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스님]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이사장 능행스님
불교신문 이경민
승인 2021.03.16
“죽음 앞에 우리는 너무나 천진난만하다…지금 당장 세상과 이별할 수 있음에도”
탁발로 모금 시작해 불교계 최초
스님이 세운 호스피스 병원 건립
명상 등 활용한 웰다잉 교육도
‘호스피스’ 주제 유튜브 4월 개설
“편안한 죽음 맞이할 수 있어야
오늘 더 찬란한 하루 살 수 있어”
“우리는 죽음 앞에 너무나 천진난만 합니다. 그게 너무 안타까워요.”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이사장 능행스님이 담담하게 말했다. 3일에 한번 꼴로 타인의 죽음을 품어 안는 삶, 호스피스 활동에 있어서 불모지나 다름없던 불교계에서 누구보다 발 빠르게 현장 속에 뛰어들어 새 길을 열었던 스님이다. 탁발로 후원금을 모으기 시작해 지금은 어엿한 불교 대표 호스피스 병원 이사장으로 굵게 새긴 직함에도 스님은 “아직 한참 부족하다” 말했다. 씁쓸한 미소가 돌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죽음에서 버둥대는 이들의 손을 잡아주고 싶다 말하는 눈빛, 30년 전 열정이 출렁였다. 춘삼월을 앞두고 전국적으로 봄비가 내리던 3월1일, 울주 상북면에 있는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에서 능행스님을 만났다.
능행스님은 교계 보다 일반에 더 알려져 있다. 2003년 출간한 가 일약 베스트셀러로 떠오르며 강한 인상을 남긴 덕이다. 50만부 이상이 팔렸다. 지금이야 ‘웰다잉’이 익숙한 언어가 됐지만 그때만 해도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 시한부 삶이라는 것이 막연하게만 다가오던 시절이었다. 스님은 지난 30여 년 간 호스피스 현장 곳곳을 다니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죽음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돌이켜보면 시절인연이 그리 된 것 같아요. 출가도 호스피스 활동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으니까요.” 처음부터 호스피스 활동을 하고자 마음먹었던 것은 아니었다. 출가 수행자로서의 삶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것처럼 인연은 불현듯 다가왔다.
청소년기를 개신교 문화 속에서 보낸 능행스님은 스물일곱까지 출가 수행자를 만나본 적도 사찰에 가 본 적도 없었다. 그때만 해도 몰랐다. 우연히 듣게 된 독송 소리, 운명처럼 만난 법정스님 책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줄은. “부처님오신날 즈음이었던 것 같아요. 1990년대 만해도 도로변에 레코드 가게가 많았거든요. 우연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염불 소리를 들었어요. 태어나서 처음 듣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끌리더라구요. 그 때 딱 멈췄던 것 같아요. 제가 살아온 삶 자체가.”
경전 독송 소리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불교라는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완전히 빠져들었다. 불교신문을 받아봤다. 신문 기사에 실린 책 광고를 보며 법정스님, 성철스님, 효봉스님 등 당대 스님들도 알게 됐다. 스님들이 쓴 책이란 책은 모두 사서 읽었다. 지금까지 알았던 종교와는 너무 달랐다. 정적이면서도 동적인 삶,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삶, 출가 수행자는 모두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출가를 해야만 하는 줄 알았다.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이사장 능행스님을 3월1일 만났다. 3일에 한번꼴로 죽음을 마주한다는 스님은 말기 환자의 경우 치료에 집착하기 보다 홀가분하게 삶의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이사장 능행스님을 3월1일 만났다. 3일에 한번꼴로 죽음을 마주한다는 스님은 말기 환자의 경우 치료에 집착하기 보다 홀가분하게 삶의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때만 해도 출가를 하면 선원으로 향하는 추세가 강했다. 능행스님도 진로에 대한 고민을 안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지인의 병문안을 하러 천주교 병원에 들렀다가 말기암 환자들을 봤다. “충격이었어요. 폐가 부풀어 오르고 주사 바늘을 꽂은 모습으로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듯한 모습을 한 환자 8명이 한 방에 누워있는데 제가 다 고통스러웠어요. 사람이 죽어가는 걸 그 때 처음 본거에요. 태어나서 가장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충격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황에서 능행스님은 병원을 도망치듯 나왔다. 스님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있던 불자들이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하던 때였다. 천주교 병원으로 병문안을 다니며 불자들을 위한 별도의 배려가 없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죽음만 기다리는 환자, 그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가족들이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스님은 승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고 했다. “무서웠다. 어떻게 해야할 줄 몰랐으니까. 그 때가 내 사문유관(四門遊觀)이었던 것 같다”고.
