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스타시아가 들려주는 人類(인류)의 역사' 下
5. 육신의 생명을 위한 식사
6. 강도질 도적질 없는 삶
육신의 생명을 위한 食事(식사)
베다期(기)에 산 사람들은 肉身(육신)의 질병을 하나도 몰랐어. 심지어는 백오십 혹은 이백 살에도 精神은 활기 있고, 삶의 기쁨에 넘쳤으며, 티없이 건강을 유지했어. 그때는 의사도 민속의술사도 없었어. 지금은 이런 사람들이 아주 많지만, 육신의 병이 없었던 이유는, 자기 所有(소유)의 家園에서 삶의 방식이, 자기가 손수 조성한 자연스런 사랑의 空間에서의 삶의 방식이 食事(식사) 문제를 온전히 관장했기 때문이야. 사람의 몸은 필요한 것 모두를 필요한 양만큼, 음식을 섭취하기에 가장 좋은 時間에, 식사하기에 가장 적절한 별자리 때 얻을 수 있었어.
주의를 기울여봐, 블라지미르, 봄 여름 그리고 가을 季節(계절)을 따라 일정 순서에 의해 다양한 식물들의 열매가 성장하고 열매를 맺는 것은 그냥 우연이 아니야.
먼저 온갖 풀과 민들레가 나와. 이걸 겨울 음식과 섞어 먹으면 유난히 香氣(향기)롭고 맛이 있기도 해.
이른 구즈베리, 양딸기가 익어가고, 산딸기 중 이른 것은 양지에서, 늦은 것은 음지에서 익어 있어. 진홍색 체리, 좀 나중에 빨간 앵두, 그 외 온갖 과일, 풀, 열매들이 정확히 자기 때에 맞추어 익고, 특별한 모양, 색깔, 향기로 사람들의 관심을 사려고 애쓰지.
당시에는 먹는 것에 대한 학문이 없었어. 무엇을 얼마나 어느 때에 먹어야 할지 누구도 그에 대한 생각조차 없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몸에 필요한 모두를 그램 單位(단위)까지 정확히 섭취한 거야.
열매나 풀, 과일들한테는 年中(연중) 사람의 몸에 가장 큰 이로움을 줄 수 있는 자기만의 날, 시간, 분이 있어. 宇宙의 별들과 소통을 하며 성장을 완료하는 때가 있는 거야. 땅속 그리고 주변의 식물들, 그리고 자기한테 視線(시선)을 선사한 사람의 특성을 고려하여 평가하고 사람한테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지. 그래서 사람을 섬길 준비가 되었다는 바로 그날, 사람은 그것을 먹는 것으로 경의를 표하고, 자기의 飮食(음식)이 되어 완벽해지도록 허락하는 거야.
난 말한 적이 있어. 妊娠(임신)한 여인은 자기의 동산에, 사랑하는 사람과 지은 空間에 아홉 달 내내 머물러야 한다 했어. 이건 신비허구의 의식이 아니야, 여기에는 神性한 삶의 위대한 합리가 배어 있어. 스스로 판단해봐. 자연에는 수많은 植物(식물)이 있어. 그 중에는 여성의 임신을 고통 없이 끊어놓는 것도 있어. 마늘, 순형과의 초목, 고사리 수컷, 쥐방울덩굴이 그 예야. 그 외에도 더 많아. 반면, 엄마의 뱃속에서 胎兒(태아)가 조화롭게 성장하도록 돕는 식물도 있지. 무엇을 얼마나 먹아야 하는지 그 누구도 결코 알 수 없어. 그걸 아는 유일한 자- 그는 엄마의 뱃속에 있어. 그는 자기는 물론이고 엄마까지도 보살피는 거야. 아이를 낳은 여인이 그래서 종종 좋아지고 젊어지는 건 바로 이 때문이야.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임신한 女人은 반드시 자기 동산에 있어야 해. 그곳에서는 풀 포기 하나하나가 다 그녀를 알아보고, 그녀만을 위해서 열매를 맺는 거야. 여인은 그것들을 맛으로 香으로 공부했어. 그녀의 욕구는 자연스럽고, 무엇을 얼마나 섭취해야 할지는 그 누구보다 더 잘 알 수 있어.
타인의 家園 혹은 정원에선 그러한 정확도가 불가능해. 남의 동산이 몇 배나 다 풍성하다 한들, 그곳의 식물이 더 다양하다 한들 소용이 없어. 남의 동산에서 이상적인 식사가 불가능한 이유 또 한 가지는, 무슨 과일이나 열매, 풀을 음식으로 섭취하기 전에 여인은 우선 맛을 보거든.
예로, 여인이 사과가 먹고 싶어서 따서 깨물어보았어. 한 조각을 삼켰더니 그게 몸에 필요치 않음을 바로 느꼈어. 자신과 자기 아이한테 해가 된 것이지. 왜 그리 됐을까? 사과가 겉으로 보기에는 맛이 같아 보여도 그 성분에 있어서는 다 다를 수 있는 것이지. 자기의 동산이라면 열매 맛을 여러 번 보더라도 실수하지 않을 거야. 다른 사람 동산에선 실수를 면하기 어렵지.
