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 육관도사의 風水·明堂이야기(下권) 손석우 지음

 

 

 

제1부

천하제일福地 靑瓦臺 터

노태우 前 大統領 장인墓 사연

웅비하는 西海岸(서해안) 시대와 全州

무등산 정기와 김덕령 將軍

지리와 사주와 관상의 만남

 

제2부

하회마을의 風水와 그 전설

국토비보의 사찰, 운주사와 실상사터

삼청동의 안가지기

충효세업 청백가성, 맹사성 생가

인촌 김성수 생가터

원각사터와 세조의 풍수관

보은단동, 홍순언의 집터

南山 4혈과 남산골의 명터들

염천교의 대부송과 강희맹의 집터

 

3부

우리나라 風水의 비조, 도선국사

고려왕조의 성립과 개성의 풍수

혜산스님과 낙안 오씨 이야기

무학대사와 朝鮮의 건국

태조 이성계와 활기묘의 전설

世宗大王 여주릉(영릉) 이장과 광주 이씨 문중이야기

하연 정승묘의 전설

장흥 명당과 인왕선 치마바위의 사연

묘터에 뜸 뜨는 이야기

진묵대사와 무자손 천년 향화 지지

포천 금주산과 양사언

이율곡의 잉태와 조상묘의 현몽

숙종대왕과 갈처사

祕訣편- 북한산, 관악산, 청계산 이야기

 

 

 

1부

 

웅비하는 서해안 시대와 全州

 

땅은 살아 있다. 그런데 육관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이러한 인류학적 생태학적 유사성에 대한 흥미가 아니라 땅이 움직인다, 즉 지구가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땅은 곧 살아있는 生命體요, 신성하고 경외스러운 자연 그 자체인 것이다. 땅이 움직이는 징후를 우리 동아시아의 지각변동과 관련시켜 이야기함으로써 風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육관은 말하고자 한다.

 

 

지금은 우주의 계절이 바뀌는 시기이다. 삼라만상의 모든 질서는 循環한다. 우리에게 낮과 밤이 있고 사계절이 있듯이, 우주와 지구에도 음양의 기간과 계절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쉽게 말해 換節期(환절기)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도처에서 이상 기후현상이 일어난다. 환절기에 동아시에서 일어나는 가장 큰 변화는 지각변도이다. 환태평양 화산대의 바깥 쪽에 위치하고 있는 日本열도는 서서히 가라앉는다.

 

해마다 조금씩 가라앉다가 마침내 후지산이 조그만 섬으로 변하고 만다. 태풍 폭우 지진 화산 활동이 그 기간중에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고 우리나라는 西海가 솟아올라 국토가 확장되는 경이로운 기적을 맞이하게 된다. 평균 수심 2백미터도 안 되는 서해가 융기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 속도는 일본이 가라앉는 것보다 훨씬 빠르다.

 

서해는 떠오른다. 지구의 이치가 그렇다. 우리나라의 국토는 서쪽으로 확장되고 지도는 나날이 바뀐다. 우리나라의 국운은 이제 서쪽으로 이동한다. 그리하여 위대한 서해안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中國과 땅이 붙어버리는 지각변동의 일대 기적이 일어나리니 지금의 서해안 일대를 개발하여 서진 정책의 전진기지를 마련해야 하는 것은 우리 시대가 떠맡아야 할 역사의 소임인 것이다. 서해가 서서히 솟아올라 중국대륙과 연결된다. 풍수는 큰 것을 말할 수록 더욱 믿기 어려운 법이므로 독자들을 탓할 생각은 없다.

 

천운과 지운이 함께 찾아와 위대한 서해안 시대의 서막을 여는 곳, 서해의 중심도시로 부상하여 장차 세계적인 규모의 도시로 웅비할 그곳은 어디겠는가? 육관이 觀(관)을 해보니 全州(전주)가 으뜸이라!

 

 

지기가 서남방으로 이동하여 1995년 3월 무렵이면 全州의 대운이 열리기 시작한다. '평양의 기운이 왕성하면 전주의 지운은 쇠락하고, 전주의 지운이 흥하면 평양의 지운은 망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평양과 전주는 지맥의 기운이 시소 같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제 곧 南北의 자유왕래가 시작되면 평양의 지운은 그 빛을 크게 잃게 된다. 대신 전주의 지운이 왕성하게 활동하여 전주는 크게 번성할 것이다. 평양이 쇠하는 것만큼 반대로 전주는 흥하게 된다. 이것이 지리의 법칙이다. 전주는 다가오는 2천 년대 서해안 시대의 중핵이 되는 도시가 될 것이다. 천운이 그렇고 지운이 또한 그렇다.

 

 

 

地理와 四柱와 觀相의 만남

'이보게, 옛부터 人傑은 地靈이라 했는데, 자네의 사주와 관상이 비록 거지이지만 이제 선친의 체백을 좋은 데 모셨으니 곧 발복이 있을걸세. 만약에 이후로 이상한 조짐이 있으면 어디어디로 연락해주게. 내가 그때 다시 한번 와 봄세.'

 

인간만사 만국의 도성 같은 영화 권위도

한갖 개미 집 속의 一場春夢인데

더러운 티끌 속에 뒤엉켜살면서도

천지분간을 모르는도다.

 

이 우주간에 가장 밝은 빛은

부모님을 받들어 모시는 孝性의 마음이요

이 천지간에 가장 지혜로운 바람은

수시로 모이고 흩어지는 氣이노니

 

밝은 효성이 이 지혜의 氣를 타면

땅이 달려와 그 앞에 열리고

하늘이 따스한 이불을 내려

인간의 허물을 감싸주네.

