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침구사제도의 역사와 현황

3. 침구사제도의 폐지

1) 한의사제도의 성립
2) 한의학의 제도화
3) 침구사제도의 폐지

일제시대의 의료제도는 의사를 중심으로 하는 서양식 의료제도의 기본틀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 주변부에 의생이나 침구사와 같은 동양의학의 전통적 요소를 남겨두고 있었다. 1945년에 일제 식민지배가 종식되고 미 군정을 거쳐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의료제도도 새로운 틀을 갖추게 되었다. 새 의료제도가 의사를 중심으로 하는 서양식 의료제도를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동양의학 부분에서는 큰 변화가 있었다. 주변부에 밀려나 있던 의생이 '한의사'라는 지위로 격상되었고, 반면 침구사 제도는 폐지되었다. 한의사는 정규대학 과정을 이수한 학력자에게 면허를 주었기 때문에 의사에 버금가는 법적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은 이웃 일본의 경우와는 크게 대비된다. 일본에서는 2차 대전 이후에도 의료제도에 큰 변화가 없었다. 기존 공식부문은 의사를 중심으로 하는 의료제도가 유지되었고 침구사나 안마사 제도 역시 유지되었지만 계속 주변부에 남아 있었다. 이러한 비교를 통하여 대한민국 건국 이후 의료제도에서 동양의학 부문의 변화가 컸던 원인은 '정치세력의 교체'에 따른 효과일 것으로 추측된다.

1) 한의사제도의 성립

1951년에 국민의료법이 제정되면서 한의사제도가 만들어졌다. 한의사제도가 성립되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이미 큰 세력으로 성장한 의사들은 한의사제도를 법적으로 인정하는데 강력히 반대하였다. 의사들의 주장은 한의학이 비과학적이기 때문에 제도화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의사제도를 인정하는 법은 세계적으로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고까지 발언하였다. 정부도 의사들의 의견에 동조하여 처음에는 한의사제도를 완전히 배제한 의사 중심의 의료법안을 제출하였으나 다수 국회원들의 반대로 입법되지 못하였다. 한의사제도를 인정하는 새로운 법안이 만들어져 국회를 통과할 수 있었다. 당시 국회의원의 다수는 일제에 의하여 탄압받던 민족의학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동조하였다.

보건위생 담론의 측면에서 생각할 때 1951년은 사회경제적 조건이나 보건위생의 상태가 일제시기오아 질적인 차이를 보여주지 않는다. 6.25를 겪으면서 국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지고 일본인 의사들의 귀환으로 의사는 부족하여 의료체계의 정상적인 가동이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이전 시기의 위생담론은 여전히 유효하였으며 항생제 등의 발명으로 서양의학의 성가는 계속 높아가던 시기였다. 한의학의 담론이 어떤 질적 변화를 하거나 한의학의 사회적 역활이 확대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의사제도가 성립한 것은 일제통치가 종식된 직후 식민지를 경험한 신생 독립국가로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른 요인은 국가적 차원에서 보건의료 정책을 계획하고 집행할 보건행정권력이 일시적으로 공백상태에 있거나 매우 취약했던 점이 작용하였다. 일제하에서는 식민통치의 기간조직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경찰에서 보건행정업무를 담당했었다. 그러나 미군정을 거치면서 보건행정은 미국식으로 바뀌면서 별도의 독립부서(보건부)로 이관되었다. 미국식으로 보면 보건행정을 전문화시키는 것이었지만 당시 한국의 실정에서는 보건행정의 전문가가 거의 없었고 정책을 실행할 수 있는 하부조직도 없었으며, 사회보장이나 복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치이념을 갖춘 정부도 아니었기 때문에 보건부의 정책역량은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임상 의사들이 보건부서 장관직을 맡았으나 이들은 민주주의에 압도 되었던 당시의 국회의원들을 설득할 만한 역략을 갖고 있지 못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다 의료인력의 절대적인 부족은 한의사제도의 존속 내지 승격에 유리한 조건을 형성하였다. 또한 당시에 한의사들이 상당한 인적, 물적 자원을 기반으로 국회의원들에 대한 로비를 성공적으로 진행시켰다. 당시 상황을 한의사협회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국회 사회보건위원회에 한의사제도의 입법을 위한 증언을 신청하였으나 이같은 시도는 한의학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지니고 있던 양의출신 국회워원들의 반대에 의해 빈번히 무산되고 말았다. ... 한의계 중신인사들이 적극적으로 국회의원들과 교섭을 벌였다. ... 서울에 거주할 때부터 닦아놓은 정치적 기반과 재정적 뒷받침으로 마침내 국회증언의 기회가 얻어졌다." (대한한의사협회, 1989)

