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성자를 찾아서'
김봉규, 김금화
차례
글을 들어가며...
프롤로그
제1부 히말라야에서 백두산으로
북인도 히말라야를 가다
성스러운 도시의 샹카라 차르야 사원
달의 땅에 세워진 라마유르 곰파
가난에서 풍요를 배우다
노스님의 비스킷
제2부. 민족의 성산, 백두산으로!
제1막- 백두산을 향해
하늘 연못가에서
성자의 빛을 목격하다
변화의 시작들
제2막- 2001년 2월 백두산
겨울 백두산 문턱에서
다시 찾은 백두산
하늘에 핀 빛의 연꽃
제3막- 2001년 7월 백두산
빛을 다시 목격하다
백두산 산림과 금빛나무
백두산 서쪽을 가다
天池에 내리꽃힌 여덟 다발의 번갯불
힘의 동굴을 찾아내다
천지 수면에 뜬 보름달
빛의 방사 지점을 찾아가다
방황의 시간들
제4막- 2002년 6월 백두산
불광
제2 성자의 자리를 찾아서
내적 두러움
빛의 성자의 가르침
어느 수도자의 집터
제5막- 2002년 8월 백두산
백두산에서 길을 잃다
동굴에서 자연물의 특성을 이해하다
빛의 튤립
계속되는 가르침
제6막- 2003년 7월 백두산
나는 듯이 가는 세 도인
제1성자의 자리에서 본 7군데의 둥근 자리들
빛의 튤립의 의미
완전한 자아와 보행명상
제7막- 2003년 9월 백두산
정화의 번개와 상황버섯의 교훈
허공에 그리는 원
제8막- 2004년 1월 백두산
대공 수련
마음 그 너머의 실체를 보다
잘 짜인 시나리오
識(식)의 발달과 마음자리
제9막- 2004년 4월 백두산
성자의 성스러운 빛의 몸을 보다
신성함을 닮기 위한 여정들
다가오는 새로운 비전
부록. 침묵 그 너머...
명상 수행법
좌법의 기본자세
정공: 껍질명상법
동공: 연꽃 수행법- 원만공
백두산 빛의 성자의 가르침
도리에 대하여- 완덕의 의미
귀함의 의미
성자가 되는 길
사랑과 무애자재
성자의 마음- 심안에 대하여
순일한 마음
에필로그
글을 들어가며...
세상에는 언어나 행위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월적 언어가 존재합니다. 그건 바로 沈默(침묵)입니다. 명상을 통해서 이것을 알게 되었고, 지난 7년간 白頭山 여정에서 몸소 체험했습니다. 전에는 상상 속에서만 일어났던 일들이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인생과 사물에 內在되어 있는 의미를 깨우치도록 해주었습니다.
과거에는 정녕 마음을 열지 않았기에. 그런 교훈과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內面의 완전성과 만물과 하나됨은, 맡김과 믿음 밖에는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압니다. 물론 상당한 忍耐心(인내심)을 필요로 합니다. 삶에서 배워야 할 그 길은, 한 사람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공통된 과제이며 신성한 목적입니다.
'타인이 완전해지는 길이 결국 자신이 완전해지는 길'이기에, 지난 시간의 경험과 빛의 성자들께서 주신 가르침을 세상과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아~움(AUM)!!
프롤로그
오랜 內面의 부름에서 만난 명상
가슴 앞에서 천천히 합장을 합니다.
입가에는 자비롭고 온화한 미소를 띱니다.
......
하늘에 感謝(감사)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깨달음으로 인도하시는 모든 빛의 성자분과
자신과 이웃과 모든 우주만물에
感謝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망상을 하고 있는 것도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완전한 참자아가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구결이 끝나면 실내에는 고요한 정적만이 흐른다. 이곳저곳에서 여러 명이 자리를 잡고 고요한 사색에 잠겨 있다. 입가에는 다들 옅은 미소를 띤 채, 內面의 바다로 항해를 막 시작한 듯하다. 신성한 자연의 흐름에 맡겨진 아름다운 영혼의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자세를 가다듬고 명상에 든다.
눈을 스르르 감고 몸과 마음과 주위 공간에 흐르고 있는 에너지의 흐름을 지켜본다. 시간이 흘러간다.
내면에는 깊은 沈默(침묵)이 찾아들고, 육신에는 한 오라기의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음 또한 역할을 잊어버린 듯하다. 어디에서도 감각이나 생각을 느끼진 못하지만, 무한한 공간에서 지켜보는 누군가는 분명 있다. 일순간 '자연의 흐름'에 대한 自覺이 일어난다.
아마 이대로 시간이 흘러 명상을 마치게 되면,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어떤 이치를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오직 내면의 깊은 고요와 침묵이 주는 일체감과 충만함이 전부인 듯하다.
''합장을 하시고, 지금까지의 명상을 무한한 우주로 돌려보냅니다.''
마침 구결을 끝내자, 모두들 부드럽게 동공으로 몸을 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시계를 쳐다보니 3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명상은 어떠셨나요?''
그들에게 물어보았다.
''다리가 너무 저려 허리를 조금 움직였습니다.''
''제 몸이 山처럼 커지는 느낌이 들던데요.''
''저는 그와 반대로 깡통이 찌부러지듯, 머리가 발바닥에 딱 들러붙던데요.''
''왜 그렇게 집중이 안 되던지... 잡념도 많고, 어찌나 시간이 더디가는지 지겨워서 몇 번이나 눈을 뜨고 싶었습니다.''
명상을 마치면 한 잔의 차와 함께 명상 중에 겪었던 일을 서로 이야기하곤 했다. 몇 마디를 나누고 나자, 다들 별말 없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 설명이 필요한 분위기였다.
