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대사 왕생집
제3권 처사의 왕생(處士往生類)
• 주속지(周續之)
송(宋) 주속지는 안문(雁門) 사람이다. 열두 살에 오경(五經)과 오위(五緯: 미래의 길흉화복을 예언한 다섯 가지 책)에 통달했으므로 십경동자(十經童子)라고 불렀다.
한가한 곳을 좋아하여 공경(公卿)과의 교류를 피하고 언제나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여산 원(遠) 법사를 섬겨 참예하였다. 문제(文帝)가 즉위하자 그를 불러 함께 담론한 후 매우 기뻐하였다.
누가 “처사의 신분으로 임금의 뜰을 밟으니 어떻습니까?” 하고 묻자, “마음이 조정에 치달리는 자는 세속을 질곡과 같이 여기겠지만, 마음이 이 두 가지에서 떠난 자는 시정이나 조정이 바위 굴 속일 뿐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당시에 그를 통은선생(通隱先生)이라고 불렀다.
나중에는 종산(鍾山)에 살면서 전심으로 염불하여 나이 들수록 더욱 돈독하였다. 하루는 공중을 향해 “부처님이 오시어 나를 맞이한다.”하고는, 합장한 채 갔다.
찬(贊)
속지는 ‘시중이나 조장이 바위 굴 속과 다름이 없다’ 하였다. 그렇다면 서방이나 동토(東土)가 다를 바 없다 하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염불하며 왕생할 길을 찾았으니, 그는 진정 이롭고 해로움을 알았던 것이다. 고인의 이런 송(頌)이 있다.
‘높은 산이나 평지가 모두 서방이나. 집에 이르지 못한 자는 희론하지 말라.’
• 정 목경(鄭牧卿)
당(唐) 정목경은 형양(滎陽) 사람이다. 가족과 함께 염불하다, 개원(開元) 중에 심한 병이 들었다.
누가 어육(魚肉)을 먹어볼 것을 권하자 단호히 거절하며 손에 향로를 들고 왕생을 발원하였다. 그러자 기이한 향기가 가득히 서리더니 별안간에 갔다.
장인인 상서(尙書) 소정(蘇頲)의 꿈에, 보배의 못에 연꽃이 만발한데 목경이 그 속에 앉아 있었다.
• 장 원상(張元祥)
당(唐) 장원상은 평소부터 염불을 끊이지 않았다.
하루는 가족을 재촉하여 “서방의 성인이 나를 기다리시며 재계를 마치고 함께 가자고 하신다.” 하더니, 재계를 마치고는 향을 피우고 서쪽을 향해 죽었다.
• 손량(孫良)
송(宋) 손량은 전당 사람이다. 숨어 살며 널리 대장경을 열람하였으나, 그 중 더욱 화엄경에서 지취를 얻었다. 대지(大智) 율사로부터 보살계를 받고 하루에 만 번의 염불을 하여, 이렇게 20년 동안 쉬지 않았다.
하루는 가족들에게 스님을 청해 염불하여 왕생을 도와달라고 부탁하게 하였다. 스님들이 모여 얼마동안 염불하고 있노라니, 공중을 향해 합장하며 “부처님과 보살이 이미 왕림하셨다.” 하고는, 자리로 돌아가 죽었다.
찬(贊)
화엄합론에는 ‘정토에 왕생하려 하는 보살은 일승대도(一乘大道)를 깨닫지 못한다’ 하였으나, 이 노인은 화엄의 지취를 얻었으면서 어찌하여 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랬을까? 대개 합론은 우선 일부 모양에 집착한 범부를 위하여 그 집착하는 견해를 파했던 것으로, 이는 사정토(事淨土)를 얻었고 이정토(理淨土)는 얻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 노인은 사(事)와 이(理)에 원통하여, 화장(華藏)과 연지(蓮池)가 하나이지 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그가 왕생을 구했던 것은 의심할 만한 일이 아닌 것이다. 정토를 닦는 자는 화엄의 행원품을 의지하고 합론은 참고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 원자평(元子平)
당(唐) 원자평은 경구(京口) 광음사(觀音寺)에 우거하며 염불하였다. 어느날 홀연히 공중에서 음악소리를 듣고 서쪽을 향하여 앉아 죽었다. 기이한 향기가 며칠동안 끊이지 않았다.
