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郞外史(화랑외사)'
김범부 저
序
花郞은 우리 민족생활의 역사상에 가장 중요한 地位를 차지하게 된 一大事件(일대사건)이다. 그러므로 花郞은 언제나 마땅히 國史上의 學理的 究明이 요구되는 일대의 課題로서 우리 學徒에게 있어서는 모름지기 努力硏鑚(노력연찬)의 일대숙제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다지 시급하기 까지는 않은 것이라 하더라도 이제 와서 우리 국민도덕의 원칙을 闡明(천명)함은 遲晚之嗼(지만지막)이 없는 바도 아니다. 그런데 이 국민도덕의 원칙은 民族的 인생관의 傳統的 요소를 제처 두고는 찾을 수도 밝힐 수도 없는 것이니, 진실로 이것을 찾고 밝히려면 우리는 할 수 없이 花郞을 더듬어 보지 않을 수 없는 터이다. 아니 그 源泉(원천)을 정확히 탐구해서 국민도덕의 전통적 根據(근거)를 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보다도 더욱 시급한 것이 또 없지 않으니 우리는 今日(금일)에 있어서 空前의 국난에 직면하고 있는 即地(즉지)의 사실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이날이야말로 거족적 총력량을 결집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요, 그 총역량이란 一代의 그것만이 아니라 역사적 전력량을 현재란 焦點(초점)에 集注(집주)하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다.
그런데 靜肅(정숙)히 우리의 歷史를 回顧(회고)하건데 何代 何人의 정신과 행동이 과연 금일 우리의 歷史的 力量(역량)으로서 살릴 수 있는 것인가?
보라 上下千古의 맥락을 짚어서 이것을 더듬어 오다가 '여기다'하고 큰 숨을 내어 쉴 자리는 역시 '新羅統一 旺時(왕시)의 花郞을 두고는 다시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軍人(군인) 정신훈련은 말할 나위 없고 청년 일반의 교양, 나아가서는 국민일반의 교양을 위해서 花郞精神의 認識(인식), 體得(체득)은 실로 짝없는 眞訣(진결)이며 시급한 대책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저자 일찍부터 花郞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생각나는대로 적어 둔것이 별 수 없는 채 그래도 그것을 읽어 보면 역시 한 편의 論稿(논고)가 될 양도 한지라 혹시 緩急間(완급간)에 一助(일조)가 될까 하여 수차 만져도 보았으나
년래에 무엇이 그리 紛忙(분망)했던지 아직껏 鋟梓(침재)에 미치지 못하고 이제 출간하는 花郞外史는 기실인즉 어느덧 육년전(巳卯冬)에 이미 탈고했던 바 이제야 비로소 출간의 기회를 얻어 되고 보니 무엇보다도 자신의 疎忽(소홀)을 悔悟(회오)할 일이다. 그리고 이 花郞外史는 제목에 명시하는 그대로 정사가 아니라 外史란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정사를 두고 외사의 제목을 골랐을까?
일찍 김대문의 花郞世記가 있었다고 삼국사기에 명기한 바 있거니와 花郞의 전통이 반드시 김씨의 세기만이 아닐 것도 짐작할 수 있건만 이제 와서는 어느것이고 볼 수 없는 터이며, 다만 삼국유사 삼국유사등의 문헌을 통해서 零落(영락)한 기록을 收拾(수습)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몇 번이나 花郞世記를 부질없이 念誦(염송)하다가 역시 별도리 없이 금일에 있어서 花郞정신 花郞생활의 活光景(활광경)을 描出(묘출)하려면 역시 說話(설화)의 양식을 선택해야겠고 이러한 양식을 선택하는 이상은 얼마든지 윤색과 연의가 필요한 것이라 그러고 본즉 저절로 외사의 범위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外史라고 해서 荒唐無稽(화당무계)한 것은 自初(자초)로 경계할 바이오 외사의 의의는 오히려 정사 이상으로 활광경을 寫傳(사전)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본편의 필치는 拙劣(졸렬)하나 그 윤색이라 할지 연의할지가 실록의 진면목을 정확하게 활현하자는 데 그 본의가 있다는 것을 독자가 알아 주기만 하면 저자는 이것으로써 만족할 것이다.
