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と)! 일본- 응집하는 일본인의 의식구조 해부'
성호철 지음
이 책을 쓰면서 일본인이 자신들의 사고와 행동을 정당화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공을 들였다. 편견과 선입견을 지우고 차가운 理性만으로 일본, 일본인과 마주하려고 했다.
차례
1부. 눈(視線)의 세계
2부. 뒤틀린 '와(と)'
3부. 메센(目線) 전쟁
4부. '밖의 세계'와 일본
1부. 눈의 세계
일본인은 사물을 어떤 기준으로 바라보고 무엇을 위해 행동하는가?
일본인은 안과 밖으로 나눈다. '안'은 자신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삶이 벌어지는 곳이다. 일본인은 이곳에서 최대한 예의와 도리 그리고 사회의 룰(rule)을 철저히 따른다. 반면 '밖'은 자신과는 무관한 세상이다. 어떤 무례를 저질러도 자신이 소한 '안'에서 이를 용인하면 괜찮다. '밖의 1세계'는 두차례에 걸쳐 '안의 세계'에 충격을 가했다. 1853년 쿠로후네(くろふね, 黑船. 미국 페리제독 함대의 일본에 대한 開港 요구사건)의 출현은 중세막부 체제가 유지되던 '안의 세계'에 충격을 줬으며 질서를 송두리째 바꾸게 했다.
봉건주의 일본을 무너뜨리고 근화된 일본제국을 만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은 '밖의 세계'가 안의 질서를 붕괴시킬 것이란 공포감에 대한 반작용으로 새로운 안의 질서를, 즉 밖의 공포에 대응할 정도의 힘을 키우기 위해 새로운 '안의 세계'를 만들려는 革命이었다. 1945년 미국 맥아더 장군이 이끈 연합국군 총사령부가 도쿄에 위치해 일본을 정렴했다. 1952년 일본이 주권을 회복할 때까지 軍 점령은 약 7년 정도 이어졌다.
일본인을 지배하는 건 주변의 視線, 눈이다
눈이 지배하는 사회의 모습은 매뉴얼 사회, 룰(rule)의 사회. 공간에는 수 많은 눈이 서로를 주시하면서 균형을 맞추며 이런 눈의 상호 견제 속에 도출한 결론은 하나의 메센(めせん, 目線, 시선)으로 정해진다. 앞서 설명한 시선과 메센(目線)을 적용하자면 균일한 구성원이 서로의 시선을 느끼면서 균형을 맞춘 메센(目線), 즉 '안의 세계'가 나아갈 방향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횡적 사회라 하기엔 너무나 一絲不亂(일사분란)하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도 그렇다. 누가 행동지침을 내린 것도 아닌데 수많은 사람들이 이견 없이 같은 방향으로 힘을 응집시켰다. 힘을 응집시키는 기준은 '1'이다. 메이지 유신의 경우 '1'은 덴노(てんのう, 天皇)였다. 권력이 아닌 權威(권위)에 의한 지배다. '1'이 정하는게 아니라 '균일한다'가 '안의 세계'의 입장에 서서 사물을보고, 다른 눈을 의식하는 과정에서 空氣를 읽으면서 점차 의견 수렴이 이뤄지는 것이다.
덴노(天皇)는 권력자가 아닌 집단을 응집시키는 기준이자 무게 중심
일본 사회로 시야를 넓히면 일본이란 '와(と)의 세계'에서 '1'은 덴노(天皇)다. 덴노(天皇)는 다른 국가나 민족의 황제나 국왕과도 다르다. 덴노(天皇)는 권력자가 아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막부 체제를 붕괴하고 다시 덴노(天皇)가 정치의 중심에서 서서 형식적으로 최고 결정권자가 되었지만 역시 덴노(天皇)가 마음대로 결정을 내리는 구조는 아니었다.
