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국선도의 正體

 

1절 국선도의 特徵(특징)

2절 국선도의 目的(목적)

3절 국선도의 方法(방법)

4절 국선도의 門

5절 국선도의 大意(대의)

 

 

제2장 국선도의 정체

 

국선도의 수련은 그 초기에 있어서 지도에 따라 丹法을 그대로 수련하여도 氣力 증진의 효과를 체득할 수 있으나 점차로 깊이 들어가고 높이 올라감에 따라서는 국선도의 깊고 높은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않고서는 得道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선도의 正體를 한번 요약하여 밝히는 것이다.

국선도의 수련은 두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宇宙觀에 대한 원리요, 또 하나는 人生觀에 대한 원리다.

 

근본적으로 생각할 때는 자연계나 인간계는 동일한 陰陽五行의 법칙 하에 있으므로 그 생성 변화의 원리는 동일할 것이나 소우주라고 하는 인간은 우주와는 다른 성격의 정신작용을 하는 神機之體(신기지체)요 氣立之物이므로 우주의 원리 이외의 다른 원리가 하나 더 있으므로 그 원리를 解得(해득) 하지 않고서는 국선도 수련에 깊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丹理라는 것이다.

 

우주나 인간을 易理로 이해할 수 있으나 인간의 생성 변화의 문제는 精氣神으로 관찰하는 丹理의 이해 없이 易理만으로는 풀지 못하는 점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五行으로 우주 원리를 해명하지만 地球라는 곳에 앉아 있는 인간이 관찰할 때는 六氣의 변화가 발견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오운 육기설이 있는 것처럼 지상의 인간 몸에는 精氣神의 작용이 하나 더 있어 그것이 올바로 작용되어야 인체 내의 오운 육기의 음양 오행 작용이 원만히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 자연학 또는 철학과 여러 가지 도서에는 정기신으로 설명한 단리가 허다하게 많이 있으나 그 원초적인 문헌은 '周易'과 또는 '黃帝內經'에 있으니 우리 민족 仙의 丹理가 얼마나 오랜 것인가 알 수 있다.

 

이제 그 내용을 한 마디로 인용하면 '內經'에는 精氣神 운동이라 하였고 '周易'에는 氣精形 운동이라 하였는데 '內經'에 보면 精이 丑土之氣(인체 내에서는 脾土之氣)를 상승함으로써 神으로 化하는 것을 精氣神 運動이라 하였고

'易'에서는 神이 未土之氣(인체에서는 肺氣)에 싸여서 하강함으로써 精(물질적)을 만드는 것을 氣精形 運動이라 하였다.

이 말들을 정리하여 보면 '內經'에는 精이 化하여 神이 되는 과정을 설명했고 '易'은 氣가 변하여 다시 精(물질적)을 만드는 경로를 말한 것으로 본다.

이는 정기신 운동이라는 표현과 또는 기정형 운동이라는 표현으로 각각 인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조작 과정의 일면씩을 설명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국선도의 수련에서 말하여 온 정기신의 丹氣 작용은 그 三者가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되어 相關的(상관적) 통일성을 가진 것이다.

대우주는 陰陽의 상관 원리로 生成하고 인간인 소우주는 氣血의 상관 원리로 나타나 生成 변화하며 따라서 精과 氣와 神을 창조하는 것이니 우리가 보통 정신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 또는 의식작용을 말함이다. 精氣神의 원리를 다소 응용한 표현이다. 이 단기혈로 인하여 생하는 인간의 정신은 대자연의 우주 정신과 같은 형태이나 그 성격이 다르고 그 질도 다른 것이다.

 

먼저도 말하였거니와 우주의 정신은 음양의 律呂(율려)를 뜻하는 것으로 어디까지나 공식적이요, 공리적이지만 인간의 氣血之精神은 공리적이면서도 사리 사욕적인 것으로서 이해와 苦樂(고락)과 喜怒之感情(희노지감정)의 지배를 받는 정신이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土化作用이 되지 못하여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병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變故(변고)이다.

그러므로 국선도의 수련은 人心을 天地心에 맞도록 수련하는 道이므로 정기신의 작용을 극도로 善導(心田善化)하여 음양과 오운육기의 작용이 내 몸안에서 활발히 일어나도록 하여 천지인 三合으로 일화 통일하는 방법인 것이다.

 

만일에 이 精神과 氣에 대한 이해가 없이 易의 음양원리와 오운육기의 원리만 거론한다면 이는 한의학의 원리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는 단전호흡과 같은 동작만을 중시하여도 결코 국선도로써 수련되는 제4단계인 眞氣丹法 이상의 도력은 생각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유의할 것은 정기신의 작용으로 활발해지는 通氣生生 絶氣死亡과 같이 通氣의 현상이 음양과 오운 육기의 상생 작용에 기초를 둔 것이므로 모든 丹法의 해설이 음양 오운 육기설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국선도는 易理와 丹理의 종합원리로 볼 수 있는 것이다. 丹理는 易理를 포함하고 精氣神을 더 첨가하는 극치적 수련법이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외과와 내과에 정신신경과의 원리를 첨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외과 내과로는 치료를 할 수 없을 때에 정신신경과를 찾게 되는 것이다.