그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정확히 飮食(음식)을 섭취하도록 도운 것은 어떤 지식, 어떤 방법이었을까? 무법에 무경전! 사람이 의지한 것은 神性한 것뿐이었어. 요새 사람들이 많지, 사람이 자연과 일체이고 하나라며, 그런데 지금 뭐가 일체라는 거야, 생각해봐? 사람은 시스템이 자기한테 편해 권하는 인조음식만을 섭취하잖아. 그것도 인공의 시스템이 인공적으로 정해놓은 식사시간에.
베다期(기) 사람의 시대에는 하느님이 선사한 느낌이, 사람을 위해 결정권을 쥐었어. 조금이라도 배가 고픈 느낌이 있다면 공간이 만족시켰어. 사람의 느낌은 그 사람의 사랑의 공간과 조화 속에, 가장 완벽한 자동기계나 지혜로운 경전처럼, 언제 무엇을 섭취해야 할지 분까지 정확히 파악했던 거야.
자기가 지은 空間에서 걸으며, 그의 생각은 자유롭게 짓기로 우주적 課題(과제)를 풀기로 했어. 매혹적인 아름다움, 과일이 四方에 널려 있어. 사람은 직감적으로 그 중 하나 혹은 둘, 셋을 따서 먹었어. 사람의 만족을 위해 하느님이 주신 거라는 생각조차 없었어.
그 당시 먹거리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어. 오늘 우리가 숨쉬는 것처럼 먹었어. 그가 지은 공간이 그의 직감과 함께 무엇을 어떻게 언제 육체가 섭취해야 하는지 정확히 해결했던 거야.
겨울이면 여러 식물들이 열매, 나뭇잎을 벗어버리고 휴식을 준비했어. 겨울은 다가올 봄을 짓기 위한 것이야.
하지만 겨울에도 사람은 먹거리에 생각을 허비하지 않았어. 먹을 걸 저장 하지도 않았어. 사람을 대신해서 家畜(가축)들이 열심히, 사랑으로 준비했어. 다람쥐는 여러 가지 버섯, 건과를 저장했고, 꽃가루와 꿀은 꿀벌이 모았지. 곰은 가을이면 저장고를 파서 거기에 뿌리 열매를 모아두었어. 이른 봄, 잠에서 깬 곰은 사람의 거처로 다가와 '우으엉' 소리를 내거나, 앞발로 門을 가볍게 두드리기도 했지, 중요하지 않아.
어떤 저장고를 파헤치려는지 보여주려고 사람을 부른 거야. 혹, 곰이 어디에 먹을 걸 감춰두었는지 잊어버렸나? 아니면, 혼자 있기가 심심했나? 가족 중 누구든 곰한테 나올 수 있었지만 아이가 나오는 경우가 더 잦았어. 잠에서 갠 일꾼의 주둥이를 톡톡 다독거려주고, 장대로 표시해둔 곳에 가서 발을 굴렸어. 곰은 그곳의 흙을 열심히 긁어내서 저장해둔 걸 파헤쳤어. 그걸 보고는 기뻐서 강종 뛰고, 앞발로 꺼냈어. 먼저 안 먹고, 사람이 무엇이든 집안으로 가지고 들어가기를 기다렸어.
사람이 스스로 저장을 할 수도 있었는데, 그 경우에는 일이 아니고 藝術(예술)에 가까웠어. 여러 가정에서 여러 가지 열매로 과실주와 과실즙을 만들었어. 그 술은 보드카와 달리 세지 않고 취하지 않았어. 동물성 음식 중에서 사람은 젖을 섭취하기도 했지만 모든 가축의 젖을 그리하지는 않았어. 善하고, 多情하고, 생각이 깊다고 여겨지는 것, 사람에게 자기의 것을 대접하고 싶은 욕구가 보이는 것에만 젖을 취했어.
예로, 가족 중에 어린애든 혹은 어른이 누가 염소 혹은 암소에게 다가가서 젖통을 만졌는데, 그 짐승이 갑자기 물러선다면, 젖을 사람과 나누고 싶어하지 않는 거야. 그런 가축의 젖을 사람은 마시지 않았어. 그게 사람을 싫어한다는 뜻은 아니야. 가축들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종종 판단을 내렸던 것이지. 현재 젖의 성분이 이 사람한테는 이롭지 못하다고.
베다 문명의 사람들은 오직 자기 터에서 나는 다양한 식물성 식품과 가축이 사람한테 선사하는 것을 섭취했어. 그것은 어떤 미신이나 법으로 그리 된게 아니야. 그건 위대한 知識(지식)의 결정체였어.
'알, zanat' 즈나찌', '인식하다, vedat' 베다찌' 는 똑같은 말은 아니야. Vedat'가 Znat'보다 그 의미 폭이 넓었지. 베다찌는 단순히 아는 것뿐아니라, 자기의 몸으로, 살로, 그리고 靈魂(영혼)으로, 여러 가지 현상, 신성한 조물들의 소명 그리고 그의 시스템을 느끼는 거야. 베다 시대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飮食으로 섭취한 것이 肉身을 보양함은 물론, 靈魂을 깨달음으로 충만케 하고, 우주의 모든 세계로부터 바로 자기에게 情報(정보)를 가져다 준다는 걸 인식하였어.
그 사람들이 갖고 있던 내부의 에너지, 명철한 지혜, 생각의 속도가 현대인들보다 훨씬 뛰어났음은 바로 이 때문이야.
사람의 가족이 지은 공간에 사는 동물세계, 식물들은 사람에 반응하였어. 하느님 대하듯했지. 동물들, 풀, 나무들은 모두 갈망했어. 모두가 사람으로 부터 다정한 시선이나 선한 접촉을 고대한 거야.
