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관 도사의 터(상)' 손석우 지음

 

 

 

차례

 

책머리에

글을 엮으면서

 

제1부

육관약전

우리나라의 산세와 명혈들

全州 金氏 문장공 김태서 묘의 발복과 김일성의 운명

오대산 명당터의 비밀과 어사 박문수

동작동 국립묘지의 냉혈에 묻혀 고생하는 國母 육영수

왕비가 나는 묘터, 백담사행 법수

남원의 풍수

서울의 풍수와 韓民族의 장래

 

제2부

탈신공 개천명

지구의 신비

2대 天子가 날 자리

형산 옥벼루와 天子의 등극

자미원의 비밀과 남연군 墓(묘)의 도굴 사건

귀룡동 복매의 발복으로 王이 되다

 

 

 

제1부

 

육관약전

 

三國志가 그의 인생행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는 행생들에게 작업을 시키는 데도 언제나 삼국지식으로 지휘감독하였다.

 

'은사님께서는 우리들을 데리고 逍風(소풍)을 갈 때에도 특수한 통솔방법을 행사하셨습니다. 70여 명의 학생들을 3등분하여 전군 중군 후군으로 나눈 뒤 전군과 후군 앞뒤에 2명의 척후병을 배치하여 행렬 앞뒤의 변동사항을 즉각 중군으로 보고하게 하였습니다. 가령 전방(혹은 후방)에서 자동차가 온다고 가정하면 그것이 학생들의 행렬에 따른 입을 통하여 금방 중군으로 보고 되었습니다.'

 

 

3. 6 25와 피난 생활

 

1950년 6월 25일 새벽, 北韓의 전면적인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

 

4. 軍人 생활과 삼국지

 

최지사의 환송사에 이어 모든 장정을 대표한 그의 답사가 시작되었다.

 

'친애하는 道民 여러분의 뜨거운 환송에 깊은 감사의 뜻을 올립니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우리 배달민족은 국가에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언제나 신명을 바쳐서 나라를 지켜왔습니다. 新羅(신라)의 화랑도가 그랬고 한말의 의병정신이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이런 위대한 호국정신을 이어 받은 우리들 일동은 신명을 바쳐서 나라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

 

육관은 자신의 軍人생활은 그에게 많은 경험을 통하여 인생의 진미를 맛보게 하였고 넓은 세상을 헤쳐가는 동안 시야가 넓어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5. 비정한 정치계

 

1957년 늦은 가을 육관은 약 5년간의 軍人생활을 청산학고 순수한 민간인으로 돌아왔다.

 

... 그런 저런 이유로 도움을 청하려고 친한 사람들을 찾아 나섰으나 하나같이 면회사절이요, 문전박대였다. 그는 비로소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이치를 깨달았다. 이왕 이지경에 이르렀으니 名山에 가서 祈禱(기도)나 한번 정성껏 드려보자. 이렇게 결심한 육관이 단신으로 찾아간 곳이 오대산 적멸보궁이었다.

 

 

6. 땅 밑이 훤히 보이다

 

'천지신명이시여, 이 죄 많은 중생을 굽어 살펴 주옵소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軍隊(군대)에 자원입대 하였고 국민을 위한 대의자가 되고저 선거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모든 것에 실패하여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이 미련한 중생의 앞길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목숨을 걸고 하는 이 기도를 제발 성취하도록 명훈 가피 하옵소서.'

 

이렇게 5일째를 넘어서자 육관의 기도는 그 절정에 달하였다.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를 시작하면 그 다음날까지 꼿꼿이 선 체로 축원이 계속되었다.

 

이런 기도가 8일째 되던 날 그는 최후의 결심을 굳게 하고 소원을 성취하지 못할 경우 이 자리에 선 채로 저 세상으로 떠날지언정 결단코 물러서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는 이때 비로소 無念, 無常, 無我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가 이때의 기도를 통하여 깨달은 것은 우주의 만물이 그 뿌리가 하나요 그 體(체)도 오직 하나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저 높은 山이 바로 내 몸이요, 저 넓은 바다가 곧 내 가슴이라는 것이다.

