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스타시아가 들려주는 人類(인류)의 역사' 中
 
3. 베다 문화의 子女(자녀) 양육
4. 의례
 
 
베다 문화의 子女(자녀) 양육
 
인류는 아직도 완벽한 자녀 양육법을 찾아 헤매고 있어. 현명하고도 지혜로운 스승을 찾아, 그에게 자기 아이 교육을 맡기려 하지. 블라지미르, 당신도 아들과 對話(대화)를 준비하며 5년이나 최선의 아동교육법을 찾아 헤맸어. 당신에게 모든 걸 설명해줄 수 있고, 당신의 아들과 소통할 수 있게 하는 법을 찾으려 했어. 유명한 선생님들과 여러 학자들에게도 자문을 구했어. 그런데 어떤 조언도, 법도 당신을 만족시키지 못했고, 완벽해 보이지 않았어. 당신에겐 점점 더 의심이 들었어.
 
완벽한 자녀 교육법이 하나라도 있기만 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활용하였을 터이고, 그러면 지구상 어디엔가 幸福(행복)한 사람들이 살고 있을 거야. 그런데 모든 나라에 문제는 다양하고 서로 비슷한 걸. 행복한 가정이란 건초더미에서 바늘 찾기와 같으니. 그러니까 기적과 같은 효과가 있는 교육법은 없는 거야. 찾아봐야 소용이 없어. 그런 건 없으니까.
 
나를 부디 용서해, 그 때는 내게 다른 방도가 없어서, 나는 내내 당신의 생각을 추적했어. 당신을 통해 알려고 애썼어, 도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분명한 것으로부터 멀게 하는지.
그러다 어느날 당신의 생각을 느낄 수 있었어. "불신, 자신의 실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자녀를 학교에 대학에 맡기는 거야. 나중에 교사들에게 責任(책임)을 전가하려고. 자기의 책임은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아."
 
한번은 난 보았어. 당신에게 이 생각이 떠올랐을 때, 당신은 얼굴이 하얘져 꼼짝 못하고 얼어붙었어. "부모, 그리고 사회의 삶의 양식이 자녀를 보육하는 거야." 그 생각은 참이고 정확해. 그런데 당신은 그게 두려웠고 계속 그걸 잊으려고만 했지. 하지만 명백한 것을 잊을 수는 없었어.
당신은 자신의 생각을 인정하려들지 않았어. 당신은 이렇게 사리분별을 했어. "특수학교에서 공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학자, 화가, 시인이 될 수 있는지? 수학, 천문학, 역사학을 어찌 알 수 있느냐고?"
 
당신이 생각한 것은 學科目(학과목)이야. 자녀교육에선 그게 주가 아니야.
온 지식을 한 알의 씨앗에 압축할 수 있는, 느낌의 문화가 측량할수 없이 더 중요해. 당신은 내 말의 明明白白한 증인고로, 당신은 이걸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당신은 특수학교에서 공부하지 않고도 책을 써냈으니까.
 
당신과 내가 숲 속의 빈터에서 같이 한 건 딱 3일이야. 이제 당신은 여러 나라에서 유명한 作家(작가)가 되었어. 사람들로 꽉 찬 큰 마당의 무대에 설 수도 있어. 그 중에는 교사, 학자, 시인, 유명한 민속치료인들이 있어. 그들 앞에서 당신은 3시간이 넘도록 얘기할 수 있어. 사람들은 집중해서 당신의 말을 듣지. 당신한테 종종 질문을 하기도 하지.
 
"그 無限(무한)한 양의 정보를 당신은 어떻게 기억하지요? 책을 보지도 않고 기억만으로 어떻게 정확히 읽을 수 있지요?" 이런 질문에 당신은 알기 쉽게 대답할 수 없었어. 내가 당신에게 전에 없던 마술을 건 것이라 당신은 생각하고 알았지. 정작 당신한테 일어난 일은 훨씬 단순한 거야.
 
타이가에서 당신이 나와 함께한 첫 3일 내내, 베다 학교가 당신에게 작용한 거야. 그건 집착하지도 강요하지도 않아. 거기에는 경전도 전제도 없어. 모든 정보를 그 학교는 感情(감정)을 통해 전할 수 있어.
 
