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지대사 왕생집 2

제2권 임금과 신하의 왕생(王臣往生類)


• 오장 국왕(烏萇國王)

 오장 국왕은 백성을 다스리는 여가에는 평소 불법을 숭봉하여, 일찍이 시신(侍臣)에게 “짐은 국왕이 되어 비록 복락은 누리고 있으나 무상無常은 면할 길이 없다. 듣건대 서방정토는 마음을 깃들일 만한 곳이라 하니, 짐은 마땅히 발원하여 저 국토에 왕생하고자 한다.” 하고는, 종일 행도염불(行道念佛) 하였으며, 부처님이나 스님들께 공양할 때마다 왕과 부인이 몸소 음식을 드려, 이렇게 30년 동안을 거르지 않았다.

 붕어할 때, 얼굴에 웃음빛을 띠고 화불(化佛)이 와서 맞이하는 등, 상서가 한 둘이 아니었다.

찬(贊)
말세에 법을 듣고 믿어 지니는 자들 중에는 지위가 없는 자는 많고 지위가 있는 자는 적으며, 지위가 있으면서 그 지위가 지극히 존귀한 자는 더욱 적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지위가 높을수록 욕심도 더욱 많고, 욕심이 많을수록 번뇌도 더욱 깊기 때문으로, 이치가 그럴진대 이를 면할 수 있는 자는 드물다.

 지금 임금의 복락을 누리면서도 서방西方에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숙세에 수승한 인因을 심지 않았다면 어찌 그럴 수 가 있겠는가.

 그런데 이제까지 제왕으로서 마음을 불법에 둔 자를 어찌하여 기록하지 않았는가 하면, 이 정토전(淨土傳)을 기록하는 것만해도 그 의도가 마음을 외곬로 전념하는 자에게만 있으므로, 단순한 신앙을 가진 자는 함부로 기록할 수 없었던 것이다.


• 위세자(魏世子)

 송(宋) 위 세자는 부자父子 세 사람이 모두 서방을 닦았으나, 처만은 닦지 않았다.

 딸이 열네 살에 죽었는데, 7일 만에 다시 소생하여 그의 어머니에게 “소녀가 보니, 서방의 칠보로 된 연못 속에 아버지와 오빠 등 세 분은 이미 연화가 피었으니 돌아가시면 반드시 이곳에 왕생하실 것입니다만, 유독 어머니만이 없었으므로 잠시 돌아와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어머니께서도 뜻을 일으키소서.” 하고 아뢰었다.

 어머니도 딸의 말에 감동하여 즉시 신심을 일으켜 염불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중에 죽어 역시 안양에 왕생하였다.

찬(贊)
처음에는 정토와의 인연이 소원했으나 마침내 극락국에 왕생하게 된 것은, 믿고 믿지 않는 차이였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다만 믿지 않는 자는 제외한다.’ 하였다.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 유유민 참군(劉遺民 參軍)

 진(晋)의 유유민은 팽성(彭城) 사람으로 한나라 초원왕(楚元王)의 후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면서 효성으로 소문이 났다.

 자신의 재주를 자부하여 세속의 무리들과 휩쓸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처음에 부(府)의 참군이 되었으나 숨어버렸고, 사안(謝安)이 유유(劉裕)와 사귈 것을 권했으나 듣지 않고 스스로 호하기를 유민(遺民)이라고 하였다.

 여산에 들어가 원(遠) 공의 연사(蓮社)에 참예하였고, 염불삼매라는 시를 지어 자신의 전념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일찍이 정 중에서 부처님의 광명이 땅을 비치니 모두 금색으로 변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연사에 산 지 15년 째 되는 해에는 또한 아미타불이 옥호광(玉毫光)을 비치시며 팔을 드리워 이마를 어루만지시자, 유민이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저의 이마만을 만지십니까? 옷으로 저를 덮어주소서.” 하고 간청하니, 잠시 후에 부처님이 이마를 만지시며 가사를 끌어 그를 덮어주시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는 또 칠보의 연못에 들어가니, 푸르고 흰 연꽃이 만발한데, 그 물이 한없이 맑았다. 이마에는 원광(圓光)이 빛나고 가슴에는 만자(卍字)가 드러나 있는 어떤 사람이 못의 물을 가리키며 ‘팔공덕수(八功德水)다. 너는 이 물을 마셔라.’ 하고 말하였다. 유민이 물을 마시니 더없이 달고 향기로웠던 일을 보기도 하였다.

 깨어나 보니 그때까지 아직도 기이한 향기가 몸에서 풍기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대중에게 “나는 정토의 인연이 이르렀다.” 하고는, 성상(聖像)을 대하여 향을 피우고 두 번 절하고는 “저는 석가의 유교(遺敎)로 인하여 아미타불이 계시는 줄을 알았습니다. 이 향을 석가여래에게 공양하고, 다음에는 아미타불과 묘법화경에게 공양합니다. 원하옵건대 일체 중생이 모두 정토에 왕생하여지이다.” 하고 축원하고는 서쪽을 향하여 합장하고 갔다. 그 때는 의희(義熙) 6년[410]이었다.