이러한 감각 에너지의 힘은 菜園(채원)이나 동산에 雜草(잡초)가 지나치게 자라는 걸 막을 수도 있었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알아. 집안에 누군가가 꽃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꽃은 갑자기 시들 수도 있어. 반대로, 자기에 대한 사랑, 소통을 느낀다면 왕성하게 꽃을 피우기도 하지.
때문에 베다기 사람들은 자기의 채원에 결코 괭이를 대지 않았어. 지금도 이런 표현이 있지. - ''선하지 않은 눈'', 혹은 ''선하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다, 부정 타게 하다'', ''부정''. 그때부터 내려온 거야. 그 사람들은 감각 에너지로 많은 것을 지을 수 있었어.
상상해봐. 한 사람이 자기 터에서 걷고 있어. 주변의 모두가 그의 착한 視線(시선)을 받으려고 해. 그런데 그가 잡초를 보고 생각한 거야. ''왜 네가 여기 있지?''. 잡초는 슬퍼서 곧 시들었어. 반대로, 누가 앵두나무한테 微笑(미소)를 지으면 두 배나 힘차게 실관을 따라 땅의 즙을 내보냈지. 베다 문명의 사람 누가 먼 길을 떠나야 할 일이 생기면, 그 사람은 먹을 것을 가지고 다니는 번거로움이 없었어. 가는 길에 그는 얼마든지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어. 마을에 들어가 훌륭한 가원들을 바라보며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을 청할 수 있었지. 손님에게 음료, 과실, 맛있는 뿌리열매를 올리는 걸 영광이라고들 여겼으니까.
강도질 도적질 없는 삶
베다 문명이 수천 년 존속되었는데 사람 사회에서는 강도질, 도적질 또는 단순한 주먹질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어. 심지어는 나쁜 말도 어휘에 없었어. 이때 그러한 행위를 처벌하는 법도 없었어. 법으로는 결코 범죄행위를 막을 수 없어. 베다 사람들의 지식, 문화가 사람들 관계에서 갈등을 許容(허용)하지 않았던 거야.
우주의 에너지가 그곳에 자라고 사는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거야. 에너지 균형이 흔들려. 호전 에너지는 다 자라서, 어른에게 그리고 아이에게 영향을 미치고, 후손에 병을 유발할 수도 있어.
반대로, 지나는 나그네가 밝은 기분을 남기고 가면, 공간은 더 나은 아름다움으로 환하게 밝았지.
게다가, 마을에 들어온 나그네는 다른 사람 소유의 동산에서, 자기 마음대로 따거나 주운 과일을 육체적으로 먹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어. 베다 문화 사람들의 감각은 아주 銳敏(예민)했어. 자기 마음대로 딴 것, 그리고 선한 손으로 그에게 올린 열매를 먹어보면, 이들의 몸은 큰 차이를 바로 느낄 수 있었어. 상점에서 파는 먹거리가 원래 지어진 바와 달리 냄새도 없고 맛도 없는 건 지금이나 그래. 그건 사람에 대하여 냉정하고 무관심해. 누구의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도 忠誠(충성)하지 않아. 팔면 그만이야.
현대 사람이 베다기에 있었던 飮食을 먹어보고 비교해본다면, 현대의 식품은 먹지 못할 거야.
길손은 남의 것을 청하지 않고 취한다는 건 생각도 못했어. 어떤 물건이든, 심지어 돌맹이에 하나도 자기 안에 정보를 담고 있어. 가원에 사는 가족만이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았지.
베다 문명의 家園 하나 하나는 다, 악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난다 해도, 그것이 범하기 어려운 城廓(성곽)이었어. 동시에, 그곳에 사는 가족에게는 엄마의 벳속과 같았지.
성곽의 높은 담을 세우는 자 아무도 없었고, 초록의 생 울타리로 영역을 막았어. 이 울타리와 그 너머에 자라는 모든 것이, 사람의 肉과 靈魂에 해가 되는 부정적인 것 모두로부터 가족을 보호한 거야.
난 당신에게 말한 적 있어. 오직 자기의 동산이나 자기 소유의 家園의 숲에만 죽은 자의 몸을 埋葬(매장)했다고.
그 사람들은 인식한 거야. 사람의 靈魂은 영원하고, 物質(물질)적인 몸도 흔적없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물체 하나 하나 모두는, 얼른 보기에는 영혼이 없어도, 그 안에 적지 않는 우주의 情報(정보)를 담고 있어.
신성한 자연에서는 아무것도 어디로도 그냥 사라지지 않아. 다만 그 상태와 육을 바꾸는 것일 뿐이야.
죽은 자의 몸을 돌판으로 덮지 않았고, 심지어는 매장한 장소에 어떤 표식도 하지 않았어. 이들의 손과 마음으로 지어진 空間이 이들을 추억하는 위대한 紀念(기념)이 된 거야.
생태를 변화하며, 이제 영혼이 없는 몸은, 자신으로 나무와 풀과 꽃을 키웠어. 그 속에서 새로 태어난 아이들이 노닐었지. 오, 주위의 모든 것이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했는데! 조상의 魂(혼)이 그 공간 위에 머물렀던 거야. 아이들을 사랑하고 保護(보호)한 거야.
아이들은 자기가 태어난 곳, 空間을 사랑으로 대했어. 생각은, 생명의 끝이라는 허상을 만들지 않았어. 베드의 생명은 無限(무한)이야.
