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癌) 환자 100명에 대한 '구당침뜸' 치료법

제2절 본론

1. 암의 정의
1) 동양의학적 암
암에 대한 정확한 동양의학적 정의를 찾기는 어렵지만, 황제내경에 의하면 '기혈이 머물러 있으면서 사라지지 않으면 덩어리가 된다'고 하였고, 고려의학에서는 유기체의 정기가 허해진 바탕에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기체, 어혈 또는 습담울체 등이 생기며 그것이 뭉쳐 작은 것으로부터 점차 커지면서 굳어져 암이 된다고 보았다.

구당침뜸의학의 관점에서는 '암은 곪지 않은 종기'라고 한다. 세포 덩어리에 균이 침범해서 곪는 것인데, 곪아야 할 것이 곪지 않고 덩어리가 되거나, 곪지 않고 커지는 것을 암이라고 보는 것이다.

2) 서양의학적 암(cancer)
'종양(tumor)'이라고 하는 것은 신체조직의 과잉성장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자라난 덩어리를 의미한다. 이는 양성종양(benign tumor)과 악성종양(malignant tumor)으로 구분할 수 있다. 경ㅇ에 따라 덩어리가 주위 장기를 압박할 뿐 아니라 그에 인접한 정상 조직 및 장기에 침윤하는 것이 악성종양이며, 서양의학에서는 이것을 암(cancer)이라고 보는 것이다.

2. 연구절차
1) 연구대상의 선정
연구대상은 구당클리닉에서 치료받은 암 환자들의 침뜸치료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구당침뜸클리닉에서 치료받은 암 환자들 중 100명을 선정하였다.

2)연구기간의 설정
연구기간은 2013년 1월 21일 부터 2014년 1월 21일까지 1년으로 하였다.

3)연구자료 및 연구방법
연구를 위한 자료로는 환자들이 처음 내원하여 작성한 침뜸진료기록부를 1차 자료로 사용하였고, 환자들과의 면담과 전화 상담을 통해 작성한 설문지를 2차 자료로 사용하였다.
ㄱ. 100명의 암 환자에 대한 설문조사
구당침뜸클리닉에서 치료받은 100명의 암 환자들과 면담하면서 작성한 침뜸진료기록부를 토대로 한 설문지에 따라, 치료 후 직접 상담과 전화 상담을 통해 침뜸치료의 효과에 대한 내용을 조사하였다.
ㄴ. 100명의 암 환자 중 선별된 5명에 대한 임상사례분석
100명의 암 환자 중 5명의 환자를 암의 종류, 성별, 나이, 직업, 침뜸에 대한 이해도 및 침뜸치료 효과등 다양한 기준에 의해 선별하여 임상사례를 분석하였다.

3. 내원한 암 환자 중 100명의 암 환자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구당침뜸클리닉에서 1년간(2013년 1월 21~2014년 1월 21일) 내원한 암 환자 100명 중 한 달 이상 뜸을 떠온 환자를 대상으로 한 면담, 전화 통화, 설문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환자의 남녀 및 연령 비율
연령별 암방생률을 보면 남자가 55명, 여자가 45명으로 남자의 비율이 높았다. 일반적으로 노화될수록 암발생률이 높은데, 내원 환자 중에서는 50대에서 70대의 비율이 높았다.

2) 환자의 암의 종류별 분포
암 종류는 모두 24종으로 유방암이 가장 많고 뒤를 이어 폐암, 위암, 췌장음, 간암 순이며 기타로는 방광암, 부신암, 편도선암, 혈액암 등이 있었다.

3) 환자의 주 증상
항암 치료, 방사선 치료를 하는 경우 암세포는 물론 우리 몸의 정상 조직 세포에도 손상을 주게 된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탈모, 백혈구 및 혈소판 등이 감소하며 이 결과 소화장애, 식욕부진, 무기력 등의 증상이 생긴다. 또한 만성 피로, 메스꺼움, 구토, 설사, 통증 등의 부작용을 경험하게 된다. 구당침뜸클리닉에 내원한 암 환자 중에서는 기운이 없고 피곤하다는 환자가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 통증, 불면증, 숨참, 식욕부진, 오심 등 순이었다.

4) 환자가 받은 암치료 방법
설문조사 결과 두 가지 이상의 치료방법을 병행한 환자가 많았다. 구당침뜸클리닉에는 의사들이 수술을 포기할 만큼 진행된 말기 암 환자 19명이 내원했다. 또, 스스로 수술과 항암치료를 거부한 유방암 환자 1명을 제외하고는 80명 모두 수술 치료를 한 후 내원했다. 수술은 대부분 1차에서 3차까지 받았고 항암치료는 1차에서 29차까지, 방사선 치료를 33차까지 한 사람들도 있었다.

5) 환자의 뜸치료 빈도
매일 뜸을 뜨는 환자가 68%이고, 적어도 1주일에 3~4회 뜨는 환자까지 합하면 84%가 지속적으로 뜸을 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6)환자의 침뜸치료 후 호전도
호전도 조사에서는 완전히 나았다고 대답한 환자가 30%, 많이 좋아졌다는 환자가 45%, 조금 좋아졌다는 환자가 20%로 뜸을 뜬 후 상태가 호전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95%로 나타났다.

7) 환자의 침뜸치료 후 만족도
만족도 조사에서도 침뜸치료가 매우 도움이 된다는 환자가 47%, 꽤 도움이 된다는 환자가 29% 등으로 뜸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95%였다.


4. 침뜸치료방법
1) 침치료
ㄱ. 시술 방법
침술시술에 사용된 침은 직경 0.20mm, 길이 50mm인 스테인레스-스틸로 제작된 일회용 호침이며, 자침 심도는 혈위에 따라 0.5~1촌 자입하였다.
유침 시간은 15분 정도로 하였고, 침법으로는 직자법을 시행하고 특별한 수기 방법은 사용하지 않았다(가는 침은 자극이 아니라 통(通)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특별한 수기가 필요 없고 유침만으로 충분하다.).
ㄴ. 시술 부위
경락을 조절하고 경기를 잘 소통시켜 누구에게나 도움이 되는 '구당 기본 상용혈'을 기본으로 하고, 장부와 변증별로 경혈자리를 추가하였다.

2) 뜸치료
ㄱ. 시술 방법
뜸은 3년 이상 묵은 쑥을 사용하였고, 뜸봉의 크기는 반미립대로 하였다. 뜸법은 직접구로, 치료할 때 손(왼손 엄지와 검지)으로 직접 만들어서 시술하였다.

ㄴ. 시술 부위
기혈순환과 음양오행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고안된 '무극보양뜸'을 기본으로 하고, 장부와 변증별로 경혈자리를 추가하였다.

• 기본 상용혈: 기본 상용혈은 17경혈 31자리이다.(곤륜, 위중, 신유, 고황, 천종, 천료, 풍지, 천주, 백회, 태충, 양릉천, 합곡, 수삼리, 중완, 지창, 동자료, 인당)
※ 경우에 따라 선택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 무극보양뜸: 무극보양뜸은 남자는 8개 경혈(백회, 폐유, 고황, 곡지, 중완, 족삼리, 기해, 관원) 12자리이고 여자는 8개 경혈(기해, 관원 대신하여 중극, 수도) 13자리이다.


5. 100명의 암 환자 중 선별된 5명에 대한 임상사례 분석

※ 5명에 대한 임상사례 대상자 선정기준: 100명 중 5명의 환자는 암의 종류, 성별, 나이, 작업, 침뜸에 대한 이해도 및 침뜸 치료효과를 고려하여 선정하였다.

1) 간암 사례
• 병명: 간암
• 성명: ㅇㅇㅇ(54세, 남), 기자
• 발병원인: B형 간염으로 인해 간경변과 간암 발병
• 발병일자: 2012년 1월 간암 수술
• 내원일자: 2013년 2월 13일

이 환자는 B형 간염이 원인이 된 54세 남자로 지름 3.5cm 종양 2개 수술 후 다른 항암 치료는 하지 않고 뜸을 뜨면서 강원도 산사에서 요양을 해왔다. 구당침뜸클리닉에 내원한 이유는 정확한 뜸자리를 잡고 싶어서라고 했다. 뜸을 뜨기 전에는 가슴이 뛰고 자다가도 자주 코피가 났다고 한다. 늘 피로하고 몸이 가려웠으며, 의사가 간 이식을 당장 권할 정도로 나쁜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구당침뜸클리닉에서 치료를 받고 난 후 최근 정기검진에서는 간 이식은 필요하지 않으며 AFP(종양표지자) 수차가 정상수치인 0.6으로 떨어졌고, 간경변 상태도 더 이상 악화되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현재는 암 때문에 휴직했던 신문사에 기자로 복귀하여 근무 중이다.

◎ 구당 침뜸처방
• 침 치료 경혈: 기본 상용혈+ 양관, 신유, 간유, 우양문, 거궐
• 뜸 치료 경혈: 무극보양뜸+ 양관, 신유, 간유, 우양문, 거궐
• 침뜸치료 3회, 뜸은 1년간 매일 뜨고 있음.

2) 담낭암 사례
• 병명: 담낭암 4기, 간림프절;복강 벽에 전이
• 성명: ㅇㅇㅇ(52세, 남), 금융 종사자
• 발병일자: 2013년 4월 30일 담낭암 4기 진단 후 수술 불가능한 상태에서 항암치료
• 내원일자: 2013년 6월 10일

이 환자는 52세의 남자로 담낭암 4기 진단 후 외과적 수술이 불가능한 상태였으며, 내원 시 항암치료를 하는 중이었다. 구당침뜸클리닉에서 치료받기 전에는 늘 피로하며 수면 중 자주 깨고 정서불안 등의 증상을 호소했으나, 현재는 정신적으로 많이 안정되고 7차 항암치료 후 부작용도 거의 없이 비슷한 처지의 암 환자들의 부러움을 산다고 한다. 현저한 체력 개선과 더불어 수면상태도 많이 호전되었다고 한다.

◎ 구당 침뜸처방
• 침 치료 경혈: 기본 상용혈+ 신유, 간유, 담유, 우비유, 양문, 우활육문, 거궐
• 뜸 치료 경혈: 무극보양뜸+ 신유, 간유, 담유, 우비유, 양문, 우활육문, 거궐
• 침뜸치료 7회, 뜸은 7개월간 매일 뜨고 있음.

3) 대장암 사례
• 병명: 대장암 4기
• 성명: ㅇㅇㅇ(64세, 여), 주부
• 발병일자: 2009년 암 수술 후 임파선 및 폐로 전이, 그동안 항암치료 16회, 방사선치료 32회 받음
• 내원일자: 2013년 12월 2일

이 환자는 64세 주부로 대장암 판정 후 두 차례 수술을 받았고, 수술 후에는 항암 16차, 방사선 32차 치료를 받은 상태였다. 불면증, 식욕부진, 구토, 전신 권태감, 탈모 등의 증세가 있었고 항암치료 중에도 암세포가 늘었다고 했다. 그러나 뜸을 뜨면서부터 암세포 활동이 줄고 있다는 검진 결과를 받았다고 한다. 이 환자의 특이사항은 청주시 소재 성모꽃마을에서 열린 암 교육캠프에 참여하여 구당 무극보양뜸을 처음 접하고 2년간 꾸준히 뜸을 뜨다가 내원했다는 점이다. 구당침뜸클리닉에서 치료받은 후 현재는 탈모가 치료됨은 물론, 흰머리가 빠지고 검은 머리가 나는 등 건강 상태가 매우 호전되어 활력 있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 구당 침뜸처방
• 침 치료 경혈: 기본 상용혈+ 신유, 양관, 흉추4,5,6(아시혈), 대추, 천추, 거궐
• 뜸 치료 경혈: 무극보양뜸+ 신유, 양관, 흉추4,5,6(아시혈), 대추, 천추, 거궐


4) 유방암 사례
• 병명: 유방암 말기, 뼈•간으로 전이
• 성명: ㅇㅇㅇ(49세, 여), 교수
• 발병일자: 1999년 암 진단 15년 째 투병, 수술 후 항암치료 5회, 방사선치료 1회
• 내원일자: 2013년 6월 3일

이 환자는 49세 여성으로 15년 전 유방암 발병 후 빈혈과 부종이 심했고 기운이 없으며 늘 피로한 상태였다. 혈색소 수치가 매우 낮아 항암치료 시 수혈을 하면서 치룔를 받았다고 한다.
구당침뜸클리닉 내원 시에는 백혈구, 적혈구, 혈색소, 헤마토크리트, 혈소판 등 수치가 정싱치에 훨씬 못 미쳤으나, 침뜸 치료 후 꾸준히 뜸을 뜬 결과 3개월 후 검사수치가 정상치료로 나왔다. 이 환자는 설문조사에서 본인이 완전히 나았고 뜸 치료가 매우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

◎ 구당 침뜸처방
• 침 치료 경혈: 기본 사용혈+ 양관, 신유, 삼초유, 간유, 격유, 음릉천, 혈해, 대거, 음교, 거궐, 좌양문, 아시혈
• 뜸 치료 경혈: 무극보양뜸+ 양관, 신유, 삼초유, 간유, 격유, 음교, 좌양문, 거궐
• 침뜸치료 2회, 뜸은 7개월 매일 뜨고 있음.


5) 폐암 사례
• 병명: 폐암 4기
• 성명: ㅇㅇㅇ(71세, 여), 주부
• 발병일자: 2009년 암 4기 진단
• 내원일자: 2013년 4월 내원

이 환자는 상태가 심각해서 수술도 받지 못하고 항암치료나 방사선치료조차 하지 못한 71세의 여성으로, 잦은 기침, 숨 참, 수면장애, 식욕부진, 소화불량, 우울감 등의 증세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구당침뜸클리닉에 내원하여 치료받고 꾸준히 뜸을 뜬 지 3개월 후부터는 계단을 오르내닐 수가 있게 되었고, 기침도 없어져 잠도 잘 잔다고 한다. 또한 감기회복도 빨라졌으며, 요즘은 산에 갈 수 있을 정도로 몸 상태가 좋아졌다고 한다.

◎ 구당 침뜸처방
• 침 치료 경혈: 기본 상용혈+ 신유, 양관, 심유, 지양, 영대, 신도, 좌양문, 우활육문, 거궐
• 뜸 치료 경혈: 무극보양뜸+ 신유, 양간, 심유, 지양, 영대, 신도, 좌양문, 우활육문, 거궐
• 침뜸치료 14회, 뜸은 9개월간 매일 뜨고 있음.


제3절 결론

100명의 암 환자들을 설문한 결과와 5명의 암 환자들을 분석한 임상사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당침뜸클리닉의 침뜸치료는 암 치료에 도움이 되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 중심에 선 구당 선생은 침뜸치료와 현대의학적 치료를 병행하면 암도 완치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암은 두려워하고 싸울 대상이 아니다. 자신이 스스로의 몸을 잘 알고 자기 몸의 주인이 되어 현명하게 치료법을 선택한다면 암으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 핵심에 경제적이면서도 효과가 좋은 뜸이 있다. 개인이 뜸을 뜨면서 가족과 이웃에게 전한다면 자연스럽게 사회로 확산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뜸시술의 자율화'가 현실화될 것이고, 모든 국민의 의료 주권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구당 무극보양뜸'은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우리의 정통의학으로, 인간존엄을 지키는 자연의학을 보존하는 방법이다.
우리에게는 문제를 인식했을 때 방향을 선회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암을 치료하는 기존 방법들의 한계를 인식하고, 침뜸치료를 암 치료법으로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본 연구가 그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돕는 객관적인 자료로 남기를 바란다. 그리고 암 치료에 있어서 침뜸치료의 효과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이루어져 언젠가는 침뜸만으로도 암 치료를 할 수 있다는 결과가 검증되기를 희망한다.


제4절 후기

오늘도 할머니 한 분이 젊은 아들을 데리고 피맺힌 통곡을 하다가 부산으로 내려갔다. 아들이 골수암 환자인데 침뜸치료 후 호전되다가 500만원이 넘는 비싼 약을 먹고 다시 나빠졌다며 찾아온 것이다. 뜸을 뜰 때는 수치가 내려가고 몸 상태가 좋아졌는데, 뜸을 뜨지 않고 약을 먹었더니 수치가 깜짝 놀랄 정도로 올랐다고 했다. 뜸자리를 다시 잡아 달라고 애원하는 보호자와 환자를 이미 가득 찬 예약 때문에 돌려보내는 데 한참이 걸렸고,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우리는 한숨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밖에도 우리의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여건 상 많은 환자들을 하는 수 없이 돌려보냈던 경우가 많았다. 직접 찾아왔지만 인터넷 예약자만 받는다는 원칙적인 설명을 듣고 헛걸음하고 되돌아가신 분들, 또 전화로 예약을 부탁하며 사정하셨던 많은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밖에 전할 수 없었던 것이 1년간 구당 선생님 곁에서 치른 가장 가혹한 고통이었다.
구당 선생님의 제자라도 소개시켜 달라는 분, 하루 종일 떼 아닌 떼를 쓰다가 뜸사랑 봉사실 주소와 전화번호를 받아 들고 겨우 돌아가는 딱한 환자들을 보는 것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근무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한편, 진료예약에 성공하여 복권 당첨된 것보다 기쁘다며 구당침뜸클리닉을 찾는 환자와 보호자들 얼굴에는 희망의 빛이 돈다. 예약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가족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동원하여 힘겹게 찾아오는 환자들을 보며서, 또한 침뜸을 하고 나서 많이 호전되었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이 애타게 찾는 침뜸의 효과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싶었다.

