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風水 잡설''
최창조 지음
1부. 다시 바람과 물의 길에 들어서서
''마을 뒤로는 겨울의 모진 바람, 눈보라를 막아 주는 수려한 山이 우뚝 솟아 있다(주산, 또는 진산으로 불리우는 현무). 그러나 그 산은 결코 위압감을 주지 않는 부드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 산기슭, 경사가 급하다가 완만하게 바뀌는 곳에는 祖上들의 산소를 모셨다. 조상들은 자기 子孫들이 사는 마을을 언제나 굽어보고 있다. 마을 좌우로는 고만고만한 봉우리의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 온화하기 이를 데 없다(청룡과 백호).
조상들은 산소가 있는 마을 뒷산은 성역이라 함부로 대하지 못하지만 그 옆 산들은 나무하러, 소 먹이러, 꼴 베러 每日처럼 오르내렸다. 계집아이들은 봄이면 나물 캐러 그곳에 나온다. 사내아이들과 어울려 놀다 보면 나중에야 그 안에 신랑감이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사내아이들이 산딸기를 따 주면 계집아이들은 꽃목걸이 꽃팔찌를 만들어 준다.''
''마을 앞 텃밭(명당)을 지나면 질펀한 논이 펼쳐지고 그 가운데 동동산이라고 부르는 장난감 같은 동산이 있다(안산). 어느 해 홍수에 떠내려 가다가 이 마을이 좋아 눌러앉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이 동산에는 꽃이 많이 핀다. 그 동산 양지녘에는 함지박만한 아기무덤이 있다. 그곳은 오히려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다. 그 동산을 휘돌아 시내가 흐른다(내수 혹은 명당수).
시냇가 자갈을 들추면 가재가 웅크리고 있고 다슬기가 지천으로 깔려 있다. 물은 맑고 가뭄에 그치는 법이 없다. 동동산에 올라 그 시내를 보면 들판을 굽이굽이 돌아 마을을 쓰다듬듯 흘러가는 모양이 손에 잡힐 듯하다.
마을 앞쪽으로 멀리로 비단 장막을 펼친 듯 빼어난 산(조산)이 가물거리고 그 산 아래로는 큰 江(외수 혹은 객수)이 흐른다고 한다. 어른들은 한 해에도 몇 차례씩 그곳으로 천렵을 나가고 겨울철에는 멧돼지 따위 산짐승을 잡아 오기도 한다. 삶의 터전과 죽음의 공간이 혼합되어 이루어진 이 풍경은 전통적인 우리들 마을의 전형이자 風水家의 이상향이다.''
가을 학기 강의는 두 군데 모두를 맡아야 했다.
한 주의 반은 全州에, 반은 청주에, 하는 식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일은 그 大田 가는 시외버스 속에서 벌어졌다. 도무지 숨을 쉴수가 없었던 것이다. 呼吸 곤란 정도가 아니라 누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히는데 나중에는 이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의 고통이었다. 차 속에서의 40분여에 걸친 그 고통은 이후의 내 생활을 거의 완전히라고 할 정도까지 變化시켜 버리고 말았다.
도무지 사람이 많은 곳이라든가 都市의 잡담 속으로는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고, 억지로 그렇게 하면 틀림없이 그 증세가 찾아들었다. 묘하게도 그 증세는 도시 밖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野外에서야말로 健康을 되찾는 꼴이어서 강의만 없으면 나다니는 식이었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山도 여러 가지 말을 해 준다.
그것을 들을 수 있어야 風水를 할 수 있다. 惻隱之心(측은지심)은 사람에게 있어서 뿐만이 아니라 산에 대해서도 심성의 기초가 된다.
나는 본래부터 학문에 큰 뜻을 두고 학교에 몸담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歲月이 지나고 보다 깊이 風水를 알게 된 다음에는 나름대로의 학문관이라는 것이 생겼다.
도시 속에서도 명당을
나는 최근에 명당은 색다른 특정의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마음속에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風水는 기본적으로 땅에 대한 사랑을 출발점으로 삼기에 그러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풍수를 참 좋아한다.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風水를 격렬하게 논박하던 사람도 자신이 상을 당하면 내게 산소자리를 부탁하는 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여기에는 男女老少도, 종교도, 교육정도도, 사회 계층도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심지어 北韓 사람들도 풍수에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직접 목도한 일도 있다.
2부 역사속의 遷都(천도)
현대 韓國 정계의 인물은 최종적으로 靑瓦臺를 지향한다. 청와대가 지어진 것은 1927년 3대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 때였다.