솟아 날아오른 영혼은 우주의 모든 차원을 빠르게 날고, 여러 존재의 차원에서 잠시 손님으로 머물다가,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는 거야.
동산 故鄕(고향)에서 깨어나서 아이는 다시 미소 지어. 온 공간이 그에게 미소로 화답하지. 해님의 햇살, 나뭇잎에 살랑이는 바람, 꽃 먼 곳의 별이 환희의 숨을 내쉬는 거야. ''神性한 존재의 아이여, 그대로 인하여 다시 태어난 우리는, 하나입니다.''
他鄕(타향)에 사는 老人의 ''나 죽으면 故鄕에 묻어주오.'' 하는 간청은, 오늘날에는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이야.
이런 사람들은, 지구로, 낙원동산으로 자기를 돌려 놓을 수 있는 건 오직 故鄕(고향)뿐임을 직감하는 거야. 客地(객지)는 靈魂(영혼)을 밀어내니까.
사람은 故鄕에 자기 몸을 묻고 싶어해. 靈魂이 그렇게 수천년을 간청하고 있어. 그런데 공동묘지를 고향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게 어느 나라에 있건?
공동묘지가 생긴 건 최근의 일이야. 사람의 영혼을 지옥으로 갈기갈기 찢고, 능멸하고, 노예로 만들고, 절을 강요하도록 만들어진 거야.
공동묘지가 비슷하기로는... 사람들이 불필요한 쓰레기를 갖다 버리는 쓰레기장과 같아. 공동묘지 상공에선 죽은 자의 영혼이 괴로워. 산 자들은 공동묘지가 무섭지.
그 당시의 家園을 상상해봐. 그곳에 여러 세대의 몸이 매장되어 있어. 그곳의 풀 하나 하나는 다 산 자를 애무하고, 사람의 몸에 이로워지고 싶어.
好戰(호전)을 가지고 들어온 자에게, 동산의 풀 한 포기, 열매가 모두가 갑자기 毒(독)이 되는 거야. 바로 이 때문에 무언가 자기 마음대로 취한다는 생각조차 못한 거야.
가원을 武力으로 취하기는 불가능이야. 무슨 돈을 줘도 살 수 없어. 침입자를 멸할 수 있는 걸 그 누가 감히 범하려 하겠어?
모두가 스스로 자신의 훌륭한 오아시스를 지으려 했지. 우리 별은 해마다 점점 더 좋아졌어. 사람이 오늘 높은 곳에서 현대의 도시를 조망한다면, 무엇이 보일까? 엄청난 인공의 돌 더미가 땅을 덮고 있어. 높이로, 그리고 넓이로 집들이 자라나, 여기저기 점점 더 넓은 공간을 돌 풍경이 가로 막아. 그곳에 깨끗한 물은 없고 공기는 오염되었어. 그 엄청난 돌 무더기 속에서 행복한 家庭(가정)은 얼마나 되지?
베다 문화의 가족에 비한다면, 한 가족도 없어. 더한 얘기도 할 있지. 인공의 거대한 돌 더미 속에 사람의 가족은 사는게 아니야, 자고 있어.
그렇지만 그 최면의 잠 속에서도 산 細胞(세포) 하나가 알갱이처럼 온 몸을 헤매고 다녀. 숨을 죽이는가 하면, 빠른 속도로 날고, 다른 수천에 수천의 것을 건드려서, 잠자는 다른 모두를 산 細胞가 깨우려고 애를 써. 그 이름은 꿈이 라고 하지. 그게 모두를 일깨울 거야! 그러면 사람의 가족들은 다시 지구에 훌륭한 오아시스를 짓기 시작할 거야.
다시 전과 같이 될 거야. 높은 곳에서 地球(지구)를 내려다보면, 살아 있는 수많은 그림이 시각을 매혹할 거야. 그 훌륭한 그림 하나 하나가 의미하는 것은 - 잠에서 깬 베드의 손이 이곳의 흙에 닿았다는 뜻이지. 하느님을 깨닫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깨달은 행복한 가족이 다시 자기 고향에 산다는 거야.
베다 사람들은 하늘의 별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고 있었어. 그 사람들 중엔 위대한 시인, 화가들이 不知其數(부지기수)였어. 마을 간 반목이란 건 없었어. 도적질, 노략질을 할 이유가 없었어. 관료조직도 없었어. 현대의 유럽, 인디아, 이집트, 중국 등의 영역에서 베다 문화가 꽃을 피웠어. 여러 영토 사이에는 경계도 없었어. 크고 작은 위정자도 존재하지 않았어. 연이은 성대한 제전이 자연스러운 다스림이었지.
베다기의 사람들은 현대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상 理致(이치)에 대한 지식이 있었어. 그들의 내부 에너지는, 어떤 식물은 성장을 더욱 촉진하고, 다른 식물은 성장을 늦출 수도 없었어. 가축은 사람의 명령에 순종하려 했는데, 그건 먹을 것을 얻기 위함이 아니었어, 먹을 건 그러지 않아도 충분했거든. 가축은 사람한테서 나오는 복된 에너지를 상으로 받고 싶었던 거야.
지금도 사람의 稱讚(칭찬)은 누구든 기분 좋게 하지. 사람한테도, 동물, 식물한테도.
전에는, 사람의 에너지가 훨씬 더 강했어, 太陽(태양)을 향하듯, 산 것 모두가 그쪽으로 끌렸으니까.