예컨대 滿洲事變(만주사변)은 덴노(天皇)를 비롯한 도쿄의 결정권자들의 지시에 따라 생긴게 아니라 關東軍(관동군)이 민족주의적 폭주를 하면서 터진 측면이 적지 않다. 물론 만주사변을 지지하는 일본 민족의 메센(目線)과 함께 이후 만주사변을 하나의 결정으로서 도쿄의 결정권자들의 밀고 나간 것 또한 사실이다. 덴노(天皇)는 만주사변을 지시한 권력자가 아니라 '안의 세계'가 결정한 메센(目線)을 인정하고 그런 메센(目線)에 權威(권위)를 얹는 역활인 셈이다. 현대 일본에서 권력자는 내각총리이며, 덴노(天皇)는 일본 정치에 직접적인 결정 권한이 없다. 하지만 덴노(天皇)는 일본 2천 6백여 년의 역사에서 줄곧 '1'로서 일본인의 무게 중심이었다.
눈의 지배를 만든 배경... 섬
섬나라인 일본의 특성상 섬 밖으로 밀려나가는것 자체는 곧 죽음을 의미할 수 있다. 셈의 메센(目線)을 따르지 않으면 다른 선택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기에 룰(rule)과 空氣를 따라야 하는 절박함이나 압력은 半島나 大陸의 국가와는 차원이 달랐을 것이다.
눈의 지배를 만든 배경... 흔들리는 땅 위에 사는 일본인
인간이 진동을 알 수 있는 震度(진도)는 3이상이다. 2014년 진도 3이상의 지진은 189회다. 이틀에 한 번꼴로 일본의 땅이 흔들렸다. 일본의 地震을 경험하지 않고는 일본인을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이 발을 딛고 선 땅이 흔들리는 상황이 반복되면 땅을 절대적인 존재가 아닌 相對的인 존재로 인식한다.
닌겐(人間)은 자연재해라는 큰 혼란과 위협을 순식간에 맞닥뜨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서 형성된 표현이다. 자연재해의 위기에서 '와(と)의 세계'는 하나로 뭉치고 서로 엔료(えんりょ, 遠慮(원려)하고 메이와쿠(めいわく, 迷惑, 폐)를 끼치지 않으며 조화롭게 살려고 노력한다.
완벽한 물건을 요구하는 일본 소비자
흔들리는 땅 위에 사는 소비자는 불완전한 제품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다. 低價라도 완벽해야 한다. 일본 100엔숍에서 파는 저가 제품들도 싼 재료를 썼지만 제품 하나로서의 완벽성은 모두 갖추었다. 자연재해 속에 사는 일본인은 安全과 信賴(신뢰)를 중시한다.
제2부 뒤틀린 '와(と)'
눈의 지배가 주는 압력과 병리 현상
대인공포증은 일본에 그 환자 수가 유독 많을 뿐만 아니라 아예 이런 증세를 처음 발견하고 병명을 붙인게 日本이다. 일본 사회를 지배하는 눈을 항상 의식하고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메센(目線)에 신경을 쓰다 보니 이것이 病으로 발전한 형태다.
T.W.강은 2002년 저서인 "日韓동맹 vs중국"에서 일본인은 개인으로선 미국인도 혀를 내두를 만큼 기발한 의견이나 아이디어를 가진 국민임을 지적하는데 문제는 '그룹'으로 여러 일본인이 모였을 때라고 보았다.
'와(と)'의 응집... 작아지는 개인과 강해지는 집단
졸전한 월드컵 대표팀에게 환호하는 일본 축구팬.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일본 대표팀도 브라질월드컵에서 1무 2패로 최악의 성적을 내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나리타空港에는 1천여 명의 축구팬들이 몰려 '수고했습니다'를 외쳤다. 출국 때 모인 7백 명보다 많은 숫자가 몰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16강은 물론이고 8강 정도의 성적을 낸 대표팀을 맞는 분위기 였다. 부진한 성적을 거둔 대표팀에게 냉대의 시선을 보내거나(잉글랜드), 달걀(이탈리아)이나 엿(韓國)을 던지는 나라보다 최악의 성적을 내고 돌아온 축구대표팀에게 우르르 몰려들어 '수고했습니다'를 연발하는 일본이 무섭다. 일본 축구팬은 단지 '일본을 대표해 고생한 축구팀'이기 때문에 박수를 보내는 다테마에(たてまえ, 建(て)前, 원칙)를 보여줬다.
