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마음 닦고 염불하는 수행의 요령 .. 119 1) 염불은 어떻게 하는가? .. 119 2) 업습의 기운[習氣]을 다스리는 방법 .. 131 3) 마음가짐과 품격 세움[存心立品] .. 157 4) 각 수행 방법에 대한 평가 .. 170 5) 수행인들이여, 힘써 노력하세! .. 185
4. 생사(生死) 해탈을 위한 보리심 .. 192 1) 사람 목숨 덧없음을 경책함 .. 192 2) 오로지 부처님 힘에 의지하길 권함 .. 194 3) 임종이 몹시 중요하고 절실함을 알림 .. 205 4) 임종에 갖추어야 할 지혜로운 배와 노[臨終舟楫] .. 215
5. 수행인의 마음가짐은 오직 정성과 공경! .. 221
6.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 240 1) 인과응보의 사실 .. 240 2) 인과응보의 이치 .. 247 3) 운명을 바꾸려는 노력이 진정한 수행 .. 257 4) 채식은 지계와 수행의 밑바탕 .. 263 5) 재앙의 연유를 아는가? .. 279
7. 염불과 참선은 본디 둘이 아니건만 .. 287 1) 영명(永明) 선사의 사료간(四料簡) .. 287 2) 참선과 염불의 관계 .. 303
9. 재가 수행 정진하여 거사 불교 꽃 피우세 .. 411 1) 유교와 불교의 윤리강상(倫理綱常) .. 411 2) 가정교육은 인생의 기초 .. 415 3) 집에서 불법을 잘 펼치세[處家弘法] .. 427 4) 홍진 속에서 도를 닦세[居塵學道] .. 433 5) 재가 불자를 위한 삼귀의와 오계·십선 .. 439
10. 극락왕생에 요긴한 나침반(경전)들 .. 448
11. 부록 .. 458 1) ‘시야우(柴也愚)’의 뜻을 밝힘 .. 458 2) 유혜욱(兪慧郁)·진혜창(陳慧昶) 거사에 대한 답신 .. 460 3) 우승(愚僧) 거사에 대한 답신 .. 464 4) 소혜원(邵慧圓) 거사에 대한 답신 .. 467 5) 왕심선(王心禪) 거사에 대한 답신 .. 468 6) 양기(楊?)의 등잔은 천추를 밝히고, 보수(寶壽)의 생강은 만고에 맵도다 .. 469 7) 인광(印光) 대사의 간략한 전기 .. 480
『화두 놓고 염불하세』는 그동안 화두선 일변도인 한국불교의 풍토에 염불수행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염불 수행의 요체를 총체적으로 밝힌 뛰어난 염불 법문집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문장을 더 다듬고 번역자의 내용 설명을 더욱 보충하여 독자들에게 새롭게 선보이게 되었다. 『화두 놓고 염불하세』에 실린 한 편 한 편의 글마다, 생사(生死)를 위해 보리심(菩提心: 求道心)을 내고, 믿음과 발원으로 염불하여 서방 극락 정토에 왕생하는 넓고 평탄한 길을 가르쳐 주었다. 아울러 절실하게 실천하여 평범함을 뛰어 넘고 성현의 경지에 들어가는[超凡入聖] 지름길로 닦아가라는 인광 대사의 간곡한 당부가 마음을 울린다.
책 속으로
염불할 때 마음이 하나로 잘 모아지지 않으면, 마땅히 마음을 추스르고[攝心] 생각을 절실하게 하오. 그러면 마음이 저절로 통일될 것이오. 마음을 추스르는 방법은, 지성과 간절보다 더 나은 게 없소. 마음이 지성스럽지 않으면, 추스르려 해도 별 도리가 없소. 지성을 다하는데도 마음이 순수하게 통일되지[純一] 않으면, 귀를 기울여 잘 듣도록 하시오. 소리를 내든 내지 않든, 염불은 모두 모름지기 생각이 마음에서 일어나, 소리가 입으로 나오고, 그 소리가 다시 귀로 들어가야 하오. 묵송의 경우 비록 입을 움직이지는 않지만, 생각의 차원[意地]에서는 이미 그 소리의 모습[相]이 있기 마련이오.
마음과 입으로 또렷또렷하게 염송하고, 귀로 또렷또렷하게 듣는다면, 마음이 오롯이 추슬러지면서, 잡념 망상이 저절로 사라지게 되오. 그런데도 더러 망상의 물결이 용솟음쳐 오르거든, 십념법(十念法)으로 횟수를 세어 보시오. 이렇게 온 마음의 힘을 고스란히 부처님 명호 염송하는 소리 하나에 갖다 바치면, 비록 망상을 일으키고 싶어도 여력이 없을 것이오. 이것이 마음을 추슬러 염불하는 궁극의 미묘 법문이오. - 본문 124쪽에서
염불은 그 자체가 정기(正氣)를 함양하고 정신을 조절하는 방법이자, 본래 진면목을 참구하는 법문이기도 하오. 왜 그렇게 말하겠소? 우리들 마음은 평상시에 어지럽게 흩어지는데, 만약 지성으로 염불을 하면, 일체의 잡념 망상이 모두 점차 사라지게 되오. 그러면 마음이 저절로 집중 통일되고, 정신과 원기가 자연히 충만해지고 조절된다오.
보통 우리는 염불이 잡념 망상을 쓰러뜨리는 줄 잘 모르오. 게다가 염불을 좀 해보면, 마음속에 온갖 잡념 망상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오. 그러나 오래도록 염불을 지속하면, 이러한 잡념 망상이 저절로 없어지게 된다오. 맨 처음 단계에 잡념 망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마음속에 파묻혀 숨어 있던 잡념 망상이 바로 염불하는 힘 때문에 비로소 고개를 쳐드는 거라오. 염불하지 않으면 나타날 리가 없다오. - 본문 135쪽~136쪽에서
예불이나 경전 독송, 주문(진언), 염불 등의 각종 수행은, 모름지기 모두 정성과 공경을 위주로 해야 하오. 경전에서 설한 공덕이 설령 범부 중생의 지위에서 원만히 얻어질 수 없을지라도, 만약 정성과 공경만 지극하다면, 그로 말미암아 얻는 공덕만도 이미 생각하고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크다오.
그러나 정성과 공경이 없다면, 배우가 노래 부르고 연극하는 것과 같을 뿐이오. 배우의 희로애락은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허위와 가식에 속하지 않소? 마찬가지로 정성과 공경이 없으면, 설령 공덕을 쌓더라도 인간과 천상의 바보스런 복덕[人天癡福]에 불과하게 되오. 이 바보스런 복덕은 반드시 악업을 짓는 원인이 되어, 장래 그칠 기약 없는 고통의 씨를 뿌리게 된다오. - 본문 223쪽에서
실행[行]이란 가르침에 따라 진실하게 행동해 나가는 것이오. 『능엄경(楞嚴經)』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염불삼매장(念佛三昧章)에 보면, “육근(六根: 눈·귀·코·혀·몸·뜻)을 모두 추슬러 깨끗한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져 삼매(선정)를 얻으면, 이것이 바로 제일입니다[都攝六根, 淨念相繼, 得三摩地, 斯爲第一.].”라는 말씀이 나온다오. 여기 보면, 염불 법문은 마땅히 육근을 모두 추슬러야 함이 잘 나타나오. 육근을 모두 추스르기 전에, 특히 두세 근만 우선 추스를 필요가 있소. 그 두세 근이란 바로 귀[耳]와 입[口]과 마음[心]을 가리키오.
‘나무 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여섯 글자 한 구절을 매 구절 매 글자마다 입안에서 또렷또렷[明明白白] 염송하면서, 마음속으로도 또렷또렷 염송하고, 그 염송 소리를 귓속에서도 또렷또렷 듣는 것이오. 조금이라도 또렷하지 않은 데가 있다면, 이는 곧 진실하고 간절한 염불이 못 되며, 잡념망상이 비집고 생겨나는 틈을 주게 되오. 단지 입으로 염송만 하고 귀로 듣지 않으면, 잡념 망상이 생기기 쉽다오. 그래서 염불은 매 구절 매 글자마다 또렷하고 분명해야 하며, (의미나 논리를 따지는) 사색을 해서는 안 되오. 그 밖에 간경(看經: 독경) 또한 마찬가지라오. 절대로 경전을 보면서, 다른 한편으로 분별하지 마시오. 분별하면 감정과 생각만 많아질 뿐, 얻는 게 적어지기 때문이오 - 본문 299쪽에서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참선보다는 정토 염불 수행에 전념하는 것이 마땅한 방법이오. 한 티끌도 물들지 아니한 마음 가운데서, 만 가지 공덕을 두루 갖춘 위대하고 거룩한 나무 아미타불의 명호(名號)를 지송(持誦)하는 것이오. 더러 소리 내어 염송하기도 하고, 더러 소리 없이 조용히 암송하기도 하되, 끊어짐이나 잡념 망상이 없도록 하오. 반드시 생각[念]이 마음에서 일어나, 소리가 자기 귀로 들어가면서 한 글자 한 글자가 또렷또렷 살아...
출판사서평
정토종 13대 조사이자 대세지보살로 추앙받는 인광 대사의 정토왕생을 위한 염불수행에 대한 간곡한 가르침
인광(印光) 대사(1861~1940)는 태허(太虛) 대사, 허운(虛雲) 대사 및 홍일(弘一) 대사와 더불어 근대 중국을 대표하는 4대 고승 중 한 분으로 꼽힌다. 근대 중국은 청나라 말엽에서부터 중화민국 초기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는데, 이 당시 중국은 극도로 혼란하고 불법(佛法)의 쇠퇴가 극심한 상황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염불수행법을 널리 전하면서 혼란기의 중국인들에게 마음의 평화와 위안을 주었던 인광 대사는 중국 정토종의 13대 조사이자 대세지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았다.
인광 대사는 평생 출가제자는 한 명도 받지 않고, 재가신자들에게 주로 서신으로 설법하였는데, 한결같이 믿음과 발원으로 극락왕생을 구하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대사를 따르는 재가자들이 대사의 서간문과 잡지 기고문을 모아 『인광대사문초』로 엮어 널리 보시하였는데 이 중에서 중요한 내용만 간추려 부문별로 분류하여 『인광대사가언록(印光大師嘉言錄)』을 편집하여 대중들에게 보시하였다. 『문초』는 초심자가 쉽게 이해하고 근기에 맞는 내용을 찾기 어렵지만, 『가언록』은 염불수행에 입문하는 사람에게는 입문처를 찾아주며 착실하게 수행정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수행을 오래 한 사람에게는 자칫 잊어버리기 쉬운, 수행법의 핵심을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불심 깊은 정토염불 수행자인 보적 김지수 교수님의 신심(信心)을 북돋우는 부드러운 번역과 상세한 내용 해설
인광 대사의 법문 중 핵심적인 내용을 간추린 『인광대사가언록』은 불심(佛心) 깊은 정토염불 수행자인 보적 김지수 교수님의 번역으로 2000년에 처음 한국 불자들에게 소개되어, 1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홉 번이나 거듭 인쇄하며 정토염불 수행을 널리 알려왔다. 『화두 놓고 염불하세』는 『가언록』을 번역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국의 불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중요한 교리나 용어를 상세히 해설하는 각주를 더하고 있다. 초판에서는 『실용불학사전(實用佛學辭典)』과 『사해(辭海: 上海辭書出版社, 1979년)』와 『실용대자전(實用大字典: 中華書局, 1982년)』을 참고하였고, 이번 개정판에서는 대만(臺灣) 불광산출판사(佛光山出版社)에서 발행한 불광대사전(佛光大辭典)의 전자본(電子本)을 활용하여 기존 각주를 보충하며 새로운 해설 각주를 더하였다.
『화두 놓고 염불하세』는 그동안 화두선 일변도인 한국불교의 풍토에 염불수행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염불 수행의 요체를 총체적으로 밝힌 뛰어난 염불 법문집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문장을 더 다듬고 번역자의 내용 설명을 더욱 보충하여 독자들에게 새롭게 선보이게 되었다.
『화두 놓고 염불하세』에 실린 한 편 한 편의 글마다, 생사(生死)를 위해 보리심(菩提心: 求道心)을 내고, 믿음과 발원으로 염불하여 서방 극락 정토에 왕생하는 넓고 평탄한 길을 가르쳐 주었다. 아울러 절실하게 실천하여 평범함을 뛰어 넘고 성현의 경지에 들어가는[超凡入聖] 지름길로 닦아가라는 인광 대사의 간곡한 당부가 마음을 울린다.
고향이 거제예요. 저의 부모님이, 아버지가 어부였어요, 배를 타고. 그래서 배를 타러 가면 3년 만에 한 번씩 오는 어부인데, 제가 태어난 그곳은 산과 들과 바다가 있는 아주 아름다운 곳이에요. 앞에 가면 바다 있고, 우리 살고 있는 넓은 들이 있고, 뒤에는 아주 아름다운 산이 있고. 마을 구성이, 동네가 가구수가 되게 많았는데, 가족공동체로 할아버지, 할머니, 다른 집도 할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뭐 이렇게 대가족 속에서 태어나서 그 동네도 하나의 가족공동체 구성으로 이렇게 살았던 거 같아요. 그래서 이 집 애도 이 집 애고, 이 집 애도 이 집 애라. 서로서로 봐주고 이렇게 다함께 공유 하고 분담하고. 이런 구조 속에서 제가 태어났어요.
우리 할아버지는 침을 놓는데, 소에게도 침을 놓고 사람에게도 침을 놓아서 고치는 할아버지였는데. 제 기억속의 할아버지는 갓을쓰고 하얀도포를입고, 어디를 갔다 오시기도 하고. 침을 놓으러 갔다 오셨던 거 같애, 침통을 들고. 그 다음에 아침 저녁에는 밭에서나 논에서 일을 하셨어. 일을 엄청 많이 하는 우리 할아버지였어. 우리 할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는 다 만주로 가셨답니다, 독립운동하러.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부터 홀로 컸대요, 동생들이랑. 그래서 늘 우리 할아버지는 집안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어요. 아버지 어머니가 만주로, 당신 아버지 따라 어머니가 만주로 갔지만, 독립운동을 하러 갔다고 생각해서 굉장히 긍지심을 가진….
저는 부모가 결혼하고 좀 늦게 태어났어요. 저가 맏이인데, 6년인가 있다가 태어 났대요, 굉장히 많이 바랬는데. 그렇게 태어났는데, 저희 할아버지가 제 태몽 꿈을 꾸신 거예요. 당신 생각에는 아들이라 보셨던 거 같애. 그 꿈이 매우 상서롭고 훌륭한 인재가 태어나는 꿈이었다고 당신이 인제 생각하신 거 같애.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가 태교를 너무 잘 하신 거예요, 며느리에게. 얘기를 들어보면 시골에서 농사도 짓고 막 이래야 되잖아요, 밭도 매고. 그런데 할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입태를 했다는, 들은, 알고 난 순간부터는 그다음 부터 안 시켰대. 김도 매러 나오지 마라, 개울도 여기서 여기로 펄떡 뛰어 건너지 마라. 태교를 잘했대요. 모든 손자손녀에게 다 그런 건 아니고, 당신이 태몽을 꿨기 때문에 이 아이는 필시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당신이 투자한 거죠, 그죠. 우리 집안을 이 아이가 살릴 거다. 항상 집안을 중요시 했는데, 거기서 우리 할아버지 생각에 ‘하, 뭣이 하나 태어나서 집안을 다시 세울라나’ 이렇게 생각을 하시고 투자를 하신 거 같애.
