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놓고 염불하세-인광대사 가언록1
(印光大師 嘉言錄)

옮긴이 김지수(寶積)

 
가언록(嘉言錄) 중판 서문


정토 법문은 이치는 지극히 높고 심오하지만, 그 일은 몹시 간단하고 쉽다오. 그래서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지견이 탁월한 사람들은, 정토 법문을 그저 어리석은 범부 중생의 일로 깔보고 수행하려 들지 않소. 정토 법문이 시방 삼세 모든 부처님께서, 위로 불도를 성취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는, 맨 처음이자 맨 끝인 궁극 법문인 줄은 그들이 어떻게 알겠소?


어리석은 범부 중생도 닦을 수 있다고 정토 법문을 깔보는데, 그렇다면 화엄경은 어찌 보지 않는단 말이오? 보현보살과 같이 이미 증득한 경지가 부처님이나 다를바 없는 보살들도, 오히려 십대원왕(十大願王)으로 서방 극락세계 왕생을 회향하여 부처님 과위를 원만히 성취하려고 발원하지 않소? 정토 법문을 깔보고 닦으려 하지 않는 자들은 화엄경의 이 내용을 또 어떻게 간주할지 궁금하오. 역시 깔볼 것이오? 아니면 존중할 것이오?

 
이는 다름이 아니라, 보통 법문과 특별 법문의 차이, 자력(自力)수행과 불력(佛力 : 他力)수행의 규모 및 난이도를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초래된 결과라오. 그 차이를 상세히 알고 나서도 화장해중(華藏海衆)의 행렬에 끼어 함께 극락 왕생의 길에 나서지 않을 수 있겠소?

 
나는 일찍이 머리를 묶고 글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한유ㆍ구양수(歐陽修)ㆍ정자ㆍ주자가 강렬히 주장한 벽불론(闢佛論 : 척불론)의 해독을 심하게 받았소. 다행히 내게는 한유ㆍ구양수ㆍ정자ㆍ주자같은 재주가 없었소. 만약 조금이라도 그들을 따라갈 만한 재주가 있었던들, 틀림없이 자신과 남들을 함께 망치고, 살아생전에 아비지옥에 빠져 들었을 것이오. 십사오 세 때부터 질병으로 몇 년간 심하게 고생했는데, 그때부터 고금의 뭇 경전들을 두루 펼쳐 보면서, 비로소 한유ㆍ구양수ㆍ정자ㆍ주자가 이러한 벽불론을 주장한 것이 순전히 특정 문중(파벌)의 지견에 불과하고, 성현의 심오한 중용의 도에 입실(入室)한 경지가 절대로 아님을 알아차렸소.

 
약관(弱冠 : 스무 살)의 이듬해 출가하여 스님이 된 뒤, 오로지 정토 법문수행에 전념했소. 그리고 이 한평생 다하도록 스스로 생사를 끝마치는 사나이(自了漢)가 될 뿐, 문중을 세워 제자와 신도를 널리 불러 모으는 짓은 하지 않기로 서원했소. 후세의 법자손(法子孫)들이 불법을 파괴하면, (스승의 연대 책임으로) 나까지 아비지옥에 끌려들어가 함께 고통을 받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오.

 
광서(光緖) 19년(1893) 보타산(寶陀山 : 관세음보살의 도량으로 유명함) 법우사(法雨寺) 화문(化聞) 화상이 북경에 들어가 대장경을 청하면서, 나에게 조사해 인쇄하라고 분부했소. 일이 끝난 뒤 그의 요청으로 함께 보타산에 왔는데, 내가 일하기 좋아하지 않는 줄 알고는, 작고 한가한 방에 머물며 내 뜻대로 수행하라고 배려해 주어, 지금까지 벌써 35년을 지냈소. 산에 오래 있다 보니 더러 붓으로 글 쓰는 일을 부탁받긴 했지만, 인광(印光)이란 이름자는 절대로 쓴 적이 없소. 설사 반드시 자기 서명을 해야 할 경우가 있더라도, 단지 아무렇게나 두 글자를 썼을 따름이오. 그래서 20년 동안은 나를 방문하는 객이나 서신 왕래 같은 번거로움이 전혀 없었소.

 
중화민국 기원이 시작되면서, 고학년(高鶴年) 거사가 내 글 몇 편을 가지고 가서 불학총보(佛學叢報)에 실었는데, 그 때도 인광이란 이름은 감히 쓰지 않았소. 내가 늘상 ‘항상 부끄러운 중(常慚愧僧)’ 이라고 스스로 불렀기 때문에, 그냥 ‘常慚’ 이라고만 썼소. 서울여(徐蔚如) 거사와 주맹유(周孟由) 거사가 내게 대단한 식견이 있는 줄로 착각하여 3~4년간 연락했지만, 전혀 아는 사람이 없었소.

