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침과 뜸으로 勝負(승부)한다
머리말
1. 침뜸을 모르면 不運이다
아이들이 장난치고 노는 모습을 보면 그 집안의 來歷(내력)을 大綱 짐작할 수 있다더니, 우리집 孫子들은 장난을 쳐도 침대롱 따위를 가지고 鍼 놓는 놀이를 한다. 나도 어렸을 적에 의원을 하시던 부친 곁에서 의원 흉내를 내며 놀았던 것을 생각하면 집안 내력은 어쩔 수가 없는가 보다.
가까우면 자연히 그 쪽으로 기우는 법인지 나의 형님도 의원을 하셨고 그의 자식도 나의 자식도 鍼을 배웠다. 지금 침구사는 살아있어도 침구사 養成(양성) 제도는 없어진 상태라 우리 자식들의 10년, 20년 공부는 도로아미타불이 될 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그들에게 病을 고치는 術者로 나서든 나서지 않든 침뜸술은 알아는 뒤야 한다고 當付(당부)한다.
왜냐하면 침과 뜸은 최고의 의술이라는 신념이 내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의술자로서의 인생을 80년 가까이 살아올 수 있었다는 사실은 바로 침과 뜸이 최고의 의술이라는 사실을 證明(증명)하고 있다. 내가 침과 뜸으로 펴온 의술이 별로 신통치 않았다면 나는 벌써 침술원 문을 닫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끊이지 않고 아픈 사람들이 나를 찾아온다. 아니, 침뜸의술을 찾아온다. 현대의술도 한방의 탕약술도 포기한 환자들이 한가닥 희망을 걸고 침뜸의술을 찾고 있다. 그런데 지금 침뜸의술을 마음놓고 펼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침구사는 이 나라에 100여명 남짓 살아 남아 있을 뿐이다.
그나마도 거의 연로해서 시술을 직접할 수 있는 침구사는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언뜻 사람들은 한의사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고 할 지 모르나, 엄밀하게 말하면 한의사는 침구사일 수 없다. 침구사는 침과 뜸만으로 벼을 고치지만 한의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한의사는 침과 뜸을 전문으로 시술하는 침구사만큼 침술과 뜸술이 능할 수 없다.
그리고 설사 침구사만큼 침과 뜸을 시술할 수 있는 실력이 있는 한의사가 있다 해도 약으로 처방하는 것보다 휠씬 힘든 품을 팔아야 하고, 그럼에도 의료수가도 싼 침뜸의술을 굳이 선택하려 하지 않는게 당연할 것이다.
오죽하면 조선 시대에도 藥과 鍼灸를 따로 나누어 약만 다루든가 침구만 하게 하는 제도가 있었을까. 약과 침뜸을 함께 다루게 했다면 아마도 편한 약만 취급하게 되니 자연히 침구 의술은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 사라지게 됐을 것이다.
그 유명한 동의보감을 지은 허준은 분명 궁중에서 약을 다루는 '侍醫'였고 궁중에서 침과 뜸으로 다루던 유명한 侍醫로는 '침구경험방'을 지은 허임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옛말에 침은 一字無識이라도 잘 놓을 수 있다고 했다. 누구라도 어떤 병일 때 어느 자리에 침을 놓아 낫는지를 눈여겨 보아 익힌다면 그와 똑 같은 병은 직접 침을 놓아 고칠 수 있다는 이야기이며 그만큼 침과 뜸은 學보다 術이 앞선다는 뜻이 담겨있기도 하다.
물론 침으로 여러가지 병을 고치는 의술자가 되려면 의학적인 지식과 전문적인 기술을 오랫동안 익혀야 하지만 막말로 몸 아무데나 침을 놓아도 뜸을 떠도 효과가 있다고 할 만큼 침과 뜸의 효능이 대단하기에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침과 뜸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불운이다. 병이 낫는 쉬운 길을 놔두고 힘들이며 먼 길을 돌아가니 운이 나쁜 것이다. 어찌됐든 나를 만나 침뜸의 효능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은 運이 좋다고 보아야 한다. (나를 만난 사실이 중요한게 아니라, 침과 뜸을 만난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도 운이 좋다. 침과 뜸의 힘이 얼마나 큰지 제대로 알게 될 것이고 병이 낫는 쉬운 길을 찾을 것이므로.
만약 이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직접 침뜸을 제대로 경험해 보라. 내가 이 책에서 설명한 대로 침하고 뜸 한다면 누구나 약 안 먹게 되고 병원에 안가게 될 것이다.