찬(贊)
관경(觀經)에서 정업의 정인(正因)을 밝히면서, 부모에게 효양하는 것이 제일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불효한 자는 종일 염불하더라도 부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것임을 알 수 있겠다.

지금 유민은 어려서는 효양을 다 바쳤고, 다시 깊이 삼매에 들어 여러 가지 상서로운 징조를 감응했으니, 그의 왕생의 품위(品位)가 높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다. 재가에서 정업을 닦는 자는 이것으로 만대의 사법(師法)을 삼으라.

* 사안(謝安): 동진(東晋) 중기의 명신

* 유유(劉裕): 남조(南朝) 송(宋)나라 무제(武帝)의 이름. 처음에는 진(晋)을 섬기다가 나중에 제위를 찬탈하였다.

* 유민(遺民): 전조(前朝)의 백성으로 의를 지키고 새 조정을 섬기지 않는 자를 일컫는 말.

* 팔공덕수(八功德水): 정토의 연못에 담겨있는 여덟가지 훌륭한 공덕이 있는 물. 여덟가지 공덕이란, 맑고[澄淨], 차고[淸冷], 감미롭고[甘美], 부드럽고[輕軟], 윤택하고[潤澤], 화평하고[安和], 기갈을 면하고[除飢渴], 신체의 여러 기관을 자라게 하는[長養諸根] 공덕을 말한다.


• 장야 무재(張野茂才)

 진(晋) 장야는 심양(潯陽)에 살았다. 중국어와 인도어에 다 능통했으나 더욱 글을 잘 지어 무재(茂才)로 천거되기도 하였다.

누차 산기상시(散騎常侍)로 부름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나아가지 않고, 여산의 연사(蓮社)에 들어가 정업을 닦았다. 의희(義熙) 14년[418], 가족에게 고별하고 방에 들어가 단정히 앉아 죽었다.


• 장항 학사(張抗學士)

 송(宋) 장항은 부처님께 선행을 쌓고 대비다라니(大悲陀羅尼)를 10만 번 외우면서 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하였다.

나이 60여가 되어 앓아 누웠으면서도 일심으로 염불하더니, 가족에게 말하기를 “서방정토는 다만 눈 앞에 있을 뿐이다. 아미타불이 연꽃 속에 계시고 옹아(翁兒)는 금지(金地)에서 부처님께 예를 드린다.” 하고는, 염불하고 갔다. 옹아란 항(抗)의 손자로서 세 살 때 죽었다.

찬(贊)
마음이 청정하면 서방도 눈길에 닿는 곳에 있고, 마음이 더러우면 지옥도 몸을 따라온다. 항(抗)의 청정한 마음을 성취함이여! 눈 앞에서 부처님을 친견했다는 말을 어찌 의심하랴.


• 왕중회 사사(王仲回 司士)

 송(宋) 왕중회는 관직이 광주(光州)의 사사참군(司士參軍)을 지냈다.

 무위자(無爲子) 양(楊) 공에게 “경에서는 사람들에게 정토에 왕생하게 하였으나, 조사(祖師)는 마음이 바로 정토다. 굳이 따로 찾을 필요가 없다 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었다.

 양 공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스스로 생각해 보시오. 만약 부처님의 경계에 있다면 깨끗하지도 더럽지도 않을 것이니 무엇하러 왕생을 찾겠소. 만약 중생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어찌 지심으로 염불하여 더러운 국토를 버리고 정토에 왕생하려 하지 않겠소.” 사사는 깊이 깨닫고 뛸 듯이 기뻐하며 물러갔다.

 2년 후, 양 공이 단양(丹陽)의 태수가 되었을 때, 홀연히 꿈에 사사가 나타나 “전에 가르침을 받고 지금 이미 왕생할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와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하였다.

 며칠 후에 부음이 도착했는데, 사사는 7일 전에 미리 때가 이른 것을 알고 가족들에게 고별하고는 죽었다는 것이다. 바로 꿈 꾼 때였다.


• 마자운 현위(馬子雲 縣尉)

 당(唐) 마자운은 효렴(孝廉)에 천거되어 경읍(涇邑)의 현위가 되었다. 조세선(租稅船)을 호송하여 서울로 가다 풍량을 만나 배가 뒤집히고 말았다. 이러한 죄로 체포되었으나 전심으로 염불하여 5년 만에 사면을 받고 남능(南陵)의 어느 절에 숨어 살았다.

  하루는 사람들에게 “내가 일생을 염불을 정근하여 지금은 서방의 업이 이루어졌다. 이젠 가서 안양에 왕생해야겠다.” 하더니, 다음날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는 단정히 앉아 합장하고 있으니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하였다.