''몸의 다양한 느낌이나 고통, 사념 등에 關與(관여)하지 마십시오. 그 모든 것에 어떤 의미도 두지 말고 그냥 담담하게 바라보십시오. 그 느낌들이 실제처럼 느껴지더라도, 그건 단지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幻想(환상)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말이야 쉽죠. 사념에 시달리는 마음에다, 뼈마디 끊어질 것 같은 육체적 통증가지 느껴지는데, 그걸 어떻게 덤덤하게 봐요?''
난감해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김금화씨였다.
''물론 마음이나 육신이 고통스러울 때, 어떠한 동요 없이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떤 상황이든 平定心을 갖고 그냥 지켜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바람을 예로 들어보지요. 눈으로 볼 수 없는 그것은 대개 그 흐름에 저항하는 것이 없으면, 흔적 없이 왔다가 흔적 없이 지나가버립니다. 고통이나 사념도 이와 같습니다. 담담히 그 상황을 바라보면 그냥 그렇게 스쳐지나가는 바람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분석하거나, 생각하거나, 피하거나, 意味를 두려고 한다면 그냥 지나가버릴 바람은 거센 태풍으로 바뀝니다. 태풍이 지나가면 땅이 패이고, 나무가 꺾이고, 건물이 무너지는 등 여러 할퀸 흔적을 남깁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이 관여한 사념이나 고통 또한 육체와 마음에 그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이 理致(이치)는 모든 삶 속에서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러기에 매사 모든 일을 그냥 담담히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그들과 담소를 마치고 밖에 나오니 초여름 밤의 공기가 제법 후덥지근하게 느껴졌다. 넓게 보이는 밤하늘 여기저기에는 몇 개의 적은 별들이 반짝이며 그들의 存在(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몇몇 분은 마음이 고요해져서인지 이야기의 상당 부분을 이해하는 듯했다. 하지만 더러 몇 분은 자신의 건강과 병에 대한 불안감에만 매달리는 있는 것 같았다. 매번 명상이 끝나면 그들은 항시 다른 질문을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늘 동일한 문제를 묻고 또 묻는다. 며칠 지나면 또 비슷한 질문에 똑같은 답을 해야 하고, 무엇이든 그것을 놓아버려야 영원히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궁극적으로 內面을 들여다보는 행위란 변하는 변하는 것들로 얽혀 있는 삶 속에서 변치 않는 것을 찾아가는 여정일 것이다. 매 순간 변치 않는 내면의 참자아와 자연의 완전성을 바라보기에도 인간의 生이 그리 길지 않은데, 어찌 시간마다 변하는 오감과 육신의 느낌에 執着(집착)해 매번 발목을 잡혀야만 하는 것인지...
2007년 11월 김 봉 규
제1부. 히말라야에서 백두산으로
2000년 5월 어느 화창한 날이었다.
''히말라야 가실래요?''
서영란씨가 다가오며 불쑥 말을 끄집어냈다.
지나는 비처럼 스쳐가는 우연들 속에, 어떤 因緣이 숨겨져 있는지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다.
北引渡(북인도) 히말라야에 가다
2000년 6월 15일, 부산 김해공항에서 우리를 인솔할 다른 일행과 처음 만나게 되었다.
비행기는 日本 오사카에서 1박을, 태국 방콕을 경유해 다음날 저녁 무렵 인도 델리에 도착했다.
잠무로 출발하는 일반 버스는 에어켠 가동은 고사하고 의자마저 낡고 삐걱거려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운행시간도 장장 15시간이 걸렸다.
성스러운 도시의 샹카라 차르야 寺院
중간 중간 旅券(여권) 검사로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스리나가르에 도착하자, 어느덧 늦은 오후가 훌쩍 지나 있었다.
다른 일행이 시내관광을 하는 동안 우리는 택시를 대절해 예수님이 머물렀다는 그곳을 찾아갔다. 그 사원은 샹카라차르야 언덕 위에 있었다.
달의 땅에 세워진 라마유르 곰파
버스는 어느 듯 海拔(해발) 3,529미터의 '조지라' 고개를 올라가고 있었다. 라다크 지방의 레를 향하던 길에서 만난 그곳은 라마유르(해발 3,390미터)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아래로 향하는 좁은 계곡 길을 따라 십여분을 걸어 내려가자 차창 밖으로 보였던 사원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 스님은 法堂의 오른 쪽 입구에 있는 책장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책을 보여주나 싶었는데 갑자기 책장을 뒤로 미는 것이었다.
순간 동굴에서 나오는 서늘한 기운과 함께 어렴풋한 결가부좌상이 보였다. 스님은 티베트의 위대한 성자인 나로빠 성자가 70여 년 간 처절한 修行을 했던 동굴이라고 했다.
나로빠는 한때 인도의 나란다 대학의 대승원장을 지냈고, 불교 경전의 지식으로는 당대 독보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그 많은 지식도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띨로빠라는 스승을 만나게 되면서 沙上樓閣(사상누각)이 되어버렸다. 띨로빠는 초인 스승으로부터 텔레파시를 통해 가르침을 받고,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셨던 분이었다. 하지만 그분이 그 당시 사회에서 보여주었던 모습은 낮에는 깨를 갈고, 밤에는 창녀의 포주였던 것이다.
가난에서 풍요를 배우다
사람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부족함이 아니라, 타인과 比較(비교)함으로써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마음 때문임을 동자승을 통해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노스님의 비스킷
모든 사람들의 삶에는 案內者(안내자)가 있게 마련이다.