1년에 걸친 진료기록을 정리하면서, 침뜸치료를 받고 건강이 몰라보게 호전되었다며 고마워하던 환자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휠체어를 타고 내원한 60대 여자분은 단 한 번 침뜸치료를 받고는 두 발로 걸어 나가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극심한 불안 장애로 자살 충동까지 느낀다는 아내를 데려온 40대 남편은 3개월 후에 찾아와 침뜸치료 후 '아내가 사람이 되었다'는 말과 함게 본인도 만성 소화 장애와 수족냉증을 치료받고 웃음 가득한 얼굴로 돌아가기도 했다. 또 아버지가 허리 통증 때문에 구당 선생님께 치료받고 꾸준히 뜸을 떠서 완치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최근 암 진단을 받은 어머니도 모시고 온 딸도 있었다.

침뜸치료를 받은 후 기뻐하는 사람들 외에도 본인 스스로 침뜸을 배우고 싶다며 견학을 신청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세계중의약학회연합회(WFCMS)의 리전지 주석, 중의대 교수들, 중의사들, 일본 침구사들의 견학은 물론, 미국에서 침뜸 병원을 하는 병원장들, 국내 개원의들까지도 견학을 하면서 침뜸을 배워갔다. 온두라스에서도 30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와서 배워 갔으며, 미국, 스페인 등지에서 무작정 배우고 싶다며 찾아온 교포들도 있었다. 이렇게 서울역 대합실 4층에 있는 구당침뜸클리닉은 세계와 소통하고 있는 장이 되고 있다.

내가 신비한게 아니다. 침뜸이 신비하다. 침뜸이 신비한게 하니다. 인체가 신비하다.
ㅡ 구당 김남수
무극보양뜸

제3편 임상사례

암(癌) 환자 100명에 대한 '구당침뜸' 치료법

제1절 서론
암은 지속적인 관리를 필요로 하는 만성질환으로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경제적 측면에서 개인은 물론 국가적 차원에서 부담을 주는 질환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도 걸릴 수 있다는 암. 이와 같은 종류의 조직변형은 약 500만년 전부터 존재했다고 추측된다.

급속한 현대의학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암은 1983년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사망원인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발생빈도 또한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일반적으로 초기 암은 수술적 절제를 통해 완치를 기대하고, 진행 암은 서양의학적 표준치료로 알려져 있는 항암화학요법을 근간으로 한 치료를 하고 있다. 최근에는 기존의 세포독성 항암요법에 표적치료제 병행요법이 더해져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표준치료의 확장으로 인해 암 치료 비용은 더욱 증가하여 선진국들조차 부담하기 어려운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다. 암 치료에 관련된 경제적 비용은 2010년 기준으로 우리 돈 1,260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한편 표준치료의 한계로 인한 진행 암의 재발과 치료부작용을 극복하기 위하여 많은 암 환자들이 서양의학적 표준치료 이외의 치료법을 찾아 환자 자신에게 적용하고 있다. 표준치료 이외의 암 치료법에는 식이와 영양요법, 정신신체기법, 약물 및 생리적 치료, 면역강화요법, 자연약초의학 등이 있다. 이러한 다양한 방법의 치료에 대한 암 환자들의 만족도는 높은 편이며, 이번 임상사례 연구의 치료법인 '침뜸치료'도 그 중 하나이다.

현재 많은 암 환자들이 여러 가지 불리한 제도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침뜸을 통한 암 치료를 원하고 있다. 침뜸치료는 즉각적으로 환자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등 약에 비해 치료효과가 빠르고 우수하며, 때로는 수십 년 동안 앓아 온 고질병을 완치시키기도 한다. 뜸사랑이 맥을 잇고 있는 정통침뜸의학은 치료효과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경제적이기 때문에 현대의학의 최신 의료기기가 넘쳐나는 오늘날에도, 열악한 사회제도적 상황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환자치료의 역활을 담당하고 있다.

미국의 존슨 홉킨슨 의과대학은 암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과 치료법에서 서양의학적 표준치료인 화학적 요법과 방사선요법의 한계점을 지적하고, 암 환자의 영양 섭취와 면역체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영양섭취와 면역력을 강화하는 근본치료를 우선으로 하고 있는 서울역 대합실 4층 구당침뜸클리닉에 수많은 암 환자들이 몰리는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음은 최근 미국의 유명한 존슨 홉킨슨 의과대학이 암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과 치료법에 대하여 발표한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ㅇ 면역체계가 충분히 강할 때 암세포는 파괴되며, 증식되거나 종양을 형성하는 것이 억제된다.
ㅇ 암에 걸리면 복합적인 영양결핍을 보인다. 이것은 유전적, 환경적, 식생활 그리고 생활습관상의 요인들에 의한 것이다.
ㅇ 항암주사요법은 급속히 성장하는 암세포를 독살하는 것이다. 그러나 골수, 위장 내관 등에서 성장하는 건강한 세포 역시 파괴한다. 뿐만 아니라 콩팥, 심장, 폐 등과 같은 기관까지도 손상을 야기한다.
ㅇ 방사선치료요법은 암세포를 파괴하는 동안 건강한 세포, 조직, 기관 역시 태우고 흉터를 내고 손상을 입힌다.
ㅇ 화학적 요법과 방사선요법의 주요 처치는 종종 종양의 크기를 줄이기는 하지만 오랜 치료에도 더 이상 악성종양의 파괴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ㅇ 인체가 독한 화학적 요법과 방사선요법으로 부터 많은 부담을 가지게 되면 면역체계는 굴복하거나 파괴되고 만다. 또한 다양한 감염과 합병증에 의해 쓰러질 수 있다.
ㅇ 화학적 요법과 방사선요법은 암세포를 돌연변이시킬 수 있으며, 암세포의 저항력을 키워 파괴되기 어렵게 만든다. 수술 역시 암세포를 다른 곳으로 전이 시킬 수 있다.

인터넷 예약을 통해 구당침뜸클리닉을 찾는 환자 중 1/3 정도가 암 환자들이다. 구당침뜸클리닉에서는 환자들에게 기본 상용혈, 무극보양뜸, 그리고 장부와 병증별로 추가 경혈자리를 잡아 침뜸으로 치료하고, 집에서도 환자나 보호자들이 뜸을 뜰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 단 3초 만에 끝나버리는 인터넷 예약에 성공하여 재진을 온 환자와 보호자들은 침뜸의 효과에 대해 놀라움을 전해주었고,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암에 대한 침뜸치료의 효과를 기록으로 남겨 널리 알려야겠다는 책임감을 갖게 되었다.
침뜸치료가 암 환자에게 구체적으로 어떠한 도움을 주는지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지만, 그동안 구당 김남수 선생을 제외하고는 침뜸치료를 할 수 없는 불합리한 제도로 인해 진행되지 못했다. 따라서 구당침뜸클리닉에서 침뜸치료를 받은 암 환자들 중 100명을 추적 조사하여 침뜸치료가 암 환자에게 어떤 작용을 하는지에 대한 기초자료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 조사를 근거로 정부와 의료계가 침뜸의 우수한 치료효과에 주목하여, 온 국민을 위한 '뜸 시술 자율화'의 기반을 다지는 기회로 삼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제2절 본론
1. 암의 정의
2. 연구절차
3. 내원한 암 환자 중 100명의 암 환자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4. 침뜸치료방법
5. 100명의 암 환자 중 선별된 5명에 대한 임상사례 분석

제3절 결론

제4절 후기
구당 김남수, 침뜸과의 대화

제3장 구당 침뜸의학의 치유능력

1. 구당 침뜸의학과 암

○ 여기 흥미로운 두 권의 책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들병원 사이버나이프클리닉 최일봉 원장이 쓴 "암환자는 암으로 죽지 않는다 굶어 죽는다"고 다른 하나는 나가사키 의대의 이시하라 유미 박사가 쓴 "암을 혈액으로 치료한다"는 책입니다. 두 권 모두 기존 제도권 의학이 주목하지 않던 정보를 의료 소비자를 위한 입장에서 꺼내 놓았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합니다. 놀랍게도 구당 선생님의 치료 방법론과 정확히 일치 하고 있습니다. 굶어 죽는 암 환자를 위해서 '암 환자는 먹여서 살리자'고 말씀하셨고, 암은 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피의 문제니까 '뜸을 떠서 피를 만들어서 살리자'고 강조하지 않으셨습니까?

먼저 최일봉 원장의 책은 기존의 연구 조사 결과를 토대로 암 환자들이 잘 먹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토나 메스꺼움을 느끼지 않고 음식물을 잘 섭취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지는 못 하지만 그건 뜸으로 잘 해결할 수 있는 문제지요. 다른 책, 그러니까 '피의 문제 때문에 암이 나타나므로 피를 맑게, 많이 만들어야 암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혈액 내과를 전공한 유미 박사의 주장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자칫 혈액 만능주의가 아니냐는 지적도 가능한데요?

• 그렇지. 물론 혈액이 정말 중요하지. 하지만 혈액만 가지고 말해서는 치료가 될 수가 없어. 혈액으로 인해 생긴 병이 있지만 기(氣)가 닿지 않아 생긴 병도 있거든. 두 가지가 있는 거야. 음양도 두 가지 이치이기 때문에.

○ 그럼에도 뜸의 기능을 특히 중시하는 구당 침뜸의학의 관점에서 볼 때 기의 문제만큼 피의 문제가 암의 발생과 치료에 중요하다고 보시지 않습니까?

• 요즘에는 과학자들이 우리 몸이 세포 덩어리라고 말하거든. 60조 개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더 많다는 설도 있어. 100조 개까지 말을 해. 하루에 없어지는 것만 해도 수백, 수천억 개가 되고, 다시 만들어지는 것도 그만큼이라고들 하지. 만들어지면 없어지고 다시 만들고, 그런 것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때 음양에 따른 이치대로 몸이 돌아가는 것이지. 그런데 이 세포를 만들어 주는 원료가 뭐지?

바로 '피'야. 세포 제조 원료인 피의 원료는 두 구멍으로 들어가. 하나는 입으로 들어가고 또 하나는 코로 들어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물체(物體)이고 코로 들어가는 것은 기(氣)란 말이지. 그 두 가지가 위(胃)로 들어가서 위에서 소화의 결과 여러 가지 소화액 같은 것과 합해져서 다시 피를 만드는 것이야.

그래서 나는 오장육부가 바로 제약 공장이라고 말해. 제약 공장은 세포 덩어리다. 세포를 만드는게 바로 피다. 피를 만드는 것은 먹고 숨쉬는 작용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렇게 봐야지.

자, 그렇다면 피가 좋아야지 암이 예방되고 치료될 수 있는 것이야. 암이 뭐지? 세포 덩어리에 균이 침범 한다든가 해서 곪는 건데, 곪았을 때는 암이라고 하지 않고, 그게 곪지 않고 덩어리가 되거나 안 곪고 커지는 것을 암이라고 하지. 그렇기 때문에 암을 곪지 않는 종기(腫氣)라고 말해.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심지어 6.25 전쟁 이전만 해도 상처가 곪는 사람이 많이 있었어.

그땐 암이 별로 없었거든. 예전에는 환자를 치료하다가 보면 정말 고름을 많이 짜내야만 했어. 옛날 사람들은 남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 내뱉거 했지. 옛날 할머니들이 손자 녀석들 고름을 빨고 그랬다니까. 그런데 그렇게 고름을 짜내면 상처가 그냥 나았어.

○ 서양이나 동양이나 암 치료에 대해 어렵게 생각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중요한 건 암의 발생 원인을 아직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추천만 내놓고 있을 뿐이지요. '암을 곪지 않은 종기'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암이 왜 생긴다고 보십니까?

• 발생은 나도 잘 모르지. 다쳐서 그 자리에 곪을 수도 있고, 긁혀서 그럴 수도 있고, 균이 들어가서 그럴 수도 있고, 스트레스나 그에 따른 단백질 변형 작용일 수도 있고. 여러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 다만 나는 눈에 보이는 암의 병증을 직시하는 거야. 암은 곪지 않는 종기야. 분명히 종기인데 곪지를 않아. 곪으면 나아버리는데 곪을 것 같으면서도 안 곪는게 암이야. 곪지 않으니까 또 이게 아주 아파. 나중에는 어떤 균인가 했는데 균도 아니야. 세포가 자꾸 죽어 가는데, 죽으면 없어져야 하는데 없어지지 않고 자꾸 커져서 증식되는 거지.

○ '암이 곪지 않은 종기'라는 말씀은 시사하는 바가 참 많습니다. 암에 대한 정의만큼이나 암이 발생 원인에 대해서도 명쾌한 설명을 기대했는데 좀 실망스러운 말씀이네요. 그러면 이렇게 여쭤 볼게요. 어떤 연구를 보면 암이 체내에서 자라 병증으로 발현되기 위해서는 때로 10년 이상의 긴시간이 걸리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암이 긴 시간에 걸쳐 발전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게 하세요?

• 어린아이도 암에 걸리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암이 자라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지. 종기라는 것은 비교적 단기간에도 생길 수가 있어. 보통 '전이(轉移)'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옛날에 '주마담'이라는 말이 있었어. '담'이 생기는 게 말이 달리는 것과 같다는 거지. 곪게 만드는 물질이 혈관을 타고 다니다가 여기저기 종기를 만들어. 그럼 이것저것 옮겨 다니면서 아프지. 정신이 없어. 종기는 처음 생길 때가 제일 아프거든. 건드려도 아주 아프고. 그러다가 갑자기 크게 자라나기도 하지. 그게 종기야. 그런데 그 중에서 곪지 않고 커지는게 바로 암이야. 그런데 중요한 것은 곪게 하면 낫는다는 것이야. 암이니까, 죽지 않아.

○ 사실 암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고 장진영 씨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장진영 씨를 비롯하여 지난 6년 동안 다양한 암 환자들의 치료 과정을 바로 선생님의 어깨 너머로 지켜 보았습니다. 그 결과 침뜸이 통증 억제, 구토방지, 기력 회복, 어지럼증 해소 등의 면에서 아주 탁월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침과 뜸을 함께 시술할때 치료 효과가 극대화되는 것도 관찰할 수가 있었고요. 진통 효과도 대단하지만 종양의 크기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은 장진영 씨를 비롯한 거의 모든 환자들의 경우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괄목 할 만한 치료 효과가 수십년 동안 반복적으로 이루어져 왔는데도 주류 의학계는 여전히 주목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정부도 임상 연구를 지원하기 보다는 오히려 구당 선생님의 손발을 묶어 두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정말 개탄스러운 일이지요.

• 그러게 말이다. 나는 할 일을 다 했으니 더 이상 아쉬움이 없다. 하지만 아무리 진실을 알리려 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 세상이 야속 하기는 하구나. 돈만 아는 세상이 정말 돌아버린 것 같다.

○ 장진영 씨의 경우, 기획사 측의 간청으로 임상 자료를 일반에 공개하기로 하고 치료를 해주기로 약속은 했지만, 막상 환자를 대면 해보니 환자의 상태가 너무나 좋지 않았습니다. 장진영 씨는 이미 복부 전체와 임파선까지 암이 퍼진 상태였고, 복수도 팽팽하게 차 올라와 있었지요. 언론에는 초기라고 나왔지만, 이미 위암 4기였습니다. 굴지의 대학병원들이 3개월의 시한부 선고를 내린 상태였습니다. 저는 정말 당황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흔들림 없이 무려 82일 동안을 매일 시술해 주셨습니다. 대단한 정성이 셨지요. 모든 암환자들을 위한 일이라며 단 한 푼의 치료비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 그게 80일을 넘었나? 그러고 보니 치료를 오랬동안 했구나. 참 정이 많이 들었지. 진영이 만 오면 진료실이 아주 봄날 같았어. 화기애애했지.

○ 불과 두세번의 치료만으로 복부의 종양이 3분의 1 정도로 크기가 크게 줄어들어 배가 푹 꺼지고 또 복수도 금세 빠지는 걸 보고 놀랐습니다. 장진영 씨는 다른 암 환자들을 위해 치료의 전 과정을 기록하는데 적극적으로 협조해줬지요. 82회 걸친 방대한 임상 기록이 작성 됐고, 그 기간 동안 자침은 모두 2,500회 이상, 뜸 시술도 10,000회가 넘게 이뤄졌더군요. 침뜸 시술로 인해 장진영 씨는 항암제로 인한 구토와 어지럼증 등 일체 부작용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런 내용은 MBC 와의 인터뷰에서도 직접 밝힌 적이 있었지요.

암 치료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시술 시작 3개월 만에 장진영 씨는 위장 일부를 제외하고는 몸속에 암세포가 모두 사라지는 극적인 효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침뜸 시술은 계속될 수 없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었을 때지만, 장진영 씨의 침뜸치료 사실을 뒤늦게 안 병원 측이 침뜸 시술을 중단시킨 게 큰 이유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터질게 터진 것이지요. 장진영 씨는 치료 초기부터 침뜸치료 사실을 의사들이 알까봐 늘 노심초사하며 병원 눈치를 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2008년 12월 크리스마스 이후 침뜸 시술을 포기하고 병원 치료에만 의존 하게 됐지요. 장진영 씨와 함께 침뜸 치료를 받던 영화 제작자 정승혜 대표도 나중에 병원에 입원해 침은 물론 뜸마저 뜰수 없게 되자,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뜸을 뜨게 해 달라'고 애원해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 내가 죄인이다. 더 알렸어야 하는데. 병원이 침뜸을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환자들에게 겁을 주니까. 침뜸으로 병이 나았는데 병원에 가면 대번에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평생을 그래 왔거든.