 자운(子雲)은 기뻐하며 “부처님이 오셔서 나를 맞이하신다.” 하고는 갔다.

찬(贊)
몸은 체포를 당했으나 마음은 염불하여 마침내 사면을 받을 수 있었으니, 이는 곧 칼이나 쇠사슬을 쓰고 옥에 갇혔더라도 관음보살을 생각하고 해탈을 얻은 자의 경우일 것이다.

 지금 오욕에 얽혀있는 것이 어찌 체포를 당한 것이 아닐 것이며, 염불 한 마디로 80억 겁의 생사중죄를 면할 수 있는 것은 어찌 사면장이 아니랴. 그러나 오욕에 손발이 묶여 있으면서도 염불할 줄 모르고 영겁토록 죄를 안고 있으니, 끝내 사면을 받을 때가 없다. 슬프다.


• 가순인 군쉬(賈純仁 郡倅)

 송(宋) 가순인은 잡천(霅川) 사람으로 벼슬은 영주(郢州) 군수를 지냈고, 정업淨業에 전심하여 오랫동안 염불로 재계하였다.

 조그만 병이 들더니 서쪽을 향하여 조용히 앉아 갔다. 머리 위에는 원상(圓相)의 흰 광명이 서렸고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하였다.


• 장적 조교(張迪 助敎)

 송(宋) 장적은 전당 사람으로 벼슬은 조교를 지냈다. 원정(圓淨) 율사로부터 보살계를 받고, 정업 법문을 물어 독실하게 수지(修持)하여 안양에 왕생할 것을 서원하였다.

 염불할 때마다 큰소리로 용맹을 다하여 목소리가 쉰 경우에도 그치지 않았다. 하루는 원정에게 “정 중에서 흰색의 빈가조(頻伽鳥)가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더니, 3년 후에 서쪽을 향하여 단정히 앉아 염불하며 죽었다.

찬(贊)
빈가만을 보고 부처님은 보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개 처음에는 이런 것들을 잠깐 보았다가 나중에는 으레 부처님을 보기 마련이다.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는 표현이 어떨까.


• 왕용서 국학(王龍舒 國學)

 송(宋) 왕일휴(王日休)는 용서 사람이다. 성품이 단정하고 간결하여 경사(經史)에 박식하였으나 하루 아침에 그것들을 내버리고는 “이것들은 모두 업습(業習)일 뿐 구경법은 아니다. 나는 이제 서방으로 돌아가려 한다.” 하였다.

  이로부터 염불을 정진하여, 나이 60에 베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었으며, 하루에 천 배의 절을 하고 밤에 늦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정토문(淨土文)을 지어 세상에 권하기도 하였다. 죽기 3일 전에 두루 친척이나 아는 이들에게 고별하며,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그 때가 되어 독서를 마치고 평소와 다름없이 예념(禮念)하더니, 문득 큰소리로 아미타불을 부르면서 “부처님이 오셔서 나를 맞이하신다.” 하고는 나무처럼 반듯이  서서 죽었다. 이웃 사람의 꿈에, 푸른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공을 이끌고 서쪽을 향하여 가는 꿈을 꾸었다. 이로부터 집집마다 그를 숭앙하게 되었다.

찬(贊)
 용서는 서방을 권발(勸發)하기에 가장 간절했던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괜한 말이 아니다.
심지어 임종시에 수승하고 기이한 상서는 천고에 빛나는 것이었다.
아! 어찌 정토의 성현이 세간에 내려와 중생을 교화했던 분이 아니겠는가.

* 송나라 왕일휴는 유학에 조예가 깊어 국학진사(國學進士)가 되었으나, 후에 느끼는 바가 있어 유교를 버리고 오로지 서방의 정토업을 수행하였다. 남송 소흥 30년(1160)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기원하여 무량수경의 사역(四譯)을 교정하고 모아 새롭게 2권 56분의 경을 만들었고, 용서정토문龍舒淨土文 10권(지금은 12권이 있지만 뒤 두 권은 후대 사람들이 추가하여 보충한 것임)을 찬술하여 정토의 긴요한 법과 고금에 왕생한 사람들의 행적을 기술하였다. 그는 건도9년(1173)에 죽었다. 그의 정토문은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이르러 여러 차례 간행되어 많은 이들 사이에서 인용되었다.

  또 그는 십념(十念)의 행을 중시하여 매일 새벽에는 합장하고 서방을 향하여 예배하고 열 번 부처님을 불렀으며, 동시에 나무관세음보살, 나무대세지보살, 나무일체보살성문제상선인(南無一切菩薩聲聞諸上善人)을 각각 열 번씩 불렀다고 한다.