 

명당은 하늘이 감추고 땅이 숨긴

이 우주의 보물,

꽃에 燈이 달린 향기로운 생명이니

뉘라 함부로 가질손가.

 

욕심을 버리고 마음이 깨끗하며

선업과 적덕을 행하는 자만이

땅 속의 향기로운 바람氣을 만날 수 있나니

바라건대 부디 복을 지을 지어다.

 

더러운 티끌 속의 부귀 공명이

어찌 이 향기로운 세계의 悅樂(열락)을 알겠나

명당의 정기를 받은 밝은 공명은

紅塵(홍진)의 부귀를 까마득히 넘어가네.

 

 

 

하회마을의 풍수와 그 전설

하회의 主山은 花山인데 그 宗山 태백산의 맥을 이은 日月山이다. 화산을 주산으로 하고 남산을 좌청룡으로, 북쪽 절벽에 이어지는 화산의 잔맥을 우백호로 하며 水口인 화천을 건너 원산지를 안산으로 하니 그 가운데 있는 화회는 곧바로 풍수상 명당이 되기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인걸은 人傑은 지령地靈이라 했다.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이 되어 求國의 명재상으로 추앙받는 서애 유성룡에 가문에는 흥미로운 비화가 많이 전한다.

서애 유성룡은 안동에 살았다. 그에게는 '숙'자가 셋이나 달린 가까운 인물이 있었는데, 사람됨이 어리석고 둔하여 '숙맥' 노릇밖에 못하던, 집안에서 '치숙'으로 불리는 그의 '숙부'였다. 이른바 '삼숙이' 삼촌이었던 샘이다.

 

'어찌하여 그대는 속았다고 생각하는가? 그럭저럭 지내다보니 우연히 그렇게 되었늘 뿐이라네. 그대는 이미 출세하여 나라일에 바쁜몸이고, 나 같은 사람은 草野(초야)에 묻혀 있으니 무슨 가르칠 말이 있는가? 그러나 내일이 되면 반드시 어떤 중 하나가 찾아와서 자고 가기를 청할 것이니, 그 중이 아무리 애원을 하더라도 절대로 재우지 말고 집뒤의 망자로 보내 재우도록 하게. 이 말을 반드시 명심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크게 그르칠 일이 생길 것이니, 조카님은 꼭 잊지 마시게나.'

 

 

'저는 오대산에 있는 중으로서 영남의 山川을 돌아보는 길이옵니다. 평소에 대감의 맑은 德과 높은 이름이 당대 제일이란 말을 듣고 잠시 뵙고자 왔사온데, 오늘은 날이 저물었으니 하룻밤을 재워주시면 내일 날이 밝은 대로 일찍 떠나겠습니다.' 했다.

 

서애는 숙부의 혜안에 놀라 속으로 감탄하면서,

'집안에 사정이 생겨서 재워드릴 수 없으니 집 뒤의 산속 암자에 가서 쉬도록 하시구려.' 하면서 거절하였다.

 

'어디서 오시는 존사이시기에 이러한 누지에 왕림하셨습니까?' 밤이 깊어 술이 깨는데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왔다. 중은 눈을 떴다가 너무나 끔찍한 장면에 다시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거사가 자신의 배를 깔고 앉아 시퍼런 비수를 들고 쏘아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천한 중놈이 어찌 감히 이런 생각울 하였느냐? 네가 바다를 건너 이 땅에 오르던 날, 나는 이미 네 녀석이 이곳으로 오리라는 것을 알았는데, 어찌 나를 속이려 드는냐?'

 

'이제 소승에게 죽음이 임박했는데 터럭만큼인들 어찌속이겠습니까. 소승은 일본 중이옵니다. 토요토미가 바야흐로 군사를 내어 귀국을 치려 하는데 꺼리는 것은 오직 귀댁 대감이오. 그 때문에 여기 먼저 와서 유성룡 대감을 해치려 했던 것인데, 이제 선생의 神鑑(신감)에 탈로난 것입니다. 바라옵건데 제 목숨을 살려주시면 맹세코 이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치숙은 말했다.

'우리나라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하늘의 運數로 정해진 것이니 사람의 힘으로 어찌 할 도리가 없다. 나 역시 하늘을 어기려고 하지는 않지만 이곳만은 나의 힘으로 마땅히 지킬수 있다. 장차 왜병이 여기에 들어오면 하나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터인데, 너 같은 개미목숨을 죽여서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목숨은 살려줄 것인바 곧바로 돌아가서 토요토미에게 조선에 내가 있다는 것을 반드시 알려라.' 임진왜란 중에도 안동의 한 고을이 편안히 지낼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중의 보고가 토요토미에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국토비보의 사찰, 운주사와 실상사

음택의 경우는 예외가 많지만, 터의 규모를 크게 잡아야 하는 양택의 경우는 대체로 그 입지 조건이 몇 가지 조건에 한정되어진다. 상식적인 얘기가 되겠지만 우선은 지반이 단단해야 하고 급격한 경사는 피해야 한다. 일광이 좋아야함은 물론이고 풍부한 물을 쉽게 구할 수 있어야 한다. 바람도 막아야되며 排水(배수)도 원활해야 한다. 또한 궁극적으로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매사에 편안한 느낌을 줄 수 있도록 그터가 有情해야만 한다.