당신은 화가 나가도, 환희에 들뜨기도, 웃기도, 놀라기도 했어. 일어난 느낌 하나를 통해 당신에게 정보가 주입된 거야. 그 양이란 위대하고, 당신이 그 느낌을 회상할 때, 그 3일간 당신한테 일어났던 느낌을 회상할 때, 나중에 열리는 거야.
느낌은 엄청난 양의 壓縮(압축)된 정보이니까. 느낌이 더 밝고 강할수록 그 안에는 더 많은 우주의 지식이 들어 있어.
 
타이가에서 첫 번째 밤을 보내고 일어나서 당신은 옆에 누운 암곰을 보았어. 생각나지. 순간 당신은 겁에 질렸어. "일순간에 겁에 질리다." 란 말을 잘 생각해봐, 부디. 놀란다는 것은 도대체 뭐지? 그걸 한 번 정보로 번역해보자고. 그럼 어떻게 되지? 당신은 생각한 거야. "내 옆에 엄청난 몸집의 짐승이 있다. 그의 무게는 내 몸무게보다 훨씬 더 나간다. 그 발의 힘이란 내 팔의 근력보다 세다. 숲 짐승은 사나울수 있고 내게 덤벼들어 내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수도 있다. 나는 무기가 없다. 벌떡 일어나서 도망쳐."
 
이 엄청난 양의 정보는 의식적으로 생각할 때, 일순이 아닌 훨씬 많은 시간을 요해. 하지만 느낌으로 압축된 정보, 우리의 경우에 있어, 공포란 느낌으로 압축된 정보는 상황에 일순간 대응토록 해주지. 사람한테서 일어나는 일순의 선명한 느낌, 그 순간 엄청난 정보가 흐르는 거야. 그걸 기술하면 과학대전이 되고, 그걸 느낌없이 사유하는 데는 몇 해가 걸릴 수도 있어.
 
느낌들의 적절한 複合(복합), 그 느낌들의 올바른 順序(순서)는 이미 사람한테 내재하는 지식의 양을 몇 배나 더 느릴 수 있게 해.
예로, 암곰에 놀란 당신의 공포는 금방 사라졌어. 왜 사라졌을 까? 그건 자연스럽지 않잖아. 당신은 여전히 타이가에 있었고, 여전히 무기가 없었으며, 암곰이 멀리 간 것도 아니며, 또한 타이가에는 다른 짐승들도 수없이 많았는데.
그런데 당신 안에서 공포란 느낌은 일순 安心의 느낌으로 바뀌었어. 이 안심이란 느낌은 당신이 당신의 증기선에서 혹은 무장을 한 경호대에 싸여, 도시에 있을 때보다 더 큰 것이었어.
 
당신 안에서 안심의 느낌이 일어난 것은 순간이었어. 암곰이 내 말과 몸짓에 따라 나의 명령을 기꺼이 이행하는 것을 당신이 보자마자 일어난 거야. 안심이란 느낌 덕분에 당신은 정보를 새로이 인식할 수 있었어. 당신에게서 일어난 일 모두를 소상히 적으려면 큰 학술서의 적지 않은 장을 적고도 남을 거야. 당신은 책에서도 짐승들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적지 않은 말을 할애했어. 말로는 끝이 없지. 하지만 느낌에는 일순이 담겨 있어.
 
그런데 더 중요한 사건이 있었어. 불과 몇 초 만에 두 개의 상반되는 느낌이 절대균형을 이루었던 것이지. 당신에게 나는 같이 있으면 절대 안심이 되고, 동시에 알 수 없는, 약간은 좀 겁이 나는 사람이 되었어.
느낌의 均衡(균형)은 아주 중요해. 그것은 균형있는 사람을 증거하는 거야. 하지만 동시에 연속적으로 맥동하면서 느낌은 계속해서 새로운 정보의 흐름을 창출하기도 해.
 
베다 문명의 각 가정의 문화, 생활양식, 온 인류사회의 생활양식은 자라나는 세대를 교육하고 사람이 빠르게 성숙토록 하고, 끌어안을 수 없이 넓은 우주 세상에서 사람이 짓도록 하는, 위대한 학교였던 거야.
베다기의 아이들은 현대 학교에서처럼 교육받지 않았어. 흥겨운 祝祭(축제)와 儀式(의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교육이 이루어졌어. 축제는 한 가족의 축제이기도 했고, 온 마을 사람들, 때로는 이웃한 몇 개 마을 사람이 참가하는 축제도 있었지.
 