지금 世界는 동서양의학을 종합하여 의료체계를 갖추는 대안의학이 각광을 받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이미 1976년, 현대의료에 침을 병용하도록 회원국에게 권장하기 시작했다.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라면 지구촌에 있는 좋은 방법은 모두 활용돼야 하지 않는가. 이 세계의 흐름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大勢이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의료법이 있는지 구분이 되지 않는 어처구니 없는 나라에서 살아 온 것은 아닌지 분명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될 시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모두 건강 運이 좋아야 한다. 그러려면 양의사도 한의사도 침을 놓고 뜸을 떠야 한다. 그리고 침뜸을 전문적으로 시술하는 침구사도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누구나 자기치료를 할 수 있을 만큼 救急(구급)이나 應急(응급) 치료를 할 수 있을 만큼의 간단한 침술과 뜸술은 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80년 가까운 임상을 통해 얻은 확신은 침과 뜸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썼다. 누구든 침과 뜸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썼다. 누구든 침과 뜸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내는 내가 쌓아온 모든 것을 다 주고 싶다. 책도 하나의 방법이라면 계속 책으로 담아 내겠다.
나는 침과 뜸으로 병과 승부하며 병 낫는 재미에 살아온 침구사이다. 나의 마지막 승부는 누구나 침과 뜸이 최고의 의학임을 알게 되고 최고의 의술인 침과 뜸의 혜택을 모두가 누리게 되는 날 끝이 날 것이다.
구당(뜸집)에서
김남수
2. <개정판을 내며> 뜸으로 다시 살아 정통침뜸의 맥을 잇는다
'나는 침과 뜸으로 승부한다'를 낸지 어느덧 7년이 흘렀다. 7년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다. 창신동에는 노인, 생활보호대상자,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침뜸 상설봉사실이 생겼고 광주 송원대학 안에도 침뜸 상설봉사실이 문을 열었다. 국회의사당 안에 침뜸 상설 봉사실 문을 열었고 과천 정부종합청사 안에 있는 재정경제부 청사에도 침뜸 상설봉사실이 개설되었다. 어디 그 뿐인가. 침뜸을 아끼는 이들도 늘어났다.
정통침뜸교육원에는 침뜸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가득하고 의사들이 침뜸을 배우고 있으며 여기저기에서 강의를 해 달라고 한다. 인터넷으로 침뜸을 배울 수 있게 했다. 뜸사랑 봉사단원들이 전국 각지에서 연간 5만여명에게 침뜸봉사를 하고 있다.
이렇게 늘 새로운 하루하루를 보내다보니 어떤 때는 내가 생각해도 젊어지는 것 같고 다시 사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젊음과 늙음은 마음속에서 나오고 삶과 죽음은 하나이며 해와 달처럼 늘 뜨고 진다. 23년 전 그날도 그랬다.
견기기 어려운 고통이 가슴을 뻐근하게 조여 왔다. 심장이 불에 달군 부젓가락으로 찌르는 것처럼 아프더니 곧이어 바위로 으깨는 것처럼 숨이 막혀왔다.
'아, 이게 죽는 것인가 보구나. 내가 죽어가고 있나 보구나.'
죽음을 떠올리는 와중에도 등과 가슴이 좁아져 오는 것 같은 통증은 점점 심해졌다. 등과 가슴이 종이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 처럼 느껴지면서 그것이 딱 붙으면 죽을 것 같았다. 그 순간, 그 찰나에 불현듯 어릴 적일이 생각났다. 집안에 잔치가 있던 날 어머니 등에 업혀 떼쓰며 울던 일이 떠오르면서 그간 살아온 기억들이 모두 지나갔다.
죽음이 다가오는 짧은 순간에 살아온 일들이 모두 지나간다고 사실이었다. 수많은 임종을 바라보며 가졌던 의문이 저절로 풀렸다. 임종 순간의 평안함과 괴로움이 거기 있었다. 나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잊고 싶은 기억이 많아 그 죽는 순간이 괴로울 것이고 좋은 일 많이 한 사람은 행복한 기억이 많아 그 찰나에 편안함을 느끼겠구나. 천당과 지옥이 별 것 아니었구나. 삶을 마감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그 찰나가 바로 천당과 지옥이었구나.