국회증언 이후 한의사제도는 법안에 포함되어 제출되었고 결국 통과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한의사들은 의생이라는 격하된 지위에서 벗어나 법적으로 의사와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고 곧바로 한의과대학도 만들어지면서 대학 학력을 가진 한의사가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2) 한의학의 제도화

국민의료법이 제정된 이후 한의학의 제도화가 시작된다. 한편으로는 한의과대학을 설립하고 후진을 양성하며 한의학을 체계화하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법제에 따라 기존의 의생들에게 한의사 시험을 치르고 면허를 부여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국민의료법 통과에 따라 국가는 1952년에 4년제 정규대학인 서울한의대학 설립을 인가하였고 이 학교는 1955년에 동양의약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당시는 한의과대학이라는 명칭이 갖는 사회적 위상이 지금과 달라 일제시대의 낙후된 한방의 이미지를 연상시켰기 때문에 동양의학이란 명칭을 생각하였고, 약학과 설치를 염두에 두게 되면서 동양의약대학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대한한의사협회, 1989). 이 학교는 한의학 이외에 해부학이나 생리학 같은 기초의학 강의를 실시함으로써 보다 현대화된 한방의학의 이미지를 만들려는 노력을 시도하였고 이러한 교과과정은 이후 한의학 교육의 전형으로 자리잡게 된다.

한의학 제도화의 다른 측면은 한의사의 자격을 인증하고 성원을 구성하는 일이었다. 국민의료법은 한의사의 자격으로 한의대 졸업자나 검정시험을 합격하여 동등한 학력을 인정받은 자에게 한의사 자격시험을 거쳐 면허를 부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당시 의생의 경우 영구면허를 가진 자는 곧바로 한의사 면허를 인정받았지만 한지의생 면허를 가진자는 검정시험을 치른 후 다시 자격시험을 보아야 면허를 얻을 수 있었다. 일제의 정책에 의하여 의생규칙이 반포된 최초 1회를 제외하고는 이후로 계속 한지의생 면허증만을 주었기 때문에 노령의 일부 의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의생들이 한지의생이었고 심지어 한의대 교수나 자격시험 위원 중에도 한지의생으로 한의사 면허를 갖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대한한의사협회, 1989). 따라서 이들은 한지의생을 의생과 동일하게 인정해달라는 청원을 국회에 제출하였으나 국회에서는 의사자격을 인정하기 어려운 한지의사들과의 형평성을 이유로 이러한 청원은 거부되었다. 따라서 한지한의사의 일부는 검정시험을 거쳐 한의사 자격을 획득하였으나 다수는 한지한의사로 남게 되었다.