제3부 메센(目線) 전쟁
일본인은 남들과 같은 방향으로 가야 마음이 놓인다. 메센(目線)은 이런 방향을 결정하고 강제하는 힘이다. 메센(目線)은 주로 정치적 지지를 묻는 여론과 달리 생활 전반에 걸친 행동지침이다. 메센(目線)은 범위가 넓고 다양하다.
일본의 3세대론...
패전세대, 富의 향유 세대, 잃어버린 세대, 2000년 이후 일본의 세대교체. 현재의 일본을 이해 하기 위해선 2000년 이후 세대 주도권의 변화를 봐야 한다.
전쟁을 보는 일본의 눈... 미야자키 하야오와 '영원의 제로'
'안의 세계' 입장에 서서 전쟁을 보면 일본 국민들이 스스로를 진정한 전쟁 피해자라고 보는 메센(目線)이 보인다. 도쿄 대공습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空軍이 일본 本土를 폭격한 것을 일컫는다. 이중 1945년 3월 10일에 벌어진 '미팅 하우스2' 작전이 가장 큰 규모였으며, 이날 하루 동안에만 도쿄에서만 사망자 8만 3,793명, 부상자 4만 918며(당시 일본 경시청 조사)에 달했다. 단독작전에 따른 공습 피해로는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로 추정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애니메이션 감독이다. '이웃집 토토로'가 보여준 따뜻한 感性과 童心의 세계은 어른이 된 한국인에게 여전히 기대고 싶은 故鄕의 풍경이다. 미야자키는 그동안 작품 전편에서 '反戰' 사상을 보여준다. 그런데 독특한 특징은 善惡의 대결을 묘사하면서도 선악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인의 마음속엔 '침략자인 일본군이 누군가를 죽였다'는 이미지가 별로 없다. 줄곧 일본열도에 살았던 대다수 일본인의 입장에서 침략 전쟁은 '美軍의 공습을 받은 전쟁'이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전쟁의 참혹함'을 다루면서 '일본인이야말로 정말 가장 큰 전쟁의 피해자'라고 말한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죽은 日本人은 8백만 명이 넘는다. 반면 일본군이 한국과 중국에서 서민을 학살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일본인 피해자 메센(目線)을 믿는 일본인으로선 植民地 지배에 대해 일본을 비판하는 한국인을 상대로 진심어린 사과를 할 수 없는 것이다.
혐한론의 뿌리... 한국인에게 배신당했다는 일본의 패전세대
하지만 일본인은 항상 '왜 한국인은 일본을 미워하냐'고 묻는다.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양심적 일본 지식인조차도 '수백만 명이 희생된 한국전쟁을 겪은 한국인에게 왜 共産主義에 대한 적개심보다 더 오래된 과거인 식민지를 떠올리는 반일이 더 큰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富의 향유 세대'의 무관심을 '친한'으로 본 한국인의 착각
1980~1990년대 세계의 돈줄을 쥐었던 일본에게 한국은 안중에도 없었다. 三星電子가 1970~1980년 대 일본의 전자 기업에게 많은 기술 이전을 받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국에선 정치계와 경제계 할 것 없이 '克日(극일)'이란 기치 아래 일본과의 관계 맺기에 여념이 없었다.
몰랐던 한국에 옛 '쇼와'(しょうわ, 昭和)의 정취를 느끼며 다가섰다가 반일 정서의 가시에 찔린 일본
1990년 대까지 일본에게 한국이란 나라는 '밖의 3세계'였다.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2002년 韓日월드컵 개최와 한국의 4강 진출은 일본에 한국을 각인시켰다. 2003년 4월 NHK의 위성방송인 BS2에서는 '겨울戀歌'를 방송했다. 2004년 11월 욘사마의 일본 방문에 나리타空港엔 5천여명의 팬들이 새벽부터 몰려 들었고, '환영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한글 플래카드가 등장했다. 일본 민영방송사들은 '욘사마 訪日'을 생중계하기 위해 헬기를 띄웠다. 정규 프로그램 중에도 욘사마를 태운 자동차가 현재 일본의 어디를 지나고 있는지 보여줄 정도였다.