 

 

그러나 풍수지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주변 山의 형상과 기운을 참조하고, 건축물의 기능과 성격에 따라 동일한 공산 내에서도 배치를 섬세하게 하며, 지기를 잘 살펴 그 기운이 힘을 쓸 수 있도록 조영해야만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이러한 '조화로운 터'의 상당부분이 寺刹터라고 하는 점은 자못 意味深長(의미심장)한 면이 있다. 육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절터가 풍수상으로 매우 좋은 자리에 터잡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이다.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천불산 기슭에 가면 운주사라고 하는 사찰이 있다. 운주사와 그 일대의 터는 매우 신비로운 곳이다. 운주사는 도선국사의 국토비보사상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찰이라 할 수가 있다. 도선스님은 우리나라의 지형 전체를 배(船)로 보았다. 그런데 船腹(선복)에 해당하는 호남땅이 영남에 비해 산이 적어 배가 기울 것울 항상 염려 하였다. 게다가 우리나라 錦繡江山 三千里의 빼어난 정기가 배가 기울어지는 동쪽으로 흘러서 일본으로 가는 것을 몹시 꺼려하였다. 그래서 호남에서 제일 적격지를 골라 천불,천탑을 세웠던 것이다.

 

 

히로히토의 묘를 쓰러 갔을 때도 느꼈던 바이지만, 우리는 아직 일본의 위세를 당하기가 여의치 않다. 그러나 전 국민이 힘을 모아 통일을 이루면 그 옛날 중원평야를 치달리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 더구나 앞으로 오랫동안 五庚明星(오경명성)이 우리나라를 비추니 國運의 대상승은 이미 보장된 것이다. 또한 머지 않아 지구의 地軸이 바로 서는 날이 오는데(정확한 날짜는 천기누설이므로 밝힐 수 없으니 양해를 바란다) 그때가 되면 천지가 개벽하고 驚天動地할 대사건이 일어난다.

 

 

서해는 솟아오르고 일본열도는 가라앉는 것이다. 후지산이 조그만 섬으로 변하고 우리나라의 서해안은 대륙과 연결된다. 그러니 우라나라는 이제 西進政策(서진정책)을 과감히 펼쳐야만 한다. 압구정동 거라에서 철없이 일본문화를 쫓아다니는 젊은이들이여, 명심할 지어다. 일본은 망한다. 국운이 쇠하는 정도가 아니라 땅덩어라 全體(전체)가 가라앉고 마는 것이다.

 

망하는 나라의 문화를 어짜 똥강아지처럼 뒤따라 다니는가? 정신차리고 民族의 자존심과 정기를 되찾는 일에 힘을 쓸지어다. 그 옛날 花郞道의 정신을 본받고, 예의범절을 잘 지킬 것이며, 도덕성 함양에 전력하여야 할 것이다. 일본을 넘어서고자 하는 이들도 또한 감상적으로 일본을 배척할 게 아니라 오직 그 인품과 실력으로써 克日 해야할 것이다.

 

 

 

삼청동의 안가지기

이 동리의 지명 또한 안씨가문과 무관하지 않으니, 그 가문에 3형제의 淸白吏가 나왔음을 칭송하자는 뜻이요, 3대에 걸쳐 청백리가 대를 이어 나왔음을 기리는 의미에서 그렇게 지어진 것이다. 삼청동 '안가지기'의 연유는 이와 같은것이니, 곧 음택명당과 양택명당의 중요함이 역사와 가계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력을 실증해주는 좋은 사례로써 기억해둘만하다.

삼청동의 이름 유래와 관련하여 또 다른 유력한 학설 중의 하나는 그것이 도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이다. 三靑이란 원래 인간이 희구할수 있는 도교의 최고의 이상향으로써 옥청, 상청, 태청,을 지칭한다.

 

 

도교의 이러한 사상은 우리나라 고유의 민족사상인 國仙道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써 역대로 그 흔적을 남겨왔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도교를 매우 존중한 인물이었고, 고려시대에도 복원궁, 대청관 등의 도관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도 소격서에 삼청전을 두어 그 전통을 이어온 바 있다. 따라서 삼청동의 이름은 바로 이 삼청전의 소재지라는데서 유래한다.

 

 

 

3부

혜산 스님과 낙안 오씨 이야기

 

도선국사를 따라다니며 지리를 어느 정도 전수받은 스님 중에 혜산 이란 분이 있었다. 때는 후삼국시대였다. 민심은 피폐하였다. 허기에 지쳐 쓰러진 혜산 스님. 마침 이곳을 지나던 오씨 성을 가진 노인 한 분이 그를 본 것이다. '아이구, 이를 어째, 스님께서 길에서 돌아가시다니!' 오노인댁에서 여러 날을 보낸 후 혜산스님은 쾌차할 수 있게되었다. 그동안 오노인댁의 모든 식구들은 정성을 다하여 스님을 간병하였던 터라, 모두들 너무도 기뻐하였다.

 

 

혜산스님은 길 떠날 차비를 하면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였다.

'소승이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제가 땅을 좀 볼 줄 아오니 이후 커다란 福을 받을 명당터를 보아드릴까 하는데 어떠실지요?'

 

고려의 제2대 임금인 혜종 의공대왕의 운명의 첫 페이지는 이 한마디의 제안에서부터 시작된것이니, 신기하고 묘하도다! 착한 일을 한 사람은 반드시 복을 받나니, 그 후손이 훗날 대왕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는 구나. 그래서 스님은 낙안고을 어느 산자락 아래에 이르러 훈훈한 地氣가 오르는 곳을 가리키며 '여기는 왕비가 날 자리이오니, 여기에 묘를 쓰면 후손 중에 반드시 대통일왕국의 왕비가 나올 것입니다.' 하였다.

