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본 나의 침뜸인생 (16)
김남수(본지 발행인, 무극보양뜸 국제연맹 총재, 한국정통침구학회 회장)
고령화 사회, 복지와 의료제도 혁신 요구
아무리 노인 인구가 늘어나도 의료복지만큼은 희망과 경쟁력이 있다는 것이 내 소신이다. 만성 질환이나 노인성 질환에는 침과 뜸만한 것이 없다. 침만 있으면 되는 침술과 들에 지천으로 자라는 쑥만 있으면 되는 뜸술은 오래된 병을 치료하는 데 아주 탁월할 뿐 아니라 비용도 매우 저렴하다.
우리나라는 유래가 없을 정도로 고령화 속도가 빠르다. 이는 사회복지 및 의료복지의 체계를 새로운 사회(고령사회)에 맞게 준비하고 정비하여 시험해 볼 시간적 여유가 없음을 뜻한다. 그런 혼란스런 시기에 가장 적합한 방법이 뜸이다. 침뜸 시술 자율화가 더욱 절실해지는 시기가 곧 다가온다.
<지난 호에서 계속>
여전히 부조리한 국내 의료법
반면 그 사이 우리 침구계는 쇠퇴의 길을 걸었다. 교육과 전수의 길까지 절딴나버려 우리 정통침뜸은 명맥조차 잇기 어려운 실정이다. 침구술에 매료된 젊은 한의사들은 한국 전통의 침구를 가르쳐줄 스승을 찾지 못하자 차선책으로 중국으로 일본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침구사자격증을 찾아 길을 떠났다.
국내에서는 한의대에 다니는 것 이외에 합법적으로 침을 시술할 수 있는 자격증을 취득할 방법이 전무하자 내린 결정이다. 정확한 수치를 헤아리기는 어렵지만 중국의 국제침구수평고시와 미국의 NCCAOM, 일본의 침구전문대학 등에서 자격을 취득한 우리나라 사람은 1만~2만 명 정도이다.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양의사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근래 들어 만성 질환과 노인성 질환에 침구술이 놀라운 효과를 보이는 사례가 과학적으로 속속 증명되면서 침구술에 관심을 갖는 양의사의 수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개원의 가운데 침구술을 포함하는 대체의료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교육받은 사람들은 2%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건이 되면 이에 대해 교육받거나 연구해보고 싶다는 사람은 응답자의 30%에 달했다. 전통의학을 비롯해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의술에 대해 비교적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결과다.
그러나 양 한방 통합진료를 비롯한 다양한 의술의 통합진료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장애물을 뛰어넘어야 한다. 가장 큰 걸림돌은 비합리적인 조항이 대단히 많은 우리나라의 의료법이다. 일례로 외국의 경우 전문의 자격증을 2개 이상 보유하고 있는 의사는 보유하고 있는 진료과목에 대해 모두 진료가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느 한 과목만 선택해야 한다. 안과와 이비인후과 전문의 자격증을 가지고 있건, 한의사와 양의사 면허증을 소지하고 있건 마찬가지로 보유하고 있는 둘 가운데 하나는 포기해야만 한다. 일정 신간 이상의 침구교육을 마치면 시술할 수있는 다른 나라와는 완전히 다른 의료행정이며 양한방통합진료를 가로막는 법체제라 아니할 수 없다.
침뜸의 경제적인 저비용, 의료복지 필수 항목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침구술의 발전만이 우리 의료계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는다. 지금까지의 의학적 지식으로는 그 원인이나 치료방법을 알 수 없는 새로운 질병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고 질병의 고통을 안은 채 살아가야 하는 노인 인구도 늘고 있기 때문이다.
2002년 통계청이 발표한 인구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2000년 7월을 기점으로 우리나라는 전 인구의 7% 이상이 65세 이상 노인 인구인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다. 또한 통계청은 우리나라의 인구 고령화가 갈수록 빨라져 늦어도 2020년에는 전 인구의 14%가 노인 인구인 고령사회, 2030년이면 초고령사회(인구의 20% 이상이 노인 인구인 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내다봤다.
쉽게 말해 지금은 우리나라 사람 100명 가운데 7명이 노인이지만 2020년에는 7명 중 1명이 노인, 2030년에는 5명 중 1명이 노인이라는 뜻이다. 이에 따라 2002년 현재에는 청년(비노인인구) 10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하면 되지만 2030년에는 청년 10명이 노인 3명을 부양해야 한다.
한 사회가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다는 것은 복지와 의료제도에 있어 일대 혁신이 요구됨을 의미한다. 노인인구는 비노인 인구에 비해 일하는데 제약이 따르고 생산성이 크게 떨어지는 반면 의료비 지출은 많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나라 역시 그동안 노인 의료비의 비중이 급속하게 증가해 왔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증가하고 있다. 1985년 전체 의료비 중 노인 의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4.7%였던 반면 1998년에는 15.4%나 된다.