초기 한의사를 형성했던 또 다른 집단은 한약종상이다. 통계를 보면 1950년대 초에는 한의사 수의 2~3배에 달하는 한약종상이 존재했다. 그런데 한의사 검정시험 규정에 의하면 의생은 물론 10년 이상 한약판매 업무에 종사한 한약종상들에게도 시험자격을 부여하였다. 한약종상은 의료인력의 부족 때문에 정규 의료인이 없는 지역에서 약품판매업을 할수 있도록 자격을 부여한 직종으로 진맥이나 침구시술 등 진료행위는 할 수 없고 처방집에 따른 한약의 판매만을 하는 직종으로 '한약방'을 운영하던 직종이다. 이들은 한약재 유통에도 관계하였기 때문에 일부 '성공한' 한약종상은 상당한 경제적 자산을 형성하고 있었고 한의계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적지 않았다. 한의사 국가고시를 볼 수 있는 자격부여 검정고시에 매년 수십 명의 합격자가 배출되었던 점을 생각할 때 적어도 검정고시가 시행되었던 63년까지 수백 명의 한약종상이 한의사 자격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표1]에 의하면 1953년에서 1962년까지 매년 약 150명의 신규 한의사가 등록되었다. 1954년 당시 유일한 한의학 교육기관이었던 4년제 서울한의대 재학생이 280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신규 한의사의 절반 이상이 한지의생이나 약종상 출신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같은 동양의학 계열의 시술자였던 침구사에게는 한의사 자격 검정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나 기회를 부여하지 않았던 점이다. 이것은 초기 한의사 형성과정에서 의생과 한약종상은 집단의 정체성을 같이 하였으나 침구사와는 사회적 거리를 멀리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이들 세집단은 모두 정규적인 학력을 갖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지식수준'의 차이가 이들의 집단정체성을 가르는 기준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지식수준의 차이가 있더라도 시험을 통하여 '유자격자'를 가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1950년대 동양의약대학의 교과과정을 보면 침구학 전임교수와 침구강좌가 있었다(정우열, 1999). 따라서 당시의 한의사들이 침구를 한의학의 한 부분으로 생각했던 것은 분명해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한의사의 형성과정에서 침구사들을 제외했던 것은 두 집단의 세력화 정도의 차이가 크고 집단정체성이 달랐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한의사 형성과정에서 침구사를 배제한 결과 이후 침구사들과의 갈등이 조성되었다.

3) 침구사제도의 폐지

국민의료법은 침구사제도에 대해서는 별다른 논의 없이 그대로 존속시켰다. 또한 침구사 제도 운영에 관한 사항을 관련 행정부령으로 정하도록 함으로써 일제시절의 법체계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관련 부령을 제정하지 않았고, 특시 신규 자격증 발급을 위한 시험을 실시하지 않았다. 당시 의료계에서 의학이 발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의료유사업을 존속시킬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했던 사실을 생각할 때 의료계의 절대적 영향 아래 있었던 정부의 보건행정 부서가 행정부에 위임된 침구사 부령 재정을 회피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침구사제도는 법적으로 존속되었지만 침구영역이 누구에게 귀속되는가 하는 점은 상당히 모호해질 수 밖에 없었다. 1950년대에 침구는 한의사의 독점 영역이 아니었다. 국민의료법 임법과정에서 한의사들은 침구사제도 존속에 대하여 별다른 의견제시가 없었다. 또한 1962년까지 실시되었던 한의사 자격 검정시험 과목은 첩약제조 관련 과목으로 구성되었을 뿐 침구관련 과목이 포함되지 않았다. 의료법이 개정되기 이전인 1961년 대법원은 "침구사 자격증을 소지하지 않은 한의사가 침술이나 구술을 실시할 수 있다는 법적인 근거는 없다"고 판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침구가 한의학의 한 부분이기는 하여도 한의사들의 독점영역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정부가 침구사 신규배출 기회를 만들지 않음으로써 침구영역에 대한 실질적 관할권은 모호할 수밖에 없었다.