더 정확히는, 베다기의 수많은 축제는 동시에 어린이나 어른들에게 중요한 試驗(시험)이자 정보 공유의 場(장)이었던 거야.
가족의 생활양식과 축제 준비, 그것으로 엄청난 양의 체계적인 지식을 얻게 할 수 있었어.
아이를 억지로 앉혀서 선생 말을 듣게 하지 않고도, 지식은 술술 아이에게 주어진 거야. 교육과정은 자녀 모두에게 있어 쉽 없이, 흥겹게, 술술 흘러간 거야. 그건 기다려지고 흥미 있는 것이었어.
 
그런데 거기에는 오늘날 보기에는 특별한 기법도 있었어. 사람을 교육하는데 있어 그 엄청난 의미를 모르고, 현대의 학자들은 베다 시대의 부모들의 행위를 미신 또는 신비주의라 할 수도 있어.
예로, 아직 잘 일어서지도 못하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직 갓난 우리 아들을 힘센 독수리가 낚아챈 걸 보고 당신도 그리 생각했고 황당했지. 발톱이 드센 발에 아이를 잡고는 빈터 위 하늘을 높게도 낮게도 빙빙 돌았지.
 
베다 가정에서는 누구든 아이한테 비슷한 걸 해주었어. 여기에 항상 독수리가 이용된 건 아니야. 집 가까이 높은 山이 있다면 산꼭대기에서 갓난아이한테 地球(지구)를 보여주기도 했어. 때로는 아버지가 아이를 안고 높은 나무에 오르기도 했지. 혹은 이 목적으로 특별히 망루를 세우기도 했어. 어쨋거나 독수리가 갓난아이를 잡고 하늘 높이 원을 그리고 날 때, 효과가 가장 좋았어.
 
이 순간 온갖 느낌을 체험하는 갓난아이는 안으로 수많은 지식이 빠르게 들어간 거야. 그러다 어른이 되어서 원할 때, 그럴 필요성이 생기면, 아이는 느낌을 통해 이 지식을 자기 안에서 열 수가 있는 거야.
예로, 잘생긴 靑年 라도미르는 新婦(신부) 류보밀라와 함께 그야말로 완벽한 家園의 설계를 지은 걸 내가 당신한테 보여주었어. 나는 또한 당신께 말했어. 이와 비슷한 것을 현대과학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과학자라도 지을 수 없고. 모두가 하나로 합쳐도 할 수 없어.
 
그렇다면 젊은이는 그때 어떻게 혼자 그런 기적을 이룰 수 있었을까? 모든 식물에 대한 지식, 바람의 의미, 별들의 빛, 그 외 다른 많은 것들의 소명에 대한 지식이 청년은 어디서 났을까? 그는 보통 학교 책상에 앉아본 적이 없거든. 학문을 하지도 않았어. 청년은 어떻게 오십삼만 종의 식물들 각각의 召命(소명)을 터득했을까? 그 중 청년은 9천 개만 썼을 뿐이지만, 이때 각각의 상호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어.
 
어려서부터 라도미르가 자기 아버지와 이웃의 家園을 본 건 물론이야. 그렇다 해도 아무것도 적지 않았고, 기억하려고 애를 쓰지도 않았어. 무엇이 왜 자라는지 부모에게 묻지 않았고, 부모는 그에게 훈계로 기분 상하지 않았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진 라도미르는 부모의 것보다 더 나은 자신의 것을 지었어.
 
블라지미르, 부디 당신 놀라지마! 이해해. 정작 라도미르가 지은 건 과원, 채원이 아니야. 그의 가원이 실제 그리 되었지만 말이야. 실제 라도미르는 사랑하는 여인과 앞으로 자기 자손들을 위해 자기의 느낌으로 훌륭한 그림을 그린 거야. 그의 분출하는 사랑과 영감에 도움을 준 건 독수리와 함게 한 가원 위 飛行(비행)이었어.
 
어려서 라도미르가 높은 하늘에서 가원의 風光(풍광)을 내려다볼 때, 그 그림이 그의 潛在意識(잠재의식) 속에 마치 영화 필름처럼 찍힌 거야.
그는 아직 머리로는 훌륭한 그림을 인식할 순 없었어. 하지만 느낌으로는! 느낌으로는 다양한 모습의 공간에 대한 모든 정보를 영원히 스캔한 것과 같아. 이성이나 지혜가 아닌 느낌으로, 본 것들의 훌륭함을 만끽한 거야.
 