西醫에서는 이 정신신경과가 근일에 발달한 의학이나 동양에서는 고래로부터 이 精氣神을 중요시하여 의약보다 앞서 以道而治病하였다는 말은 다름아닌 정신적 방법으로 治病했다는 말이다.

인간의 정신을 天地理에 合一케 하는 방법은 먼저 인간적인 사욕을 公慾(공욕)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사욕은 마음을 괴롭히는 결과가 된다. 사리사욕은 公道인 天地道와 합치되는 정신자세가 되지 못한다.

 

우리의 정신이 언제나 天地의 道理와 公利를 생각하고 나라와 민족과 조상을 염두에 두고 수련할 때 天地人 三合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선도 수련의 제1수련이 正心, 선심인 것이요, 심신통일인 것이다. 좀더 나아가 空心 眞心으로 空眞我가 되어야 天地人 三合인 것이다.

이와 같은 空眞正善의 마음이 되어야 정심, 시, 각, 도, 행(正心, 視, 覺, 道, 行)하게 된다. 이와 같은 공, 진, 정, 선심(空, 眞, 正, 善心)을 말하는 것은 소우주인 인간의 小體가 심리불안으로 파괴되는 것을 방지하자는 것이요, 따라서 우주적인 정신(公道)와 합치하는 자세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정신작용으로 精氣神의 올바른 정상적인 집중 또는 통일하여 우리 정신자세부터 일반적 감정을 초월하여 초인간적인 마음의 자세가 되어야 국선도의 眞氣丹法부터 수련이 된다는 것을 밝힌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연의 法理를 正覺하고 그 道의 길을 닦아 나아가 몸소 얻어갖는 體得的 方法이 국선도의 정체다.

 

 

제1절 국선도의 特徵(특징)

원래 東方에는 道가 많이 있다.

그러나 각기 그 특징이 있다. 우선 相異點을 찾아 보고 다음으로 공통점을 살펴보자.

유교의 사상은 存心養性으로써 中庸之道를 실천하는 도요, 불교의 사상은 明心見性으로써 中道之行을 실천하는 도다.

그러나 국선도의 사상은 修身煉性(수신연성)으로써 金丹之道를 성취하려는 養生之道다. 이렇게 볼때 그 특징은 각이 하다.

유교는 中庸之道로서 인간사회에서 올바른 윤리적 실천을 하는데 그 목적이 있어 성인이나 군자가 되고 저 하는 것이요, 불교는 中道之行으로서 원효대사의 말을 빌리면

 

'以覺言之(이각언지) 無彼無此(무피무차) 穢土淨國(예토정국) 本來一心(본래일심) 生死涅槃(생사열반) 終無二際(종무이제)'

 

라 하여 모든 差別相(차별상)을 떠난 평등관에서 이해를 초월한 중도의 행으로서 보살의 경지로 생활한 다는 것인 바 이도 역시 올바른 깨달음으로서의 윤리적 실천이 목적인 것이다.

 

그러나 유독 국선도만은 다르다.

국선도는 올바른 인간만이 되겠다는 도가 아니라 强(강)한 인간, 無病長壽의 인간이 되겠다는 것이 그 목적이다. 전자들은 하나의 도덕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 목적이라면 후자는 生命力이 충일한 인간이 되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전자는 생활의 도요, 후자는 生命의 道라고 하여야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동방의 도는 修心修身의 방법에서 나타난다.

 

수심을 목적으로 하는 유가의 도와 불가의 도는 그 修心으로 인하여 修身養性이라는 副(부)목적이 이루어지며 또한 수신연성을 목적으로 하는 국선도는 그 수신연성으로 인하여 修心이라는 부목적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유는 正心, 善心이 없이는 도에 도달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렇게 본다면 동방사상에는 어디까지나 도덕적인 동시에 養生的인 요소가 아울러 잠재해 있다고 본다.

국선도는 생명의 養生이 되는 동시에 생활의 道德도 이루어지는 일거양득이 되는 도이다.

 

아울러 동양적 자연과학의 특징을 해명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과학 혹은 철학의 연구대상은 언제나 자연과 인생이다. 국선도의 사상이 동양적 자연관에 근거하였으므로 동양적 자연관의 특징을 살펴보면 서구적인 자연관과 상이한 점이 나타난다.

서구철학에서는 대개가 인과적인 사고방식이나 또는 분석적 사고방식으로 자연을 관찰한다.

자연은 어디서 나왔는가 하는 원인을 따지며 자연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하는 요소를 분석하려 한다. 그리하여 자연의 배후에는 조물주나 창조주를 인정하기도 하고 또는 자연의 구성요소로서 原子나 單子(단자) 같은 것을 지목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양의 자연인은 자연은 자연 그대로 보고 자연의 배후를 따진다거나 자연을 쪼개서 분석한다거나 하는 일을 하지 아니한다.