 

여태까지의 온갖 차별세계가 오직 하나로 보였다. 모든 것이 평등하게 되었으며 生과 死가 마치 번갯불 같고 아지랑이 같았다.

 

한참만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중대에서 수도하는 원주스님이 그의 전신을 주무르고 있는게 아닌가?

 

'나도 기도를 많이 한 편이고 또 다른 사람들이 기도하는 광경도 허다하게 보아왔지만 거사님처럼 生命을 내걸고 기도에 열중하는 사람은 평생 처음 보았습니다. 새벽녘에 이상한 꿈을 꾸어서 혹시나 하고 올라 왔는데 만약 내가 오지 않았더라면 정말 큰일 날뻔 하였습니다. 조금 전의 거사님의 몸은 완전히 송장으로 변하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금년 봄에 육관 도사와 단둘이서 조용하게 만난 자리에서 왜 祖父母님을 좀더 큰자리로 모시지 않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의 대답은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그대는 남사고 선생의 행적을 알고 있는가? 명종시대의 큰 예언가였던 선생은 천문 복서 상법 뿐만 아니라, 특히 風水 地理에는 도통한 명사라고 알려지지 않았던가? 지금까지도 격암유록이라는 비결이 성행할 정도이니 참으로 대단한 도인이였었지...

 

그러나 딱 한 가지 과도한 욕심때문에 9천 10장으로 끝내는 망하고 말았어... 사람이 너무 욕심이 강하면 망하는 법이지.'

 

 

7. 풍수의 대도사

 

70년대 초 강남지구 개발이 한창이던 때에 D신문사에서는 지사들의 실력을 시험하는 묘안을 짜내었다. 그들은 육관에게 1호분, 2호분...이렇게 일련번호에 따라 그 묘의 현재상태가 어떠냐고 질문하였다. 이렇게 기록한 자료를 가지고 그 일대의 모든 분묘를 파헤칠 때에 실제 확인해 보니 100퍼센트 적중한 것이 육관이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시험에서 대부분의 지사들은 백기의 묘소중 단 한 군데도 제대로 관평하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경북도청 이전문제가 제기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만은 유독 지금의 도청자리인 산격동으로 옮겨 南向으로 건축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곳에 묘를 쓴다면 반드시 경상감사가 배출될 명당입니다. 그러니 이런 자리에 도청을 신축한다면 날마다 경북지사가 앉아 있을 것이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곳에 도청이 들어섰을 때 대구지방의 地氣를 돋구어서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어 국가 경영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잘 모르는 일이지만 제일 많은 터를 잡아준 곳이 軍隊의 기지이다. 제1군, 2군, 3군, 사단본부의 자리도 대부분 그가 잡은 자리이다. 계룡산 신도안에 육군본부의 터를 잡아준 사람도 육관이었다(계룡대). 그곳 일대는 원래 터가 너무 세어서 군대가 먼저 들어가 지신을 밟아 놓은 뒤에 다른 중요한 기관이 들어가는 것이 순서라는 생각에서였다. 태조가 이곳에 궁궐을 지으려고 목재와 석재를 다듬다가 도중에 물러선 것도 그 터가 너무 세었기 때문이니 두 번 다시 그러한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역대 지사들의 행적을 소상히 설명하면서 그들의 후손이 끊기고 대개가 빈곤하였으며 고희를 넘기도록 장수한 사람이 없었던 까닭은 백골 적악 때문이라고 거듭거듭 훈계하였다.

 

그의 서재에는 온갖 책으로 가득하고 책상 머리에는 다음의 글귀를 써붙여 놓고 있었다.

