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手들은 健康하다'
이길우 지음
머리말
이 책은 '현대의 神仙'을 찾아 헤맨 기록이다. 이 책에서 소개한 현대판 신선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健康(건강)했다.
2015년 6월 이길우
4. 뜸 기운으로 '百歲靑春(백세청춘)'
- '100살'의 구당 김남수
5. 8가지 동작만으로 몸은 바윗덩어리
- '武八段錦(무팔단금)' 수련하는 주역학자 김성욱
9. 몸으로만 수행하라
- 전통무예 '기천문' 2대 문주 박사규
12. 35년 공무원 생활 중 가장 잘한 決定(결정)
- 국선도 수련 관세청장 백운찬
17. 병은 들어오는 길이 있으면 나가는 길도 있어요
- 87살 기공지도사 윤금선
24. 단 세 가지 동작으로 '초감각' 단련
- 神武(신무) 장성일
28. 통즉불통, 움직이면 낫는다
- 전통 건강술 '오금희' 한의사 정행규
4. 뜸 기운으로 '백세청춘'
- '100살'의 구당 김남수
주변에 100살 이상 長壽를 누리는 이를 만나긴 쉽지 않다. 한 세기를 산다는 것은 아직은 개인에게 축복일 수도 있고, 불행일 수도 있다. 친구도 모두 떠나고, 반려자도 떠나고, 심지어 자식도 먼저 떠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만큼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生老病死를 진하게 체험하며 살아온 시간의 집합일 것이다.
특히 백 살까지 건강하게 살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각종 질병의 '지뢰밭'을 피해 누구의 도움 없이 하루하루를 두 발로 걸어 다니며 健康(건강)하게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드문 일이다.
그런 점에서 灸堂(구당) 김남수는 정말 健康하고 幸福(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지난 2014년 6월 9일은 그의 99번째 生日이었다. 그는 中國 베이징에서 백수생일 밥상을 받았다. 중국 의학계에서 그를 招請(초청)해 그가 평생 연구한 침뜸 講義를 들으며, 그을 위해 생일상을 차려준 것이다. 한반도에 침뜸을 전해준 동양의학의 본고장에서 구당을 공부하고 있다. 그의 '무극보양뜸'은 중국 最高位層의 치료를 담당하는 '인민해방군 301병원' 醫師들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구당은 한달에 한 번씩 중국에 가서 이틀 동안 30명의 환자를 치료해 주고 있다.
서울驛舍(역사) 4층에 자리 잡고 있는 '구당 침술원'에서 만난 구당은 '백세 어르신'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활기찼다. 전날 일주일간의 중국 出張(출장)에서 돌아온 구당은 이미 자신의 출장기간 중 치료를 받지 못한 환자 10여명을 치료한 뒤였다. 顔色(안색)은 20대 청년처럼 血色이 붉었고, 그가 구사하는 언어는 正確했고, 힘이 있었다. 두 시간 이상 對話를 나누었으나 한 번도 물을 마시지 않았고, 피곤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화 내내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끈질게 풀어놓았다. '정말 백 살 어르신이 맞나?'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그는 에너지가 넘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당연한 질문을 했다. ''그런 건강에 祕訣(비결)이 있나요?'' 아마도 그는 이런 질문을 숱하게 받았을 것이다. 구당은 허허롭게 웃어넘겼다.
''이제 나이가 백 살이 되니 뭔가 특별한 장수 건강 비법이 있는가 모두 궁금해 해요. 운동하느냐고요? 운동할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면 좋은 八字(팔자)지요. 뭔가 특별한 것을 먹느냐고요? 남들과 똑같이 먹어요. 하루 세끼, 가리지 않고.''
구당은 서울 淸凉里(청량리)에 있는 집에서 서울역 침술원까지 버스를 타고 출근한다. 출퇴근 동안 걷는 것이 그의 유일한 운동이다. 그리고 환자들이 이야기를 듣고 침과 뜸을 놔준다. 구당은 ''사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구당은 환자를 치료해주고, 그 환자가 좋아지는 것을 보면서 무한한 幸福感을 느낀다고 한다.
''환자의 병세가 좋아지면 어쩌면 환자보다 제가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 맛에 평생 즐겁게 살아왔어요.''
물론 구당이 말하는 건강의 비결은 있다. 그것은 바로 뜸이다. 구당은 매일 한차례씩 자신의 몸에 뜸을 뜬다. 물론 집에서 딸과 며느리가 떠주고, 집에서 못 뜨고 출근하면 제자들이 떠준다. 구당은 서슴지 않고 이야기한다.
''뜸만 뜨면 병도 豫防(예방)하고, 治療(치료)도 하는데 왜 힘들게 다른 방법으로 건강을 찾으려 애쓸까요?''
그런 구당에 대해 기존 한의하계나 양의학계에서는 구당이 자신의 치료 행위를 과장시키고 부풀린다고 비난한다. 그의 호인 灸堂(구당)은 '뜸을 뜨는 집'이란 뜻이다. '灸(구)'는 '오랫동안 불을 지핀다'는 뜻이다. 평생 구당을 외로운 투쟁을 하게 한, 그러나 그를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든 뜸은 정말 효과가 있는 것일까?
구당은 그에게 치료받은 환자 가운데 金載圭(김재규)氏를 가장 잊지 못한다고 한다. 1979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그가 어느 날 한밤중에 구당을 자신의 집에 불렀다. 김재규는 구당에게 ''나 잠 좀 자게 해주시오''라고 부탁했다. 不眠症(불면증)에 오래 시달린 것이다.
구당은 그에게 침과 뜸을 시술했고, 김재규는 한동안 밤마다 구당을 불렀다고 한다. 구당은 1962년 3월 국민의료법이 개정되며 사라진 침구사 관련 規定(규정)을 復活(부활)시켜줄 것을 그에게 부탁했는데, 김재규가 ''10월 30일 朴正熙 大統領과 구당의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약속일 나흘을 남기고 10.26事態(사태)가 나면서 물거품이 됐다고 한다. ''그 이후 法보다는 術을 남겨놔야 한다고 생각해 침구사 관련 立法보다는 침술원 개원해 後進을 養成하기로 했어요.''라고 구당은 아쉬워한다.