• 유선(庾銑)
양(梁) 유선은 신야(新野) 사람이다. 무제(武帝)가 불러 황문시랑(黃門侍郞)을 삼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염불에만 전념하였다. 어느날 저녁, 자칭 원 공이라는 도인이 나타나 선(銑)을 ‘상행선생(上行先生)’이라 부르고는 향을 주고 가면서 4년 후에 다시 오겠다고 하였다. 죽는 날, 공중에서 ‘상행선생은 이미 안양에 태어났다.’ 하는 말이 들려왔다.
• 송만(宋滿)
수(隋) 송만은 상주(常州) 사람이다. 콩을 헤아리면서 염불하여 30 석의 콩을 쌓았다. 개황(開皇) 8년[588] 9월, 이것들을 스님들께 공양하고는 앉아서 갔다. 사람들이 보니, 하늘꽃과 기이한 향기 속에서 만(滿)이 공중에 올라 서쪽으로 가고 있었다.
• 분양 노인(汾陽老人)
당(唐) 분양 노인은 법인사(法忍寺)에서 빈 방 하나를 빌려 기숙하면서 주야로 염불하였다. 정관(貞觀) 5년[631], 목숨이 다하는 날, 큰 광명이 두루 비치는 가운데 서쪽을 향해 죽었다. 사람들이 보니 연대(蓮臺)를 타고 있었다.
• 원자재(元子才)
당(唐) 원자재는 윤주(潤州) 관음사(觀音寺)에 살면서 미타경을 읽으며 염불하였다. 어느날 조그만 병이 들었는데, 공중에서 향기와 음악소리가 들려오며, 누가 ‘거친 음악이 사라지고 세밀한 음악이 이어서 들려올 때, 군은 반드시 가라.’ 하는 소리를 듣고 염불하며 죽었다. 기이한 향기가 며칠동안 흩어지지 않았다.
* 거친 음악과 세밀한 음악: 거친 음악이란 징과 북 따위의 타악기로만 연주하는 음악. 세밀한 음악은 관현악기로 내는 경쾌하고 맑은 소리의 음악을 말한다.
• 오자장(吳字章)
원(元) 오자장은 소주(蘇州) 사람으로, 대대로 의업(醫業)에 종사하였다. 형인 자재(子才)와 함께 운옥(雲屋) 화상을 참예하고 염불을 정근하여 온 집안이 불법을 숭봉하였다. 지정(至正)년 간에 병 없이 합장하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죽었다.
• 하담적(何曇迹)
원(元) 하담적은 나이 18세에 보살계를 수지하며 염불하던 이다. 어느날 사고(四鼓: 오전 두시 경)에 일어나 염불을 하고 있노라니, 어떤 사람이 “너무 이르지 않은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부처님의 금상(金相)과 깃발과 꽃이 와서 맞이합니다.” 하고 대답하고는 죽었다.
• 왕전(王闐)
송(宋) 왕전은 사명(四明) 사람으로, 호를 무공수(無功叟)라고 하였다. 모든 선림의 종지와 천태의 교의에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정토자신록淨土自信錄을 저술하였다. 만년에는 염불에 전심하며 앉아서 죽었다. 기이한 향기가 자욱하였다. 다비에 붙여 콩만한 사리 108 낱을 얻었다.
• 범엄(范儼)
송(宋) 범엄은 인화(仁和) 사람이다. 세상의 일에 무심無心하여, 그의 아들이 집안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으나 엄(儼)은 못 본 체하며 “나는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일 뿐이다.” 하며, 날마다 법화경을 읽고 아미타불을 염하기에 마음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느날 보현보살이 육아(六牙)의 흰 코끼리를 타고 금색 광명을 놓으며 엄에게 말하기를, ‘내일 묘시(卯時)에 반드시 가라.’ 하시는 것을 보고, 다음날 저녁, 불 보살이 와서 맞이하자 자리에 앉아 합장하고 갔다.