 

'慾心(욕심)없는 것이 큰 부자요, 職責(직책)에 오르지 않음이 가장 귀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산세와 명혈들

 

우리나라는 山의 나라이다. 우리나라의 산은 수려하고 단아하며, 천지간의 조화를 잘 갖춘 지구의 정기가 그 어느곳보다 충만해 있다. 三千里 錦繡江山이라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니다. 국조 단군 할아버지 이래로 우리 배달민족은, 지구의 정기가 가장 왕성하게 살아 있는 이 땅에서 살아왔다. 그러니 산은 우리의 어버지요 어머이였으며 삶의 터전이었던 것이다. 산을 알지 못하는 것은 제 뿌리를 모르는 것이요, 스스로가 발 딛고 서 있는 삶의 터를 모르는 것이다.

 

山은 높고 신성하다. 인간이 쉬이 갈 수 없는 곳이요, 하늘의 신이 하강해서 살고 있는 곳이다. 적어도 고대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때문에 제천사상과 함께 산악숭배사상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민족신앙이 되었다. 신라 때는 삼신산(금강, 지리, 한라산)이 있었고, 고려 때는 지리, 삼각, 송악, 비백산 등을 사악신으로 했으며, 치악 죽령 주흘 금성 한라 오관 마니 감악 백두산 등에 제단을 만들고 나라의 제사를 지냈다. 조선에 와서는 오악(금강 묘향 지리 백두 삼각산), 오진(오대 구월 속리 장백 백악산)에서 산제를 지냈으니 이러한 숭산사상은 곧 민족의 신앙이었던 것이다.

 

山이라고 하는 것은 요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물리학적 공간으로 인식해서는 안된다. 높이가 얼마요 면적이 얼마며, 어느 지점에서 어느 지점까지 걸쳐 있다는 식의 생각은 제 아버지의 키와 몸무게를 수치적으로 안다고 해서 아버지의 모든 것을 안다고 하는 생각과 똑같다. 현대의 지리학은 山의 일면만을 볼 뿐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과학은 인간과 우주의 극히 작은 부분만을 보는데 그친다.

 

山의 정체와 그 조화는 신묘 무궁하다. 그러므로 산을 인식하는 방식은 형이상학적이고 경험과학적이며 종합적인 사고 체계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터를 잡은 풍수의 출발이다. 풍수는 산을 종합적으로 바라봄으로써 결국은 인간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우리의 유서 깊은 인식체계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온통 산으로 에워싸여 있다. 비행기를 타고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거대하게 굽이치는 산맥과 산맥사이의 조그만 땅에서 오밀조밀 모여 사는 것이 우리들이다. 우리는 그저 산의 커다란 품에 안겨 대대로 그 정기를 받고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周易을 보아도 이것은 분명하다. 우리나라는 주역 팔괘중 칠간산에 속하기 때문에 각 민족의 운세 가운데 산에 속하는 운세이다. 예를 들어 일건천, 이태택, 삼이화...등은 각각 중국, 미국, 독일 등을 가리킨다. 우리나라는 하늘 물 불도 아닌 산의 운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무한히 뻗어나갈 잠재력을 지닌 총각(소남)의 운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艮(간)'이라 함은 만물이 시작하는 곳이자 끝맺는 곳이라는 뜻이다.

 

주역의 설명에 '물시어간하고 종어간이라' 하는 것이 바로 그 뜻이다. 즉 우리나라에서 인류의 원래시족가 생기고 우리나라에서 최후의 마지막을 맺는다는 말인데, 이것은 세계적인 관심거리인지라 특히 영국 옥스포드대학의 고고학회 같은 데서 연구활동이 활발하다.

 

山은 지구의 정기가 화생하는 곳이다.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지구의 기운이 온 나라에 용출하는 곳이 바로 우리의 땅이다. 산 중에서도 백두산은 바로 지구의 정수리이다. 백두산은 모든 산의 조종이며 지구의 숨통이니 천지의 물은 땅의 생기의 정화수이다.

 

'그대들은 '三水甲山'을 아는가?'