구당은 기존 중국의 뜸술이 361개 온몸의 혈에 뜸을 뜨는 것을 남자는 12곳, 여자는 13곳으로 축약시켜 '무극보양뜸'으로 이름을 붙였다. 그의 90년 침뜸의 經驗(경험)을 집약한 것이다. 구당의 침술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시작됐다. 한의사였던 아버지에게 한학과 한의학을 배운 구당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구당은 ''11살 때 국민학교에 들어가려고 하니 학교에서 허락을 하지 않아 포기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는 침과 뜸을 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全國의 유명한 한의사를 찾아다니며 침과 뜸을 배웠다. 그의 兄(형)도 유명한 침사였다. 구당은 침보다 뜸에 注目(주목)했다. 침은 배워야 하는 의술이지만 뜸은 어린아이도 쉽게 할 수 있는 민간의술이기 때문이다.
''뜸을 뜨면 피부에 약한 火傷(화상)을 입으며 혈액에 異種蛋白質(이종단백질)이 생깁니다. 이 단백질이 체내에 흡수되며
免疫力(면역력)과 治癒力(치유력)을 키웁니다. 뜸 맛을 알면 누구나 할 수있어요.''
구당이 말하는 뜸맛은 이렇다.
''뜸자리에 붙여 놓은 뜸쑥이 타들어가면서 피부에 뜨거운 열감이 생깁니다. 찌르는 것과 같은 예리한 뜨거움과 함께 섬뜩한 냉감도 한순간 듭니다. 뜸이 끝나면 몸 全體가 가벼워진 느낌이 옵니다.''
구당은 뜸을 뜰 때 3년 묵은 쑥을 쓰는 이유는 쑥의 약 성분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植物(식물) 가운데 가장 낮은 섭씨 60도에서 열도를 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살갗에 뜸을 뜨면 흉터는 조금 남아요. 그 흉터는 건강의 증거입니다.''
'배워서 남주자'를 외치며 자신에게 침뜸을 배운 '뜸사랑' 5천여 회원들과 봉사활동에도 열중하는 구당은 머리 한가운데인 백회혈에 남아 있는 뜸자리를 보여준다.
평생 뜸 뜬 자리다.
5. 8가지 동작만으로 몸은 바윗덩어리
- '武八段錦(무팔단금)' 수련하는 주역학자 김성욱
그를 만나기엔 勇氣(용기)가 필요했다. 그는 周易학자이다. 인가사의 과거를 통해 미래를 豫測(예측)한다는 주역의 전문가이다. 게다가 그는 在野(재야)에 있다. 원주의 치악산 기슭에 은거중이다.
최근엔 7년의 은거 끝에 다음 한국 대선의 향방과 한반도의 30년, 주요 국가의 운명, 삼성 등 대기업의 앞날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豫言(예언)'이라는 책을 발간해 주목을 받고 있다.
치악산 기슭에서 본 주역학자 백오 김성욱(52)은 외모상 책상에 앉아 책을 쓰는 학자가 결코 아니었다. 거칠게 표현하면 길거리 차력사의 몸이었다. 불끈 힘주리 불거진 팔뚝과 단단하게 발달한 가슴근육 등이 옷으로 감출 수 없는 武人의 몸이었다. 손을 잡아 보니 강한, 아니 천둥 벼락 같은 기운이 그대로 전해진다. 두 눈동자로부터 검다 못해 푸른 눈빛이 瀑布水(폭포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몸을 부딪쳐 보니 바윗덩어리와 맞선 느낌이다. 비록 옷을 입고 있으나 정밀하게 단련된 작은 근육과 늠름한 큰 근육은 단단한 힘줄과 뼈대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육체를 구성하고 있다.
산길을 가다가 두께 5cm 이상 되는 차돌을 집는다. 단단한 화강암이다. 별다른 준비운동 없이 차돌을 향해 손날을 내리쳤다. '푸식'하고 차돌이 부서진다. 그리고 강한 破裂音(파열음)이 사방에 퍼진다.
''언제부터 손에 氣運(기운)이 모였어요. 저도 모르게 발길에 부딪힌 돌을 집었어요. 내리쳤어요. 돌이 깨지는 겁니다. 저도 놀랐어요.''
다시 한번 그의 팔뚝에 손을 대 보았다. 뜨겁다.
''집에서 바늘을 두 손가락으로 집어 유리창에 튕겨 보았어요. 바늘이 유리창에 꽃혔어요.''
보지 않았지만 믿을 수 있다.
''그런 능력이 어떻게 생겼나요?''
''八段錦(팔단금)을 몇 년 째 하고 있어요.''
''헉!'' 순간 숨이 막힌다.
문헌으로만 보았던 중국 전통의 팔단금이라는 무술의 실체를 접하다니...
''몸은 헬스 기구를 들어 그렇게 만들어졌나요?''
''아뇨, 한번도 아령이나 덤벨 같은 기구를 들어보지 않았어요. 팔단금을 하니 저절로 몸이 이렇게 됐어요.
팔단금은 중국 道家의 양생술이다. 아직 한국에서 보지 못한 도인술이기도 하다. 도인술은 온몸의 關節(관절)을 펴거나 굽히며 신선한 공기를 몸속에 들여와 氣血을 원활하게 하는 각종 건강체조를 일켣는 말로 역근경, 오금희, 팔단금이 대표적인 도인술이다.
800여년 前인 중국 宋나라 시대부터 체계화된 八段錦은 8가지 동작이 비단처럼 곱고 귀하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드럽고 가벼운 文八段錦과 강하고 중후한 武八段錦으로 나뉘는 데, 중국과 대만 일부에서만 비전되는 양생술로 알려져 있다. 일단 직접 본 무팔단금의 효력은 대단했다.
무팔단금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모든 動作을 있는 힘을 다해 하는 것(極力)이고, 그다음은 숨을 가득 들이쉬고 참을 수 있을 때까지 呼吸(호흡)을 멈추는 것(閉息)이다.''
모두 8가지 동작은 簡單(간단)하고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다. 매일 꾸준히 하면 막힌 氣血이 열리고 근육과 힘줄에 힘이 생겨서 뼈가 바로잡힌다고 한다. 그래서 心身이 愉快(유쾌)해지기 때문에 삶이 건강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김씨는 8살 때부터 집에서 아버지한테 漢字와 易學, 天文, 風水, 豫言(예언), 東學 등에 대해 배웠다. 옹기공장장을 하시던 아버지는 평생 달과 태양의 변화등 天文에 관심이 많았고, 천도교 신도였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 탓인지 평범한 지방대학의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해 대기업에 취직했으나, 온통 관심사는 周易에 쏠렸다. 현실이 아닌 먼 과거나 먼 未來(미래)에 대해 관심이 집중됐다.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주역과 한학에 몰두하며 주역학자가 됐다. 또 한때 불교에 심취해 불경을 번역하고 강의를 하기도 했다.