가령 이건희 회장 같은 분도 자기가 침뜸을 해서 효과 있는 걸 알았거든.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 다음에 병원에 가서 의사가 뜸자리를 본 것 같아 의사가 뜸자리를 보고서 하지 말라고 하면 환자 입장에서는 의사 말을 안 들을 수가 없어. 환자 입장이 그렇게 약한 거다. 침뜸을 해서 효과가 없었다면 당연히 의사 말을 들어야 하지만, 분명히 효과가 있었는데도 의사가 말하면 의사 말을 듣게 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의사들이 침뜸을 못 하게 하면 그때부터 딱 결과가 나빠져 버린다는 거야. 늘 그랬다. 의사들은 사실 그때까지 자기들이 치료한 건지 침뜸이 치료한 건지 몰랐던 거지. 환자 상태가 좋아진게 침뜸 때문인 줄 모르고 자기들 치료 때문이라고 잘못 알았던 거지. 환자한테 해가 없었으니 그냥 놔뒀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늘 든다.

○ 술자의 입장에서도 답답하겠지만, 환자 입장에서 보면 참 안타까우시겠어요?

• 안타깝지.

○ 개인적으로도 80년 정도를 침뜸으로만 임상 하셨기 때문에 이 병이 과연 침뜸으로 치료가 된다 안 된다, 혹은 좋아진다 안 좋아진다, 충분히 판단이 가능한 데이터를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 나는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 있게 한다. 그래서 환자들에게도 어쨌든 그렇게 하라고 얘기를 하는 거지. '해가 없으면 꼭 하라'고. 그런데 병원에서 의사가 하지 말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의사 말을 듣는 것 같아. 우리나라에서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어. 그게 내 확실한 생각이야. 그런데 지난 1월에 미국에 가서 알았어.

여기에서 꼭 할 필요가 뭐 있겠느냐. 의사들이 먼저 달려들어서 암 환자를 함께 치료 하자고 하는데 말이야. 미국 환자들한테도 효과가 대번에 나버렸지 않니? 암 환자들의 부작용이 없어지고, 그러니까 치료 효과도 더욱 좋아지는 것을 미국의 의사들이 알아 버렸지. 의료인의 목적은 하나다. 환자 치료. 그럼 목적대로 가야 하는 것 아니겠니? 그래서 나는 미국에서 치료할 것이다.

○ 의료인은 무엇보다 환자 치료하는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미국과 우리나라 의료계는 너무나도 대비가 되는 거 같습니다.

• 서로 그렇게 보완하고 병을 고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텐데, 자꾸 자기주장만 하고, 참. 그걸 못하게 하면 결국 환자를 죽게 하는 것이 아니니?

○ 언론의 잘못도 큽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상당 부분 언론인의 몫인데, 침뜸을 사회적으로 소통시키는 역활을 못한 것이지요.

• 사실 따지고 보면 대화가 부족한 것도 아니야. 얘기를 해보면 의사들중에도 바른 사람들이 제법 있다. 그런데 가만 보면 다른 의사들이 그 사람들도 자기들처럼 만들어버려. 그러니까 그 사람도 할 수 없이 그냥 말을 못하는 것이지. 말을 못하도록 하는 병원이 문제다. 의사는 우주를 상대하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자꾸 큰 병원의 일개 직원이 되어가는 것 같아. 분명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텐데.

안녕하세요.
뜸사랑입니다.

코로나19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 회원님들의 건강과 가정의 평안을 기원드립니다.

뜸사랑에서는 작년 초부터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봉사실 운영 중단이 장기적으로 지속되고 있습니다.

몸이 불편해도 해결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수강생 및 회원님들의 가족, 지인분들께 어떻게 하면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최근 뜸자리 잡기 문의 요청이 많아 김현성 회장님께서 직접 뜸자리를 잡아 드리는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일시 : 6월 1일부터 매주 3일동안(화, 목, 토 오후 2시 ~ 4시)

.장소 : 청량리 본원
.대상 : 정회원 및 수강생의 가족 및 지인

.접수방법 : 전화 예약(10시 ~ 17시) / 02-964-7994

자세한 내용은 홈피 참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루 한 끼의 기적

저자 이태근

책을 펴내며

1부
1일 1식이 치유와 다이어트의 기적을 일궈낸다.

― 1일 1식, 왜 해야 하는가
― 1일 1식이 건강과 행복을 가져다준다
― S 라인 몸매는 1일 1식으로
― 아름다운 피부의 당신을 위하여
― 영양가 있게 잘 먹어서 몸매와 건강이 망가졌다
― 공복 시에 몸 안이 청소되고 세포가 재생된다
― 위기가 닥치면 생명력이 강해지고 건강해진다
― 1일 1식으로 내 몸에 기적이 일어나다
― 영양 과다와 섬유질 부족이 변비와 당뇨를 일으킨다
― 현미, 과일, 채소가 변비와 당뇨를 치유한다
― 골다공증은 과도한 단백질 섭취가 원인이다
― 1일 1식은 세포의 자가융해를 촉진시킨다
― 종양을 없애려면 1일 1식을 하라

2부
1일 1식, 이렇게 하라!

― 먹는 방법과 순서가 극히 중요하다
― 성질이 비슷한 음식끼리 먹으라
― 자연식을 해도 소화가 되지 않으면 독이 된다
― 골고루 먹지 말고 단순하게 먹으라
― 제철음식을 먹고 전체식을 하라
― 섬유질이 풍부한 식품을 먹으라
― 익혀 먹지 말고 뜨거운 음식을 피하라
― 9白 식품을 멀리하라
― 꿀과 감식초가 건강을 가져온다
― 1일 1식, 신 나고 자유롭게 하라
― 요리는 간단히, 음식은 단순하게, 잘 먹고 잘 살라

3부
1일 1식은 사랑이요, 아름다움이다

― 채식은 사랑의 실천이다
― 싱크대에서 주부를 해방시키라
― 1일 1식은 아름다운 자연치유
― 종양을 스스로 사라지게 하라
― 필요 없이 물을 마시면 건강을 해친다.
― S 라인을 망치는 저녁식사
― 저혈당증에서 벗어나라
―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좋다
― 수선화처럼 사랑하라

에필로그


MBC 다큐 「목숨 걸고 편식하다」 기적의 사나이
30년간 온몸으로 체험한 진짜 1일 1식을 말하다!

「1일 1식, 끼니만 줄인다고 될까?」
천하를 잃어도 건강만 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내 병은 내가 만든 것이니 남 탓하지 말고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 신장이식 환자로서 면역억제제를 끊는 기적을 이뤄낸 저자는 모든 해답을 오직 자연 속에서 찾았다.
1일 3식을 하면 체내에서 배출되는 독소보다 발생하는 독소가 더 많아서 면역력과 치유력이 떨어진다. 1일 2식을 하면 발생하는 독소와 배출되는 독소의 양이 같아지므로 현 상태가 유지되지만 호전되진 않는다. 1일 1식을 하면 배출되는 독소가 발생하는 독소보다 더 많아지고, 우리 몸이 스스로 ‘자가융해’라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켜 대사활동을 극대화시킨다.
진짜 1일 1식은 단순히 끼니만 줄이는 것이 아니다. 먹는 방법과 순서, 먹는 때와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이치에 맞지 않게 먹으면 오히려 몸에 부담이 될 뿐 아니라 허기를 참기 힘들고 감정 조절도 어렵다. 그러나 자연식과 제철식, 전체식으로 하루 한 끼를 제대로 즐기면서 내 몸을 진정으로 사랑해줄 때, 치유의 기적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해보려고 맘은 먹었지만…」
ㆍ배가 고프다면? - 습관화된 고정관념을 버리라
ㆍ기운이 없다면? - 생명력이 가득한 과일을 챙겨 먹으라
ㆍ사회생활이 어렵다면? - 피치 못할 때는 흔쾌히 2식을 즐겨도 괜찮다
ㆍ영양이 부족하다면? - 제철 음식을 최대한 날것으로, 통째로 먹으라
ㆍ나도 모르게 짜증이 난다면? - 성질이 다른 음식들을 한 끼에 섞어 먹지 말라

「나는 30세에 말기 신부전증이 되어 혈액투석을 하다가 신장이식까지 하게 되었다. 현대의학에서는 장기이식을 하면 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도록 면역억제제와 스테로이드제를 평생 먹어야 하며, 그래도 15년 이상 살기는 어렵다고 한다. 이것은 아니다! 그렇게 살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건강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다. … 해답은, 해결책은, 진리는, 자연 속에 있었다. 식생활을 채식 위주로 1일 1식 하였더니 고혈압이 정상으로 되돌아오고 혈액의 독소수치인 크레아틴도 1.0 이하로 항상 유지되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복용하던 약을 서서히 줄이다가 5년이 되었을 때 완전히 끊었다. 지금은 약을 끊은 지 28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고 그 누구보다도 건강한 몸이 되었다. 」-본문 중에서


저자 : 이태근
1951년생으로 전주가 고향이며, 한양대 고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화학회사에 오래 근무했다. 지금은 전북 임실에 살면서 농사, 양봉, 한옥건축 등의 일을 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는 ‘녹색마을자연학교’라는 이름으로 단식, 건강법, 자연체험 등을 가르쳐주고 있다. 33년 전 신장이식 수술을 받은 후로 스스로 몸과 마음을 수행해왔다. 30년 전부터는 1일 1식을 시작했고, 28년 전부터 면역억제제를 복용하지 않고 있다. 항상 자연과 일체가 되어 비호飛虎처럼 자유롭고 건강하게 살고자 한다. 저서로는 《밥상혁명》《당신을 살리는 기적의 자연치유》가 있고, MBC 다큐멘터리 「목숨 걸고 편식하다」를 비롯하여 TV 프로그램에 다수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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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관절주위염(책 '무극보양뜸')


• 혈자리
견우 견료 거골 천종 곡지 합곡 외관 양지 관원 폐유 격유 비유 신유 무극보양뜸

• 동일질환
견비통
유착성관절낭염
석회침착성건염

1) 치료

• 응급치료
통증이 심할 경우 극통처(가장 아픈 곳)를 꼼꼼히 찾아내 다장구(15장 이상)하여 통증을 완화시킨다.

• 기본치료
견우 견료 거골 천종을 주혈로 하고 곡지 합곡 외관 양지에 반미립대 뜸을 매일 5~7장씩 떠 준다.

• 선택치료
날씨가 차고 습할 때 더 아프면... 관원 폐유
밤이면 더 찌르듯 아프면... 격유 비유
저리고 아픈데 피로하면 더할 경우... 신유 관원

2) 증상
어께가 뻐근하고 불편하여 팔을 위로 올리거나 뒤로 젖히기 힘들며, 옷을 입거나 벗을 때마다 팔이 아픈 것이 이 병의 특징이다. 이러한 환자의 태반은 처음 약을 복용하거나 병원에서 주사도 맞고 또 다른 곳에서 전기 치료와 습포 등의 물리치료도 받는 등 여러 방법으로 치료해 보지만 쉽사리 낫지 않는 것이 이 병의 특징이다.
어떤 사람들은 견비통은 한 번 년쯤 있으면 가만히 있어도 자연 완쾌된다고 하지만 관절이 굳저져 고착되어, 조그만 움직여도 몹시 아프고 밤에 잘 때 가만히 있어도 아파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그 고통은 일상생활에 큰 지장을 주는 등 하루도 참고 있을 수 없는 중증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절로 낫는다면야 오죽 좋겠는가?

3) 원인
어께 관절은 상완골, 견갑골, 쇄골 등 흉곽 사이의 복잡한 구조와 어께 주위의 근육, 인대, 점액포, 관절포 등으로 고정되어 있다. 이들의 조직이 극상근건의 단열, 상완이두근중두건초염, 점액포염 등의 원인으로 골격근 조직이 변성되었거나, 또는 혈중 요산의 석회 성분이 누적 침착되어 이들 조직이 변성, 굳어져 버린 것이 견관절주위염 즉 견비통이다.

4) 정의
어깨 관절 조직에 생긴 염증으로 어깨 골격근이 굳어 버려 통증과 운동장애를 일으키는 질환을 견관절주위염이라고 한다. 견비통이라 부르는 이 질환은 팔을 들어올리거나 뒤로 젖히는 등의 팔운동을 할 수 없을 뿐더러 움직이면 심한 통증을 유발한다.

• 참고
일반적으로 신장이 허약한 사람의 경우 요산 배설이 미비하여 발병률이 높다. 이는 혈중 요산이 배설이 미비하여 혈중의 요산결정이 어깨관절에 침착되어 석회침착성건염이 되기 때문이다. 평소 무극보양뜸 뜨기를 꾸준히 하여 신장 기능을 강화한다면 그만큼 견비통에 걸릴 확률을 낮춘다 하겠다.
손가락이 저리고 아픈 것은 경추 이상으로 생긴 통증이므로 견비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질환이다.

근골격계질환이란 어깨, 목, 허리 등 운동량이 많은 관절 주위에 생기는 통증증후군을 말한다. 즉 목, 어깨, 허리, 팔다리 등에 포진해 있는 골격근이 단순 반복 작업에 따라 약화 내지는 손상되어 해당 부위에 통증을 일으키는 질환을 근골격계 질환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용접, 조립, 운송, 농장, 사무 설계직, 컴퓨터 작업 등 단순반복 작업으로 골격근에 외상 또는 피로가 누적되어 생기는 일종의 직업병이기도 하다.


견우
견봉단 전하방 함중
피부병의 명혈, 눈, 견비통, 습진
수양명대장경, 15

견료
경봉단 후하방 함중
수소양삼초, 14

거골
쇄골의 견봉과 연결된 곳의 끝과 견갑극 사이 함중
수양명대장경, 16

천종
견갑골 하 모서리 수직선과 흉4극돌기하 교차점
수태양소장경, 11

곡지
팔꿈치 가로금 선과 전완외측 가장 볼록한 부분이 만나는 부분
반신불수, 피부, 소화기 치료
수양명대장경, 11

합곡
2중수골 중점 함중
목, 머리, 안면 통증, 얼굴 제반의 문제, 임산부 금침

외관
완관절 중앙 양지 상2촌 요골과 척골 사이
중풍근육마비: 외관 곡지 견우
수소양삼초경, 5

양지
완관절 중앙 요골과 척골 사이
비뇨생식, 여성요통(자궁후굴), 만성질환
수소양삼초경, 4

관원
곡골상 2촌, 신궐하 3촌
비뇨생식
임맥, 4

폐유
흉3극하 외 1.5촌
폐질환, 소화불량
족태양방광경, 13

격유
흉7극하 외 1.5촌
딸국질, 소화불량
족태양방광경, 17

비유
흉11극하 외 1.5촌
당뇨(비유 간유 지기), 부종
족태양방광경, 20

신유
요2극하 외 1.5촌
요통, 비뇨생식, 50대 이후 뜸 필수
족태양방광경, 23

무극보양뜸
신유 고황 폐유 곡지 백회
중완 관원 기해(여성은 중극 수도) 족삼리


"말기 환자도 단번에 완치"…'꿈의 항암제' 국내 들어온다


한국경제 오상헌
입력2021.03.05

• 식약처, 노바티스 '킴리아' 허가
• 환자 몸에 있는 면역세포 활용
유도탄처럼 암세포만 찾아 공격
• 치료비 5억원 수준이지만
건보적용 땐 수백만원 될 듯


환자 몸에 있는 T세포(면역세포)를 조작해 유도탄처럼 암세포만 찾아 공격하는 ‘꿈의 항암제’가 국내에 들어왔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5일 노바티스가 만든 세계 첫 CAR-T(키메라 항원 수용체 T세포) 치료제 ‘킴리아’(성분명 티사젠렉류셀·사진) 사용을 허가했다. 2017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사용 승인을 받은 지 4년 만에 국내에 상륙한 것이다. 2회 이상 치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없는 성인 미만성 거대 B세포 림프종(DLBCL) 및 25세 이하 B세포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 환자(ALL)를 대상으로 쓸 수 있도록 했다.

킴리아는 기존 항암제와는 작용 기전이 완전히 다른 치료제다. 암을 없애기 위해 바깥에 있는 물질을 갖다 쓰는 기존 항암제와 달리 킴리아는 자기 몸속에 있는 T세포를 활용한다. T세포가 암을 제거하기에 충분한 힘을 갖고 있다는 데 착안한 것이다.

문제는 ‘영리한’ 암세포가 공격 대상이 아닌 것으로 착각하게끔 ‘멍청한’ T세포를 속인다는 데 있다. T세포가 손 놓고 있는 동안 암세포는 온몸에 퍼져나간다.

노바티스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전자조작기법을 활용했다. 환자의 피에서 T세포를 추출한 뒤 공격 대상 암세포의 특정 항원을 인식하도록 유전자 정보를 입힌다. 공격 대상이 입력된 T세포를 대량 배양한 뒤 다시 환자 몸에 주입한다. ‘똑똑해진’ T세포는 유도탄처럼 암세포만 찾아 공격한다.

치료 효과는 획기적이다. 노바티스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와 함께 성인 재발성·불응성 DLBCL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 2상 시험에서 53%가 킴리아 투여 3개월 뒤 약에 반응했다. 39.1%는 암이 완전히 사라졌다. 33%는 2년이 지나도 재발하지 않았다. 치료 대상이 두 차례 이상 항암치료와 조혈모세포 이식에 실패해 기대수명이 3~6개월에 불과한 환자라는 점에서 ‘꿈의 항암제’란 별명이 붙었다. 소아 재발성·불응성 ALL 환자는 암이 완전히 사라진 비율(완전관해 비율)이 82%에 달했다.