 

'갑산'이란 '최고의 산'이라는 뜻이다. 성리학의 태두인 중국의 대학자 주자는 '지구의 지붕인 곤륜산(에베레스트산)으로 부터 세 갈래의 지맥이 뻗어나갔는데, 그중 간룡으로 불린 북쪽 가지가 천산산맥을 타고 몽고를 가로 질러 白頭山에 이르러 결을 맺게 되었다.'고 말했다. 곤륜산의 이 북쪽 가지가 이 세상의 천하에 비길 데 없는 최고의 산이다. '갑산'이란 그런 뜻이다. 또한 이 갑산에서 발원한 물은 압록 두만 송화강으로 흘러 가는데, 이를 두고 삼수라 하니, 삼수갑산이란 백두산의 위용과 주변의 지세를 칭송하는 말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산세는 바로 이 백두산(甲山)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산은 바로 이 지구의 숨통과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봉우리 봉우리, 골짜기 골짜기마다 빼어난 모습은 우리민족의 정기 그 자체이다. 무수한 외적의 침입에도 굽히지 않고 불굴의 勇氣(용기)로 헤쳐나온 것은 모두가 白頭山의 위용과 영기 때문이요 그 신묘한 감응때문이니, 백두산은 그마큼 靈山이요 名山이다.

 

그 백두산이 아래로 가지를 뻗어 삼천리를 내려가니, 흘러가는 용마다 명당 명혈을 이루지 않을 수 없도다. 이여송과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아무리 우리의 명산을 파괴했어도 민족의 정기는 여전히 올올용용하게 살아 있으며, 이제부터는 찬란히 꽃 필것이다. 그리하여 육관은 각 山脈의 흐름을 설명하고 그곳에 있는 명당터에 대한 흥미있고 신비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백두산에서 뻗어내린 대간룡은 굽이쳐 흘러오다가 함경남도 신흥군 가평면의 천불산에 하나의 명혈을 이루었는데, 이곳의 주인공은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이다. 함경산맥이 뻗어내린 이곳의 산형은 목이요, 좌향은 '해좌사향', 형국은 '선인등단'이니 이 묘는 곧 덕릉으로 불리운다. 문장 무장은 물론 왕기가 있는 유수한 명혈이다.

 

이곳의 왕기는 간룡의 흐름을 따라 안변 칠령을 마디로 남행 5백리하여 양주에 이르고, 동북방향으로 틀어 도봉으로 솟은 다음, 다시 龍이 꿈틀거려 백운대 만경대로 재차 치솟아 남으로 뻗어 북악 아래의 양택 대혈에 와서 멈춘다. 첨불산에 묻힌 이안사의 묘의 발복으로 자손의 발복이 한양 땅의 경복궁으로 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러니 조선왕조 5백년의 뿌리가 된 명혈중의 명혈이다.

 

명천 고을의 뒤산에는 칠보산을 수국으로 한 또 하나의 명혈이 있으니 이용익이 그 할아버지의 체백을 몰래 암장하여 발복한 명혈이다. 그는 기묘한 계책으로 이 묘를 쓰고 10년 후 서울에서 물장수의 천민으로 일하고 있었다. 때는 마침 고종이 임오군란으로 장호원에 피신해 있는 민비에게 정세의 역전을 알리고 상경의 희소식을 전할 '조선천지에 가장 빨리 달리는 건각'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그 건각으로 천민 이용익이 뽑혔고 이 희소식을 전한 당사자는 그후 민비의 총애를 받아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 것이다. 또한 그는 여러 벼슬을 거쳐 마침내 전국의 광산권을 독점하면서 황실의 경비를 조달하니 일명 금독대감이었던 것이다. 그는 바로 고려대학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한 인물로서 함경산맥에 묻힌 조부의 발복으로 서울에 와서 이름을 날린 풍운아였다.

 

'그러면 묘향산맥이 지나는 평양은 어떠합니까? 또한 평안도에는 여러 명혈이 있다고 하던데 그곳은 어디인지요?'

평안도의 최고 대혈은 압록강병의 국경도시인 강계에 있다. 이 혈은 중국의 옛 책에 전해오는 천시원국으로 불리우는데, 천하의 4대 명혈 중의 하나이다.