  또 재계(齋戒)를 지켜야 한다고 권장하였고, 특히 살생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훈계하여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을 큰 선이라고 하였다. 만약 질병이 들었을 때에 세 가지 깨끗한 고기(자기에게 제공된 고기를 죽이는 것을 (1) 보지 않은 것. (2) 듣지 않은 것. (3) 자기를 위해 죽였을 것이라는 의심이 없는 것)를 먹으려고 하면, 이 먹는 고기 중생들을 위해 ‘나무서방정토극락세계 삼십육만억 일십일만 구천오백 동명동호 아미타불(南無西方淨土極樂世界 三十六萬億 一十一萬 九千五百 同名同號 阿彌陀佛)’을 49번 염송하여 그들의 왕생극락을 빌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 계살염불(戒殺念佛)설은 당시 교계를 크게 자극하였고, 명나라시대 이후부터는 거사불교의 규범이 되었다.(모찌쯔끼신코望月信亨 지음. 이태원 역, 중국정토교리사, 운주사, 1997. 409-411쪽에서 정리)


• 강공망 사간(江公望 司諫)

 송(宋) 강공망은 조대(釣臺) 사람이다. 관직이 간의(諫議)에 이르렀으나 거친 음식을 먹으며 청정히 수행하였다. 보리문(菩提文)과 염불방편문(念佛方便文)을 지어 세상을 깨우쳤다.

 어려서 죽은 아들이 있었는데, 꿈에 나타나 “아버지께서는 도를 닦아 이미 공업(功業)이 성취되었습니다. 명부에 금자(金字)의 편액이 걸려있는데 ‘엄주부(嚴州府) 강공망(江公望)’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하였다. 간관(諫官)의 책임을 맡은 지위에 있었으나, 마음은 불도를 사모하여 몸소 수행하여 마음에 애욕을 없이하였다.

 동정(動靜)에 불법을 어기지 않았고 어묵(語黙)에 종풍과 계합하여, 명리는 이미 염부를 벗어났고 몸과 마음은 정토로 돌아갔다. 선화(宣和) 말에는 광덕군(廣德軍)이 되었다가, 어느날 병 없이 서쪽을 향하여 단정히 앉아 죽었다.

찬(贊)
어떤 이는 편액에 이름이 적혀있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아! 영명은 명부에 상(像)을 그려 놓았던 일이 있었고, 탑을 돌던 스님이 이것을 확인하였다. 어찌 유독 공망에 대해서만 의심하랴.


• 갈번 대부(葛繁大夫)

 송(宋) 갈번은 징강(澄江) 사람이다. 젊어서 급제하여 벼슬이 조산(朝散)에 이르렀다. 공서(公署)나 사가(私家)에 반드시 정실(淨室)을 짓고 불상을 모셨다.

 일찍이 방에 들어가 예송하고 있노라니, 사리가 허공에서 떨어진 적도 있었고, 평소 정업淨業을 널리 세상 사람들에게 권하여 많은 감화를 받기도 하였다.

어떤 스님이 정 중에서 정토를 여행하다, 번(繁)이 그곳에 있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 병 없이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 죽었다.

찬(贊)
사대부로서 부처님을 믿었던 자는 그런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상의 조롱을 피해 밖으로는 형색을 갖춰가면서 공서에 부처님을 모시는 일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갈 군은 그 독실한 신앙을 회피하지 않은 분이다. 앉아서 숨을 거두고 왕생했던 사실은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니다.


• 이병 중관(李秉 中官)

 송(宋) 이병은 소흥(紹興)의 중관으로 약원(藥院)을 관리하였다. 처음에는 정자사(淨慈寺)의 휘(輝) 공으로부터 선(禪)을 배워 깨달음이 있었으나, 만년에는 용서의 정토문을 읽고 매일 염불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으며, 각장(閣張)인 원미(元美), 전장(殿長)인 임사문(林師文) 등 수십인과 전법사(傳法寺)에서 염불회를 결성하였다.

 하루는 병이 들었는데, 꿈에 아미타불이 금색 원광(圓光)을 그의 머리에 씌워주는 것을 꿈 꾸었으며, 7일 후에는 금색 꽃이 방에 가득한 것을 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친척에게 고별하고 단정히 앉아 인(印)을 맺고 죽었다.


• 호인 선의(胡闉 宣義)

  송(宋) 호인은 관직이 선의였다. 평소에도 불법을 믿었으나 정토를 알지 못하다, 나이 84세가 되어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할 지경이 되자, 그의 아들이 청조(淸照) 율사를 맞이하여 가르침을 간청하였다.

  조(照)가 인(闉)에게 물었다. “공은 안심입명(安心立命)할 곳을 아십니까?” “마음이 깨끗하면 불토도 깨끗할 것입니다.”