킴리아의 또 다른 장점은 ‘원샷 원킬’이다. 기존 DLBCL 치료제는 5~6종의 항암제를 2~3주일 간격으로 6~8회 투여하지만, 킴리아는 단 한 번 주입으로 끝난다. 환자의 몸에서 뽑아낸 T세포를 쓰는 덕분에 상대적으로 부작용도 덜한 편이다.

CAR-T가 전 세계 제약·바이오업계의 ‘핫 아이템’이 된 이유다. 국내외 제약사들은 혈액암뿐 아니라 췌장암 간암 등 고형암에도 CAR-T 기술을 적용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문제는 비용이다. 1인 맞춤형 항암제이기 때문에 치료비(미국 기준)가 5억원에 달한다. 건강보험 비급여라서 환자가 전액 부담해야 한다. 내년께 보험을 적용받게 되면 환자부담액은 수백만원 수준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국내에는 노바티스가 인증한 세포배양 시설이 없어 T세포를 미국으로 옮겨 증식한 뒤 다시 국내로 들여와야 한다.

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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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왕재 서울의대 명예교수가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연건동 '건강과 생명' 사무실에서 UPI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병혁 기자]

이왕재 교수 "집단면역? 백신으로 코로나 예방 자체가 불가능"

UPI뉴스 권라영, 이원영
입력 2021-01-15


• 독감 수준의 사망자…이렇게 호들갑 떨 일 아냐
• 거리두기·집합금지·확진자 숫자 아무 의미 없어
• 지금의 방역 방식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아

빠르면 다음달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된다. 어떤 이들은 오매불망 백신 접종을 기다리고, 어떤 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전성을 의심한다. 정부 당국자나 대다수 언론도 백신 접종·물량·시기에만 관심을 두지, 백신의 효용성과 안전성에 대해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백신을 통한 '집단면역'이 하나의 믿음처럼 퍼져 있다. 백신을 많은 숫자가 맞으면 항체 형성자가 많아지고 이를 통해 감염자가 줄어드는 집단면역을 이룰 수 있다는 논리다.

이렇게 백신에 관한 한 공론의 장은 실종된 상태다. 백신은 빨리 들여와야 하고, 전국민이 맞아야 하고, 정부 방침에 따라야 한다는 분위기가 지배한다. 가히 '묻지마 백신 접종'이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 백신 실용화는 99% 불가능하다, 백신으로 코로나를 예방할 길이 없다, 집단면역은 불가능하다, 백신회사가 말하는 효용을 믿을 수 없다, 확진자 숫자 발표할 필요가 없다는 '위험한 발언'을 소신있게 하는 의사가 있다. 면역학 전문가인 이왕재 서울대 명예교수다. 대한면역학회 회장도 지낸 이 분야 전문가다.

그는 건강정보 잡지 '건강과 생명' 1월호에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과 관련된 불편한 진실'이란 글에서 그런 주장으로 백신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에 경종을 울렸다.

15일 이 교수를 직접 만났다. 그의 '백신 무용론'에 솔깃해 백신에 대한 불신을 퍼뜨리려는 게 아니다. 실종된 공론을 되살려 맞더라도 제대로 알고 맞자는 취지다. 백신 접종이 시작된 미국과 유럽에선 노약자 중심으로 백신을 맞은 뒤 사망하는 일까지 벌어지는 터다.

'불편한 진실'을 말한 대가로 비난이 적지 않을 것 같다고 하자 그는 "학자적 양심은 포기할 수 없다"고 소신을 피력했다.

대담=이원영 정치·사회 에디터


-다음달부터 백신 접종이 시작된다. 백신을 맞으면 코로나19에 걸리지 않나

"이론적으로 예방이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백신이라고 하면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다. 호흡기 바이러스는 백신 가지고 안 된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 바이러스가 혈액을 타고 다니면서 질병을 일으키는 경우는 백신이 100% 유효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상기도(코점막, 인후두 점막)에 감염되는 것인데 백신으로 인한 혈중 항체가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 예방할 길이 없다."

-코로나19는 감기 바이러스의 일종이라고 하는데

"감기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하겠다. 감기는 내과 책에 뭐라고 돼 있냐면 일주일 정도 지속되는 self limiting disease(자기 제한 질병)라고 돼 있다. 상기도에 감염돼서 기껏해야 일주일 정도에 끝이 나는 질환, 이렇게 돼 있다. 그리고 치사율은 없다. 항체는 빨라야 감염 3일 지나야 나온다. 3일 이전엔 항체가 절대 안 나온다. 흔히 면역 그러면 항체를 일반인들이 생각한다. 3일 이전에 어떻게 막느냐, 3일 이전에 막는 면역시스템을 우리는 선천면역이라고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감기 바이러스와 똑같다. 다만 차이가 뭐냐면 상기도 점막에 딱 붙는다. 붙는 능력이 100배 이상 강해졌다는 거다. 아시다시피 아무 세포나 붙는 게 아니다. 감기 바이러스는 상기도 점막에만 붙는다. 붙는 힘이 변종이 된 코로나 바이러스가 100배 이상이라는 거다. 그래서 한여름에도 계속 감염이 되는 거다. 원래는 3~4일로 끝이 나는 병이다. 항체가 만들어질 틈도 없다. 상처가 아무는 데 3~4일 걸려서 일주일이면 끝나는 병이다."

-일반 감기 바이러스보다 증상이 심한가

"일반감기보다 심하지만 독감보다 약하다고 돼 있다. 왜 그러냐면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모든 사람에 있다. 공생하는 바이러스다. 그런데 코로나19는 공생하는 바이러스와 5~10%가 염기서열이 다른 것이다. 박쥐 것이 감염된 것이기 때문이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원래 종간에 서로 왔다갔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 이거는 박쥐 것, 사스는 사향고양이, 메르스는 낙타의 코로나바이러스가 사람에게 감염된 것이다. 종간의 벽이 무너지는 일이 21세기에 생긴 것이다."

-코로나19 항체가 생기기 어려운 이유는 뭔가

"코로나19는 원래 몸에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5~10% 다른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몸엔 생소한 것이다. 생소한 놈이 들어오면 반응이 심하게 일어난다. 없던 놈이지만 실제는 90~95%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다. 항체가 그래서 잘 안 만들어진다. 정은경 청장이 발표했다. 한국인 1440명을 임의로 뽑아 코로나19에 대한 항체를 검사했더니 1명 나왔다고 했다. 항체가 거의 안 생기는 거다. 내가 몸에 가지고 있는 것은 항체를 안 만드는데 코로나19가 90~95%가 똑같기 때문이다.

인플루엔자(독감)는 내 몸에 없어요. 감염되는 거다. 그건 우리 몸의 면역시스템이 항체를 금방 만든다. 인플루엔자는 항체가 잘 생긴다. 그러나 호흡기바이러스의 경우는 공기 중에 있다가 콧속에 붙는데, 인플루엔자 항체는 혈중에 있다. 피를 타고 돌아다니기 때문에 호흡기 점막 상피세포에 혈관이 없기 때문에 접근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예방효과는 0%이다. 그런데 왜 맞느냐, 노인들은 독감의 합병증이 생기면 폐렴이 돼서 죽는다. 폐렴이 된다는 얘기는 상기도에 있던 놈이 혈액을 타고 돌아다닌다는 말이다. 혈액을 타고 돌아다닐 경우에는 항체가 작용한다. 죽지 않게 할 수 있다. 효과가 전혀 없다는 게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사람이 1%도 안 된다는 말이다. 100명 중 1명도 안 되는 사람을 위해서 백신을 맞을 필요가 있냐는 거다."

-그렇다면 코로나19 백신도 그런 효과는 있겠다

"코로나19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로 죽은 사람은 많은 경우 뇌에 있는 혈관이 막히고, 콩팥도 망가지고, 폐도 망가지고, 간도 망가지고 이래서 죽더라는 거다. 만일 코로나19에 항체가 만들어졌다고 하면 그런 건 막을 수 있다. 그런 게 무서워서 백신을 맞겠다면 나름 의미가 있다. 백신의 효과가 전혀 없다는 게 아니다. 예방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염자 99%가 그냥 넘어간다. 1~2%에서 문제가 되는 건데, 그 사람들은 백신을 맞아서 항체가 생겨있다고 하면 혈중으로 들어가서 생기는 문제엔 효과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독감은 거의 100% 항체가 생기지만 코로나19는 우리 몸에 상존하는 코로나바이러스와 90~95%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5~10%를 우리 면역세포가 찾아야한다. 그걸 찾아서 항체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굉장히 어렵다."

▲ 15일 UPI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코로나19 백신의 허구성을 설파하는 이왕재 서울의대 명예교수. [정병혁 기자]

- 백신 그 자체의 위험은 없나

분명한 건 뭐냐면 화이자나 모더나에서 하는 게 mRNA백신이다. mRNA백신을 인류최초로 하는 거다. 굉장히 위험하다. 원래 mRNA가 찔러서 넣어준다고 세포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데 들어가는 기술을 개발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최초의 시도라면 안전성에 대해서 10년 이상 봐야 한다. 과학자로서 정확하게 팩트만 얘기하는 것이다. 안전성 검증이 안 됐다는 건 확실하다. 메이저언론에서는 백신확보에 대한 얘기만 나오지 문제점에 대한 얘기는 없다. 그러면 안 되죠. 메이저언론이 많은 국민들이 보는데 문제점이 있을 수 있는 걸 지적하는 게 언론의 기능인데 이건 지금 뭐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분명한 건 아무튼 mRNA 백신 안전성 검증을 안했다는 것이다."

- 집단면역 형성시킨다는 정부 발표에 대해서는

"집단면역은 만들어지 않는다. 감기가 인류와 역사를 같이 한 질환인데 왜 집단면역이 안 생기나. 절대 안 된다. 집단면역이란 불가능하다. 항체가 잘 생기지도 않는 데다가 항체가 생긴다 하더라도 계속 걸릴 수밖에 없다. 집단면역이라는 건 항체가 바이러스 들어오는 걸 막을 수 있다는 게 전제가 될 때다. 예를 들면 간염은 백신이 완벽하게 듣는다. 그런데 이건 아니다. 항체가 바이러스와 만날 수가 없다. 치료제도 마찬가지다. 주사제나 먹는 걸로는 치료제가 나올 수가 없다. 항체가 감염되는 세포로 가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데, 거기로 안 가니 무슨 재주로 막나. 그러니까 계속 실패하는 거다."

- 백신 맞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감염시키는 걸 막아주나

백신 맞았다고 마스크 벗지 마라, 그 얘기가 나온 것은 화이자 등이 조심스럽게 백신의 취약성을 가리려고 하는 것이다. 말이 되나. 백신을 맞고 항체가 생겼다면 왜 마스크를 써야 하냐. 나는 감염도 안 되고 감염도 못시키는데. 들어오는 바이러스가 항체에 의해서 다 죽었기 때문에. 혈액으로 감염되는 바이러스는 그 말이 맞는 거다. 그런데 백신 기껏 만들어 놓고는 백신 맞았다고 마스크 벗지마라, 이런 소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한 말이 맞다는 것을 그 사람들이 개런티(보증)하고 있는 것이다."

예일대 하비 리쉬 박사도 최근 미국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 코로나19백신이 자신을 예방하는 효과는 있을지라도 남에게 감염시키는 것을 막아주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 코로나19를 감기·독감수준으로 생각해도 된다면 사망이 많은 이유는

"죽어나간다고 보도해서 그런 것이다. 우리나라가 매년 독감으로 1000명 가까이 죽는다. 그거 죽을 때마다 보도해봐라. 온 국민이 공포에 떤다. 우리가 13개월 동안 1200여 명 죽었다. 독감은 5월부터 10월까지 없고, 11월부터 그 다음해 3~4월까지 5~6개월 동안 1500명이 죽은 적도 있다. 그런데 지금 이거는 14개월 동안에 1100명이 죽은 거다. 호들갑을 떨 일이 아니다."

- 교수님이 정책결정자라면 어떻게 하고 싶으신지

"사실 (거리두기를) 푸나 안 푸나 크게 차이 안 난다. 대신 퍼지는 것이 걱정이라면 마스크 쓰는 것만 철저하게 하면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 대신 병원, 요양원 이런 데는 훨씬 강화해야 한다. 실제로 거기 근무하시는 분들은 지금보다 10배 강화해서 진짜로 의심되는 사람은 한 명도 못 들어가게 해야 한다. 노약자, 기저질환자 보호를 철저하게 해서 죽는 사람이 안 나오면 되는 거다. 집합금지는 아무 의미가 없다. 감염이 덜 될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얻는 게 없다. 죽는 사람은 어차피 기저질환자들이다. 70%가 감염되더라도 요양원이나 병원 관리를 완벽하게 해서 노약자, 기저질환자들에게 균이 갈 수 없게끔 차단하면 한 명도 안 죽는다."

- 가족과 같이 사는 취약자는 어떻게 보호해야 하나

"그게 사실은 가장 구멍이다. 요양원에 가실 정도는 아닌 노인들이 있다. 젊은 애들은 무증상감염자가 너무 많다. 할아버지 감염시키면 어떻게 하느냐는 게 문제다. 그런 부분은 머리를 맞대고 찾아내면 되는 것이다. 코로나시대 이후에 생길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변화라고 생각하시면 된다. 60대 이하의 부부하고 자녀들 정도면 문제없이 사시면 되는데, 80이 넘은 부모님을 모시고 산다든지 그럴 경우에는 주의해야 한다."

- 유럽은 백신 거부율이 굉장히 높더라

"백신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화이자나 모더나가 예방률 95%라고 한 것은 전혀 믿을 수가 없다. 흔히 하는 RT-PCR로 하면 진짜백신 접종자는 모두 양성이 나오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써야 하는데 그들은 그것을 발표하지 않습니다. 방법이 없으니, 증상완화를 기준으로 했다는 궁색한 설명을 들었는데 납득하기 어렵다."

지난해 12월 27일 프랑스에서 백신 접종이 시작됐으나 1월 7일까지 접종률은 0.03%에 불과하다. 접종 거부율은 60%에 달한다. 당국 최고 책임자인 백신접종전략위원회 알랭 피셰 위원장은 백신 접종에 앞서 백신에 대한 과학적 자료를 볼 수 없으며, 효능이 2~3개월에 그치고, 기저질환자에 얼마나 효과적인지 알려진 바가 없으며, 접종자가 남한테 옮기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지금 당국이 확진자 숫자 발표하는 게 의미가 있나

"아무 의미가 없다. 주말엔 검사가 적어서 확진자가 적게 나온다. 많이 검사하면 많이 나오고, 적게 하면 적게 나오는데 그런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나. 감기환자 몇 명이라고 발표하나. 정부가 국민들 공연히 겁주는 행위다. 아예 발표할 필요가 없다. 차라리 검사숫자 대비 확진자를 비교해 확진율을 비교하는 건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발표하는 확진자 숫자가 0이 되어야 이 사태가 끝날 판인데 그날이 오겠나

"절대 안 온다. 0이 될 수가 없다. 인간 공생 바이러스다. 변종이 끊임없이 생긴다. 공생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0이 될 수 있나. 어제 뉴스에도 나오더라 백신을 만든 모더나 CEO가 코로나19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풍토병이 될 것이고 인류를 이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야 할 것이라고. 그렇게 인정하면서 백신은 왜 만들고 맞으라고 하나. 앞뒤가 안 맞는 말이다. 이 사람들이 도망갈 구석을 만들어 놓는 거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계속 변종이 나올 수밖에 없으니 백신은 무용지물이란 말이다."

- 백신접종을 앞두고 있는데, 전문가로서 가족이나 친구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은 메시지는

"변종이 나오면 백신은 백약이 무효라는 말이 또 나오게 돼 있다. 변종이 나오면 순식간에 다 퍼진다. 변종 출현은 불 보듯 뻔한 얘기다. 변종이 생기면 어떡하냐, 지금 그 백신 다 쓰레기가 될 것이다. 백신에 의지하지 말아라. 죽는 것 때문에 우리가 무서워하는 건데, 면역기능이 어떠한 이유로 낮아진 경우에 불행하게 혈액을 타고 바이러스가 돌아다니는 불행한 일이 생겨서 그 중에 일부가 죽는 일이 생기는 거니까 자기의 면역기능을 지키는 게 제일 확실한 거다. 면역기능만 좋으면 변종도 상관없다. 변종일수록 더 활발하게 작용한다. 백신은 변종이 나오는 순간 무력해지만 우리 몸의 면역기능은 변종에 대해서 면역반응을 더 확실하게 한다. 자기면역기능을 키우는 게 최고다. 그거의 대표적인 것이 비타민C를 먹는 것이다. 감염 자체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마스크는 어떤가

"마스크는 코로나19에 걸리기 싫다 하면 쓰는 것이다. 마스크 쓰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마스크를 안 써도 된다는 것은 비과학적이다. 마스크는 써야 한다. 유럽에 더 많이 감염되는 이유는 마스크를 안 쓰기 때문이다. 그것은 확실하다. 거리두기를 할 때는 경제적인 효과를 고려해야 한다. 거리두기 하면 덜 감염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렇게 되니까 교회 못 가고, 당구장 막고, 커피집 막고. 안 막아도 되는 감염을 막겠다며 오히려 경제적으로 다 죽는쪽으로 가면 안 된다는 거다. 마스크 쓰고, 자기면역 지키고,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

- 마스크는 언제 벗나.