5. 육신의 생명을 위한 식사
6. 강도질 도적질 없는 삶
육신의 생명을 위한 食事(식사)
베다期(기)에 산 사람들은 肉身(육신)의 질병을 하나도 몰랐어. 심지어는 백오십 혹은 이백 살에도 精神은 활기 있고, 삶의 기쁨에 넘쳤으며, 티없이 건강을 유지했어. 그때는 의사도 민속의술사도 없었어. 지금은 이런 사람들이 아주 많지만, 육신의 병이 없었던 이유는, 자기 所有(소유)의 家園에서 삶의 방식이, 자기가 손수 조성한 자연스런 사랑의 空間에서의 삶의 방식이 食事(식사) 문제를 온전히 관장했기 때문이야. 사람의 몸은 필요한 것 모두를 필요한 양만큼, 음식을 섭취하기에 가장 좋은 時間에, 식사하기에 가장 적절한 별자리 때 얻을 수 있었어.
주의를 기울여봐, 블라지미르, 봄 여름 그리고 가을 季節(계절)을 따라 일정 순서에 의해 다양한 식물들의 열매가 성장하고 열매를 맺는 것은 그냥 우연이 아니야.
먼저 온갖 풀과 민들레가 나와. 이걸 겨울 음식과 섞어 먹으면 유난히 香氣(향기)롭고 맛이 있기도 해.
이른 구즈베리, 양딸기가 익어가고, 산딸기 중 이른 것은 양지에서, 늦은 것은 음지에서 익어 있어. 진홍색 체리, 좀 나중에 빨간 앵두, 그 외 온갖 과일, 풀, 열매들이 정확히 자기 때에 맞추어 익고, 특별한 모양, 색깔, 향기로 사람들의 관심을 사려고 애쓰지.
당시에는 먹는 것에 대한 학문이 없었어. 무엇을 얼마나 어느 때에 먹어야 할지 누구도 그에 대한 생각조차 없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몸에 필요한 모두를 그램 單位(단위)까지 정확히 섭취한 거야.
열매나 풀, 과일들한테는 年中(연중) 사람의 몸에 가장 큰 이로움을 줄 수 있는 자기만의 날, 시간, 분이 있어. 宇宙의 별들과 소통을 하며 성장을 완료하는 때가 있는 거야. 땅속 그리고 주변의 식물들, 그리고 자기한테 視線(시선)을 선사한 사람의 특성을 고려하여 평가하고 사람한테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지. 그래서 사람을 섬길 준비가 되었다는 바로 그날, 사람은 그것을 먹는 것으로 경의를 표하고, 자기의 飮食(음식)이 되어 완벽해지도록 허락하는 거야.
난 말한 적이 있어. 妊娠(임신)한 여인은 자기의 동산에, 사랑하는 사람과 지은 空間에 아홉 달 내내 머물러야 한다 했어. 이건 신비허구의 의식이 아니야, 여기에는 神性한 삶의 위대한 합리가 배어 있어. 스스로 판단해봐. 자연에는 수많은 植物(식물)이 있어. 그 중에는 여성의 임신을 고통 없이 끊어놓는 것도 있어. 마늘, 순형과의 초목, 고사리 수컷, 쥐방울덩굴이 그 예야. 그 외에도 더 많아. 반면, 엄마의 뱃속에서 胎兒(태아)가 조화롭게 성장하도록 돕는 식물도 있지. 무엇을 얼마나 먹아야 하는지 그 누구도 결코 알 수 없어. 그걸 아는 유일한 자- 그는 엄마의 뱃속에 있어. 그는 자기는 물론이고 엄마까지도 보살피는 거야. 아이를 낳은 여인이 그래서 종종 좋아지고 젊어지는 건 바로 이 때문이야.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임신한 女人은 반드시 자기 동산에 있어야 해. 그곳에서는 풀 포기 하나하나가 다 그녀를 알아보고, 그녀만을 위해서 열매를 맺는 거야. 여인은 그것들을 맛으로 香으로 공부했어. 그녀의 욕구는 자연스럽고, 무엇을 얼마나 섭취해야 할지는 그 누구보다 더 잘 알 수 있어.
타인의 家園 혹은 정원에선 그러한 정확도가 불가능해. 남의 동산이 몇 배나 다 풍성하다 한들, 그곳의 식물이 더 다양하다 한들 소용이 없어. 남의 동산에서 이상적인 식사가 불가능한 이유 또 한 가지는, 무슨 과일이나 열매, 풀을 음식으로 섭취하기 전에 여인은 우선 맛을 보거든.
예로, 여인이 사과가 먹고 싶어서 따서 깨물어보았어. 한 조각을 삼켰더니 그게 몸에 필요치 않음을 바로 느꼈어. 자신과 자기 아이한테 해가 된 것이지. 왜 그리 됐을까? 사과가 겉으로 보기에는 맛이 같아 보여도 그 성분에 있어서는 다 다를 수 있는 것이지. 자기의 동산이라면 열매 맛을 여러 번 보더라도 실수하지 않을 거야. 다른 사람 동산에선 실수를 면하기 어렵지.
그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정확히 飮食(음식)을 섭취하도록 도운 것은 어떤 지식, 어떤 방법이었을까? 무법에 무경전! 사람이 의지한 것은 神性한 것뿐이었어. 요새 사람들이 많지, 사람이 자연과 일체이고 하나라며, 그런데 지금 뭐가 일체라는 거야, 생각해봐? 사람은 시스템이 자기한테 편해 권하는 인조음식만을 섭취하잖아. 그것도 인공의 시스템이 인공적으로 정해놓은 식사시간에.