그리고 花郞外史에 수록된 인물은 반드시 花郞의 명목으로서 전해진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 정신과 행동이 花郞의 풍격과 동조한 것을 類聚(유취)한 것이니 花郞외사는 본래부터 그 제도의 考据(고거)에 置重(치중)한 것이 아니오 오로지 그 精神과 風格(풍격)의 闡明(천명)에 본령을 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제목을 花郞의 혈맥 혹은 풍류외사라고 붙이기는 했거니와 花郞의 운동은 원래 新羅에서 위주한 것이지만 그 精神과 風格만은 당시로는 百濟 高句麗에도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요, 또 후대로는 高麗 한양을 통과해서 금일에 이르기까지 그 혈맥은 依然(의연)히 躍動(약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花郞외사는 新羅만이 아니라 高句麗 百濟 高麗 李朝까지의 열전을 隨時(수시)해서 公刊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독자에게 또 한 말씀 드릴 것은 花郞을 正解하려면 먼저 花郞이 崇奉(숭봉)한 風流道의 정신을 이해해야 하고 풍류도의 정신을 이해하려면 모름지기 풍류적 인물의 風度와 생활을 翫味(완미)하는 것이 그 要諦(요체)일지라 그래서 그 현묘한 풍류도의 淵源(연원)을 默想(묵상)하던 나머지 물계자 백결선생을 발견한 것이니 누구든지 진실로 花郞外史를 詳讀(상독)하는 이는 물계자 백결선생으로부터 그 讀次(독차)를 取(취)하면 거기에는 暗然(암연)히 一脈貫通(일맥관통)의 묘리를 짐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本稿(본고)의 대부분은 우리 趙璡欽君(조진흠군)이 巳卯冬(사묘동)에 이제는 폭파된 明洞一隅(명동일우)에서 손을 불면서 필기를 받았던 것인바 趙君(조군)은 六.二五事變中에 存亡消息(존망소실)이 떨어지고 오늘까지 그 踪跡(종적)이 杳然(묘연)하다. 그런데 조군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趙君은 花郞정신의 사람, 그 중에는 사다함의 化身을 연상케 하는 君의 風格인지라 아마 苟且(구차)한 삶을 버리고 당당한 죽음을 취했을 것이라 한다.
이제 그 舊稿(구고)를 다시 만지면서 그 일점 사기없는 璡欽(진흠)의 風貌(풍모)를 생각하니 이에 나의 心事를 무어라 할지 形言할 바없다. 다만 이 글이 세상에 나감으로써 긴 세월을 吾族(오족)의 혈관 속에 졸고 있는 萬千의 花郞이 깨어나게 된다면 璡欽(진흠)으로 말미암은 이 가슴의 멍울이 풀릴까 한다.
光復後 甲午 暮春日(모춘일)
釜山 寓舍(우사) 著者 草
목차
花郞外史화랑외사
新羅(신라)의 祭主(제주) 가시나니(哭 凡父 金鼎卨(김정설)先生)
삼간序文
중간序文
초간序文
序
1. 花郞哥
2. 사다함
3. 김경신
4. 불녕자
5. 마도형제
6. 김경운
7. 소나부자
8. 계론부자
9. 필부
10. 물계자
11. 백결선생
발문- 김동리
*부록- 국민윤리구조
1. 해제
2. 국민윤리의 현상
3. 국민윤리의 歷史性
4. 국민윤리의 普遍性(보편성)과 特殊性(특수성)
5. 韓國적 국민윤리의 전통
-花郞정신-
기1.
기2.
김범부선생 略歷(약력)
1. 花郞哥
너는 누구며 나는 누구냐
살아 사나이 죽어 사나이
끓는 한 줄기 花郞의 피로
티 없는 피는 죽음이 없다
''花郞을 보라 앞으로 간다
해달이 밝아 별이 나고나
花郞을 보라 앞으로 간다
앞길이 터져 질편하고나''(후렴)
무지개 띠에 꽃송이 사매
봄바람 맞아 나부끼나니
花郞이 피어 나라가 피어
花郞의 나라 永遠의 꽃을
말은 가자고 굽을 쳐 울고
칼은 번뜩여 번개를 치네
너도 갈까나 나도 갈까나
때 만난 靑春을 지쳐 두다니
이제 승전고 오늘 승전고
깃발이 펄펄펄 바람도 살아
하늘은 높고 땅은 넓은데
장부의 숨결이 시원하고나
*花郞哥에 대하여
花郞에게 있어서는 音樂이 본래 그 주요한 과목이고 본즉, 노래 역시 그러한 것인지라 花郞이 있고는 노래 없을 수 없는 일인 바에 그 당시 花郞단체의 노래가 있었을 것은 알기 쉬운 일이다. 그러기에 花郞이 창설되던 바로 그 眞興王 당대에 道令哥(도령가)가 제작되었다는 것은 삼국사기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거니와 이 또한 千秋恨事(천추한사)로서 그처럼 由來 깊은 도령가의 사슬만은 이제 와서 찾아 볼 길이 전혀 없는 터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천추의 한사가 어찌 이것만이랴.