自然이라는 그 개념대로 (스스로 그렇게 되어 있다) 생각하는 것이다. 자연은 있어 온 그 때도 있었고 또는 있는 그대로 서로 인연을 맺어 생성하여 가고 있다고 본다.

자연은 어떤 縱(종)적인 선후나 상하관계에서 존재 생성한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음양상호감응으로 相剋도 相生도 이루어져서 만물의 생성사멸적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자연세계의 원리와 인간생존의 원리와 분리하여 생각하지도 않고 따러서 인류도덕의 원리도 자연의 원리와 분리 하지도 아니한다.

 

서구의 물리적 화학적 문화가 발달한것은 자연을 분석하고 그 구조를 변화시키는 이른바 자연에 도전하여 얻은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인간이 자기 손으로 만든 비자연적 인간문명에 인간 자신이 굴복하고 공포를 느끼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도리어 도전을 받고 있는 불안에 빠져있는 상태다.

그러나 동양인은 자연을 자연 그대로 두고 자연을 즐기고 자연의 품안에 안기어 자연과 더불어 살기를 원해 왔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과학문명은 발달치 못하여 현대문화의 후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동양인들도 서구의 과학문명을 따라가기 위하여 자연에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오늘날에 와서는 도리어 서구문화로만 인간의 생활이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구적인 과학문명은 생활에는 有益유익(便易)하나 생명에는 위협을 준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문제가 여기에 이르자 인간은 東西人을 막론하고 자연을 자연 그대로 親近해야만 한다는 인간 본래의 생존원리인 國仙道法을 되찾지 않을 수 없게끔 되었다.

 

동양인의 자연관은 한 마디로 말하면 氣一原論에 있다. 이는 곧 국선도의 丹理의 원리다.

자연이나 인간이나 막론하고 다 氣의 聚散으로 生하고 滅한다. 기가 한 번은 陰으로 한 번은 陽으로 변하는 것을 말함이니 生은 氣의 聚요, 死는 氣의 散이다.

이 氣는 우주와 인간의 본원이다. 기는 일음일양의 樓運(누운)에 의하여 天地人의 도를 일관하는 것으로서 이 氣를 우리 인간이 우리 몸에 充溢(충일)시키는 방법이 다름 아닌 국선도의 단리인 것이다.

양생법은 곧 양기법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국선도의 理는 곧 氣의 이요, 기의 이는 丹의 理가 된다. 그것은 기를 養하면 仙人이 되고 氣를 養하려면 단전호흡으로 행공을 해야하는 까닭이다.

간단히 말하면 단전호흡으로 기를 양함으로써 국선도의 목적을 達(달)한다. 蓄氣(축기)는 단전호흡으로 이루어진다.

끝으로 음양사상에 대하여 한 마디 나의 견해를 덧붙이려 한다.

 

단전호흡으로 氣를 養하는 것이 丹理다. 호흡은 기의 일음일양이다. 기가 한 번 음으로 한 번은 양으로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陰陽사상은 동방사상의 근본이라 하였거니와 우주는 氣의 集散이요 그 집산의 원리는 陰陽이다. 이 원리가 易의 철학적 형이상학인 것은 주지하는 바이나 동방제국에 있어 陰陽사상이 제일 먼저 발달하고 생활화한 나라는 우리나라이다.

우리나라 國號도 여러 가지로 명칭이 있으나 높은 나라, 활 잘 쏘는 나라라 하여 大弓國, 바다 동쪽에 있는 민족이라 하여 東夷族 또는 海東盛國, 후에는 海東朝鮮(古朝鮮), 君子國, 이 외에도 수많은 이름을 썼으나 오늘날 大韓民國이라 하였다. 약하여 韓國이라 한다.

대저 한 민족이 문화적 유산으로서 가장 귀중한 자료는 그 민족의 言語다. 韓民族 속에서 수천만년 혹은 수억년 전부터 성장해 내려온 우리말은 곧 우리 민족의 思想이 잠재해 있는 것이다.

 

언어는 변한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다른 민족의 말과 글로써 이루어지는 말이 들어오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민족 고유의 말은 그대로 있다.

이러한 견해에서 볼 때 우리나라 말은 거의가 陰陽性을 내포한 이념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 말의 표현은 양음사상이 아니요, 陰陽思想이다. 언제나 陰的인 것을 앞에 놓고 양적인 것은 뒤에 놓는다.

예를 들면 '밤낮', '안밖', '물불', '흑백', '좌우', '강산' 등은 '음선양후'한다. 한자로는 '男女'라 하나 우리말로는 '여남(연놈)'으로 표현한다.