베다期(기) 사람의 시대에는 하느님이 선사한 느낌이, 사람을 위해 결정권을 쥐었어. 조금이라도 배가 고픈 느낌이 있다면 공간이 만족시켰어. 사람의 느낌은 그 사람의 사랑의 공간과 조화 속에, 가장 완벽한 자동기계나 지혜로운 경전처럼, 언제 무엇을 섭취해야 할지 분까지 정확히 파악했던 거야.
자기가 지은 空間에서 걸으며, 그의 생각은 자유롭게 짓기로 우주적 課題(과제)를 풀기로 했어. 매혹적인 아름다움, 과일이 四方에 널려 있어. 사람은 직감적으로 그 중 하나 혹은 둘, 셋을 따서 먹었어. 사람의 만족을 위해 하느님이 주신 거라는 생각조차 없었어.
그 당시 먹거리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어. 오늘 우리가 숨쉬는 것처럼 먹었어. 그가 지은 공간이 그의 직감과 함께 무엇을 어떻게 언제 육체가 섭취해야 하는지 정확히 해결했던 거야.
겨울이면 여러 식물들이 열매, 나뭇잎을 벗어버리고 휴식을 준비했어. 겨울은 다가올 봄을 짓기 위한 것이야.
하지만 겨울에도 사람은 먹거리에 생각을 허비하지 않았어. 먹을 걸 저장 하지도 않았어. 사람을 대신해서 家畜(가축)들이 열심히, 사랑으로 준비했어. 다람쥐는 여러 가지 버섯, 건과를 저장했고, 꽃가루와 꿀은 꿀벌이 모았지. 곰은 가을이면 저장고를 파서 거기에 뿌리 열매를 모아두었어. 이른 봄, 잠에서 깬 곰은 사람의 거처로 다가와 '우으엉' 소리를 내거나, 앞발로 門을 가볍게 두드리기도 했지, 중요하지 않아.
어떤 저장고를 파헤치려는지 보여주려고 사람을 부른 거야. 혹, 곰이 어디에 먹을 걸 감춰두었는지 잊어버렸나? 아니면, 혼자 있기가 심심했나? 가족 중 누구든 곰한테 나올 수 있었지만 아이가 나오는 경우가 더 잦았어. 잠에서 갠 일꾼의 주둥이를 톡톡 다독거려주고, 장대로 표시해둔 곳에 가서 발을 굴렸어. 곰은 그곳의 흙을 열심히 긁어내서 저장해둔 걸 파헤쳤어. 그걸 보고는 기뻐서 강종 뛰고, 앞발로 꺼냈어. 먼저 안 먹고, 사람이 무엇이든 집안으로 가지고 들어가기를 기다렸어.
사람이 스스로 저장을 할 수도 있었는데, 그 경우에는 일이 아니고 藝術(예술)에 가까웠어. 여러 가정에서 여러 가지 열매로 과실주와 과실즙을 만들었어. 그 술은 보드카와 달리 세지 않고 취하지 않았어. 동물성 음식 중에서 사람은 젖을 섭취하기도 했지만 모든 가축의 젖을 그리하지는 않았어. 善하고, 多情하고, 생각이 깊다고 여겨지는 것, 사람에게 자기의 것을 대접하고 싶은 욕구가 보이는 것에만 젖을 취했어.
예로, 가족 중에 어린애든 혹은 어른이 누가 염소 혹은 암소에게 다가가서 젖통을 만졌는데, 그 짐승이 갑자기 물러선다면, 젖을 사람과 나누고 싶어하지 않는 거야. 그런 가축의 젖을 사람은 마시지 않았어. 그게 사람을 싫어한다는 뜻은 아니야. 가축들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종종 판단을 내렸던 것이지. 현재 젖의 성분이 이 사람한테는 이롭지 못하다고.
베다 문명의 사람들은 오직 자기 터에서 나는 다양한 식물성 식품과 가축이 사람한테 선사하는 것을 섭취했어. 그것은 어떤 미신이나 법으로 그리 된게 아니야. 그건 위대한 知識(지식)의 결정체였어.
'알, zanat' 즈나찌', '인식하다, vedat' 베다찌' 는 똑같은 말은 아니야. Vedat'가 Znat'보다 그 의미 폭이 넓었지. 베다찌는 단순히 아는 것뿐아니라, 자기의 몸으로, 살로, 그리고 靈魂(영혼)으로, 여러 가지 현상, 신성한 조물들의 소명 그리고 그의 시스템을 느끼는 거야. 베다 시대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飮食으로 섭취한 것이 肉身을 보양함은 물론, 靈魂을 깨달음으로 충만케 하고, 우주의 모든 세계로부터 바로 자기에게 情報(정보)를 가져다 준다는 걸 인식하였어.
그 사람들이 갖고 있던 내부의 에너지, 명철한 지혜, 생각의 속도가 현대인들보다 훨씬 뛰어났음은 바로 이 때문이야.
사람의 가족이 지은 공간에 사는 동물세계, 식물들은 사람에 반응하였어. 하느님 대하듯했지. 동물들, 풀, 나무들은 모두 갈망했어. 모두가 사람으로 부터 다정한 시선이나 선한 접촉을 고대한 거야.