 

'지혜롭도다, 오씨 처녀여!

먼 길을 달려 물을 청하는 지친 장수에게

완사천 수양버들 잎사귀를 그 물에 띄우나니

지혜로움은 장수의 눈에 들어

훗날에 장화왕후가 되는 구나

지금도 그 수양버들 남아 있어

왕후의 智慧(지혜)를 한들한들 노래하네.'

 

 

 

무학대사와 조선의 건국

 

무학(1327~1405)은 고려 충숙왕 14년 9월 20일에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다. 무학은 어린나이에 근처의 절에 출가하여 동자승이 되었다. 신라때 의상대사가 지었다는 '산수기'에는 이 부분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한양에 도읍을 정하려고 하는 이가 만약 스님의 말을 듣고 따르면 그래도 나라를 연존시킬수 있는 약간의 희망이 있도다. 그러나 정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나와서 시비하면 채 5세도 지나지 않아 임금자리를 뺏고 빼앗아가는 재앙이 있으며 도읍한 지 2백년 쯤 뒤 나라가 위태로운 국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스님은 곧 무학을 지칭하는 것이요, 정씨는 정도전을 말하는 것이며, 위태로운 국난이란 임진왜란을 뜻하는 것이니, 8백 년 앞을 내다 본 의상대사의 혜통함이 이와 같았다.

 

 

서울은 국도의 터다. 조선왕조의 都邑地(도읍지)이자, 오늘날 우리 大韓民國의 수도이기도 하다. 역사의 기록으로 보면 고구려 동명성왕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부아악(인수봉)에 올라 살 만한 곳을 찾았다 하니 이미 2천년 전부터 국역풍수의 진원지가 되는 으뜸 터다. 의상스님과 도선스님이 미리 그 길기를 보았고, 마침내는 나옹스님의 법통을 이은 무학대사에 의해 국도의 터로써 정해졌다. 그러나 국도로써 쇠운의 길에 접어들었으니 머지 않아 이전될 운명에 닥친다.

 

 

 

진묵대사와 무자손 천년 향화지지

 

진묵화상 그는 신통자재한 큰스님이었으나 불행하게도 그가 처한 사회적 상황이 웅지를 펴지 못하게 하였다.

'내가 곧 떠나리니 그대들은 물을 것이 있으면 기탄없이 물으라.'

'스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 어떤 스님의 법통을 이은 것으로 할까요?'

'비록 세간의 명리에 대한 집착에서 초탈하지는 못한 스님이라 할지라도 휴정 노장의 문하로 하려므나.'

세속 나이 72세, 법랍52하였다. 때는 인조 11년(1633) 10월 28일이었다.

 

진묵스님은 이름자 그대로 우뢰와 같은 큰 목소리를 가진 스님이었으나 평생토록 沈默하며 살아가신 분이다.

이번 이야기는 진묵스님이 출가한 승려의 신분으로 속가의 부모님께 어떻게 孝道했는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진묵은 어느덧 세속 나이 사십을 넘기고 있었다. 전주의 일출암에 있을 때는 庵子(암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조그만 집 한 채를 마련하여 불거촌에 계신 어머니를 모셔왔다. 그곳은 왜막촌으로써 지금의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 아중리에 해당한다. 그는 朝夕(조석)으로 어머니를 찾아뵙고 문안을 여쭈었다. 그로부터 5, 6년이 지나서 늙으신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내가 중의 몸이니 대를 이어 祭祀(제사) 모실 아들을 낳을 수 없구나. 하니, 나의 자손들이 아니더라도 뭇 사람들이 향불을 피울 그런 자리에 어머님을 모셔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오늘날 성모암 옆자리에 묘를 썼다. 그자리가 연화부수형으로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그날 진묵대사는 목수를 불러 현판을 만들고 스스로 붓을 들어 이렇게 썼다.

 

'여기 이 묘는 만경현 불거촌에서 나서 출가 사문이 된 진묵일옥의 어머니를 보셨는 바, 누구든지 豊年(풍년)을 바라거나 疾病(질병) 낫기를 바라거든 이 묘를 잘 받들지니라. 만일 정성껏 받든 이가 영험을 못 받았거든 이 진묵이 대신 結草報恩(결초보은) 하리라.'

 

그 뒤로부터 원근의 주민들이 이 묘에 향화를 받들고서 소원을 이루지 못한 이가 없었다고 전한다. 오늘날까지도 참배객들이 줄을 잇는 이유는 모두 그 영험이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이 묘에 향불을 사르고 자신이 소원하는 바를 간절히 기원하면 반드시 성취하는 바가 있으리라. 자손만이 발복을 받는 법이 어디 있는가. 이곳은 누구든지 발복할 수 있으니 명당 발복을 원하는 사람들은 깨끗하고 맑은 마음으로 이곳에 참배하라. 그로써 진묵의 영통함이 증명될 것이다. 육관은 그날 진묵스님의 어머니묘를 보고서 일행들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이율곡의 잉태와 조상묘의 현몽

 

율곡의 가문은 덕수 이씨의 가문이다. 이 조상의 묘는 개성군 중면 덕수리 왕대동에 있는데 지금의 休戰線(휴전선) 부근이다. 묘택의 주인공은 고려시대에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친 이소 라는 분이다.