• 육원(陸沅)
송(宋) 육원은 도호(道號)를 성암(省菴) 거사라 하고 명(明)의 개울가에 살았다. 새벽에 일어나서 향을 피우고 가부좌하고 앉아 눈으로 다른 것을 보지 않고 먼저 게(偈)를 읊기를,
새벽에 일어나 손을 씻고 패엽(貝葉)을 펼치니
복을 구하지도 않고 재앙도 바라지 않네.
세상 인연 끊어진 곳, 그것을 따라 끊어지나니
겁화(劫火)의 광명 속에서 한 바탕 춤추네.
하고는, 그런 다음에 염불을 하고 경을 읽되, 더디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아 마치 구슬을 꿰듯 하였다.
이렇게 매일 한 번을 읽고 미타 만 번을 부르면서 한결같이 서방을 염원하였다.
나이 85세 나던 해 4월 6일,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는 갔다. 염습할 때, 어디서 풍겨오는지 연꽃향기가 진동하였으나, 가까이 가서 보니 입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 손충(孫忠)
송(宋) 손충은 사명(四明) 사람으로, 젊어서부터 서방을 사모하여 마을의 동쪽에 암자를 짓고 염불하였다. 나중에 병이 들어 스님 백 명을 청해 염불하게 하더니, 갑자기 허공을 향해 합장하고 손으로 쌍인(雙印)을 짓고 미소하며 죽었다.
온 마을이 하늘 음악과 기이한 향기가 점점 서쪽을 향하여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두 아들도 아버지를 따라 염불하여 또한 앉아서 죽었다.
• 심전(沈詮)
송(宋) 심전은 전당 사람이다. 처妻 시(施)와 함께 정토를 전심하여 평소의 모든 선행을 모두 서방에 회향하였다. 나중에 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목숨을 마쳤는데, 모두 화불(化佛)이 석장을 잡고 접인해 가는 것을 감응하였다.
• 당세량(唐世良)
송(宋) 당세량은 회계(會稽) 사람이다. 계행을 청정히 지키며 일심으로 염불하여, 늙고 병이 들었으면서도 자리에 눕지 않고 10만 번을 읽었다. 어느날 식구에게 “부처님이 와서 나를 맞이하신다.” 하고는, 예하고 앉아서 죽었다.
이(利) 스님이 그 때 도미산(道味山)에 머물고 있었는데, 간밤 꿈에 서방의 기이한 향기와 깃발과 꽃과 하늘음악이 들려오는 가운데 공중에서 ‘당세량은 이미 정토에 태어났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계공(計公)
송(宋) 계공은 사명(四明) 도원(桃源)의 대장장이였다. 나이 70에 두 눈을 실명했는데, 그 때 그 마을에 잠학유(昝學喩)가 벽과도(擘窠圖: 글씨나 그림을 새긴 판)를 인쇄하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염불하기를 권장하였다.
계(計) 공이 처음에 그림 한 장을 받아 36만 번의 염불은 채웠고, 염불이 넉 장의 그림에 이르러서는 두 눈이 밝아졌다. 이렇게 3년 동안 열일곱 장의 염불을 채웠다.
어느날 숨이 끊어졌다가 반나절 만에 다시 소생하여 “부처님이 그림 여섯 장을 나누어 잠학유에게 주게 하였다. 그는 당초에 나를 인도해 준 분이다. 또한 그림 한 장을 나누어 이이(李二) 공에게 주게 하였다. 그는 그림을 나누어 준 분이다. 그러니 그의 아들에게 가서 감사의 인사를 드리게 하셨다.” 하고는 목욕하고 서쪽을 향해 영원히 갔다.
• 진군장(陳君璋)
원(元) 진군장은 황암(黃岩) 사람이다. 성품이 신중하고 과묵했으며, 나이 40에 부인 섭(葉)씨와 함께 법화경을 읽으며 염불에 전념하였다. 60에 큰 병이 들더니, 하루 저녁에는 아들 경성(景星)에게 부축하게 하여 앉고서는 “내가 이젠 돌아가야겠다.” 하였다.