태교를 아주 잘 했대요. 어머니도 굉장히 정적이시고 해서. 제가 안전한 환경, 좋은 환경, 어머니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그런 안락한 환경에서 제가 잘 자랐고. 그 다음에 인제 거기가 바닷가니까, 그때 당시에 이런 시골이나 산골마을에는 먹을 게 없었다 그래요. 보리 뭐 이런 거 밖에는. 거기는 생선도 많고, 쌀, 보리, 산도 있으니까. 모든 게 다 풍요로워서, 그런 섭생이 매우 좋았던 거 같애요. 제가 정말 건강한 몸을 가지고 태어났거든요. 지금은 일을 하도 많이 해서 인제 이렇게 늙고 야위고 이랬지만, 굉장히 제가 팔도 엄청 굵고 건강한 몸으로 태어났는데. 태교를 정말 잘, 할아버지가,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해주셨고. 그 다음에 제가 태어나서 (아들이 아니라서) 많이 실망하셨지만, 그 이후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한테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고. 그러고 한 열 살 때까지는 정말 좋은 환경에서 제가 아주 잘 자랐어요.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올바르게 잘 컸어요. 스님이 아주 부지런하고 똘똘했대요. 심부름을 잘했대요. 담배 사와라 이런 것도 참 잘 사다주고. 그런 거 잘했대요. 그래서 동네사람들에게도 많이 귀여움을 받았던 거 같애.
할아버지의 한마디 스님이 성이 여가예요. 속가의 성이 여가인데, 우리 할아버지가 한 내가 여덟살 때나 되었을 때 우리 혈통에 대해서 말해줬어요. 여가는 중국 성이래요. 시조가 진시황인거야. 여불위1 아들이 진시황이잖아요. 우리 할아버지가 어린 나를 데리고 앉아서, “너는 황족의 피를 받았어, 니가 혈통을 잘 알고 살아야 해. 그러니까 공부도 잘해야 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돼, 착한 사람이 되어야 돼,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 해.” 그런 이야기를 한 거예요. 이 이야기가 끄트머리는 나중에 생각한 거고, 다른 건 다 없어지고, 사라지고, 딱 하나 남은 게. “너 혈통이 황족이다.” 이렇게 말한 게, 엄청난 자존감과 자긍심이 만들어 졌어요. 나 어른 되어서는 진짜 맞는지 족보를 막 이렇게 역사적으로 찾은 적이 있어요. 중국의 영화를 비디오로 다 갖다 빌려보면서 진짜 맞나, 여불위가 어떤 사람이고, 진시황이 어떤 사람인가 막 이렇게 찾아보려 애썼던 적이 있어요. 우리 할아버지 했던 말이 정말 맞나. 지금 가만 살펴보면, 아, 근거가 없는 얘기는 아니었고, 우리 할아버지가 왜 나에게 손자가 엄청 많은데 그런 얘길 했을까. 당신의 꿈이 이뤄지지 못한 상실감에 대해서 나한테 그렇게라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그때는 뭔 말인지 몰랐고, 어리니까. 아무 경위 없이 내 할아버지가 심각하게 했던, 그 진지하게 말했던 그 말씀을 제가 기억하고 그 단어자체만 가지고 스스로, 아, 나는 남과 다른 사람이구나. 딱 고 한 마디만 남아서, 이 거친 세상을 안 넘어지고 잘 살 수 있었던 거 같아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자빠져도 다시 일어나고. 그때 만들어진 자존감과 자긍심이 지금까지 내가 세상을 사는데, 그게 바탕이 돼요. 많은 사람들 사랑하게 되고, 돕게 되고. 그들의 고통을 통해서, 그들이 고통에서 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저들이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는 원초적인 바탕이 할아버지의 한마디가 아니었을까.
열 살 가장 「그 시절엔 왜 그리 먹을 게 부족했을까. 산천에 쑥이 자랄 때쯤엔 동무들과 산과 들을 분주하게 오갔다. 학교에 갔다 와서 주린 배를 안고 땔감을 하러 산에 가면 이 산 저 산에 창꽃이 피어 있었다. 낫도 팽개치고 창꽃을 한입 가득 따먹었다. 그러다 목이 마르면 옹달샘 물을 두 손 가득 채워 벌컥벌컥 들이켰다」 제가 열 살 때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학창시절에 가끔 선생님들이 너는 소설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해준 선생님이 한분 계시긴 해요. 그 선생님이 그리 말했다고 내가 소설가 되는가. 소설가가 뭔지도 모르는데 뭐. 꿈이 있었던 거 같진 않고, 그냥 아버지가 아팠기 때문에 나는 간호장교가 되고 싶었던 꿈은 있었어요. 간호 장교가 되고 싶다. 질병과 무관하진 않아요, 아버지가 아픔으로 해서. 그러나 인제 그런 간호장교의 꿈은 이루지 못했고.
열 살이 지나면서 아버지가 배를 타셨는데 사고가 나서 다쳤어요. 3년인가 4년 동안 아버지 투병을 하시게 되었는데, 그때 제가 가장 노릇을 했던 거 같애. 우리 할아버지 사는 집이 여기 있으면, 우리 아버지 둘째네 이쯤에 살아요. 여기서 한 십분 거리쯤에 살고, 또 작은집 있고. 큰집엔 할머니 할아버지 식구가 많고, 우리 집에는 분가를 해가지고 집을 짓고 아버지, 어머니, 나, 동생들 둘 이렇게 살았는데. 어머니가 아버지 간병을 하러 가야 되잖아요. 그때 제가 동생들 두 명 하고 저하고 셋이 이렇게 남게 되었는데. 할아버지가 가르쳐주는 대로 할머니가 가르쳐주는 대로 동생들도 키우고, 집도 관리하고, 동생 학교도 보내고, 저도 학교 가고. 저희가 밭이나 이런 게 많았어요. 어머니가 막 농사 짓다가 갔으니까. 그런 것 거두어들이고. 어머니가 키우던 소, 돼지도 키우고. 이런 거를 척척척 하면서 컸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학교 갔다 오는데, 그때는 공동우물에서 물을 먹었어요, 우물을 지나 가는데 동네 어른들이, “금이는”, 제 이름이 금이에요, 동네 금이에요,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거예요, “금이는 못하는 일이 없어, 쟤는, 뭐든지 잘해” 이렇게 말했어요. 제가 들으면서 지나가면서 기분이 엄청 좋았어요. 그때부터 나는 못하는 게 없고, 뭐든지 잘하려고 엄청 노력하는 사람이 됐어요, 그 말 한마디에. 어릴 때 말 한마디가 너무 중요한데.
어린 시절의 그런 부분들, 앞에가 탁 트인 바다와, 뒤에는 푸른 산과 넓은 들. 그런 환경적 구조도 제 영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어요. 제가 한 3~4년 동안 동생들하고 살면서 이렇게 동네 어른들이 다 도와주셨어요. 동네 어른들하고 살아가는 방법도 제가 배웠고, 소통하는 방법도 배웠고, 생존,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지도 배우고.
제가 중요하다 여기고 역할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어린아이들을, 젊은 사람들이 잘 낳지 않지 않습니까. 아기들 많이 낳으라고 권해드리고 싶고. 태교를 저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요. 태교를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미래지향적으로 잘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했던 입태와 열 살 때까지의 그 환경이 아무리 척박하고 어려운 환경에 놓여도 무너지지 않고 오뚝이처럼 끝없이 일어나서 이거를 풀어야지, 했던 배경이 됐어요. 어떤 아동심리학자가 열 살까지 그때 그렇게만 키워주면 그 다음부턴 지가 알아서, 자기 가져온 까르마에 따라서 자기 생을 개척해나간다, 이렇게 얘기했는데, 거기에 100% 공감을 하면서. 또 입태 시기에, 태어났을 때에 고통 받았던 아이들, 그래서 어른이 된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불행하거든요. 엄청 미약하고, 유약하고, 하여튼 장애가 많은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정말 태교가 너무 중요해. 어린 시절의 환경, 대상, 너무 중요해. 이런 것을 깨닫게 되죠. 그래서 지금은 그게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많이 말해줄려고 해요.
살아볼수록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제가 만나지 않습니까. 그럴 때 그 고통의 원인은 어디서 왔을까. 원인을 분석을 해봅니다. 이 고통의, 고통의 시작은 어디서부터 되었나. 그 다음 단계, 이 고통이 어떻게 무엇으로 인해서 확장 되었는가에 대해서 관찰 하고 분석하고 사유해보죠. 그랬을 때, 어릴 때 엄마 뱃속에 입태되는 순간부터 태어날 때 그 환경이 너무 중요했고, 그다음에 두 번째로 중요한 환경이 태어나서부터 열 살 때까지의 환경이 매우 중요했다. 이게 1차 단계, 1단계라 한다면. 2단계가 열 살에서 스무 살 때까지. 단계가 있는 거예요, 입태가 0살에서 태어날 때까지 그때가 우리가 불가에서 생유라 합니다, 생유. 입태에서부터 생유, 태어나서부터 열 살 때까지 딱 10년 보는 거예요, 만 10년 이잖아요. 이때가 한 인간에게는 너무나 이 인간이 행복해지는지 불행해지는지 그 삶의 방향, 질, 결, 모양, 형태가 거진 다 결정이 된다고 보면 될 거 같아. 그것은 뭘 근거로 얘기 해줄 수 있느냐면, 수많은 사람들을 상담하고 그들의 고통을 보면서 ‘아! 정말 중요하구나’ 알게 됐어요.
예배당 가는 길 만난 불교음악 「그 봄도 어제 같고, 그 여름도 어제 같다. 서른이 다 되어갈 무렵 그 봄날, 거리에는 연등이 달려 있었고, 나는 교회를 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초파일 연등이었다. 문득 레코드 가게에서 들리는 소리가 내 폐부에 박혔다. 처음 듣는 소리에 온몸이 전율했다. 교회에 갔지만 목사님 설교도 귀에 들리지 않고 오직 그 소리만 귓전을 울렸다」 집안 종교는 기독교였어요. 지금도 제 바로 밑에 동생은 목사고, 부인도 목사예요. 전생의 인연이라고 봐야죠.. 전생에 내가 아마, 전생에도 출가자였던 거 같아요. 근데 환경이 불교를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어서 접하지 못하다가, 처음으로 불교라고 하는 환경을 찰라 시간에 접한 거죠. 과거 생의 습기, 습관이 탁 재생된 거죠. 아무도 말 못했어요. 그땐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안 계셨지만, 제 출가에 대해서 아무도 저를 막을 수가 없었어요. 제가 너무 단호했기 때문에, 아무도. 저는 스스럼없이 거침없이 이 길을 갔어요. 지금까지 한 번도 뒤를 돌아보거나 옆을 돌아본 적이 없어요. 다음 생에도 이 길을 갈 거예요.
그 힘이, 그 토대가, 할아버지인 거예요. 할아버지 그 한 마디. 그 자긍심과 자부심. 한 마디가 어떻게 승화됐나 보니까. 내가 출가하면서 더 승화가 된 거예요. 일체중생들이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내가 힘이 되어주어야 하고, 내가 무언가 해주어야 된다는 이 사명감이 엄청 커진 거예요. 어떠한 역경이 있어도 이 길을 가야 되는 거예요. 안 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어린 아이들에게 부모가 주변에서 한마디가 그렇게 중요 하다는 것, 제가 새삼 느낍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만약 우리 할아버지가 그런 말을 안 했으면 나는 어떻게 이 고통을 극복했을까, 안 죽고 살 수 있었을까.
2. 길 위에서
소록도와 꽃동네 내가 출가하자마자, 내가 세상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실제로, 고통 속에 죽는 사람을 만나보게 되었어요. 내가 그때 되기 전에 할아버지 할머니 돌아가셨는데, 그분들은 그냥 연세가 다해서 자연스럽게 돌아가신 거고. 고통 받다 죽는 사람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고, 고통이 무엇인지, 그 다음에, 어떻게 하면 죽는 건지, 이런 거에 대해서 뭐랄까 객기가 발동했다 해야 되나, 이거를. 아니면 호기심이 발동했다 캐야 되나. 뭐 어떻게 말해야 될까. 그걸 너무 알고 싶었어요. 죽음이 뭔가, 어떻게 하면 죽을까, 얼마나 사람이 아프면 죽는지. 그래서 소록도를 갔는데. 정확하게 말하면은 그들이 나를 돌봤지, 그 환자들이. 사랑스런 눈빛으로, 화사한 미소로, 일그러지고 찢어져도 그 속에서 스님이라 고 얼마나 잘 보살피고 보호를 하는지. 거기서 알았어요. 인간은, 인간이 행복을 만들어 내는 데에서는 환경과 조건이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구나. 마음가짐이 중요하구나, 마음가짐이…. 그들이 뭐가 행복하겠어요. 그래도 한없이 그 삶을, 그 삶 안에서 행복을 만들어내고, 미소를 만들어내고, 사랑을 만들어내더란 말이지. 죽음은 그곳에서 잘 몰랐어요. 그곳에서는 행복에 대해서 알게 되었어요, 마음에 대해서 알게 되었어요. 아, 진짜 일체가 유심조4 구나. 원효스님이 말씀했던 것처럼. 그래, 마음이 이 세상을 창조하네, 사랑을 창조하고. 그것을 어렴풋이 알게 됐고.
꽃동네에 가서, 천주교 재단의 꽃동네에 가서 환자들을 만나게 됐고, 거기서 죽음을 알게 됐어요. 거기서는, 매우 경건하고 엄숙한 죽음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천주교 수사님 이나 신부님, 수녀님이 너무나 그쪽으로 잘 돌보는 모습들, 굉장히 엄숙하고 경건한 죽음, 존엄한 죽음을 만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인제 거기서 나와서, 암환자들을 만나게 되면서 저는 그때부터 지옥을 만나게 되지요. 암환자들을 돌보게 되면서, 호스피스를 시작하게 되면서, 이 세상에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있구나. 역부족인, 인간의 힘으로는 버틸 수 없는, 역부족인 고통이, 괴로움이 있구나. 그때는 스님이 한 서른 여섯, 일곱 살쯤이 됐는데, 그때부터 인생의 진한 맛을 보게 된 거죠. 말 그대로 똑 부러진 배를 타고 바다 한 가운데서 폭풍을 만난 거죠. 어떻게 안 빠져죽고 살아남았는지. 그때부터, 그때는, 마약도 많이 발달 안 하고, 암환자 치료법도 그렇게 개발이 별로 안 됐을 때라서 환자들이 고스란히 통증을 다 안고 죽었어야 하는 때예요. 그때가 1996년, 97년, 98년 이때거든요. 그때부터 시작이지, 그때부터.
생과 사의 기로를 지나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 안기듯 환자가 내 품에서 가만히 숨을 고른다. 스님 없는 동안에 혼자서 죽으면 어쩌나 너무 두려웠다는 말과 함께……. (중략) 아들의 죽음을 기다리는 어머니와, 홀로 자녀들을 챙기며 살아가야 할 아내……. 한 사람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의 삶이 내 마음을 이리저리 솓아놓았다」 5 「그들의 고통 앞에 어떻게 초연해질 수 있겠는가. 세월이 가면 갈수록 그들의 고통과 아픔의 늪 속에서 나는 함께 허우적거리며 울고 아프고 위로하고, 간호하고 동반자가 되어주며 허허 웃을 뿐이다」 2000년도에 청주에 정토마을 만들었는데, 정토마을 호스피스 센터를 만들었는데, 1년이면 백 명 이상 환자가 돌아가셨어요. 백 명이면 그 역사가 백 개예요. 그 [환자] 가족이 다섯이면, 그 역사가 다섯 개이면, 백 명이면 오백 개의 역사를 내가 만나는 거예요. 그 역사 속에서, 그 역사 책을 들여다보고 느끼는, 정말 정말 다차원적인 고뇌와 고통과 갈등과 번민들. 그때는 이렇게 분석하고 분류할 줄도 몰라, 온통 다 뒤집어쓰고, 같이 함께 아파하고 뒹굴면서,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섭섭하게[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라는 책이에요. 그것도 천분의 일이나 될까, 그 속에 담긴 것들이. 그냥 그 속에서 사는 거지, 그럭하고. 그때는 이들에게, 이들이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도와야 한다, 그 사명감으로 그걸 할 수 있었죠. 내가 곁에 있는 게 도움이 된다니까, 힘이 된다니까, 덜 무섭다니까.