 

이 명당터의 형국은 야자형이고 중국의 성인인 공자를 낳은 니산과 닮았다 하여 여니산이라 한다. 이 산을 주산으로 하여 동군자, 북성인, 서대장, 남성현의 바위봉우리가 둘러져 있으니 성인군자와 문재무장의 영기를 모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래서 6세 이후에는 반드시 중국의 공자, 제갈공명, 이태백에 비견할 만한 偉人(위인)이 나온다고 일찍이 중국의 지관들이 예언한 바 있었다. 그 소응은 예상대로였다. 6세쯤부터 동방의 군자로서 공자에 견줄만한 이율곡이 나왔고, 제갈공명에 비할 만한 李舜臣(이순신)이 나왔고, 이태백에 비견할 만한 택당 이식이 나온 것이다.

 

 

 

숙종대왕과 갈처사

 

조선시대 숙종대왕은 순행을 좋아하는 임금이었다.

어느날 삼척에 도착하여 자기와 生年日時가 똑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 사람은 벌을 천 통이나 치는 양봉꾼이었는데 숙종은 너무도 신기해서 그를 초대하기에 이른다.

'나는 한양 사는 이동지라는 사람인데, 우리가 기이한 因緣이니 한번 우리집으로 놀러 오시게나.' 하면서 아무날이 되어서 어디어디로 오라 말하고는 돌아왔다.

 

얼마후 이 양봉꾼은 자신을 초청해준 주수한 용모의 선비 말대로 한양 구경도 할 겸 정말로 남대문을 들어오게 되었다. 마땅한 선물이 없어서 도토리 알맹이에 꿀을 재워서 한 통을 싸들고 그 선비가 오라는 곳으로 갔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아뿔사 경복궁이 아닌가?

 

王 앞에 사지를 떨며 나서니, '어이쿠, 우리 친구 어서 오시게.' 하면서 숙종은 희색이 만면이었다. 가져온 선물보따리를 풀어놓으니, 궁궐의 만조백관들은 모두 처음 보은 것이라 눈이 자못 휘둥그레졌다. 숙종임금이 먼저 맛을 보니 도토리의 떫은 맛이 약간 남아 있긴 했지만 그 속에 든 꿀은 몇 달간이나 재워져 있었던 까닭에 희한한 단맛이 입 안에 다그히 퍼지는 것이었다. 숙종은 신하들에게도 권하며, 이 음식의 이름을 '꿀밤'이라 명했다고 한다.

 

 

순행을 좋아하는 숙종이 수원 지지대 고개 쪽으로 쉬엄쉬엄 걸어내려 가는 중이었다. 언제나처럼 두루마기 차림에 갓을 깨끗이 쓰고 가던 중, 숙종은 고개 아래쪽 냇가 (이 냇가는 수원천으로 지금도 있다)에서 엉엉 울고 있는 어떤 총각을 발견했다. 괴이하다 싶어 자세히 살펴보니 그 총각은 물이 흘러 내려 가는 냇물 바로 옆에 관을 가져다 놓고 묘를 파고 있지 않은가. 조금 파내면 물이 그만 꽉 차, 삽만 갖다대도 물이 술술 오르니 그 더벅머리 총각은 엉엉 울면서도 어찌 할 바를 모르는 것이었다. 숙종은 내심 의아스러웠다.

 

'저 사람이 아마도 묘를 쓰는 모양인데, 아무리 가난하고 땅이 없어도 有分數(유분수)지, 묘를 쓰려면 山에 써야지 어찌 송장을 물속에 넣으려고 저러는지 그것 참 희한도 하다.'

'이보게 총각, 여기 관은 누구 것인고?'

'제 어머니의 시신입니다.'

'여기는 왜 파고 있는고?'

'묘를 쓰려고 합니다.'

'이보게나, 여기 좀 보게. 물이 금방 이렇게 솟아나는 곳에 어찌 묘를 쓰려고 하는가?'

 

'저도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늘 아침에 어머니께서 갑자기 세상을 뜨셨는데 갈처사라는 노인이 찾아왔습니다. 절더러 불쌍타 하면서 이리로 데려와서는 이 자리를 무조건 파라 하셨습니다. 그분은 꽤나 유명한 지관인데, 저기 저 높은 언덕에 살고 계십니다.' 산 언덕 높은 곳에 쬐그만 오막살이가 있었다.

 

숙종은 불현듯 차고 다니던 붓통에서 붓을 꺼내어 무엇인가르 급히 썼다. 그리고는 둘둘 말아 그 총각에게 전해주고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 일은 내가 보고 있을 터이니 이 서찰을 가지고 수원부로 급히 가거라. 수문장들이 길을 막거든 이것을 보이도록 하라.'

 

총각은 또한번 황당했다. 아침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지, 유명한 지관이 와서 오후시간에 냇가에 묘를 쓰라고 하지, 묘를 쓰면서 하도 기가 막혀 엉엉 울고 있는데 갑자기 왠 선비가 나타나 수원부로 뛰어가라 하지, 도무지 어느 장단에 발을 맞추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선비의 차림새가 워나 수려청정하고 목소리에 위엄이 있는지라, 총각은 그러리라며 수원부로 급히 가게 되었다.

 

 

그 서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御命(어명). 수원부사는 이 사람에게 당장 쌀 3백 가마를 하사하고 좋은 터를 정해서 묘를 쓸 수 있도록 한시 바삐 조치하라.'

수원부가 발칵 뒤집힌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전후사정을 파악한 수원부사는 즉시 어명을 수행했다.