40대 중반에 접어들어 김씨는 속세를 떠나 周易에만 집중하면서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키 166cm에 체중 80kg인 비만 체형이 되면서 몸에 각종 질환이 발생한 것이다. 손목터널증후군, 풍치, 어깨 등뼈 통증, 허리 디스크, 소화불량에 눈과 입이 떨리며 뇌졸중 증세까지 겹쳤다. 손도 떨려 찻잔도 들지 못했다.
더는 책상에 앉아 책을 보거나 쓸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김씨는 전 강원대학교 최상익 교수를 만났다. 7년 전 당시 70대였던 최교수는 해석이 잘 안 되는 고전을 김씨에게 보내왔고, 김씨가 이를 해결해주자 감사의 마음으로 무팔단금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최 교수는 대수술을 수차례 받으며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50살에 대만에 유학 갔다가 기체조 전수자(국립대 기공학 교수)를 만나 무팔단금을 배웠다고 했다. 그 대만 교수는 최 교수에게 처음에는 기본 동작만 가르쳐주고 호흡법에 대해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가르쳐주지 않았다. 최 교수는 호흡법까지 어렵게 깨치고 24년간 수련한 결과 70대 나이에 중년의 건강을 유지했다.
김씨는 최 교수로부터 8주간의 혹독한 수련을 거쳐 무팔단금의 기본 동작을 전수받았다. 그 뒤에는 기초체력 단련법과 호흡법, 양생법을 배웠다. 그리고 최 교수는 자신이 아는 무팔단금의 모든 것을 전수 한 뒤 ''이것을 착한 사람에게 전하라. 악인에게 전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른바 비인부전을 당부한 것이다.
무팔단금을 익히며 김씨의 체중은 6개웖 만에 15kg이상 줄었고, 각종 疾病(질병)도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또 정신이 맑아지며 집중력이 높아져 집필도 한결 수월해졌다.
실제로 무팔단금의 동작을 배워 보았다. 동작이 간결하고 동작마다 五臟六腑를 자극하는 느낌이 강했다. 특히 두 번째 동작인 開弓射雕(개궁사조, 두 팔로 활을 당겨 멀리 있는 독수리를 쏘아 떨어뜨린다.)는 가슴과 팔뚝 근육을 강하게 하면서 心臟과 肺, 肝 기능을 활기차게 만드는 데 탁월하다고 한다.
김씨는 ''서양 운동은 효과는 빠르지만 혈기 손상 가능성이 높고, 동양 운동은 효과는 느리지만 氣를 蓄積(축적)해 心身이 건강해지며 마치 한 마리 鶴(학)이 되어 춤을 추는 느낌을 준다''고 말한다.
김씨는 ''묵은 기운을 토해내고 새 氣運을 받아들이는 도인술은 많은 이들에게 健康을 찾아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9. 몸으로만 수행하라
- 전통무예 '기천문' 2대 문주 박사규
''진정한 武人이라면 몸으로 한번 보여주세요.''
화가 났지만 꾹 참고 부탁조로 말을 붙였다. 상대는 여전히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앉아 있다.
언뜻 보기엔 어린 중학생 같았다. 한 손에 도복을 말아 쥐고 도장을 찾아온 청년 박사규(67, 당시 29)는 눈앞에 흰 한복을 입고 자신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작은 체구의 무술인을 내려다보았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그 무술인은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나며 ''정 願(원)하신다면 저도 한 수 배우지요''라고 말했다.
박사규는 당시 합기도 사범을 하는 공인 5단. 어릴 때부터 박사규는 권투와 跆拳道(5단), 합기도 등 각종 무술을 익혔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무술 고수와 수를 섞어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진도의 여유 있는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덩치가 작아(현재 165cm) 이런저런 무술을 배우며 '깡다구'를 키웠던 박사규는 친구로부터 ''눈 위를 걸어도 발자국이 남지 않고, 나뭇가지를 뛰어다니며, 掌風(장풍)도 쓰는 당대 최고의 武人이 출현했다''는 말을 듣고, 서울 왕십리 뒷골목에 있는 도장을 묻고 물어 찾아온 것이다.
마주서니 상대는 키가 자신보다도 10cm는 작아 보였고, 대련 자세를 잡기 위해 들어올린 손을 보니 조막손 같았다. 속으로는 ''저 정도는 다섯 명이 한꺼번에 덤벼도 자신있다''고 생각한 박사규.
그러나 승부는 순식간에 끝났다. 공격하려고 다가서는 순간 상대는 사라졌다. 잠시 기절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상대는 다시 처음처럼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 앚아 있다. 단 일 합에 끝났다. 수많은 고수들과 맞붙었지만, 보도 듣도 못한, 그러나 엄청난 위력을 지닌 무술에 압도됐다. 즉시 박사규는 제자로 삼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청년 박사규는 전통무예 기천의 초대 문주 박대양의 제자가 됐다. 박대양은 어린 나이에 雪嶽山(설악산)에 들어가 20살 때까지 원혜상인이라는 '神仙'에게 기천을 익혔다. 그리고 세상에 내려와 전국을 돌 때, 당시 무술 고수들은 그 앞에서 秋風落葉(추풍낙옆)이었다.
박대양이 박사규와 맞붙어 풀어낸 무술 기술은 '연비파문'. 오른손을 크게 밖으로 휘둘러 상대의 관자놀이를 가격한 뒤에 날아올라 360도 회전하며 다시 발로 상대의 얼굴을 타격하는 초절정 무술의 기술. 마치 제비가 자신을 공격하는 덩치 큰 독수리를 향해 쏜살같이 파고드는 형세이다.
그렇게 맺은 기천과 박사규의 인연은 끈질겼고, 잔인했다. 1973년 軍에 제대한 박사규는 결혼하고 3년간 農事를 짓다가 상경해 이대입구에 있는 의상실에 취직했다. 재단과 디자인 보조 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배웠고, 남대문시장에서 의류 도매를 시작했다. 도매사업과 병행애 이태원에 큰 여성복 매장을 운영했다. 의류업계의 신화가 됐다. 당시 하루 5000만원 가량의 매출을 올렸다.
그는 매일 아침마다 자신의 승용차로 박대양 사부를 모시고 효창공원 등 서울시내 공원을 돌아다니며 기천을 전수받았다. 처음 3년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몽둥이로 맞으며 배웠다. 온몸에 피멍이 가실 날이 없었다.
기천의 첫번째 계율은 '기천은 보이지도 잡히지도 아니하고 무게도 형체도 이름도 없으므로 일체 말이나 글에 집착하지 말고 몸으로만 수행하라'였다.