 

南北韓의 자유왕래가 가능해지면 육관은 쉽사리 찾을 수 있겠으나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명혈인 자미원국은 이미 찾아 놓았다. 서산 땅에 있는 이 지구상의 최대 음택 명당인 자미원은 세계통일의 대제왕이 날 자리요, 다스리는 인구가 72억이다. 지금이 쓸 시기로서, 그 전에는 혹 알았어도 건드리기만 하면 벼락을 맞는 자리다. 강계의 천시원은 둘째가는 대명당으로 일제시대 때만 해도 무수한 풍수지사들이 엄청나게 넓은 강계땅을 평생토록 헤매어 다니곤 했었다.

 

또 재미있는 것은, 요즈음 中國사람들이 하늘처럼 떠받드는 모택동의 선조 묘가 강계에 있다는 점이다. 혈 이름이 지주혈이다. 뭇산들이 첩첩으로 에워싼 형상이 마치 거미를 한 가운데 놓은 거미줄 모양이니 높디나 높은 곳에 있다. 모택동은 그 지주혈의 발복으로 天子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평양은 이른바 국도의 터다. 묘향산맥이 흘러오다 낮게 엎드리어 평야를 이루고 대동강이 크게 흘러 바다로 빠지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만한 곳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도읍지로 자주 거론되었던 곳이다. 평양은 풍수의 형국으로 보면 행주형이니 떠나는 배의 형상이고,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곧 항해하는 배 안의 선원들과 같다. 그래서 평양에는 예로부터 우물을 파지 않는 풍습이 있는 것이다.

 

우물을 파면 곧 배의 구멍을 뚫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어찌 되겠는가. 이 믿음은 평양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용수를 대동강에서 취하게 하였고, 그래서 봉이 김선달 같은 대동강 물장수 이야기도 전해지는 것이다.

 

또 읍형이 행주형이기 때문에 풍수적으로 이를 진압해야만 했다. 커다란 쇠닻을 대동강 연광정 밑 용소에 묻어놓았는데, 풍수상으로 배가 떠내려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확인하기 위해 1923년에 日本 사람들이 수중탐사를 한 바있다. 탐사팀은 정말로 커다란 쇠닻을 발견하고 그것을 끌어올렸는데 그리고 나자 그해 평양이 생긴 이래 미증유의 폭우가 쏟아져 평야시 전체가 침수될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 이유가 쇠닻을 걷어올렸기 때문이라고 확신하였다. 민심이 흉흉해지자 그들은 다시 침정의 대제를 지내고 쇠닻을 옛모습대로 돌려놓았다. 지금도 그대로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明(명)나라의 태조인 주원장은

'짐의 조상님은 원래 朝鮮 사람인고로 그 나라는 山川이 빼어나 큰 명당자리가 많다고 하니 조선땅으로 가서 잘 살펴 보도록 하라.' 이런 칙명을 받은 지사들은 三千里 江山을 차례로 답산 하다가 마침내 이 오대산 보궁자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여기가 어떤 성지인데 감히 이곳에다 송장을 묻으려고 했으니 하늘이 진노 하시는 것도 당연하지.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모셔놓은 이 자리에 묘를 쓰려고 했으니 벼락을 맞아 죽는 것도 마땅한 일이여...'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이 묻힌 김수로 왕릉은 백자천손의 명혈이다. 김해 김씨는 南北을 통틀어 1천만명을 육박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家門이다. 백두의 연맥이 한반도의 등줄기를 타고 숨가쁘게 달려와 멈추어 스러지는 곳, 그곳이 바로 김해의 분산(분성산)이요 그 서편 끝 자락 기슭에 유명한 구지봉이 있다.

 

김유신은 수로왕 12대 후손으로 금관가야 구해왕의 증손이며, 7요(일월화수목금토성)의 정기를 타고나서 등에 칠성 무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 다른 인물전은 靑(청)나라 태조인 누루하치에 대한 것이다. 그는 종성이 김씨인데, 이 사람이 바로 김해 김씨라는 것이다.