'아! 상감 마마, 그분이 상감마마였다니!'

총각은 하늘이 노래졌다.

 

 

한편 숙종은 총각이 떠나자 구씨를 불러 관을 지키게 한 다음, 단단히 벼르고서는 산마루를 향해 올라갔다. '나는 한양 사는 이동지인데 그대가 갈처사 맞소? 그대가 저 밑에(관이 보이는 냇가를 가리키며) 묘를 쓰라고 했소?' '아니, 저기 저렇게 물이 펑펑 솟아나오는 곳에 어떻게 묘를 쓰라 했소? 듣자니 당신이 지리를 좀 한다던데, 그런 엉터리로 어찌 가난한 사람을 울리고 골탕 먹이는 것이오?' '아니, 선비란 양반이 개코도 모르면서 참견이야. 당신이 저 밑의 땅이 얼마나 좋은 명당터인 줄 알기나 해?' '저기가 어떻게 명당이란 말이오?'

 

 

'이 양반아, 저기는 시체가 들어가기 전에 이미 쌀 3백 가마를 받고 명당으로 들어가는 땅이야.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발복을 하는 자리인데 물이 있으면 어떻고 불이 있으면 어떠냐. 개코도 모르면 잠자코나 있으시오.' 숙종의 얼굴은 그만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조금 전에 자기 손으로 서찰을 써주지 않았던가.

 

 

'영감님이 그렇게 잘 알면 어찌 하여 저 아래 고래등 같은 기와집들이 천지로 많은데, 게서 好衣好食하며 살지 않고 이런데서 사십니까? '

'이 양반이 또 아무 것도 모르는 이야기를 떠드네.'

'무슨 말인지...'

숙종은 아예 벌써부터 죽눅이 든다.

 

 

'저 밑에 저놈들은 말이여. 도둑질해가지고 암만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가져봐야 아무 소용 없어. 여기는 바로 임금이 찾아올 자리여. 그러니 이런 좋은 터가 또 어디 있겠나? 수원부 안에서 아무리 떵떵거리고 호의호식해도 임금이 찾아오는 그런 집은 없지. 여기는 비록 보잘 것 없이 누추한 집이지만 나라의 임금이 찾아오는 명당터란 말일세.'

숙종은 그만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이런 신통한 사람을 만나고 있는 자기 스스로가 꿈속을 헤매고나 있지 않은지 꼬집어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王이 언제 찾아옵니까?'

'거, 꽤나 귀찮게 물어오시네. 잠시 기다려보오. 내가 재작년에 이 집을 지을 때에 날 받아놓은 것이 있는데, 가만 어디에 있더라.' 하면서 옛날 보자기를 풀어서는 날 잡아놓은 종이를 찾아 먼지를 털어내어 보고는, 그만 대경실색한다. 그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밖에 나와 큰절을 올리는 것이다.

 

'상감마마, 소인이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종이에 적힌 시간이 바로 이 시간이었던 것이다.

'이보게 갈처사, 괜찮소이다. 대신 그 누구에게도 결코 말하지 마시오.' 하면서

 

'나를 위해서 내가 죽은 뒤에 묻힐 자리 하나 잡아주지 않겠소?' 다정한 목소리로 신후지지를 부탁하니, 어느 분의 분부라고 거역하랴. 이틀 뒤에 갈처사는 정말 올라왔다. 그리고는 명당을 잡았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 서울의 서북쪽 고양시의 서오릉에 있는 명당 자리다.

 

 

''신묘神妙하도다, 갈처사여

냇가에 묘를 쓰고 산마루 언덕에 초막을 지으니

음택명당은 냇가에도 있고

양택명당은 산마루에도 있구나

임금을 호통치면서도 죄가 되지 않으니

풍수의 조화는 국법도 넘어가네

볼품없이 초라한 몸이라도

가난한 이웃에게 적선하고

나랏님께 충성하노니

그 이름 歷史에 길이길이 남으리라.'

 

 

 

祕訣편- 관악산, 북한산, 청계산이야기

 

옛날부터 관악산에 대명당이 있다고 전해왔다. 수년 전에 육관이 제자의 간청에 못 이겨 직접 올라가본 적이 있었다. 이 산을 올라가다보면 그 경치가 빼어나서 곳곳에 명승을 이뤄놓았는데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산을 찾아 호연한 기상을 연마하고 있었다.

 

 

관악산은 차령 산맥이 끝나는 곳이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들 이 관악산이 행정구역상으로 서울 특별시에 속해 있다고 해서 삼각산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삼각산은 우리나라 모든 山의 태조가 되는 白頭山에서 뻗어내려 함경도를 거쳐 남쪽으로 곧바로 달려와서 서울 북방에서 끝나는 산이다. 인구 천만이 넘는 서울의 진산이 바로 이 삼각산이다.

 

 

그러나 관악산은 속리산 천황봉에서 시작하여 남쪽에서 북쪽으로 뻗어 올라온 차령산맥의 끝머리로써, 삼각산과는 전혀 그 뿌리가 다른 산이다. 그러므로 풍수 지리상으로 본 首都(수도) 서울은 漢江 이북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며, 한강 이남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주기 바란다.

관악산에 올라가서 사방을 관망하니 첩첩한 산줄기가 이리꾸불 저리 꾸불 천변만화를 이루었도다. 서울 남산 쪽에서 바라보던 이 산의 봉우리는 마치 불꽃같이 생겼었는데 이곳에서 관악산 꼭대기를 바라보니 흡사 관 같이 생겼구나. 산줄기의 기세가 너무나 웅장하여 사람과 귀신을 압도하는구나.