古朝鮮부터 무인집단인 '조의선인'들이 익혔고, 그 뒤 기록엔 없으나 山中의 지킴이들에 의해 면면히 전해 내려왔다는 기천은 우선 내공을 강하게 단련한 뒤, 외을 익히는 무술이다. 특히 손과 발의 근육을 뒤틀어 자세를 오랫동안 힘을 키우는 '역근'동작을 하는 기본 동작인 '내가신장'은 기천 입문을 어렵게 하는 관문이기도 하다.
손바닥으로 돌을 박살내는 파석장과 날아오는 화살을 두 손 바닥으로 잡아내는 합장공은 물론이고, 몸에서 마음을 분리해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훤히 알 수 있는 환영신공의 경지에 오를 때까지 박사규는 모질게 수련했다.
기천을 수련하며 한편에선 사업을 키우던 박사규는 1998년 아이엠에프 경제위기에 빈털털이가 됐다. 주머니에 단돈 10만원을 갖고 그는 계룡산 갑사 입구의 庵子(암자)로 스며들었다.
능선 모양이 닭 벼슬을 닮았고, 龍이 웅크린 모습인 계룡산은 한국산 가운데 가장 氣가 세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들어온 박사규를 계룡은 포근히 안아줬다. 박대양으로부터 기천 문주 자리를 이어 받은 박사규의 하루는 계룡의 정기를 받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흰 한복을 입고 산을 오르는 모습은 사뿐사뿐하기가 날렵한 학과 같다. 산 정상에서 떠오르는 太陽을 가슴에 품으며 내가신장을 선다. 땅의 기운과 하늘의 정기가 내 몸을 통해 疏通(소통)한다. 우주의 기운이 배꼽 아래의 단전에 모인다. 호랑이가 공격을 하는 형세인 범도, 소가 무거운 쟁기를 끌고 가는 형세인 소도, 금빛 닭이 한 발을 들고 상대를 덮치는 형세의 금계독립 등 기천의 기본 동작을 행한다.
그리고 무예의 최고 단계인, 무술을 춤으로 승화시킨 '기천무'가 중중모리 가락의 거문고 산조 가락과 어울려 자연을 수놓는다. 가벼우면서도 육중하고, 느린 듯하면서도 번개같이 빠른 손과 발동작이 화려하면서도 절도 있게 펼쳐진다.
''비록 기천이 한민족 전통무술이라는 기록은 없지만, 이런 몸동작은 우리 민족에게만 있어요. 몸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지킴이의 전통을 강렬하게 느낄 수밖에 없어요.''
행하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선가의 불문율도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흰 수염과 붉은 얼굴빛이 멋지게 어울리며, 깊은 산속에서 전통무예를 지키고 가꾸는 박사규의 제자들은 매주 일요일 전국에서 모여든다.
박사규는 50여명의 제자를 연천봉 자락 수련장에서 직접 지도한다. 학생, 대학교수, 경찰, 군인, 무당, 스님 등의 직업을 가진 남녀 제자들은 10대부터 70대까지 연령층도 다양하다.
''이제는 자신의 몸에 생긴 강한 免疫力(면역력)으로 온갖 질병을 치유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 올바른 몸동작으로 건강을 되찾고 지켜야합니다. 그것이 기천의 존재이유이기도 합니다.''
12. 35년 公務員(공무원) 생활 중 가장 잘한 결정
- 국선도 수련 관세청장 백운찬
산새의 지저귐이 정겹다.
새벽이다.
떠오르는 태양의 햇살이 부끄러운 듯, 검붉은 암벽은 비단결 같은 雲海로 낮을 가린다.
발을 내딛는 소리가 경쾌하다.
사박사박.
소리뿐 아니라 몸놀림도 가볍다.
함께 冠岳山(관악산) 山行을 시작한 지 30분이 지났지만 그는 거친 숨소리를 내지 않는다. 아니 숨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땀도 흐르지 않는다. 평온한 숨소리는 몸 깊숙한 곳에서 시작되는 듯하다. 날렵하게 바위를 올라타고, 흐르는 물을 건너뛴다. 매우 산길에 익숙하다.
''매일 아침 冠岳山에 올랐어요. 오르내리면서 할 일을 정리하고, 아이디어 떠올리고.''
산 정상 못미처에 좀 너른 공터가 나온다. 군데군데 대들보를 지탱했던 바위의 흔적이 있다. 아마도 옛 절터인 것 같다.
''여기서 수련을 했어요. 혼자만의 즐거움이었지요.''
백운찬(59) 관세청장이 公務員 생활을 하면서 지친 몸과 마음의 치료제로 선택한 것이 國仙道였다. 깔끔한 도복으로 갈아입은 백 청장은 跏趺坐(가부좌)를 틀었다. 허리를 세우고, 턱을 잡아당긴다. 두 눈의 눈꺼푸은 가볍게 내려앉아 있다. 순간 정적에 빠져들었다.
몸 안에서 발산되는 기운이 자연의 정기와 부딪친다. 도복 속 丹田에서 강한 에너지가 꿈틀거린다. 손을 모으고, 다리가 교차된 자세는 마치 태아가 뱃속에서 보여준 자연스럽고 평온한 모습 같다.
''다리를 접는 것은 모든 欲望(욕망)을 끊는다는 의지입니다. 욕망의 집착에서 벗어나면 마음이 편해지고 고요해집니다.''
보이진 않지만 새벽의 맑은 공기가 코를 통해 몸 깊숙이 전달되는 느낌이 온다. 가슴이나 복부로 하는 호흡이 아닌, 배꼽 아래 단전으로 하는 호흡이다. 부드럽고, 고르고, 깊고, 완만하게 들이쉰다. 그리고 유연하고, 조용하게, 천천히, 길게 내쉰다.
'아! 이런 修練(수련)을 15년간 했으니 산에 올라올 때 숨소리가 안 들렸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백 청장은 山에 올라오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일반인들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숨을 내쉬고 들이쉬지만, 호흡 훈련을 하면 333호흡을 합니다. 세 걸음 가는 동안 들이쉬고, 세 걸음 가는 동안 숨을 멈추고, 세 걸음 가는 동안 내쉽니다. 물론 444, 555도 가능합니다. 이렇게 호흡하면 일반 호흡보다 5~6배의 산소량이 몸에 들어오니 숨이 찰 수가 없어요. 숨이 차서 헐떡거리는 것은 곧 몸에 산소가 부족하다는 반응이지요.''
눈을 뜨고 일어난다. 얼굴에 윤기가 돈다. 입가에 미소가 감돈다. 충만한 아침의 기운을 가득히 품었기 때문이리라. 손과 발, 허리와 어께, 목을 움직인다. 서두르지 않고, 두터운 동작이다. '입단행공'이다. 기운을 돌게 하고(운기), 기운을 축적하는(축기) 동작이다.