1960년에 이승만 정부가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에 의하여 몰락하고 새로 장면 정부가 수립되면서 상황이 변화하였다. '민의의 표출'이 자유로워지면서 다양한 조직과 단체들의 민원이 제기되었는데 침구를 배웠던 맹인학교 학생과 침구학원 졸업생들이 침구사 부령제정을 강령하게 요구하였다(이우관, 1973:34). 맹인들이 생업으로 안마와 침구를 배웠으나 법적 자격을 얻지 못하게 되자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던 것이다. 그 결과 1960년 12월에 침구 등 의료유사업자에 대한 부령이 재정되었지만 곧이어 1961년 5.16 쿠데타로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침구사 자격시험은 실시되지 못하였다. 더욱이 1962년에 의료법이 개정되면서 침구사제도는 기존 정규 침구사의 기득권만 인정하고 폐지되었다. 더욱이 개정 의료법은 침구사제도를 폐지하면서 침구를 한의사가 관장한다는 등의 제도폐지에 따른 경과규정을 마련하지도 않음으로써 이후 집단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조국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통하여 정권의 정당성을 확립하려 하였다. 의료부문에서도 역시 '근대화'를 지향하면서 여러가지 개혁조치가 이루어졌다. 한편으로는 의료인에 대한 국가고시제도를 도입하여 의료인력의 질적 향상을 기하고 물리치료사 등 의료보조인력 제도를 도입하고 간호사에 대한 교육을 대학수준으로 높이는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의료 근대화의 다른 측면은 '전통의 잔재'를 없애는 것이었다. '전통'은 곧 '낙후와 빈곤'의 원인처럼 간주되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전통의 탈피가 강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의사와 침구사, 안마사 같은 동양의학의 전통은 비과학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1962년에 국민의료법을 의료법으로 개정하면서 이를 일거에 없애려고 시도하였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한의사들의 강력한 반발이 제기되면서 결국에는 한의과대학을 4년제에서 6년제로 교육연한을 연장하여 그 실력수준을 높이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반면 침구사 제도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 과정도 세심한 검토를 거쳐 결정되기보다는 비과학적 의료행위를 근절하는 식으로 무조건 폐지해 버렸다. 이후 의료유사없자들이 담당하던 접골은 정형외과 의사들이, 침구는 한의사들이, 마사지는 물리치료사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다만 맹인들의 생업을 위한다는 목적에서 안마만이 제도적으로 살아남았다.

조직력이 약했던 침구계는 군사정부의 조치에 제대로 반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군사정부가 종식되고 민정으로 복귀하면서 몇몇 침구계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침구사제도 부활운동이 조직되었다. 이 운동의 주체는 침구사 자격시험을 준비해오던 침구학원 졸업생들과 맹인학교 졸업생들이었다. 1950년대에는 법적으로 침구사제도가 존속하였고, 침구사 신규 자격시험 실시를 예상하면서 여러 침구학원들이 설립되어 수천 명의 이수자를 배출하였다. 대한침구학원 동창회가 1964년에 결성되었고 이후 몇몇 침구학원동창회가 이어서 결성되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국회의원들에 대한 로비를 통하여 입법청원이 이루어졌다. 정규 침구사들의 단체인 대한침구사회는 조직역량이 미비하여 조직차원의 지원은 없었고 몇몇 침구사들이 개인적으로 도움을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의 입법청원은 큰 효과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맹인학교 학생들이 침구사 제도 부활을 요구하면서 조직적인 거리 시위를 전개하자 여론이 반전되었고 국회도 이 문제에 관심을 보이면서 보건사회위원회와 법사위원회를 통과하여 1966년 1월에 본회의에 회부되었다.

침구사제도가 국회 통과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 전개되자 의사회와 한의사회는 합심하여 저지에 나섰다. 소위 '2대 악법'에 대한 저지 투쟁이다. 정부는 의사들의 기피로 보건소장을 의사로서 보임하기 어렵게 되자 의사가 아닌 약사 등 타 직종도 보건소정에 임명할수 있도록 보건소법을 개정하여 하였고, 국회는 침구사제도를 추진하여 66년 1월에 두 법안이 국회 보건사회위원회를 통과하였다. 의사회는 법안이 보건사회위원회를 통과하자 위기를 느끼고 국회 통과 다음날 '보건관계법안특별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고 각 지부별로도 집회를 가졌다. 일부 의사들은 두 법안을 반대하면서 국회의사당까지 시위를 하기도 하였고 의사 4천명의 서명이 담긴 연판장을 첨부하여 대통령과 국회의장에게 제출하였다. 일부 의사들은 하루 동안 휴진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사들의 집단 행동은 유례가 없던 일로 정부나 국회에 상당한 압력을 가하게 되었고 국회는 결국 두 법안을 폐기하는 것으로 종격지었다.