한자로는 呼吸이라 하나 우리말로는 들이쉬고 내쉰다고 한다. '들숨날숨', '들락날락' 또는 '들숙날숙' 한다는 말과 표현은 호흡을 들숨이 먼저고 날숨이 후에 있어 한자로 쓰면 흡호로서 흡음이 선이고 호양이 후로서 음양으로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이외에도 우리말은 다 陰陽思想이다. 음양사상은 우리민족 문화속에 그리고 생활속에 깊이 뿌리 박고 있다.

서양식 사고는 음양사상이 아니고 양음사상이다. 양이 활동적이요 중심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동양사상은 陰이 더욱 활동적이요, 시초적인 것으로 보아 氣가 먼저 陰으로 나타나고 따라서 陽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소위 陰中陽火인 것이다.

국선도의 단전호흡에도 원리는 기초적인 숨이 들숨인 吸(흡)의 효과로써 陰의 德用에 있고 陰德인 吸의 효용으로 단전호흡하여 道胎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道胎는 곧 여성의 胞胎(포태)에 비유한 표현이다.

 

 

제2절 국선도의 目的(목적)

인간이 영위하는 일에는 목적이 분명하고 정확하고 올바라야 한다. 국선도는 단리에 있다 했고 단전수련법은 산중수도자의 기본이라 하였거니와 이 단리수련에는 세 가지 뚜럿한 目標(목표)가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세 가지 목표는 서로 相依相卽的(상의상즉적)인 관계가 있어 그 어느 하나라도 단독적으로 성취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이것이 국선도의 특성이기도 하다.

첫째는 극치적 體力이요,

둘째는 극치적 精神力,

셋째는 극치적 道德力

이니 이 세 가지를 아울러 수도하고저 하는 것이 국선도요, 단리의 목적인 것임을 밝혀둔다.

 

智, 仁, 勇 삼자가 다 좋은 인간의 덕성이지만 서로 떠나서는 비가치적인 것이 되고 만다.

仁과 勇이 없는 智는 남을 속이는 잔꾀나 부리는 인간이 될 것이요, 智나 勇이 없는 仁은 무능한 仁의 인간이 될 것이요, 智와 仁이 없는 勇은 만용이로서 악독한 인간이 되며 智, 仁, 勇이 겸전한 인간이 되면 義의 인간이 되며 이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처럼 국선도에서는 전인적 수련으로 仙人의 경지까지 들게 하는 것을 목표를 삼는 것이다.

그런데 항간에서는 흔히 국선도에 대하여 정확하지 못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국선도란 마치 바위나 부수고 불속에나 들어 간다든가 하는 따위의 초인간적인 체력을 수련하는 것만이 전부로 착각하고 지나친 호기심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제아무리 眞言(참말)을 해도 믿지를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국선도의 진의를 의심하거나 不信마저도 나타내는 것이다.

물론 靑山 자신도 市井에서 국선도를 수련시킨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님을 알고 있으므로 어떻게 하면 眞意의 眞價(진가)를 인식시킬 수 있을까 하여 고심하던 끝에 하는 수 없이 실지로 보이는 것이 급선무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 道力을 국내외에서 각TV網(망)을 통하여 또는 서울운동장에서 그 실기를 보였던 것이다. 이는 다만 믿음을 주기 위하여 입증을 해 보였던 것이다.

물론 이 道法을 고귀한 인품을 양성하는 곳으로 알고 찾아오는 이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지만 이는 반은 알고 반은 모르는 생각이다.

 

體能하면 體智하고 德力이 높아져야 道力이 높아지면 도력이 높아짐에 따라 德力이 높아져 자연 심신통일로서 대우주의 진리를 全知하고 대우주의 도력이 내몸에 合一하여 도력을 전능케 되어진다는 것은 직접 단전법의 수도를 해보지 않고서는 이해하기도 곤란할 뿐만 아니라 설명만으로도 이해키 여러운 것이다.

어느 정도 진리적인 방법을 알고 다소라도 수련하면 누구나 그만큼의효력을 다소 체득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약간의 수도를 했다고 해서 적어도 36단계(一修부터 十五地) 이상의 道段에 비추어 볼때 첫 층계에도 발을 디뎌놨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正心과 精力이 일치되어야 함은 물론이려니와 동시에 인간과 우주와의 妙合이 이루어져야 하는 심오한 원리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능력을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국선도의 秘傳은 듣고 보고 직접 수련하여 도력을 얻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선도 단리의 목적은 직접 精氣神 통일의 수련에 있다는 것을 銘心(명심)해야 하겠다.

 

 

제3절 국선도의 방법

우주적인 元氣(外氣)와 인체적 氣(內氣)가 상통하는 길은 오직 呼吸에 있다. 그러므로 수도에서 호흡을 중요시하는 것이 국선도의 특색이다.

호흡의 중요성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호흡의 부조리에서 오는 피해도 적지 않으나 대개 이를 모르고 겨우 生命維持(유지)의 정도밖에 호흡을 못하고 있다.

