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뜸으로 이뤄낸 유방암 완치(계간 구당 2017 여름)

 

ㅇㅇㅇ 정회원 31기

 

 

구당 선생과 첫 만남

 

2001년 어느 날 ebs 방송을통해 구당 선생을 처음 만났다. 무극보양뜸을 강의 하셨는데 묘한 매력에 이끌려 그 강좌를 모두 시청했고 언니에게 전했다. 얼마 후에 언니가 灸堂 선생의 진료를 받고 싶다며 浦項(포항)에서 올라왔다. 그 당시 나도 허리가 아파 서 있기조차 힘든 상태여서 언니와 東大門에 있었던 침술원을 찾아갔다.

 

대기실은 순서를 기다리는 환자들로 가득 찼고 그날은 접수 마감이 되어 많은사람이 돌아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 포항에서 비행기 타고 진료받으러 왔다며 꼭 침을 맞아야 한다고 떼를 쓰다시피 해서 맨 마지막 시간을 할애받고 진료카드를 작성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고통스러울 만큼 허리 통증이 심했다. 그래도 침을 맞는 것이 두려웠다.

 

진료시간에 내가 뜸은 뜨겁고 흉터가 남는게 싫다고 했더니 灸堂 선생이 아직 덜 아픈 모양이라고 하셨다. 치료를 받고 집으로 오는데 腰痛(요통)이 사라진 걸 느꼈다. 언니에게 얘기했더니 언니도 배에 만져지던 덩어리가 사라졌다며 신기해했다.침 한 번 맞고 어떻게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질 수 있을까?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아들의 도움을 받아 뜸 뜨다

 

그 후로 나는 뜸사랑 홈페이지를 종종 방문했고, 정통 침뜸 교육과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교육 희망자가 너무 많이 경찰의 입회하에 추첨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기회를 보다가 나도 배우겠다는 다짐을 했지만 바쁘게 살다보니 생각이 희미해져 갔다. 그렇지만 뜸은 열심히 떴다. 앞쪽은 혼자서 뜨고 등은 당시 7살이었던 아들이 도와주었다.

 

뜸을 뜨고 3개월이 지나면서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요즘 좋은 일이 있느냐, 피부 관리받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평소에 나는 腰椎(요추)의 이상으로 다른 사람보다 피로를 두배 넘게 받았으며 항상 몸이 무겁고 특히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힘겨웠었다. 병원에서는 언제나 정상이었다. 그래도 아프다고 하면 신경서이라고 했다.

 

나중에 공부하고 나서야 내가 陽虛 상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서양의학을 믿지 않게 되었다. 部分을 보는 서양의학보다 全體를 보고 병의 뿌리를 치료하는 동양의학이 내게는 절실했었다.

 

팔을 올리기 어려워 한의원에 갔으나 효과가 없다

 

침뜸의 신비를 경험한 후 어느 날 갑자기 팔을 올리기도 어려운 지겨이 되어 동네 한의원을 찾아가서 침을 놓아 달라고 했다. 침 한번 맞으면 풀리 것 같다고 했더니 그 한의사가 본인은 한번으로는 절대 치료할 수 없고 열흘 정도 침을 맞아야 한다고 했다. 그 날 침을 맞고 왔는데 효과는 없었다.

 

열흘이면 침을 맞지 않더라도 저절로 나을 것 같아서 더 이상 한의원에는 가지 않았고 팔을 스스로 풀렸다. 나는 참으로 혼란스러웠다. 똑같은 침인데 한의사의 침은 왜 효과가 없는지, 우리 동네 한의사가 실력이 없는 것인지. 이은성의 소설 東醫寶鑑을 읽으며 참 멋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실망스러웠다. 주위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침을 맞으라고 권했는데 그때부터 나는 灸堂 선생에게 침을 맞으라고 보냈다.

 

디스크 판정을 받은 조카, 구당 선생이 치료

 

한번은 조카가 디스크 판정을 받아서 침을 맞으라고 했더니 무서워서 싫다고 했다. 灸堂 선생의 말씀대로 아직 덜 아픈가 보다고 했는데 몇 개월 후에 灸堂 선생에게 데려다 달라며 연락이 왔다. 우리 집에 온 그 아이는 안지도 서지도 못하고 밥 먹을 때만 겨우 식탁에 앉을 뿐이었다.

 

다음날 구당 선생의 침사에서 본 그 아이의 脊椎(척추)는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듯했다. 脊椎의 위쪽은 오른쪽 아래는 왼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그 정도인지는 짐작도 못했는데 상태가 심했다. 그래서 내가 "할아버지 이것도 나을 수 있을까요?" 했더니 "뜸 뜨면 좋아져"라고 하셨다.