  “공은 스스로 평생을 돌아보십시오. 잡념에 물든 적은 없습니까?” “이왕 세간에서 사는 몸이 어찌 잡념이 없을 수 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이 청정하고 국토가 청정할 수 있겠습니까.” “한번 부처님 명호를 부름으로 해서 어떻게 능히 80억 겁의 생사중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아미타불은 큰 서원과 오랜 수행으로 위덕이 광대하신 분으로, 광명의 위신력은 불가사의합니다. 그래서 한 번 그의 명호를 부름으로 해서 한량없는 죄를 소멸할 수 있습니다. 마치 밝은 햇살 아래 서리가 녹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무엇을 다시 의심하겠습니까?”

인은 마침내 깨닫고 그날로 스님을 불러 염불하게 하였다. 다음날 조(照)가 다시 왔다. 인이 “스님께서는 어찌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두 보살이 강림하신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하니, 조(照)가 대중과 함께 큰 소리로 염불하자 인이 합장하고 갔다. 

찬(贊)
인(闉)이 왕생한 것은 청조를 만났기 때문이요, 청조를 맞이해 온 사람은 그의 아들이었다. 그를 진정 대효(大孝)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겠다. 세상에는 조그마한 애정에 집착하여 부모의 재계를 망치는 자가 있다. 매우 잘못된 노릇이다.


• 양무위 제형(楊無爲 提刑)

  송(宋) 양걸(楊傑)은 무위주(無爲州) 사람으로 호는 무위자(無爲子)다. 소년에 급제하여 관직이 상서주객랑(尙書主客郞)이 되어 양절(兩浙)의 형옥(刑獄)을 다스렸다. 불법을 존숭하고 선종에도 깨달음이 있었다.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중생의 근기는 날카롭고 둔한 차이가 있으나, 누구나 알 수 있고 누구나 행할 수 있는 법문은 오직 서방정토일 뿐이다. 일심으로 관념(觀念)하여 어지러운 마음을 거두기만 하면 부처님의 원력에 의지하여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

  천태십의론서(天台十疑論序)과 미타보각기(彌陀寶閣記), 안양삼십찬(安養三十贊), 정토결의집서(淨土決疑集序) 등을 지어, 널리 서방의 교관(敎觀)을 천양하고 미래 중생을 깨우쳤다.

  만년에는 미타장육존상(彌陀丈六尊像)을 그려놓고 늘 수행 관념(隨行觀念)하더니, 목숨이 다하는 날, 부처님이 와서 맞이하는 것을 감응하고 단정히 앉아 죽었다.

그의 사세송(辭世頌)에 이런 것이 있다.

삶도 연연할 것 없고
죽음도 버릴 것 없네
허공 속의 한 점 구름인 듯
기왕 착오한 일
서방극락에 나아가네.

생역무가연 生亦無可戀
사역무가사 死亦無可捨
태허공중지호자야 太虛空中之乎者也
장착취착 將錯就錯
서방극락 西方極樂

찬(贊)
무위자의 송을 읽어보니, 이른바 선을 참구하여 성품을 보았으면서 다시 정토로 돌아갔음을 알 수 있겠다. ‘이왕 착오한 일’ 운운은 곱씹을 맛이 적지 않다. 아! 인간의 재사(才士)로서 어찌 이 한번의 착오를 고쳐 나아갈 수 있으랴.


• 위문진 관찰(韋文晋 觀察)

송(宋) 위문진은 행동거지가 고결하고 정업도량을 세워 널리 중생을 제도하였다. 유월 모일 홀연히 서쪽을 향하여 가부좌하고 합장한 채 염불하며 죽었다. 기이한 향기를 원근에서 다 맡을 수 있었다.


• 문언박 로공(文彦博 潞公)

송(宋) 문언박은 서울에서 정엄(淨嚴) 법사와 함께 10만 인을 모아 정토회를 만들었다. 임종에 편안히 염불하며 죽었다.


• 마우 시랑(馬圩 侍郞)

송(宋) 마우는 그의 할아버지인 충숙공(忠肅公)이 항주 군수일 때부터 자운참주(慈雲懺主)에게서 염불을 배워 온 가족이 숭봉하게 되었고, 우(圩)도 25년 동안 염불하였다.

  숭녕(崇寧) 때 조그만 병이 들더니, 옷을 갈아입고 앉아서 갔다. 덮개가 푸른 (마차가 문을 나서는 듯한) 어떤 기운이 하늘로 올라갔다. 가족들이 우(圩)가 상품(上品)에 왕생하는 것을 모두 꿈꾸었다.


• 종리 소사(鍾離 少師)

송(宋) 종리근(鍾離瑾)은 절서(浙西)의 제형(提刑)으로 있을 때 자운참주를 만나 정토를 독신하게 되었다.

나중에 개봉(開封)의 군수가 되어 나갔을 때는 국사에 전념하고, 들어와서는 잠을 잊고 염불하더니, 갑자기 밤중에 가족을 깨워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는 앉아서 갔다.