“그 때 처음 본 것 같아요.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죽는지. 불과 3개월 전만해도 멀쩡했을 텐데 그런 모습은 하나도 없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구요. 그 때부터 죽음 속에 스며들 듯 살았던 것 같아요.”
아프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들었다. 부산 소록도, 행려 병동, 충북 음성 꽃동네 등 곳곳으로 갔다. 독실한 불자들이 타종교로 개종하는 모습도 그 때 많이 봤다. 심한 경우 개종을 조건으로 내 건 병원도 있을 때였다. “불도 부산에서도 개종을 엄청 했을 때였어요. 이유는 간단했죠. 죽을만큼 아프니까. 가장 힘들 때 불교 보다 그들이 가까이 있으니까.”
무방비로 방치된 불자들을 보며 스님은 시설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시설이 어렵다면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시스템이라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절실한 마음은 행동으로 옮겨졌다. 1997년 호스피스 센터 건립을 위한 모금을 시작했다. 정토마을을 처음 세운 청주 땅이 그 때의 활동으로 마련된 것이다. 그 때만 해도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능행스님은 “급한 마음에 맨 땅에 천막을 치고 환자들을 들이기도 했다”며 “2000년이 되어서야 어느 정도 시설이 갖춘 호스피스센터를 운영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5병상으로 시작한 호스피스 센터, 입원을 원하는 환자는 종교 상관없이 받았다. 병원비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조립식 벽으로 지어진 탓에 신음 소리가 방에서 방으로 전해지는 상황이 이어졌다. 죽음의 질을 높이기 위해 센터를 지었는데 소음으로 또 다시 고통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콘크리트 벽으로 된 병원을 다시 지어야겠다.”
생각한 스님은 다시 모금을 시작했다. 땅을 사는 데만 3년, 건물 짓는 데만 또 5년이 걸렸다. 그 긴 시간을 감내한 끝에 세운 것이 지금의 울산시 울주군에 세운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이다. 140여 개 병동이 들어서 있다.
수많은 시행착오, 열악한 무관심 속에서도 능행스님은 30년 세월을 주저 없이 굵은 궤적을 그려왔다. 스님을 버티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능행스님은 질문으로 답했다. “죽음이 아주 가까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없지요? 당장 오늘밤 죽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있나요? 3시간 뒤에 죽는다고 생각해보세요. 무엇부터 할 겁니까?”
“먹고 살기 바빠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서 한번도 죽음을 생각해 본 적 없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선상에 들어오면 한없이 무너집니다. 죽을 준비가 다 됐다고 하는 사람조차 실제로 그 안에 들어오면 준비돼 있는 게 없어요. 시한부 삶을 선고 받고 대책 없이 들어와서 1~2달 내에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50~60년 인생을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정리 할 수 있을까요. 물리적으로도 너무 부족합니다.”
살고 싶다 살려야 한다. 몸부림치는 모습들을 보며 능행스님을 여전히 안타까움을 느낀다. “죽음의 고통은 생각하는 것보다 상상을 훨씬 넘어서요. 그래서 그 순간을 품위 있게 잘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해두어야 합니다. 당장 오늘밤에도 죽을 수 있다 생각하면 그때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이 달라집니다. 오늘을 실속 있게 살아야 다음 생도 실속 있게 살아지는 거에요. 코로나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나는 아닐거라고 생각하잖아요. 죽을 수 있는 이유가 살 수 있는 이유보다 많습니다.”