내공을 키워 筋力과 氣力을 강하게 하고, 氣의 흐름을 원활하게 한다. 버들가지처럼 유연하고 탄력 있다. 힘을 빼긴 했으나 온몸을 흐르는 기운의 기운참이 느껴진다. 두 손과 두 발로 하늘을 단단히 들어올리는가 하면, 십리 밖의 과녁도 맞힐 듯 기운차게 활을 당긴다.
''하늘의 큰 기운 휘몰아 굽이치니 은하수가 활처럼 휘고/ 구름을 혜쳐 광명을 펼치며 거친 소용돌이를 잠재운다.''
입단행공 수련을 하며 수없이 읊조린 시구다. 이제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는다.
그는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다. 행정고시를 통해 공무원이 됐다. 하동 '촌놈'이 출세의 길로 들어섰다. 일선 세무서에서 경험을 쌓다가 재무부 관리가 됐다. 증권국과 세제실, 대통령 비서실에 근무하며 금융실명제와 현금영수증제 도입의 주역이 됐다.
2000년대 초반 재정경제부 조세지출예산과장, 소득세제과장을 거쳐 세제실 조세청과장을 역임하는 동안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죽기 살기로 일했다. 몸은 시들기 시작했다. 가끔 검도와 등산을 하긴했지만 몸에 활기를 넣어 주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국회에 파견 근무하게 됐다. 마침 국회에는 국선도 同好會(동호회)가 있었다. 수련하면서 깨달았다. '精神은 몸에서 나온다'는 것을. 피곤하면 창의적인 생각이 나오지 않을뿐더러 짜증만 쌓였다. 결론은 體力이었다.
억지로 시간을 내었다. 智異山 종주도 했고, 雪嶽山(설악산) 가을 단풍도 즐겼다. 그리고 하루 한 시간씩 국선도 수련에 빠졌다.
''35년간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많은 결정을 해야 했어요. 그중에 국선도를 선택한 것은 아주 잘한 決定(결정)으로 꼽고 있어요. 몸과 마음이 편해지거든요.''
지난 2013년 3월 직원 4600명의 관세청장에 취임한 그는 청사의 빈 공간에 국선도장을 만들어 직원들에게 국선도를 소개했다. 본인은 그 수련장에 가지 않는다. 직원들이 불편해하기 때문이다. 그는 고차원 수련을 위해 기본 체력을 다지는 단계인 정각도 3단계 수련을 마쳤다. 지금은 9단계 가운데 4단계인 眞氣丹法 단계다. 서울과 대전을 오고 가는 차 안에서도 호흡 수련을 한다.
''국선도는 전통무술인가요?''
''오랫동안 한민족에게 전해 내려오는 구전심전(말로 마음으로 전해오는)의 심신건강법이죠. 청산선사가 20년 동안 스승으로부터 전수를 받아 1967년붙 속세에서 전하기 시작했어요. 기록은 없지만 마음으로 느껴져요.''
숨고르기, 몸 고르기, 마음 고르기 과정과 기혈순환 유통을 통해 강하고 편한 몸과 마음을 만드는 국선도는 호흡에 중점을 둔다. 특히 '하늘 기운과 땅 기운이 만나는' 하단전에 집중한다. 단전호흡을 하면 횡격막이 6~8cm 아래로 내려가 공기 유입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복부 근육이 단련되면서 내장이 골고루 자극된다고 한다.
''초로 비유를 해봅시다. 生命力을 뜻하는 精은 하복부이고 초의 몸체입니다. 정신활동의 원동력인 氣는 머리에 있고 초의 불꽃입니다. 마음의 기운인 神은 가슴에 있고, 초의 빛입니다. 몸통인 초가 튼튼하고 건실해야 초의 불빛이 더욱 강하고 널리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튼실한 초로 만드는 백 청장은 미끄러지듯 산을 내려간다. 금세 보이지 않는다.
17. 병은 들어오는 길이 있으면 나가는 길도 있어요
- 87살 기동지도사 윤금선
새벽 3시, 잠에서 깬다.
結跏趺坐(결가부좌).
두 손을 丹田에 모으고 두 눈을 지그시 감는다.
숨을 깊숙이 들이마신다. 사방은 고요하다.
점차 깊이 명상에 빠져든다. 몸의 혈문이 스르르 열린다. 우주의 에너지가 몸으로 들어온다. 내쉬는 숨으로는 몸 안에 있던 탁한 기운을 뽑아내고, 신선한 氣運을 마신다.
온몸은 새로운 에너지로 충만해진다. 신선한 에너지는 단전으로부터 뿜어져 나와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전달된다.
한 시간의 단전호흡을 마친 윤금선(87) 할머니 30년째 한결같이 하루를 이렇게 시작한다.
''寅(인)시는 오전 3시부터 5시 사이에요. 子正부터 天地의 氣運이 陰에서 陽으로 바뀌고, 寅時가 되면서 陽 기운은 고조돼요. 이때 단전호흡을 하면 낮에 하는 것보다 곱절 이상 좋은 氣運을 빨아들일 수 있어요. 이 좋은 시간에 어찌 잠을 잘 수 있나요?''
그는 우주의 에너지를 먹고 산다. 그러기에 하루 한끼만 먹고도 산다. 1일 1食이다. 잠도 3시간만 잔다. 얼굴 혈색은 복숭아 빛이다. 카랑카랑 목소리에는 힘이 넘친다. 머리를 바닥에 대고 양손의 손가락 한 개씩만 짚고 물구나무를 선다. 다리를 180도 벌리고 앉아 自由自在(자유자재)로 방향을 튼다. 허리를 뒤로 90도 이상 꺾은 자세로 오랫동안 단전호흡을 한다. 10대 체조선수 같은 자세로 몸을 푼다. 어떻게 그 나이에 그런 동작이 가능할까?
윤씨는 중국동포였다. 50대 중반까지 중국 창춘의 병원에서 醫師로 일하다가 퇴직했다. 그러나 의사였음에도 그의 몸은 종합병동이었다. 간경변 초기에 십이지장궤양, 위궤양, 관절염에 목디스크, 거기에 흉막염까지... 의사였음에도 그의 육체가 그렇게 망가진 이유는 떠올리기조차 힘든, 어렵고 괴로운 젊은 세월의 결과였다.