  온 집안 식구가 모두 근(瑾)이 푸른 연꽃을 타고 선악(仙樂)에 인도되어 서쪽을 향해 가는 것을 보았다.


• 염방영 승무(閻邦榮 承務)

송(宋) 염방영은 지주(池州) 사람이다. 24년 동안 왕생주(往生呪)를 외며 염불하더니, 죽을 때 가족들의 꿈에 부처님이 광명을 놓으며 영(榮)을 맞이하는 것을 보았는데, 새벽에 영이 서쪽을 향해 가부하고 앉았더니 갑자기 일어나 몇 발자국을 걷고는 선 채로 죽었다.


• 왕충 조산(王衷 朝散)

송(宋) 왕충은 가화(嘉禾) 사람이다. 서호(西湖)에서 염불회를 조직하여 현우(賢愚), 귀천(貴賤),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왕생하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나 회에 들게 하였다.

  권수문(勸修文)이 현재 세상에 남아있다. 나중에 병 없이 서쪽을 향하여 앉아 죽었다.


• 종리 경융 대부(鍾離景融 大夫)

송(宋) 종리 경융은 조청대부(朝請大夫)의 벼슬을 지냈다. 일찍이 관경(觀經)을 읽다 염불에 몰두하게 되었다. 사직한 후에는 동원(東園) 곁에 띠집을 짓고 살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미타를 모르면 미타가 서방 밖에 있으나, 미타를 알면 미타는 다만 자기의 집에 있을 뿐이다.”

  어느날 저녁, 묘응(妙應) 스님에게 보현행원품을 읽게 하고는 향을 피우고 공경히 듣더니, 두 손으로 인(印)을 짓고 죽었다.


• 전상조 군수(錢象祖 郡守)

송(宋) 전상조는 호를 지암(止菴)이라 하였다. 금릉(金陵)을 다스릴 때는 날마다 정토를 더 충실히 수행치 못하는 것을 한탄하였다.

  향주(鄕州)에 접대십처(接待十處)를 만들어 모두 정토극락 등의 이름을 붙였고, 지암고승료(止菴高僧寮)를 지어 스님들을 맞이하여 도를 담론하는 장소를 만들었다. 좌상(左相)을 사직하고 돌아와서는 더욱 정업에 힘썼다.

가정(嘉定) 4년[1211] 2월에 조그만 병이 들더니,

연꽃향기는 불국에서 풍겨오고
유리의 땅에는 티끌도 묻지 않았네
나의 마음은 저보다 깨끗하여
오늘에야 비로소 한 송이 꽃이 핀 걸 알겠네.

함담향종불국래 菡萏香從佛國來
유리지상절섬애 琉璃地上絶纖埃
아심청정초어피 我心淸淨超於彼
금일요지일타개 今日遙知一朶開

하고 게(偈)를 썼다.

  3일 후, 어떤 스님이 병 문안을 하였는데, 공이 “나는 삶도 탐하지 않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늘에 태어나지도 않고 인간이 되지도 않고, 오직 정토에 왕생하고자 할 뿐입니다.” 하더니, 말을 마치자 가부좌하고 갔다.

후에 어떤 사람의 꿈에 공중에서 ‘전 승상은 이미 서방의 연궁(蓮宮)에 태어나 자제보살(慈濟菩薩)이 되었다.’ 하는 꿈을 꾸었다.


• 매여능 현령(梅汝能 縣令)

송(宋) 매여능은 상숙(常熟) 사람으로 벼슬은 현령을 지냈다.
평소부터 정업淨業에 뜻을 두었더니, 어느날 꿈에 어떤 스님이 종이 백 폭을 주는데 찢어보니 16자의 글자가 되었다.

  이 사실을 동령 조(東靈照) 스님에게 물어보니 “열여섯 자란 어찌 십육관경(十六觀經)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그 때 마침 어떤 스님이 경을 주고는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

  이로부터 경을 읽고 염불하며 스스로 ‘왕생하기 위하여 마음을 보인다(爲往生以見志)’ 하고 이름하였다.

  그 때 읍의 생(生) 공이라는 분이 장육(丈六)의 미타상을 조성하였는데, 재산 백 만을 보시하여 장식하였다. 그랬더니 법당 앞의 못에 한 쌍의 백련이 피었는데 꽃잎이 백 잎이나 되었다. 그해 겨울에 병 없이 죽었다.


• 잠정국 학유(昝定國 學諭)

송(宋) 잠정국은 호가 성재(省齋)로서 주학유(州學諭)를 지냈다.
염불하면서 정토의 모든 경전을 읽었고, 매월 24일 마다 승속을 모아 경을 읽고 염불하였다.

 가정(嘉定) 4년[1211], 꿈에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부처님이 군을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3일 후에는 반드시 저 나라에 왕생할 것입니다.” 하고 고하였다. 그날이 되어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는 염불하고 앉아 죽었다.