잃어버린 보배와 뉘우칠 일도 하도 많으니 이제 우리로서는 찾아 볼 것을 찾는대로 찾아 보다가 하는 수 없을 때는 그와 방불한 것이라도 만들어 보고 될 수 있는 데까지는 그만한 것을 꼭 성취할 결의를 할 수 밖에 딴 재주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 도령가를 찾을 길 없어 한탄하던 나머지에 감히 試作(시작)을 해 본 것이 이 花郞가란 拙篇(졸편)인바 혼자 요량으로는 花郞哥는 곧 도령가의 補亡(보망)인양 하자는 셈이다.
그런데 徒領(도령)은 곧 花郞일지나 花郞은 郞徒(랑도)의 首領(수령)이라, 郞徒의 首領을 徒領이라 부르게 된 것은 언제나 그럴 수 있는 일이라 할 것이다. 이제도 총각의 존칭을 도령이라 하는 것은 花郞은 의례히 童男(동남)을 추대하던 遺風餘韻(유풍여운)을 짐작할 수 있는 바이다.
그는 그렇다 하고 이따위 졸작으로써 花郞哥란 이름도 오히려 미안한터이거늘 하물며 道領哥의 補亡이란 부끄러운 말씀이다.
그러나 하도 궁금해서 그런 궁한 생각을 한 것이니 이를 아는 이는 아마 좀 웃어 주기나 할는지...
2. 斯多含(사다함)
花郞 斯多含은 奈勿王 七世孫이다. 그 어른 仇梨知(구리지)도 역시 重職(중직)에 있었다.
사다함은 모든 것이 남과 달랐다. 風貌(풍모)가 뛰어나게 아름다웠을 뿐 아니라 특이한 性格(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처음 화랑으로 推戴(추대)를 받게 된 조건은 물론 그의 풍모도 풍모였지만 그보다도 그의 특이한 성격이 그때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격을 준데 있었다. 사다함의 미모란 또 특이한 것이어서 그냥 아름답다기보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금시 陶醉(도취)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그의 성격의 발원이었던 것으로 그 풍모는 곧 그 성격이었다.
언제나 맑고 빛나면서도 어딘지 눈물 고인 듯한 그 두 눈, 미소를 띠운 듯하면서 오히려 哀愁(애수)에 젖은 그 입, 정경운 목소리에 설음을 띤 그 語調, 그러면서 어려운 일이 있을 적마다 반드시 남의 앞장을 서던 그 勇氣, 모든 利益이란 이익은 모두 남에게 사양을 해 버리는 그 雅量(아량), 누구의 억울한 소문을 들으면 잠시도 참지 못하던 그 俠氣, 이 모든 아름다움은 그냥 타고난 그의 성격이었으며 동시에 그의 풍모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풍모와 이러한 성격으로써 멋(風流)을 尊尙(존상)하던 그 시대의 많은 사람에게 귀염과 숭배를 받았다는 것은 알기 쉬운 일이다. 그래서 그 열정이 조금도 남자에 밑질리 없는 新羅의 아가씨들은 언제나 사다함을 두고 말썽이었다.
아가씨들이 모였을 때 일어나는 남자 이야기의 절반 이상은 사다함에 관한 것이었고, 어떤 때는 온통 사다함의 이야기로 한판 법석이 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아가씨들이 사다함의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는 것은 사다함의 美貌(미모)도 그 중대한 조건이 아닌 바 아니었지만, 그보다도 아무도 그의 사랑을 받아 본 여자가 없다는 데 있었다.