산 정상으로 나있는 가파른 돌계단을 지나 큰 법당에 들어서자, 노스님은 손가락으로 아주 큰 맨발 자국이 찍혀 있는 천정을 가리키며 ''샤카모니, 샤카모니''라고 말했다. 그 발자국은 생전의 석가모니 부처님의 것이었다.
리종을 떠나 불교 미술품으로 유명한 알치 곰파가 있는 알치 마으로 들어섰다. 택시가 레의 시내로 들어서자, 이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都心(도심)이 나타났다.
다음날은 택시 기사가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추천해 주었던 헤미스 곰파를 방문했다.
16박 17일 동안 인도의 도시와 시골 등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지켜본 그네들의 삶은 정말 힘겨워 보였다. 북인도 히말라야 여정은 짧은 시간 동안 광활한 지역을 주마산간식으로 슬쩍 스쳐가는 일정에 불과했다. 하지만 성스러운 분들이 남기고 간 불멸의 족적들을 직접 두 발로 더듬을 수 있었고, 깨달음의 그윽한 향기를 동일한 공간에서 희미하게나마 맡을 수 있었다.
제2부- 민족의 성산, 백두산으로!
제1막 백두산을 향해
2000년 7월 10일이었다.
익숙지 않은 잠자리 때문인지 장춘의 작은 호텔에서 눈이 일찍 떠졌다. 이른 새벽에 출발한 항공기는, 아침 무렵 연길 공항에 도착했다. 약 7시간을 달린 그날 오후, 목적지인 백두산에 맞아 주었다.
잠시 뒤 지프를 타고 天池(천지)를 내려와, 서둘러 장백폭포로 향했다. 폭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두견산장이 바로 우리가 묵을 숙소였다.
하늘 연못가에서
백두산은 造物主가 만들어 놓은 16개의 연봉과 다양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山이며,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성스러운 기운이 머무는 수많은 명소들로 가득하다.
천지는 해발 2,200m가 넘는 높은 산 정상에 자리를 잡고 있지마, 지하에서 솟아나오는 거대한 힘에 의해 여름이든 겨울이든 물의 양이 주는 법이 없는 특이한 연못이다.
''천지는 성스러운 곳이고 이 물은 聖水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오면 항시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드립니다.''
''적각도인님이 가르쳐주셨지요.''
''천지에 怪物(괴물)이 산다는데 진짠가요?''
''예, 생긴 것은 목이 긴 거북처럼 생겼고, 몸집은 큰 소만 합니다.''
''아니오, 보통 사람이 그것을 보면 누군든지 죽습니다. 그것은 천지의 신성함을 수호하는 動物입니다. 보통 때는 거의 나타나지 않지만, 천지 주위의 기운이나 사람의 심성이 아주 탁해지면 그 기운을 淨化(정화)하기 위해 올라온다고 합니다.''
''백두산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아주 신성하고 귀한 수도처입니다. 그리고 백두산 곳곳에는 초월 경지에 이른 성자님들이 지금도 많이 계십니다.''
성자의 빛을 목격하다
''번쩍''
바로 그때였다. 무언가 '번쩍'하면서 눈앞의 視野(시야)가 순간 밝아졌다. 그건 분명 빛! 빛이었다. 그것도 방사되는 규모가 반경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의, 正體不明의 힌 빛기둥이었다.
변화의 시작들
'18세 원리와 참건강'- 인간의 몸을 이루고 있느 細胞가 대략 70~100조개 임을 감안하면, 우리는 약 100조개 세포의 어버이이며 또 하루마다 100억 개의 세포를 배고 있는 임산부인 셈이다. 그렇기에 심신의 조화와 건강을 위해서는 항시 調和(조화)롭고 바른 마음가짐이 요구된다.
그 중 壽命이 오래되고 늘름한 용문사 은행나무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 나무는 물론이고, 그 곁에 서 있는 수많은 거목들이 아주 밝고 활기찬 청년의 목소리로 동시에 대답했다.
''우리는 열여덟 살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저 거목들이 저리 오랫동안 대지에 뿌리를 박고 살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나간 세월의 흔적인 낭이에 구애받지 않고, 항상 활기찬 18살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제2막- 2001년 2월 백두산
겨울 백두산 문턱에서
2001년 2월 10일 오후 4시경, 연길 空港(공항)에 도착했다.
다시 찾은 백두산
하늘에 핀 빛의 연꽃
''밖의 별 좀 보세요.''
바깥에는 想像을 초월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늘에 있는 별들은 모두 여기에 모아놓은 것같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별들이 움직이는 것이었다. 몇몇 문양들은 예전에 히말라야를 갔을 때, 어느 사찰에 그려져 있었던 '만다라' 그림과도 닮아 있었다.
한 시간 남짓 지나고 나서야, 거대한 별들의 群舞(군무)가 끝이났다.
세월이 한참 지난후, 그것이 초월경지에 이른 분들이 冥想(명상)을 할 때 생겨나는 현상이라는 것을 여러 수행관련 책을 통해 알수 있었다.
'생명의 기운을 채워넣는 명상'
그러던 중 '白頭山'의 가르침을 통해, 명상의 행위 이면에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구분짓는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생명력의 흐름이 단절된 상태인 죽음의 기본적인 특징을 통해, 반대로 삶의 비밀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이다.
