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도 ‘맨발의 의사’가 필요해

 

2014년 10월 28일(화) 제371호

정준호 (전 NGO 활동가·기생충 애호가) webmaster@sisain.co.kr

 

 

- 중국의 적각의생은 1차 의료 확대와 최소한의 건강권 보장을 골자로 한 1978년 알마아타 선언의 배경이 되었다. 공공의료 훼손, 의료 격차 문제를 겪고 있는 한국에도 시사점이 많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중국에는 적각의생(赤脚醫生)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맨발의 의사’라 불리던 이 사람들은 중국에서 의료 서비스가 가장 취약한 지역에서 1차 의료를 지탱하던 이들이었다. 문화혁명 당시 마오쩌둥은 보건 시스템을 재편하면서 도시 지역에 밀집된 의료 서비스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당시 830만명가량의 도시 거주민들이 사용하는 보건의료 재정이 5억명에 달하는 지방 주민들의 그것보다 많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당장 지방에 투입할 숙련된 의료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가능한 방법은 다수의 비숙련 인력을 키워내는 방식이었고, 1965년부터 도시에 거주하는 의사들을 지방에 파견해서 적각의생들을 훈련시키도록 했다. 대부분 초·중등학교 졸업 학력인 일반 농민을 대상으로 병원에서 3~6개월간 훈련시켜 지역사회 내에서 위생 개선 활동 등 기초적인 보건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했다. 전문적인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는 없었지만, 예방이나 기초 보건위생 측면에서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고, 당시 의료 부문의 재정지출을 상당히 줄여준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항생제나 진통제 등 서양의 약품과 의료기술을 적극 받아들여 중국 의료 수준을 빠르게 현대화한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1965년 제도화한 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 무려 100만명에 이르는 적각의생이 각 지역 내에서 활동했다. 1970년대 초반에는 90% 이상의 협동농장 및 마을들에서 적각의생이 성공적으로 운영되었다(체제 특성상 많이 부풀려졌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이런 성공은 다른 나라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대표적인 예가 지금은 전설이 된 1978년 알마아타 선언이다. 1차 의료 확대와 최소한의 건강권 보장을 주요 골자로 한 세계보건기구 선언의 배경이 된 것이 바로 적각의생이라 할 수 있다. 즉 전문적인 의료인력의 양산 없이도 비숙련 인력을 다수 훈련시켜 기초의료 서비스를 전달할 수 있다는 성공 모델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야심찬 선언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듯 성공적으로 운영되었던 적각의생은 1980년대 협동농장 체계의 붕괴와 사회적 변화로 인해 빠르게 무너져 내린다. 한때 중국 전역을 뒤덮었던 협동농장이 사라지고 개별 농장으로 분리되자 소득원이 사라진 적각의생도 빠르게 동기를 잃어갔고, 보급률은 90%에서 1984년 4.8%까지 떨어졌다. 기초의료 서비스의 공백을 틈타 지방에도 유료 병원이 빠르게 자리를 잡아갔고, 이는 결국 지방의 공공의료를 크게 훼손하는 결과를 낳았다.

 

전국 보건소 10곳 중 9곳이 보건인력 기준 미달

 

오늘날 지역 보건원(Community Health Worker·CHW)은 의료보건 자원이 열악한 제3세계에서 1차 의료를 확대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런 이유로 100만 지역보건원 프로그램(1millionhealthworkers.org)처럼 제3세계에서 100만명의 CHW를 훈련시키겠다는 사업도 진행 중이다.

 

한국은 어떨까. 과거 중국이나 저개발 국가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많은 숙제가 남아 있다. 영리법인 설립을 통한 공공의료 훼손, 도시에 밀집된 의료 자원으로 인한 심각한 지역 간 의료 격차 등은 최근 들어 더 두드러지고 있다. 지자체별 보건소의 보건인력 배치 현황을 보면 전국 보건소 10곳 중 9곳은 기준 미달로, 인력 기준이 충족된 곳은 전국 253곳 중 고작 24곳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최근 국정감사에서 밝혀지기도 했다. 또한 최근 의료계의 뜨거운 감자인 ‘원격의료’는 기기를 공급하고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특정 대기업 배불려주기로 왜곡될 수 있다는 우려도 강하다.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고, 지역을 기반으로 튼튼한 건강의 기초를 다질 수 있는 적각의생 제도를 한국에 도입해볼 수는 없을까. 의료자원을 적절히 배분하고 운영했던 경험은 분명 배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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