「어떤 가르침을 얻게 하려고 이런 경험을 하게 하셨을까? 내 자신이 죽음의 문턱 까지 다녀온 다음에서야 비로소 환자와 가족들의 심정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의사의 한마디가 환자의 투병생활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2003년도에, 그때는 스님이 암환자만 돌봤던 게 아니고 에이즈 환자도 돌봤어요. 에이즈가 마지막에 굉장한 고통을 호소해요, 면역체계가 다 무너지면서 결핵부터 시작 해서 온갖 병이 다 생겨요. 그런 상태에서 고통이 너무 심하니까, 주사를 놓으려고 간호사랑 둘이서 어리버리하다가 같이 동시에 바늘에 찔렸어요. 그럼 50일 동안 약을 먹어야 돼요. 그 약을 먹으면서 나는 간이 많이 상했어요, 약이 너무 독해서. 간 때문에 생사가 좀 오고 갔죠. 50일 있다가 검사하니까, 에이즈에 걸리지 않은 걸로 판명이 나서, 그 이후에 계속 그 약 때문에 간이 많이 힘들어졌고. 한 2년 정도 걸렸어요, 회복하는 데. 지금도 많이 피곤하고 힘들면 간 수치가 좀 올라가고. 보호자들의 심정, 환자들의 심정, 그런 것들을 실질적으로 내가 경험, 내 문제로 경험하면서 깊이 체득해서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 좀 더 깊어졌죠.
「이곳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어 더욱 감사한 순간들이다. 오십이 넘은 지금에서야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이 선물로 다가온다. 그 고통이 무엇이든 내 작은 가슴으로 품어 안을 때마다 내 속에 있는 아픔까지 치유받는 느낌이다」 어떤 때는 내 삶 자체를 압도시킬 때가 있어요, 죽음이. 이런 죽음들. 내 삶을 그냥 잡아먹을 거 같은 압도적인 죽음. 내 삶을 압도시킬 만큼 강렬한 어떤 감정적인 부분들, 상황적인 부분들, 이런 부분들이, 발생할 때. 아마 다른 사람보다는 많이, 다른 사람이 열 번이면 나는 아마 삼십 번 될 거 같은데. 그렇게 어느 한시도 고요하고 조용할 날이 없을 만큼 이 복잡다단한 이 삶 속에서 그러한 일이 발생할 때, 그걸 저는 제 안으로 갖고 와서,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이 안에서 승화해내는 거 같아요, 그거를. 우리가 밥을 먹어서 몸에 자양분을 보내듯이 그걸 내 안으로 갖고 와서, 내 안에서 그것을 썩혀서 발효시켜서 긍정적인 부분으로 승화시켜내는 거 같아요. 이겨낸다, 견뎌낸다라고 하기 보다는, 승화시켜낸다. 감정에 빠질 때는 푸욱 빠지고, 빠진 줄 알고 퍼뜩 벗어나야죠. 슬퍼할 때는 온전히 슬퍼하고, 아파할 때는 온전하게 아파하되, 온전하게 경험하고 짧게. 그 다음에 인제 정리해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게 참 쉽지 않죠. 참 어려워요, 그죠. 우리가 상황에 압도되어 버리니까.
종교적인 측면도 없지는 않겠지만, ‘인간의 고통, 인간이 겪은 괴로움들을 보고 관찰하고 그것을 분석하고 이러면서 이 부분들을 누가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그것을 승화시켜내는 수밖에 없다. 억압해서 참아도 문제가 되고, 이것을 밖으로 드러내도 문제가 되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 안에서 이 폭탄을 터뜨 리지 않고, 잘 분해해가지고, 본래대로 회복시키는 게 가장 적합한 방법이다’ 라고 나 스스로 결정한 거 같애요. 수많은 고통을 보고 느끼며 경험하면서. 수많은 다차원적인 고통들을 실제로 경험하면서 얻은 답이 그것. 그 길만이 오직 살길이다. 이 고통을 벗어 나는 길이다. 표현을 한다 해도 파편이 튀고, 억누르고 억압한다고 해도 내가 심리적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 받을 것이기 때문에. 버리지도 못하고 가질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하나의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 뭐 때문에 이게 발생했는지 원인을 분석하고, 이것이 실질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분석해보고, 그 다음에 여기에서 버릴 것과 취할 것을 분류합니다. 분류해서, 버릴 것 버리고, 취할 것의 기준을 너도 좋고 나도 좋은 것을, 선택하는 거죠.
마하보디 교육원과 자재(自在)병원 「스님의 임종을 준비하던 중 뜻밖의 유언을 받아 쥐게 되었다. 나에게 병원을 지어 달라셨다. 숨을 몰아쉬며 피 같은 땀을 떨구면서도 스님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 (중략) “원력만 세워요, 내가 죽어서라도 도울게. 혼자 하게 두지 않고 내가 도울게. 시님아, 중이 이래 죽어서 되겄소. 노무 뱅원에서 (고개를 뒤로 젖혀 십자가를 보면서) 이래 죽어서 되겄소. 나는 이래 가지만 다른 시님들은 이러면 되겄소. 다른 시님은 몰라도 시님이라면 할 수 있다.”」
「앞으로 이 병원을 통해 ‘죽음의 문화 바로세우기’ 운동을 전개할 생각이다. 죽음에 대한 사회의 영적 돌봄이 어떤 것인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우리 인간을 얼마나 가치 있게 하는지, 그것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리고 싶다」 내가 병원까지 짓는 것은, 센터를 짓는 것은 엄두도 못냈는데. 그 스님의 간절한 부탁과, 또 우리 불교계에 너무 필요한 시설이고 그래서, 어쩌다보니 총대를 내가 메게 된 거지. 마하보디교육원은 섭섭하게 책 팔아가지고 [만들었어요]. 하하. 책이 정말 많이 팔렸는데, 사람들은 다 병원을 짓자고 했는데, 저는 병원을 짓지 않고 이 교육원을 지었어요. 2007년에 이걸 지었어요. 정말 의견이 많았습니다, 비난과 비판이 막. 그래도 이걸 지었어요. 왜냐면 저들을 돌볼려고 하면 여기[마하보디교육원]서 그에 알맞은 교육을 시켜서 알맞은 영성을 갖추어줘야 저기[자재요양병원] 누워있는 사람들의 삶의 질이 높아지는 거지, 대책도 없이, 사람도 없는데 병원만 지으면 누가 사람을 돌봐요. 환자를 돌보는 건 사람인데. 그래서 사람다운 사람을 만들어서, 전인적인 아름다운 사람을 만들 어서 저기에 투입하겠다. 매우 전략적이죠. [여기 의사분들, 간호사분들] 다 교육받고 해요. 지금 만약 입사한다면, 여기서 교육 받으면서 일을 해요. 또 스님들도 계시고, 다양한 사람들이 와서 다양한 차원의 교육들을 받아요. 영적 돌봄가이신 스님들 다 여기서 교육 받아 나가서, 다 그런 존재들이 되어서 전국 각지 병원으로 가고.
명상심리대학원 석사과정이 있고, 사람의 영성과 고통을 돌보는 전문가를 배출 하는 CPEE라는 교육 프로그램도 있고, 그 다음에 인제, 호스피스 교육도 있고.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기도교육도 있고. 죽음, 임종의식 교육. 굉장히 많아요. 생사의 장이라고 5박 6일짜리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게 고통을 다루는 법이거든요. 고통을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해소하고, 집에 가서도 고통이 생길 때 덜어낼 줄 아는 방법을 배우는 프로그램인데, 올해 23년째 하고 있어요. 그 프로그램을 하고나면 많은 사람들의 삶의 변화가 오고, 관점의 변화가 오고, 건강도 좋아지고.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도 알게 되고, 죽음은 무엇인지,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도 알게 하는 교육이 생사의 장입니다. 5박 6일, 그 안에서 그거를 돌출해낸다는 건 대단한 거죠. 저번에 학생들도 중국에서, 미국에 서도 오고 이랬던데, 생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지 궁금해서 다 온 거예요. 누구에게나 다 필요해요. 아이들은 더 좋아요. 아이들은 절대 자살하지 않아요, 이런 교육 받으면. 떠나가는 사람은 잘 떠나가도록 도와야 하고, 떠나보내는 사람은 잘 떠나보내도록 준비 해야 하고. 떠나간 뒤의 그 빈자리, 그 아픈 자리에서 새 살이 차오를 때까지 우리가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는 거죠. 그러지 않으면 보내놓고 그 빈 자리에 빠져 죽어요. 얼마나 중요해요. 삶.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이 무엇인가. 스스로 발견해요. 죽음.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죽음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 답을 찾아요. 그 다음 에 길을 가는 거예요. 그때부터는 너무 잘 사는 거예요. 이거를 몇 마디 언어로서 스님이 여러분에게 설명해줄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그게 궁금하고 알고 싶은 사람은 생사의 장에서 공부를 하란 거예요. 울산시에 이런 아름다운 곳에 멋진 교육장소가 있잖아요. 최고로 공부 안 하는 사람이 울산 시민입니다. 최고로 자기 발전, 자기 번영, 자기 행복을 위해 투자 안 하는 동네가 울산광역시라고. 정말… 어디다 가치를 두고 사는지 몰라.
「완화의료를 전문으로 하는 자제병원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교과서가 되어주는 공간이 될 것이다. 죽음의 끝까지 배움의 여정으로 함께 가고, 또 더 높은 차원의 영적인 존재로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 곳, 모두가 희망을 얻어가는 곳. 언양에 뿌리내릴 자제병원은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공간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 언제가는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겠지만, 간접적인 경험도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자비로서 누군가를 건네준다’라고 처음에 이름을 그렇게[자제(慈濟)병원이라고] 지었는데, 그게 너무 오만한 이름인 거 같애. 난 내 자비로 단 한 사람도 건네줄 수 있는 게 없어. 스스로 건너도록, 스스로. 스스로 자유롭고, 스스로 죽음과 삶에서 자유로워지도록 내가 도울 뿐이지 내가 건네주는 게 아니었다, 라는 데서 이름을 스스로 자(自)자에다가 있을 재(在)자를 써서 스스로 건넌다, 단지 나는 징검다리에 불과하다, 내가 건네주는 게 아니고, 이 징검다리를 놓아주면 건너가기만 하면 되는 거지. 정토마을은 그저 힘이 되어 줄 뿐이다. 스스로 가야 한다. 그 말은 니가 스스로 수행해야 하고, 스스로 착한 마음 먹어야 하고, 착한 일 해야 되고, 마음씨도 잘 써야 돼, 이건 거예요. 책임을 개인에게 다 돌렸어요. 하하.
상북면 땅을 보고 여기다 싶었어요. 왜냐면 이 아름다운 산들과 이런 구조가 환자 들에게 많은 위안과 위로가 될 거 같고, 보호자들에게도. 실제 그래요. 우리 보호자들은 여기서 가슴이 턱턱 막히다가도 밖에 나오면 호흡을 하고 숨을 쉬어요. “하… 숨이 쉬어 진다” 이렇게. 호스피스라는 것은 환자뿐 아니라 보호자까지, 또 의사, 간호사 모두가 다 포함이 돼요. 한 사람을 돌보는 데, 모두가 다 그 스트레스에 놓이게 돼요. 한 사람 빠지는 사람 없어요, 다. 그들에게 이 공간이, 치유의 공간, 휴식의 공간, 숨을 쉬는 공간이고.
건립할 때 최고 어려웠던 점은,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여기가 기부를 받고 모금하는 단체잖아요. 모금하는 것도 힘들지만, 모금되어진 돈을 적절하고 적합하게 잘 쓴다는 게 저에게는 너무 어렵고 힘들었어요. 돈 하나가, 내 돈이 아니잖아요. 남의 돈을 써준다는 게, 그게 정말 엄청난 부담이고, 어려움이고 힘들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이 병원은 전 국민과 전 세계에 있는 교포들이 낸 돈으로 이게 지어진 거예요. 수를 헤아릴 수가 없어요. 이거 짓는 데 150억이 들었는데, 그 150억이 어떤 사람은 백 원 에서부터, 천 원에서부터 시작해서 수없는 돈들이 모여서 이게 만들어진 거예요. 돈이 많은 사람이 자기 돈 갖고 지은 게 아니라,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이걸 만든 거예요. 정말 가치 있는 거예요.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모금해서 이 병원이 울산 광역시에 섰다는 게 얼마나 기뻐요, 얼마나 좋아요. 울산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특히 환자들이게, 이게 기여했으면 좋겠어요. 저희 병원이 정말, 우리나라가 인정할만한 아름다운 병원이에요. 저 안에 있는 사람들도 아름다고. 저기 입원하는 환자들은 정말 복이 있는 거다.
서사와 대안이 필요한 울산 여러 교육을 하면서 제가 울산 사람들을 접하고 하면서 ‘아, 이분들은 어떻구나. 아,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구나. 울산 사람들은 그냥, 돈을 벌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에 주의가 너무 집중되어 있다. 지금은 1960년대 아니고, 80년대 아니기 때문에 벗어나서 조금 더 자유롭고 행복하고 또 단란한 삶을 추구할 수 있는데 너무나 사는 데 급급한 것이, 그것에만 욕망이 계속 활성화 되고 있다. 욕망이 중재가 안 되고 있다.’ 욕망이 절제되는 이슈가 이제는 필요할 거 같아요. 우리나라 경제는 10년 전에도 불경기, 20년 전에도 불경기였어요. 한번도 호황이었던 때가 없었어요. 우리가 어디에 기준을 두고 사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예요. 울산이 살기가 얼마나 좋아요. 바다, 산, 대숲, 태화강, 장미 공원….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데. 우리가 정말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 이 관점만 바꾸면 얼마든지 행복하고 질 높은 삶을 살 수 있는 울산 시민입니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얼마든지 즐기고, 가족이 단란하게, 행복하게, 너무 돈 추구하지 않아도 좀 아끼고 살면 되는데, 욕망이 절제되지 않다보니 이 갈애심이 끝없이 활성화 되다보니 끝이 없어요. 그래서 자폭하게 되는 거예요. 영적으로 폐허가 되는 거죠. 이혼하고, 별거하고, 이런 식으로 가정이 무너지죠. 울산시는 돈은 많은 도시인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인간이 행복한 도시일까. 특히 여성이 행복한 도시가 맞나. 여성이 행복한 도시 아닌 거 같아요. 돈도 벌고, 삶의 질도 올라가면 좋은데 이게 뭔가 어딘가 펑크가 났어. 돈은 많은데 이게, 삶의 질은 바닥을 쳐요. 여기서 다양한 결핍이 있는데 아동, 청소년, 노인,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정의 엄마가 행복해야 됩니다.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엄마가 과연, 울산광역시에 살고 있는 엄마들은 행복한가. 우리가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지도 서로가 머리를 맞대보고, 그게 해결이 되어야 아동 [문제]도 해결이 되고 노인[문제]도 해결될 수 있어요. 다문화 가정도 참 손 쓸 데가 많은데, 한국 가정의 모델을 보고 그들이 그대로 따라하기 때문에. 한국 가정이 바로 서야 다문화 가정도 바로 섭니다. 그런 철학을 가지고 우리도 행복한가? 행복하려면 뭘 해야 하지? 서사도 해보고 대안을 세워야 합니다.