이러한 감각 에너지의 힘은 菜園(채원)이나 동산에 雜草(잡초)가 지나치게 자라는 걸 막을 수도 있었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알아. 집안에 누군가가 꽃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꽃은 갑자기 시들 수도 있어. 반대로, 자기에 대한 사랑, 소통을 느낀다면 왕성하게 꽃을 피우기도 하지.
때문에 베다기 사람들은 자기의 채원에 결코 괭이를 대지 않았어. 지금도 이런 표현이 있지. - ''선하지 않은 눈'', 혹은 ''선하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다, 부정 타게 하다'', ''부정''. 그때부터 내려온 거야. 그 사람들은 감각 에너지로 많은 것을 지을 수 있었어.
상상해봐. 한 사람이 자기 터에서 걷고 있어. 주변의 모두가 그의 착한 視線(시선)을 받으려고 해. 그런데 그가 잡초를 보고 생각한 거야. ''왜 네가 여기 있지?''. 잡초는 슬퍼서 곧 시들었어. 반대로, 누가 앵두나무한테 微笑(미소)를 지으면 두 배나 힘차게 실관을 따라 땅의 즙을 내보냈지. 베다 문명의 사람 누가 먼 길을 떠나야 할 일이 생기면, 그 사람은 먹을 것을 가지고 다니는 번거로움이 없었어. 가는 길에 그는 얼마든지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어. 마을에 들어가 훌륭한 가원들을 바라보며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을 청할 수 있었지. 손님에게 음료, 과실, 맛있는 뿌리열매를 올리는 걸 영광이라고들 여겼으니까.
강도질 도적질 없는 삶
베다 문명이 수천 년 존속되었는데 사람 사회에서는 강도질, 도적질 또는 단순한 주먹질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어. 심지어는 나쁜 말도 어휘에 없었어. 이때 그러한 행위를 처벌하는 법도 없었어. 법으로는 결코 범죄행위를 막을 수 없어. 베다 사람들의 지식, 문화가 사람들 관계에서 갈등을 許容(허용)하지 않았던 거야.
우주의 에너지가 그곳에 자라고 사는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거야. 에너지 균형이 흔들려. 호전 에너지는 다 자라서, 어른에게 그리고 아이에게 영향을 미치고, 후손에 병을 유발할 수도 있어.
반대로, 지나는 나그네가 밝은 기분을 남기고 가면, 공간은 더 나은 아름다움으로 환하게 밝았지.
게다가, 마을에 들어온 나그네는 다른 사람 소유의 동산에서, 자기 마음대로 따거나 주운 과일을 육체적으로 먹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어. 베다 문화 사람들의 감각은 아주 銳敏(예민)했어. 자기 마음대로 딴 것, 그리고 선한 손으로 그에게 올린 열매를 먹어보면, 이들의 몸은 큰 차이를 바로 느낄 수 있었어. 상점에서 파는 먹거리가 원래 지어진 바와 달리 냄새도 없고 맛도 없는 건 지금이나 그래. 그건 사람에 대하여 냉정하고 무관심해. 누구의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도 忠誠(충성)하지 않아. 팔면 그만이야.
현대 사람이 베다기에 있었던 飮食을 먹어보고 비교해본다면, 현대의 식품은 먹지 못할 거야.
길손은 남의 것을 청하지 않고 취한다는 건 생각도 못했어. 어떤 물건이든, 심지어 돌맹이에 하나도 자기 안에 정보를 담고 있어. 가원에 사는 가족만이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았지.
베다 문명의 家園 하나 하나는 다, 악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난다 해도, 그것이 범하기 어려운 城廓(성곽)이었어. 동시에, 그곳에 사는 가족에게는 엄마의 벳속과 같았지.
성곽의 높은 담을 세우는 자 아무도 없었고, 초록의 생 울타리로 영역을 막았어. 이 울타리와 그 너머에 자라는 모든 것이, 사람의 肉과 靈魂에 해가 되는 부정적인 것 모두로부터 가족을 보호한 거야.
난 당신에게 말한 적 있어. 오직 자기의 동산이나 자기 소유의 家園의 숲에만 죽은 자의 몸을 埋葬(매장)했다고.
그 사람들은 인식한 거야. 사람의 靈魂은 영원하고, 物質(물질)적인 몸도 흔적없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물체 하나 하나 모두는, 얼른 보기에는 영혼이 없어도, 그 안에 적지 않는 우주의 情報(정보)를 담고 있어.
신성한 자연에서는 아무것도 어디로도 그냥 사라지지 않아. 다만 그 상태와 육을 바꾸는 것일 뿐이야.
죽은 자의 몸을 돌판으로 덮지 않았고, 심지어는 매장한 장소에 어떤 표식도 하지 않았어. 이들의 손과 마음으로 지어진 空間이 이들을 추억하는 위대한 紀念(기념)이 된 거야.
생태를 변화하며, 이제 영혼이 없는 몸은, 자신으로 나무와 풀과 꽃을 키웠어. 그 속에서 새로 태어난 아이들이 노닐었지. 오, 주위의 모든 것이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했는데! 조상의 魂(혼)이 그 공간 위에 머물렀던 거야. 아이들을 사랑하고 保護(보호)한 거야.
아이들은 자기가 태어난 곳, 空間을 사랑으로 대했어. 생각은, 생명의 끝이라는 허상을 만들지 않았어. 베드의 생명은 無限(무한)이야.