 

이튿날 조카가 집으로 갔는데 전화기는 꺼져있고 집에 도착할 시간이 훨씬 지났음에도 연락이 없어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저녁때쯤 나타난 그 아이는 허리에 통증이 사라져 친구를 만나고 왔다고 했다.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침뜸의 효력을 다시 한번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초기 암 진단받고 방사선 치료

 

그 후에 나는 뜸 전도가 되었고 우리 형제들이 서울에 올 때마다 灸堂 선생에게 들려 뜸자리를 잡도록 했다. 그러나 정작 나 자신은 바쁘다는 핑계로 처음 1년간 뜸을 뜬 후로는 뜸자리조차 희미해지고 없었다. 업무가 바빴고 스트레스도 심했다.

서양의학을 신뢰하지 않는 터라 건강검진도 받지 않았는데 아는 보험 설계사가 실손 보험을 권했고 건강검진이 필요하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대학병원에서 검진을 받았다. 그런데 정밀검진이 필요하다는 소견이 나왔고 조직검사후에 의사가 급하게 수술날짜를 잡자고 했다. 초기 癌이었다. 믿을 수가 없어서 몇 군데를 더 가 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막상 診斷을 받고 보니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수술하고 방사선치료를 받았다.

 

그 이후의 삶의 질은 말이 아니었다. 겉은 멀쩡해보이는데 내 몸은 언제나 피로에 젖어 있었다. 효과도 없는 여성 호르몬 억제제를 5년간 먹어야 한다고 의사가 처방했다. 병원에 갈 때마다 야글 먹지 않겠다고 했고 의사는 먹어야 한다고 했다.

 

안면신경 치료 마비 치료 못하는 병원

 

그러던 중 2013년 9월, 새벽에 일찍 일어나야 할 일이 있어서 며칠간 새벽바람을 쐬고 다니다 顔面神經痲痺가 왔다. 기가 막혔다. 병원에서 입원을 시키고 스테로이드를 한주먹씩 처방해 주었다. 물론 매일 침 치료도 병행했으며 많은 검사를 한 후에 원인은 불명이라고 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병원에서 할 일은 다 했으니 퇴원을 하든지 한방으로 입원을 하든지 하라고 했다. 증상이 그대로였기에 나는 한방 입원실로 갔다. 안면신경마비 환자들만 모아놓은 그 병실은 끔찍했다. 같은 병실의 환자 중에는 4개월 된 할머니도 6개월된 아가씨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고 그대로인 채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무서웠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어떡하지, 침을 맞으면 차도가 있어야 하는데.. .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음 날 조용히 병원을 빠져 나왔다.

 

뜸을 뜨고 나서 처방받은 약을 끊다

 

灸堂 선생에게 침을 맞았는데 그동안 뻑뻑하던 눈이 조금 부드러워진 듯했다. 병원에서 맞았던 봉침은 효과도 없었으면서 너무 아파 공포로 다가왔었다. 병원으로 돌아온 나는 곧장 퇴원 수속을 밟았다. 완강하게 퇴원을 원하는 내게 병원에서는 책임질 거냐고 협박하듯 했다. 당연히 내 몸인데 내가 책임진다고 하고 나는 집으로 와서 침을 맞으러 다녔다. 몇 번 침 치료 후부터 마비는 풀렸고 나는 두려움에 좀 더 치료했다. 열 번쯤 침을 맞으니 완치되었다.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침뜸 공부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서 다른 일보다 먼저 배우려고 알아봤다. 그랬더니 기본과정 강의가 개설되지 않았다고 한다. 오랜 기다림 끝에 2014년 4월 월수반 332차에 등록할 수 있었다. 나처럼 병원에서는 병명도 모르는 병을 시름시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가!

 

공부를 시작하기 전부터 다시 뜸을 뜨기 시작한 나는 경락경혈을 배우면서 膻中(전중)혈을 추가했고 한 달쯤 지나서 병원에 정기 검지늘 받았는데 의사가 호르몬 수치가 많이 좋아졌다며 이제 초음파 검사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3년 반 동안 아무런 변화도 없던 호르몬 수치가 膻中혈 하나로 호전되다니 정말 놀라웠다. 그날부터 병원에서 처방바든 약을 끊었고 정기 검진도 받지 않은 상태로 병원에서 완치 판저을 내리는 5년이 지났다. 의사는 아마도 약의 효과로 착각 했을 것이다.