首都 서울의 주산이자, 우리나라의 가장 상징적인 역활을 하는 위상을 지닌 北岳山. 멀리서 보면 그저 혼자 잘난 듯이 버티고 있는 왜소하기 그지없는 산에 지나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완벽하고 고고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산.
행정수도 이전
우리나라에는 왕조가 많지 않아서 예를 들 것이 별로 없지만, 고구려와 백제가 남천을 거듭하다가 망국의 한을 남겼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곱씹어 볼 일이다. 首都뿐 아니라 都市를 건설할 때는 무엇보다 用水공급이 어떨지를 따져 보는 것이 최우선 고려 요소이다. 충청권에 수도를 지탱할 만한 큰 강이 있는가? 금강이 있지만 이 강은 지금도 주변 목 축이기에도 부족한 형편이다.
혹자는 조선이 한양에 천도할 때 한양도 그저 그런 농촌이 아니었느냐고 지적할지 모르겠다. 그렇지않다. 한양은 이미 三國시대부터 국토의 요충지로서 중요성이 충분히 인식된 위에, 고려시대에는 남경으로서 이미 준서울의 자격을 지니고 있었던 곳이다.
교하에 統一 수도를
새로운 해는 시작되었으나 산천은 의구할 뿐이다. 1990년 이래 필자는 교하 일대를 統一 수도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해왔다. 교하라는 지명은 한강과 임진강 사이에 끼여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두 개의 큰 강 사이에 위치하므로 그 분수계 기능을 수행하기에, 해안인데도 지세는 악지에 속한다. 이곳이 천도 물망에 오른 곳은 광해군 때이다.
아들을 데리고 다니는 踏査(답사)는 아버지인 내게는 큰 의미가 있다. 제자들은 제자들대로의 맛이 있지만 子息은 그와는 다른 情緖(정서)를 가슴에 심어준다.
먼저 통일 수도 교하의 주산으로 지정한 장명산을 올랐다. 산 너머 북쪽으로는 곡릉천이 흐르고,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놓인 산이다.
풍수사상의 역사와 교하 천도설
韓國풍수의 비조라 불리는 도선국사. 신라말 불교의 선종과 풍수지리는 그 인식 방법이 모두 분석적이 아니라 直觀的이었던 점에서 일치했으며, 더욱이 수행방법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風水의 내용도 매우 건전하여 초기 풍수의 지리학적 접금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 寺刹 입지 선정에 이용되다가 점차 왕궁 입지, 지배층의 양택 터잡기 등 양적 풍수로 확장되고, 후삼국시대에 이르면 국도를 비롯하여 마을, 고을 등의 입지 선정 등에 쓰이는 대표적인 지리학 이론으로 전개된다.
고려시대에 천도 후보지로 가장 각광을 받은 서경 평양과 남경 한양은 득수국이라는 특징을 갖는 장소이다. 득수국이란 명당의 삼면 혹은 이면은 산으로 보호를 받지만 반드시 한쪽 면은 큰 강을 끼고 있는 형세의 땅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시대의 풍수학인들은 그 대부분이 승려 출신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조선, 교하천도설에 대한 이항복의 반대론
'臣이 땅 일은 잘 알지 못하오나 오직 사람의 일은 이해합니다. 일찍이 세상 사람들이 보건대 최상은 德과 福을 심는 것이요, 그 다음은 藥을 먹고 수명을 늘리는 일이요, 그 다음은 財物을 모아 후손에게 전하는 것이며, 계책을 쓸 수 없는 것은 질병과 재앙으로 인하여 백 가지 방법을 다하여도 효력이 없어 할 수 없이 집을 옮기고 방위를 피하는 계책을 써서 요행을 바라보고, 이곳저곳 옮겨서 표주박이 깨지고 솥이 없어져 찝은 쓸쓸하고 곤궁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한말 이후 풍수
조선 왕조 말에 이른 19세기, 風水는 또다시 개벽사상의 기반으로 기능하게 된다. 분명한 것은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 되지 못하는 한, 어떤 수단으로도 명당 吉地를 얻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풍수의 출발점이다.
3부 운현궁 명당터
철종은 33세에 후사 없이 승하한다. 왕권 임명권은 헌종의 어머니인 조대비의 손에 들어갔고 이미 여러 방면에서 손을 써 두었던 흥선군 이하응은 자신이 철종과 6촌 간이란 점을 이용하여 둘째 아들 명복을 등극시키니 이가 곧 고종이다. 고종의 誕生地(탄생지)는 지금의 운현궁 자리였음은 운현궁 관람권에도 명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