호흡의 신비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 神祕가 있다. 호흡이 빠르고 숨이 거칠면 短命하고 호흡과 맥박이 같이 뛰면서 어깨호흡을 하면 3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한다. 이와 같이 맥박과 호흡은 연관성이 있으며 호흡의 중요성은 再言(재언)을 要(요)치 않으므로 수도는 호흡을 고르는 (調息)데서 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특별한 방법으로 호흡을 하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奇蹟(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 눈앞에서 볼수 있을 것이다. 과학이 극도로 발달하였다 하더라도 이 기적 같은 사실 앞에서는 입을 열 수가 없으려니와 이 사실을 부인할 수도 없다.

 

자연은 심오하고 위대하다.

자연의 원리에서 생기는 사실을 인간 지혜로서는 아직 접근할 수가 없고 탐구의 발길은 아직도 첫 걸음에 불과하다.

단리의 호흡방법은 精氣神 三丹 二段呼吸祕法이다.

동양적 자연관에 근거하여 실천으로 찾아낸 체득적 비법이기에 自認自得的(자인자득적)인 體智體能이라는 것이다.

이는 동양저연적 원리에 의한 방법이요 결코 서구적 철학이나 과학적 방법은 아니다. 이해할 수 없다고 하여 비과학적이라고 부인하는 무지를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과학적 지식이 극히 초보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자인할 줄 알아야 한다.

生命을 다룬다면서 生氣 도는 좁쌀알 하나도 못만드는데야...

단전행공의 벙법은 精氣神에 있다고 말하였거니와 이는 內丹이다.

精을 實하게 하면 氣가 壯(장)해지고 氣가 壯해지면 神이 明해진다는 원리에 근거를 둔다. 이 원리를 형체적으로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蠟燭(납촉)의 불로 해설해 본다면

精은 초의 油脂(유지)에 해당하고 氣는 심지에 타오르는 화염에 해당하고 神은 火光에 해당한다고 본다. 즉, 유지가 실하면 화염이 壯할 것이요, 화염이 壯하면 화광이 明할 것은 자명의 이치인 것이다. 이와 같이 精實卽氣壯 하고 氣壯卽神明함을 말한 것이다.

 

이제 그 원리적인 문제는 다음 장에서 다시 언급하겠거니와 그 개념만을 말해 보겠다.

인체에 있어 精이란 水穀이 胃로 들어가고 공기가 폐로 들어가 脈道가 行하고 霧露(무로)와 같은 액체가 經路(경로)에 들어가면 그 기운으로 붉게 化하는 것이 피가 되니 전신에 流行하는 血이 氣海에 이르러서 天氣와 地氣가 合實하여 단기의 제1차적 精으로 자연 변하여 力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精은 몸의 근본이 되는 것이며 이 氣海穴部를 하단전이라 하고 神이 一身의 主로서 심장에 守居하여 가슴을 중단전이라 하고 氣는 身의 根蒂(근체)로서 뇌로부터 전신에 있으므로 상단전이라 칭한다.

정기신 삼단전이라 함은 이 상중하 삼단전을 말하는 것으로 一身의 主인 정기신의 相依相生(상의상생)의 원리를 응용하는 것이 단전행공법인 것이다.

보통 단전호흡법이라 할 때의 단전은 下丹田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단전 기해혈을 중심하여 深呼吸을 하는 것을 말하나 정기신 삼단 단전호흡이라 할 때는 상단전인 氣와 중단전인 神을 고요한 경지에서 하단전인 精있는 곳으로 집중하면서 하단전으로 심호흡을 하는 것을 말함이다.

이것이 단법인 행공의 방법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특이한 방법은 단전심호흡을 하되 호와 흡에 있어 호할 때나 흡할 때 중간에 잠시 자연스럽게 숨을 정지하여 二段적으로 호흡하는 일이다. 또한 호와 흡에 있어 호하는지 흡하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히 호흡하는 일이니 微羽(미우)를 코에 대어도 흔들리지 않아야 되는 것이다.

이제 이와 같이 고요한 극경 속에서 단법은 그 출발점이 정의 충실에서 비롯된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서의 단전호흡은 곧 精의 충실을 위한 방식인 것이다.

 

精은 五米와 맑은 공기속에 靑氣를 호흡하여 力의 작용으로 나타난다 하여 精字가 된 것이며 精力이라 칭하는 것이다. 이는 승화하여 大宇宙道源에서 얻는 力의 작용까지 하게 되므로 동양에서는 道力이라 호칭하게 된 것이다.

이 도력이 丹田(下丹)에 충일하면 후끈한 열기가 단전에 感觸(감촉)된다. 이것을 가리켜 道胎가 生하였다 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흔들린다거나 갑자기 벽력같은 소리를 지른다거나 하는 증세가 나타나는 수가 있다.

 

본래 力의 작용이 강한 자는 약간 몸을 떨기도 한다.