 

김일성의 운명

김일성의 본관은 全州(전주)이고 그 시조의 묘는 전주의 모악산에 있다. 김일성은 전주 김씨다. 전주 김씨는 본래 경주 김씨다. 저널리스트 문명자씨. '김주석은 북한을 방문한 인사들에게 이씨조선을 창업한 이성계, 大韓民國 초대 대통령인 李承晩(이승만)이 전주 이씨고 또 전두환 전 대통령이 완산 전씨인 것이 자랑스럽다. 나도 전주 모악산의 정기 한몸에 받고 태어났고 그쪽에서도 김씨가 높은데(당시 관2호인 김재순 국회의장을 말함) 어찌 통일이 안되겠느냐고 말하곤 했다는 거에요.'

 

문장공 김태서의 묘는 전라북도 완주군 모악산 도립공원 내에 있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잘 갖춰진 천하대명당이다.. 이 터를 보면 49년 동안 요지부동의 절대권력자가 나올 지기가 있다. 또한 김일성이 6.25 전후 까지 꼭 세번 죽을 고비가 있었지만 꿈에 태서공이 나타나 구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태서공 할아버지를 모시는 김일성의 마음은 이후 각별했던 것이다.

 

육관은 예언한다. 김일성의 운명은 이미 그 시조 墓(묘)에 의해서 정해져 있다. 김일성 같은 큰 인물은 山川의 精氣(정기) 없이는 생겨나지도 못한다. 터의 위력은 참으로 위대하고 신묘하고 무섭기까지 한다. 지령은 인걸이다.

 

 

오대산

 

동대 서대 남대 북대에다 중대 등 동서남북과 중앙에 각각 대가 있고 그곳마다 각각 절이 있다. 그래서 이 산을 오대산이라 한다.

 

'저기 보이는 저 높은 뒷산이 바로 이 오대산의 주봉인 비로봉이여.'

 

설화에 의하면 이조 영조때의 문신 박문수 어사가 이 적멸보궁터에 올라와 보고 크게 감탄하여 그로부터는 佛敎에 대한 비난을 중단했다고 한다.

 

'진실로 굉장한 자리다. 이런 대명당에다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모셨으니 그 제자인 스님들이 山 좋고 물 맑은 좋은 곳에 위치한 화려하고 큰 집에서 놀고 먹는 것도 당연하지. 이 보궁자리로 미루어볼 때 우리나라 불교의 운세는 영원무궁할 것이 틀림없어. 내가 몰라서 잘못 생각한 거야. 앞으로는 불교에 대한 비판을 중단할 거이여.'

 

 

國母 육영수

 

옛 결에 이르기를, 삼각산과 남산이 분할될 때 왕이 급사하리라 했는데, 육여사가 저격당한 그날은 마침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는 날이었으니, 한양의 주산(북악)과 안산(남산)의 지맥이 끊기자 왕비가 급사해버린 형국이 되어버린 것이다. 풍수학적으로 말하자면 그녀는 朴正熙(박정희)를 대신하여 비명에 간 셈이다.

 

'이거 안되겠다. 여기는 악혈이다. 내 평생 백골에 적악하는 것을 피하는게 신조요 서원인데, 이럴 수없다. 이 자리에 들면 국모의 시신은 썩지도 않을 것이다.'

 

'여기 이자리는 음양의 교구가 안되는 자리이고 냉혈입니다. 냉혈이니 시신이 썩지 않고, 음양교구가 안되니 자손이 끊어집니다. 딸이라도 시집가서는 살 수가 없게 됩니다. 이 동작동이라는 터는 공작이 날개를 펴서 날아가는 모양인데, 이런 공작새의 형국에는 명당이 밑에 있지 위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는 포란의 자리도 아니고 그 훨씬 윗쪽이니 윗쪽은 나쁜 곳입니다.'

 

'절더러 바보라 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저는 백골적악을 안하기로 서원을 세운 사람입니다. 귀신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지사로서 첫째가는 금기사항입니다. 지금의 저 자리에 쓰면 반드시 영부인의 시신이 편치 못합니다. 그러니 제가 이 돈을 받으면, 아무리 저 자리가 나쁜 자리라고 강경하게 반대했어도 결국은 동참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니 돈 아니라 비록 天下를 준다 하더라도 그리는 못합니다.'