"마스크는 저절로 벗게 돼 있다. 코로나가 그렇게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 감기,독감 수준이라는 것을 깨우치면 자연스럽게 벗게 될 거다. 의료계로서는 아주 우울한 얘긴데, 마스크 쓰면서부터 개원가가 많이 황폐화됐다. 결핵도 훨씬 많이 줄어들고, 독감도 없다고 한다. 환자가 줄었단 얘기다. 현재 상황에서는 마스크를 쓰는 것을 추천한다."

UPI뉴스 / 정리=권라영 기자 ryk@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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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오후 향년 105세로 별세한 김남수 옹. 생전 진료 모습./조선일보 DB

'침과 뜸 대중화'에 한평생 바친 구당 김남수옹 별세, 향년 105세

조홍복 기자
입력 2020. 12. 28

고향 장성 자택서 27일 타계
유족 "지병 없이 평화롭게 생 마감"

평생 침·뜸 대중화에 매진했던 ‘침구(鍼灸)계의 큰 별’ 구당(灸堂) 김남수(金南洙) 옹이 향년 105세로 별세했다.

28일 전남 장성군과 유족에 따르면, 구당은 지난 27일 오후 4시 50분쯤 장성군 서삼면 금계마을 자택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 금계마을 뒷산에 조상의 무덤이 있다. 구당은 2015년 10월 고향 장성에서 무극보양뜸센터를 열고 침과 뜸을 놓는 무료 의료 활동을 이어왔다. 선영(先塋)이 있는 금계마을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큰딸과 지냈다.

2018년 4월, 다소 몸이 쇠약해지자 침과 뜸 기구를 내려놨다. 당시 103세였다. 28세 때부터 지속한 침구사(鍼灸師)로서의 의료행위가 75년 만에 공식적으로 중단된 것이다. 제자들과 교류는 멈추지 않았다.

임종을 지킨 장녀 김관순(71)씨는 본지 통화에서 “아버지는 2년 전 정신이 또렷하고 몸도 건강했지만 고령이라 일을 중단했다”며 “지병으로 고생하는 일 없이 평화롭게 생을 마감했다”고 말했다. 빈소는 장성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고, 발인은 29일.

1915년 5월 전남 광산군 하남면(지금의 장성군)에서 태어난 김남수 옹의 아호 구당은 말 그대로 ‘뜸(灸)을 뜨는 집(堂)’이라는 뜻이다. 부친 김서중씨로부터 11세부터 뜸과 침을 배웠다는 구당은 대가 없이 주민들에게 무료 시술을 했다. 그때 비롯된 아호가 구당이다.

일제시대 1943년 침사(鍼士·침을 놓는 사람) 자격증을 딴 구당은 구사(灸士·뜸 놓는 사람) 자격 없이 침과 뜸 시술을 병행했다. 구당은 28세 나이인 1943년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에서 남수침술원을 열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구당이 한의학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로 떠오른 것은 침술원을 연 지 65년 만인 93세에 이르러서였다. 2008년 방영된 공중파의 추석 특집프로그램이 계기가 된 것이다. ‘구당 김남수 선생의 침뜸 이야기’가 두 편을 거쳐 방송됐고, 시청률은 20%가 넘었다.

구당은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방송에서 선보인 자가(自家) 뜸 치료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전국적으로 뜸 열풍이 불었다. 구당이 소설가 조정래, 시인 김지하, 배우 고(故) 장진영, 수영선수 박태환, 김춘진 의원(민주당) 등을 시술한 사실도 알려졌다. ‘현대판 화타(명의)’ ‘뜸 전도사’ ‘뜸 대가’ 등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구당의 손만 거치면 모든 병이 낫는다”는 말까지 퍼졌다. 구당은 자서전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 장준하 선생,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등도 치료했다”고 주장해 관심이 쏠렸다.

하지만 한의사협회는 “구당의 이력이 과장됐고, 신분도 침구사가 아닌 침만 놓는 침사로 뜸을 뜰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무면허 의료행위’가 논란의 중심에 섰다. ‘현대판 화타’에서 ‘무면허 침술가’라는 엇갈린 꼬리표가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서울시가 쐐기를 박았다. 시는 2008년 10월 구당의 남수침술원 의료행위를 45일간 정지하는 자격 정지처분을 내렸다. 법원도 서울시의 손을 들어줬다. 구당은 침술원을 폐쇄하고 중국과 미국으로 건너가 뜸 시술을 전파했다. 동시에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헌법재판소는 2011년 11월 “침사에 의한 뜸 치료도 안전한 시술”이라며 그전 서울시의 행정처분과 검찰의 기소유예 처분을 모두 뒤집었다. 3년간의 족쇄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한의사협회의 ‘불법도 오래하면 합법이 되는가’라는 등의 부정적인 반응을 잠재우지 못했다.

2017년 8월, 대법원이 구당이 수강생들에게 돈을 받고 침·뜸 실습 교육을 한 것은 불법 의료 행위라는 판단을 내리기도 했다. 한의사 면허 없이 유료 침·뜸 교육을 한 혐의(부정 의료)로 재판에 넘겨진 구당에게 원심과 같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벌금 800만원을 선고했다. 구사 자격이 없는 뜸 시술 행위가 법적으로 처벌받은 것이다.

반면 구당의 제자들은 2018년 8월 재판에서 ‘뜸 시술이 불법 의료행위가 아니다’라는 판단을 받았다. 당시 대전지법은 “의료인 아닌 사람이 뜸 시술을 해도 일반 공중의 위생에 위험을 가져온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장녀 김관순씨는 “침사에게 뜸은 기술적으로 문제 될 게 없다는 게 아버지의 평소 생각이었다”며 “침과 뜸의 세계화와 대중화에 노력한 아버지는 인체에 해가 없는 뜸으로 돈벌이보다는 봉사에 전념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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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K-A를 발현하는 암세포 이식 마우스 모델을 통해 확인한 암 전이에서의 과당의 역할(사진제공:서울대 박종완 교수)© 뉴스1

서울대 의대, 과당 과잉 섭취에 의한 암전이 경로 규명

심영석 기자
입력 2020.11.15


과당 – 과당인산화효소 – 유전자 조절 새로운 경로 밝혀

(대전=뉴스1) 심영석 기자 = 단맛을 내는 과당을 많이 섭취한 생쥐에서 두드러지는 유방암 전이의 분자적 기전이 국내 연구진에 의해 밝혀졌다.

그간 과당의 과다한 섭취가 대사질환 이외 유방암, 대장암, 폐암 등 여러 암의 발병과 진행에 관련이 있다는 역학적 연구결과는 보고된 바 있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기전이 밝혀지지 않아 과다한 과당 섭취가 암을 직접적으로 악화시킬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없었는데 이를 증명해 낸 것이다.

한국연구재단은 서울대 의대 박종완 교수 연구팀이 유방암 세포와 유방암 이식 생쥐모델을 이용해 과당에 의해 억제된 유전자의 발현이 암전이를 촉발함을 알아냈다고 15일 밝혔다.

연구팀은 우선 과당을 대사시키는 효소(KHK-C)와 구조적으로 상당히 유사하지만 과당을 대사(Metabolism)시키지 않는 과당인산화효소(KHK-A)의 진짜 표적이 무엇인지 알아내고자 했다.

간 같은 대사기관을 제외한 대부분의 조직에서 이 효소가 생성되는 만큼 중요한 역할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실제, 생쥐에게 과당을 섭취한 경우라도 이 효소가 지속적으로 생성되는 암 세포가 이식된 생쥐에서는 다른 기관으로의 전이가 왕성하게 일어났다.

연구팀은 이를 토대로 다양한 분자생물학 기법을 이용해 이 효소가 과당이 아닌 핵속 단백질 YWHAH를 변형(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 가운데 25번 아미노산 세린 잔기를 인산화함)시키는 것을 알아냈다.

핵 속 단백질이 변형된 결과 여러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암 억제 유전자인 세포표면접착단백질(E-cadherin)의 발현이 억제되면서 암세포의 이탈을 촉발하는 것을 밝혀냈다.

본 연구에서 규명된 ‘Fructose – KHK-A - YWHAH’신호전달 체계(사진제공:서울대 박종완 교수) © 뉴스1

암세포는 왕성하게 증식하던 일부 암세포가 기존에 존재하던 암 조직을 이탈, 혈관으로 진입하면서 다른 조직으로 전이되는데, 이 과정은 세포와 세포를 이어주는 접착단백질이 감소하면서 시작된다.

실제, 이 효소에 의해 번역 후 변형이 일어나지 않는 돌연변이 단백질(YWHAH)을 가진 생쥐모델에서는 과당의 과도한 섭취에도 불구하고 암전이가 일어나지 않았다.

과당에 의한 암전이 경로를 밝힌 이번 연구성과는 생쥐모델을 이용해 15% 가량의 과당 혼합물을 이용해 이뤄졌다.

연구팀은 실제 암환자가 영양보충을 위해 과당이 함유된 식단을 이용하는 경우 어느 정도의 과당 섭취가 적당한지 알기 위해서는 생쥐모델이 아닌 사람에서의 임상연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번 연구 성과는 국제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 10월28일자에 게재됐다.

km5030@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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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침구사 제도 역사와 현황

5. 논의

근대사회에서 의료의 전문화가 진행되고 '과학적 의학'이라는 근대적 담론에 배치되는 의학이론과 시술법들이 소멸되거나 공식의료체계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현상은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일제하에서 한방과 침구 역시 이러한 추세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이들은 근대의료체계의 기반이 충분하게 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부족한 의료공급을 보완하는 차원에서만 그 역활이 인정되었을 뿐이다. 건국이후 의사들에 의하여 한방과 침구제도의 폐지가 꾸준하게 주장되었던 것은 이러한 근대성 담론이 작용했던 결과였다고 할수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한방은 살아남고 침구사 제도는 폐지되었던 데에는 서로 다른 요인이 작용하였다. 한방의 경우에는 근대성 담론에 대응하는 민족주의 담론이 중요하게 작용하였지만 침구사 제도는 민족주의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근대성 담론에 밀려서 폐지되고 말았다.

여기서 흥미로운 현상은 한의사들의 전략이다. 한의사들은 한의사제도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민족주의에 기대었지만 일단 한의사제도가 만들어진 이후에 이들은 의사가 밟아 온 전문화 과정을 답습하였고 이후 침구사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의사가 한의사제도의 불필요성을 주장하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자신들은 침구를 포함하여 동양의학 분야에서 전문화된 의료인력이고 침구사들은 자질이 부족한 부정의료업자로 격하시켜면서 침구사제도의 존속에 반대하였다. 이후 한의사들은 의사들과 대립되는 상황에서는 '민족의학'이라는 점을 계속 부각시켰지만 내부적인 발전전략은 전문화를 지향하는 양면전력을 구사한다. 이에 따라 한편으로는 한의학을 한의학이라고 명칭변경 하면서 민족주의를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 서양의학체계와 유사하게 전문의제도를 도입하거나 종합병원시스템을 발전시키고 있다.

이러한 반전전략은 1930년대에 의사와 한의사들 간에 한방논쟁이 있었을 때 조헌영(1942: 181~204)이 제시했던 한방의 발전전략과는 크게 대비된다. 조헌영은 한의학은 서양의학과 달리 생활주변에서 손쉽게 약재를 구할 수 있고 누구나 쉽게 배워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민중보건에 크게 기여할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한방의 시술자에 대해서도 '해방주의'와 '엄선주의'를 병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방을 전업으로 하려는 경우에는 자격시험을 치러서 유자격자를 걸러낼 필요가 있지만 동시에 일정한 학식이 있는 자가 스스로 한의학를 배워서 이용하는 것을 제한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한의학 자체가 수천년 동안 해방주의 전통을 갖고 있었고 해방주의를 취하면 민중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하여 무자격자가 걸러질 것으로 보았다. 조헌영은 일제가 잠정적으로 인정했던 의생제도를 곧 폐지할 것이라는 위기감 속에서도 한의학이 살 길은 민중과 함께 하면서 해방주의를 취하는 것임을 역설하였다. 그런데 건국 이후 한의학의 발전과정은 이와는 달리 엄선주의만을 지향했던 것으로 볼 수 있고, 해방주의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최근의 대중적 침술의 부활로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의료분야에서의 민족주의 담론의 성격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방과 침구의 존폐가 논의되던 50~60년대에 보건의료분야에서의 민족주의는 단순히 근대성에 대립되는 정치적 지향만은 아니었다. 근대의료체계가 지향한 전문직 중심주의의 필연적 결과인 의료서비스의 불평등 분포에 대응하여 '중간수준의 의료시술자'들을 양성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가 내포되어 있었다. 세계보건기구를 중심으로 중간수준 시술자에 의한 1차보건의료 체제로 후진국 의료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시도가 1970년대에 만들어졌던 점을 생각할 때 한국의 경우는 그보다 일찍 내부적으로 이 문제를 두고 사회적 논쟁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침구사제도의 폐지와 함께 의료체계는 더 이상 불평등에 대한 민중지향적인 속성을 상실하고 전문주의가 지배하게 되었다. 한의사들의 경우 대외적으로는 아직도 민족주의에 상당히 경도되어 있지만 이들이 주장하는 민족주의는 더 이상 민중지향적으로 것으로 보기 어렵다. 한의사들 자신이 이미 전문화되어 있고 한방의료 생산체계가 상당히 고가의 자본과 비용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한방의료는 더 이상 근대의료에 대한 비용효과적 대안은 아닌 것이다. 이들의 민족주의는 의사에게 대항하기 위한 정치적 성격이 강하다.

이와 대비하여 대중적 침구술은 서양식 근대의료와 한방의료 모두에 대립하는 대안적 성격을 갖고 있다. 즉 대중적 침구술은 전문화 전략을 거부하고 일반대중을 침구시술자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일부 시술자들은 암암리에 침구시술을 생업으로 하기도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자기건강관리를 목적으로 침을 배우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사회에서도 서구와 마찬가지로 대중의 의식이 건강문제와 관련하여 전문화된 의료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던 상태를 벗어나 적극적인 자기건강관리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음을 말해준다. 일상적 건강관리 목적의 침구사용에는 단기간의 학습만으로도 가능하고 별다른 비용부담도 없다는 특성 때문에 침구는 쉽게 대중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전문화는 지식의 독점을 의미하기 때문에 전문화된 의사나 한의사는 이러한 새로운 대중적 욕구(즉 지식 나눔)를 충족시키기 어렵다. 이와 같이 현재 한국사회에서 침이 이원적으로 존재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의료체계를 정당화해주는 담론체계가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담론의 등장은 새로운 사회적 관계의 구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대중적 침구술의 등장으로 한의사와 침구사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의사와의 관계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침구를 둘러싼 정치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과거에 침구를 전근대적인 유물로 간주하던 의사들이 이제는 침구의 효용성을 인정하고 침구를 배우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과거에 침구사제도 폐지에 의사와 한의사가 협력하였던 점이 주효한 성공요인이었다면 이제 의사가 침구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임에 따라 새로운 역학관계가 만들어졌다. 아직은 의사들이 의사회나 관련 학회에서 공식적으로 침구사제도의 부활 같은 것을 주장하는 단계는 아니지만 의사들이 침구에 관한 지식을 한의사가 아닌 침구사나 외국의 침구사들로부터 배우고 있다는 사실은 침구사의 사회적 존재를 인정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것은 전문직간의 협력관계가 준전문직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Halpern(1992)의 연구와도 일치되는 현상이다.

전문화론의 관점에서 볼 때 침구의 이원적 존재는 결국 그동안 진행되어 온 한의학의 전문화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한의사들은 한의학을 대학교육화하는 등 제도화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침구사와의 관계에서 이들을 흡수하거나 위계적 통제구조하에 두지않고 베제한 결과 상황의 변화와 함께 부메랑이 되어 침구영역에 대한 갈등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사후적인 가정일 뿐 거대한 의사집단을 상대하면서 생존을 모색하던 한의사들에게는 전문화를 통한 성장발전과 침구사폐지라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침구를 둘러싼 갈등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전문화된 한의학과 대중적 침구술은 그 구성논리나 지향점이 크게 대비되는 상황이다. 영역갈등론의 관점에서 시사하듯이 누가 더 사회적으로 설득력 있고 세련된 담론체계를 구성하는 가에 따라서 앞으로의 방향은 달라질 것이다. 현재로서는 침구에 대한 새로운 담론이 충분히 만들어졌다기보다는 만들어지는 초기 단계에 있기 때문에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재야침구사들의 침구담론 역시 대중성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충분히 세련된 형태는 아니고 의사나 한의사들 역시 아직은 변화하는 상황에 충분히 주목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영역갈들이 본격화되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만일 현재와 같은 침구의 이원적 존재가 그대로 제도화되었다면 이것은 의료의 탈전문화에 신기원이 될 것이다.