죽음과 명상의 정신적인 면을 비교해보자. 죽음의 경우에는 이미 정신이 날아가 버렸으므로 육신이 부패되어 가는데 반해, 눈을 감고 자신의 內面을 철저히 지켜보는 명상은 생명 에너지의 증강이 매순간 일어나게 되어 나날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아울러 명상은 육신적 정신의 점차적인 合一과정을 겪게 됨으로써, 심신의 調和로움 뿐만 아니라 통찰력이 겸비된 영성의 발달까지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동공의 의미'
생명의 특징을 한마디로 규정짓자면, 운동 즉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동공이란 운동과 달리 동작 하나하나에 체내의 모든 흐름을 자연의 흐름과 一致(일치)시키는 육체적인 움직임을 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제3막- 2001년 7월 백두산
백두산에서 전해들은 자연의 율동인 동공을 배우고 익히기 위해 노력하는 사이, 어느덧 7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빛을 다시 목격하다
2001년 6월 29일 오후 1시경 연길 공항에 도착했다.
백두산 산림과 금빛나무
그곳은 다름 아닌 천지 물가에서 멀리 바라다보였던 금벽 능선이었다.
''이 나무들 좀 보세요. 색깔이 참 희한해요.''
''여기는 꼭 만화에 나오는 스머프 동산 같아요.''
백두산 서쪽을 가다
누구에게나 세상살이의 근심걱정과는 무관하게 그저 밝고 희망차기만 했던 어린 시절이 있게 마련이다.
天池에 내리꽃힌 여덟 다발의 번갯불
마침 그해 여름은 현지인 몇 명이 천지 주변에 텐트 쳐놓고 있었기에 천지에 1泊(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연이어 '꽝! 꽝! 꽝!'하고 지축을 흔드는 천둥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명상을 그만두어라!''는 고막을 찢는 듯한 큰 소리가 들려왔다.
힘의 동굴을 찾아내다
동굴은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좁은 입구와는 달리 그안은 무척 넓어 장정 100여 명도 너끈히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
천지 수면에 뜬 보름달
빛의 방사 지점을 찾아가다
방황의 시간들
산은 원래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한층 어려운 법이다.
'껍질 명상법'- 명상중에 자신의 껍질을 지켜보는 것이 바로 '껍질 명상'이다. 껍질이란 자신이란 자신과 우주를 격리시키는 最前方(최전방)으로, 자신이라 느껴지는 몸의 바깥부분(皮膚面)을 일컫는말이다. 껍질을 지켜본다는 의미는 바깥 면에 머무는 시선을 점차 안으로 이끌어 자신의 감각기관의 작용을 명확히 깨닫고자 함이다. 궁극적으로는 자신과 우주의 일치를 이루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
제4막- 2002년 6월 백두산
佛光(불광)
중국인 관리자가 김사장에게 들려준 말에의하면, 새벽 3시경 장백폭포 위에서 흰옷을 입은 仙人이 허공에 뜬 채로 빛을 방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느 수도자의 집터
출발을 하루 앞둔 백두산에서의 마지막 밤에도 빛의 방사가 목격되었고, 그 날의 명상 중에도 가르침은 계속 되었다. 그때의 가르침은 만물의 기본 생성원리인 五行論에 관한 이치였다.
'五行의 이치'
오행의 방향을 살펴보면 오원소의 에너지 중 木은 좌에서 우로(ㅡ>), 우에서 좌로(<ㅡ), 횡선(ㅡ)으로 이동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고, 火는 위에서 아래로(ㅣ) 내려가고, 金은 측면 선에서(/, /) 빠르게 흡수하여 방출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水는 아래에서 위로(ㅣ) 튀어오르는 성질을 가지고 있고, 土는 모든 것을 아울러서 (ㅇ) 둥글게 모으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또한 오행의 완벽한 균형점인 相火는 원의 중심점에서 제1원인자로 작용을 한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오행의 성질'
자연을 관찰해 보면, 하늘의 일월성신의 변화든, 허공에서 일어나 계절의 변화든, 一定한 흐름이 존재한다. 그 흐름에 감응해, 땅에서 일어나는 인간을 포함한 온갖 생명체의 생명활동인 생장수장의 변화 역시 늘 규칙적인 흐름을 가지고 있다.
오행의 성질 분류
커피를 예로 들어보자. 커피는 검은 색에 가까우므로 오행으로 水의 성질을 띠었으리라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소위 '춤추는 염소'라는 커피 발겨에 얽힌 이야기를 듣게 되면, 그 속에서 커피의 성질을 파악할 수 있는 힌트를 발젼할 수 있다. 여러 검증을 거쳐 그 빨간 열매가 잠을 쫓는 효과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물에 사는 종류 가운데 水의 성질을 가진 것은, 水와 동일하게 대개 표면의 형태가 비늘이 아주작거나 아예 없다.
소금, 장어, 오징어, 낙지, 다시마, 미역, 김 등과 같이 표면에 어떠한 저항력이 없는 형태로 존재하는 군들 역시 水의 성질을 띠고 있음을 알수 있다.
반대로 水와 상극관계에 있는 土와 火의 성질을 띠는 군들은 물의 저항을 많이 받아야 한다. 즉 돔(火), 아귀(土), 멍게(火)처럼 비늘이 많고, 크거나, 울퉁불퉁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제5막- 2002년 8월 백두산
백두산에서 길을 잃다
동굴에서 자연물의 특성을 이해하다
빛의 튤립
'백두산! 그 이름 만큼이나 신성하고 모든 만물을 품어주는 기운을 가진...'
火의 자리- 火는 하늘 기운의 성질로는 '사랑'을 상징하고, 허공 기운으로는 '뜨거움'을 뜻하며, 땅 기운으로는 '불'을 일컫는다. 이러한 기운이 인체에서는 心臟과 小腸에 영향을 미친다. 방향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水의 자리- 水는 하늘 기운의 성질로는 '고요, 인내'를 상징하고, 허공 기운으로는 '차가움'을 뜻하며, 땅 기운으로는 '물'을 일컫는다. 이러한 기운이 인체에서는 腎臟과 膀胱에 영향을 준다.