 

육관이 왜 삼경도인으로 불리웠던가?

사람들은 그의 초능력에 어찌하여 세 번씩이나 놀랐는가? 반말을 턱턱놓아서 하던 경호실 과장은 그때까지 미쳐 몰랐던 것이다. 그는 육관이 천신 산신 지신 화엄신장이며, 죽은 귀신에 으르기까지 영계의 뭇 신들과 얼마나 가깝게 교감하는지를 알수 없었던 것이다.

 

삼경이란 무엇인가?

땅에 흐르는 生氣를 한 눈에 알아서 혈을 잡아냄이요.

풍수지리서를 전혀 읽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고서도 훤히 하는 것이요.

패철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不可思議(불가사의) 하리만치 방향을 정확하게 잡는 것이다.

 

여기에다 멀리에서도 명당을 감지하니, 그저 훈훈한 김만 올라오는 걸 느끼기만 해도 명당을 판별하는 초능력이 또한 첨가되니 사경도인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육관은 웬만한 경우를 빼고는 손수 답산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육관에게는 수많은 풍수서들이 無用之物(무용지물)이요 오히려 조리정연해 보이는 듯한 복잡한 가르침도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원래 패철은 주자의 이기설에 입각한 음양오행론의 이치에 따라야 하기 때문에 고도의 감각과 천리를 통달하는 심원한 배움이 있어야 한다. 육관이 명당에 가서 패철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은 자연의 질서가 그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육관의 도통함에는 귀신도 감복하여 그에게 절을 하곤한다. 묘자리를 볼 경우 육관은 절대로 시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바로 백골절악을 피하는 것이다. 흉지에서 길지로 묘자리를 옮겨준 사례는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은데, 그럴 때마다 그 묘택의 주인공은 그날 밤 육관도사의 잠자리에 어김없이 찾아든다.

 

정확하게 밤12시 10분에서 1시 사이에 의관을 곱게 차려 입은 귀신들은 육관의 잠자는 방 앞에 와서 큰 절을 올리고 간다. 예외인 적은 없다. 鬼神(귀신)들은 말한다.

'이렇게 좋은 집으로 저를 옮겨 주시니, 말 그대로 白骨難忘(백골난망)이옵니다. 그 공덕으로 부디 큰 복을 받으십시오.'

 

인걸은 지령이요 동기는 감응인데, 그 어머니가 어둡고 찬 냉혈에서 갖은 고생을 다하고 있으니 자손이 어떻게 복을 바랄 수있겠는가? 음양의 교구가 되지 않아 머지 않아 멸손할 것이니 유념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시신은 생기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생기는 따듯하고 따뜻하면 살은 빨리 부패하여 인체 생기의 정화인 뼈만 남는다. 그래야만 죽은자도 삼라만상의 대질서에 편안하게 들어서고, 살아있는 동기의 후손들은 발복을 한다.

 

 

왕비가 나는 묘터, 백담사행 법수

5공화국의 핵심적인 두 인물과 관련된 풍수이야기만을 하고자 할 뿐이다.

이순자. 그녀의 할아버지의 무덤에 대한 이야기다. 이세상에 미운 인간이 어디 있는가. 사람들은 모두 불쌍하노니, 그 불쌍함을 서로 감싸고 慰勞(위로)해 주어야 하지 않겠나.

 

이규광씨는 무엇보다 孝性이 지극했고 간청하는 바도 매우 남달랐다. 그곳이 바로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에 있는 금박산 높은 곳에 있는 鶴(학)이 날아가는 형국의 명당터이니, 곧 왕비가 날 자리다.

 

'왕비가 날 자리가 있으니 가능한한 남에게 알리지 말고 새벽에 올라가 몰래 써야 합니다.'