外信(외신)들도 이런 일본 반응에 놀라 '한국의 드라마 스타가 도쿄 공항에 수천명을 운집시켰다' 등의 기사를 내보냈다. 겨울戀歌. 여성팬들은 한국 드라마에서 자신들의 靑春 시절인 1970년대 일본을 배경으로 한 사랑 이야기를 봤다. 일본인이 말하는 쇼와(昭和) 시대는 대략 1960년~1980년대 초반을 일컫는다. 한국 드라마가 일본인이 잃어버린 옛 鄕愁(향수)를 들고 일본열도에 들어온 것이다. 한류 팬은 한국을 일본의 쇼와(昭和) 시대로 생각했다.
혐한은 한국을 '일본의 일부'가 아닌 '외국'의 경쟁자로 인식
반면 韓流는 아시아 각국의 국민들이 쉽게 접할 수있는 저렴한 가격에 제공되었고 그만큼 많이 소비되면서 하나의 문화 기류로 만들어졌다.
한일간 새로운 관계 만들기
韓流와 혐간의 메센(目線) 전쟁에서 긍정적인 대목은 고슴도치처럼 서로를 찌르지만 이 과정이 적당한 거리를 찾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경제와 문화 분야에서 한국과의 경쟁을 접하면서 오히려 혐한 세력이 먼저 '구시대의 식민지적 한국 인식'에서 벗어나고 있다. 사실 한국이 싫어하는 일본은 현대의 일본이 아니라 근대의 일본(1945년 종전 이전)이다.
제4부 '밖의 세계'와 일본
1945년 8월 15일. 덴노(天皇)는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침략전쟁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에서 면책을 받은 덴노(天皇)는 여전히 '1'이었다. 미국은 이질적인 힘이자 현실적인 권력이었다. 메이지유신 이전의 幕府(막부)와 같은 존재일 따름이다.
재등장한 '전'의 세계와 '밖의 2세계'
2010년 중국의 GDP는 5조 8786억달러를 기록해 5조 4742억 달러에 그친 일본을 제쳤다. 日本은 1968년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지 42년 만에 3위로 밀렸다.
한국의 외교를 고자질이라고 비판하는 일본인
일본 사회에선 朴槿惠 대통령에 대해 '구치츠게 가이코' 이른바 '고자질 외교'라는 말이 유행했다. 고자질은 우선 같은 '소속 집단'이어야 성립된다. 동생이 형을 엄마에게 고자질하려면 같은 가정에 소속되어야 한다. 사실 朴대통령이 해외 국가원수들에게 일본을 언급하는 것이 고자질 외교가 된다면, 중국의 習近平(시진핑) 주석도 마찬가지로 고자질 외교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인은 유독 한국에 대해서만 고자질 외교라고 말한다.
왜일까? 일본인 잠재의식 속에서 한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일본의 一部(일부)로 여기기 때문이다. 누구도 현대 사회에서 이를 말하지 않지만 무의식에선 여전히 한국을 일본의 一部로 본다.
일본에 오는 관광객 숫자로 보면 중국인에 이어 한국인이 두번째로 많다.
실제로 '가이진(がいじん, 外人, 외국인)' 이란 단어에는 한국인이 포함되지 않는다. '한국인을 가이진(外人)으로 보세요? 라고 물어보면 다들 웃으며 대답을 회피한다. 아니라는 뜻이다.
일본인은 한국을 '구니'(くに, 國)로 여긴다. 구니(國)는 통일된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일부분이며 地方이다. 이런 의식은 역사가 오래 되었다. 壬辰倭亂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明을 치러 갈 테니 朝鮮은 길을 비켜 달라'고 요청했다. 물론 전쟁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였지만 그 안쪽엔 이런 의식도 없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고자질 외교도 이런 일본인의 의식속에선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韓國은 일본의 一部인데 어찌 다른 나라 元帥를 만나서 日本을 비난하니 배신감이 드는 것이다. 일본 '안의 세계' 에서 한국은 밖이면서 밖이 아닌 존재다.