상생(아스콘 공장 대표에게) 교레미콘은 안 들어오게 됐고, 아스콘 공장은 들어오게 됐다가, 건립 불허가 났는데. 어찌 보면, 개인적으로 보면 너무 미안해요. 그들에게는 가족이 있고 직원들이 있고 이런 측면에서 보면 정말 미안해요, 마음이 아프고. 얼마나 상심하고 힘들까, 이렇게. 또 다른 차원에서 보면,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이곳이 적합하지 않다라는 거예요. 산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 높은 산에, 그 미세먼지가 넘어가겠습니까, 못 넘어가죠. 그러면 내 수십 명이 돈을 벌어먹고 살기 위해서 수천 명이 자자손손 대대로 고통을 받을 거 아닙니까. 여기 사는 주민들의 고통을 예방하고, 완화하기 위해서 여기다 그거를 지으면 안된다라는 거예요. 한편으론 미안하고, 참 걱정이 되는 마음이 있어요. 얼마나 그들의 삶이 힘들까. 레미콘은 안 그런데, 아스콘에 대해서는 좀, 영세업자라서 마음이 가고, 아프고 미안하고. 얼마나 고민하고 고뇌할까. 정말 잘 되기를. 적합하고 적당한 땅이 나와서 그 사업이 정말 잘 되기를 바래요. 그렇지만, 나는 그 사업주가 크게 마음을 먹고 여기에 칠천 오백명이 살고 요 밑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그 사람들을 생각해서 좀만 더 양보하고 적당한 부지를 찾았으면 좋겠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또 사람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에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또 그게 되도록 울주군도 많이 도와주고 해서, 사업이 망하게 하는 게 아니라, 사업을 하되 안정적으로 할 수 있고, 인간도 서로 안정적 으로 살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그런 차원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만날 수 있으면 꼭 한번 만나보고 싶고, 이런 얘기 해주고 싶어요. 힘내어서 정말 적당한 부지가 생겼으면 좋겠고, 그런 부지에서 계속 사업을 잘 이루어갈 수 잇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꼭 해 주고 싶어요. 정말 지지해주고 싶고, 격려해주고 싶고, 기도해주고 싶어요, 잘 되길. 그럼 왜 이곳엔 안 되냐고 반문한다면, 너무 많은 사람이 살지 않냐, 그리고 젊은 아이들 이나 노약자들이 이 미세먼지 때문에 병에 걸리면 그에 대한 고통과 괴로움이 너무나 크다. 그 업을, 그 죄를, 그 사람이 다 받을 건데, 너무 가혹하다. 그래서 적당한 .. 적당하고 적합한 땅을, 내가 군수님한테 이야기 했어요, 적합하고 적당한 땅을 군에서도 찾아줘서 정말 성공적으로 사업을 잘 풀어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도 가족이 있고, 그 직원들은 또 다른 가족들이 있는데, 스님 어찌 그 생각을 안 하겠어요,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 [그러나] 요 언저리 사는 7,500명 주민들, 그리고 상북면 밑으로 언양 까지 그 많은 주민들의 생명의 고귀함을 생각한다면, 사장님께서 너그럽게 배려하고 내 생명이나 그 생명이나 차이가 없으니까, 소중함에는, 정말 좋은 마음을 가지면 좋은 땅이 좋은 곳에 나타나지 않을까. 그러기를 기도해요.
3. 기도
그 자체로도 기도 잖니 「깊고 깊은 산속을 그리며 청아한 자연과 샘물같이 맑은 영혼으로 걸림 없이 살아 가는 사문(沙門)의 꿈을 안고 출가를 하였다. 출가를 하고나서 몇 년이 지난 후 나를 돌아보니 깊은 산도 아니요, 너른 들도 아닌 사람들이 죽어가는 고통의 늪 중심에 서 있었다. 은사스님께서는 나에게 사문으로서 공부에 전념하기를 바라 셨지만 그 뜻을 따르지 못하고 나는 늘 환자들 곁에 있었다」 마흔한두 살 때까지는 늘 공부를 해야 된다고, 갈애심이, 늘 갈증이 있었어요. 어느 순간부터 ‘이 자체가 공부고, 이게 수행이고, 이게 전부다’ 라고 딱 알아진 순간, 깨닫게 된 순간에 그런 허기가, 갈증이 싹 없어졌어요. 이게 그 어떤 수행보다도 가치 있고, 그 어떤 수행보다도 더…. 원효스님이 해골의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를 깨달았듯이, 이 임상에서 끝없이 죽고, 죽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들의 역사를 통해서 내가 보고 듣고 배우고 깨달은 이것. 그래서 더 많은 연민과 더 깊은 사랑을 만들어내는 나.
이것이 더 훨씬 팔팔하게 살아있는, 살아있는 수행이에요, 돌아보니까. 모두가 다 이런 수행을 하고 싶어서 저런 수행을 하고 있는 거더라고요. 그 사람들 그렇게 수행하고 있는 것은, 이런 수행을 하고 싶어서, 이런 보살행을 하고 싶어서 그런 수행을 하고 있는 거더라고요. “스님 저는 기도할 시간도 없고 맨날 일만 하고 어떡해요” 이랬더니 어떤 스님이 “그 자체가 기도잖니, 그 자체가 수행이잖니, 거기서 뭘 더 바라냐. 너 삶 전체가 다 그냥 기도고 수행인데” [말씀하셨어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정말 새로운 세상을 발견 했어요. 내가 그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걸 몰랐구나.
다음 생 「죽음을 맞이하는 이가 다음 생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발원할 수 있도록 돕는 일도 불교 호스피스의 중요한 소임 가운데 하나다.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다음 생을 맞이하고 싶은지, 그러기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옆에서 조언해주고 지켜봐준다. (중략) 윤회는 선택이다. 다음 생에 어떤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일으키는 순간, 자신이 살아온 업성에 따라 그대로 이 세상에 재현되는 것이다. 어떤 삶의 주체로 태어나고 싶은가는 이생의 업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윤회의 삶도 그 연장 선상에 놓일 수밖에 없다」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는 부분에 대해서 한 5년 동안 고민 중에 있는데, 요 근간에는 이제 좀, 사실 태어나는 걸로 확정이 거진 90% 되어가고 있는 중이에요. 다시 태어나는 걸로. 이 고통 많은 세상에 그때는 다른 비전을 갖고 와서 인류에 기여하고 싶어요. 인류의 평화와 공존을 위해서. [다시 태어날지 아닐지는] 당연히 제가 정해야죠. 내 인생인데. [중생들도] 당연히 결정해야 되겠지. 결정 안 해서 그렇지. 스님 글에 보면, 대책 없이 살다가, 대책 없이 죽으면, 대책 없이 태어난다. 그래서 또 대책 없이 살다가 또 대책 없이 죽는다[는 내용이 있어요]. 응, 이게 업의 사슬이에요. 까르마의 사슬이에요.
죽을 때 말하는 건 이미 늦은 거예요. 늦어서 말빨이 안 서, 말의 힘이 없어. 지금 부터 건강할 때, 이 순간부터 다음 생 어떡할 건가 계획을 짜고 전략을 잘 세워서 성공적 으로 이끌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거예요. 안 그러면 대책 없이 또 흘러가잖아요. 그러니까 이 생도 삶이고 다음 생도 삶이기 때문에. 삶이란 이 자체는 현대어로 말하면 경영이라, 경영. 공장을 세워 돈을 벌려면 공장 세우기 전에 기획을 잘 하고 전략을 잘 짜야 되잖아요. 그리고 내 분수에 맞는 적합한 전략을 짜야 되겠죠. 분수는 항상 변화해. 어떻게 변하냐. 내 마음이, 마음 씀이 변하면 모든 게 다 변해요. 마음 씀이 변하면 마음 씨가 변하고, 마음 씨가 변하면 삶이 변하는 거예요.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는 거 같애, 그 어떤 것도 정해진 게 없더라. 찰나 찰나에 일어나고 경험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경험하고 사라지고 하는 것뿐이지. 정해진 것이 없어서 매우 희망적이지 않아요? 좀 불안하기도 하지만. 마음을 잘 써서, 마음 씨를 잘 만들면, 그게 아주 긍정적으로 변하겠죠. 희망적이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면 어떡하겠어요. 변합니다. 흘러가고, 다시 만들어 지고, 다시 경험하고, 흘러가고.
잘 살아야 잘 죽는다 「임종이 다가오면 지수화풍地水火風이 차례대로 무너진다.임종은 사람마다 다르다. 각자 지어온 업력에 따라, 그리고 마지막 종착역에서 어떤 마음으로 죽음을 대하는 가에 따라 죽음의 질은 천차만별이다. 잘 살아야 잘 죽는다. 그렇다면 어떤 삶이 잘 사는 삶일까?」
「천차만별의 다양한 죽음의 과정을 보며 ‘아! 잘 살아야 잘 죽는구나!’ 삶의 흔적들이 보여주는 진실은 죽음의 과정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많은 죽음을 보며 이제는 ‘어떻게 하면 잘 죽을까?’가 아닌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하루의 삶을 늘 챙기게 된다. ‘오늘 하루 아쉬움이나 후회는 없는가?’ 살피며 살게 된다. 진정으로 오늘 하루 잘 사는 것이야말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죽음의 근원이 됨을 알았기 때문이다」 잘 산다는 것의 기준이 없잖아요. 기준을 꼭 잡아야 한다면, 스님은,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이로운 삶이 잘 사는 삶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죽어야 잘 죽는 거냐 하면, 일단은 죽음의 과정에서 최소한, 고통이 최소화되어야 한다, 고통이. 심리적, 정신적, 영적, 사회적, 육체적 이 다섯 가지 고통이 최소화되어야 된다. 그런 환경과 그런 상황이 만들어 지는 게, 그게 정말 잘 죽어갈 수 있는 사항이에요. 그리고 마지막까지, 정말 죽을 때까지도 걱정과 근심과 고통과 괴로움에 시달리지 않고 편안하게 숨 쉬다가, 숨이 마감되는 그 순간까지 숨을 쉬면서 여유롭게 머물다 갔으면 좋겠다. 이게 내 생각에는 정말 잘 죽는 죽음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다양한 측면에서 죽음의 원인 주어지기 때문에, 그럴 때, 좀 더 나의 마지막이 안전하고, 존중되고, 존엄한 공간, 존엄한 환경에서 내가 여유 있게, 또 숨을 쉬면서 죽을 수 있었으면 죽겠어, 숨을 쉬면서. 숨을 쉴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는 죽음. 살다가, 숨이, 목숨이 다하면 어쩔 수가 없는 거죠. 숨이 끊어질 때 끊어지더라도, 그 전까지는 숨을 좀 잘 쉬고 살았으면 좋겠어, 숨 쉬다가 죽었으면 좋겠어요, 끝까지.
「저 멀리에서는 무정하게도 죽음의 열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급히 보따리를 싸야 한다면 정성을 다해 싸는 일을 도와주는 것이 호스피스의 사명이다. 장례식 장소는 사람들이 많이 올 수 있는 곳으로, 장례식은 최소한 간소하게, 기간은 상황에 맞추어, 그리고 최대한 빨리 상복 벗기. 이와 같은 새로운 죽음의 문화와 정서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 다음에 인제, 그렇게 숨이 심장이 멎었다고 죽은 것이 아니다. 그 이후에도 우리는 몸과 의식이 분리되는 시간을 그 사람에게 공급, 제공해주어야 되고, 기다려줘야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를 도와서 몸과 신체와 의식이. 인제. 처음에는 우리가 이렇게 의식과 몸이 붙어 있잖아요. 같이 활동하잖아요. 죽게 되면 몸이 못쓰게 되잖아요. 그러면 못쓰게 된 몸과 의식이 분리, 나누어져야 된다. 그래서 몸과 의식이 나누어질 수 있는 시간을, 이걸 사회적인, 대한민국의 그 어떤 죽음의 문화와도 연결되어 있는데. 우리가 불과 15년 20년 전에도 그렇게 가능했거든요.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아파트 문화가 생기면서 이 문화가 없어지기 시작했는데, 이건 너무나 중요한 거예요. 몸이 다 식고, 좀 기다려줘서, 적어도 24시간 기다려줘서 깨어나지 않을 때 그리고 몸과 의식이 분리되어버렸을 때, 그때 우리는 죽었다 라고 정의하고 그 다음 단계에 나아 가야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지금 숨이 딱 끊어지면 무조건 영안실, 냉장고에 딱 집어 넣는다. 그러고 길면 60시간 이내 우리 존재는 영원히 사라진다. 그래서 그 죽음 이후의 존재에 대한 존엄성이나 가치, 의미, 이것이 너무 없는 거예요. 급하강, 급하강하고 있어요. 그거는, 그 의식은 다음 생과도 무척 관련이 있어요. 그 전에는 우리는, 우리나라는, 유교 불교 뭐 다차원적으로 종교가 있지만 그것 상관없이 무조건 사람이 죽으면 당신이 죽은 방에다 병풍을 치고 홑이불을 덮어서 24시간을 기다렸어요. 그러고 안 깨어나면 지붕 위에 올라가서 옷을 흔드는, 초혼, 영혼을 부르는 의식을 했어요. 그래도 안 깨어나면 그때 입관을 해서 보통 기본 5일장을 치렀어요. 천천히 천천히. 지금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 문화가, 한국의 그 아름답고 고귀하고 가치있던 죽음의 문화가 우리 스스로 다 상실시켜 버렸어, 상실. 우리가 다 제거했어요. 우리 다음 생의 질이 엄청나게 떨어지고 있어요. 미국도 그리 하지 않고, 중국도 그리 하지 않고, 전 세계가 그리 하지 않아요, 우리나라 만큼 그리 하지 않아요. 일본이 좀 그런 경향이 조금 있긴 한데,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이렇지는 않죠.
소박한 즐거움 울산 시내에 열 번도 안 나가봤는데 [울산 온 지] 벌써 13년이 되었어요. 한 네 다섯 번 나갔던 거 같은데. 태화강 축제에 한 세 번 정도 나가본 것 같고, 그 다음에는 시장을 보러 두 번 나가고. 다섯 번 갔네.
「나의 가장 큰 취미와 즐거움은 환자돌보기요, 그 다음은 장보기다. 한 달에 두어 번씩 강연료를 모아들고 시장에 가서 환자들과 가족들을 위해 장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좋은 것을 요즘은 한 달에 한 번도 못 한다. 시간이 없어서다」 역시 그게 즐거운데, 환자 보는 건 마 그냥 가면 되는데, 시장 보는 즐거움이 없어 졌어요. 갈 새가 없어. 한 번씩 제가 마트에 가면 정말 즐기거든요, 시장 보는 걸. 환자들 에게 주고 싶은 것, 해주고 싶은 것, 이런 거 저런 거 막 이렇게 사서 뭔가 해주는 게 정말 즐거웠어요. 지금도 가면, 우리 이쪽 사무실에 뭐 사다주고 저쪽 사무실에 뭐 사다주고 챙기는 게 너무 즐거운데, 시간이 없어. 대신에, 일 년에 두 번은 하네. 추석 전날 내가 시장을 가요. 가서 이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에게 추석날 아침에 아침 식사를 스님이 해줘, 다. 설날에 시장 가요. 가서 사다가, 설날 아침에 여기 사는 모든 직원들이랑 밥 먹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양해줘요. 그거는 계속 하고 있어요. 스님 요리… 나는 잘한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도 긍정해요, “맞아요” 이렇게 해줘요. 야채 볶는 거. 저 정말 잘하는데, 할 시간이 없어요. 장 봐다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직원들이랑, 함께하는 사람들, 애쓰는 사람들에게.
완전히 뻗어버릴 때가 있죠. 그냥, 완전히 지쳐서 파김치가 되어 뻗어요. 그럴 때는 뻗어지는 대로, 뻗어서 하루 정도는 가만히 쉬어요, 멈춰요. 그리 하든지, 아니면 스님 그림을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데 그냥 물감을 풀어놓고 무언가를 그리든지, 마음대로. 「이 순간」 책갈피에 있는 그림, 제가 그린 그림이에요. 제가 쓴 책 중에 이 책 참 좋아 해요. 이거 바다예요, 바다. 응. 하늘이고 바다예요. 근데 이게 별인데, 별이 바다에 떠 있는 거. 요새는 그림을 안 그려가지고. 이때는 한창 너무 고통스러웠나봐. 이런 그림. 색 돌아가는 대로 그냥 그대로 그리거든요. 큰 붓으로 노랗게 묻혀서 막 돌리는 거야 이렇게. 어떨 때 내가 그림을 그리는가 보니까 고통스러울 때, 심신이 지칠 때, 이럴 때 이렇게 막 그림을 그리는데. 사람을 그리거나 그러진 않아.
이루어지이다 일과가, 보통 네 시 정도 일어나면 12시 정도까지 뭔가를 해야 해요. 목표가 여섯 시간 자는 건데 잘 안 되네. [제가 하는 일들은] 그게 전부 다 연결을 해보면, 생명과 생명 끼리의 공생과 공존, 존엄이 거기에 다 연결되어 있어요. 다 한 맥이에요. 한 나무에서 난 가지라, 그냥.