[입법공청회 자료집 (2005.8.29)에 수록된 글이다.]
한국 침구사 제도 역사와 현황

4. 대중적 침술의 부활

침구사법 제정청원은 70년대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있어왔지만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적극적인 입법논의는 되지 않으며 침구는 한의사들의 영역으로 굳어지게 된다. [표2]를 보면 90년대를 들어 6번에 걸쳐 침구사제도 부활과 관련된 법안이 국회의원들에 의하여 발의되었지만 매번 상임위원회에서 한두번 논의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국회 논의에서 핵심 사안은 기존 한의사가 있는데 별도로 침구사 제도를 둘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문제였는데 침구의 대체의학으로서의 활용가치나 비용의 경제성 등이 그 이유로 제시되었지만 이러한 문제는 한의사제도의 보완을 통해 해결해야지 별도의 침구사제도를 도입하면 의료시장에 혼란을 유발한다는 반대의견이 더 많았다. 이것은 의료의 공식부문에서는 한의사의 지위가 확고하게 인정받게 되었음을 의미하며 한의사의 업무영역에 도전하는 시도는 더 이상 국회차원에서 지지를 얻기 어려워졌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표2]에서 주목할 점은 70년대 초반까지 활발하던 침구사법 제정운동이 이후 20여 년간 거의 사라졌다가 90년대 들어와 6차례나 시도될 정도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대중영역에서 침구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대되고 있고 침구부활운동 역시 과거보다 조직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90년대에는 대중영역에서 침구의 담론이 과거와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즉 자연의술로서의 침구의 효용성이 인식되면서 대중영역에서 침구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크게 증가하였다. 이들을 대상으로 전국적으로 수십 개소의 침구강좌가 개설되었다. 한의학 전공자가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침구강좌를 개설하는 정규학교로는 포천중문의대 대체의학대학원과 경기대학교 대체의학대학원이 있다. 전문대학인 송원대학에 2년제 자연요법과가 설치되어 뜸요법을 강의하고 있다. 정규학교보다 일반 교습소에서 더욱 활발하게 침구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데 대학부설 사회교육원의 경우가 많고 다음으로 침구관련단체에서 제공하는 강좌들이 있다. 강좌기간은 주2회 강연에 1~2년 정도가 보통이다. 강사진은 대부분 재야 침구사들이다.

침구를 배우려는 사람들의 지식수준도 높아져 일반인들은 물론 이제는 의사들도 침구를 배우는 경우가 많아졌다. 침구를 비과학적이라 여기며 경원시하던 의사들이 침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획기적인 상황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일반인들 중에도 대학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들도 상당수 있으며 침구를 배우려는 목적도 자기건강관리와 생명과 환경운동의 일환으로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해외선교 목적으로 침구를 배워 파송되는 경우들도 생겨났다. 대중영역에서의 침구의 유행은 기공이나 단전호흡과 같은 전통적인 수체수련이나 아로마 요법과 같은 서구에서 개발된 대체요법들이 사회적 관심을 끌고 있는 것과 유사한 사회적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나아가 고비용의 의료체계에 대한 대안으로 자연의술의 가치에 주목하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90년대 이후의 침구는 더 이상 과학성 논란이나 의료불평등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대안적인 삶과 자연의술의 상징으로 대중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문화된 한의사들이 침 시술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구에 대한 새로운 대중적인 욕구가 만들어지고 있고 그것의 상당부분이 재야 침구사들을 중심으로 해결되고 있는 점이 특기할만하다. 대중영역에서 새로운 침법이 개발되고 있는 점도 유의할만한 사실이다.

수지침 같은 새로운 침법이 비제도권에서 개발되었고 특히 수지침은 이미 전국적인 조직을 갖는 단체로 성장하였다. 이들 침구운동가들은 대체의학의 한 부분으로 침구를 받아들임으로써 한의사 이외의 의사나 간호사는 물론 일반인들도 침구를 배워서 건강관리를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 만성병이나 노인의료에 있어서 침구가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비용효과가 높기 때문에 침구사를 많이 양성하여 이에 대비토록 하자는 주장까지 건개하고 있다(침뜸살리기 국민연대 준비모임, 2002). 이러한 주장이 아직은 정치적으로 큰 지지세력을 형성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이미 세계적으로는 대체의학과 자기치료(self-care)에 대한 관심이 높은 상황이기 때문에 앞으로 이 문제는 계속적으로 논쟁거리가 될 소지가 크다.

물론 법적으로 침구는 한의사들이 독점 영역으로 규정되어 있다.과거에 한의사들에게 침구시술 권한이 없다고 판결했던 법원도 이제는 침구는 한의사들의 영역으로 판정하고 있다. 한의사 제도가 공인되는 현재 상황에서는 침구사를 별도로 인정하는 법제도가 만들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는 침구가 대중적인 간심사로 대두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침구사가 법제화되어 있는 일본의 경우는 한국처럼 침구에 대한 대중적인 운동이 없고 침구사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변화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침구사라는 전문가가 이미 오래전부터 제도화되어 있기 때문에 침구에 대한 새로운 수요는 이들 침구전문가를 중심으로 해결되는 방식이 정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침구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관심이 제기되었을 때 이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대중영역 내의 무자격 전문가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이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침구전달체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한의사들이 침구에 대한 배타적 독점권을 주장하면서 한의사 이외의 다른 집단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켰기 때문에 정작 침구에 대한 관심이 있는 의사들도 제도권 내의 침구 전문가인 한의사들로부터 침구를 배우기 보다는 대중영역의 비제도권 전문가들로부터 배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대안의술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도 한의사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재야 침구사들은 침구술 부활이라는 목적 때문에 대중 누구에게나 침구를 전수하는데 열성을 보이기 때문에 침구를 배워 스스로 건강관리를 하려는 사람들과 쉽게 목적이 일치되지만 전문화를 지향하는 한의사들의 경우는 이러한 식의 지식 나눔이 원천적으로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결국 지난 60년대에 한의사들은 의사들과 연대하여 침구사와 제도화를 방지하고 침구사들을 비제도권으로 몰아냄으로써 동양의학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지만 비제도권 내에서의 침구의 존재 자체를 없애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사회적 상황의 변화와 함께 이것은 부메랑이 되어 오히려 자신들을 옥죄는 요인이 되었다. 만일 한의사들이 침구사 제도를 허용하였거나 아니면 침구사들을 한의사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완전히 단일적인 동양의학 전문가 집단으로 발전하였다면 현재의 상황은 환전히 달라졌을 수 있다.
한국의 침구사제도의 역사와 현황

3. 침구사제도의 폐지

1) 한의사제도의 성립
2) 한의학의 제도화
3) 침구사제도의 폐지

일제시대의 의료제도는 의사를 중심으로 하는 서양식 의료제도의 기본틀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 주변부에 의생이나 침구사와 같은 동양의학의 전통적 요소를 남겨두고 있었다. 1945년에 일제 식민지배가 종식되고 미 군정을 거쳐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의료제도도 새로운 틀을 갖추게 되었다. 새 의료제도가 의사를 중심으로 하는 서양식 의료제도를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동양의학 부분에서는 큰 변화가 있었다. 주변부에 밀려나 있던 의생이 '한의사'라는 지위로 격상되었고, 반면 침구사 제도는 폐지되었다. 한의사는 정규대학 과정을 이수한 학력자에게 면허를 주었기 때문에 의사에 버금가는 법적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은 이웃 일본의 경우와는 크게 대비된다. 일본에서는 2차 대전 이후에도 의료제도에 큰 변화가 없었다. 기존 공식부문은 의사를 중심으로 하는 의료제도가 유지되었고 침구사나 안마사 제도 역시 유지되었지만 계속 주변부에 남아 있었다. 이러한 비교를 통하여 대한민국 건국 이후 의료제도에서 동양의학 부문의 변화가 컸던 원인은 '정치세력의 교체'에 따른 효과일 것으로 추측된다.

1) 한의사제도의 성립

1951년에 국민의료법이 제정되면서 한의사제도가 만들어졌다. 한의사제도가 성립되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이미 큰 세력으로 성장한 의사들은 한의사제도를 법적으로 인정하는데 강력히 반대하였다. 의사들의 주장은 한의학이 비과학적이기 때문에 제도화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의사제도를 인정하는 법은 세계적으로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고까지 발언하였다. 정부도 의사들의 의견에 동조하여 처음에는 한의사제도를 완전히 배제한 의사 중심의 의료법안을 제출하였으나 다수 국회원들의 반대로 입법되지 못하였다. 한의사제도를 인정하는 새로운 법안이 만들어져 국회를 통과할 수 있었다. 당시 국회의원의 다수는 일제에 의하여 탄압받던 민족의학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동조하였다.

보건위생 담론의 측면에서 생각할 때 1951년은 사회경제적 조건이나 보건위생의 상태가 일제시기오아 질적인 차이를 보여주지 않는다. 6.25를 겪으면서 국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지고 일본인 의사들의 귀환으로 의사는 부족하여 의료체계의 정상적인 가동이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이전 시기의 위생담론은 여전히 유효하였으며 항생제 등의 발명으로 서양의학의 성가는 계속 높아가던 시기였다. 한의학의 담론이 어떤 질적 변화를 하거나 한의학의 사회적 역활이 확대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의사제도가 성립한 것은 일제통치가 종식된 직후 식민지를 경험한 신생 독립국가로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른 요인은 국가적 차원에서 보건의료 정책을 계획하고 집행할 보건행정권력이 일시적으로 공백상태에 있거나 매우 취약했던 점이 작용하였다. 일제하에서는 식민통치의 기간조직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경찰에서 보건행정업무를 담당했었다. 그러나 미군정을 거치면서 보건행정은 미국식으로 바뀌면서 별도의 독립부서(보건부)로 이관되었다. 미국식으로 보면 보건행정을 전문화시키는 것이었지만 당시 한국의 실정에서는 보건행정의 전문가가 거의 없었고 정책을 실행할 수 있는 하부조직도 없었으며, 사회보장이나 복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치이념을 갖춘 정부도 아니었기 때문에 보건부의 정책역량은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임상 의사들이 보건부서 장관직을 맡았으나 이들은 민주주의에 압도 되었던 당시의 국회의원들을 설득할 만한 역략을 갖고 있지 못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다 의료인력의 절대적인 부족은 한의사제도의 존속 내지 승격에 유리한 조건을 형성하였다. 또한 당시에 한의사들이 상당한 인적, 물적 자원을 기반으로 국회의원들에 대한 로비를 성공적으로 진행시켰다. 당시 상황을 한의사협회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국회 사회보건위원회에 한의사제도의 입법을 위한 증언을 신청하였으나 이같은 시도는 한의학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지니고 있던 양의출신 국회워원들의 반대에 의해 빈번히 무산되고 말았다. ... 한의계 중신인사들이 적극적으로 국회의원들과 교섭을 벌였다. ... 서울에 거주할 때부터 닦아놓은 정치적 기반과 재정적 뒷받침으로 마침내 국회증언의 기회가 얻어졌다." (대한한의사협회, 1989)

국회증언 이후 한의사제도는 법안에 포함되어 제출되었고 결국 통과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한의사들은 의생이라는 격하된 지위에서 벗어나 법적으로 의사와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고 곧바로 한의과대학도 만들어지면서 대학 학력을 가진 한의사가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2) 한의학의 제도화

국민의료법이 제정된 이후 한의학의 제도화가 시작된다. 한편으로는 한의과대학을 설립하고 후진을 양성하며 한의학을 체계화하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법제에 따라 기존의 의생들에게 한의사 시험을 치르고 면허를 부여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국민의료법 통과에 따라 국가는 1952년에 4년제 정규대학인 서울한의대학 설립을 인가하였고 이 학교는 1955년에 동양의약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당시는 한의과대학이라는 명칭이 갖는 사회적 위상이 지금과 달라 일제시대의 낙후된 한방의 이미지를 연상시켰기 때문에 동양의학이란 명칭을 생각하였고, 약학과 설치를 염두에 두게 되면서 동양의약대학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대한한의사협회, 1989). 이 학교는 한의학 이외에 해부학이나 생리학 같은 기초의학 강의를 실시함으로써 보다 현대화된 한방의학의 이미지를 만들려는 노력을 시도하였고 이러한 교과과정은 이후 한의학 교육의 전형으로 자리잡게 된다.

한의학 제도화의 다른 측면은 한의사의 자격을 인증하고 성원을 구성하는 일이었다. 국민의료법은 한의사의 자격으로 한의대 졸업자나 검정시험을 합격하여 동등한 학력을 인정받은 자에게 한의사 자격시험을 거쳐 면허를 부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당시 의생의 경우 영구면허를 가진 자는 곧바로 한의사 면허를 인정받았지만 한지의생 면허를 가진자는 검정시험을 치른 후 다시 자격시험을 보아야 면허를 얻을 수 있었다. 일제의 정책에 의하여 의생규칙이 반포된 최초 1회를 제외하고는 이후로 계속 한지의생 면허증만을 주었기 때문에 노령의 일부 의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의생들이 한지의생이었고 심지어 한의대 교수나 자격시험 위원 중에도 한지의생으로 한의사 면허를 갖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대한한의사협회, 1989). 따라서 이들은 한지의생을 의생과 동일하게 인정해달라는 청원을 국회에 제출하였으나 국회에서는 의사자격을 인정하기 어려운 한지의사들과의 형평성을 이유로 이러한 청원은 거부되었다. 따라서 한지한의사의 일부는 검정시험을 거쳐 한의사 자격을 획득하였으나 다수는 한지한의사로 남게 되었다.

초기 한의사를 형성했던 또 다른 집단은 한약종상이다. 통계를 보면 1950년대 초에는 한의사 수의 2~3배에 달하는 한약종상이 존재했다. 그런데 한의사 검정시험 규정에 의하면 의생은 물론 10년 이상 한약판매 업무에 종사한 한약종상들에게도 시험자격을 부여하였다. 한약종상은 의료인력의 부족 때문에 정규 의료인이 없는 지역에서 약품판매업을 할수 있도록 자격을 부여한 직종으로 진맥이나 침구시술 등 진료행위는 할 수 없고 처방집에 따른 한약의 판매만을 하는 직종으로 '한약방'을 운영하던 직종이다. 이들은 한약재 유통에도 관계하였기 때문에 일부 '성공한' 한약종상은 상당한 경제적 자산을 형성하고 있었고 한의계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적지 않았다. 한의사 국가고시를 볼 수 있는 자격부여 검정고시에 매년 수십 명의 합격자가 배출되었던 점을 생각할 때 적어도 검정고시가 시행되었던 63년까지 수백 명의 한약종상이 한의사 자격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표1]에 의하면 1953년에서 1962년까지 매년 약 150명의 신규 한의사가 등록되었다. 1954년 당시 유일한 한의학 교육기관이었던 4년제 서울한의대 재학생이 280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신규 한의사의 절반 이상이 한지의생이나 약종상 출신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같은 동양의학 계열의 시술자였던 침구사에게는 한의사 자격 검정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나 기회를 부여하지 않았던 점이다. 이것은 초기 한의사 형성과정에서 의생과 한약종상은 집단의 정체성을 같이 하였으나 침구사와는 사회적 거리를 멀리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이들 세집단은 모두 정규적인 학력을 갖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지식수준'의 차이가 이들의 집단정체성을 가르는 기준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지식수준의 차이가 있더라도 시험을 통하여 '유자격자'를 가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1950년대 동양의약대학의 교과과정을 보면 침구학 전임교수와 침구강좌가 있었다(정우열, 1999). 따라서 당시의 한의사들이 침구를 한의학의 한 부분으로 생각했던 것은 분명해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한의사의 형성과정에서 침구사들을 제외했던 것은 두 집단의 세력화 정도의 차이가 크고 집단정체성이 달랐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한의사 형성과정에서 침구사를 배제한 결과 이후 침구사들과의 갈등이 조성되었다.

3) 침구사제도의 폐지

국민의료법은 침구사제도에 대해서는 별다른 논의 없이 그대로 존속시켰다. 또한 침구사 제도 운영에 관한 사항을 관련 행정부령으로 정하도록 함으로써 일제시절의 법체계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관련 부령을 제정하지 않았고, 특시 신규 자격증 발급을 위한 시험을 실시하지 않았다. 당시 의료계에서 의학이 발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의료유사업을 존속시킬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했던 사실을 생각할 때 의료계의 절대적 영향 아래 있었던 정부의 보건행정 부서가 행정부에 위임된 침구사 부령 재정을 회피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침구사제도는 법적으로 존속되었지만 침구영역이 누구에게 귀속되는가 하는 점은 상당히 모호해질 수 밖에 없었다. 1950년대에 침구는 한의사의 독점 영역이 아니었다. 국민의료법 임법과정에서 한의사들은 침구사제도 존속에 대하여 별다른 의견제시가 없었다. 또한 1962년까지 실시되었던 한의사 자격 검정시험 과목은 첩약제조 관련 과목으로 구성되었을 뿐 침구관련 과목이 포함되지 않았다. 의료법이 개정되기 이전인 1961년 대법원은 "침구사 자격증을 소지하지 않은 한의사가 침술이나 구술을 실시할 수 있다는 법적인 근거는 없다"고 판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침구가 한의학의 한 부분이기는 하여도 한의사들의 독점영역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정부가 침구사 신규배출 기회를 만들지 않음으로써 침구영역에 대한 실질적 관할권은 모호할 수밖에 없었다.