韓日 경제 보완론과 극일 경제의 종언
소프트뱅트 회장인 孫正義(손정의)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일본 내 전력 수급상황이 불안정해지자 KT와 협력해 金海에 IDC(인터넷데이터센터)를 세우고 일본 기업 전용 서비스를 시작했다.
일본인을 만나면 다들 그들의 친절함에 놀라고, 뒤돌아서면 집단주의 폭주라는 과거의 칼날을 되뇌며 마음이 불편해진다. '잃어버린 세대' 에게 한국은 외부에 있는 '국가'다. 앞선 세대와 같이 무의식 속에서 한국을 일본의 一部로 보거나 하지 않는다.
극일 시대의 종언
"일본과의 和(화)를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문신 申叔舟(신숙주)는 성종(成宗, 1457~1494)에게 이 같은 유언을 남겼다. 징비록에 따르면 成宗이 죽음을 앞둔 申叔舟에게 유언을 물었고 그의 대답이 이와 같았다고 한다. 成宗은 유언대로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고 교린 관계를 유지하며 일본과의 관계를 유지했다. 1980년대 한국은 극일을 선언했다. 이후 20여년간 언론에선 한국인의 질서의식 개선을 바랄 땐 일본인의 질서의식을 보도했고, 한국의 기업경쟁력 약화를 걱정할 땐 일본의 기업 사례를 찾아 독자에게 알렸다. 한국의 문제를 고칠 때마다 항상 日本의 사례가 등장했다.
2000년 이전 까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은 모든 준거를 日本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 시기 일본은 한국에 무관심했다. 욘사마의 등장과 2002년 韓日월드컵 개최, 케이팝의 인기 등 2000년 이후 변화가 생겼다. 일본은 고의적으로 무시했던 한국을 재발견했고, 일본과 너무 흡사한 情緖(정서)에 놀랐고 친밀감을 가졌다. 韓流(한류) 붐이 불었다.
현대 일본의 '안의 세계'에서 한국은 특이한 '밖'이다. 한국은 일본의 '안의 세계'가 바라보는 '밖의 123세계' 어느 곳에서 고정적으로 속해 있지 않다. 한국을 바라보는 '안의 세계'의 메센(目線)이 아직 고정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례적인 일이다. 韓流 붐은 한국을 '안의 세계'의 균일한 多(다)' 중 하나로 여기는 눈이다. 한국을 타국으로 인지하지 않고 자신들의 세계에 속한 一員(일원)으로 보는 것이다.
혐한은 무의식으로 한국을 '안의 세계'의 一員으로 인정하면서 한국이 메이와쿠(迷惑, 폐)를 끼친다면서 배제하고 이지메를 가하려는 눈이다. 일부 애국론자들은 친중으로 흐르는 한국을 바라보면서 중국과 같은 편인 '밖의 2세계' 로 바라보는 눈이다. 공통점은 2000년 이전의 한국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어 '밖의 3세계' 로 보는 눈은 이제 '안의 세계'에서 사라졌다.
日本 물건이면 무조건 좋다는 1980년 대와 1990년대 인식은 한국에서 사라졌다. 극일 콤플렉스를 아직 못 버린 건 한국의 정치인들과 일부일 뿐이다. 申叔舟가 잃지 말라고 유언한 '일본과의 和', 申叔舟의 속뜻은 여러 갈래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섬나라 일본에 마주한 半島에 위치한 국가로서 섬을 대륙과 이어주는 역활일 것이다. 섬나라 日本을 고립시키지 말고 가까이 해 交易을 주고 받으면 갈등도 그만큼 줄어줄 것이다.
고립된 섬이 자신들만의 생각에 갇혀 잘못된 오판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라는 것도 속뜻의 하나일 것이다. 申叔舟의 유언은 戰後 70년 만에 등장한 '밖의 2세계'에 동요하는 일본 '와(と)의 세계'와 애국론자들에게 하고 싶은 조언이기도 하다. "한국과의 '和(화)'를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