 

나를 설레게 한 침뜸 공부

 

기대와 설렘과 걱정을 안은 채 공부를 시작했다. 눈 깜짝할 새도 없이 기초반이 끝났고 중급반으로 접어들었다. 교수들 덕분에 두러움이 점차로 사라져 갔다. 어느 반보다 열정적이었던 332차 동기 선생들로 인해 우리 반은 언제나 활기가 넘쳤다. 새로운 새계를 열어간다는것도 경이로웠고 뜻을 같이 하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더욱 즐거운 일이었다.

 

그 당시 직접 접히지 못했으나 皇帝內經과 醫學入門, 許任의 鍼灸經驗方, 鍼灸大成을 전해 들으며 가슴이 뛰었다. 무엇보다 침뜸의학의 꽃이라 불리는 診斷學은 어렵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나를 더욱 설레게 했다. 四診과 八綱은 나에게 많은 숙제를 남겨 주었다. 교수들 덕분에 그 문 초입에 발을 내디딜 수 있었음에 감사를 드린다.

 

전문과정이 끝을 향해 치달을 즈음 집안에 장례가 났다. 너무 애달픈 죽음이라 모두가 반은 넋이 나간 상태였는데 화장장에서 곡을 하는 줄 알았던 30대 후반의 남자가 갑자기 말을 못하고 呼吸도 끊어지기 직적이었다. 급박한 상황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119를 부르라고 말하며 환자를 눕혔다. 배운 대로 少澤과 膻中을 자극하고 四關을 터 주었더니 5분쯤 지나서 환자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린 그는, 처음엔 사람들이 입을 벙긋거리는데 말소리는 들리지 않다가 차츰 숨을 쉴 수도 없었다고 했다. 그때까지 모든 사람이 어리둥절 할 뿐 119를 부른 사람은 없었다. 다시 한 번 우리 정통침뜸이 진가를 발휘했고 사람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참으로 배운 배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일상 속에서 경험한 침뜸의 효과

 

침뜸 교육과정 1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2015년 가을 長城(장성)에서 시험이 치러졌고, 31기 뜸사랑 정회원이 되었다.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를 배웠으니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더욱 멀다는 각오로 한 발씩 내디뎠다. 나아갈 방향을 함께 고민했던 선생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교육이 시작되면서부터 내 몸은 교재가 되었다. 經穴을 배울 때마다 느낌을 알기 위해서 때론 나 자신의 치료를 위해서 수없이 내 몸을 자극해 보았다. 그 결과로 우리는 일상 속에서 정통침뜸의 놀라운 효과를 不知其數로 접한다. 이사 후 집 정리를하다가 팔을 들 수 없을 때 완골 하나로 회복되는 경험, 새벽에 식증독으로 고생하는 가족을 裏內庭과 몇 개의 혈을 자극함으로써 입원하지 않고 깨끗이 회복시킨 일, 발을 접질러 뼈가 부러진 이웃을 뜸으로 통증을 잡은 일 등.

 

배워서 남 주는 시간이 왔다

 

교육이 끝났으니 배워서 남 주는 시간이 찾아 왔다. 모든 상황을 고려한 끝에 가장 안정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화요일을 택하여 2016년 5월부터 동산봉사실에서 실천의 단계에 돌입했다. 언제나 겸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치유의 손길이 되게 해 달라고.

 

봉사실에는 어렵고 힘든 분들, 나이든 어르신들이 많다.앓고 있는 병도 제각각이다. 처음엔 말도 제대로 못하고 걸음도 힘겨웠던 분이 많이 좋아져서 얼굴이 환해지는 걸 보면 보람을 느낀다. 손을 잡고 고마워하는 그분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밝게 살아가시길 소망한다.

화요팀에는 많은 선생이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있다. 주춧돌 되시는 박팀장과 주실장 그 밖에 연세를 잊게 만드는 선생들의 열정으로 가득하다. 기쁜마음으로 봉사하는 그들을 나는 존경한다.

 

의삭 못 고치는 병을 고치다

 

의사가 못 고치는 병을 나 자신은 정통침뜸으로 고쳤다. 지금도 병원에 가면 정상이라 말하지만 힘겹게 투벼하고 있을 사람들은 누가 고쳐주나 묻고 싶다. 기득권에 안주하지 말고 오직 국민의 건강한 삶을 위해 각자에게 선택권을 부여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나를 정통침뜸으로 이끌어 주신 灸堂 선생에게 감사하고 여러모로 도와주신 교수들에게 감사하며 함께 뜻을 같이한 332차, 31기, 뜸사랑 모든 선생에게 감사한다. 무엇보다 '배워서 남주자'는 구당 선생의 뜻을 실천하는 봉사실 선생님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나는 오늘도 정통침뜸을 붙잡고 고민하며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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