저희 재단이 두 가지 사업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하나는 교육이고 하나는 의료 사업이에요. 우리 불교계에서 이런 병원이 없어 좀 그랬지만, 사실 우리 한국은 굉장히 좋은 병원이 많지 않습니까. 저희가 복지의료사업부가 있거든요. 복지의료사업부는 이 병원 짓자마자 실행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우선 동남아시아쪽 중심으로 해서 가난한 나라에 작은 진료소를 지어준다거나, 또 의료봉사를 가서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거나 이런 사업들을 하고 있죠. 만약 예를 들면 우리가 네팔에 병원을 하나 지어주겠다고 하면 프로젝트를 실행해요. 스님들도 다 도네이션을 하는 거라 거기다가. 이거 하는 데 3억 든다 하면 3억을 도네이션 받아, 들어가서 거기다 지어주고, 이렇게. 프로젝트 당 한 개씩 해가지고 하고나면 또 다른 거 해주고. [의료봉사] 도네이션 하면 그걸 갖고 약을 삽니다. [재단 홈페이지] 들어가면 도네이션하게 되어 있거든요. 여러분이 보내주신 돈으로 거기 필요한 약을 사서 의사들이랑 함께 가요. 병원에는 내과 의사, 가정의학과 의사, 한방의사 해서 의사가 네 명. 행동대원들 사십 명. 환자 옮겨주고, 처리해주고, 식사도 우리가 다 해줘야 되거든요. 식사도 해주고, 그리고 약을 가져가기 위해서 우리가 사람이 많이 필요해요. 약이 어마어마해요. 한국 약이 좋아요, 아주 좋아요.
계획은, 계속 외국에 조만한 진료소를 만들어주는 일을 추진해갈 거고, 그 다음에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곳에 그런 병원을 비롯하여 그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고민하게 될 거고, 그 고민이 실행되어질 거예요. 아마, 그중에 가장 유력한 게 병원을 지어주거나 진료소를 지어주고 지원해주는 거. 그렇게 해서 케어할 거고.
그 다음에 인제 소원이 하나 있는데, 그 소원은 부산, 대구, 서울 지역에 누가 자기 건물을 도네이션 해주면 스님 거기다가 너무 아름다운 호스피스 병원을, 조그마한 병원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서울 지역, 대구 중간 지역, 부산 지역에 사람들의 죽음의 질을 높이 는 데 기여해주고 싶어요. 죽고나면, 자식에게 남겨줘도 3년 안 가거든요. 자식에게 물려 준 재산이 3년 안 가니까 굳이 물려주려 애쓰지 말고, 죽기 전에 내가 좀 많이 가졌다면 그런 것들을 도네이션 해주면, 서울 지역, 대구 지역, 부산 지역에 임종을 전문으로 돌봐 주는 병원을 만들고 싶다, 자재병원보다 더 아름다운 병원으로. 얼마나 그 사람의 공백이 무량하겠어요. 얼마나 돈 멋지게 쓰는 거잖아요. 나는 힘들겠지만 그 사람은 멋지게 쓰는 거지. (합장하며) 이루어지이다.
/ 각주
1. 여불위는 원래 양책(陽翟:河南)의 대상인(大商人)이었다.
2. 「이 순간」 p.132
3. 「이 순간」 p.229
4.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임을 뜻하는 불교용어이다.
5. 「이 순간」 p.26-28
6.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p.130
7. 「이 순간」 p.163
8. 「이 순간」 p.175
9. 「이 순간」 p.234
10. 「이 순간」 p.256
11. 마하보디교육원은 울산시 울주군에 위치한 불교 의료복지 전문인력 양성기관으로 불교호스피스 교육, 영적치유 에너지 강화 훈련, 승려연수 불교호스피스 영적돌봄, 직무연수교육 등을 실시하고 있으며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을 운영 중이다.
12. 「이 순간」 p.256
13. 2018년 6월 11일 능행스님을 상임대표로 한 울산불교환경연대와 상북면 주민들은 울산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울주군 상북면 길천산업단지 내 유해업체 아스콘 공장 설립 반대를 주장했다.
14. 「이 순간」 p230
15. 「이 순간」 p.194
16.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p.95
17.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p.238
18.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p.56
19. 「이 순간」 p.153
20. 「이 순간」 p.274
구술자 능행스님과의 만남
구술자 능행스님은 1960년 거제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그를 잉태했을 때 상서로운 태몽을 꾼 할아버지께서 태교를 매우 중히 여겼다. 구술자는 자존감과, 긍정,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의 근원에는 안전하고 아름다운 태교에서부터 열 살 때까지의 환경, 자긍심을 심어준 할아버지의 교육이 있었다고 말한다. ‘예배당 가는 길 들은 불경 소리’에 이끌려 삼십대에 출가를 결심하였다. 소록도, 꽃동네, 암환자 병동 등에서 호스피스 돌봄을 하다가 2000년에 충북 청주에서 정토마을 호스피스 센터를 건립하였다. 2003년 생사를 오가는 경험 끝에 죽음을 사유하고 환자와 보호자의 입장에 더욱 다가갈 수 있었다. 불교 호스피스병원 건립을 발원하여 십시일반의 모금으로 2005년 울산 울주군에 자재요양 병원 부지를 매입해 2년 후 불교 의료복지 전문인력 양성기관인 ‘마하보디교육원’을 개원하였고, 2009년에는 불교호스피스협회를 창립하였으며, 2014년에 자재요양병원을 개원하였다. 2018년에는 울산불교환경연대를 창립하여 자연과 인간이 상생하는 울산을 만들고자 힘쓰고 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의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게 전부 다 연결을 해보면, 생명과 생명끼리의 공생과 공존, 존엄이 거기에 다 연결되어 있어요. 다 한 맥이 에요. 한 나무에서 난 가지라, 그냥.”
2018년 8월 두 번째 방문에서 자재요양병원의 직원들과 구술자는 사랑하는 동료의 사고사 소식으로 큰 충격과 비탄에 빠져있었다. 만남을 취소하고 돌아가려는 기록자를 다시 자리에 앉힌 것은 그의 슬픔이 묻어나는 깊은 목소리였다. 두 번째 만남 녹취록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어떤 때는 내 삶 자체를 압도시킬 때가 있어요, 죽음이. 이런 죽음들. 내 삶을 그냥 잡아먹을 거 같은 압도적인 죽음.” 그는 8월 어느 날의 일기에 쓴다. ‘이 삶이 참 힘겹다.’ 그리고 또 쓴다. ‘삶은 매일 피는 꽃을 닮았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하루의 시작. 삶이 너와 나를 깜짝 놀라게 하도록 허락해야 하는 이 아침을 선물로 받았다. 밤이 주는 잠에 어제가 깨끗이 지나고 다시 맞는 아침. 모든 일은 정확히 일어나야 하는 대로 일어날 그날. 이 닦고, 세수하고, 선선한 바람을 만나면서 신선한 바람 속으로 걸어 나가는 것보다 더 고귀하거나 영적이거나 숭고한 일은 없음을 알게 하는 아침이다. 이해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이지만 그래도 깊은 수용으로 허락해보면서 매일, 매 시간, 매 순간을 그때가 언제나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 마지막 순간임을 성찰하는 아침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날이 또한 최초의 날이며 마지막 순간이 최초의 순간임을 일깨우는 아침이다. 모든 작은 것들 하나 하나 안에서 현존을 보이는 우주를 만나는 아침. 이 아침을 나는 찬미한다.’
“우리는 죽음 앞에 너무나 천진난만 합니다. 그게 너무 안타까워요.”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이사장 능행스님이 담담하게 말했다. 3일에 한번 꼴로 타인의 죽음을 품어 안는 삶, 호스피스 활동에 있어서 불모지나 다름없던 불교계에서 누구보다 발 빠르게 현장 속에 뛰어들어 새 길을 열었던 스님이다. 탁발로 후원금을 모으기 시작해 지금은 어엿한 불교 대표 호스피스 병원 이사장으로 굵게 새긴 직함에도 스님은 “아직 한참 부족하다” 말했다. 씁쓸한 미소가 돌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죽음에서 버둥대는 이들의 손을 잡아주고 싶다 말하는 눈빛, 30년 전 열정이 출렁였다. 춘삼월을 앞두고 전국적으로 봄비가 내리던 3월1일, 울주 상북면에 있는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에서 능행스님을 만났다.
능행스님은 교계 보다 일반에 더 알려져 있다. 2003년 출간한 가 일약 베스트셀러로 떠오르며 강한 인상을 남긴 덕이다. 50만부 이상이 팔렸다. 지금이야 ‘웰다잉’이 익숙한 언어가 됐지만 그때만 해도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 시한부 삶이라는 것이 막연하게만 다가오던 시절이었다. 스님은 지난 30여 년 간 호스피스 현장 곳곳을 다니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죽음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돌이켜보면 시절인연이 그리 된 것 같아요. 출가도 호스피스 활동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으니까요.” 처음부터 호스피스 활동을 하고자 마음먹었던 것은 아니었다. 출가 수행자로서의 삶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것처럼 인연은 불현듯 다가왔다.
청소년기를 개신교 문화 속에서 보낸 능행스님은 스물일곱까지 출가 수행자를 만나본 적도 사찰에 가 본 적도 없었다. 그때만 해도 몰랐다. 우연히 듣게 된 독송 소리, 운명처럼 만난 법정스님 책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줄은. “부처님오신날 즈음이었던 것 같아요. 1990년대 만해도 도로변에 레코드 가게가 많았거든요. 우연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염불 소리를 들었어요. 태어나서 처음 듣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끌리더라구요. 그 때 딱 멈췄던 것 같아요. 제가 살아온 삶 자체가.”
경전 독송 소리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불교라는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완전히 빠져들었다. 불교신문을 받아봤다. 신문 기사에 실린 책 광고를 보며 법정스님, 성철스님, 효봉스님 등 당대 스님들도 알게 됐다. 스님들이 쓴 책이란 책은 모두 사서 읽었다. 지금까지 알았던 종교와는 너무 달랐다. 정적이면서도 동적인 삶,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삶, 출가 수행자는 모두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출가를 해야만 하는 줄 알았다.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이사장 능행스님을 3월1일 만났다. 3일에 한번꼴로 죽음을 마주한다는 스님은 말기 환자의 경우 치료에 집착하기 보다 홀가분하게 삶의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이사장 능행스님을 3월1일 만났다. 3일에 한번꼴로 죽음을 마주한다는 스님은 말기 환자의 경우 치료에 집착하기 보다 홀가분하게 삶의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때만 해도 출가를 하면 선원으로 향하는 추세가 강했다. 능행스님도 진로에 대한 고민을 안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지인의 병문안을 하러 천주교 병원에 들렀다가 말기암 환자들을 봤다. “충격이었어요. 폐가 부풀어 오르고 주사 바늘을 꽂은 모습으로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듯한 모습을 한 환자 8명이 한 방에 누워있는데 제가 다 고통스러웠어요. 사람이 죽어가는 걸 그 때 처음 본거에요. 태어나서 가장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충격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황에서 능행스님은 병원을 도망치듯 나왔다. 스님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있던 불자들이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하던 때였다. 천주교 병원으로 병문안을 다니며 불자들을 위한 별도의 배려가 없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죽음만 기다리는 환자, 그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가족들이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스님은 승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고 했다. “무서웠다. 어떻게 해야할 줄 몰랐으니까. 그 때가 내 사문유관(四門遊觀)이었던 것 같다”고.
“그 때 처음 본 것 같아요.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죽는지. 불과 3개월 전만해도 멀쩡했을 텐데 그런 모습은 하나도 없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구요. 그 때부터 죽음 속에 스며들 듯 살았던 것 같아요.”
아프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들었다. 부산 소록도, 행려 병동, 충북 음성 꽃동네 등 곳곳으로 갔다. 독실한 불자들이 타종교로 개종하는 모습도 그 때 많이 봤다. 심한 경우 개종을 조건으로 내 건 병원도 있을 때였다. “불도 부산에서도 개종을 엄청 했을 때였어요. 이유는 간단했죠. 죽을만큼 아프니까. 가장 힘들 때 불교 보다 그들이 가까이 있으니까.”
무방비로 방치된 불자들을 보며 스님은 시설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시설이 어렵다면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시스템이라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절실한 마음은 행동으로 옮겨졌다. 1997년 호스피스 센터 건립을 위한 모금을 시작했다. 정토마을을 처음 세운 청주 땅이 그 때의 활동으로 마련된 것이다. 그 때만 해도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능행스님은 “급한 마음에 맨 땅에 천막을 치고 환자들을 들이기도 했다”며 “2000년이 되어서야 어느 정도 시설이 갖춘 호스피스센터를 운영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5병상으로 시작한 호스피스 센터, 입원을 원하는 환자는 종교 상관없이 받았다. 병원비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조립식 벽으로 지어진 탓에 신음 소리가 방에서 방으로 전해지는 상황이 이어졌다. 죽음의 질을 높이기 위해 센터를 지었는데 소음으로 또 다시 고통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콘크리트 벽으로 된 병원을 다시 지어야겠다.”
생각한 스님은 다시 모금을 시작했다. 땅을 사는 데만 3년, 건물 짓는 데만 또 5년이 걸렸다. 그 긴 시간을 감내한 끝에 세운 것이 지금의 울산시 울주군에 세운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이다. 140여 개 병동이 들어서 있다.
수많은 시행착오, 열악한 무관심 속에서도 능행스님은 30년 세월을 주저 없이 굵은 궤적을 그려왔다. 스님을 버티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능행스님은 질문으로 답했다. “죽음이 아주 가까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없지요? 당장 오늘밤 죽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있나요? 3시간 뒤에 죽는다고 생각해보세요. 무엇부터 할 겁니까?”
“먹고 살기 바빠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서 한번도 죽음을 생각해 본 적 없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선상에 들어오면 한없이 무너집니다. 죽을 준비가 다 됐다고 하는 사람조차 실제로 그 안에 들어오면 준비돼 있는 게 없어요. 시한부 삶을 선고 받고 대책 없이 들어와서 1~2달 내에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50~60년 인생을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정리 할 수 있을까요. 물리적으로도 너무 부족합니다.”
살고 싶다 살려야 한다. 몸부림치는 모습들을 보며 능행스님을 여전히 안타까움을 느낀다. “죽음의 고통은 생각하는 것보다 상상을 훨씬 넘어서요. 그래서 그 순간을 품위 있게 잘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해두어야 합니다. 당장 오늘밤에도 죽을 수 있다 생각하면 그때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이 달라집니다. 오늘을 실속 있게 살아야 다음 생도 실속 있게 살아지는 거에요. 코로나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나는 아닐거라고 생각하잖아요. 죽을 수 있는 이유가 살 수 있는 이유보다 많습니다.”
병원 운영 외에도 호스피스 교육기관인 ‘마하보디 교육원’, 구호 활동을 펼치고 있는 ‘국경없는 민들레’ 등으로 외연을 넓히는 이유다. “삶이 소중하면 죽음도 소중한 겁니다. 오로지 사는 것에만 가치를 두니 죽음에는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불자라면 더 잘 알거에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결국 사라진다는 것을. 죽음을 생각해야 하기 시작하면 늘 좋은 생각을 갖게 되고 욕망이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삶이 심플해져요. 다른 차원의 삶이 열려요. 간소하게 되니 많은 것을 소유하기 보다 나누게 됩니다. 그런 태도가 삶의 질을 한 차원 높일 겁니다. 불자들이 보다 많은 준비를 해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길, 스님들도 조금 더 호스피스에 관심을 가져주길, 그래서 모두가 아등바등 살기보다 지금 이 순간 보다 의미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능행스님은...
1994년 세종 학림사에서 수환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95년 불교 봉사자 15명으로 구성된 ‘자비회’를 창립, 1997년부터 정토마을 호스피스센터 모금 운동을 추진해 2000년 충북 청원군에 15병상 규모의 불교계 최초로 독립형 호스피스 시설인 정토마을을 세웠다. 2003년부터 완화 의료 전문 시설인 자재병원 건립을 위한 천일기도를 시작으로 2005년 울산시 울주군에 부지를 마련, 기금을 모아 2013년 200여 개 병동의 자재병원을 개원해 운영해오고 있다. 불교 전문 호스피스 교육을 위한 ‘마하보디 교육원’, 미얀마 등에서 구호 활동을 펼치고 있는 ‘국경없는 민들레’ 등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대한불교진흥원 대원상 단체부문 대상, 보건복지부장관 표창, 영축문화대상 등을 수상했으며 저서로는 산문집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임상전문서적 〈불교 임상기도집〉, 산문집 〈이 순간〉 등이 있다.