이것은 고무호스에서 갑자기 강한 물이 나가면 진동이 오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인 것이다. 샤만인들의 경 읽는 소리에 도취되어 흔드는 증세와는 전연 다른 증세인 것이다. 이때 스승이 없이는 까딱 잘못하면 광인이 되는 수가 있으며 혹은 폐인이 된다.

때문에 수도중에 혹 미친사람이 나타나는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증세는 대개가 수도를 시작하여 眞氣丹法에 나타나는 수가 많다.

이때엔 經驗者외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며 그때부터 힘의 작용은 倍(배)로 증가되며 道力에 첫발 디딜 장소를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체험과 자증과 자각이 없이 약간 배워자기고는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이며 지도를 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오랜 수도로 누진되어 완전히 金剛體가 되어 도태가 生하고 도태는 곧 精隨氣 氣隨神(정수기 기수신)의 원리로 천변만화의 작용으로 초인적인 현상이 일어난다.

그리고 덕력과 도력의 작용은 저차원에서 고차원적 경지까지 自然昇華(자연승화)하여 체득하게 된다.

본래 인간과 호흡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절대적 관계가 있어 잠시라도 호흡이 중단되면 질식되고 만다. 그러므로 도에서는 천기호흡법이라고도 한다. 천기를 逆(역)한 즉 死한다. 그 이유는 적혈구에 산소공급이 못되는 까닭이다.

 

일반적으로 볼 때 호흡은 생명유지에 절대불가결의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을 유의 관찰하면 자기의 폐활량을 100%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직 잠자는 시간만은 잡념을 다 버리고 고요히 呼吸을 제대로 할 뿐이다.

그러나 눈을 뜨면서부터 생각은 변하여 각자의 職(직)에 급급하여 호흡은 다시 거칠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전호흡은 인위적으로 심호흡을 하여 피를 맑게 하는 근본적인 섭생 방법인 것이다.

이것이 습관되어 잠시의 여유만 있으면 단전호흡으로 서서히 승화하여 도력의 경지에 들게 되어 眞健康을 갖게 되는 것이며 大道眞人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단전을 중심한 심호흡은 전신의 혈액순환을 촉진시킨다는 사실은 이미 과학적으로도 증명되고있다.

 

본래 국선도를 말할 때는 숨을 고르는 (調息)데서 시작해 가지고 절로(自然)에 이르고 이 절로가 화기(和氣)를 이루고 이 和氣가 제작(天人妙合)에 이를 때 이것이 神仙이지 이것을 떼어놓고 따로 眞道人에 신선이 있다면 그것은 믿지 못할 노릇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이 최종의 수행을 한 도는 곧 숨을 고르는 법인 선단법 수행이었던 것이다. 인체의 정과 우주의 정이 단전에 集積(집적)이 되게 하여 氣壯 神明하게 되는 선단법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국선도는 곧 단전법이라고 하여도 무방하다.

 

단법으로부터 대우주의 모든 원리를 一의 경지까지 覺하여 체득한 자를 仙人 또는 道人이라 존칭하거니와 '삼국사기'에 나타난 百結先生(백결선생)이나 勿稽子(물계자)도 역시 선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靑山은 입산수도 수십 년 간 도사로부터 직접 수도를 받아 단법을 완수하여 산에서 하산하여 사회생활하는 市井에 지도하여 본 결과, 뜻과 誠을 가진 자에게는 男女老少 누구나 정도에 따라 단법의 목적이 성취되어 가는 것을 보고 자신을 각게 되었으니 이는 참으로 기쁜일인 것이다.

 

 

제4절 국선도의 門

국선도로 들어가는 문은 靜心과 靜座, 靜思에 있다.

도에는 無門이라는 말이 있다. 동양의 도의 특색은 무문에 들어가는 것이 특색이거니와 국선도의 들어가는 문도 무문으로서 스스로 체득하는 길밖에 없으나 特說一門(특설일문)하면 다름아닌 정심, 정좌, 정사의 문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류가 우주에 접근하는 길(道)은 靜心, 靜座의 방법밖에는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동방의 모든 道人들도 入道의 길은 靜思, 靜心에 있다고 깨달은 것이다.

 

宋儒(송유)들도 主靜工夫에 힘을 썼고 정이천도 心의 본체를 善하고 靜하니 心의 本體를 찾기 위하여는 靜座工夫를 해야한다고 하였고, 中庸의 道로서 喜怒哀樂이 動하여 發하지 아니하는 不動의 靜心을 中이라 했다.

禪定이란 두말할 것 없이 虛心, 靜思의 坐禪으로 인간의 本來面目을 찾아 깨닫는 見性이 목적인 것이다. 白玉蟾道人(백옥섬도인)의 長生之道는 無心, 忘形(망형)에서 비롯한다고 하였거니와 靜心, 靜座의 극치는 忘形, 止思, 止息에 있는 것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논리는 하나의 역설적인 것으로 보이나 동양사상에 접근하려면 이 역설적인 논리를 過通(과통)하지 않고서는 입문할 수가 없다.