고향이 慶北 달성인 윤씨는 15살이던 1944년에 滿洲(만주)로 이주했다. 당시 만주로 가면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온 가족이 이주한 것이다. 그러나 만주는 혹독한 추위와 거친 자연환경으로 살아가기가 더 힘들었다. 아버지는 부짓집 머슴으로 들어갔고, 몸을 의탁한 큰아버지는 어린 윤씨를 이웃동네 나이 든 남자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그때 마침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서 입대를 권유했다. 장제스의 국민당과 치열한 내전을 벌이던 마오쩌둥의 팔로군은 젊은이들이 필요했다. 변복하고 윤씨 가족에게 접근한 팔로군 간부는 ''入隊(입대)하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고 부추겼다.
맨발로 40리를 걸어 연길의 팔로군에 두 오빠와 함께 입대한 18살이 된 윤씨는 곧바로 전선에 투입됐다.
별다른 교육도 없이 看護兵(간호병)이 된 윤씨는 전선을 따라다니며 부상당한 병사들을 治療했다. 하루하루 生과 死를 넘나들었다. 수수밥과 옥수수밥으로 延命(연명)했다. 물이 없어 말 오줌으로 갈증을 면했다. 수혈할 피가 없어 간호병들은 즉석에서 자신의 피를 뽑아 환자들에게 수혈을 했다.
팔로군은 大長程(대장정)을 거쳐 마침내 국민당을 이겼다. 두 오빠는 전쟁에서 살아오지 못했다. 전쟁 중에 윤씨는 간호병에서 看護師로 승급했고, 군의군관학교에서 공부를 해 軍醫官이 됐다. 또 다른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韓半島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 윤씨는 다시 전쟁터에 투입됐다.
''그때 일은 다시 기억하기도 싫어요.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어요.''
두 번째 전쟁에서도 살아 돌아온 윤씨는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혁명열사 처우를 받았고, 의과대학에서 교육을 받아 정식 內科 醫師가 됐다. 그러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한 환자로부터 氣功을 배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귀가 솔깃했다.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기를 서양 의학을 한 윤씨가 받아들이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윤씨는 조금씩 기공에 빠져들었다.
''단전호흡을 하면서 冥想에 들어가면 상상할 수 없는 에너지의 움직임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 에너지는 나의 몸에 붙어 있는 나쁜 에너지를 밀어냈고, 질병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을 떠나기 시작했어요.''
윤씨는 열심히 기공을 배웠다. 사흘 기차를 타고 가서 배우기도 했고, 그렇게 배운 기공을 자신의 환자에 적응시키기도 했다. 양약으로 치료를 못 하던 환자에게 자신이 배운 기공을 가르쳐주니 병세가 눈에 띄게 좋아지게 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유언으로 ''비록 중국인들 사이에서 살았지만, 죽은 몸은 중국 땅에 묻지 마라. 화장을 해서 강물에 뿌려라. 뼛가루라도 故鄕(고향) 합천에 닿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고향이 그리웠다. 평생 잊고 살았던 자신이 태어난 故鄕에 가서 살고 싶었다.
마침 한국의 정신과학연구소에서 윤씨를 기공과학연구원으로 招請(초청)을 했다. 5년 계약으로 한국에 왔다. 제자들이 많이 생겼다. 그 제자들이 도와줘서 윤씨는 2004년 한국에 歸化(귀화)했다. 그리고 자신의 호인 '난강'을 따 '난강기공연구원'을 차렸다. 윤씨를 따르는 제자가 수백 명이다.
''난강의 뜻처럼 모든 이에게 따뜻한 기운을 주고 싶어요.''
윤씨는 평생 육식을 하지 않았다.
''고기는 죽을 때 업을 남겨요. 그런 고기를 많이 먹으면 사람의 몸에 그 업이 쌓여 나쁜 결과를 남깁니다.''
윤씨는 아침저녁엔 두유나 우유를 한잔 먹고, 식사는 점심에만 한다. 그나마 '누룽지'와 채식이다.
''남들은 먹는 재미에 산다고 하지만 저는 안 먹는 재미에 살아요. 먹지 않으면 氣感이 살아나고 氣力도 소모되지 않아요.'' 윤씨 건강의 출발이다.
''火가 나면 흰 사발에 맑은 물을 담아 눈앞에 놓고 지그시 쳐다보세요. 火를 물(水)이 끄는 것을 10분 내에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윤씨가 勸(권)하는 화를 푸는 비결이다.
''이 세상 울고 태어났는데, 살면서 울 일도 많았는데, 갈 때는 울지 말아야죠. 항상 어린이 같은 마음으로 생기를 지니고 잘아야 해요. 그래야 주변사람들에게 좋은 波動(파동)을 줄 수 있어요.''
50대 중반에 시작한 기공으로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靑春의 기운을 내뿜는다.
''병은 들어오는 길이 있으면 나가는 길도 있습니다.''
윤씨는 환하게 웃는다. 그의 흰 머리카락에서 윤기가 난다.
24. 단 세 가지 동작으로 '초감각' 단련
- 신무 장성일
정말 간단하다. 복잡한 동작이 없다. 단지 3가지 동작이다.
日本에서는 '무술 중의 무술'이라는 뜻으로 '皇武'로 불렸고, 韓國에 넘어와서 '신비로운 무술'이라는 뜻의 '神武'로 불린 이 무술의 수련 동작은 낯설었다.
먼저 두팔을 벌려 중심을 잡는다.
발의 모양은 기역자로 놓는다. 어깨를 돌려 손의 끝은 진행 방향을 가리킨다. 뒤쪽의 발과 팔을 순간적으로 앞으로 옮기며 다시 두 팔을 쭉 뻗는다. 손끝에는 힘을 준다. 두 번 前進한 뒤에는 몸을 틀어 방향을 바꾼다. 움직일 때마다 몸의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누구나 설명을 들으면 곧 따라할 수 있다. 점차 속도를 높인다. 움직일 때마다 몸의 중심이 바뀌는 바람에 균형을 완벽하게 유지하긴 쉽지 않다.
광주에 사는 神武의 전인 장성일(68)씨를 만나 이 동작을 배우고 나서, 한 달 남짓 이 단순한 동작을 틈이 날 때마다 해보았다. 복잡하고 화려한 무술에 익숙한지라, 저렇게 단순한 동작이 과연 무술로서 어떤 의미가 있고, 몸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직접 체험하고 싶었다.
처음엔 1분을 하기가 힘들었다. 우선 지루했고, 忍耐(인내)가 필요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 단순한 동작에 빠져들었다. 손끝에 氣가 많이 생기는 느낌과 함께, 몸이 敏捷(민첩)해지는 것을 느꼈다. 온몸의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장씨는 이 수련을 하면 신체의 균형이 발달하며 질병을 없애주는 것은 물론이고, '超感覺'적으로 몸이 각종 자극에 반응한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믿기 힘들었지만', 攻擊(공격)과 防禦(방어) 동작이 자신이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된다고 장씨는 설명한다.