 
그 뒤 주맹유가 산에 찾아와 인사하며 내게 귀의하겠다고 원하며, 못쓸 원고 몇 편을 가져다가 서울여 거사에게 보내, 북경에서 인쇄하여 인광법사문초(印光法師文鈔)로 출판했다오. 그래서 군자들의 우아한 눈을 널리 자극하게 되어 부끄러움만 더욱 늘어났는데, 그 때까 민국 7년(1918)이었소.


이듬해 또 약간의 글을 모아 속편을 만들고, 초판과 함께 인쇄했소. 민국 9년 상해상무인서관(上海商務印書館)에서 두 책으로 조판한 뒤, 이듬해 봄 책이 나왔소. 내가 또 양주(揚州)에서 9년 조판한 글을 4책으로 인쇄했소. 민국 11년 다시 상무인서관에서 4책으로 찍었는데, 당시 여러 거사들이 2만부나 인수해 갔으며, 상무인서관에서 판매한 책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소. 민국 14년 다시 중화서국에서 증보서판을 역시 4책으로 찍었는데, 전보다 백쪽 남짓 늘어났소.

 
올 여름 발행하는데 노동운동 등으로 가격이 몹시 비싸져, 단지 2천부 밖에 못 찍었소. 원래 4부의 지판(紙版 : 원판 지형)을 만들어, 2부는 서국에서 보존하고 2부는 내게 주기로 했소. 그래서 내가 항주(杭州) 절강인쇄공사(浙江印刷公司)에 우선 1만부를 인쇄하라고 부탁하고, 이후 추가 인쇄는 모두 인연에 맡기기로 하였소.

 
원정(圓淨) 거사 리영상(李榮祥)이 근래 몇 년간 불학에 전념하여, 기신론ㆍ능엄경ㆍ원각경 등에 소해((疎解 : 주석 해설)를 달았소.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했소.

 
“젊은 사람이 우선 실용적인 염불 공부에 착수하여, 업장이 말끔히 해소되고 지혜가 밝아지며 복덕이 높아질 때를 기다린 다음 발휘해야, 부처님의 뜻을 저절로 밝게 이해하고 우주에 널리 전파할 수 있소.”

 
당시에 그는 아직 내 말을 옳게 믿지 않았소. 나중에 마음을 지나치게 써서 몸과 정신이 날로 쇠약해지자, 비로소 내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오. 그리고는 나의 문초(文鈔)를 상세히 열람한 뒤, 환희심을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중요한 내용만 간추려 부문별로 분류하여 1책을 편지하였소. 우선 신문용지로 1천책을 인쇄하여 시급히 바로 귀의했는데, 8월에 책이 나와 얼마 안 되어 모두 증명하였소.

 
편지로 책을 요구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마침내 조하경감옥서(漕河涇監獄署)에서 다시 조판하도록 했소. 진적주(陳荻注) 거사가 조판을 맡고 4부 지판 비용과 2천부 인쇄비용을 부담하겠다고 나섰소. 그렇게 인수한 책이 2만부 가까이 되었소.

 
간추린 내용의 출처는 몇 권 몇 쪽까지 일일이 기재하여, 문초의 원문과 서로 대조할 수 있게 하였소. 여러 글 가운데 중요 내용만 간추려 한데 모은 것이라, 내용이 좀 비슷해도 삭제하지 않았으므로, 독자에게 반복해서 권장하는 이점이 있겠소. 그 자리에서 의심을 끊고 믿음을 일으키길 바라오.

 
또 문초는 좀 번잡하고 많아서, 초심자에게 쉽게 이해되고 근기에 맞는 내용을 가려 주기가 어려운 점이 있소. 그래서 먼저 입문처를 찾아 주고, 거기서부터 착실히 수행에 정진해 나가도록 도와주면, 처음부터 손댈 곳도 몰라 망연자실하고 물러서는 폐단이 훨씬 줄어들 것이오. 이러한 연유를 간단히 적어 독자들이 함께 참고하길 바라오.

 
소원이 있으니, 보고 듣는 사람들이 내용상 너무 평범하고 일상적이다고 내팽개치며, 고상하고 심오하며 미묘한 것만 찾으려 하지 말라는 점이오, 요순의 도는 효도와 우애일 뿐이며, 여래의 도는 계율과 선정과 지혜일 따름이오.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을 착실히 행하여 지극해지면, 고상하고 심오하며 미묘한 이치를 따로 구할 필요가 없소. 그렇지 않으면 고상하고 심오하며 미묘한 이치가 구두선(口頭禪)에 불과하고, 생사(生死)가 닥칠 때 조금도 쓸모없게 되오.

 
보는 사람마다 주의하고 명심하길 바라오.


민국 16년(1927) 정묘년 섣달 초파일
고신(苦辛) 상참괴승(常慚愧僧) 인광(印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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