지는 것을 보고 곧바로 가부좌하고 합장하여 아미타불을 백여 번 염송한 뒤 편안하게(安詳)163) 입적하였다. 관에서 기이한 향기가 났다.164)
太淸道樞。仁和人。每勸人以念佛爲前
矛。平居勇猛念佛。不勤世緣。順治乙
未。夢與神僧。登玉屏峰頂。丙申六月。
示疾。二十六日蚤。語衆曰。夜夢神僧
來迓。豈即昔之登玉屏峯者邪。至戌時。
忽見幡盖盈空。蓮華布地。即趺坐合掌。
念彌陀佛號百餘聲。安詳而逝。龕有異
香。

 45. 청淸 만연萬緣의 속성은 교喬씨로 장흥長興 사람이다. 사람됨이 우둔하여 평소에 꾸짖어도 화를 내지 않고 칭찬해도 기뻐하지 않으며 오직 아미타불 명호만 수십 년간 지송持誦하였다. 강희 2년(1663년) 6월 아픈 기색 없었는데 홀연 스스로 풀로 엮은 감실을 만들었다. 9월 초엿새에 스스로 그곳에 들어가 가부좌하고 입적하였다.165)
太淸萬緣。俗姓喬。長興人。爲人愚鈍。
平日詈之弗嗔。譽之不喜。專持彌陀佛
號數十年。康熈二年六月。無疾。忽自
縛草龕。九月初六日。自入草龕。趺坐
而逝。

 46. 청淸 항군杭郡 장가사張家寺의 본충 선사本冲禪師는 평소에 법석法席166)에만 전념하여 여러 어리석은 중생을 위해 도를 펴신 분이다. 강희康熙 11년(1672년) 9월에 병색을 보이고 말하기를 “나는 죽는다.”라고 하였다. 조금 후에 다시 살아나 대중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평소에 염불 공부를 하지 않아 지금 가보니 앉을 자리가 없었다. 여러분들은 마땅히 나를 도와 염불해 달라.”고 하여 대중들이 합장하여 칭념稱念167)하자 바로 입적하였다.
이를 보면 염불법문은 범속함을 뛰어넘어 성인에 이르는 것으로 그 이익이 범상치가 않으니 절대로 조금이라도 늦추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168)
太淸杭郡張家寺禪師本冲。素專法席。
開道羣蒙。康熈十一年九月。示疾云亡。
有頃復甦。謂大衆曰。我平日缺念佛工
夫。今去無坐位。汝等當助我念佛。衆
爲合掌稱念。逾時而逝。觀此則知念佛
法門。超凡入聖。利益非常。斷斷不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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