水 기운의 특징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기운을 하늘 기운을 그대로 받아 아래에서 위로 올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보통의 경우이지만, 천지는 물이 아래에서부터 위로 솟아오르고, 특히 山 정상 높은 곳에서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오행 중 水의 맑은 기운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표징이다.
土의 자리- 土는 하늘 기운의 성질로 '화합'을 상징하고, 허공 기운으로는 '습기'를 뜻하며, 땅 기운으로는 '흙'을 일컫는다. 이러한 기운이 인체에서 脾臟과 胃腸에 영향을 미친다.
土의 기운은 완성을 뜻하며, 도형으로는 표현하면 둥근 원이라 할 수 있다. 계절로는 7~8월 습기가 많은 장마철을 의미한다.
金의 자리- 金은 하늘 기운의 성질로는 '순결'을 상징하고, 허공의 기운으로는 '서늘함'을 뜻하며, 땅 기운으로는 '금속, 돌'을 일컫는다. 이러한 기운이 인체에서는 肺와 大腸에 영향을 미친다.
木의 자리- 木은 하늘 기운의 성질로는 '자유'를 상징하고, 허공 기운으로는 '바람'을 뜻하며, 땅 기운으로는 '나무'를 일컫는다. 이러한 기운이 인체에서는 肝, 膽에 영향을 미친다.
계속되는 가르침
백두산에서 깨친 오행의 이치와 빛의 성자께서 주신 가르침은 백두산을 내려온 후에도, 명상 수행을 통해 계속 심화되고 구체화되어 갔다.
가족과 백두산을 다녀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심한 어지럼증과 함께 배꼽 주위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배꼽 왼쪽에 있는 因緣 줄이 끊어지려는 모양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인연 줄을 끊으려고 하면 그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 사람은 배꼽을 통해 生命을 부여받았고, 그것으로 인해 모든 인간과 사물의 關係가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그 줄이 끊어지면 동시에 그것과 연결된 모든 관계가 끊어지므로 너를 데려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날의 임사체험을 통해 한 가지 교훈을 얻게 되었다. 비록 인간이 이 땅에서 많은 사람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많은 사물들에 집착하면서 살아가지만, 하늘이 정해준 때가 되면 자신의 삶을 左之右之했던 그런 느낌들은 한낱 봄날의 눈과 같이 힘이 없다는 것이었다.
'體質 형성의 이치를 풀다'
해의 움직임은 매일 해가 떠오르는 일출에서 해가 지는 일몰로 나타나고, 1년으로는 태양 고도의 높낮이에 따른 季節로 구분할 수 있다. 태양의 높이에 의해 햇빛의 양이 달라지므로, 태양빛을 받아 사는 지구의 생명체는 이러한 움직임에 생명활동을 맞출 수밖에 없다. 인간의 하루 생활이 태양이 있는 낮 동안엔 주로 활동하고 해가 지는 밤이 되면 睡眠(수면)이라는 휴식을 취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1년 중 햇빛의 높낮이는 일조량을 변화시켜, 식물의 발아와 성장뿐만 아니라 동면이나 철새의 이동 등 동물의 활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 그것을 태양력으로 세분화시켜 놓은 것이 바로 24節氣이다. 모든 일상의 大小事를 행함에 있어 태음력을 중히 여겼던 우리 선조들도 농사와 같이 자연의 흐름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일에서만큼은 태양력의 24절기에 따라왔다.
이러한 태양의 고도로 세분화된 24절기를 季節로 대별하면 크게 5가지로 나룰 수 있다. 이는 흔히들 알고 있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사계절 중에서 여름을 햇빛이 뜨거워지는 '여름'과 덥고 습기가 많은 '늦여름'으로 나누어 5계절로 구분짓는 것이다.
예를 들어 봄은 木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계절이다. 결국 오행의 특성을 가진 계절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태양의 운행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오행의 기운에 따른 5계절의 영향을 받게 되지만, 특히 誕生(탄생)의 순간에 그 영향이 가장 극대화된다. 그 이유는 일생 중 첫 숨을 들이마시는 出生의 순간과 동시에 갓난아기의 몸속으로 밀려들어온 季節的인 기운의 영향 때문이다. 즉 계절에 따른 특정 오행 기운의 많고 적음으로 인해, 인체의 5장부에 각기 다른 영향을 주게된다.
결국 이 요인으로 인해, 인체의 어느 장부의 기운은 實하게 되고, 다른 어느장부의 기운은 虛하게 되는, 인체 오행 에너지의 차별성이 발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가을에 태어난 사람의 체질은 外氣의 강성한 금기운의 영향으로 인해 體內의 금의 기운은 반대로 약해져, 오행의 기운 중 금의 기운이 약한 금체질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원적인 체질을 결정짓는 이치다.
탄생의 순간에 오행의 季節的 기운에 의해 결정된 체질로 오장육부의 기운에 虛實이 생겨 평생 동안 인간의 건강, 성격과 적성, 진로, 취미 등 삶의 모든 부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체질 분류법을 '태양운기체질 분류법'이라고 명명하며, 자세한 것은 필자의 졸저 '5계절 5체질 건강법'에 언급해 놓았다.
제6막- 2003년 7월 백두산
완전한 자아와 보행명상
韓國에 돌아와서도 백두산의 가르침은 계속되었다. 궁극적으로 삶의 전체가 명상인 것을 감안하면, 일상사 모든 일을 이렇게 완전한 自我에 집중된 명상상태에서 행하는 것은 대부분 명상자의 바람이기도 할 것이다.