괴벽하거나 정이 없거나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구나 반겨 다정스럽게 대해 주는 사다함이언만 어떤 아가씨와도 긴 시간을 이야기할 여가를 가져본 일이 한번도 없었다. 그는 어떤 아가씨의 인사에도 고맙게 답례해 주기는 하나 따로 어디서 애정을 속삭인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나라 걱정을 같이 하는 同志들의 여러 가지 주선을 해주기 위해서 언제나 쉴 사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쌀쌀하고 매정스러워 그런 것도 아닌 사다함인지라 그러면 그럴수록 아가씨들의 마음은 더욱 안타까움에 탔던 것이었다. 그리고 사다함 자신도 겨를도 겨를이려니와 사실은 어떤 여자도 온통으로 사랑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사다함은 너무나 순정적이요 열정적이었다. 그는 일찍 死生을 맹세한 친구 武官郞(무관랑)이 作曲하고 자기가 지은 '식기 전에'라는 노래를 즐겨 불렀다.
잔을 들어
사랑으로 고인 잔을
식기 전에 이 잔을 들어
피는 뛰어
피는 살아
어젊은 피는 붉어 붉어
님하 아손 님
늘 보아도 아손 님
고이려 고이려 무엇으로 고이려
지고져 나는 애달픈 꽃이여
시들기 전에 져 버리고져
(註) 어젊은- 아주 젊다는 感嘆詞.
아손- 그립고 아쉽다.
고이려- 귀염을 바친다.
이 노래는 언제나 님을 위해 바칠 목숨이지만 늙기 전에 젊은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의미의 것이었다.
여기 '님'이란 것은 물론 어떤 여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다함의 심장에는 '나라'란 것으로 깊이 새겨져 있었다. 나라에 바치기로 맹세한 목숨이요, 게다가 청춘을 바치기로 결정한 몸인지라 아무데도 그 열정을 나눠 쓸 길이 없다는 것을 사다함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남자 동지들의 信任(신임)과 사랑은 사다함의 한 몸에 더욱 집중되었다.
그런데 사다함은 늙는다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그는 누구든지 곁에서 늙는다는 말만 하면 몹시 불쾌한 표정을 했다. 늙어서 피가 식고 血脈이 硬化(경화)하여 얼굴에 주름살이 잡히며 거무튀튀한 점이 생긴다는 것은 사다함에겐 생각 조차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그래서 이런 말을 듣거나 혹시 이런 생각이 떠 오르거나 할 때는 그만 진저리를 치던 터이었다. 그는 죽음과 늙음을 엄격히 구분하였다.
그는 老衰(노쇠)에게 젊음이 침략당하는 것을 甘受(감수)하느니 보다는 차라리 뜨거운 피가 살아서 약동하는 靑春시절에 죽음을 꽃답게 하는 것이 가장 賢明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물론 죽음을 두려워 할 리 없었다. 그리고 죽음 가운데도 청춘시절에 꽃지듯 지는 것을 가장 아름답게 여겼다. 그는 난만히 핀 꽃 보다도 오히려 그 난만히 피었던 꽃이 비오듯 떨어지는 落花의 光景(광경)을 봅시도 좋아 했었다.
그럴때는 으례 여러 벗들과 함께 지는 꽃을 歎賞(탄상)하면서 술을 나누었다. 그는 누구를 대하든지 꽃이 시들기 전에 지듯 사람도 역시 시들기 전에 져야 한다고 말했고 늙어 죽는 것은 죽음의 아름다운 가치를 놓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삶은 儉素(검소)하게 살망정 죽음만은 호사스러운 이상으로 심히는 사치하게 죽어야 한다고 늘 강조하는 것이었다. 모든 다른 凡事들도 그랬었지만 그의 死生觀은 이만큼 天才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다함이 자기 목숨과 청춘을 바치고 말 자리는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 그것은 나라밖에 다른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수천명의 愛國청년들은 아무도 異議 없이 이 사다함을 화랑으로 推戴(추대)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다함은 몇 번이나 이 신라 청년의 더 없는 榮譽(영예)인 화랑의 지위를 사양했던 것인데 그가 사양하면 할수록 郞徒들의 생각은 더욱 더 간절한지라 사다함도 나중에는 그 지위를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수천명의 낭도들이 모두 다 사다함의 마지 못하는 승낙에 감격하고 만족한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던 것이다. 이때 사다함은 평소에 맹세한 바도 있었거니와 나라에 바칠 목숨, 나라에 바칠 청춘이란 것을 다시한번 깊이 느꼈다. 그리고 많은 낭도들을 모아 세워 앞창을 대이고 낭도들이 뒤를 받아 '식기 전에'를 노래 불렀다.