묘를 옮긴 후 육관은 이규동씨의 저녁 초대를 받았다. 그자리에서 이순자 여사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당신이 아마도 향후 靑瓦臺(청와대)에서 영부인 노릇을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보시기에 아마도 힘에 부치는 자리로 보였나 봅니다.'

 

여러분이 믿거나 말거나 간에, 육관은 터의 신비가 이토록 천지조화를 정확하게 일으킨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음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다.

전기환, 전경환 두 형제가 그들은 부모님 墓所(묘소)를 보수한다며 합천으로 육관을 모셨다.

 

'만약에 법수를 무시하고 석물을 세우면 하늘 높이 날던 봉황이 추락할 것입니다. 이기붕씨 일족이 멸한 것도 비금수 형상의 선조 묘에 화려한 碑石(비석)을 세웠기 때문이니 각별히 유의하는 것이 좋을 겝니다. 이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석을 철거하지않으면 3년후 음력 3월 3일 9시 42분에 일족이 전멸당할 터이니...'

 

 

그러나 어찌 되었는가?

87년 6.10 민주화 항쟁 이후 육관은 전기환씨를 다시 만난다. 그나마 곧 비석을 쓰러뜨렸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일족이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지혜롭게 하는자는 글자와 실증 너머의 것을 도리로써 깨닫는다. 그것이 참다운 앎이요 곧 지혜이다. 대통령의 형제들은 국가 원수의 명예에 흠집을 내고 다같이 단죄를 받았다. 隱忍自重(은인자중)하며 德(덕)을 쌓고 베풀었으면 그 이름이 아름답게 오래갔을 것이나 그렇지 못했던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남원의 풍수

백두대간이 아래로 흘러 智異山(지리산)에 와서 멈추니 예로부터 두류산이라 불리던 데가 바로 한국의 3대명산인 지리산인다.

 

'남원은 행주형 아니요? 배가 떠나가는 형상이지요. 그래서 예로부터 배가 떠나지 못하게 하려고 꼼짝 못하게 묶어두었지요? 그걸 모두 풀어내야 합니다.'

 

육관은 남원의 염승법을 철저히 적용하여 고장 사람들의 이기심을 깨뜨림으로써 새로운 방식을 창안한 것이었다.

 

 

진시황의 출생 내력에 관한것이다.

漢字가 생긴이래 최고의 명문장은 단언컨대 呂氏春秋(여씨춘추)라 할 수 있다. 저술한 사람은 여불위다. 진시황의 아버지가 되는 인물이다. '아무래도 여공이 이 터의 임자인가 보오. 자손이 천자가 될 자리니 부디 각골명심 하십시오.'

 

정승 황희의 집은 언제나 가난했다. 나라에서 주는 녹을 받으면 한 80%는 남산골 가난한 선비촌에 보내고 자신은 생계유지비만 가지고 왔다. 農事(농사)도 손수 지어 먹고 살았다. 慾心(욕심)과 이기심을 버리면 모든게 만사형통인데, 인생살이란 것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 많다.

 

'아버지 혼자 靑白(청백)하면 무얼하나. 그 밑의 신하들, 저 까마득한 아래 직급의 사람들도 好衣好食(호의호식)하며 잘 사는데 한나라의 정승이 집꼴이 이게 뭔가?'

 

하루는 술에 취해 돌아오는 아들을 大門에서 맞으며 절을 올린다. 아들은 술기운이 확달아나 버렸다.

 

'뉘시온지 모르지만 어서 오십시오. 절더러 아버지라 하십니다만 댁은 제 아들이 아닙니다. 애비 말을 안 듣는 子息(자식)은 손님이나 마찬가지인데, 주인이 손님에게 절하는 것이 무에 그리 잘못된 일입니까?'

'아니쿠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수신이 애걸복걸하여 아버지 정승에게 용서를구하니, 황희의 자식교육이 이 정도였다.

 

명재상 황희가 그 할아버지의 묘택이 있는 남원땅 서선령의 발복으로 아름다운 이름을 길이 남기니 유방백세요, 유취만년이라 하는 옛말은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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