'운동 방향에 담긴 건강의 이치'
한 쪽 발을 교대로 火방향인 위에서 아래로 털어주거나, 지면에 양쪽 뒤꿈치를 세게 닿도록 하는 행위를 하게 되면 心臟의 부담이 휠씬 줄어드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이 현상을 오행의 운동방향으로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 사선 방향(金)인 가파른 山이나 계단을 아래에서 위로(水) 올라가다보면, 체내의 金과 水의 에너지는 과다해지는 반면 그와 상극인 火의 에너지는 약해진 상태에 처하게 된다. 이럴 경우 火의 기운을 보강하는 행위를 하면, 부조화 상태였던 체내 오행 기운이 조화롭게 바뀌게 되면서 위로 오르기가 수월해지는 것이다.
다양한 체질의 사람들과 지내다보면, 체질별로 그들의 무意識的인 행동에서 조각그림이 맞추어지듯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체질적으로 상반되는 火(여름)체질의 사람과 水(겨울)체질의 사람이 일을 할 때를 살펴보면, 체질별특성의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火체질은 상반신은 약한 반면 하체의 에너지가 强하기에, 상반신에 부담을 줄 수 있는 자세인 쪼그려 앉아 일하는 것보다 서서 일하는 것을 선호하고 별 무리 없이 오랫동안 일을 헤나갈 수 있다.
이와 반대로 水체질은 하체는 약한 반면 상반신의 에너지가 强하기에, 서서하는 자세보다는 쪼그리거나 앉아서 하는 일을 선호하고 그 자세로 일하는 것에 크게 무리를 느끼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이치는 건강유지를 위한 운동에서도 동일하게 해당된다.
제7막- 2003년 9월 백두산
정화의 번개와 상황버섯의 교훈
'비록 그대들이 상황버섯을 따더라도 그것을 가진다는 생각으로 하지 말고, 나무를 살린다는 생각으로 그 行爲를 하여라.'
제8막- 2004년 1월 백두산
대공 수련
명상을 마치고 눈을 떴지만, 온몸이 텅 빈 것 같은 느낌과 물과 같이 맑은 기운이 온몸을 타고 내리는 느낌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지금껏 느껴왔던 어떤 에너지와는 次元(차원)이 달랐다. 그래서인지 온몸의 에너지 상태가 완전히 바뀐 듯했다.
마음 그 너머의 실체를 보다
명상 수련중에, 그런데 보통 때와는 달리 꼬리뼈 근처에 참을 수 없을 만큼 극심한 통증과 심한 어지럼증이 머리에서 느껴졌다.
그러던 찰라, 극심한 고통 속을 버둥대는 나 자신과 동시에 그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어떤 存在를 보게 되었다. 그는 고통이나 괴로움과는 별개였고, 심지어 그것은 죽음과도 무관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참자아인 實體였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참 실체는 호흡을 조절하거나, 마음을 닦는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이 알든 모르든, 그것과는 별개로 항상 마음 너머에 存在해오고 있었다. 그걸 볼 수 없었던 건, 자신이라고 굳게 믿었던 거짓된 오감과 인식적 마음 탓이었다.
결국 '알고자 하는 마음', '보고자 하는 마음' 등의 人爲的인 마음 하나만 내려놓으면 쉽사리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걸 깨닫고 나자 입가에 저절로 쓴웃음이 지어졌고, 다음과 같은 말이 떠올랐다.
잘 짜인 시나리오
''참 實體란 마음을 닦는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명상 수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모든 만물에 대한 善한 마음과 순일한 정성이 가장 필요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러한 마음만이 하늘에 닿아 본질적인 진동과 공명하게 될 테니까요.''
實體를 보고나자, 지금까지 나라고 여겨왔던 자신과 그것을 둘러싼 현실이 너무나 잘짜여 있어, 다들 속을 수밖에 없었던 한편의 시나리오를 보는 것 같았다. 거짓된 자신을, 진정한 자신이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아등바등했던 지난 시간 속의 내 모습이, 마치 관객들을 웃기려고 노력했던 어릿광대처럼 느껴졌다. 실상은 자신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창조성이 자신을 살아가도록 해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識(식)의 발달과 마음자리
백두산에서 실체를 경험하고 부산으로 돌아왔지만, 일행과 정기적인 명상 시간은 그대로 이어갔다. 하지만 그때부터 명상 수행은 實體의 상태에서 몸과 마음을 그냥 지켜보는 것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마음은 이미 참 실체를 바라보고 있어 항시 고요한 상태였지만, 낮은 원습에 쌓여 있던 육신은 실체 쪽으로 가기 위해 장렬한 몸부림을 쳐대었다.
순간순간 低진동의 육신이 高진동의 실체 쪽으로 가기 위해, 신체의 關과 節에 참을 수 없을 만큼 날카로운 아픔이 전해져 오곤 했다. 심할 경우 마치 유형의 몸을 커다란 맷돌을 잘게 가는 듯했다.
하지만 고통이란 실체에서 바라보던 단지 육신과 인식적인 마음이 합작해 만들어낸 하나의 부산물이었기에, 지금껏 경험했던 고통과는 그 의미가 사뭇 다르게 닿았다.
나의 肉身에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자, 백두산을 함께 다녀온 다른 일행에게도 변화의 조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파란 잉크를 풀어놓은 욕조에 다양한 종류의 옷감을 적시면 옷감의 재질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 푸른빛을 띠는 것은 동일할 것이다. 그처럼 백두산이라는 거대한 에너지장 속에서 同苦同樂했던 그들에게도 큰 정신적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9막- 2004년 4월 백두산
성자의 성스러운 빛의 몸을 보다
그때 환하게 빛나는 둥근 원반이 하늘에 떠 있는 것이, 시야의 정중앙에 들어왔다.