1960년에 이승만 정부가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에 의하여 몰락하고 새로 장면 정부가 수립되면서 상황이 변화하였다. '민의의 표출'이 자유로워지면서 다양한 조직과 단체들의 민원이 제기되었는데 침구를 배웠던 맹인학교 학생과 침구학원 졸업생들이 침구사 부령제정을 강령하게 요구하였다(이우관, 1973:34). 맹인들이 생업으로 안마와 침구를 배웠으나 법적 자격을 얻지 못하게 되자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던 것이다. 그 결과 1960년 12월에 침구 등 의료유사업자에 대한 부령이 재정되었지만 곧이어 1961년 5.16 쿠데타로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침구사 자격시험은 실시되지 못하였다. 더욱이 1962년에 의료법이 개정되면서 침구사제도는 기존 정규 침구사의 기득권만 인정하고 폐지되었다. 더욱이 개정 의료법은 침구사제도를 폐지하면서 침구를 한의사가 관장한다는 등의 제도폐지에 따른 경과규정을 마련하지도 않음으로써 이후 집단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조국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통하여 정권의 정당성을 확립하려 하였다. 의료부문에서도 역시 '근대화'를 지향하면서 여러가지 개혁조치가 이루어졌다. 한편으로는 의료인에 대한 국가고시제도를 도입하여 의료인력의 질적 향상을 기하고 물리치료사 등 의료보조인력 제도를 도입하고 간호사에 대한 교육을 대학수준으로 높이는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의료 근대화의 다른 측면은 '전통의 잔재'를 없애는 것이었다. '전통'은 곧 '낙후와 빈곤'의 원인처럼 간주되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전통의 탈피가 강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의사와 침구사, 안마사 같은 동양의학의 전통은 비과학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1962년에 국민의료법을 의료법으로 개정하면서 이를 일거에 없애려고 시도하였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한의사들의 강력한 반발이 제기되면서 결국에는 한의과대학을 4년제에서 6년제로 교육연한을 연장하여 그 실력수준을 높이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반면 침구사 제도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 과정도 세심한 검토를 거쳐 결정되기보다는 비과학적 의료행위를 근절하는 식으로 무조건 폐지해 버렸다. 이후 의료유사없자들이 담당하던 접골은 정형외과 의사들이, 침구는 한의사들이, 마사지는 물리치료사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다만 맹인들의 생업을 위한다는 목적에서 안마만이 제도적으로 살아남았다.

조직력이 약했던 침구계는 군사정부의 조치에 제대로 반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군사정부가 종식되고 민정으로 복귀하면서 몇몇 침구계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침구사제도 부활운동이 조직되었다. 이 운동의 주체는 침구사 자격시험을 준비해오던 침구학원 졸업생들과 맹인학교 졸업생들이었다. 1950년대에는 법적으로 침구사제도가 존속하였고, 침구사 신규 자격시험 실시를 예상하면서 여러 침구학원들이 설립되어 수천 명의 이수자를 배출하였다. 대한침구학원 동창회가 1964년에 결성되었고 이후 몇몇 침구학원동창회가 이어서 결성되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국회의원들에 대한 로비를 통하여 입법청원이 이루어졌다. 정규 침구사들의 단체인 대한침구사회는 조직역량이 미비하여 조직차원의 지원은 없었고 몇몇 침구사들이 개인적으로 도움을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의 입법청원은 큰 효과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맹인학교 학생들이 침구사 제도 부활을 요구하면서 조직적인 거리 시위를 전개하자 여론이 반전되었고 국회도 이 문제에 관심을 보이면서 보건사회위원회와 법사위원회를 통과하여 1966년 1월에 본회의에 회부되었다.

침구사제도가 국회 통과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 전개되자 의사회와 한의사회는 합심하여 저지에 나섰다. 소위 '2대 악법'에 대한 저지 투쟁이다. 정부는 의사들의 기피로 보건소장을 의사로서 보임하기 어렵게 되자 의사가 아닌 약사 등 타 직종도 보건소정에 임명할수 있도록 보건소법을 개정하여 하였고, 국회는 침구사제도를 추진하여 66년 1월에 두 법안이 국회 보건사회위원회를 통과하였다. 의사회는 법안이 보건사회위원회를 통과하자 위기를 느끼고 국회 통과 다음날 '보건관계법안특별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고 각 지부별로도 집회를 가졌다. 일부 의사들은 두 법안을 반대하면서 국회의사당까지 시위를 하기도 하였고 의사 4천명의 서명이 담긴 연판장을 첨부하여 대통령과 국회의장에게 제출하였다. 일부 의사들은 하루 동안 휴진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사들의 집단 행동은 유례가 없던 일로 정부나 국회에 상당한 압력을 가하게 되었고 국회는 결국 두 법안을 폐기하는 것으로 종격지었다.

침구사 문제를 두고 찬반 양진영의 세력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기울어져 있었다. 반대진영의 선두에는 의사회가 있었고, 한의사회가 그 다음으로 참여했으며, 치과의사회와 약사회도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병원협회와 보선소장, 의과대학학장협의회와 의학회 등 의료계와 한의계의 각종 단체가 모두 반대운동에 참가하였다. 집권당인 공화당 역시 반대 입장에 서 있었다. 반면 찬성진영은 침구학원동창회연합회가 주도하였고, 여기에 맹학교 학생들과 안마사회에서 참여하였다. 이들은 모두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이들간의 사회적 지위나 조직의 규모 및 대외적 교섭력 등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임이 분명하다. 정규 침구사들이 이들의 노력을 외면하거나 방해하는 일까지 있었다.

침구사제도 부활에 대하여 양측은 뚜렷하게 대비되는 논리를 갖고 있었다. 논쟁의 핵심은 의료의 전문활를 통하여 우수한 전문 인력을 양성할 것인가 아니면 의료시술자의 질적 수준을 낮춰서라도 시급한 의료인력의 부족을 해결할 것인가의 여부가 대립되었다. 이와 함께 침구(안마, 접골)이 전근대적인 비과학적 요법인가 아니면 과학적 근거를 가진 치료법인가를 두고 논란을 빚었다.

당시 정부의 견해는 1962년 의료법 개정으로 침구사제도가 폐지되었고 침구는 한의사의 영역으로 호함되었기 때문에 별도로 침구사제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침구가 비과학적이라는 점에 대해서 찬성론자들은 선진국에서 침구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를 하여 효능을 밝혀내고 있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당시는 이미 국제침구학회가 존직되어 매년 학술대회를 열고 있을 정도로 국제적으로는 의료계를 중심으로 침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지만 국내 의료계는 침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이것을 비과학적인 전통의 잔재로 보는 견해가 강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의사들은 이미 정규대학과과정에서 한의사들이 배출되고 있는 상황에서 체계적 교육을 결여한 침구사를 인정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의료계와 한의계는 공통적으로 당시 침구사들이 가졌던 공식교육의 부재와 기술능력의 취약성을 지적하고 있다. 의사들은 여기에 침구가 그 자체로 비과학적이라는 가치판단까지 첨가하고 있다. 당시 치구사들이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최초의 관인침구학원 대한침구학원이 1957년에 인가되었는데 이 학원은 6개월 이론과정과 6개월 전문과정으로 1년의 교과과정을 마련하고 있었으나 수강생들은 경제난으로 전과정을 이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또한 수강생들의 학력수준도 국민학교나 중학교 졸업 등 낮은 편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정교교육 이외에 독학, 개인교습, 비정기적인 관련단체 학술강좌 등을 통하여 침술을 익힌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문제를 두고 찬성측에서는 의료인력이 전반적으로 부족하고 특히 농촌에서는 의료인력이 전무한 상황에서 의사나 한의사 등 고급인력의 배출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침구사처럼 단기간에 보다 많은 인력을 배출해서 의료공급을 원활히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결국 침구사 문제는 의료제도 구성에서 과학화 전문화를 지향하면서 소수 엘리트에 의한 의학발전을 도마할 것인지 아니면 계층간 형평성 해소를 지향하면서 가용자원을 최대한 활용할 것인지의 문제로 집약된다. 여기서 정부는 전자를 지향하였다. 정부는 한걸음 더 나아가 1969년에 '보건범죄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재정하여 불량식품과 부정의약품은 몰론 부정의료업자에 대하여 2년 이상 무기징역까지 내릴 수 있도록 강력한 처벌위주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70년대 이후 침구사 등 불법적인 진료는 사라지게 되었다. 반면 국민들의 경제사정이 향상되는 80년대까지 다수의 국민들은 의료를 이용하기 어려운 의료소외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침구사 제도 역사와 현황

2. 침구사제도의 형성

한국의 역사에서 조선시대(1392~1910)에는 의료 시술자(medical practioners)들에게 공식적인 자격을 인증하거나 면허를 부여하는 제도적 장치가 없었다. 물론 당시에도 전통의학을 시술하는 한의사들이 존재했지만 이들에 대한 자격기준같은 것은 없었고 다양한 수준의 시술자들이 병존하였다. 조선 왕국의 말기에(1900년) 서양식 근대국가가 만들어지면서 의사, 약제사 같은 직종에 대한 자격기준이 만들어졌고 면허증이 발급되기 시작하였다. 이때 침술은 별도의 직종으로 독립되지는 않았고 서양의학을 전공한 의사나 동양의학을 시술하는 한의사 모두 '의사'라는 직종으로 통합되어 면허가 발급되었다.

그런데 조선이 1910년에 일본이 식민지가 되면서 의료제도도 일본식 제도가 도입되는 변화를 겪게 된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 한방의 제도를 완전 폐지하고 서양의학을 전공한 의사를 중심으로 하는 의료제도가 만들어졌다. 원래 한의학은 첩약과 침술의 2가지 치료법을 갖고 있었는데 일본에서는 17세기 이후 맹인들이 침술에 종사하기 시작하면서 한방의들은 침술을 하지 않게 되었고(Lock, 1980: 53~61), 한방은 곧 첩약만을 의미하게 되었다(흑전호일랑, 1985). 메이지 유신 당시 한방의 제도는 폐지되었지만 침술은 맹인들의 복지를 위하여 존치시켰다(구산효일, 1932: 441). 조선이 식민지화 되면서 침구사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렇지만 일본과는 달리 전통 한방의를 의생이라는 이름으로 존속시켰다. 이것은 일제초기에 자격을 갖춘 의사가 수백 명밖에 되지 않는 현실에서 의료공급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전통 한방의를 존치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수천 명에 달하는 조선인(전통 한방의)들을 실직상태에서 구제하는 '은혜를 베품'과 동시에 향후 수십 년에 걸쳐 자연도태 되도록 하였다(백석보성, 1918: 52). 즉 의생제도는 점정적으로 허용되는 제도이다. 서양식 의과대학에 대한 신규면허의 발급도 매우 제한하였기 때문에 의생의 수가 계속적으로 감소하였고 한의학의 학문적 연구나 교육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

반면 침구사들의 수는 계속적으로 증가하였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1933, 1939판)에 따르면 의생제도가 실시된 1914년에 5,800여명이 의생 자격을 취득하였다. 이후 의생의 수는 계속 감소하여 1939년에 3,600명 수준이 되었다. 반면 침구사는 1938년 당시 침구사 882명, 구사 668명이었는데 양쪽 면허를 모두 가진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침구사의 수는 약 1,000명 내외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의생과 달리 침구사의 경우에는 일본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조신인 침구사는 수백 명에 불과했다.

의생과 침구사가 병존하게 되면서 이들 간에 업무영역의 중첩이 불가피하게 발생하였다. 의생은 전통 한방의 역활을 그대로 이어받을 것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초근목피'로 첩약을 조제하는 일 이외에도 침과 뜸을 사용하였는데 제한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침구사 제도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침 시술권자의 이원화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일제시대에 의생과 침구사간에 업무영역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발생하지 않았다. 의생이나 침구사 모두 공식 의료체계의 핵심인력이 아니었으며 의료체계의 주변부에 머무르는 직종이었다.

이들에게는 근대적 직업집단에 필수적인 학력이 요구되지도 않았다. 다만 관련 의업에 종사했거나 기성 자격자에게서 의술을 배운 경력만 인정되면 자격이 부여되었다. 따라서 공식부문에서 요구되는 학력과 독점적 면허제도와 무면허자에 대한 염격한 정부의 규제가 이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 간에 직업적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은 낮다. 또한 의생들은 새로 배출되는 의사들에게 밀려나 지방이나 농촌에서 직업 활동을 하게 된 반면 침구사들은 의사와 마찬가지로 도시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던 점도 이들간에 갈등이 빚어지지 않게 만든 요인이었다. 더욱이 침구사 제도가 공인되는 새로운 상황에서 의생들은 침구보다는 첩약의 조제판매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의생 이외에도 약종상이라는 직종이 있었다. 원래 의생은 진단하고 처방하는 시술자였고 약종상은 기성 처방집에 수록된 대중적인 한방약을 판매하는 직종이었다. 의생과 약종상은 의료체계의 주변부에 있는 직업군이었고 이들의 직업활동에 대한 정부의 규제도 엄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생과 약종상은 실제 업무수행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게 되었다. 이들은 첩약조제판매에 주로 종사하였고 필요할 때 침구시술도 하였지만 이들의 주수입원은 첩약판매로부터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의생과 약종상은 법적 자격은 의사와 달리 독점적 면허의 개념이 아니라 한방업무에 종사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자격증을 매우 제한적으로 발급하였기 때문에 자격취득 기회의 편의에 따라 의생 또는 약종상의 자격을 취득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두 집단 간에는 상당한 동질성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이들과 침구사는 그 생성배경이 다르고 활동 지역이 달랐기 때문에 이질성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으로 한의사 가계를 유지하여 왔던 집안 출신의 한 한의사의 회고에 의하면

"왜정시대에 침구사라는 것이 별로 없었다. 서울이나 부산 같은 큰 도시에나 이었지 지방에는 모두 약종상만 있었다. 약종상들이 약은 물론 침과 뜸을 다했다. 침뜸은 재료가 안 드는 것이기 때문에 별도로 돈을 받지 않았다. 그러면 환자들이 나중에 담배 같은 것을 갖다 주었다."

의생과 약종상은 때로 침구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이들은 첩약조제판매에 치중하게 되고 침구사는 침만을 전문으로 하는 식으로 업무의 영역이 분화되었다. 그런데 침구와 달리 첩약조제는 원료비가 많이 소용되었기 때문에 치료비가 상대적으로 비쌀 수 밖에 없었고 이를 전문적으로 하는 의생과 약종상들은 보다 많은 자원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생과 약종상은 침구사보다 상대적으로 집단 규모도 켰고 자원통제력도 우월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대한민국 건국 이후 한의사제도가 성립되고 침구사제고다 폐지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국 침구사제도의 역사와 현황

계간 구당 2019 겨울
조병희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1. 연구의 배경
2. 침구사제도의 형성
3. 침구사제도의 폐지
4. 대중적 침술의 부활
5. 논의


1. 연구의 배경
침구사 제도는 세계 각국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한국사회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한국에서도 1960년대 초까지 침구사 제도가 유지되다가 1962년에 의료법이 개정되면서 제도가 폐지되었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침구시술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침구는 한의사들에 의하여 합법적으로 시술되고 있다. 한의사 이외에도 과거 일제시대에 침구사 면허를 획득했고 현재까지 생존하고 있는 소수의 정규침구사들도 침구시술을 한다. 의료법에 따르면 의사들에게는 침구시술 권한이 없기 때문에 불법적인 시술이 된다. 의사 이외에도 무면허로 침구를 시술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이들의 숫자는 정확하게 추산하기 어렵지만 침구지식을 습득한 사람들은 최소한 수만 명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전통 침법을 배우기도 하고 수지침처럼 최근에 개발된 새로운 침법을 배우기도 한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침구강좌를 개설하고 있는 학원도 여러 곳이 있다. 이러한 상황은 침구제도가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제도의 정비가 필요함을 말해 준다.

침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증대는 일차적으로 서구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체의학의 등장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체의학의 등장 원인은 여러 가지로 설명되고 있지만 의학적 요인과 사회적 요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대체(alternative)' 의학의 문자적 의미는 정통의학을 대체하는 치료법이란 것인데 그러면 사람들이 정통의학에 불만이 커서 이것을 포기하고 대안적인 치료법을 선택하는 것일까? 이에 관한 많은 연구에 의하면 대답은 'NO!'이다. 현대사회에 들어와 질병구조가 급성전염성 질환으로부터 만성퇴행성 질환 또는 생활습관병으로 변화하면서 의학의 역활도 환치보다는 증상의 악화를 방지하는 수준의 치료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예를 들어 아토피 피부염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은 기존의 병원 치료에서 뚜렷한 효과를 얻지 못하게 되자 대안적인 치료법을 찾게 된다. 이들은 대안적 치료법에 의존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현대의학의 치료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하나의 요인은 사회적인 것으로 70년대 이후 자신의 신체와 건강에 대한 통제력 또는 권리에 대한 인식이 만들어진 점이다. 이에 따라 자조(self-care & self-help), 소비자 주권, 소비자 동의 등의 새로운 개념들이 만들어졌고, 환자가 치료법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전파되었다. 대체의학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보통 학력이나 소득수준이 높은 증산층들로써 이들은 고도로 복잡하고, 경쟁지향적이며, 상업화된 문화를 벗어나 대안적인 생활방식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고, 이들을 중심으로 well-bing과 같은 새로운 가치가 보편화되면서 대체의학도 대안적인 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대안적 치료법들은 대체로 정통의학만큼 과도하게 침습적이지 않으며 신체의 자연치유력을 강화시키고 신체와 정신의 조화를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 또한 의사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기 보다는 본인이 직접 시술하거나 실천하는 부분이 많다는 점도 환자의 주체성이란 측면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이러한 특징들이 탈든대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방식이나 가치관과 부합되면서 대체의학이 사회적으로 관심사로 대두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대체의학은 기존에 지위를 확릭하고 있는 정통의학과 일정하게 이해관계가 대립되기도 한다. 정통의학과는 치료법의 철학적 근원이나 이론적 원리를 달리하기 때문에 의사들로부터 '사이비 의료'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대체의학의 효과를 입증하는 것도 쉽지 않은 과제이다. 철학이나 이론적 원리가 매우 상이가 하기 때문에 기존의 과학적 검증의 틀로는 효과입증이 잘 안 되는 경우들이 많다. 대체요법의 효과가 어느 정도 입증되는 경우에도 그 시술자들에게 공식적인 권한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며 경우에 따라선는 정통의학의 한 범주로 편입시켜 버리기도 한다.