솟아 날아오른 영혼은 우주의 모든 차원을 빠르게 날고, 여러 존재의 차원에서 잠시 손님으로 머물다가,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는 거야.
동산 故鄕(고향)에서 깨어나서 아이는 다시 미소 지어. 온 공간이 그에게 미소로 화답하지. 해님의 햇살, 나뭇잎에 살랑이는 바람, 꽃 먼 곳의 별이 환희의 숨을 내쉬는 거야. ''神性한 존재의 아이여, 그대로 인하여 다시 태어난 우리는, 하나입니다.''
他鄕(타향)에 사는 老人의 ''나 죽으면 故鄕에 묻어주오.'' 하는 간청은, 오늘날에는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이야.
이런 사람들은, 지구로, 낙원동산으로 자기를 돌려 놓을 수 있는 건 오직 故鄕(고향)뿐임을 직감하는 거야. 客地(객지)는 靈魂(영혼)을 밀어내니까.
사람은 故鄕에 자기 몸을 묻고 싶어해. 靈魂이 그렇게 수천년을 간청하고 있어. 그런데 공동묘지를 고향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게 어느 나라에 있건?
공동묘지가 생긴 건 최근의 일이야. 사람의 영혼을 지옥으로 갈기갈기 찢고, 능멸하고, 노예로 만들고, 절을 강요하도록 만들어진 거야.
공동묘지가 비슷하기로는... 사람들이 불필요한 쓰레기를 갖다 버리는 쓰레기장과 같아. 공동묘지 상공에선 죽은 자의 영혼이 괴로워. 산 자들은 공동묘지가 무섭지.
그 당시의 家園을 상상해봐. 그곳에 여러 세대의 몸이 매장되어 있어. 그곳의 풀 하나 하나는 다 산 자를 애무하고, 사람의 몸에 이로워지고 싶어.
好戰(호전)을 가지고 들어온 자에게, 동산의 풀 한 포기, 열매가 모두가 갑자기 毒(독)이 되는 거야. 바로 이 때문에 무언가 자기 마음대로 취한다는 생각조차 못한 거야.
가원을 武力으로 취하기는 불가능이야. 무슨 돈을 줘도 살 수 없어. 침입자를 멸할 수 있는 걸 그 누가 감히 범하려 하겠어?
모두가 스스로 자신의 훌륭한 오아시스를 지으려 했지. 우리 별은 해마다 점점 더 좋아졌어. 사람이 오늘 높은 곳에서 현대의 도시를 조망한다면, 무엇이 보일까? 엄청난 인공의 돌 더미가 땅을 덮고 있어. 높이로, 그리고 넓이로 집들이 자라나, 여기저기 점점 더 넓은 공간을 돌 풍경이 가로 막아. 그곳에 깨끗한 물은 없고 공기는 오염되었어. 그 엄청난 돌 무더기 속에서 행복한 家庭(가정)은 얼마나 되지?
베다 문화의 가족에 비한다면, 한 가족도 없어. 더한 얘기도 할 있지. 인공의 거대한 돌 더미 속에 사람의 가족은 사는게 아니야, 자고 있어.
그렇지만 그 최면의 잠 속에서도 산 細胞(세포) 하나가 알갱이처럼 온 몸을 헤매고 다녀. 숨을 죽이는가 하면, 빠른 속도로 날고, 다른 수천에 수천의 것을 건드려서, 잠자는 다른 모두를 산 細胞가 깨우려고 애를 써. 그 이름은 꿈이 라고 하지. 그게 모두를 일깨울 거야! 그러면 사람의 가족들은 다시 지구에 훌륭한 오아시스를 짓기 시작할 거야.
다시 전과 같이 될 거야. 높은 곳에서 地球(지구)를 내려다보면, 살아 있는 수많은 그림이 시각을 매혹할 거야. 그 훌륭한 그림 하나 하나가 의미하는 것은 - 잠에서 깬 베드의 손이 이곳의 흙에 닿았다는 뜻이지. 하느님을 깨닫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깨달은 행복한 가족이 다시 자기 고향에 산다는 거야.
베다 사람들은 하늘의 별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고 있었어. 그 사람들 중엔 위대한 시인, 화가들이 不知其數(부지기수)였어. 마을 간 반목이란 건 없었어. 도적질, 노략질을 할 이유가 없었어. 관료조직도 없었어. 현대의 유럽, 인디아, 이집트, 중국 등의 영역에서 베다 문화가 꽃을 피웠어. 여러 영토 사이에는 경계도 없었어. 크고 작은 위정자도 존재하지 않았어. 연이은 성대한 제전이 자연스러운 다스림이었지.
베다기의 사람들은 현대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상 理致(이치)에 대한 지식이 있었어. 그들의 내부 에너지는, 어떤 식물은 성장을 더욱 촉진하고, 다른 식물은 성장을 늦출 수도 없었어. 가축은 사람의 명령에 순종하려 했는데, 그건 먹을 것을 얻기 위함이 아니었어, 먹을 건 그러지 않아도 충분했거든. 가축은 사람한테서 나오는 복된 에너지를 상으로 받고 싶었던 거야.
지금도 사람의 稱讚(칭찬)은 누구든 기분 좋게 하지. 사람한테도, 동물, 식물한테도.
전에는, 사람의 에너지가 훨씬 더 강했어, 太陽(태양)을 향하듯, 산 것 모두가 그쪽으로 끌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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