''그 분이시잖아요.''
물론 보름달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지는 않았다. 얼핏 보면 그러했지마, 자세히 쳐다보니 그 안에는 아주 밝은 빛을 띤 사람 形像이 보였다. 바로 성자의 거룩한 빛의 몸인 眞身이엇던 것이다.
다가오는 새로운 비전
'그대여! 시간과 공간이 그대와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다네. 그대가 모든 萬物을 항상 신성한 빛의 원반으로 여겨 完全함만 보고자 한다면, 그때 그곳에 그대와 우리가 함께 있을 것이네! 또한 타인의 形像이 그대 눈에 차별 없이 신성한 빛의 원반처럼 보일 때, 그대 역시 그렇게 될 것이라네. 왜냐하면 만물과 그대는 하나이기 때문이라네.'
*부록 '백두산 빛의 성자의 가르침'
道理에 대하여- 完德(완덕)의 의미
질문자: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빛의 성자: 자연의 道理이다.
질문자: 무엇이 도리입니까?
빛의 성자: 完德과 같은 의미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항상 存在하는 것이 있다. 비록 바람이 어디에 있는지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틀림없이 우리 곁에는 항상 존재한다. 세상에는 이와 같이 눈으로 볼 수 없지만 항상 존재하는 법이 있다. 이것을 因果律의 법칙이라고 이야기 한다.
어느 누구도 세상을 살면서 인과율을 벗어나서 살아갈 수는 없다. 사람의 모든 행위에는 항상 그에 따르는 보응하는 힘이 존재한다. 즉 준만큼 더 많이 돌려받는 것이 자연의 理致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하는 善한 생각과 행위에는 그에 따르는 보응의 결과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작은 물방울 모양의 흰빛이 그의 주위에 쌓이게 된다. 하지만 그 빛이 그 사람의 삶에 바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가다가 어려움에 봉착해 더 이상 전진할 수 없고 어둠 속에서 헤맬 때가 오면 비로소 그 주위에 쌓여 있던 흰빛이 저절로 뭉쳐져 그 사람의 앞길을 작은 등불처럼 비춰주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사람은 어둠을 뚫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고, 계속 善한 생각과 행위를 해 나가면 이와 똑같은 현상이 反復되면서 인생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게 된다.
이러한 덕을 쌓는 행위가 자연과 완전히 합치되는 경우에는 결국 도를 깨우쳐 빛 속에서 더 이상 빛이 필요 없어지는 단계가 된다. 이것은 어둠(미망) 속에서 흰빛(밝음)이 합쳐져 中(調和)을 이루는 이치이다.
이와 반대로 조화롭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세상을 살면서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有無形의 해를 끼치게 된다. 그러면 작은 물방울 모양의 검은 어둠이 그의 주위에 쌓여 가게 된다. 그것이 즉시 그 사람의 앞길을 가로막지는 않더라도 그 사람에게 무엇인가 큰 것을 얻을 듯이 세상이 보일 때, 모여 있던 검은 어둠이 그 사람의 앞길을 가로막게 된다.
그래서 그는 한치 앞도 볼 수 없게 되고, 결국은 미망 속에서 헤매게 되는 것이다. 이것도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흰빛(밝음) 속에서 검은 빛(미망)이 합쳐져 中을 이루는 이치이다.
그러나 이렇게 中을 이루는 이치는 같지만, 이것이 어찌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로부터 성인들은 '德을 쌓으라'라고 경계의 말씀을 남기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엄연히 存在하는 하늘의 도리이고 진정한 德의 완전한 작용인 것이다.'
귀함의 의미
질문자: 그러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빛의 성자: 貴(귀)하게 살아야 한다.
질문자: 어떻게 사는 것이 귀하게 사는 것입니까?
빛의 성자:
''父母들이 사랑하는 子女들에게 '貴하게 되어라'라는 말들을 한다. 또한 사람들은 누구나 항상 자신이 귀하게 여겨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귀함의 기준은 '세상에서 그 數가 가장 적은 것'이다. ''부모가 귀하고 배우자가 귀하고 자식이 귀한 것은 그 각자가 唯一(유일)하기 때문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현재의 모든 만물이 어느 것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그 때에 조물주께서 아무것도 없는 데서 오직 존귀한 생각만으로 모든 만물을 만들어 내셨고, 그 모든 하나하나가 똑같은 것이 없다(쌍둥이라고 해서 똑같지 않고, 풀 한포기라도 똑같은 것은 없다.)그러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이 존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자연이 보는 귀함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만이 혹은 내것만이 귀하다는 생각 때문에 미망 속에 갇히게 되었고, 결국 자연으로부터 고립되 되었다. 이러한 미망에서 벗어나 無爲的인 자연의 실상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풀 한 포기, 나무 한그루, 햇빛, 바람, 물, 공기, 사람, 동물 등 모든 것들을 자신과 同一한 마음으로 귀하게 대하여야 한다. 그러면 꼬여있던 모든 매듭들이 풀리면서 삶은 저절로 조화로워지고 平安해질 것이며, 가려진 눈이 열려 자연의 무한하고 완전한 힘과 자신이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한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성자가 되는 길
질문자: 어떻게 하면 빛의 聖者가 될 수 있습니까?
빛의 성자: 그대가 방사되는 그 빛을 바라볼 때 그대의 마음이 어떠하였는가?