그렇게 된 것은, 공중에서 본 훌륭한 풍광속에 微笑(미소)를 짓고 서 있던 자기 엄마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해. 아기에게 엄마의 미소보다 더 좋은 게 무엇있을까? 엄마가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어. 엄마가! 엄마의 가슴에는 따뜻하고 生命力 넘치는 젖이 있지. 아이에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어. 라도미르가 새처럼 높은 곳에서 보니, 그에게 보이는 것이 엄마한테서는 뗄수 없는 하나의 전체로 보였어. 환희의 느낌이 플래시처럼 반짝이던 순간, 세상 理致(이치)에 대한 지식 일부가 그의 속으로 들어가게 된 거야.
 
현대의 동물학, 농학, 그리고 천문학과 같은 분야에서 젊은이는 위대한 학문적 수준을 보여주었어. 그들의 미적 취향도 높은 평가를 받았지.
베다기에도 특수 교사들이 있었던 건 물론이야.
 
겨울이면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마을을 돌았어. 이들은 여러 학문 분야에 특별히 지혜로운 사람들이었지. 마을마다 공공의 집이 있었고, 여기서 자신들의 학문을 늘어놓았어. 그러다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아이 중 누가 天文學에 특히 관심을 보이면, 선생은 그 아이의 부모 집으로 갔어. 그 집에서는 선생을 정성스레 맞았어. 학문이지 지고한 어린애가 원하는 만큼 아이와 별에 대한 對話를 나누었어. 그 대화에서 누가 누그로부터 더 많은 지식을 취했는가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어.
 
나이가 지긋한 선생은 깊은 존경심으로 어린아이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으니까. 훈계없이 어린애와 논쟁을 하기도 했어. 대화의 내용, 거기서 나온 결론, 발견을 기록하는 것은 베다기에는 의미가 없었어. 오늘날 부산한 일상, 온갖 근심 걱정에서 홀가분한 사람의 기억은 지금의 최신 컴퓨터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품을 수 있었어.
게다가 그 발견이 합리적인 것이라면, 모든 사람들에게 바로 奉仕(봉사)하도록 현실에 적용되었어.
 
부모와 일가족 모두도 학문의 대화를 傾聽(경청)할수 있었어. 가끔은 슬그머니 대화에 끼어들기도 했지. 그렇지만 대화의 주인공은 항상 어린애였어. 어린 천문학자가 어른들 보기에 별들에 대해 그른 결론을 내리면, 이렇게 말할 수 있었어. "미안하구나, 내가 너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는걸."
어린애는 애써 설명을 했지. 어린애는 자신이 옮음을 증명하는 경우가 잦았어.
 
봄이 오기전 마을 사람들은 공공의 집에 모이곤 했어. 모두가 자기 자식들이 이룬 성과에 관심을 가졌던거야. 이때 보고가 이루어졌어. 여섯 살 짜리 소년이 마치 철학자와도 같이 삶의 意味(의미)에대해 얘기해,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지. 어린이들은 이날 모두가 보는 앞에 어여쁜 공예품들을 내보이기도 했어. 노래로 모인 사람 모두의 청각을 녹이거나 특별한 춤으로 즐거움을 주는 아이도 있었어.
 
그 행위를 시험이라고 혹은 모두를 위한 축제라고도 할 수 있어, 중요하지 않아. 더 중요한 건, 모두가 지음에서 기쁨을 얻었다는 거야. 연이은 좋은 기분, 이날 이루어진 발견들은 생활에 기꺼이 이용되었어. 어린이 교육에 있어 누가 주일까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을까? 베다기의 가족의 문화, 삶의 양식이라고 확고히 답할 수 있어.
 
오늘을 사는 어린이들이 그 문화에서무엇을 취할 수 있을까? 오늘 존재하는 어린이 교육법중 어떤 것을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스스로 판단해봐. 모두가 온전하지 않아. 인간의 역사를 왜곡함으로써 우리는 어린이들이 자기 스스로한테 거짓말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어. 생각이 그릇된 길은 가도록 강요하고있어. 그 때문에 스스로 괴롭고, 자기 자식도 괴롭게 하는 거야.
 