울산=이경민 기자 kylee@ibulgyo.com 유지호 부산울산지사장 kbulgyo@ibulgyo.com
경북 안동의 한 산골마을에 「이상한」유적들이 발견됐다. 한국 최대의 돌거북상 6개와 6각형 모양의 주춧돌, 인공축대 등이 지금도 방치돼 있다. 누가 무엇 때문에 외진 산자락에 「소왕국」을 건설했을까? 이 유적지를 처음 발견한 이는 전설의 여인왕궁터라고 주장하는데….
지난 8월초 대전에 사는 한 기공사로 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경북 안동에 왕궁터가 발견되었는데 같이 가서 확인해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의 「전공」과는 별관계가 없을 법한 전혀 엉뚱한 제안이었지만 귀가 솔깃해졌다. 평소 빈말을 하지 않는 그의 성격을 아는지라 왕궁터는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무언가 역사적 의미가 담긴 것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일 이어지는 서울의 찜통 무더위 속에서 반은 피서 삼아, 반은 문화유적 답사 삼아 주말 동행을 약속했다.
전화의 주인공은 올해로 26년째 기공사로 활약, 우리나라 기공계의 선구자격이라고 할 수 있는 金炅甫씨(김경보·49). 대전의 약속 지점에서 그를 만난 뒤 바로 안동으로 직행했다. 경북 영주에서 안동으로 가는 5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광평리(안동시 서후면)로 접어들어 10분 남짓 달렸을까, 「가야」라는 팻말이 서 있는 마을 입구가 오른쪽에 나타났다. 차를 바로 꺾어 10m쯤 진입했더니 오른편 논 한가운데에서 버티고 앉아 있는 아기거북 두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주 잘 생긴 돌 거북상이다. 초록빛 벼이삭 틈에 웅크려 있는 모습이 매우 자연스럽다. 이 논의 주인은 거북을 옮기기가 귀찮았던지, 아니면 거북상을 신령스럽게 생각했던지 논에 그대로 모셔두고 있었다.
『왕국의 번영을 기원하던 거북들이지요. 여기 말고도 왕궁터 입구 곳곳에 아기 거북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김씨는 씩 웃는다. 아예 우리 일행이 가는 목적지가 왕궁터라고 단정하고 있는 말투다. 아기거북을 만난 곳에서부터 다시 5분여 겨우 차 한대 통과할 정도의 시멘트 도로를 달리는데, 차창 좌우로는 산쪽으로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전형적인 두메산골 풍경만이 펼쳐진다. 이런 외진 곳에 무슨 왕궁터 같은 것이 있으랴 하는 의심이 부쩍 들었다.
그러나 좁은 도로 하나만을 가운데에 남겨두고 정면을 가로막고 있는 야산을 통과하자마자 경치가 갑자기 달라져버렸다. 순식간에 5만평 정도 되는 평지가 나타난 것이다. 도로가 난 출입구를 제외하고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분지형이었다. 아기 거북상이 있는 마을 입구에서조차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내부 풍경이다. 김경보씨는 평지에 들어서자 차에서 내린 다음 아담한 규모의 콩밭 너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가 손짓하는 곳에는 산자락 아래에 파묻힐 듯 웅크리고 있는 바위 덩어리가 있었다.
6개의 돌거북과 6각형의 왕궁터
김경보씨는 또 거든다. 『지금 거북바위가 앉아 있는 산은 왕국 사람들이 천신제(天神祭)를 지내던 곳이고, 거북바위는 왕국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또 산 자체가 6각형 구조로 인공적으로 조성된 것입니다. 거북바위도 모두 6면을 따라 6개가 있었지요. 이곳에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여의주(둥그런 돌)를 잃어버린 거북바위가 1개 더 있고, 또 그 밑으로는 논에 잔해가 흩어져 있는 거북바위가 있습니다. 나머지 3개의 거북바위도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의 말은 척척 맞아떨어졌다. 김씨는 이미 완벽하게 사전답사를 해두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산자락 아래로 산을 둘러싸듯이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다른 거북바위가 있는 곳으로 옮기는 동안 의외의 수확을 거두었다. 수풀 속에 살짝 숨어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 인공축대였다. 축대는 김경보씨도 미처 챙겨보지 못했던지 신기해했다. 그것은 3~4단으로 축성된 바위들이 산 둘레를 2백m쯤 둘러싼 형태였다.
누가, 왜 그랬을까? 사방이 산으로 둘어싸인 외진 산골 마을에서 유독 이 산에 돌거북상을 만들고 축대를 쌓았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부여돼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면 이 산 자체가 왕궁터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왕궁 터는 지금 논으로 변한 이쪽 평지입니다. 이곳저곳에 돌무더기들이 보이지요. 그것이 왕궁의 주춧돌입니다. 그런데 널려진 주춧돌들도 그 선을 따라가다보면 역시 6각형 구조입니다』
주춧돌은 여름 태양을 한껏 받아 푸르게 자란 벼이삭들에 가려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드문드문 흩어져 있었다. 너무 방대하게 흩어져 있어 6각형인지는 잘 알 수 없었으나, 김씨는 논이 텅 빈 겨울에 와서 보면 분명히 나타난다고 말했다. 6자가 들어가는 이상한 모양의 구조물들은 아직까지 우리나라 고고학계에서는 보고된 바가 없다. 결국 호기심 삼아 김씨를 따라 나섰다가 의외로 수수께끼의 문화유적 현장을 만난 셈이다. 마치 고고학자가 최초로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유적지를 발견해냈을 때 느끼는 희열감까지 들었다.
이곳 유적지에서 마치 고대에 살아본 적이 있다는 듯이 말하는 김씨의 「일방적인」 해설은 일단 접어두고 마을촌로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행정지명으로는 광평 1리와 2리, 일명 제전부락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50호 정도가 사는 아담한 산골마을. 먼저 노인회관을 찾았다. 마침 이곳에서 토박이로 살아온 유건기씨(68.광평2리)를 만났다. 거북바위에 대해서 물어봤더니 대뜸 『아, 그 용바우(바위)요? 그것은 아마 땅 생기면서부터 있었지요』하면서 매우 오래됐다고 말한다. 그는 거북 입에 들어 있는 여의주 때문에 금구상을 용상으로 본 모양이었다. 마을 사람들도 다 「용바우」라고 부른단다.
『용바우 밑에는 거북바우도 있었어요. 그런데 77년도쯤에 새마을 사업을 한다고 길을 내면서 바우들이 깨져버렸습니다. 깨진 돌들이 아직 거기에 남아 있어요』
유씨는 논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바위들이 거북바위였다는 것만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들의 아주 먼 옛날 조상 때부터 있어 왔다고도 증언했다. 다른 마을사람들도 대개 비슷한 대답을 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터전이 그 옛날 왕궁터였다는 얘기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듯했다.
미스터리 고대사
이곳이 왕궁터든 아니든 누가 이 첩첩산중에 어마어마한 거북상을 세우고, 산에다 인공적인 축대를 쌓고, 들에다가는 주춧돌로 건물을 세웠단 말인가. 그것도 마을 입구에서도 전혀 보이지 않도록 아주 은밀한 곳에 감추듯이 말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대 한반도의 왕궁은 대부분 평지에 세워졌다. 신라의 경주가 그렇고, 백제나 고구려의 수도도 마찬가지였다. 왕족과 신하들이 있고 일반 백성들이 모여 살기 위해서는 당연히 평지가 적격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김경보씨의 주장과는 달리 다른 용도로 쓰인 유적지일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나라 역사서 혹은 문헌 중에서 경상북도 안동과 관련해 어떠한 왕국이 존재했었다는 기록은 아직까지 보고된 바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서는 지금으로부터 2천여년 전 경상북도를 중심으로 신라가 일어나고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백제가 태어나고, 한강 이북에 고구려가 있었고, 그 후에 경상남도 쪽에 가야가 있었다고 기록한다. 그 시기에 안동에 어떤 왕국이 있었다면 우리나라 최고의 고대 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그 흔적이나마 기록해두었을 텐데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기원후 7세기에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이후 이어지는 고려와 조선왕조의 역사에서 찾는다는 것은 더 무리한 일이다.
오히려 가능성이 있다면 고구려 백제 신라 이전의 역사, 고고학적 용어로는 「원삼국시대」때의 일이 아닐까. 실제로 김경보씨도 이 유적지의 건설은 한반도에 신라와 백제가 들어서기 이전인 BC 100년 전후의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김경보씨를 「심문」할 차례였다. 그는 어떻게 해서 왕궁이라고 주장하는 이곳의 유적지를 손금 보듯 훤히 알고 있으며, 그 존재했던 연대를 원삼국시대라고 단호하게 주장하고 있는가. 그는 고고학의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던 아마추어 아닌가.
김씨는 먼저 일부러 이곳을 안내한 것에 대해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양해를 구한 다음 장황하게 그 배경을 설명했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몇해전 박모라는 청년이 「심령 기치료사」로 소문난 김씨를 찾아왔다. 박씨는 단전(배꼽 밑의 경혈) 아래 부분에 심한 습진이 생겨 낫지 않는 데다가 밤만 되면 악몽에 시달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다고 호소했다. 병원을 찾아도 그의 습진과 악몽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는 것. 게다가 박씨에게는 남에게 털어놓지 못할 고민도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자신은 원래 여자로 태어나야 했는데 남자로 태어났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여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해 유년시절에는 여자아이처럼 소꿉놀이를 해왔고, 철이 들어서는 여성들의 소지품을 수집해 몰래 간직하는 것으로 여인이 되지 못한 한을 풀어왔다. 그런 한편 자신의 이런 모습을 극복해보려고 일부러 해병대에 자원 입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호된 기합과 훈련 속에서도 박씨의 내면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는 결국 『내 팔자는 여성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구나』하고 체념하고 마지막으로 돈을 모아 성전환수술을 받으려고 하던 차에 습진이 생긴 것이다.
본론은 지금부터다. 찾아온 박씨를 처음 본 순간 김경보씨는 박씨가 여왕의 후생(後生)이라는 것을 투시(초능력의 일종)로 알아냈다.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2천년도 훨씬 넘은 오랜 옛날 한반도 땅에서 남자들에게 핍박받는 여인들을 구해 그들만의 왕국을 세운 「사라」라는 여왕이었다. 박씨가 여인이 되고 싶어했던 것도 전생의 기억이 현생의 잠재의식까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박씨는 여인 왕국을 건설하면서 당시 수많은 남자들을 죽인 업으로 인해 현생에 태어나서는 질병과 악몽으로 고통받고 있었던 것. 김씨는 자신의 기로써 박씨의 압성습진은 물론 악몽까지 말끔히 고쳐냈다.
과거를 투시해 찾아낸 역사유적?
김씨로부터 치료를 받은 후 박씨는 자신의 전생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어졌고 그런 능력을 배우고 싶어했다. 김씨는 그가 자질이 있어 보여 「자동서기」라는 영능력 개발 훈련을 시킨다. 자동서기는 외국 말로 「아캬샤 레코드(akasha record)」라고 하는데 미국의 유명한 예언가 에드가 케이시와 프랑스의 노스트라다무스가 이 방법으로 수많은 예언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이 기술은 한마디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서 날아오는 과거 혹은 미래의 메시지를 영적으로 수신해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놓는 것. 이리하여 박씨는 자신의 전생의 역사, 곧 여인 왕국의 역사를 자동서기로 기술해나간다.
그러는 한편으로 김씨는 전생에 여인 왕국과 관련된 환자들의 방문을 받는다. 대표적인 예가 울산에 사는 황명숙씨. 수년 전 갑상선암으로 수술을 받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임파선에 암이 재발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 황씨는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김씨를 만난다. 황씨는 김씨로부터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말을 듣게 된다.
황씨의 전생은 여인 왕국 시절의 여자 무사. 이 여자에게 무예를 가르친 스승이 바로 김씨 자신이었다는 것. 말하자면 전생의 스승과 제자가 현세에서 기공사와 환자로 만나게 된 셈이다. 어쨌든 전생의 여자 무사는 다른 검객들과 검술겨루기를 무척 좋아해 사람들을 수도 없이 살상했다. 그 벌로 황씨는 현생에 태어나 고통을 받게 됐다. 재미있는 현상은 황씨는 언제나 목부위와 배부위에 묵직한 통증을 느껴왔는데, 김씨는 황씨가 묻기도 전에 전생에 검으로 남의 목과 배를 많이 갈라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현상은 황씨가 김씨로부터 기치료와 기운동을 받으면서 나타났다. 황씨는 치료를 받아 몸이 좋아지자 기운동 시간을 차츰 늘려갔는데,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무술동작이 나왔다. 평소 춤이나 노래 같은 것에는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고 운동이라고는 아무 것도 해보지 않았던 전업주부인 황씨에게서 놀랄만한 전통 무예동작이 나타난 것. 처음엔 가족들도 믿지 않았으나 그녀가 무술 시범을 보이자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암에서 완전히 벗어난 황씨는 지금도 김씨와 함께 기수련을 하고 있다.
이외에도 김씨가 병원에서 치료를 포기한 간 질환자 등을 고쳐내면서 여인왕국과 관련된 희한한 얘기는 적지 않지만 대략 이 정도로 그치기로 하자.
『제 자신이 여인 왕국과 무관하지 않은 사람인지, 환자들도 여인왕국과 인연깊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게다가 얼마전에 박씨가 자동기술로 밝혀낸 우리 고대 역사를 마무리해 책(무린바타 전4권, 행림출판)으로 엮어 냈습니다. 여인들의 왕궁 터도 책의 무대가 되는 장소를 사진으로 찍기 위해 박씨와 함께 안동 일대를 다니면서 찾아낸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고대사에서 잃어버린 역사를 햇볕속으로 끄집어낼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김씨는 공상 과학소설보다도 더 앞서 나가는 논리를 가지고 매우 신념에 차 얘기한다. 김씨가 밝힌 환자들을 만나 확인해봤지만 역시 김씨의 「비상식적인」 말에 깊이 동조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찌됐건 김씨로 인해 자신의 건강을 되찾은 것을 최대의 증거로 여기고 있었다.
게다가 김씨는 안동의 왕궁터를 눈앞에 들이밀고 있다. 김씨는 왕궁터가 타인 소유라서 파헤칠 수 없지만, 이 왕궁터를 발굴하면 훨씬 더 구체적인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게 돼 있다고 확신한다.
아마추어들의 세계적 발굴기
하긴 고고학자만이 문화유적 발굴을 전담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 고고학 발굴사에서 유명한 발굴들은 전문가보다도 비전문가의 손에 의한 것이 더 많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성경에서 무려 1백52번이나 등장하는 고대의 대제국 앗시리아는 1843년 봄까지는 단순히 전설상의 나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프랑스의 의사 출신인 보타와 영국의 빈털터리 여행자 레이아드가 앗시리아 제국의 왕궁터를 발굴함으로써, 그때까지 고대 이집트 문화가 인류 문명의 발상지라고 하던 인류사를 다시 쓰게 되었다. 고고학자가 아닌 보타와 레이아드의 땅파기는 현대 고고학 발굴의 효시가 되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나오는 전설의 도시 트로야와 미케네를 찾아낸 실리만 역시 고고학자가 아닌 사업가였다. 고고학자들은 전설만을 믿고 주먹구구식으로 땅을 파헤치는 실리만을 정신병자라고 비웃었지만, 이후 그가 발굴한 터에서 유물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밀림속에 버려진 마야제국의 유적지를 처음 발굴한 스티븐스는 법률가 출신이었고, 캄보디아에서 사라진 크메르왕국을 찾아낸 뷰우오는 가톨릭 신부였다.
외국뿐이랴. 지난 76년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동양 최고(最古)의 유물선과 유물을 처음 발견하고 이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들 역시 고고학과는 상관없는 아마추어들이었다.
그러니 기공사라고 해서 자신의 독특한 「비법」을 가지고 역사투영을 통해 유물을 발견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실제로 김씨는 이 방법을 통해 지금까지 세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흔적을 찾아내지 않았는가. 문제는 이것이 과연 사료에서 나타나는지, 직접적인 증거가 있는지 여부다. 김씨의 확신대로 땅속 깊숙이 묻혀 있을 유물들이 발굴된다면 여인왕국의 이야기도 전설이 아닌 실화로 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여기서는 남겨두자. 그것은 학자들의 몫일 것이다.