그때 사다함의 풍모는 더 한층 아름다웠고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그의 표정은 구슬퍼 사람의 애를 끊게 하는 것이었다. 사다함은 이미 더 말할 필요가 없고 거기 모인 수천 낭도들은 모두 때없이 침노하는 外敵을 물리치고 나라 일에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한 사람들인지라 노래가 끝날 무렵에는 일제히 설음이 움직이고 설음과 함께 憤激(분격)와 용기가 백배나 더해서 그 중에는 주먹을 쥐고 눈을 부릅뜨고 적국 편을 향해서 발을 굴리며 아우성을 치는 사람도 있었다.
사다함은 언제나 설어운 사람이었고, 또 누구의 마음이나 서럽게 하는 표정을 가졌었다. 그 설음이란 자기 자신이나 나라의 運命에 대한 悲觀이라던지 不幸을 한탄하는 데서 오는것이 아니라 아무 까닭없이 그저 설이운 것이어서 오히려 지나친 열정과 청춘의 哀傷(애상)에 말미암은 것으로 보이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 애상은 頹廢(퇴폐)로 쏠리는 것이 아니었고, 도리어 忠憤(충분)과 義勇을 振作(진작)할 수 있게 마련인 특수한 성격의 것이었다. 그래서 이 특수한 사다함의 애상은 자기만이 아니라 사다함을 가까이 하는 어떤 사람이든지 날이 가면 갈수록 그와 같은 심정을 갖게 하였다.
眞興王 이십삼년, 사다함의 나이 열여섯살 때, 그해 구월 경에 加羅(가라)와 큰 싸움이 벌어졌다. 그때 그 전쟁에는 가라에서 倭國의 수만 大兵과 合勢해서 신라를 침노했던 것이다. 그래서 진흥왕은 重臣 異斯夫(이사부)를 主將으로 삼고 왜나라군사와 합세한 가라군사를 막게 하였다. 이 때 열여섯살인 화랑 사다함은 이러한 國難을 보고 앉아 배길 리가 없었다. 마침내 그도 出戰을 지원했으나 임금은 사다함의 나이가 어린 것을 염려하여 쉬 應諾(응낙)하질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설 사다함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사다함의 지원이 간절하기도 했지만 그의 지원보다도 그것을 응낙할 수 밖에 없는 한가지 사건이 생겼다. 그것은 사다함이 인솔한 수천명 낭도들이 모두 칼을 품고 사다함의 출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낭도들의 결의는 만일 사다함의 출전이 뜻 같이 되지 못하는 날은 모두가 사다함과 함께 죽어 버릴지도 알 수 없었다. 이를 알게된 임금과 장수들은 사다함의 部隊(부대)를 힘답게 보았던지 마침내 그 부대의 출전을 응낙하게 되었다.
사다함이 騎兵 오천명을 거느리고 敵陣(적진)을 헤쳐 들어가자 아무리 悍毒(한독)한 倭軍과 겁없는 가라 군사들일지라도 폭풍이나 洪水처럼 밀고 들어오는 사다함의 決死 부대에는 정신을 걷잡지 못하고 겨루어 볼 재간도 없었다. 그러자 이사부장군이 인솔한 大部隊가 뒤를 이어 왜군과 합세한 가라군사를 여지없이 擊退(격퇴)하였는데 그대 生擒(생금)된 倭將 河邊瓊缶(하변경부)는 신라에 돌아와서 각가지 제나라 機密(기밀)을 일러 바쳤다. (주- 일본 사기 흠명기, 23년건에 자세한 기록이 실려있다)
그 때 그 싸움에 사다함의 功이 가장 높았고 신라는 물론이고 이웃 여러 나라가 다 놀랐으며 왜나라의 朝野(조야)는 간담이 떨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임금은 사다함에게 捕虜(포로)된 가라 군사 300명과 良田 몇 백 마지기를 賞(상)으로 주었다.
그러나 사다함은 싸울 때는 적이었지만 降伏(항복)한 뒤에는 적이 아니요, 또 敗戰을 했을 망정 모두가 다같은 사람의 자식이라고 해서 모두 놓아 보내서 마음대로 살게 하였다. 그리고 그 좋은 밭도 사양을 하다 못해서 마침내 부대 동지들에게 고루 나눠 주었다. 그래서 그때 사람들의 崇敬(숭경)과 欽嘆(흠탄)과 사랑은 비할 데가 없었다. 그래고 동시에 그 前道를 한량없이 기뻐했다.