예를 들면 단전호흡을 할 때 그 호흡은 물론 이단식 심호흡이나 그 호흡의 모습은 극히 고요하여 그 숨의 소리를 귀로 들리지 않게 하고 오직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는 표현이 있다.

이는 止息과 다름이 없으나 非止息之息으로서 靜하고 細하고 弱하고 小한듯 해야 한다.

그 靜과 小로 우주적인 動과 大에 接線(접선)하는 能이 自在한 원리를 알아야 하고 吸은 陰의 相이요, 呼는 陽의 相으로서 元氣가 음양의 相으로서 접근된다. 내가 나의 自形과 心像을 忘(망)할 때 또는 虛할 때 空할 때 無할 때 대우주의 元氣는 나에게 接近流入한다.

 

이것이 종교적인 말로 표현하면 범아일여지경이요 신인합일지경이다. 그러나 우주생성적 원리로 보면 元氣相通의 妙境(묘경)이다.

東方사상은 언제나 인간과 세계를 분석적으로 보지 않고 統一綜合體로 보므로 만물일체적인 유기체로 보기 때문에 모든 수양법과 수련법은 物心一如的이요 宇我一如的인 세계관과 인생관에 국선도의 入道之門도 서게 된다.

靜思, 靜心, 靜座의 문이다.

다음으로 止思의 논리다.

이것도 역설적인 표현이다. 지사는 혼미한 정신을 말하는 것 같으나 入道에는 昏迷(혼미)는 금물이다. 무념, 무상, 명상, 묵상은 몽유 상태나 혼미 상태는 아니다.

상념은 없으나 정신 그 자체는 맑아 있어야 한다. 不然(불연)이면 睡眠(수면)상태, 暗示(암시)상태, 幻想, 幻覺상태 등에 빠지기 쉽다.

그것은 다 外道現象이다. 언제나 그 정신상태는 明鏡止水와 같은 착하고 고요하고 맑고 깨끗한 상태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상념을 여읜 止思이어야 한다. 이것은 止思之思로서 妙有의 경지다.

止息之息의 호흡과 止思之思의 정신이 국선도 입문의 첫 걸음인 것을 알아야 한다.

 

마음을 고요히 가라 앉히고 숨을 고요히 고를 때(조) 元氣가 기해하단전에 차게 되는 것이다. 마음이 고요하면 숨이 고요해지고 숨이 고요하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따라서 숨이 고요해지면 심장의 고동이 순조롭고 심장의 고동이 순조로우면 맥박이 순조로워진다.

정신은 고요한 가운데 청명해지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心身一如之境의 입문이요 국선도의 입문으로서 이른바 정관의 문이다.

 

新羅(신라)의 물계자 도인은 항상 제자들을 앉혀 놓고 숨을 바로 쉴줄 알아야 한다고 주의를 환시켰다. 그는 수련도장에 제자들을 앉혀놓고

 

''너 숨을 쉴 줄 아느냐?''

 

하는 것이 첫 과정이었으니 숨을 고르는(調息) 것이 얼(精神, 魂)의 앉을 자리를 닦는 것이고 얼이 자리잡은 후에야 무슨 도이든지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러나 숨을 고른다는 것은 숨을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 고요한 가운데서 자연히 이루어지는 숨을 말하는 것이다.

 

숨을 고른다, 얼의 자리를 닦는다 하는 일이 모든 도의 입문이니 그것은 모든 武道나 모든 藝道가 다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우주에는 보이지 않는 宇宙線이 있는 것같이 인체에는 보이지 않는 經絡이 있다. 거미줄처럼 전신에 얽혀 있는 任督脈을 主樞(주추)로 기경팔맥과 12경 365락이 生體의 主樞로서 모든 신경과 氣血이 유통하는 무형의 통로가 된다.

이 경락은 任督脈이 主가 되어 전신적 운행을 하되 그 운행은 表裏(표리)陰陽의 운행이다.

이것이 생명체의 신비이거니와 그 經絡의 부조화가 발생하거나 일부에서 정체가 될 경우 생리에 고장이 생긴다. 이 경락은 氣血의 길을 지배도 하나 또는 인간의 정신의 부조리나 호흡의 부조리, 심장의 부조리, 맥박의 부조리 등이 有할 시는 그 영향이 경락에 미치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靜座, 靜心과 靜思가 순조로운 호흡으로 경락을 순조롭게 하여 기혈의 순행을 돕게되는 것이다. 고로 국선도에서는 經絡流通法을 중요시하며 필연적으로 유통시켜야 된다.

이러한 天理와 生理의 道理는 아직 과학화할 수 없다. 그러나 천리의 모습(相, 象, 形)을 본받아 실천함으로써 자연의 원리에 접할 수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해는 어려우나 체험으로 입증할 수 있다.