남은 것은 앞으로 이곳을 정식으로 발굴할 누군가를 위해서 참고삼아 여인 왕국 등장에 관한 역사적 배경을 들어보기로 하자. 물론 이것은 문헌에 나온 역사가 아닌 박씨가 받은 「소설 같은」 자동서기를 통해서다.
한반도의 아마조네스 왕국
때는 고조선 시대. 한반도 북쪽 땅에서 충성을 다하다 반대파에 억울한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최후에 환멸을 느낀 「용장」이란 장수가 만삭의 몸으로 병든 아내와, 딸 「시애」을 데리고 사람이 살 만한 땅을 찾아 남하한다. 그러나 도중에 아내를 잃고 아버지와 딸이 정착한 곳이 지금의 안동 일대. 이후 용장은 딸인 시애를 통해 자손을 퍼뜨리게 되고, 후손들은 점점 번창해 「알신」과 「공명」이라는 씨족 집단으로 성장한다. 이들 집단은 철저하게 여성을 존대하는 모계 중심사회를 유지한다. 그것은 시조 용장의 유언 때문이었다.
이 씨족 사회가 바깥으로도 알려지면서 외부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인구가 점점 늘어난다. 그러나 알신과 공명 집단은 외부인의 정착은 허락했으되 혼인은 거부하는 등 순수한 혈통만을 고집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날아온 돌이 박힌 돌 뺀다는 격으로 유입인구가 씨족들보다 훨씬 많아지자,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지도자를 뽑아 부족국을 형성한다. 물론 그들은 남성 중심의 사회를 형성했다. 이렇게 해서 경북 일대에 6부족 사회가 형성된다.
그런데 여성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살아야 하는 알신과 공명 집단의 남성들은 이웃부족의 남성들과 자신들을 비교해보고는 크게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육체적으로도 남성이 우월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잠자리에서까지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여성들을 상전처럼 모시며 기죽어 사는 것이 억울했던 것이다. 마침내 쌓이고 쌓인 불만이 행동으로 터져 나왔다. 그들은 몽둥이를 앞세워 여성들을 무력으로 굴복시킨 다음 남성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어낸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듯이,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심한 매질과 구박은 물론 「살파」라는 집단농장을 만들어 여성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가 하면, 「미루나기」라는 젊은 여인들의 수용시설을 만들어 여자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기도 했다. 심한 경우 여자들을 인신매매하기도 했다. 이제는 짐승과 비슷한 대우을 받는 여성들은 자신들을 구해줄 메시아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다가 여인들의 집단농장을 탈출한 한 여인이 이웃나라로 도망쳐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는다. 이때가 BC 126년의 일. 그 아이가 후에 진녀라는, 여인국의 여왕이 된다. 진녀는 당대 최고 검객이자 선비인 기른장으로부터 10년 동안 문무를 익히며 20세 처녀로 자란다. 진녀의 출현에 용기 백배한 여인들은 그녀의 휘하로 모여들고, 그들만의 왕국을 건설할 꿈을 꾼다.
그러나 수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남성들보다 열세일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진녀는 우선 잘 생긴 젊은 여인들을 골라 요즘 말로 하자면 미인계를 써서 남성들이 지배하는 6부족에 침투시킨다. 그리하여 소수의 정예 부대를 이끌고 기습작전을 펴 부족들을 하나씩 무너뜨린다. 진녀 부대가 6부족 등을 멸망시키면서 규합한 여성은 30만명에 이른다. 이들은 처음에 숲속에 숨어서 이른바 게릴라전을 폈으나 이제 두려워할 것이 없게 되자 「서현」(지금의 안동 왕궁터)에다 왕궁을 건설한다. BC 106년의 일이다.
이 왕궁터는 출입구를 제외한 4면이 거의 험한 산으로 둘러싸이다시피 한 천연의 요새였다. 여인들은 마치 벌집을 연상케 하는 6각형의 3층 목조건물을 짓는다. 그리고 산꼭대기에 저수장을 만들고 그 물로 반 수세식 통나무 소변기를 사용할 만큼 문명한 생활을 한다. 여인들은 또 왕궁 입구에다 아기 거북을 만들어 세우고, 궁궐 옆에는 수호신이자 남성을 상징하는 거대한 돌거북 6개를 세운다. 왕궁터 북쪽의 가장 신령하다고 믿은 언덕에는 국정자문위원격인 「상라여신」이 기거하며 여왕의 스승 노릇을 했다. 왕궁 안의 모든 길은 꽃으로 단장하고 뜰에는 금잔디를 가꾸었다.
여인들은 포로로 잡아온 남자들을 이용해 성욕을 해결한다. 만약 임신이 돼 여자 아기가 태어나면 전사로 키워내고 남자 아기는 왕궁에서 30~40리 떨어진 「월전」이란 곳에 버려서 굶어죽게 만드는 잔혹성도 보인다. 깊을대로 깊은 남성에 대한 증오심이 모성애를 가렸던 것이다
신라 박혁거세의 정체
여왕 진녀가 왕궁을 산속 깊은 곳에 세운 데는 이유가 있었다. 6부족국을 무너뜨려 나라를 세웠지만 주변의 남성이 통치하는 나라들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약한 상태여서 일단은 여인왕국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여인국 주위로는 소백산 남서쪽에 자리잡은 동인국(후의 한반도 백제)이 있었다. 동인국이라는 이름은 서해바다 건너 중국 대륙에 서인국(후의 대륙 백제)이라는 나라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동인국은 몇 차례 여인왕국에 기습을 시도하지만 여인국의 미인계를 이용한 첩보전과 수기(手旗)를 이용한 신속한 연락망, 고도로 훈련된 여인 기마병 앞에서 맥을 못추고 퇴각했다.
여인국 남쪽으로는 일찍부터 중국대륙에서 한반도에 진출한 6가야가 있었다. 6가야 세력은 어쩌다 여인왕국이 큰 위기를 맞을라 치면 번번히 도와주어 위기를 모면한다. 가야인들은 북쪽세력(후에 고구려)과 서쪽세력(백제)의 방어기지인 여인국이 무너지면 자신들도 위험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인왕국이 개국한 지 30여년만에 여왕 진녀는 죽고 후에는 「울멍」이라는 장수에 의해 여인국은 문을 닫게 된다. 이때가 기원전 56년경. 이후 여인국의 여성중 일부는 각지로 뿔뿔이 흩어지고, 남은 여성들은 남성들에 대한 증오심을 잊기로 하고 남성사회인 사로 6촌과 더불어 새로운 나라를 일으키기로 결정한다. 그것이 바로 BC 54년 박혁거세와 여인국 출신 알영이 합의해 세운 신라인 것이다.
여기까지가 자동서기로 기록한 여인왕국의 역사다. 김경보씨와 함께 안동의 여인 왕궁터에서 마지막 여정으로 경주를 향했다. 김씨의 주장에 의하면 남성과 여성들을 화해케 하고 그 공로로 신라의 초대왕이 된 박혁거세는 첫 도읍지로 지금의 황룡사 터를 잡았다는 것. 현재 복원처리를 한 황룡사 터를 밟으면서 먼먼 과거로 눈을 돌려본다.
사람들은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하면 대개 알에서 나온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설화나 금 바구니에서 출현한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 전설을 머리에 떠올리는 게 보통이다. 그만큼 신화시대로 여긴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은 바로 그 2천년 전에 한반도에서는 신화시대가 아닌 역사시대로 활발한 문화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는 것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다.
지난 88년 발굴된 경남 창원 다호리 고분군에서는 2천년 전의 유물인 붓과 부채, 목제 칠기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붓은 당시 우리 민족이 문자생활을 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이고, 동양 특유의 공예품인 칠기는 문명의 발달 정도를 가늠하는 잣대였다. 또 최근에 발굴이 완료된 전남 광주 신창동 유적지에서는 높은 문화수준을 나태내주는 가야금과 가죽신의 신발골, 베틀의 부속기구 등이 출토됐다. 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 이전에 높은 문화를 유지한 집단들이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다.
바로 그 시기에 진녀의 여인왕국은 50년간이라는 짧은 역사를 누리다가 신라에 자리를 물려주고 무대에서 사라져간 것이다. 과연 여인 왕국은 존재했을까, 그리고 안동의 유적지는 과연 여인 왕국의 근거지였을까. 왕궁터를 발굴한다면 과연 어떤 유물이 쏟아져 나올 것인가.
만일 여인왕국의 존재가 밝혀진다면 우리 고대사는 그만큼 풍성해질 것이고, 그것이 한 기공사의 상상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쳐도 재미있는 소설 읽기 정도는 되지 않을까.
‘BC57년에서 BC24년경 30여 년간 안동에 여인왕국이 있었고, 진녀 여왕이 울멍에 망하고 남은 여인들이 경주로 가서 다른 부족들과 신라를 건국하였다.’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있다.
그 여인왕국의 위치는 천등산 봉정사 동쪽 개목사 아래 산야에 펼쳐진 서후면 광평(가야)리이며, 실제로 고대국가로 추정해볼 수도 있는 돌거북상 6개와 6각형 주춧돌과 인공축대 등 여인왕국을 뒷받침할만한 유물들이 들판과 마을입구 등에서 발견되고 있다. 지금은 재미있는 전설이지만 만약에 2천여 년 전의 여인왕국으로 증명이 된다면 대한민국 역사를 다시 써야하는 어마어마한 스토리텔링이 될 수도 있다는데 주목해봐야 할 것 같다.
필자가 지역 언론인 친구와 호기심에 몇 번이나 현장을 둘러보니 마을주변으로 인공석축이 쌓여있고, 개목사 아래 계곡으로 생활용수를 저장하여 이용할 수 있는 저수지 같은 구릉지대가 층층이 있고, 가야리 들판 중앙에서 궁궐터로 볼 수도 있는 솔밭과 거북바위와 육각형 받침대 등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고대유적 전문가가 아닌 일반상식으로 보기에는 호기심이 극에 달하였지만 여인들만의 왕국이었다는 증거유물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아직까지는 이야기 거리로만 남겨둘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보물창고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1997년 신동아 9월호(안영배 동아일보 기자)에 실린 이 이야기는 과연 누가 어떻게 시작한 걸까? 행림출판사에서 1989년부터 1999년까지 4권을 출간한 국내 최초의 자동서기(akasha record 자기도 모르게 영감으로 쓰여 지는 현상)로 쓰인 이 책은 여인왕국, 혹은 무린바타 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으나 그 이후에 출판이 중단되어 완결이 나오지 않은지 20년이 지났다. 그러면 여인왕국 이야기의 줄거리를 발췌해본다.
때는 고조선 시대. 한반도 북쪽 땅에서 충성을 다하다 반대파에 억울한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최후에 환멸을 느낀 ‘용장‘이란 장수가 만삭의 몸으로 병든 아내와, 딸 '시애'를 데리고 사람이 살 만한 땅을 찾아 남하한다. 그러나 도중에 아내를 잃고 아버지와 딸이 정착한 곳이 지금의 안동 일대. 이후 용장은 딸인 '시애'를 통해 자손을 퍼뜨리게 되고, 후손들은 점점 번창해 '알신'과 '공명'이라는 씨족 집단으로 성장한다. 이들 집단은 시조 '용장'의 유언으로 철저하게 여성을 존대하는 모계 중심사회를 유지했다.
이 씨족 사회가 바깥으로도 알려지면서 외부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인구가 점점 늘어나 남성 중심의 부족국가를 형성했다. 이렇게 해서 경북 일대에 6부족 사회가 형성된다. 그런데 여성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살아야 하는 '알신'과 '공명' 집단의 남성들은 이웃부족의 남성들과 자신들을 비교해보고는 크게 불만을 품고 여성들을 무력으로 굴복시킨 다음 남성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고 여성들에게 심한 매질과 구박은 물론 '살파'라는 집단농장을 만들어 여성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가 하면, '미루나기'라는 젊은 여인들의 수용시설을 만들어 여자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기도 했다. 이제는 짐승과 비슷한 대우를 받는 여성들은 자신들을 구해줄 메시아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다가 여인들의 집단농장을 탈출한 한 여인이 이웃나라로 도망쳐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는다. 이때가 BC 126년의 일. 그 아이가 후에 '진녀'라는 여인국의 여왕이 된다. ‘진녀’는 당대 최고 검객이자 선비인 기른장으로부터 10년 동안 문무를 익히며 20세 처녀로 자란다. ‘진녀’의 출현에 용기백배한 여인들은 그녀의 휘하로 모여들고, 그들만의 왕국을 건설하고 미인계를 써서 남성들이 지배하는 6부족을 멸망시키면서 규합한 여성들이 30만 명에 이른다. 이들은 처음에 숲속에 숨어서 이른바 게릴라전을 폈으나 이제 두려워할 것이 없게 되자 ‘서현’(지금의 안동 왕궁터)에다 왕궁을 건설한다. BC 106년의 일이다.
여왕 ‘진녀’가 왕궁을 산속 깊은 곳에 세운 데는 이유가 있었다. 6부족국을 무너뜨려 나라를 세웠지만 주변의 남성이 통치하는 나라들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약한 상태여서 일단은 여인왕국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여인국 주위로는 소백산 남서쪽에 자리잡은 ‘동인국’(후의 한반도 백제)이 있었다. ‘동인국’이라는 이름은 서해바다 건너 중국 대륙에 ‘서인국’(후의 대륙 백제)이라는 나라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동인국’은 몇 차례 여인왕국에 기습을 시도하지만 여인국의 미인계를 이용한 첩보전과 수기(手旗)를 이용한 신속한 연락망, 고도로 훈련된 여인 기마병 앞에서 맥을 못추고 퇴각했다. 여인국 남쪽으로는 일찍부터 중국대륙에서 한반도에 진출한 6가야가 있었다. 6가야 세력은 어쩌다 여인왕국이 큰 위기를 맞을라 치면 번번히 도와주어 위기를 모면한다. 가야인들은 북쪽세력(후에 고구려)과 서쪽세력(백제)의 방어기지인 여인국이 무너지면 자신들도 위험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인왕국이 개국한 지 30여 년만에 여왕 ‘진녀’는 죽고 후에는 ‘울멍’ 이라는 장수에 의해 여인국은 문을 닫게 된다. 이때가 기원전 56년경. 이후 여인국의 여성들 일부는 각지로 뿔뿔이 흩어지고, 남은 여성들은 남성들에 대한 증오심을 잊기로 하고 남성사회인 사로 6촌과 더불어 새로운 나라를 일으키기로 결정한다. 그것이 바로 BC 54년 ‘박혁거세’와 여인국 출신 ‘알영’이 합의해 세운 신라인 것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만 2018년 새해에는 2천 년 전 여인왕국의 주인공 진녀가 천등산자락에 백마를 타고 바람같이 나타나기를 기대해본다.
현존하는 어떠한 사서(史書)나 유물 및 야사(野史)에서 박혁거세가 신라를 건국하기 이전 경북 안동지역에 여인들만 모여 살았던 여인왕국이 있었다는 기록이나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다.
그러나 실재했던 여인왕국의 여인들은 38여 년 동안 왕국을 지탱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동백제와 대규모 전쟁을 치르기도 하고, 가야(伽倻)로부터 빼어난 토기술과 기하학 및 천문, 지리 등을 전수받아 왕국의 번영을 누렸었다. 이것이 훗날 신라문명의 모태가 된다.
왕국을 지탱하기 위한 가냘픈 여인들의 피나는 노력과 그 역사를 기록한 이 글은 우주 속에 기억되어진 기록을 고도의 정신수행을 통한 자동서기(自動書記)·자동기술(自動記述)에 의해 씌어진 것이다. 흔히 자동서기를 아카식 레코드〔akasha record〕라 부른다. 서양에도 이 방법으로 기록된 실례가 많이 있다.
성경의 일부와 리바이 도링(Levi DowLing)이 받아 적은 보병궁 복음서(예수의 12세부터 30세까지 18년간의 드러나지 않은 생을 적은 것).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를 비롯한 각종 예언서들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카식 레코드를 전문적으로 교육시키는 단체까지 있다. 그러나 역사부분을 기록한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자동서기는 받아 쓰는 이의 인격적인 자질에 따라서 보다 진실에 가까운 진술이 되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할 것이다. 이 글을 자동서기한 필자 역시 진실된 기록을 하느라 노력했던 그 많은 시간들이 꿈만 같다.