그러나 사다함은 특수한 성격의 사람으로서 특수한 운명의 줄을 타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 자기 운명을 미리 알고 있기나 한듯 사다함은 일찍부터 '식기 전에 져버리고져'하는 노래를 불러 왔던 것이다.
일찍 '식기 전에'를 작곡해 준 친구 武官郞은 사다함에게 둘도 없는 친구로서 언제나 나라에 일이 있으면 죽음을 같이 하기로 맹세해 왔던 터이었는데 加羅戰役(가라전역)이 일어나기 얼마 전부터 무관랑은 병으로 누어 있었기 때문에 앓는 무관랑을 혼자 남겨 두고 자기만 출전하게 될 때 부터 몹시 애달프게 생각했거니와
더구나 勝戰(승전)까지 하고 돌아온 뒤로는 사다함의 가슴은 무관랑을 생각할 적마다 걷잡을 수 없이 저리고 아팠었다. 그런데 사다함이 승전하고 돌아온 뒤에는 무관랑의 병세는 더욱 더 危重(위중)했었다. 그러나 무관랑은 병석에 누었으면서도 슬픔을 못견뎌하는 사다함을 오히려 慰勞(위로)했다.
''같이 살아서 나라 일에 힘쓰게 되었더라면 그만 좋은 일이 없겠지만 내 일이 이미 이렇게 된 바에는 사다함 도령님이 혼자서라도 내 일까지 힘써 주시기를 바라오.''
하는 무관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으나 그럴수록 사다함은 아무래도 무관랑을 혼자 죽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 얼마 뒤에 무관랑은
''도령님의 勝利(승리)와 幸福(행복)을 비오.''
하는 간단한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 말을 들은 사다함은 七日 동안을 먹지도 자지도 않고 낮밤으로 울다가 과연 시들기 전에 지고야 말았다.
무관량과 사다함이 떠난 뒤에 나라사람들이 그 무덤을 한곳에다가 갋은장(比翼塚(비익총))으로 묻어 두고 모두들 모인 사람이 함께 '식기 전에'를 불렀다.
사다함부기
사다함이 무관랑을 따라 죽은 것은 이미 사실 그대로의 기록을 마쳤다. 그런데 사람들이 흔히 그 죽음을 너무나 궁금해 하는 경향이 있다. 이 궁금한 경향은 文識이 有餘(유여)한 사람중에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이 문식이 유여한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하다는 것은 소홀하게 볼 수 없는 한 가지의 사실이다.
무릇 自然은 이따금 人工以上으로 人工的인 때가 있는 것처럼, 사람의 생각은 이따금 自然以上으로 자연스러운 때가 있는 것이다. 이 사다함의 죽음에 대한 궁금은 아마 그것이 어느 의미로 보아서는 자연이상의 자연스런 생각 일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면 사다함의 죽음 뒤에 어떠한 일이 있었을까 이것을 찾아보는 것은 동방의 風景畫家가 實在의 山水보다 이른바 胸中丘壑(흉중구학)을 더욱 重視하는 그 지경을 다시한번 생각해 볼일이다. 그래서 궁금한 사다함으이 죽음 뒤에 어떤 일이 있었던가 찾아보기로 하는 바 그것이 發見(발견)되는 대로 사다함의 기록은 다음에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런 발견은 궁금증을 풀 수 있을 것이다.(끝)
*부록
'新羅(신라)의 祭主(제주) 가시나니'
-哭 凡夫 金鼎卨(김정설)先生-
하늘 밑에서는 제일로 밝던 머리.
쫓기어 헤매다가 말도 없이 가는 머리.
학비 없어 퇴학맞아 서성이다 殞命(운명)하는 小學校 一等生의 入棺을 보는듯 설웁습니다.
선생님!
한밤중 들으시던 땅속의 부흥이 소리 인제는 그만 우리에게 다 맡기시고 하늘에선 路資(노자) 없이도 대기시리니 그 다 말 못하시고 간 講義(강의) 날마다 하시러 내려오시옵소서.
열 아홉살때 太宗武烈王陵(태종무열왕릉)에서 품에 끓이셨던 匕首(비수).