아들이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으니, “숨을 곳으로 간다.” 하였다. 그리고는 또 “내가 죽으면 반드시 사문의 다비법을 따라야 한다.” 하고는, 합장한 채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서 갔다.
• 장전(張詮)
진(晋) 장전은 농부였다. 성품이 고상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농사짓는 틈틈이 경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벼슬을 주며 누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가난을 즐거워 했으며, 심양(潯陽)의 태수로 천거했으나 웃으며 “고인은 무릎을 펼만한 곳으로도 만족하게 여겼다. 어찌 뜻을 굽혀 가면서 녹을 구해 영화를 누리는 일이 있었겠는가.” 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여산에 들어가 원 공의 연사(蓮社)에 의지하여 내전(內典)을 연구하여 많은 깨달음이 있었다. 송(宋) 경평(景平) 원년[423], 병 없이 서쪽을 행해 염불하고 편안히 누워 죽었다.
• 궐공칙(闕公則)
진(晋) 궐공칙(궐공즉으로도 읽음)은 여산의 연사로 들어갔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친구가 낙양 백마사(白馬寺)에서 그를 위해 밤중에 기제(忌祭)를 지내고 있노라니, 갑자기 숲과 전각들이 금색으로 변하면서 공중에서 ‘나는 궐공칙이다. 극락에 태어나기를 바랬더니 지금 이미 왕생하였다.’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사라졌다.
찬(贊)
임종에 상서로운 일을 감응하는 경우는 흔한 일이다. 그런데 죽은 후에 다른 곳에서 금색을 나투며 왕생을 알려 온 사실은 매우 드문 일이다.
• 이지요(李知遙)
당(唐) 이지요는 정토의 가르침을 숭봉하여, 대중을 이끌어 다섯 차례의 염불회를 가졌다. 후에 병이 들더니 갑자기, “부처님이 오셔서 나를 맞이하신다.” 하고는,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서 향로를 들고 방을 나가 정례하였다.
그리고서 공중에서 ‘그대를 인도하여 정토에 왕생케 하노니, 그대는 이제 금교(金橋)에 오르라.’ 하는 게(偈)를 듣고는, 자리에 올라 앉아 죽었다. 대중이 모두 기이한 향기를 맡았다.
• 고호상(高浩象)
양(梁) 고호상은 동평(東平) 사람으로, 문을 닫아걸고 정좌하여 무량수경만을 읽었다.
일찍이 정(定) 중에서, 자신이 못 위에서 홍련을 타고 있는데, 처음에는 부처님을 보지 못했으나 연꽃 속에서 마음을 기울여 부처님께 예배하며 부처님의 얼굴을 생각했더니, 광명이 먼 곳에서 비춰오는 것을 보았다.
어느날 저녁, 많은 보살이 와서 맞이하는 것을 보고는 즉시 죽었다.
찬(贊)
옛날 두 스님이 연꽃이 피고 지는 것을 생각하고는 나중에 동시에 정토에 왕생한 일이 있었다. 상(象)의 몸이 홍련을 탔다는 것도 역시 관상(觀想)이 정성스러운 소치이리라.
• 서육공(徐六公)
송(宋) 서육공이란 분은 가흥(嘉興) 사람으로, 농부였다. 부부가 나물만 먹으면서 40년 동안 염불을 정근하였다.
미리 감실 하나를 만들어 두었다가 임종에 베옷과 짚신을 갈아 신고 감실에 들어가 단정히 앉아 있더니, 잠시 후에 “부처님이 오셔서 나를 맞이하신다.” 하고는 곧 죽었다.
• 육준(陸俊)
송(宋) 육준은 전당 사람이다. 젊어서는 공문(公門)에 종사했으나 나이 들어서 이를 버리고 오로지 정토만으로 업을 삼았다. 부처님을 대하여 참회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렸고, 도우(道友)와 만나 정토의 인연因緣을 말할 때는 겨우 열 마디만 하면 슬피 울며 감탄하였다.