• 풍제천 간의(馮濟川 諫議)

송(宋) 풍집(馮檝)은 호를 제천(濟川)이라 하고, 수영(遂寧) 사람으로 태학을 거쳐 과거에 올랐다. 처음에는 선림(禪林)을 찾아 다녔으나, 만년에는 정업만을 숭상하여 서방문(西方文)과 미타참의(彌陀懺儀)를 지었다.

  나중에 급사중(給事中)으로 노주(潞州)에 출정했다가 승속을 모아 염불회를 만들었다. 공주(邛州)를 다스릴 때, 뒷 마루에 높은 자리를 만들고 대궐을 향해 절하고는, 승복을 입고 자리에 올라 주장자를 무릎위에 비껴 얹고 죽었다.

찬(贊)
전등록(傳燈錄)에 공에 대한 기록이 실려있는데, 처음에는 용문원(龍門遠)을 참예하였고, 다음에는 묘희(妙喜)를 참예하여 각각 깨달음이 있었다. 임종에 미리 기한을 정하고 자리에 올라 주장자를 들어 무릎위에 얹고는 죽었다.

그 자재하고 분명한 모습은 완연히 선문의 여러 종사들의 풍격, 그것이었다. 그런데 도무지 그의 염불왕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저술하는 자의 뜻을 세우는 입장이 같지 않고, 각각 소중히 여기는 바를 따랐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저 전등록은 직지인심(直指人心)만을 소중히 여겼으므로 으레 심지를 밝힌 부분만을 취하고 정토는 생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컨대 회옥(懷玉)은 금대가 두 번이나 이르렀고, 원조(圓照)는 연꽃에 이름이 새겨져 있었던 사실을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으나, 여기 왕생집에서는 이 점을 상세히 기록한 것은 정토로 돌아가는 것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평소에 염불하여 왕생에 대해 대답한 것을 살펴보면, 심성을 밝히는 것이 그 가운데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만약 덕을 소중히 여긴다면 안자(顔子)를 덕행의 조목에 나열하고 정사에 대한 부분에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요, 재주를 소중히 여긴다면 안자는 임금을 보필할 만한 그릇을 갖추었다 하고 덕행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역시 각기 그 입장이 같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정업을 닦는 자는 돈독히 믿고 의심치 말기 바란다.


• 왕민중 시랑(王敏仲 侍郞)

송(宋) 왕고(王古)는 자가 민중으로 동도(東都) 사람이다.
벼슬은 예부시랑(禮部侍郞)에 이르렀으면서 자비한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깊이 선종에 계합하였다.

 또한 정토법문의 우수함을 깨달아 직지정토결의집(直指淨土決疑集) 3권을 지어 평생 염불을 정근했으며, 염주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고, 일상생활에서 늘 서방정관(西方淨觀)으로 불사를 삼았다.

 어떤 스님이 정(定)에서 정토를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고(古)와 갈번(葛繁)이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한다. 왕생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 오신수 진사(吳信叟 進士)

송(宋) 오자재(吳子才)는 호가 신수다. 벼슬을 사직한 후, 미리 관 하나를 만들어 놓고 밤에는 그 속에 누워 동자에게 관을 두드리게 하고,

오신수여
돌아가자
삼계는 편치 않아 머물만한 곳 아니다.
서방정토에 연태(蓮胎)가 있으니
돌아가자.

오신수 吳信叟
귀거래 歸去來
삼계무암불가주 三界無安不可住
서방정토유연태 西方淨土有蓮胎
귀거래 歸去來

하고 노래하며 스스로 한 줄씩 화답하였다. 나중에 병 없이 죽었다.


• 백거이 소부(白居易 小傅)

 당(唐) 백거이는 관직이 중대부태자소부(中大夫太子小傅)를 지냈다. 집을 버려 향산사(香山寺)를 만들고는 스스로 향산(香山)거사라 호하였다.

 만년에 풍질을 앓게 되자, 봉전(俸錢) 3만을 내어 서방극락세계를 한 부 그리고, 무량수경을 의지해 의정(依正)의 장엄을 매우 자세히 하였다. 그리고는 정례발원(頂禮發願)하여 다음과 같은 게(偈)를 써서 서방을 찬탄하였다.

서방세계 청정한 국토여
모든 악도나 고통이 없네
원하옵노니 저같이 늙고 병든 자
함께 무량수불 처소에 태어나과저.

극락세계청정토 極樂世界淸淨土
무제악도급중고 無諸惡道及衆苦
원여아신노병자 願如我身老病者
동생무량수불소 同生無量壽佛所

찬(贊)
전하는 이야기로는, 봉래에 낙천(樂天)이라는 신선이 있었다는데, 낙천이 이곳을 떠나면서 ‘해산(海山)은 내가 돌아갈 곳 아니요, 돌아간다면 반드시 도솔천이어야 하리. 지금 다시 도솔마저 버리고 정토를 찾노니, 소위 모래를 헤쳐 진금을 찾듯 더욱 빛나고 더욱 아름다우리.’ 하고 노래했다 한다.