침구사 문제를 두고 찬반 양진영의 세력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기울어져 있었다. 반대진영의 선두에는 의사회가 있었고, 한의사회가 그 다음으로 참여했으며, 치과의사회와 약사회도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병원협회와 보선소장, 의과대학학장협의회와 의학회 등 의료계와 한의계의 각종 단체가 모두 반대운동에 참가하였다. 집권당인 공화당 역시 반대 입장에 서 있었다. 반면 찬성진영은 침구학원동창회연합회가 주도하였고, 여기에 맹학교 학생들과 안마사회에서 참여하였다. 이들은 모두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이들간의 사회적 지위나 조직의 규모 및 대외적 교섭력 등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임이 분명하다. 정규 침구사들이 이들의 노력을 외면하거나 방해하는 일까지 있었다.

침구사제도 부활에 대하여 양측은 뚜렷하게 대비되는 논리를 갖고 있었다. 논쟁의 핵심은 의료의 전문활를 통하여 우수한 전문 인력을 양성할 것인가 아니면 의료시술자의 질적 수준을 낮춰서라도 시급한 의료인력의 부족을 해결할 것인가의 여부가 대립되었다. 이와 함께 침구(안마, 접골)이 전근대적인 비과학적 요법인가 아니면 과학적 근거를 가진 치료법인가를 두고 논란을 빚었다.

당시 정부의 견해는 1962년 의료법 개정으로 침구사제도가 폐지되었고 침구는 한의사의 영역으로 호함되었기 때문에 별도로 침구사제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침구가 비과학적이라는 점에 대해서 찬성론자들은 선진국에서 침구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를 하여 효능을 밝혀내고 있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당시는 이미 국제침구학회가 존직되어 매년 학술대회를 열고 있을 정도로 국제적으로는 의료계를 중심으로 침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지만 국내 의료계는 침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이것을 비과학적인 전통의 잔재로 보는 견해가 강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의사들은 이미 정규대학과과정에서 한의사들이 배출되고 있는 상황에서 체계적 교육을 결여한 침구사를 인정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의료계와 한의계는 공통적으로 당시 침구사들이 가졌던 공식교육의 부재와 기술능력의 취약성을 지적하고 있다. 의사들은 여기에 침구가 그 자체로 비과학적이라는 가치판단까지 첨가하고 있다. 당시 치구사들이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최초의 관인침구학원 대한침구학원이 1957년에 인가되었는데 이 학원은 6개월 이론과정과 6개월 전문과정으로 1년의 교과과정을 마련하고 있었으나 수강생들은 경제난으로 전과정을 이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또한 수강생들의 학력수준도 국민학교나 중학교 졸업 등 낮은 편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정교교육 이외에 독학, 개인교습, 비정기적인 관련단체 학술강좌 등을 통하여 침술을 익힌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문제를 두고 찬성측에서는 의료인력이 전반적으로 부족하고 특히 농촌에서는 의료인력이 전무한 상황에서 의사나 한의사 등 고급인력의 배출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침구사처럼 단기간에 보다 많은 인력을 배출해서 의료공급을 원활히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결국 침구사 문제는 의료제도 구성에서 과학화 전문화를 지향하면서 소수 엘리트에 의한 의학발전을 도마할 것인지 아니면 계층간 형평성 해소를 지향하면서 가용자원을 최대한 활용할 것인지의 문제로 집약된다. 여기서 정부는 전자를 지향하였다. 정부는 한걸음 더 나아가 1969년에 '보건범죄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재정하여 불량식품과 부정의약품은 몰론 부정의료업자에 대하여 2년 이상 무기징역까지 내릴 수 있도록 강력한 처벌위주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70년대 이후 침구사 등 불법적인 진료는 사라지게 되었다. 반면 국민들의 경제사정이 향상되는 80년대까지 다수의 국민들은 의료를 이용하기 어려운 의료소외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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