 

 

전체적인 산의 정기가 한 곳에 뭉쳐서 대명당을 맺었으니 예가 비로 '帝(제)'자 혈이 아니던가. 옛날부터 일러오기를 관악산 높은 곳에 제자혈이 있으니 28대에 걸쳐 제왕이 날 자리라고 일러왔는데, 오늘에야 그 자리를 찾으니 참으로 감회가 깊도다. 대충 계산해도 약 6백년 동안을 자손 대대로 제왕 노릇할 자리이니 한 왕조를 창건하여 유지할 대명당이 틀림없도다.

 

그 누가 복이 있어 이런 명당을 차지할꼬? 적덕한 집안에서 그 임자가 니리로다. 기묘하고 괴상한 이 혈을 무슨 수로 알아낼꼬? 동남방과 남방에 물줄기가 비치고 '帝' 자 같이 생긴 곳을 찾아라.

 

 

관악산 그 아래로는 천을 태을 이 비치는 양택 대명당터가 있으니, 오늘날 정부종합청사가 자리하여 제대로 들어섰다. 원래 종합청사터는 지금의 서울대공원 아래 부지를 마련해놓고 공사가 상당히 진척되어 있었다. 왕복 8차선 도로가 계획되고 가운데 화단이 조성되어 있었으나, 육관이 보건대 자리가 좋지 않아 古 朴正熙 大統領께 직접 건의 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된 것이다. 상권에 이미 언급한 바 있으나 관악산 명을 다루는 관계로 다시 한번 다룬다. 서울대공원 안에 있는 화원은 그 당시 종합청사터로써 만들어놓은 것이며, 다만 8차선은 4차선으로 줄였다.

 

 

북악산 안쪽에 천하의 대명당이 뭉처 있으니 현무의 세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았구나. 삼각산의 굳센 기운이 한 곳에 뭉치었으니 참으로 대단한 자리로다. 옛날 큰 명사들이 이 자리에 큰절하고 마땅히 손좌로 해야 한다고 기록해놓았으나, 이 말을 들으면 크게 그르칠 것이다. 대대로 德(덕)을 쌓아온 家門만이 이런 대명당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인즉 어찌 범상한 사람들이 이런 대지를 넘볼 수 있으랴! 마땅히 갑을묘 가운데 어떤 좌를 써야 할 것인지 깊이생각해보라.

 

 

'東方의 靑帝가 王座에 오르시니...

萬國의 백성들이 萬萬歲를 부르네.'

 

이상으로 육관비결 북한산 대명당을 조금 언급하였거니와 다음은 효자원에 얽힌 박효자의 지극한 효성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조선후기에 박태신 이라는 이가 있었다. 다동(지금의 서울시청 뒤쪽)에서 살았는데, 부모님이 살아계신 동안 봉양을 잘 하였고 孝性이 지극했다. 어느 날엔가는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북한산 아래(오늘날의 효자원자리)에 묘를 썼다.

 

 

아들 박태신은 집이 다동인지라, 묘소까지 너무 멀어 매일 같이 찾아뵙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와 똑같이 묘소에 찾아가 문안을 올렸다. 새벽같이 일어나 다동집을 출발하여 서대문 무악재 불광동 갈현동 구파발을 넘어서 그 아버지의 묘택에 문안을 드리고 돌아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장마가 오거나 태풍이 와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 일은 3년간 계속되었다. 직선거리로만 쳐도 약 40여 리(약16킬로미터)나 되는데 돌아서 가는 길은 얼마나 멀었던가.

 

 

그는 매일 새벽 뛰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이 많이 내렸다. 그는 무악재를 넘기가 어려웠다. 지금이야 그리 가파른 언덕이 아니지만, 이전의 무악재는 험하고 높은 고개였던 것이다. 호랑이도 출몰하였고, 따라서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으려면 여럿이 모여서 창을 든 병사들의 안내를 받아서 넘던 그런 고개였다.

 

 

가파르고 높은 절벽이 많은 험악한 고개인데, 폭설까지 내렸으니 神出鬼沒(신출귀몰)한 재주가 없고서야 어찌 넘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도 박태신은 무악재를 넘기로 했다. 무플과 손으로 기어오르다시피 하여 겨우 넘을 판이었는데, 그만 발을 잘못 디뎌서 절벽 아래로 구르고 만 것이다.

그는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잠시 혼절하여 쓰러져 있는 동안 옆이 훈훈하여 깨어보니 황소만한 호랑이가 지기 옆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호랑이는 박태신이 혹여 얼어죽을까 염려하여 자신의 열기로 그를 따뜻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등을 내려 엉덩이를 땅바닥에 붙이고 타라는 시늉을 하였다. 박태신은 호랑이의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무서워서 양귀를 잡으니 호랑이는 달리기 시작했다. 비호처럼 날쌔다더니, 정말로 이건 날아가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달려와 멈추었는데 바로 아버님의 묘 앞이었다. 호랑이가 영물이라더니, 과연 신통하기만 했다. 박태신이 문안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호랑이가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다시 올라타니 쏜살처럼 달려 무악재 아래 인가부근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리하여 박태신은 호랑이를 타고 돌아가신 아버지묘에 문안드리러 다니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약 6년간을 하루도 빠짐 없이 그리했다.