평소 아둔한 머리로 중등교육을 마친 뒤 학문과는 담을 쌓고 살았고, 편지 한두 장 쓰는 것도 골머리를 썩여가며 끙끙거리던 필자였다. 또한 어릴 적부터 자폐적인 데가 있어 남과 어울리는 일이 쉽지 않았었다.
나름대로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정신수행을 하던 중, 1986년 우연히 어떤 형을 만나게 되면서부터 책이나 또는 옛 정신수행자들 사이에 비밀리 전해져 내려오는 자동기술의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되어 각고의 고난 끝에 이 글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어쩌면 나는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는 여인왕국의 역사를 사실 그대로 진실되게 현세에 밝혀야 하는 사명을 띠고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현실에 살고 있는 우리들 또한 지난날 역사의 주인공들이 현세에 다시 태어나 오늘의 문명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하다면 우리는 지난날의 기억을 재조명하고 양심이라는 진실 속에 비추어 잘못된 지난날을 거울삼아 미래의 흐름을 밝은 길로 설계해야 될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진실을 외면한 채,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나 국가라는 차원에서까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오도시켜 거짓이 난무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 살아왔다.
그러나 거짓은 영원할 수 없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힘의 논리에 따라 힘있는 자들을 중심으로 역사의 물길이 흘러왔으나, 우주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사실을 관조(觀照)한다면 진실이란 어느 때고 말없이 그대로 흐르고 있을 뿐이다.
이 글은 1990년에 《여인왕국(1·2·3》이라는 제목으로 발표가 됐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여의치 않은 사정으로 인하여 중간(重刊)을 하지 않고 있다가 글을 더 다듬고 재구성하여 이제 다시 출간하는 것이다.
지금은 시대적인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전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이상하게 바라보던 사회적 분위기가, 이제는 중·고등학교 학생들 사이에 관심의 제일 항목이 전생 이야기이다.
책이 나오기까지 너무나 많은 분들로부터 은혜를 입었기에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리며, 특히나 행림출판사 사장님께서 잊지 않으시고 다시 빛을 볼 수 있게끔 성심을 아끼지 않으신 데 대하여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교열·교정을 남다른 성의를 가지고 보아준 권광숙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럼 다 함께 과거라는 열차를 타고 우리들이 살아온 지난 날의 삶으로 들어가 보자. (1996년 )
● 무린바타 들어가는 말 ---감수자 故 김경보 선생의 글 (전생에 진녀 여왕의 스승 기른장으로 알려져 있다)
1986년 초여름으로 기억된다.
박군이 처음 찾아왔을 때, 난 첫눈에 그가 심한 영적인 장애로 시달림을 받고 있으며, 앞으로 인생고가 모질겠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인격수양을 잘만 한다면 나름대로 뜻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닌가 하여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그러나 박군은, 벌써 몇 년째 밤마다 망령들의 환영에 시달려 잠을 이룰 수 없어 미칠 지경이며, 좌반골이 항시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마비증세와 함께 쑤시고 아프고, 특히 몸의 중요한 부위가 심한 습진으로 짓물러 갖은 치료를 다 해보지만 좋아지지 않아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보니 심한 영적인 장애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분명했다.
나는 박군에게 제령(除靈)시술과 체질개선시술을 1년이상 수시로 시행해 주었다. 평소 한 사람에게 길어도 1주일이면 끝내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는데, 1년 이상 박군에게 정력을 쏟았다는 것은 기이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시술을 받는 동안 박군의 정성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가 1시간용 '옴'경문 테이프를 만들어 달라고 떼를 써서 만들어주었더니, 그는 밥 먹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헤드폰을 이용하여 항시 듣고 따라 외며, 7년 가까이 끌어온 지긋지긋한 습진도 자기 나름대로 연구하여 완치시켰다. 일반연고제에 24시간 옴경문을 들려준 후 그 약을 발랐더니 3일 만에 깨끗이 나았다고 자랑하며 그 부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더욱 놀랄 일은, 박군의 문장력이 엄청나게 향상되었다는 사실이다. 박군은 평소 2장의 편지를 쓰려면 1주일 정도 진땀을 흘리며 고심해야 형편없는 솜씨로 겨우 편지지를 메꾸는 정도였다. 그런데 시술과정에서 박군이 자동서기에 호기심을 보이기에 그를 보호하고 있는 수호령들의 의식수준을 높여주었더니, 독자들이 생각하기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결과가 생겼다.
우리나라에서는 야사(野史)에서 조차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전설적인 여인왕국에 대한 이야기를 불과 1년 만에 200자 원고지 6천 매가 넘는 분량으로 자동기술한 것이 아닌가!
어찌 생각하면 박군이 필자를 찾아온 것이나, 필자가 박군에게 정성을 기울였던 것은 전생의 어떤 약속 때문이 아닌가 한다. 또한 박군도 필자도 여인왕국의 역사를 현세에 밝혀야 하는 사명을 하늘로부터 받고 세상에 태어났다고 생각된다.
박군이 여인왕국의 역사를 완성하는 동안 받은 고통을 필설로는 다 표현할 길이 없다. 전쟁하는 장면이 나오면 창이나 칼에 찔려 죽는 고통을 수천 번도 더 겪어야 했으며, 여인들이 모진 수난을 겪는 장면에서는 박군도 모진 고문에 시달리는 영적 파동에 싸여 몸부림쳐야 했다.
특히나 사대사학자(事大史學者)들의 영혼이 대거 몰려와 위협과 공갈로 괴롭히는 파동에 젖어 싸워야 했으며, 또한 밤과 낮이 뒤바뀌어 1년 동안 밤잠을 자지 못하였으니, 그간 혈변을 쏟은 적도 부지기수였다.
나는 1988년 2월 말경 여인왕국의 옛 왕국터를 찾기 위하여 안동(安東)이라는 지명만 알고서 동료6명과 함께 무작정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이때 옛 사벌터(상주군 사벌면)에 도착하자 여인왕국 존재 당시 지박령(地搏靈)이 되어 2천 년 이상 머물고 있던 수많은 원령(怨靈)들이 자기들을 구해 달라고 발악을 하여 천도해 주었다.
그리고 예천(醴泉)·풍산(豊山)을 거쳐 안동에 도착하였을 때 멀쩡하던 내 육신에 풍산골 원령들이 대거 몰려왔다. 용광로의 쇳물이 녹아내리듯 삭신이 내려않는 것 같은 고통과 함께, 머리는 곧 터져나갈 것만 같은 압박감에 쓰러질 듯한 몸을 겨우겨우 지탱하며 첩첩산중을 헤매이다 늦은 시각에 민박을 하게 되었다.
동료들은 험한 시골길을 트럭에 짐짝 취급받으며 달렸던지라 피곤을 풀고자 술잔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평소 술이라면 마다않던 나 자신은 애석하게도 5시간 이상을 의식불명이 되어야 했다. 안동에 도착하기까지 사이에 여인왕국 존재 당시에 죽은 수많은 원령들이 악상념(惡想念)이 집단으로 몰려오니, 육신을 가진 의식으로서는 도저히 이들을 감당할 수 있는 재주가 없었다.
몸은 압축기에 죄여 피가 빠져나가듯 싸늘히 식어갔고, 그와 함께 몽롱한 의식이 사라졌다. 나는 내 영혼과 함께 원령들까지 육신 밖으로 끌어내어, 이들을 저승길로 안내해주고 다시 육신으로 영혼이 빨려들어가니 곧바로 정상적인 원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믿지 못할 사실이 있다. 왕궁터를 찾기 위해 천등산(天燈山)에 올랐을 때, 몇 킬로미터 밖에서 바라본 나의 눈에 왕궁 둘레가 황금빛으로 피어오르는 것을 뚜렷이 영시(靈視)한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여인왕국의 존재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렇게 지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글을 쓸 수 있는 소양이 전혀 없던 사람이 자동서기로써 책 6권 분량을 1년 만에 완성하였다면 믿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라시대 이전 6부족시대에 여인왕국이 존재하였다고 한다면 누구나 코방귀를 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미친놈 발작하는 기분으로' 오랫동안 망설이다 이 글을 세상에 발표하기로 했다. 이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역사는 시간이 흐르면 사회나 국가적인 이권(利權)과 자존심으로 인하여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변질될 소지가 많으나, 하늘은 가장 공평하게 모든 사실을 간직하고 있기에 앞으로 자동서기 형식으로 역사를 밝힐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자 함이다.
선군(단군) 이전의 신시 개천시대(한웅시대)나 한인 시대와 같은 '초인국'의 역사는 자동서기나 마음의 문이 열린 자가 아니면 밝힐 수 있는 뚜렷한 방법이 없을 뿐 아니라, 만 년 이전의 유물이나 유골을 놓고, 그 시대를 평한다는 것은 그 시대의 마음을 읽을 수 없기에 신빙성이 희박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둘째, 여인들의 한을 풀어주고 남녀가 진실된 사랑으로 화합할 때 인류는 구제받을 수 있으며, 남녀의 근원을 파고들어가면 한 생명의 가지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함이다. 앞으로는 남녀간에 우주적인 사랑의 문이 열려 조화를 되찾는 시대가 도래하리라 믿는다.
셋째, 왜곡과 가식으로 점철된 것이 우리의 역사이다. 개인의 주인이 마음이듯, 역사란 국가의 혼이다. 역사가 올바르지 못하여 교육이나 정치·문화·사상뿐 아니라 인간의 심상마저 뒤틀려 도덕성이 땅에 딩구는 현실이다. 원시발본(原始拔本)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으니, 앞으로 참다운 인재가 드러나 잃어버린 옛기억을 되살려 인류사상사에 큰 획을 긋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넷째, 우리 민족의 잠재의식 깊숙이 잠자고 있는 '한'의식을 일깨워 인류의 큰 흐름을 이끌어갈 수 있는 깨우친 자신들의 집단이 우리 한민족이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함이다.
다섯째, 인류에게 공포의 질병으로 번지고 있는 AIDS도 그 근원적인 뿌리를 알아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나오리라 보는데, 염려스러운 것은 앞으로 다른 병균과 합체될 위험성 마저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폐결핵이나 장티푸스·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속에 길모(AIDS바이러스)가 합체하여 예상치 못한 질병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모든 사물을 물질적인 관념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서구사상은, 미안하지만 별세계에서 온 신적 존재인 길모를 결코 파악해 낼 수 없다. AIDS바이러스도 인간과 동등한 신적인 존재이므로 인간과 공존공생할 수 있는 길을 현대과학과 정신문명이 협력하여 찾을 때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리라고 본다.
주지해야 할 것은, 인간의 악한 상념이 거대하게 쌓일 때 공간에 존재하는 수동체적인 미생물이 악(惡) 생명체로 돌연변이를 일으켜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병원체가 되는 것이며, 우리 몸속에 있는 미생물도 그 자체는 해를 끼치지 않으나 인간의 마음이 변이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화로운 마음으로 자신을 다스려야 할 것이다.
나는 15년 이상 의학적인 차원을 벗어나 뇌성마비나 암 등 각종 난치병을 기공(氣功)으로 치유한 경험이 많다. 서양의학이 인류에 공헌한 점이 많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동양의 비물질적(非物質的)인 정신과학과 화합될 때 더욱더 빛나리라.
여섯째, 앞으로 자동서기를 받을 수 있는 많은 인재들이 쏟아져나와 역사·종교·의학·과학 등 각 분야의 미비점을 보완할 때 인류는 급격한 진화를 할 것이며, 또한 모든 학문의 뿌리는 하나라는 사실을 진실로 깨닫게 될 것이다.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뜻있는 사학자들께서 여인왕국의 역사적인 고증을 밝히는 데 힘써주시면 고맙겠다. 유물은 필자에게 심증(心證)이 가는 곳이 있으나 아직은 밝힐 때가 아니라고 본다.
이제 독자들께서는 모든 면에서 부정적인 시각을 버리고, 있을 수도 있는 일이구나 하며 믿는 마음으로 이 글을 읽어가다 보면 여인들의 심정을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지난날의 잘못된 점을 거울삼아 개선할 때 밝은 미래가 펼쳐지리라.
모쪼록 인류에 사랑이 넘쳐흘러 아름다운 지구동산이 되고, 무궁토록 빛나길 기원하며 끝을 맺는다.
정말 오랫동안 이런 책이 나와 주길 기다렸다. 문명을 비판하되 확실한 대안과 함께 그 미래까지 보여주는 책, 자연회귀의 역사적 필연성과 방법을 손에 잡힐 듯이 보여주는 책,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자연농업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는 책, 과학이라는 짧은 잣대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우주의 비밀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책, 그동안 주변인들의 취미 정도로 여겨졌던 대안적 삶과 문화가 새 시대의 주류임을 당당하게 보여주는 책, 이런 책이 지금 내 손에 들려있다.
내가 지난 20년 동안 글로 쓰고 떠들고 다녔던 것들이 이 책 속에 다 들어있다. 그것도 아주 작은 부분집합으로.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책의 내용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 내 수준으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고 또 나의 관점과 분명히 어긋나는 부분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대안세계를 열어가는 데 있어 이 책의 긍정적 역할에 대해 전적인 신뢰를 보낸다.
현재 9권까지출간 되었는데 6권까지 읽어 본 결과 책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들은 언제든 확인할 수 있는 사실로 인정된다. 그러나 사건의 진위 여부를 떠나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이 책이 주는 메시지의 내용이다. 권수가 많은 만큼 이 책에는 지속가능한 인류의 미래를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정보로 가득 차 있다. 아니 대부분의 내용들은 단지 알아야 할 정보라기보다 실천해야할 사항들이다.
첫째, 과학기술이 만들어 나가는 현대문명은 인간에게 죽임과 불행을 가져올 뿐이다.
둘째, 이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행복과 안식을 얻으려면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셋째, 자연보다 위대한 스승은 없으며 자연보다 풍성하고 안전한 식탁이 없다.
넷째, 인류의 매래는 우리가 어떤 신념을 갖느냐에 달려있다.
다섯째, 우리는 지금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이 책은 러시아에서 무려 1000만권이 팔렸다. 러시아의 많은 독자들이 책을 읽고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즉흥적으로 써서 보낸 시들이 한권의 두꺼운 책으로 발간되었을 정도다. 저자인 블라지미르 메그레는 러시아의 유력한 인사들과 아나스타시아 재단을 설립하여 아나스타시아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사업들을 벌이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자연과의 교감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대안교육인데 책에 묘사된 바에 의하면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뛰어난 영성과 분별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국의 대안교육 관계자들은 시급히 러시아로 달려가 봐야 한다.
그러나 '아나스타시아'를 한국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데 있어 찬사만 늘어놓을 수는 없는 요소 역시 너무도 많다. 이 책을 피상적으로 읽으면 한 채널러(Channeller: 영계와 소통하는 사람)가 현대과학지식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짜 맞춘 이야기로 오해할 수도 있다. 책 속에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너무 자주 나타나기 때문이다. 텔레파시, 원격투시, 시간 및 공간 이동, 유체이탈, 마인드 컨트롤 등 신비주의에서 사용하는 온갖 방법들이 다 나온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요소 말고도 역사와 문화가 다른 한국의 독자들에게 두 가지 장애물이 더 있다.
하나는 러시아 민족 특유의 메시아니즘과 서구 기독교 문화이다. 한국인들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러시아인들의 메시아사상은 유별나다. 80년 전에 후발자본주의 국가인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것도 러시아 특유의 인류 구원사상과 무관하지 않다. '아나스타시아'에서도 자연과 환경을 보호하는 '가원운동'으로 러시아는 위기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는 일등국가로 거듭난다고 한다.
또한 책에 서술된 인류의 역사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근거한 서구중심주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나스타시아'가 러시아에서 큰 인기를 끈 이유는 슬라브민족주의와 기독교적 세계관, 자연주의 사상 등이 적절히 어울어진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질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아나스타시아'를 추천하는 이유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메시지를 이 책만큼 강력하게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전하는 책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