2001년과 2002년의 비교도 노인의 의료비가 급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01년 1/4분기의 노인 의료비는 6,865억원이었던 데에 비해 꼭 1년 만인 2002년 1/4분기에는 8,602억 원에 달했다. 불과 1년 사이에 25.3%나 증가 한 것이다. 또한 65세 이상 노인 환자는 요양기관(병원 의원 약국)내원 일당 진료비도 매우 높은 수준이다. 65세 미만 환자의 요양기관 내원 일당 진료비가 17,430원 인데 반해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23,801원으로, 36.5%나 높다.
침과 뜸은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조류
다른 심각한 문제는 우리나라의 고령화 속도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빠르다는 데 있다. 고령화 사회에서 고령사회로 이행하는데 프랑스가 115년, 스웨덴이 85년, 미국이 71년, 이탈리아가 61년 걸렸다. 근래들어 세계 많은 국가의 고령화 속도가 빨라져 영국이 41년, 일본이 24년 소요됐으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채 20년도 걸리지 않을 것 같다.
고령화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사회복지 및 의료복지의 체계를 새로운 사회(고령사회)에 맞게 준비하고 정비하여 시험해 볼 시간적 여유가 없음을 뜻한다. 국민연금이 바닥났다는 소문이 파다하고, 해마다 의료보함의 적자 폭이 커지고있는 우리의 현실이 을씨년스러울 따름이다. 특히 고령사회로 들어서게 되면 만성질환이 커다란 사회문제로 대두되게 될 것이다. 만성질한을 치료하는데 막대한 비용을 지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노인 인구가 늘어나도 의료복지만큼은 희망과 경쟁력이 있다는 것이 내 소신이다. 사실 만성 질환이나 노인성 질환을 다스리는 데는 침과 뜸만한 것이 없다.
침만 있으면 되는 침술과 들에 지천으로 자라는 쑥만 있으면 되는 뜸술은 오래된 병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아주 탁월할 뿐 아니라 비용도 매우 저렴하다.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질 못해서 그렇지 우리 전통 침뜸은 중국이나 일본에 못하지 않다. 세계침구학회연합회나 외국에 나가 비교해보면 오히려 더 뛰어난 것을 알수 있다.
침과 뜸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조류이다.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까지 서양의학이 큰 조류였다면 이제부터는 침과 뜸이다. 지금이라도 국가와 의료계가 합심하여 하루라도 빨리 거대한 물줄기를 이끌 채비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침사랑 뜸사랑을 함께 해준 내사랑
2000년 가을,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무슨 전화냐고 했더니 집에서 왔다고 한다. 그 순간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 일하고 있을 시간에는 좀처럼 전화를 안 하는 사람인데...'
전화를 받아보니 아내가 다쳤다고 했다. 2층 계단을 올라가다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았다. 일흔이 넘은 노인네가 낙상을 했으니 아주 성하지는 않을 터.
며느리는 '다리가 부러지거나 꼼짝도 못할 정도는 아니니 걱정말라'며 나를 안심시켰고 아내는 수화기 저편에서 '왜 전화는 해서 일하시는 분을 신경쓰게 만드느냐'며 며느리를 나무랐다.
퇴근하여 집에 도착하니 아내는 아무일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아내는 '엉치며 다리가 욱신대고 열이 나기는 하지만 괜찮다'며 '침을 놓아달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병원에 가 보자'고 말했다.
'침놓는 영감이랑 같이 사는데 병원엔 왜 가요?'
'눈에 안 띄는 데 이상이 있을지 모르잖아. 나도 인간일세. 그것까진 모른다고.'
'괜찮아요'
'왜 이렇게 병원가는 것을 싫어해? 이번에 처음 떨어진것도 아니잖아'
내 성화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병원을 찾은 아내는 수일에 걸쳐 온갖 검사를 받았다. MRI 촬영을 하고 대침보다 더 굵은 바늘로 척수액을 4차례나 뽀아내는 사이, 아내의 몸에는 욕창이 생겼다. 그리고 얼마 뒤 아내는 의식을 잃었다.
아내가 의식을 잃고 있었던 며칠 동안, 아내를 잃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두려웠다. 아내와 함께 보냈던 50년 세월을 되짚어보니 나는 말 그대로 '고생만 시킨' 남편이었다.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좋은 집에서 살았으면 그나마 다치지는 않았을 것을...'
아내는 우리 식구가 서울에 정착한 뒤 30년을 넘게 살아온 집에서 사고를 당했다. 17평 5작짜리 좁은 집이었는데, 우리 부부와 네 아이는 말할 것도 없고 고향에서 올라온 조카며 친척들로 한때는 10명이 넘는 식구가 복작되며 살기도 했다.