 

그런 어느 날 박태신도 죽고 말았다. 시신을 어버지묘 앞에 묻었는데, 밤마다 호랑이가 크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구슬프고 애절하게 우는지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열흘 이상이나 같이 애를 태웠다. 어느날 호는 소리가 그쳐 찾아보니 호랑이는 박태신묘 앞에서 엎드린 채 죽어 있었다.

 

 

사람들이 크게 감동된 바가 있었다. 호랑이가 영물이라서 효자를 따라 죽으니 동네에서는 박태신을 일러 하늘이 낸 효자라 했다. 몇몇 사람들이 호랑이 고기와 껍질을 탐하여 칼을 대고자 였으나 노인들이 크게 나무라자 잘못을 알고 물러갔다. 호랑이도 박태신의 묘 앞에 묻어주었는데 지금도 있다.

소식이 전해지자 나라에서도 효자의 정문을 내리고 그 일대를 孝子院이라 명명하게 됐다.

 

 

과천 청계산 서쪽 기슭에 대명당 자리가 있으니 장군대좌혈이다. 옛 비결에 이르기를 '청계산 서쪽에 장군대좌혈이 뭉쳐 있는데 우측으로 돌아서 산맥이 흘러 혈이 응결되어져 있다. 이 자리 앞쪽에 펼쳐진 안산은 군마안 이며 좌향은 서쪽을 바라보고 혈의 깊이는 일곱 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육관이 오래 전에 제자 몇 명과 함께 이 명당을 찾아 청계산에 올라가 보았더니 정혈이 뭉친 곳이 깊이 파헤쳐져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일행은 매우 낙담하였다. 특히 벽계는 명혈이 파손된 데 통분해 하며 육관의 논평을 부탁하였다.

 

 

'이 사람아, 내 마음도 마찬가질세. 대저 명당이라는 것은 하늘에서 내리고 땅이 감추어서 수억만 년을 보전해온 천하의 보물인데 한 개인의 하찮은 욕망 때문에 무참히 파괴되어 버리니 이 얼마나 아타까운 일인가? 또 우리 배달 겨레의 후손 가운데서 위대한 인재들이 배출되어 三神一切(삼신일체)의 '한밝정신'으로 전세계 인류를 영도해 나가도록 태고때부터 마련해둔 명당자리를 이렇게 함부로 파헤쳐버리니, 이 아니 애석한 일인가? 그러나 청계산에는 또 하나의 명혈이 있지. 게 어진 줄 아나?'

 

 

그때 제자들은 모두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있었다.

'옛 비결에 의하면 말일세, 과천 동쪽 10리 쯤에 옥녀 등 공형명당이 있다고 했네. 혈이 옥녀의 콧등에 응결되었는데 천 년 후에 道人이 나타나서 묘를 쓴다고 하였다네. 그런데 내가 직접 가서 보니 말이여, 어떤 지관이 이미 자기 자리를 미리 잡아 두었지 않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그런 어려운 명당을 찾아 놓고도 혈처를 정확히 못 잡았으니 아마도 앞으로 크나큰 변고를 당할 걸세. 지관이 너무 좋은 자리를 탐하면 그 사람 꼴을 당할 테니 그대들도 유념하시게나.'

 

 

그로부터 얼마 후에, 육관의 말대로 옥녀등공에 가묘를 써두었던 지관은 부인과 아들들이 연달아 죽어버리는 변고를 당하고 말았다. 겉으로 보아서 아무리 정확한 혈처라 할지라도 그 속의 다른 경우가 허다한데, 어찌 스스로 도인이라 하며 천장지비의 혈처를 욕심내는 지관이 제자리를 찾겠는가? 그러니 청계산의 두 명당은 이미 욕심내는 사람들에 의하여 들키고 말았도다. 장군대좌는 파손되었고 옥녀등공은 혈처가 약간 틀렸다. 파손된 혈기가 되살아나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혈처가 틀린 곳은 바로 잡으면 된다.

그리고 청계산에 또 하나의 명당이 있다.

 

 

 

雲中仙坐(운중선좌)

 

신선이 구름 속에 앉아 있는 형상이 대명혈이니 이는 지금의 정신문화연구원의 뒤쪽에 있다. 제갈공명이 날 잘리다. 운중선좌혈은 예로부터 신비한 곳이니, 일찍이 중국의 장량이 자기 손으로 운중선좌를 잡은 바 있고, 세갈공명도 열일곱 살때 황승언에게 빌어서 운중선좌를 얻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전해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제갈공명은 명당을 얻은 대신 지관 황승언의 딸과 결혼해만 했다. 황씨 부인은 너무도 못생겼다고 한다. 아무리 은인의 딸이라지만 신랑은 도저히 초야를 치룰 수가 없었다. 첫날밤에 도망을 쳤다. 그러나 수십리 길을 달려가도 그는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그 부인이 도술을 부린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여러 날이 지나고 억지로나마 초야를 치루게 되었다. 그리고 나자 곧 기적이 일어났다. 초야를 지낸 신부의 흉한 얼굴이 벗겨지고 눈부시게 황홀한 얼굴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알고보니 그녀는 하늘의 仙女였는데 황정경을 잘못 읽어 벌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운중선좌의 명당도 얻고 美人 아내까지 얻은 제갈공명은 이후 유비를 만나 중국 역사상 최고의 전략가로 그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가 각종 병법과 도술에 능통했던 까닭은 모두가 黃氏 婦人(황씨 부인)의 덕택이었다고 한다. 운중선좌에 묘를 쓰는 인연이 있는 자는 앞으로 제갈공명에 버금가는 인걸이 될 것이다. 과연 누가 이 명혈의 주인공이 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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