병원 운영 외에도 호스피스 교육기관인 ‘마하보디 교육원’, 구호 활동을 펼치고 있는 ‘국경없는 민들레’ 등으로 외연을 넓히는 이유다. “삶이 소중하면 죽음도 소중한 겁니다. 오로지 사는 것에만 가치를 두니 죽음에는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불자라면 더 잘 알거에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결국 사라진다는 것을. 죽음을 생각해야 하기 시작하면 늘 좋은 생각을 갖게 되고 욕망이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삶이 심플해져요. 다른 차원의 삶이 열려요. 간소하게 되니 많은 것을 소유하기 보다 나누게 됩니다. 그런 태도가 삶의 질을 한 차원 높일 겁니다. 불자들이 보다 많은 준비를 해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길, 스님들도 조금 더 호스피스에 관심을 가져주길, 그래서 모두가 아등바등 살기보다 지금 이 순간 보다 의미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능행스님은...
1994년 세종 학림사에서 수환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95년 불교 봉사자 15명으로 구성된 ‘자비회’를 창립, 1997년부터 정토마을 호스피스센터 모금 운동을 추진해 2000년 충북 청원군에 15병상 규모의 불교계 최초로 독립형 호스피스 시설인 정토마을을 세웠다. 2003년부터 완화 의료 전문 시설인 자재병원 건립을 위한 천일기도를 시작으로 2005년 울산시 울주군에 부지를 마련, 기금을 모아 2013년 200여 개 병동의 자재병원을 개원해 운영해오고 있다. 불교 전문 호스피스 교육을 위한 ‘마하보디 교육원’, 미얀마 등에서 구호 활동을 펼치고 있는 ‘국경없는 민들레’ 등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대한불교진흥원 대원상 단체부문 대상, 보건복지부장관 표창, 영축문화대상 등을 수상했으며 저서로는 산문집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임상전문서적 〈불교 임상기도집〉, 산문집 〈이 순간〉 등이 있다.
울산=이경민 기자 kylee@ibulgyo.com
유지호 부산울산지사장 kbulgyo@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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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이경민
승인 2021.03.16
“죽음 앞에 우리는 너무나 천진난만하다…지금 당장 세상과 이별할 수 있음에도”
탁발로 모금 시작해 불교계 최초
스님이 세운 호스피스 병원 건립
명상 등 활용한 웰다잉 교육도
‘호스피스’ 주제 유튜브 4월 개설
“편안한 죽음 맞이할 수 있어야
오늘 더 찬란한 하루 살 수 있어”
“우리는 죽음 앞에 너무나 천진난만 합니다. 그게 너무 안타까워요.”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이사장 능행스님이 담담하게 말했다. 3일에 한번 꼴로 타인의 죽음을 품어 안는 삶, 호스피스 활동에 있어서 불모지나 다름없던 불교계에서 누구보다 발 빠르게 현장 속에 뛰어들어 새 길을 열었던 스님이다. 탁발로 후원금을 모으기 시작해 지금은 어엿한 불교 대표 호스피스 병원 이사장으로 굵게 새긴 직함에도 스님은 “아직 한참 부족하다” 말했다. 씁쓸한 미소가 돌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죽음에서 버둥대는 이들의 손을 잡아주고 싶다 말하는 눈빛, 30년 전 열정이 출렁였다. 춘삼월을 앞두고 전국적으로 봄비가 내리던 3월1일, 울주 상북면에 있는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에서 능행스님을 만났다.
능행스님은 교계 보다 일반에 더 알려져 있다. 2003년 출간한 가 일약 베스트셀러로 떠오르며 강한 인상을 남긴 덕이다. 50만부 이상이 팔렸다. 지금이야 ‘웰다잉’이 익숙한 언어가 됐지만 그때만 해도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 시한부 삶이라는 것이 막연하게만 다가오던 시절이었다. 스님은 지난 30여 년 간 호스피스 현장 곳곳을 다니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죽음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돌이켜보면 시절인연이 그리 된 것 같아요. 출가도 호스피스 활동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으니까요.” 처음부터 호스피스 활동을 하고자 마음먹었던 것은 아니었다. 출가 수행자로서의 삶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것처럼 인연은 불현듯 다가왔다.