젊은 시절 跆拳道 4단에 중국 무술, 차력 합기도, 요가, 봉술 등 각종 무술을 섭렵한 '종합무술인' 장씨가 신무를 접한 것은 日本에서 皇武를 익혀 1943년 귀국한 스승 설송 최기현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日帝强占期 시절 일본에 유학한 최씨는 중학생 때부터 유도를 배워, 메이지大 의예과를 다닐 때는 유도 4단의 고단자였다. 최씨의 日本人 친구 '호시 데쓰신' 역시 유도 高手였는데, 그 일본인 친구가 어느날 동네 불량배로부터 참을 수 없는 굴욕을 당했다. 불량배는 좁은 공간에 그를 몰아넣고 배에 칼을 들이대며 ''피할 수 있으면 피해보라'고 위협했다.
심한 조롱을 당하고 풀려난 그는 그 뒤 3년간 일본 全域(전역)을 돌며 그런 위기의 순간을 극복할 수 있는 무술을 찾았다. 각종 무술의 고수를 찾았지만 해결책이 없었다. 그러다가 한 허름한 사찰 입구에 쓰여 있는 '卍(만)'자를 보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맨 것이 저것이구나''하고 문득 깨쳤다고 한다. 갈고리 모양의 교차된 부분에 몸의 중심을 실은 채 팔다리를 빠르게 回轉(회전)시킬 수 있다면, 四方으로부터 공격을 쉽게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回轉 武術이 탄생한 것이다.
그는 4년간 이 무술을 수련한 끝에 皇武를 완성했다고 한다. 그 이전엔 최씨와 대련하면 지곤 하던 그는 이 무술을 몸에 익힌 뒤에는 손쉽게 최씨를 제압했다. 그와 대련을 해 몸이 부딪치는 순간 번번이 나가떨어진 최씨는 곧바로 그의 제자가 됐고, 1년 6개월 동안 수련을 했다고 한다. 결국 최씨는 응용 동작 120가지를 익혀 귀국했다. 귀국한 뒤 최씨는 금강산의 기암괴석을 바라보며 더 깊이 수련해 황무를 발전시킨 神武를 완성했다.
최씨는 全南 장흥에서 接骨師(접골사)로 20여 년간 가난한 이들에게 무료로 치료를 해주는 틈틈이 자신이 닦은 무술을 선보였다. 손가락으로 대나무를 도끼로 자르듯 조각내는가 하면, 동전 3개를 겹친 채 엄지와 검지로 엿가락처럼 늘이고, 통나무에 손가락으로 대못을 박는 괴력을 보이기도 했다는 것. 또 일본 형사가 그를 불량선인으로 몰아 몽둥이로 고문하다가 포기했다고 한다.
최씨는 정형외과가 없던 당시 뼈가 부러진 환자를 치료하다가 붕대가 떨어지면 자신의 이불보를 찢어 상처를 묶어 주기도 했다고 한다. 약을 전혀 쓰지 않고 손의 氣運으로만 치료를 했던 최씨는 자신이 설립한 중학교와 소유한 땅을 사망하기 전 나라에 獻納(헌납)했다.
제자를 찾던 최씨(당시 65살)는 1974년 자신의 동생과 알고 지내던 장씨가 세차례 찾아와 간절하게 제자로 받아주길 원하자 수제자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장씨는 제대 후 뛰어난 무술 솜씨로 한중 합작 무협영화 '협기'에도 출현했다. 최씨로부터 4년여 동안 신무를 수련한 장씨는 '武醫同術(무의동술)'(무술과 의술은 한가지)이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接骨術을 비롯한 각종 의술을 배워 무료로 환자들을 치료해주었다.
장씨는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태어나서 걷는데 1년 가량 이 걸리는 均衡(균형) 잡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걸음걸이는 손과 발이 척추를 중심으로 균형을 잡을 수 있어야 가능하다. 즉, 팔다리가 이루는 水平的 중심과 척추가 이루는 垂直的(수직적) 중심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 여기에 回轉을 가하면 놀라운 에너지가 발휘된다''고 신무를 설명한다.
이 팔다리 회전 동작을 수련하면, 비록 단순한 도악이긴 하나 좁은 공간에서도 초감각적으로 방어와 공격을 할 수있다고 한다. 손과 발을 가속화하는 과정에서 '단단한 均衡(균형)'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 균형은 五臟六腑의 균형으로 이어져 육체의 건강을 가져온다고 한다.
''마치 사람이 自轉車(자전거)를 배우면 平生 다시 배우지 않아도 자전거를 탈수 있듯이, 이 무술을 한번 익혀 수련하면 평생 쉽게 혼자 익힐 수 있어요. 사실 무술을 수련해도 평생 일반인들이 무술을 타인에게 쓰는 경우는 흔치 않아요. 이제 무술의 개념을 바꿔야 합니다. 武術이 어떻게 우리의 健康에 도움을 줄지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장씨는 자신에게 신무를 배운 제자들은 육체적인 건강뿐 아니라 창의력과 통찰력, 직관력 등 정신적인 감각도 크게 향상된다고 한다.
''단순한 동작이 모든 무술 동작을 統合(통합)한다'고 말하는 장씨의 손끝에서 공간이 '쫙'하고 갈라진다.
28. 통즉불통, 움직이면 낫는다
- 전통 건강술 '오금희' 한의사 정행규
'화랑이가 허리와 다리를 늘이고 몸을 돌려 앉는다'
'곰이 허리를 구부려 바끝을 잡는다'
'원숭이가 왼어깨를 펴서 팔을 뒤로 들어뜨린다.'
'학이 가슴을 안고 오른발로 선다'
'사슴이 하늘을 우러러 사방으로 목을 돌린다'
동물원 사육사의 도움에 대한 정밀한 관찰일자일까?
호랑이, 곰, 원숭이, 사슴, 학 등의 동물은 인간보다 두뇌 능력은 떨어지지만, 신체적 능력은 뛰어나다. 자연 속에서 약육강식의 원리에 따라 생존하는 동물들은 나름대로 특별한 신체 능력을 키우며 進化했다.
1900년 전으로 잠시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중국 주한시대의 명의 화타는 백살이 넘었으나 20대 청년의 건강을 지니고 있었다. 화타는 어느 날 關羽(관우)가 독화살을 맞고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평소 관우를 흠모하던 화타는 스스로 관우에게 달려갔다.