 

 

제5절 국선도의 大意(대의)

국선도의 대의를 밝히기 위하여 儒, 佛의 대의를 밝힘으로써 쉽게 이해할 것으로 보아 유불의 大意 밝힌다.

불교는 本來 面目의 見性을 목적으로 하는 敎다. 견성은 陰陽一氣의 先天面目이니 즉 吾身이 生하기 전에 그 무엇이 진리가 있어서 만유가 生하는 가를 覺悟하는 것이다.

그 도법의 기초원리는 먼저 탐진치의 三毒을 소멸하고 안,이,비,설,신,의의 六根을 청정하여 계정혜를 닦아서 후천물질의 染心(염심)을 버리고 보리를 얻는 것이다. 이것을 마하 반야, 바라밀라 한다.

[보리는 正覺이라는 뜻이요, 마하는 無限廣大의 뜻이요, 반야는 청정지혜의 뜻이요, 바라밀은 成道의 뜻이니 '마하 반야 바라밀'은 무한광대한 지혜로 성도해서

인간을 초월한다는 뜻이다.]

유교는 먼저 格物致知 誠意正心으로 부터 修己治人의 人道이며 윤리적 종교로서 修身齊家 治國平天下의 도를 仁義에 두고 현실적 인륜도덕을 밝히는데 있는 것이다.

 

국선도의 기초원리는 먼저 一水二火의 煉丹蓄氣(연단축기)를 入道의 門으로 하고 水火의 결합으로 金丹을 조성하여 大氣相通으로 出神成仙이 되는 것이다.

 

국선도는 현재에 생활하는 吾身이 成道하는 것이고 사후에 무슨 극락에서 신선이 되는 것이 아니다. 死하면 魂飛魄散(혼비백산)하여 없어진다. 그러므로 千年鐵樹花開易나 一失人身再復難이라 此身不向今生度하면 更待何生度此身이라 하는 말이 있다.

그러나 成仙하면 역시 생사를 超出하고 長生久命으로 消遙自在하여 壽福無窮하나니 인간의 최고최상의 발달이다.

천지지도의 公心을 儒는 道心, 佛은 淨心, 仙은 眞心이라 하고 氣質之性의 私心을 儒는 人心, 佛은 染心, 仙은 假心이라 칭한다.

仙은 因假成眞(인가성진)하고 佛은 除染悟淨(제염오정)하고 儒는 以人行道한다. 心은 同하나 用은 各異하다.

 

佛書에 본리 無一物이라 하고 一切唯心造라 하고 不生不滅이라 하고 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 하는 것이 모두 染心을 除(제)하고 淨心을 찾는 明心見性의 요결이며,

仙에는 載形包一(재형포일)이라 하고 致虛極(치허극) 守靜篤(수정독)이라 하고 寂寂醒醒(적적성성)이라 하고 一念空性이라 하는 것이 모두 假心을 滅하고 眞心으로 修身煉性의 要言이다.

佛의 장경과 선의 도서가 모두 많다. 그러나 모두 假託(가탁)이요, 비유로 되어서 眞中有假요, 假中有眞이니 진가를 분별하기가 어려울 뿐더러 이러한 문서로 하여 誤信(오신)으로 인한 誤人도 많은 것이니 직접 仙人의 사부 밑에서 체득하기 전엔 실로 極難 문제인 것이다.

 

오직 明心眞心으로 行功하여 체득이 있을 뿐이다.

先天面目을 구하려면 空과 眞을 찾아야 한다. 空으로 智慧가 生하고 眞實하므로 수명이 久(구)하다.

神은 虛에서 生하고 氣는 實에서 生하는 것이니 虛實을 잘 수련하는 것이 陰陽合實의 국선도이다. 국선도는 진실하기 위하여 一을 포한다. 仙은 寂寂醒醒이 寂寂은 空이요, 醒醒은 眞이다. 空과 眞을 동시에 수련하는 것이 국선도이다.

이 理를 曉得(효득)하지 못하면 평생하여도 道入도 못 가는 것이다. 水中의 一陽을 진리로 하는 것이니, 수중일양은 仁이요, 仁이 없는 行功은 成事成物이 아니되는 까닭이다.

천지지도는 終(종)이 없으므로, 一心으로 가는 것이므로 須臾離(수유리)가 아니다. 중단하면 二로되고 破片(파편)이다. 그러므로 수도자는 一心으로 끝까지 가는 것이 道다.

眞實은 一氣의 恒動性(항동성)으로 動하는 것이니 一向一樣(일향일양)으로 遲(지)도 없고 速(속)도 없고 마냥 動한다. 이것이 誠(성)이다.

誠者는 生物하고 成物하고 成功하고 이 道와 誠이 없으면 하나도 성공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모든 사물 모든 연구가 이 道와 誠의 부단한 노력이 있어서 성공한다.

나무도 자라다 부족이 있으면 死하는 것과 같이 인류는 도를 떠나면 혼란과 질병과 전란으로 死할 뿐이다.

 

 

제2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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