임종에 원정(圓淨) 율사에게 서방을 간청하더니, 관경觀經을 읽다 상품(上品)에 이르러 정(淨)이 “이젠 가시오.” 하니, “성인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습니다. 잠깐만 기다리겠습니다.” 하더니, 잠시 후에 갑자기 일어나 죽상(竹牀)으로 가서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 죽었다.
찬(贊)
무량수경에 말씀하시기를 ‘아미타불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금방 눈물을 흘리는 자는 모두 숙세에 선근의 소치다.’ 하였다. 준(俊)이 슬피 운 것은 마음속에서 감동하여 얼굴에 나타난 것이니, 그의 왕생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요즘 희롱삼아 정토를 말하는 자는 어찌 옳을 리가 있겠는가.
• 황타철(黃打鐵)
송(宋) 황공은 담주(潭州) 사람이다. 본시 군오(軍伍)를 지냈으나 쇠를 다루는 일로 생계를 삼았다. 망치를 칠 때마다 입에서 염불을 끊이지 않더니, 하루는 병없이 이웃 사람에게 이렇게 송(頌)을 말하고는 갔다.
딱딱! 쿵쿵!
오랫동안 단련하여 무쇠가 되네
태평이 가까워 오니
나는 이제 서방으로 가네
가가당당 呵呵璫璫
구련성강 久鍊成剛
태평장근 太平將近
아왕서방 我往西方
그 송이 호남지방에 널리 퍼져 염불하는 사람이 많게 되었다.
찬(贊)
황 공은 그다지 남다른 재능도 없이 그저 입에서 염불을 끊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본받아 실행하려고는 않고, 기이하고 교묘한 것만을 찾으며 마침내 세월을 허송하고 만다. 아! 이른바 쉽고 간단한 길을 버리고 도리어 어려운 길을 찾으려 하는 짓이 아니겠는가.
• 연화태공(蓮花太公)
대명(大明)의 연화태공이란 분은 월(越) 사람이었다. 성품이 순박하여 오직 밤낮으로 염불을 끊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죽은 후 관 위에 홀연히 연꽃 한 송이가 피어났으므로, 이웃 사람들이 경탄하여 연화태공이라 불렀다.
• 화거사(華居士)
대명(大明)의 화 거사는 강천(江千) 사람이다.
성품이 순박하여 사람들에게 아첨하는 법이 없었다. 중년에 가업을 자식들에게 전하고는 혼자 방 한 켠에 살면서 세상 일에 관계하지 않고 오직 밤낮으로 염불에만 전념할 뿐이었다.
나중에 목숨이 다하는 날, 때가 이른 것을 스스로 알고 옷을 갈아입고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손수 의관을 단정히 하고는 단정히 앉아 식구들에게 고별하고 갔다.
그의 아들이 미리 관을 만들어 두었다가 감실로 바꾸게 되었는데, 이는 사문沙門의 법을 따른 것이었다. 감실을 들어 옮기는 날, 구경꾼이 담을 치듯 모여들어 원근이 추모해 마지 않았다.
• 총론
어떤 이가 “정명(淨名: 유마거사維摩居士를 이름)과 방(龐: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법을 이은 방온龐蘊을 이름) 거사는 어찌하여 왕생을 구했다는 말을 들을 수 없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대가 스스로를 평가해 보라. 만약 두 공에게 미치지 못한다면 왕생을 구해야 하는 것은 굳이 논할 필요가 없겠거니와, 설사 다시 오신 금속여래(金粟如來: 정명의 전신이라 한다)라 하더라도 다시 미타를 친견한다 하여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정명은 석가를 가까이 하지 않았을 것이요, 방 거사도 마조(馬祖)를 참예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도 청정하다’. 한 것은 정명의 말이 아닌가? ‘만법과 짝하지 않은다’. 한 것은 방 거사의 말이 아닌가?
그대가 하루 아침에 정토를 밟는다면 반드시 ‘어찌 자기의 마음이 본래 청정하기를 바라겠으며, 어찌 자기의 생각이 만법과 짝하지 않기를 바라겠으며, 어찌 두 공이 일찍이 정토에 있는 적이 있기를 바라겠는가?’ 하고 말할 것이다.
다시 무엇을 의심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