그때 마련하셨던 新羅의 祭祀(제사) 그릇, 거기 담으셨던 陵(릉)앞 湖水의 말 풀나물,
二月 陵 앞의 山茱萸(산수유) 향기, 인제는 두루 우리에게 맡기시고 新羅의 大祭主이시여 마음놓으시고 하늘에 드시옵소서.
옛날 四天王寺 앞 길에서 月明이 한밤에 불던 피리, 先生님이 이어 받아 부시던 피리, 인제는 그것도 우리에게 주옵소서.
거기 先生님의 마음을 받아 담아 우리 길이 불고 따라 가오리니......
1966년 12월 14일
孤哀後學侍生(고애후학시생) 徐 廷 柱(서정주)
三 刊 序(삼간서)
金凡夫先生은 자기 生前에 단 한卷의 冊子를 出刊한 바 있거니와 그것이 바로 '花郞外史'란 冊이다.
범부선생은 日帝植民地統治에서 解方(해방)되어 獨立된 새나라를 건설하려는 이나라 新生國民에게 그 정신적 내지 사상적 敎養(교양)을 위해 하나의 適合(적합)한 國民讀本을 선사해 주려고, 오랜 세월동안 探究(탐구)하고 構想(구상)하여 온 新羅의 花郞과 화랑정신에 관한 說話를 1948년(己卯年) 겨울에 著述하였는데 화랑외사란 그 저서는 오래동안 출간 기회를 얻지 못하여 원고뭉치인 채로 보관돼 오다가 脫稿後(탈고후) 육년후에사 그 당시 海軍政訓監(해군정훈감)으로 있던 김건씨의 周旋(주선)으로 6.25전쟁을 치르고 있는 국군장병들을 위한 교양독본으로서 비로소 출간의 기회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 화랑외사는 곧 절판되어 오랫동안 세인에게 망각된 채로 있다가 선생께서 작고하신 직후 1967년에 범부선생유고간행회가 구성되어 성곡 김성곤씨의 후원으로 우선 절판된 화랑외사를 다시 再刊하게 되었다.
그런데 今般(금반) 범부선생유고간행회에서는 이문사 지경원사장의 후원으로 다시 또 화랑외사의 普及版을 출간하게 되었으니, 화랑외사는 이제야 진정 저자의 미래의 所望대로 일반국민의 교양을 위한 국민독본의 구실을 하게 될것이 期待(기대)된다. 그리고 아울러 설화문학 내지 전기문학 작품으로서의 본서의 참가치에 대하여 일반의 정당한 평가가 행지지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筆者의 견해로는 본서가 비단 하나의 독특한 思想內容과 스타일을 지닌 說話文學作品으로서 不朽(불후)의 고전적 명작일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고유한 얼과 사상의 眞髓와 源泉을 탐구하는데 둘도 없이 귀중한 文獻이라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진짜로 훌륭한 작품이란 언제나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서 일반에 그 眞價를 認定받게 마련인 것이다.
그리고 附錄으로 실은 국민윤리 特講(특강)은 범부선생께서 생전에(아마 1950년대 초반) 모단체 회원들에게 행한 連續講義(연속강의) 速記錄(속기록)을 정리한 것으로서 화랑외사의 사상적 背景(배경)을 理解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1980년 8월
범부선생유고간행외 회장
현대종교문제연구소 소장 李 鍾 厚(이종후)
重 刊 序(중간서)
정신적인 면에 있어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은 때로 절벽에 부딪쳐 있는 느낌을 우리에게 던져 주고 있다. 원래 사회생활에 있어서의 倫理觀과 價値觀의 변화는 생활양식의 변천과 외래풍조의 침투등에서 오는 자연적 추세로서, 이는 不可抗力(불가항력)의 대세라고도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이러한 대세의 趨嚮(중향)이라기 보다도 정신생활의 밑바닥이 되는 民族魂의 퇴색, 道德觀念의 마비 내지, 善惡의 혼선등에서 오는 정신적 破綻(파탄) 그것인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動因이 潛在(잠재)한 것으로 생각되는 바, 저 일제의 간악했던 사상정책, 해방이후의 不純分子에 의하 思想混亂, 천박한 外來風潮, 動亂등으로 빚어진 혼란과 빈곤등등이 서로 얽혀 전통적 정신을 기조로 한 새로운 생활의 논리적 '루울'이 미쳐 싹트기도 전에 재래의 사상체계는 땅에 떨어지고 自虐的(자학적)인 악과 난이 이 땅을 휩쓸기에 이르 것이라 할 것이다. 오늘의 이러한 현상은 범부선생의 在世時에 비하여 날로 더욱 번져가고 깊어져 가는 것이다.