그 집은 옛날식으로 지은 집이라 건물평수가 좁은 데도 2층이었다. 그런데 식구는 많고 집은 좁다보니 계단을 안에 두고 살수는 없었다. 그래서 계단만 밖으로 내었는데 아내는 그 돌계단에서 몇 번인가 떨어졌다.
침구사법 제정을 위한 투쟁의 역사
생각할수록 아내에게 말할 수 없이 미안했다. 침그사법을 만들겠다고 매일 밖으로만 다니고 빠듯한 생활비만 내밀고는 모두 침구사법 만드는데 써버리는데도 별말 하지 않던 아내였다. 많은 동지들이 생활고로 떠났지만 나는 끝까지 남을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아내 덕분이었다.
쓸데없는 짓 하고 다닌다고 닦달하기를 하나, 이 돈으로 어떻게 사느냐는 불평도 아끼고 아꼈던 사람이다.
다행히 아내는 의식을 되찾았다. 가끔 정신이 혼미해질때면 엉뚱한 말을 했는데 그때마다 안쓰러움에 내 가슴은 또 내려앉는다.
'밥은 드셨수? 또 밀가루 음식을 자신 건 아니지요?'
정신이 혼미할 때 아내는 어렵게 살던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 침구사법 제정 활동에 사재를 쏟아 붓느라 밥값도 아꼈던 시절에 매일 싸구려 칼구수로 점심을 때우던 나를 원망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아내 얼굴이 떠올랐다.
'말은 안 했어도 얼마나 마음에 거렸으면 절럴까. 얼마나 살기가 고단했으면 저럴까' 싶어 눈물이 앞을 가렸다.
몇 달 뒤,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긴 아내가 퇴원을 했다. 아내는 정신도 또렸하고 몸도 건강했다. 그러나 예전처럼 걸을 수는 없었다.
더욱 활성화된 침뜸 대중화 운동
아내가 퇴원후 며느리는 더 바빠졌다. 아침 6시 30분이면 집을 나서는 나때문에 새벽부터 부산한 며느리는 이제 거동이 불편한 시어머니의 수발 까지 들어야 했다. 환자들을 대하다 보면 그 집 속사정까지 알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노인 병구완하기처럼 어려운일이없건만 며느리는 늘 변함이 없다. 며느리에게 참으로 고맙지만 매일 보는 얼굴인지라 고맙다 고맙다 하기도 머슥해 고마운 마음을 가슴속에만 담아두고 있다.
아내가 퇴원하고 얼마 뒤 건물을 하나 짓기 시작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너무 비좁다며 번듯한 곳으로 옮기라고 했지만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다. 외양에 신경쓰고 싶지 않았고 또 신경쓸 여력도 없었다.
그러나 침뜸을 배우겠다며 나를 찾아 오는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났고 의사들을 대상으로 한 침뜸 의학 세미나까지 시작하게 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임대해서 사용하던 작은 사무실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몇 차례 방송을 타면서 환자들마저 엄청나게 늘어나 가뜩이나 복잡한 작은 상가는 발 디딜틈마져 없어져버렸다.
하지만 건물을 짓기로 결심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다른데 에 있었다.
90년대 후반 들어, 10여 년 동안 뜸했던 침구사법 제정운동을 다시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언제든지 자유롭게 모일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고 평생좁고 불편한 집에서 고생한 집사람도 이제는 좀 넓은 집에서 살아 볼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집이 넓어지면 노인네 수발하느라 고생하는 며느리도 좀 편해지지 않을까 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나를 그림자같이 따르며 가업을 이어온 아들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집을 하나 지어야 할 것 같은데..은행에서 융자받아야 할 거야. 네가 알아서 해주겠니?
'아버님, 걱정 마십시오.'
2000년 말, 아들이 애쓴 덕택에 그리 크지는 않지만 깨끗한 건물이 완성되었다. 작은 침술원 공간과 조용한 강의실 몇 개, 침구사 재도 마련 및 침뜸 대중화운동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일할수 있는 사무실이 마련되었다.
이 아다만 건물에는 하루에도 100여 명씩 침뜸을 아끼는 사람들이 드나든다. 사무실을 얻을 돈이 없어 남의 사무실 한 귀퉁이에 앉아 일하던 옛날에 비하면 큰 발전임 셈이다.
그때 함께 활동하던 이들 가운데 세상을 떠난 이들이 많고 남은 사람은 나뿐이다. 이제 그자리를 능력 있는 젊은 이들이 채우고 있다. 구성원이 젊어지자 분위기가 활기차게 변하고 침구사법 입법추진과 침뜸 대중화 운동도 활발해졌다.
젊고 활기찬 기운은 주변에 있는 사람과 사물을 젊게 만든다. 덕분에 침뜸운동의 역사도 시간을 거슬러 젊어지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