• 장윤 도총(張掄 都總)

 송(宋) 장윤은 양절도총관(兩浙都總管)의 벼슬을 지냈던 이다.
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약하며 일심으로 염불하니, 온 집안이 그를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처자와 함께 하루에 염불 만 번을 불렀다. 효종황제(孝宗皇帝)가 연사(蓮社)라는 친서를 내렸다.


• 소식 학사(蘇軾 學士)

 송(宋) 소식은 호를 동파(東坡)라 하고 관직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다. 남으로 귀양가는 날, 미타상 한 축(軸: 두루마리)을 그려 행낭에 넣어가지고 갔다.  누가 그 까닭을 물으니 “이것은 식(軾)이 서방에 왕생하는 징표다.” 하였다.

 어머니 정(程)씨가 돌아가시자, 남겨 두신 비녀와 귀걸이를 팔아 호석(胡錫)이라는 공인에게 부탁하여 미타상을 그려 왕생을 천도하였다.

찬(贊)
노천(老泉: 소식의 아버지)은 선망부모를 천도하기 위하여 일찍이 극락원(極樂院)에 여섯 분의 보살상을 조상한 적이 있었고, 자곡(子曲: 소식의 동생)도 역시 매우 가까이 법문에 왕래하였다. 이렇듯 소씨가 삼보에 귀의한 것은 대를 이은 것이었다.

 세상에는 서방징표라는 것을 새기는 자가 있는데, 이것은 동파에게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터무니 없는 말을 덧붙여 선전한다. 안목을 갖춘 자는 거짓을 인하여 진실까지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바란다.

*소식(蘇軾. 1036-1101): 북송(北宋)의 정치가, 문학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며 송대 문학의 제일인자. 호는 동파(東坡). 왕안석의 신법(新法)에 반대하여 자주 좌천되고 유배 중에 사망함. 정토종의 제13대 조사이신 인광(印光. 1861-1940) 대사님의 법문 중에, 오조사(五祖寺)의 사계(師戒) 선사는 송(宋)나라 초기에 천하의 명성을 떨친 훌륭한 스님이었으나 사후에 소동파로 태어났다는 말씀이 있다.


• 장무진 승상(張無盡 丞相)

송(宋) 장상영(張商英)은 처음에 부인 향(向)씨로부터 발심하여 불법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호를 무진거사라고 하였다. 그의 발원문에 이런 것이 있다.

이 세계와 오탁의 어지러운 마음을 생각해 보면, 정관(正觀)하는 힘도 없고 요인(了因:보조적으로 사물의 생성을 도와주는 힘)의 힘도 없어서 자성유심(自性唯心)을 능히 깨닫지 못하나이다.

  삼가 석가세존의 금구(金口)의 가르침을 따라 아미타불을 전념하려 하옵나니, 저 세존의 원력으로 섭수하사 과보가 다하는 날 극락에 왕생케 하소서. 흘러가는 물에 배를 타듯 자력을 들이지 않고 바로 이르게 하소서.

찬(贊)
무진은 도솔열(兜率悅) 공에게서 선종을 깨달았으면서 정성을 다해 안양에 전념하였으니, 그의 책략은 치밀한 것이었다.

  향산으로부터 이 네 분의 공에 이르기까지 비록 서방을 감응한 사실은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 원인을 근거로 하여 결과를 살펴보건대 서방에 왕생하지 않았으면 어느 곳에 태어났으랴.


• 총론(總論)

내가 듣기에 고덕이 말하기를 ‘사대부로서 총명이 출중한 자는 모두 전생에 중노릇하던 자였다.’ 하였다. 그런데 의심스러운 점은, 끝내 미혹하여 돌이키지 못하는 자는 열에 아홉이라면 숙세의 인연因緣을 등지지 않는 자는 겨우 열에 하나일 뿐이니, 그 까닭은 무엇일까?

  오탁악세에서는 퇴보할 수 밖에 없는 많은 인연들이 잠재하고 있어서 비록 어진 자라 할지라도 이를 면하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戒) 선사의 후신은 동파(東坡)요, 청(靑) 선사의 후신은 증노공(曾魯公)이며, 철(喆) 선사의 후신은 부귀에 빠져 근심과 괴로움이 많았던 어떤 자라 하였다.

   동파(소동파)는 법문에 가장 가까이 했던 분이니 증(曾) 공이 이왕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저 철 선사의 후신은 그 미혹함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고금의 선지식들이 사람들에게 오탁은 버리고 정토를 찾게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유유민(劉遺民) 이하의 여러 군자들은 그 소득이 적지 않았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