청소년기를 개신교 문화 속에서 보낸 능행스님은 스물일곱까지 출가 수행자를 만나본 적도 사찰에 가 본 적도 없었다. 그때만 해도 몰랐다. 우연히 듣게 된 독송 소리, 운명처럼 만난 법정스님 책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줄은. “부처님오신날 즈음이었던 것 같아요. 1990년대 만해도 도로변에 레코드 가게가 많았거든요. 우연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염불 소리를 들었어요. 태어나서 처음 듣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끌리더라구요. 그 때 딱 멈췄던 것 같아요. 제가 살아온 삶 자체가.”
경전 독송 소리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불교라는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완전히 빠져들었다. 불교신문을 받아봤다. 신문 기사에 실린 책 광고를 보며 법정스님, 성철스님, 효봉스님 등 당대 스님들도 알게 됐다. 스님들이 쓴 책이란 책은 모두 사서 읽었다. 지금까지 알았던 종교와는 너무 달랐다. 정적이면서도 동적인 삶,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삶, 출가 수행자는 모두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출가를 해야만 하는 줄 알았다.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이사장 능행스님을 3월1일 만났다. 3일에 한번꼴로 죽음을 마주한다는 스님은 말기 환자의 경우 치료에 집착하기 보다 홀가분하게 삶의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이사장 능행스님을 3월1일 만났다. 3일에 한번꼴로 죽음을 마주한다는 스님은 말기 환자의 경우 치료에 집착하기 보다 홀가분하게 삶의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때만 해도 출가를 하면 선원으로 향하는 추세가 강했다. 능행스님도 진로에 대한 고민을 안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지인의 병문안을 하러 천주교 병원에 들렀다가 말기암 환자들을 봤다. “충격이었어요. 폐가 부풀어 오르고 주사 바늘을 꽂은 모습으로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듯한 모습을 한 환자 8명이 한 방에 누워있는데 제가 다 고통스러웠어요. 사람이 죽어가는 걸 그 때 처음 본거에요. 태어나서 가장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충격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황에서 능행스님은 병원을 도망치듯 나왔다. 스님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있던 불자들이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하던 때였다. 천주교 병원으로 병문안을 다니며 불자들을 위한 별도의 배려가 없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죽음만 기다리는 환자, 그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가족들이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스님은 승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고 했다. “무서웠다. 어떻게 해야할 줄 몰랐으니까. 그 때가 내 사문유관(四門遊觀)이었던 것 같다”고.
“그 때 처음 본 것 같아요.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죽는지. 불과 3개월 전만해도 멀쩡했을 텐데 그런 모습은 하나도 없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구요. 그 때부터 죽음 속에 스며들 듯 살았던 것 같아요.”
아프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들었다. 부산 소록도, 행려 병동, 충북 음성 꽃동네 등 곳곳으로 갔다. 독실한 불자들이 타종교로 개종하는 모습도 그 때 많이 봤다. 심한 경우 개종을 조건으로 내 건 병원도 있을 때였다. “불도 부산에서도 개종을 엄청 했을 때였어요. 이유는 간단했죠. 죽을만큼 아프니까. 가장 힘들 때 불교 보다 그들이 가까이 있으니까.”
무방비로 방치된 불자들을 보며 스님은 시설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시설이 어렵다면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시스템이라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절실한 마음은 행동으로 옮겨졌다. 1997년 호스피스 센터 건립을 위한 모금을 시작했다. 정토마을을 처음 세운 청주 땅이 그 때의 활동으로 마련된 것이다. 그 때만 해도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능행스님은 “급한 마음에 맨 땅에 천막을 치고 환자들을 들이기도 했다”며 “2000년이 되어서야 어느 정도 시설이 갖춘 호스피스센터를 운영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5병상으로 시작한 호스피스 센터, 입원을 원하는 환자는 종교 상관없이 받았다. 병원비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조립식 벽으로 지어진 탓에 신음 소리가 방에서 방으로 전해지는 상황이 이어졌다. 죽음의 질을 높이기 위해 센터를 지었는데 소음으로 또 다시 고통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콘크리트 벽으로 된 병원을 다시 지어야겠다.”