힘들게 몸을 뒤척이며 애를 썼지만 점차 거세어지는 통증은 참기 어려웠다. 간신히 일아나 불을 켜고 힘없이 손을 내려다보았다. 완전히 사색이었다. 안되겠구나 싶어 식구들을 깨우고 아들에게 혈자리를 일러주며 침을 놓고 뜸을 뜨게 했다. 식구들은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모두 침구술을 익혀 알고 있었으므로 내가 이르는 혈자리로 병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긴장한 마음을 억누르려는 듯 입을 딱 다물고 뜸을 뜨고 있는 아들 옆에서 아내는 급한 벼이 틀림없으니 당장 응급실에 가자고 서둘렀다. 그러나 나는 아들에게 분명하게 일렀다.
''내가 이른 자리는 하나도 빼지 말고 뜸을 떠라.''
아내가 전화로 앰뷸런스를 부르는 사이, 아들이 뜸을 마쳤다. 침을 유침시켜 놓고 뜸을 뜨는 동안, 가슴을 뻐근하게 하던 통증은 조금씩 가라앉았지만 조여드는 것 같은 답답함은 뜸을 마친 뒤에도 가시지 않았다. 근심스럽게 나를 바라보는 식구들의 얼굴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늘 보던 얼굴들이 새롭게 보이면서 울컥 정이 솟았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며 뭔가 해 놓고 죽어야 하는 것을... 나쁜 짓 한 적은 없지만... 이것도 저것도 아닌 내 인생이 이대로 끝난다면 너무 허무하구나.''
혼자 넋두리하듯 읊조리는 말을 듣던 아들이 덥석 나를 들쳐업더니 뛰기 시작했다. 구급차를 기다리다 못해 직접 나선 것이다. 아들의 등에 업혀서도, 그리고 동네 어귀에서 마주친 그급차에 실려 가면서도 나는 '결국 침 때문에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침구사제도를 부활시키기 위해 힘이 되어 줄만한 사람은 누구나 만나고 다녔던 시절이었다. 약속만큼 배신도 많이 당했던 시간이었다. 가장 큰 좌절의 충격은 예기치 못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이었다. 1979년 10월 30일, 독재의 칼자루를 쥐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과의 단독 면담. 마침내 대통령을 만날 약속을 받아냈지만 10.26사건으로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충격에서 어떻게 속이 멀쩡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190년 10월 12일 그날,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제 5공화국의 천명기 보사부장관이 ''침구사제도를 부활시키겠다''는 발표를 했던 것이었다. 침구사제도를 부활시키겠다고 미친 듯이 돌아다닌 지가 어언 20년 만에 얻은 개가이자 희소식이었다. 기쁨이 지나쳐 가슴이 터질 것 같더니 말 그대로 심장에 무리가 갔던 모양이었다. 그 동안 얻은 심장의 화 기운을 침과 뜸으로 다스리며 지냈는데 너무 기쁜 소식에 일시에 간장이 풀려 심장의 화를 돋구고 말았던 것이다.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는 통증이 더 심해져 정신까지 흐릿해지고 있었다. 의사가 내 몸 여기저기를 짚어보고 왔다갔다하더니 주사를 놓았다. 조금 있으니 속이 확 뒤집히면서 왈칵 구토가 솟았다. '내가 지금 혈압이 낮은데 진통제를 놓았구나' 하면서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뜨자 형님의 얼굴이 보였다. 형님은 3일 만에 깨어난 나를 붙들고 ''네가 먼저 가려고 이러냐''며 엉엉 우셨다. 나는 그 때부터 40일을 산소마스크를 쓰고 지냈고 다시 6개월을 심근경색 치료를 받으며 병원에 있었다. 의사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듣고 있으니 내 병이 중히긴 중했던 모양이었다. 의사들은 나를 놓고 토론을 벌이고 말다툼도 했다.
그 와중에도 통증은 계속되었다.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고 7개월이 넘었지만 심장의 통증은 그대로였다. 의사들은 가슴을 짓누르는 통증을 잡지 못했다. 현대의학적인 치료로 통증을 없앨 수 없다면 이제 남은 것은 죽음 뿐! 그렇다면 이대로 병원에서 죽을 수는 없었다. 나는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당연히 의료진과 식구들은 나를 말렸다. 그러나 나는 죽든지 살든지 집에 가겠다고 우겼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침구술에 내 몸과 생명을 맡기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나를 임상대상으로 놓고 실험해 침뜸의 진가를 다시 확힌하기로 마음먹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아들에게 내 뜻을 전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숨이 붙어있는 것도 응급실에 가기전에 침 놓고 뜸을 떴기 때문이다. 그러니 뜸을 떠 다오. 혹, 내 명이 다해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분명 효과는 있을 것이다. 곧 죽어도 고통 없이 갈 수 있다면 그것도 큰 효과이고 축복일 테니.''