한국에서의 침술의 문제는 이와 같은 일반적인 문제 이외에도 한국의 특수한 역사적 사회적 상황이 작용하여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한국에서는 전통의학을 전문적으로 시술하는 한의사 제도가 만들어져 있고 그들의 교육수준이나 사회적 지위는 의사의 그것과 버금간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한의학은 대체의학이 아니라 정통의학이고 '공식의학'으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다. 그러다보니 침구는 대체의학이 아니라 공식의학의 한 부분으로 정립되어 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침술 시술자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한의사들은 민간의 침술 습득자들을 '사이비 의료'의 일종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고 불법적 시술을 금지시켜 해결해야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일반인들에게는 전문화된 한의학의 한 부분으로서가 아닌 대체의학의 한 부분으로 침술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의사들은 또 다른 차원에서 한의사에 의한 침술 독점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미 서양에서 의사들의 침 시술이 보편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들도 침술을 배워 시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60년대에는 의사들이 침 시술을 비과학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침구사 제도의 폐지를 주도하였지만 이제는 의사들의 생각이 크게 변화한 것이다. 이러한 의사들의 생각은 나아가서 의학과 한의학이 제도적으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전통의학에 대한 연구나 시술을 할 수 없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최근에는 두 의학을 제도적으로 통합하자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따라서 침술의 문제는 의학과 한의학이라는 공식부분 내부에서의 갈등은 물론 한의사와 민간침구사들 간의 갈등까지 내포하고 있는 복잡한 문제가 되고 있다.

이글은 왜 한국에서 침술제도가 이와 같이 혼란스런 상황으로 전개되었는가 하는 점을 역사적으로 살펴본 다음, 현재 침술을 둘러싼 집단 간의 갈등 현황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침술제도의 정비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14. 족궐음간경(足厥陰肝經) 

14.기문(期間)
제6늑골 아래, 거궐(중완 위 2寸) 양옆 3.5寸,거궐과 유두사이(4寸)보다 0.5寸안쪽

13장문(章門) 
제11늑골 앞쪽끝, 팔꿈치 끝이 닿는 부위

12.急脈(급맥)
치골 윗 기슭의 곡골 양옆 2.5寸, 기충 바깥쪽 0.5寸

11.음렴(陰廉)
기충아래 2寸
곡천과 기충사이 18寸
긴 모음힘줄살과 치골근 사이

10.족오리(足五里)
기충아래 3寸

9.음포(陰包)
곡천위로 4寸
정강이뼈와 엉치뼈를 이은 봉공근과 얇은 힘살사이 오목한곳

8.곡천(曲泉)
무릎을 완전히 구부려 생긴 가로 금끝의 두 힘살의 사이 오목한곳

7.슬관(膝關) 
굵은 정강이뼈머리의 안쪽 끝 수직선 아래, 힘살 밑 오목한 곳, 음릉천 뒤로 1寸에서 조금 위쪽

6.중도(中都)
발 안쪽 복사뼈 위로 7寸, 굵은 정강이뼈 뒷기슭
슬관과 발 안쪽복사뼈 높은 끝 사이 13寸

5.여구(蠡溝)
발 안쪽 복사뼈 위로 5寸, 굵은 정강이뼈 뒷기슭

4.중봉(中封) 
발목 가로금 위, 정강이힘줄의 바깥쪽, 정강이 힘줄과 엄지 발가락굽힘줄의 사이,해계와 상구의 중간

3.태충(太衝)
첫째와 둘째 발몸뼈의 위쪽 접합 부분 및 오목한 곳

2.행간(行間) 
첫째발가락 본절 바깥쪽 앞 오목한 곳, 첫째와 둘째 발가락 갈라진곳

1.대돈(大敦)
첫째발가락 발톱뿌리 바깥쪽 모서리 뒤 0.1寸

13. 족소양담경(足少陽膽經)

1.동자료(瞳子店) 
눈바깥쪽 모서리에서 바깥으로 0.5寸, 뼈 위로 올라 바로 오목한곳

2.청회(聽會) 
귀구슬 아랫부분 앞, 입을 벌리면 움폭해지는 곳
귀구슬 윗부분 앞은 이문, 귀구슬 가운데부분 앞은 청궁, 귀구슬 아랫부분앞은 청회

3.상관(上關)
광대뼈 활모양의 위기슭 오목한곳, 하관과 아래위 상대

4.함염(稟厭)
1/4 두유와 곡빈사이 4寸
두유는 이마모서리 앞 머리칼 경계에서 앞머리뼈 도드라진 부분 위쪽으로 들어가 오목한곳,
곡빈은 귀바퀴 위끝 수평선과 귀구슬 앞 수직선이 만나는 곳

5.현로(懸顱)
2/4

6.현리(懸釐)
3/4

7.곡빈(曲)
귀바퀴 윗끝이 수평선과 귀 구슬 앞 수직선이 만나는 곳, 각손 앞으로 1寸

8.솔곡(率谷)
귀바퀴 윗끝이 닿는곳(각속)의 수직선과 앞머리칼 경계와 눈썹 윗 기슭의 중간점을
지나는 수평선이 만나는 부분 조금 오목한곳, 각 손위로 1.5寸

9.천충(天衝)
솔곡 수평선과 귀바퀴 뒷 선의 수직선이 만나는 곳, 솔곡 뒤로 0.5寸

10.부백(浮白)
각손 뒤로 1寸
1/3 천충에서 완골을 활모양으로 이은 선을 3등분

11.두규음(頭竅陰)
유양돌기 뒷기슭 2/3

12.완골(完骨)
유양돌기 아래끝 뒤쪽의 오목한 곳

13.본신(本神)
눈 바깥끝 모서리 수직선 위, 앞머리칼 경계에서 0.5寸 위,
신정과 두유사이의2/3지점

14.양백(陽白)
눈동자 수직선 위, 눈썹 위로 1寸(앞머리칼 경계와 눈썹 사이의 3寸의 1/3)

15.두임읍(頭臨位)
눈동자 수직선 위, 앞머리칼 경계에서 0.5寸위, 신정과 두유 사이의 2/3 지점)

16.목창(目窓)
두임읍 뒤로 1寸(신회 수평선과 눈동자 수직선이 만나는곳에서 0.5촌 앞)

17.정영(正營)
목창 뒤로 1.5寸(전정 수평선과 눈동자 수직선이 만나는곳에서 0.5寸 앞)

18.승령(承靈)
정영 뒤로 1.5寸(백회 수평선과 눈동자 수직선이 만나는곳에서 0.5寸 앞)

19.뇌공(腦空)
뇌호 수평선과 눈동자 수직선을 이은 선이 만나는 곳, 풍지 위로 1.5寸

20.풍지(風池)
풍부 수평선 위, 뒷머리뼈 밑, 유양돌기 뒷 기슭과 승모근 바깥쪽사이의 오목한곳

21.견정(肩井)
유두 수직선 위, 7번 목등뼈 아래 대추와 어깨마루 끝을 이은 선의 중간점

22.연액(淵液)
겨드랑이 속 중앙(극천) 수직선 아래로 3寸, 제 4늑골 아래, 유두 바깥쪽 4寸

23.첩근(輒筋)
연액 앞으로 1寸, 제 4늑골 아래, 유두 바깥쪽 3寸

24.일월(日月)
거궐(중완 위로 2寸) 양 옆 3.5寸의 기문(제 6늑골)아래, 제 7늑골 아래

25.경문(京門)
제 12늑골 앞쪽 끝 아래

26.대맥(帶脈)
제 11늑골 앞쪽 끝 수직선과 배꼽 수평선이 만나는 곳

27.오추(五樞)
관원 수평선 양옆 7寸, 장골능의 뼈 안쪽 밑

28.유도(維道)
오추 안쪽 아래로 0.5寸, 앞장골가시 안쪽 밑

29.거료(居店) 
앞장골가시와 넓적다리뼈 대전자 높은 끝 사이의 중간 오목한 곳

30.환도(環跳)
넓적다리뼈 대전자 뒤 위쪽 오목한곳, 대전자와 선골 밑을 이은 선의 1/3

31.풍시(風市)
바르게 서서 팔을 내려 가운데 손가락 끝이 닿는 곳,

넓적다리벼 뒷기슭 두 힘살의 사이, 무릎뼈 윗 기슭에서 위로 7寸

32.중독(中瀆)
앞장골가시와 오금 가로 금 사이(2寸)의 1/3, 넓적다리뼈 뒷 기슭 두 힘살의 사이, 풍시아래로 2寸, 무릎뼈 윗 기슭에서 5寸,오금위로 7寸

33.슬양관(膝陽關) 
넓적다리뼈 바깥쪽 도드라진 부분의 위쪽으로 뼈 밑 오목한곳,
넓적다리 두머리힘줄의 안쪽

34.양릉천(陽陵泉)
가는 정강이뼈머리 아래쪽의 바로 앞 오목한 곳

35.양교(陽交)
발 바깥 복사뼈 위로 7寸,가는 정강이뼈 뒷 기슭

36.외구(外丘) 
양교 앞쪽 0.3寸, 가는 정강이뼈 앞 기슭

37.광명(光明) 
발 바깥 복사뼈 위로 5寸, 가는 정강이뼈 앞 기슭

38.양보(陽輔)
발 바깥 복사뼈 위로 4寸, 가는 정강이뼈 앞 기슭

39.현종(縣鐘)
발 바깥 복사뼈 위로 3寸, 가는 정강이뼈 앞 기슭, 삼음교와 내외 상대,
발 바깥 복사뼈의 뒤 기슭을 타고 오르면 뼈가 끝난듯 힘살이 나타나는곳

40.구허(丘墟) 
발 바깥 복사뼈 앞 아래쪽 오목한 곳
발 바깥 복사뼈 앞 기슭 수직선과 발목 가로 금이 만나는 부분의 오목한곳

41.족임읍(足臨立) 
넷째와 다섯째 발몸뼈가 갈라진 사이

42.지오회(地五會)
넷째발가락 본절 뒤 오목한곳, 넷째와 다섯째발가락 사이

43.협계(俠谿) 
넷째발가락 본절 앞 오목한곳, 넷째와 다섯째발가락이 갈라진곳

44.족규음(足竅陰)
넷째발가락 발톱뿌리 바깥 모서리 0.1寸

 
접골사와 침구사

보건신문 허정
입력 2019.11.18

예전에는 의사도 구분이 있어서 의사 외에 한지의사, 검정의사, 의생이 있었다. 병원에 가고 의사의 진료를 받는 것이 쉽지만은 않아서 유사의료업자들의 도움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우스갯소리로 도립병원에 가거나 의사의 진료를 받고 죽으면 복이 많다고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경찰관은 대개 검도나 유도를 잘 했다. 경찰서에는 무도관이라는 수련장이 반드시 있었고 경찰서 앞에는 접골시술소도 있었다. 유도는 거친 운동이기 때문에 뼈가 어긋나거나 탈구되고 부러지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종합병원 외과에서 치료받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원 대신 손쉽게 접골시술소에서 치료를 받았다.

나도 어렸을 때 발이 삐어 접골시술소에서 치료받은 기억이 있다. 한의사 제도도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약도 지어 먹고 침도 자주 맞았다. 면허제도가 있었지만 용하다는 침구사를 수소문해 찾아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은 세상이 바뀌어서 의사와 한의사로 통일되고 침구사는 더 이상 양성되지 않는다. 허리가 아프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중국에서 들어왔다는 추나요법이 유행하고 있지만 그것이 옛날 접골시술소의 역할을 온전하게 다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미국 같은 선진국에도 의료의 접근 문호가 의사와 병원으로 통일돼 있지는 않다. 근래 인기를 끌고 있는 침구사들도 있고 물리치료를 담당하는 물리치료소가 병원 밖에 있어서 가볍게 치료를 받는 것을 보았다. 일본도 지금까지 접골 시술사가 버젓이 인기를 끌고 있다.

우리나라의 의료에 대한 접근 문호는 너무 단순화 돼있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침구사 제도는 부활되는 것이 좋고 일본의 접골사와 미국의 물리치료실을 보완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유사의료기관이 제도화됐으면 좋겠다.

의료는 획일적으로 단순화시킬 필요는 없다. 특히 유태우 박사가 보급하고 있는 수지침도 진료권에서 수용하고 접골사나 물리치료실 같은 것도 생겨나기를 바란다.

옛날에는 秘方도 많았다.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비법이 많았고 그 도움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아직 명맥을 잇고 있는 죽염 같은 것도 좀 더 과학적인 효능을 밝혀내고 도움이 된다면 활발히 이용했으면 좋겠다.

옛말에도 溫故而知新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접골사나 침구사 그리고 미국의 물리치료실을 한번 되돌아보길 바란다. 노인 인구가 늘어나는데 의사와 의료기관으로 단순화시킨 의료접근 문호는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이라도 손을 좀 봤으면 한다. 나이 먹은 사람의 의견이다.


허정 교수의 보건학 60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전 보건대학원장)
12. 수소양삼초경(手少陽三焦經) 

23.사죽공(絲竹空)
눈썹바깥쪽 끝 홈지고 오목한곳

22.화료(和店)
귀구슬 앞 위쪽, 광대뼈의 활모양 윗 기슭 끝 동맥이 뛰는곳,귀섶머리칼 뒷 가장자리

21.이문(耳門) 
귀구슬 윗부분 앞, 입을 버ㄹ리면 홈이 지는곳,
귀구슬 윗부분 앞은 이문, 귀구슬 중앙 앞은 청궁, 귀구슬 아랫부분 앞은 청회

20.각손(角孫)
귓바퀴를 앞으로 접어 귀바퀴 위 끝이 옆머리에 닿는곳

19.노식(臑息)
예풍과 각손을 활모양으로 연결하여 3등분
귀를 뒤로 붙여 귀테가 닿는 부위에서 뼈의 오목한곳

18.계맥(瘈脈)

17.예풍(翳風)
귀방울 끝 아래턱뼈와 유양돌기 끝 사이의 중간에 오목한곳

16.천유(天牖)
아래턱뼈 모서리의 수평선 위, 흉쇄유돌근의 뒤쪽 가장자리 밑

15.천료(天店) 
(제7경추 아래 대추와 어깨마루 끝을 잇는 선위의 중간점)견정과
(어깨뼈 안쪽 윗모서리의 수평선 위, 흉쇄유돌근의 뒤쪽 가장자리 밑

14.견료(肩店) 
팔을 수평으로 들어 어깨 위에 나타나는 두 오목한 곳)곡원을 잇는 선 위의 중간

13.노회(娼會)
팔꿈치 끝 위로 7寸 팔꿈치 끝과
견료사이는 10寸
겨드랑이 뒤 가로 금 끝의 수평선 높이에서 삼각근 뒤 기슭 오목한곳

12.소락(消濼)
팔꿈치 끝 위로 5寸
팔을 안으로 돌리면 홈이지는곳

11.청냉연(淸冷淵) 
팔꿈치 끝 위로 2寸
천정 위로 1寸

10.천정(天井)
팔꿈치 끝 위로 1寸, 두 힘살 사이 오목한곳

9.사독(四瀆)
팔꿈치 끝 위로 5寸
두 개의 아래팔뼈 사이 오목한 곳, 양지와 팔꿈치 끝 사이는12寸

8.삼양락(三陽絡)
양지 위로 4寸, 양지와 팔꿈치 끝 사이의 1/3지점

7.회종(會宗)
양지 위로 3寸, 척골 안쪽 기슭

6.지구(支垣)
양지 위로 3寸, 요골 바깥쪽 가장자리 끝

5.외관(外關)
양지 위로 2寸, 내관과 내외상대

4.양지(陽池)
손목 관절의 손등쪽, 요골머리 바깥쪽 모서리 밑 오목한곳
새끼손가락펴기 힘줄과 다fms 손가락 펴기 힘줄의 사이

3.중저(中渚) 
넷째손가락과 다섯째손가락 사이 본절 뒤 오목한곳

2.액문(液門)
넷째손가락과 다섯째손가락 사이 본절 앞 오목한곳

1.관충(關衝)
넷째손가락 손톱뿌리 바깥쪽 모서리 뒤쪽 0.1寸

 
11. 수궐음심포경(手厥陰心包經) 


1.천지(天池)
유두 바깥쪽 1寸, 제 4늑골 아래

2.천천(天泉) 
겨드랑이 앞 가로 금 아래 2寸(겨드랑이 앞 가로 금과 곡택사이는 9寸)
윗팔 두머리힘살의 두 힘살 사이 오목한곳

3.곡택(曲澤)
팔꿈치의 윗팔 두머리 힘줄 안쪽, 팔꿈치 가로 금위(바깥쪽은 척택)

4.郄門(극문)
손뿌리굽힘살과 긴손바닥힘살 사이 대릉위로 5寸
곡택과 대릉사이는 12寸

5.간사(間使)
손뿌리굽힘살과 긴손바닥힘살 사이 대릉위로 3寸

6.내관(內關) 
손뿌리굽힘살과 긴손바닥힘살 사이 대릉위로 2寸

7.대릉(大陵) 
손목 손바닥쪽 가로 금 위, 손뿌리굽힘살과 긴손바닥힘살 사이

8.노궁(勞宮)
둘째 손몸뼈와 셋째 손몸뼈 사이, 셋째 손가락이 손바닥에 닿는 부위

9.중충(中衝)
셋째손가락 손톱뿌리 안쪽 모서리 뒤 0.1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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