생각한 스님은 다시 모금을 시작했다. 땅을 사는 데만 3년, 건물 짓는 데만 또 5년이 걸렸다. 그 긴 시간을 감내한 끝에 세운 것이 지금의 울산시 울주군에 세운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이다. 140여 개 병동이 들어서 있다.
수많은 시행착오, 열악한 무관심 속에서도 능행스님은 30년 세월을 주저 없이 굵은 궤적을 그려왔다. 스님을 버티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능행스님은 질문으로 답했다. “죽음이 아주 가까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없지요? 당장 오늘밤 죽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있나요? 3시간 뒤에 죽는다고 생각해보세요. 무엇부터 할 겁니까?”
“먹고 살기 바빠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서 한번도 죽음을 생각해 본 적 없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선상에 들어오면 한없이 무너집니다. 죽을 준비가 다 됐다고 하는 사람조차 실제로 그 안에 들어오면 준비돼 있는 게 없어요. 시한부 삶을 선고 받고 대책 없이 들어와서 1~2달 내에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50~60년 인생을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정리 할 수 있을까요. 물리적으로도 너무 부족합니다.”
살고 싶다 살려야 한다. 몸부림치는 모습들을 보며 능행스님을 여전히 안타까움을 느낀다. “죽음의 고통은 생각하는 것보다 상상을 훨씬 넘어서요. 그래서 그 순간을 품위 있게 잘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해두어야 합니다. 당장 오늘밤에도 죽을 수 있다 생각하면 그때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이 달라집니다. 오늘을 실속 있게 살아야 다음 생도 실속 있게 살아지는 거에요. 코로나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나는 아닐거라고 생각하잖아요. 죽을 수 있는 이유가 살 수 있는 이유보다 많습니다.”
병원 운영 외에도 호스피스 교육기관인 ‘마하보디 교육원’, 구호 활동을 펼치고 있는 ‘국경없는 민들레’ 등으로 외연을 넓히는 이유다. “삶이 소중하면 죽음도 소중한 겁니다. 오로지 사는 것에만 가치를 두니 죽음에는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불자라면 더 잘 알거에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결국 사라진다는 것을. 죽음을 생각해야 하기 시작하면 늘 좋은 생각을 갖게 되고 욕망이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삶이 심플해져요. 다른 차원의 삶이 열려요. 간소하게 되니 많은 것을 소유하기 보다 나누게 됩니다. 그런 태도가 삶의 질을 한 차원 높일 겁니다. 불자들이 보다 많은 준비를 해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길, 스님들도 조금 더 호스피스에 관심을 가져주길, 그래서 모두가 아등바등 살기보다 지금 이 순간 보다 의미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능행스님은...
1994년 세종 학림사에서 수환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95년 불교 봉사자 15명으로 구성된 ‘자비회’를 창립, 1997년부터 정토마을 호스피스센터 모금 운동을 추진해 2000년 충북 청원군에 15병상 규모의 불교계 최초로 독립형 호스피스 시설인 정토마을을 세웠다. 2003년부터 완화 의료 전문 시설인 자재병원 건립을 위한 천일기도를 시작으로 2005년 울산시 울주군에 부지를 마련, 기금을 모아 2013년 200여 개 병동의 자재병원을 개원해 운영해오고 있다. 불교 전문 호스피스 교육을 위한 ‘마하보디 교육원’, 미얀마 등에서 구호 활동을 펼치고 있는 ‘국경없는 민들레’ 등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대한불교진흥원 대원상 단체부문 대상, 보건복지부장관 표창, 영축문화대상 등을 수상했으며 저서로는 산문집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임상전문서적 〈불교 임상기도집〉, 산문집 〈이 순간〉 등이 있다.
울산=이경민 기자 kylee@ibulgyo.com
유지호 부산울산지사장 kbulgyo@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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