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가바드기타- 간디解說
[간디는 '바가바드기타'를 無我行의 복음서로 여기고 아하메다바트, 사티아그라하 아슈람에서 1926년 2월 25일에 시작하여 11월 27일까지 9개월 동안 날마다 解說하였다. 이 책은 두 充實한 필기자의 기록에 의해 世上에 태어나게 되었다.]
머리말
내가 '기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889년, 그때 나이 스무 살이었다. (英國人)그들은 에드윈 아놀드경의 훌륭한 번역판을 가져왔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제2장의 마지막 19줄은 내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있다. 내가 보기에는 그 19줄 속에 다르마의 알속이 다 들어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지식은 經驗의 결실이다. 제2장의 19줄은 '기타'를 理解하는 데 열쇠가 된다.
경전을 제대로 이해 하려면 잘 성숙된 道德的 감수성과 경전이 말하는 진리를 좇아서 살아보는 經驗이있어야 한다. 眞理를 실현코자 한다면 '타파스차리아'(修練의 하나로 자발적으로 自己 몸을 괴롭힘)가 반드시 필요하다.
기타의 주제는 단순히 브라만의 체현과 그 방법들이다. 싸움은 그 가르침을 위한 手段으로 사용되었다. 나는 두료다나와 그 측근들은 우리 속에 있는 악마적 衝動(충동)을 드러내 보여주고 아르주나와 그의 지지자들은 신적 衝動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전쟁마당은 우리의 몸이다. 그와 같은 문제를 經驗으로 알고 있는 시인- 선지자가 우리 안에서 영원히 계속되고 있는 투쟁을 충실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제1장
'마하바라타'는 歷史가 아니다. 그것은 '다르마- 그란타'(종교 윤리 문제를 다룬 저작)다. 서사시는 우리 안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카우라바와 판다바 사이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그려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단 폭력과 비폭력 문제를 밀쳐두고, 이 위대한 '다르마- 그란타'가, 人間이 자기 內部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에 어떤 義務와 責任을 져야 하는지 그것을 說明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임을 말해야겠다. 이것은 수천년 전에 있었던 전쟁이 아니다. 어느 시대에서나 있어왔고 오늘날에도 벌어지고 있는 싸움이다.
'기타' 스스로 여자든, 바이샤든 수드라든 누구든지 神에게 자기를 바치기만 하면 靈的인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밝혀놓았다. '기타'는 육체의 싸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여기에서 서술된 육체의 싸움은 다만 人間肉身의 전쟁터를 描寫(묘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여기 나오는 이름들은 인물의 이름이 아니라 그들이 代表하고 있는 性格의 이름이다. 여기서 묘사된 것은, 뚜렷이 구분되는 인물로 形像化된, 서로 반대되는 정신적 경향이 인간의 몸 속에 葛藤(갈등)하고 있는 모습이다.
악은 어떤 선이 한편이 되어줄 때 비로소 악할 수 있는 것이다. 政府가 대변하는 악한 체제는 선한 민중의 支持를 받음으로써만 지탱된다. 이것이 비협조(non- cooperation) 투쟁을 밑받침하는 原理였다.
제 2장
'마하바라타'자체가 戰爭을 묘사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 아니다. '기타'에서 저자는 위대한 眞實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이하여 그 事件을 현명하게 이용한다.
'기타'는 행위 혹은 지식 혹은 헌신의 방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잘 '바이라기아'를 開發하고 선한 행실을 이루는데 아무리 부지런하고 아무리 정성껏 '바크티'를 실천해도 깨달음에 도달하기까지는 '나'와 '나의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할 것이다. 自我에 대한 執着을 떨쳐버릴때 비로소 사람은 自己實現을 이룰 수 있다.
그것은 그렇게 成功한 사람한테만 가능하다. 자신의 오만한 固執을 버리고 謙遜하게 몸을 낮추는 정도를 보고 그 사람이 얼마나 神께 자기를 바치는지가 判斷되어야 한다. '기타'는 행위나 지식이나 헌신의 방법 따위를 가르치지 않는다. '기타'는 방금 내가 말한 이 하나의 眞理를 가르치기 위해 씌어졌다. 이것은 經驗을 통해 내린 나의 結論이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執着을 떨쳐버리는 그 만큼만 眞理를 좇아 살아갈수 있다.
스리 크리슈나가 '기타'의 그 훌륭하고 아름다운 討論을 진행시킨 것은 바로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밧줄을 뱀으로 보아서 두려워하는 것이다.
바이사는 어린이들도 자기 冊을 읽어서 거기 등장하는 有德한 인물들을 기억하고 사악한 등장인물과 비슷한 사람들을 멀리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마하바라타'를 썼다.
크리슈나는 우리속에 있어서 우리의 수레를 몰고 있는 '아트만'이다. 우리는 수레의 고삐를 그에게 넘져줄 때만 勝利할 수 있다. 우리는 아이들이 父母를 믿듯이 神을 믿어야 한다.
기타는 우리를 편들어 주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정신적 문제를 만날 때마다, 自己에 대한 執着을 버리고 그러고 나서 어떻게 할지를 결정한다면 그대들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리 크리슈나가 열여덟 장에 걸쳐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內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