무엇보다도, 사람은 모두 自身에 대한 眞理를 깨달아야 해. 진리가 없다면, 거짓 전제 속에서 삶은 催眠(최면)과 비슷한 거야.
어린이 교과서에 세 그림의 순서를 바꾸어 놓아야 해. 지구에 사는 사람의 歷史(역사)를 아이들에게 바르게 이야기해야 해. 역사의 진실을 자신이 스스로 확인해야 해. 그리고 나서 왜곡되지 않은 본질을 이해한 아이들과 같이 새길을 선택해야 해.
지구와, 지구 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발전 역사에 대한 어린이 책의 세그림은 유감이다. 그림이 어린아이에게 무엇을 주입하는지 봐.
 
첫 번째 그림. 원시의 사람이 그려져 있어. 어떤 모습이지, 봐. 가죽을 입고 방망이를 들고 서 있는 사람. 짐승처럼 사납게 아빨을 드러내고 시선은 멍청해. 죽인 짐승들 뼈가 주위에 널려 있고.
두 번째, 갑옷에 칼을 차고 투구가 장신구처럼 번쩍거려. 군대를 이끌고 도시들을 점령하지, 노예 군중이 그 앞에 땅바닥에 바짝 엎드렸어.
세 번째, 사람의 시선은 생각이 그윽하고 점잖아. 양복에 건강한 모습이야. 주위에는 온갖 장치와 편의 기기가 많아. 현대 사람은 아름답고 행복해.
 
세 그림 모두 거짓이야, 그리고 순서도 틀렸어. 이 모든 거짓은 어린이들을 집요하고 엄하게 세뇌하지, 우연이 아니야. 이렇게 하는 자가 누구이고 그에게 왜 이 거짓이 필요한지는 나중에 얘기해줄 수 있어. 우선은 당신 스스로 이 세 그림이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지 확인해봐.
 
스스로 판단해봐. 나무, 풀, 그리고 관목. 당신은 지금도 이들의 시원의 모습을 볼 수 있어. 그 나이는 수십억 년이야. 그것들을 보면서 당신은 지금도 그 완벽함에 환희할 수 있어.
이게 무슨 말일까? 創造主의 조물들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지어진 거야. 자, 창조주가 사랑하는 조물 사람, 사람이 엉터리로 지어졌을 까? 사실이 아니야! 지구 상의 훌륭한 조물들 중에서 사람은 맨 처음부터 완벽하고도 완벽한 조물이었어.
 
첫 번째 그림은 역사의 진리를 담아내야, 생각이 깊고 어린애와 같이 깨끗한 시선을 한 행복한 사람들의 가족을 담아야 해. 부모의 얼굴에는 사랑이 가득해. 사람의 육체는 주위와 조화 속에 놀랍도록 아름답고, 굳은 의지는 경건하지. 주위에는 정원이 만개했어. 짐승들 모두는 언제라도 감사히 사람에 봉사할 태세야.
 
두번째 그림에도 어린이를 위해서 역사의 사실을 전부 나타내야 해. 이 그림에선 해괴망측한 투구를 쓴 두 군대가 서로를 향해 돌진하고 있어. 장수들은 높은 곳에 서 있지. 神官(신관)들은 이들을 집요하게 설득하고 있어. 군 수뇌들의 얼굴은 당황하고 겁에 질린 표정이야. 이미 설득 당한 자들은 짐승과 같은 광기가 서려 있어. 일순이면 미친 듯한 칼부림이 시작될 거야. 사람들은 자기와 같은 종을 직일 거야.
 
세 번째 그림은 현대야. 병색이 창백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수많은 인조의 것들에 싸여 있어. 어떤 이는 뚱뚱하고, 곱사등인 사람도 있고, 표정은 시무룩하고 수심이 싶어. 도시의 행인들 대부분이 저와 같아. 창문 밖 거리에선 자동차들이 폭발하고, 하늘에는 재가 날리지.
역사의 사실을 반영한 세 그림을 아이한테 보여주며 물어야 해. ''너라면 어떤 삶을 선택하겠니?''
 
그림은 조건적인 도해일 뿐이야. 진솔한 이야기, 바르고 능숙한 이야기가 필요함은 물론이야. 아이는 거짓으로 왜곡되지 않은 인류의 온 歷史(역사)를 알아야 해. 그런 연후에야 교육을 시작할 수 있어. ''오늘을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지?''하고 아이한테 물어봐야 해.
 