아들은 불안한 기색이었으나 내 뜻을 따랐다. 내가 일러 준 자리에 아들이 뜸을 다 뜨고 1~2분 지나자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졌다. 7개월이 넘게 내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통증이 정말 일시에 걷혔다.
'아! 이래서 환자들이 나를 찾아오나 보구나. 내가 뜸을 떠주고 나면 아주 편안해 하던 환자들의 기분이 이런 것이었겠구나. 살았구나 하는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그 때부터 나는 더욱 소리 높여 ''뜸은 최고의 의학''이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몸에 더욱 열심히 뜸을 뜨기 시작했다.
나는 뜸 덕분에 살았다. 올해로 여든 아홉이니 예순 여섯 살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스물 세 해를 더 살았다. 그 때부터 지금가지 나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뜸을 뜨고 있다. 물론 지금 나는 아주 건강하다.
나는 새벽 5시에 일어나 하루 종일 서서 환자를 치료하고 일한다. 이르면 자정이 지나 잠자리에 들고, 써야할 글이 있거나 읽어야 할 글이 있을 때는 오전 2시를 훌쩍 넘기기도 한다. 그래도 다음 날 피곤해서 정신을 못차리거나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는 없다.
나는 날마다 오전 10~11시쯤 내 몸에 뜸을 뜬다. 뜸을 뜨는 동안 2~3분 정도 잠깐 잠이 든다. 극히 짧은 시간이지만 얼마나 푹 자는지, 자고 일어나면 몇 시간 잘 자고 일어난 것처럼 머리가 맑고 몸이 개운하다.
꽤 오래 전 러시아가 아직 소련이었을 때, 그 나라에서 가장 연로한 이가 사망했다. 120세를 한참 넘긴 노인었는데 장수 비결을 알아내느라 각 분야의 전문가가 참석한 가운데 그의 몸이 해부되었다. 그 노인네의 몸은 여느 사람과 다르긴 달랐다. 肺가 절반밖에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건강과 장수란, 병이 전혀 걸리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소련의 장수 노인은 병을 앓았으나 건강하게 살다 평안하게 죽었고 나는 중한 병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겼지만 건강하게 살고 있다.
건강의 核心은 병이 아니라 인체의 治癒能力(치유능력)이다. 살면서 전혀 아프지 않을 수 없다면 더할 나위 없으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경하게 앓고 얼른 회복되는 것이 관건일 터. 뜸은 건강의 핵심인 인체의 치유능력을 높이는 최고의 의술이다.
이 책 '나는 침과 뜸으로 승부한다- 개정판'은 침과 뜸에 대한 내 臨床 經驗(임상 경험)이자 내 人生의 記錄이다. 되돌아보니 나를 찾아왔던 병마가 스승이 아니었던가 싶다. 내 병을 통해 뜸을 재발견하게 된 것이 내 생애 최고의 행운이요 복이라 믿는다. 병을 통해 나는 환자들의 마음을 새삼 깨달았고 뜸의 효과를 몸소 체험하며 뜸을 더욱 널리 알리게 되었다.
이 글을 통해 나를 찾아왔던 모든 환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내 판단을 믿고 따라준 환자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術者에게 患者는 최고의 스스이며 疾病과 世上을 보는 눈을 열어주는 길잡이이다. 모든 환자들이 침과 뜸의 효과를 기억하고 침뜸으로 건강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배워서 남 주는 뜸사랑 봉사단원들이 한 없이 고맙다. 이제 이들이 정통침뜸의 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믿는다.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훌륭한 술법을 익힌 사람들, 침과 뜸을 사랑하는 南北으로, 東西로 사랑의 脈을 잇게 하여 이 나라, 나아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같이 健康하고 平和롭게 살기를 간절히 원한다.
광주 침뜸봉사 현장에서
구당 김남수
'침뜸' 카테고리의 다른 글
325. '의(醫)는 하나다(계간 구당 2015 가을)' (0) | 2015.10.15 |
---|---|
317. 허임선생, '침구경험방(序文)' (0) | 2015.09.22 |
311. '위로- 뜸사랑이야기(이정자)' (0) | 2015.09.08 |
310. '제7장 외과계('무극보양뜸') (0) | 2015.09.07 |
309. '제8장 비뇨기계('무극보양뜸') (0) | 2015.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