범부선생은 滔滔(도도)한 濁流(탁류) 속에서 일생을 보내는 동안에 사상적 狂瀾(광란)을 旣倒(기도)에서 만회하려 掩博(엄박)한 그의 철학과 명철한 그의 식견으로 혹은 講席(강석)을 통하여 혹은 저서를 통하여 사상의 醇化(순화) 인간본연에서 歸正(귀정)을 鼓吹(창취)하고 啓發(계발)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화랑외사도 그의 한 가지 유예인 것이니 일찌기 선생은 저 昏迷(혼미)의 구렁에서 헤매이며 갈피를 잡지 못하는 국민대중에게 역사적 교훈을 통하여 순화된 도의정신과 국민의식을 涵養(함양)시키려 그의 뛰어난 청명과 학식 그리고 構想力(구상력)을 기울려 화랑에 관한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전적에 남아있는 零碎(령쇄)한 사료와 유문 실사의 片鱗隻斑(편린척반)을 골간으로 하여 살을 붙이고 기운을 불어 놓어 개개의 화랑활동을 紙上에 躍如(약여)시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上下千古에 화랑과 접하는 듯한 실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우리 혈관 속에서 脉脉(맥맥)히 흐르고 있는 화랑정신을 불러 일으키려던 것이다.
본서는 부산천도시대에 亂麻(난마)와 같이 허트러진 인심과 정신적 糧食(양식)에 굶주린 군인들에게 심적지표를 마련해 주기 위하여 해군정훈감실에서 처음 간행한 것으로 일반 인심에 커다란 감흥을 불러 일으켰던 것은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거니와 추가후에 곧 절판을 고하게 되어 그의 간행의 여망이 높아온지 오래였다.
선생이 道山에 돌아가신지도 어언간 돌이 되려 하고 墓上(묘상)의 宿草(숙초)가 우거진 이 즈음에 자제 趾弘(지홍)君兄弟와 따님 乙英女史의 夫妻로부터 유고정리의 첫 단계로 김성곤 선생의 後援(후원) 아래에서 본서 재간에 着手(착수)하였다는 말을 들으니 山高水長의 그 風儀를 여윈 나머지에 아쉽고 寂寞(적막)한 感懷(감회)가 다시금 새로워진다. 애오라지 몇 줄의 蕪詞(무사)를 적어 지홍군의 남매에게 보여주는 바이다.
정미 추칠월 이십팔일
駱山下 東濱讀史硏經之室(동빈독사연경지실)에서
金 庠 基(김상기) 씀
初刊序文(초간서문)
독립체제를 갖추고 건국대업의 기초를 닦고 있는 우리 민족으로서 國防의 실력은 이미 先進國家와 더불어 어깨를 같이 할 수 있는 실력에 까지 發展을 보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多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나라는 비록 빈궁하나 젊은 겨레의 氣魄은 强하고 壯하다. 국군건설의 기반이 그 곳에 있는 것이다. 이는 너 나 個個人의 잘난 所致(소치)가 아니오, 脈脈히 흘러 내려 온 民族 傳統의 핏줄기에 起因한 것으로 믿고 싶은 바이다. 전통은 悠久(유구)한 역사를 빛내이었고 유구한 역사는 빛나는 전통을 얽어 놓았으니 이제 尙武의 정신으로 보더라도 남다른 形態와 內容으로 뚜렷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도 新羅의 花郞道는 가장 으뜸일 것이다.
이제 김범부선생의 造詣(조예) 깊은 붓끝을 빌어 花郞外史라는 책자를 발간하여 여러 將兵 앞에 내어 놓게 된 것은 건군정신함양에 기초를 닦고 있는 이즈음에 意義 깊은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 책자를 통하여 선조의 화랑들이 억세고도 부드럽게 움직인 모습을 찾아 볼 때 우리 젊은이들의 가슴에 뛰노는 共鳴(공명)의 脈膊(맥박)을 스스로 감촉하리라고 믿는 바이다.
단기 사이팔칠년(1954년) 삼월 십오일
정훈감 해군대령 金 鍵(김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