아이가 즉가, 일순에 답을 찾지는 못해. 하지만 반드시 찾아! 다른 생각- 지음의 생각이 작동하는 거야. 아, 어린이 교육! 블라지미르, 이해해, 진솔한 質問(질문)하나가, 자기 아이로부터 답을 듣고자 하는 소원이 부모와 아이를 영원히 하나가 되게 하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 행복을 향해 함께 하는 움직임은 끝이 없어. 하지만 그 시작을 이미 행복이라 할 수 있어.
오늘 우리 모두는 자기의 역사를 진실로 알아야 해.
 
 
 
儀禮(의례)
 
베다 시대의 의례 행위의 참 뜻을 중상하고 왜곡하느라, 후에 신비허구의 神官(신관)들은 적지 않은 힘을 쏟았어. 그 예로, 베다 사람들은 분별없이 물을 숭배한다는 소문이 퍼졌어. 아직 사랑도 모르는 최고의 처녀를 매년 제물로 바치고, 호수나 강물에 던지거나, 뗏목에 묶어 강변에서 밀어내어 죽게 한다는 소문이 퍼졌어.
 
실제로 베다 사람들에게는 물, 호수나 江에 연관에 다양한 행사가 이었어. 하지만 그 뜻은 전혀 다른데 있었어. 죽음이 아닌 삶을 도운 것이었어. 한 가지만 말해줄게. 겉모습이 유사한 것은 오늘날까지 살아남았지. 비슷할 뿐이야. 합리적인 뜻, 위대한 그의 시적인 의미는 오늘알 불분명한 신비주의로 대체되고 말았어.
 
지금도 여러 나라에 물과 연관된 축제가 있어. 花環(화환), 혹은 예쁜 燈(등)이나 촛불을 얹은 조그마한 뗏목을 강물에 밀어넣으며 소원을 빌지. 자 보아. 원래 이 축제의 뜻이 얼마나 이성적이고 시적이며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지.
 
베다 시대의 처녀 한두 명이, 그 수는 중요치 않고, 고향마을에서 사랑하는 짝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이었어. 몇 개의 마을이 한꺼번에 모이는 큰 축제에서도 자기의 운명을 택하지 못했어. 선택의 폭이 제한적이었던 건 절대 아니야. 그들 앞에선 마치 神仙(신선)과도 같이 생각이 그윽한 시선을 한 훌륭한 청년들이 축제의 마당에서 반짝였었거든.
 
하지만 처녀의 가슴, 마음은 다른 사람을 기다린 거야. 사랑이 이들에게 오지 않은 것이지. 처녀는 가슴, 마음은 다른 사람을 기다린 거야. 사랑이 이들에게 오지 않은 것이지. 처녀는 누군가에 대해 꿈을 꾸었지. 하지만 누구? 처녀 자신도 알지 못했어.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수수께끼, 사랑 에너지의 자유로운 선택을 설명하지 못해.
 
그래서 어느 정해진 날 처녀들은 江으로 나갔던 거야. 江邊(강변) 잔잔한 곳에서 자그마한 뗏목을 방류한 거야. 꽃으로 만든 화한으로 뗏목의 테두리를 장식했어. 뗏목의 한가운데에는 과일즙이나 과실주를 담은 작은 주전자를 놓았어. 주전자 주변에는 과일들을 놓았고, 음료는 처녀가 손수 만든 것이어야 했고, 과일은 자기가 직접 家園에 심은 나무에서 딴 것이어야 했지. 뗏목에는 아마실로 짠 끈이나 그 외 다른 것을 놓을 수 있었는데 반드시 손수 지은 것이어야 했어. 맨 마지막으로 뗏목에 조그마한 燈(등)을 내려놓았어.
 
강변에 놓은 모닥불을 돌며, 처녀들은 圓舞(원무)를 추며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랑하는 님에 대해 노래를 불렀어. 그리고 나서 모닥불에 타는 가지를 하나 집어서 등의 심지에 불을 붙인 거야. 강변에서 뗏목을 밀어넣으면, 물의 흐름을 따라, 알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내려 간 거야.
처녀들의 視線(시선)은 소망을 품고 자기 뗏목을 배웅했어. 멀리서 등불만이 보이고 점점 작아졌어. 하지만 처녀들의 가슴은 소망의 불로 타올랐어. 알지 못하는 누군가를 향해 기쁘고 부드러운 느낌이 자라났어.
 