관우는 천하의 명의인 화타가 자신을 치료해주기 위해 왔다는 소식에 기뻤다. 화타는 당시에는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외과 수술방식으로 관우의 퉁퉁 부은 팔을 치료해 주었다. 주변 사람들은 처음 보는 외과 수술 모습에 부들부들 떨었지만 관우는 태연하게 바둑을 두며 고통을 표현하지 않았다.
관우는 고마움에 황금을 사례로 주었지만 화타는 이를 거절하고 약봉지를 남기곤 떠나려 했다.
관우가 물었다.
''어찌 그리 젊어 보이시나요?''
화타가 대답했다.
''하하, 별거 있나요? 오금희를 열심히 했더니 그렇습니다. 몸이 불쾌할 때 일금의 희를 하면 땀이 나고 피부가 좋아지지며 신체는 가벼워지고 식욕이 생깁니다.''
오금희는 호랑이 등 다섯 가지 動物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관찰한 화타가 스스로 창안한 건강체조였다.
현재로 돌아오자. 한의사인 정행규(63) 박사는 고고 절업 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고향(경남 고성)의 면사무소 공무원으로 3년간 근무했다. 정씨는 한의학을 하기로 결심하고 두번의 시도 끝에 경희대 한의학과에 입학했다.
늦게 하는 공부이기에 남보다 열심히 했다. 건강은 갈수록 나빠졌다. 이런저런 운동을 열심히 했다. 그러다가 중국의 양생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화타가 창안했다는 오금희를 접했다.
1900년 전에 한의사였던 중국의 화타가 만든 건강체조를 한국의 한의사가 몸에 익힌 것이다.
''이렇게 몸에 좋은 건강체조를 왜 일찍 하지 않았나 후회됩니다.''
실제로 정 박사는 還甲(환갑)이 넘은 나이지만 젊은이 못지않은 건강한 몸을 갖고 있다. 정말 화타 오금희가 효과가 좋은 것일까?
정 박사는 매일 오금희를 한다. 아침에 한 시간씩 동물의 몸짓을 따라한다. 보기엔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호랑이처럼 손목과 발목의 관을 움직이고, 곰처럼 허리를 돌린다. 날렵한 원숭이가 나무에 매달린 것처럼 팔을 뻗고, 사방을 둘러보는 사슴처럼 목을 돌린다. 그리고 학처럼 한 발로 서서 온몸을 움직인다.
'후한서'의 화타전에 따르면 화타는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인체는 運動을 시켜주는 것이 좋다. 신체를 움직이면 血脈의 흐름이 좋아지며, 病이 없어진다. 옛날 神仙들은 신체를 잡아당기고 關節을 움직여서 老化를 막았다. 나는 내가 만든 이 술법을 오금희라고 이름 붙였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다섯 동물의 행동을 하나씩 따라서 하면 氣가 맑아진다.''
정 박사는 화타의 오금희는 '莊子'에 나오는 '웅경조신'(곰이 나무를 기어올라가는 듯, 새가 다리를 쭉 뻗는 듯)은 건강 장수를 위한 것일 뿐에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이른바 도인술의 시초이다. 天地의 氣를 자신의 몸에 끌어들이고, 몸의 關節을 늘이는 방법으로 無病長壽하는 神仙이 되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정 박사는 도인술은 ''움직이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고, 움직이면 문제가 없다''는 단순한 원리에서 출발한다고 설명한다. 즉 , 통즉불통 불통즉통(통하면 아프지 않고, 안 통하면 아프다)이다. 누구나 운동을 통해 기혈의 순환을 원활하게 하면 통증이나 병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용맹하고 사나운 호랑이의 동작은 강한 肺의 기능과 기력을 주면서 皮膚(피부)를 단련시킨다고 한다. 사람의 모습과 같은 원숭이는 활동성이 강한 사자와 脾臟을, 허리가 강한 곰의 무겁고 육중한 움직임은 下體와 肝을 단련시킨다고 한다. 새의 동작은 心臟을 강하게 하고, 사슴은 腎臟을 강하게 만들어 생생한 생명력을 준다고 한다.
결국 오금희는 인체의 心臟, 肝臟, 脾臟, 폐장, 콩팥을 강하게 하기 위하 기공체조인 셈이다.
정 박사는 실제로 오금희를 한 뒤 특히 척추가 바로 서고 몸의 균형이 바로 잡혀가는 것을 느낀다고 한다.
''아침마다 거울을 봅니다. 얼굴의 주름이 조금씩 사라집니다. 얼굴의 주름도 좌우가 다릅니다. 주름 간격의 크고 작음은 몸의 좌우가 불균형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정박사는 사람의 얼굴과 外形 변화에 대한 눈이 밝다. 정박사가 공부한 형상의학은 1976년 지산 박인규 선생이 동의보감에서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진단하는 것을 발전시켜, 난치병 치료에 효과가 있는 학문이다.
형상의학회 명예회장이기도 한 정 박사는 ''힘을 뺀 채 구부렸다가 가슴을 쫙 펴는 움직임은 막혀 있던 毛細血管을 열어줘, 체내에 있는 나쁜 氣를 밖으로 排出(배출)하여 신선한 空氣를 몸 안으로 빨아들이는 효과를 가져온다''고 오금희를 설명한다. 또 ''아랫배에 힘을 주고 몸을 구부리거나 몸을 숙여 무릎 껴안기 등의 동작들은 잃어버렸던 젊음 되찾아오는 좋은 動作''이라고 한다.
''허기심(마음을 텅 비우다), 실기복(배를 든든하게 채우다), 강기근(근육을 강하게 하다), 약기골(관절을 부드럽게 풀어주다)의 네 가지가 화타 오금희의 기본원칙''이라고 설명하는 정 박사는 자신의 한의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약에 의존하기보다는 몸을 움직여 健康을 찾으라고 충고한다고 한다.
다시 화타 시대로 돌아가자. 關羽의 적이었던 조조는 심한 頭痛에 시달렸고, 조조를 진찰한 화타는 ''이 병은 外科 手術을 하지 않으면 치료할 수 없소이다''라고 말했다. 화타가 관우를 존경하고 그를 치료해 준 사실도 알고 있던 조조는 수술을 핑계 삼아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그를 죽인다.
화타는 죽기 전에 자신의 의학 이론을 정리한 책을 써서 옥문을 지키고 있던 포졸에게 주었으나 포졸은 화타의 책 때문에 자신이 벌을 받을까봐 책을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화타의 의서는 사라졌으나 화타가 만든 건강술인 오금희는 民間에 퍼져 지금까지 전해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