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침구사 제도 역사와 현황

2. 침구사제도의 형성

한국의 역사에서 조선시대(1392~1910)에는 의료 시술자(medical practioners)들에게 공식적인 자격을 인증하거나 면허를 부여하는 제도적 장치가 없었다. 물론 당시에도 전통의학을 시술하는 한의사들이 존재했지만 이들에 대한 자격기준같은 것은 없었고 다양한 수준의 시술자들이 병존하였다. 조선 왕국의 말기에(1900년) 서양식 근대국가가 만들어지면서 의사, 약제사 같은 직종에 대한 자격기준이 만들어졌고 면허증이 발급되기 시작하였다. 이때 침술은 별도의 직종으로 독립되지는 않았고 서양의학을 전공한 의사나 동양의학을 시술하는 한의사 모두 '의사'라는 직종으로 통합되어 면허가 발급되었다.

그런데 조선이 1910년에 일본이 식민지가 되면서 의료제도도 일본식 제도가 도입되는 변화를 겪게 된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 한방의 제도를 완전 폐지하고 서양의학을 전공한 의사를 중심으로 하는 의료제도가 만들어졌다. 원래 한의학은 첩약과 침술의 2가지 치료법을 갖고 있었는데 일본에서는 17세기 이후 맹인들이 침술에 종사하기 시작하면서 한방의들은 침술을 하지 않게 되었고(Lock, 1980: 53~61), 한방은 곧 첩약만을 의미하게 되었다(흑전호일랑, 1985). 메이지 유신 당시 한방의 제도는 폐지되었지만 침술은 맹인들의 복지를 위하여 존치시켰다(구산효일, 1932: 441). 조선이 식민지화 되면서 침구사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렇지만 일본과는 달리 전통 한방의를 의생이라는 이름으로 존속시켰다. 이것은 일제초기에 자격을 갖춘 의사가 수백 명밖에 되지 않는 현실에서 의료공급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전통 한방의를 존치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수천 명에 달하는 조선인(전통 한방의)들을 실직상태에서 구제하는 '은혜를 베품'과 동시에 향후 수십 년에 걸쳐 자연도태 되도록 하였다(백석보성, 1918: 52). 즉 의생제도는 점정적으로 허용되는 제도이다. 서양식 의과대학에 대한 신규면허의 발급도 매우 제한하였기 때문에 의생의 수가 계속적으로 감소하였고 한의학의 학문적 연구나 교육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

반면 침구사들의 수는 계속적으로 증가하였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1933, 1939판)에 따르면 의생제도가 실시된 1914년에 5,800여명이 의생 자격을 취득하였다. 이후 의생의 수는 계속 감소하여 1939년에 3,600명 수준이 되었다. 반면 침구사는 1938년 당시 침구사 882명, 구사 668명이었는데 양쪽 면허를 모두 가진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침구사의 수는 약 1,000명 내외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의생과 달리 침구사의 경우에는 일본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조신인 침구사는 수백 명에 불과했다.

의생과 침구사가 병존하게 되면서 이들 간에 업무영역의 중첩이 불가피하게 발생하였다. 의생은 전통 한방의 역활을 그대로 이어받을 것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초근목피'로 첩약을 조제하는 일 이외에도 침과 뜸을 사용하였는데 제한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침구사 제도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침 시술권자의 이원화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일제시대에 의생과 침구사간에 업무영역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발생하지 않았다. 의생이나 침구사 모두 공식 의료체계의 핵심인력이 아니었으며 의료체계의 주변부에 머무르는 직종이었다.

이들에게는 근대적 직업집단에 필수적인 학력이 요구되지도 않았다. 다만 관련 의업에 종사했거나 기성 자격자에게서 의술을 배운 경력만 인정되면 자격이 부여되었다. 따라서 공식부문에서 요구되는 학력과 독점적 면허제도와 무면허자에 대한 염격한 정부의 규제가 이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 간에 직업적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은 낮다. 또한 의생들은 새로 배출되는 의사들에게 밀려나 지방이나 농촌에서 직업 활동을 하게 된 반면 침구사들은 의사와 마찬가지로 도시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던 점도 이들간에 갈등이 빚어지지 않게 만든 요인이었다. 더욱이 침구사 제도가 공인되는 새로운 상황에서 의생들은 침구보다는 첩약의 조제판매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의생 이외에도 약종상이라는 직종이 있었다. 원래 의생은 진단하고 처방하는 시술자였고 약종상은 기성 처방집에 수록된 대중적인 한방약을 판매하는 직종이었다. 의생과 약종상은 의료체계의 주변부에 있는 직업군이었고 이들의 직업활동에 대한 정부의 규제도 엄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생과 약종상은 실제 업무수행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게 되었다. 이들은 첩약조제판매에 주로 종사하였고 필요할 때 침구시술도 하였지만 이들의 주수입원은 첩약판매로부터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의생과 약종상은 법적 자격은 의사와 달리 독점적 면허의 개념이 아니라 한방업무에 종사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자격증을 매우 제한적으로 발급하였기 때문에 자격취득 기회의 편의에 따라 의생 또는 약종상의 자격을 취득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두 집단 간에는 상당한 동질성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이들과 침구사는 그 생성배경이 다르고 활동 지역이 달랐기 때문에 이질성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으로 한의사 가계를 유지하여 왔던 집안 출신의 한 한의사의 회고에 의하면

"왜정시대에 침구사라는 것이 별로 없었다. 서울이나 부산 같은 큰 도시에나 이었지 지방에는 모두 약종상만 있었다. 약종상들이 약은 물론 침과 뜸을 다했다. 침뜸은 재료가 안 드는 것이기 때문에 별도로 돈을 받지 않았다. 그러면 환자들이 나중에 담배 같은 것을 갖다 주었다."

의생과 약종상은 때로 침구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이들은 첩약조제판매에 치중하게 되고 침구사는 침만을 전문으로 하는 식으로 업무의 영역이 분화되었다. 그런데 침구와 달리 첩약조제는 원료비가 많이 소용되었기 때문에 치료비가 상대적으로 비쌀 수 밖에 없었고 이를 전문적으로 하는 의생과 약종상들은 보다 많은 자원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생과 약종상은 침구사보다 상대적으로 집단 규모도 켰고 자원통제력도 우월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대한민국 건국 이후 한의사제도가 성립되고 침구사제고다 폐지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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