질문자: 그러한 경이로운 광경에 말문이 막히고, 마음이 저절로 경건해졌습니다. 저도 모르게 손이 가슴 앞에 모여져 기도하는 자세가 되었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敬畏心과 感謝함을 느꼈습니다. 같은 일행중 어떤 분들은 감사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빛의 성자: 그러한 마음으로 그대와 주위에 있는 모든 만물들을 바라보고 對(대)한다면, 그 사람은 누구나 성자가 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진리에 대한 갈망 때문에 항상 성자를 만나고 싶어 하고, 같이 존재하고 싶어 하며,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 하지만 그대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자는 자연의 흐름에 合一된 삶을 살고 있지만 자연을 만들어 내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 또한 성자는 자연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자연 그 自體라는 것이다.
우선 그대는 자신의 주위에 있는 자연을 그대로 닮아가고자 하고, 자연을 유심히 觀察(관찰)하려고 하라. 그것이 결국에는 성자와 함께 머루르는 방법이기도 하고, 만물을 창조한 창조주와 함께 현존하는 길이기도 하다. 창조주가 항상 그대와 함께 현존함으로써 그대의 눈과 귀,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성자와 신의 현존을 멀리서 찾으려고 하지말고 自然과 그대의 內面에서 찾도록 하라.''
에필로그
2004년 4월 9번째의 여정 뒤에도 2차례 더 백두산을 찾았다. 특히 10번째 여정 이후에는 완전한 맡김과 순명으로 나아가기 위해 혹독한 試鍊(시련)의 시간을 겪어야만 했다. 개아가 와해되는 엄혹한 고통 속에서도 그나마 견딜수 있었던 건 백두산이 전해준 '시간과 공간이 갈라놓을수 없다'는 말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 때문이었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1년 반 동안의 진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난 뒤 비로소 2006년 7월 12일 백두산을 다시 찾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 사정은 그때에 비해 너무나 많이 달라져 있었다. 수년 전만 해도 한국인 일색이던 백두산은 중국의 內國人 관광객으로 도로는 물론이고 천지 물가마져 阿修羅場(아수라장)이었다. 게다가 길림성 자치구가 아닌 중국 중앙정부의 권한이 강화돼 정해진 관광코스가 아니면 엄격한 통제까진 못하고 있었기에, 공안의 눈을 피해 성자의 자리를 비롯한 몇몇 장소를 더듬을 수 있었다.
2007년 '백두산 성자를 찾아서'의 원고를 같이 마무리하던 김금화씨가 인터넷 記事를 보며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온천별장이 없어졌대요.''
''예? 철거에 대해 아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철거반이 무작정 호텔로 들이닥쳐 몽땅 부셔버렸다는데요.''
물론 2년 전부터 백두산 산문 내의 호텔에 대해 철거와 이전에 관한 말은 많았지만, 적절한 보상에 대한 合意가 이루어지지 않아 별 진전이 없이 차일피일 하던 차였다. 그러던 중, 중국 정부는 한국인이 經營하는 호텔 가운데 하나인 박 회장의 온천별장을 본보기로 삼은 모양이었다.
며칠이 지난 뒤, 조심스레 박 회장에게 연락을 취하였다. 그는 중국 정부와의 법적대응 문제로 동서분주하고 있었기에 단지 몇 마디 慰勞(위로)의 말밖에는 전할 수 없었다. 그날 명상실에서 일행도 그 사실을 접하곤 박 회장 일에 대한 인간적인 안타까운에다 마음의 본향인 白頭山을 다시 찾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다들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形形色色의 야생화 꽃 밭에서 들쭉 열매를 따먹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릴 때가 엊그제 같은데...''
'들쭉 소녀'라는 별명을 가진 김태현씨가 느닷없이 옛 추억을 꺼내듯 한 마디 던졌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그간 백두산에서 있었던 기억들을 쏟아냈다.
''들쭉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들쭉이 北韓에선 천연기념물이라 던데요.''
''우리가 밟고 다닌 풀밭에 온 사방에 널브러져 있던 그것이요?''
''어떤 사람은 그걸 귀한 분재처럼 키운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말이 어떤 생각을 들게끔 했는지 잠시 말들이 없었다. 一行은 백두산이 마르고 닳지 않은 이상 그곳과의 만남이 계속되리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이러한 일이 생기자 어쩌면 백두산 여정이 단지 剝製(박제)된 기억으로만 남지 않을까 울적해하는 모습이었다.
평소 입버릇처럼 '백두산은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라는 말을 수도 없이 해왔다. 하지만 지독한 방황과 오랜 기다림을 겪어보지 않은 그들로선 그 의미를 알지 못했었다. 물론 그들의 생각처럼 그곳에 취해지는 물리적인 통제도 문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神性한 이끌림이 있다면 어떤 불리한 정황이나 물리적 저항이라도 큰 걸림돌이 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9번째 여정을 마치고 下山하면서 '그대여! 시간과 공간이 그대와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다네...' 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땐 그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 말의 뜻이 그 후에 이러한 일이 벌어질 것에 대한 暗示(암시)였는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얼마 전 강연을 하기 위해 김금화씨와 함께 大邱로 향하다 청도 고속도로로 휴게소에 잠시 들르게 되었다. 자판기 커피를 꺼내 들고는 나무 벤치에 앉아 지리했던 장마 뒤의 淸明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기다려라.''
빛의 섬광처럼 虛空에서 백두산 특유의 짧은 소리가 가슴에 울려퍼졌다.
''선생님!''
''......''
''이젠 가야되는데요!''
텅 빈 허공만 바라보던 나를 향해 김금화씨가 길을 재촉했다.
''아~! 가야 하네요.''
그에게 뜻 모를 웃음으로 답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그 音聲이 전해준 깊은 의미를...' 아라는 마음의 간절한 소망을 지닌 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