처녀들은 자기 집으로 뛰어 돌아가 홀로 되어 만남을 소중히 준비했어. 그가, 기다렸던 그가 날이 밝는 아침 또는 석양에, 중요치 않아, 찾아왔어. 하지만 어떻게? 무엇이 그를 인도했지? 만남을 도운 것이 신비일까 아니면 합리일까? 혹, 베다 사람들이 느낌으로 접해본 지식이 그리한 건 아닐까, 스스로 판단해봐.
 
처녀들의 뗏목은 강물의 흐름을 따라 흘러내렸고, 온 마을에서, 심지어는 먼 곳에서도 그 날을 알고 있었지.
뗏목의 여행은 하루, 이틀, 사흘이 걸릴 수도 있었어. 낮과 달이 밝은 밤에, 사랑을 알지 못한 靑年들이 강변에서 홀로 소망을 품은 채 뗏목을 기다리고 있었어.
 
이제 그가 저 멀리서 내려오는 불빛을 보았어. 바로 물에 뛰어들어 사랑의 불빛을 행해 헤엄쳤지. 청정한 강물의 흐름은 청년의 뜨거운 몸을 태우는게 아니라 부드럽게 감쌌어. 불빛이 점점 가까워지고 뗏목들의 윤곽이 나타났어. 그 중 더 아름다운게 있었지. 청년은 그 중 하나를 골랐어. 자기의 선택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이유는 알 수 없지.
 
청년은 뗏목을 손으로 밀거나 뺨에 테두리를 대고 밀어서 강 한가운데서 강변으로 몰았어... 강물은 흐름으로 청년과 장난을 치는 듯했어. 그렇지만 몸은 점점 더 힘이 충만했고, 강물의 장난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생각은 이미 강변에 가 있었지.
청년은 뗏목을 땅에 조심조심 내려놓았어. 숨으로 등을 끄고, 음료를 마셔보니 기쁨이 차 올랐어. 그리고 서둘러 집으로 가서 길을 떠날 채비를 한 거야. 뗏목에 놓였던 모두를 청년은 챙겼어. 길을 가며 열매를 맛보고, 그 맛에 감격했어. 얼마 지나지 않아 뗏목이 떠내려온 마음에 도착했어. 길을 오며 만끽했던 열매의 나무와 果園(과원)을 오차 없이 찾아냈어.
 
우와! 사람들은 놀랄 수도 있겠지. 이 건 미신일 수 밖에. 청년들이 어떻게 하나도 오차 없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었냐고?
 
사랑이 자기만 아는 길로 그들을 인도했다 할 수 있어. 하지만 난 더 단순히 말할 수 있지. 등도 도움이 된 거야. 조그만 용기에는 기름이 담겨 있고, 심지가 그 기름에 떠서 타고 있었지. 그 용기에는 눈금이 새겨져 있었어. 그걸 보면 누구든 등불이 얼마나 오래 탔는지 쉽게 알 수 있었던 거야. 강물의 흐름 속도도 알려져 있었어. 아주 쉬운 과제이지- 쉽게 풀었어. 마음에서, 자기가 먹어본 열매의 나무를 찾기란 베다시대의 청년에겐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
 
열매가 서로 비슷해 보이는 건, 부주의한 사람한테만 그래. 심지어는 나란히 자라는 같은 식물의 열매라도 모습과 색갈, 냄새 그리고 맛에서 차이가 있어.
한 가지 정확히 설명이 안 되는 게 있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녀와 그가 처음 만나자마자 반드시 사랑에 빠졌을까? 그 사랑이란 유난히 뜨거웠거든.
 
현대의 철학자라면 이렇게 답했을 거야. ''그거야 간단하지 않소. 그들의 느낌은 만남이 성사되기 전부터 꿈으로 달궈진 것이오.''
힌 머리카락이 멋진 베둔이라면 그 비슷한 질문에 교묘한 웃음을 머금은 채 답했을 거야. ''우리 江(강)은 언제나 장난꾸러기였다오.''
 
물론, 원한다면, 내가 얘기한 얘식의 매순간을 베둔을 해석하고 매 순간의 목적을 정확히 풀어낼 수도 있었을 거야. 위대한 경전을 쓸 수도 있고. 하지만 베둔이라면 그런 일에 누구도 생각을 허비하지 않아. 왜냐하면, 블라지미르, 그 사람들은...
삶을 분석하지 않고, 삶을 지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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