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6. 중국 조선족의 구당침뜸(계간 구당 2017 봄)
중국 조선족의 구당침뜸 - 한국에서 받은 최고의 선물
오ㅇㅇ(정회원 32기)
나는 꿈을 안고 2003년 한국에 온 중국 조선족이다. 이제는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중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10여 년의 한국생활을 돌이켜 보면, 지금은 별 문제 없이 무난히 생활하고 있는 내 몸을 보면서 참말 感悔(감회)가 깊다. 한국에서 뜸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요양 병원에 누워 고통스럽게 연명하고 있지 않을까?
• 어릴 때부터 허약했던 몸
나는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해 많은 잔병을 달고 살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이염을 앓았고 오른쪽 무릎이 아파 침을 맞았으며, 평생 설사를 안고 살았다. 처녀 때부터 요실금이 있었고, 허리늘 늘 시큰거리고 잘 삐곤 하였다.
겨울철만 되면 맑은 콧물이 줄줄 흘러 마스크를 쓰지 않고는 사람을 상대할 수가 없었다. 겨울은 물론 한여름에도 감기에 잘 걸렸으며 목에는 항상 이물질이 낀 것처럼 아프고 불편했다.
아랫배를 조금만 걸어도 가스가 팽팽 차면서 터질 것만 같았다.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되지 않아 머리가 터질 듯 아파 항상 중국산 개보린(去痛片)을 달고 살았다. 한국에 올때도 개보린을 한 보따리 사가지고 왔다.
• 한국 가정부 생활로 옮은 병
이런 몸으로 한국에 와서 가정부로 들어가 갓난아기를 돌보았다. 그럭저럭 아픈 몸을 지탱하면서 일하다가 2008년 내가 돌보던 아이가 폐렴에 걸리면서 나는 감염되어 중한 감기에 걸리게 되었다.
약을 일주일 먹고 낫는가 싶어 약을 끊었더니 재발이 되었다. 그 후로는 약을 먹어도 낫지 않고 코가 퉁퉁 부어오르며 피가 났다.
김치, 된장 같은 조금만 짜고 매운 것만 들어가도 목이 쓰리고 아팠다. 입안이 너무 마르고 침이 생기지 않아 목캔디를 달고 살아야 했다.
• 높은 백혈구 수치
눈도 모래알이 낀 것처럼 쓰리고 아프고 햇빛만 보면 눈물이 줄줄 흘렀다. 거기에다 방광염은 날이 멀다 하고 도지고 변비와 설사가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하곤 하였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날들이었다.
이비인후과와 비뇨기과를 반년 넘게 다녔는데 조금 나았다 싶어 약을 끊으면 또 다시 재발하곤 하였다. 6, 7개월 치료하다 의사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백혈구 수치가 너무 낮아서 그런다며 다른 방법을 써보라고 하셨다.
• 나는 침뜸으로 승부한다
이 상황에서 죽지도 않고 살기도 너무 고통스러운 나날을 절망 속에서 보내던 중 2008년 秋夕(추석)에 灸堂 金南洙(구당 김남수) 선생님께서 KBS 채널에 출연하시어 이틀 동안 침과 뜸에 대해 강의하시는 것을 들었다.
아! 이 방법 밖에 없구나. 나는 그 길로 서점에 가서 '나는 침과 뜸으로 승부한다' 등 구당 선생님의 책을 보이는 대로 몇 권 사가지고 왔다.
• 구당 선생님을 찾으러 나서다
책에 적혀진 번호대로 전화를 걸었는데 받는 이가 없었다. 그 후에도 열 번도 더 걸었지만 여전히 받는 이가 없었다. '남수침술원'을 어떻게 찾지? 초조한 마음으로 몇 달을 지내다가 어느 날 지하철을 타면서 우연히 "서울의 모든 것 120에 물어보세요"란 공익광고를 보게 되었다. 120에 전화를 걸었더니 찾아가는 길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그래서 일요일날 남편과 함께 淸凉里(청량리) '남수침술원'을 찾아갔다. 그런데 구당 선생님은 계시지 않았고 침술원은 진료도 못하고 있었다. 내가 중국에서 온 僑胞(교포)라고 하니 구당 선생님 아드님께서 동묘 봉사실을 알려주시면서 그곳에 가서 치료 받아보라고 하셨다.
• 동묘 봉사실에서 받은 치료
그 길로 동묘 봉사실에 찾아가 나의 정황을 말하고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봉사실 선생님께서 침을 놓고 뜸자리를 잡아주면 집에 돌아가 매일 한 번씩 꾸준히 뜸을 뜨고 일주일에 한 번씩 봉사실에 나와 침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그 날이 내 평생 잊지 못할 2009년 1월 18일이다. 내 건강의 길을 찾은 날이다.
침뜸 공부를 하고 난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무극보양뜸에 상성 신유 요추345 삼음교 대장유 천추 거궐 좌양문 등의 혈자리를 잡아주었던 것이다.
• 동생의 도움을 받아 뜸 뜨다
물이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방법 아니면 나의 몸은 다른 방도가 없다. 생각하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뜸을 떴다. 앞에는 나 혼자 뜨고, 등은 내가 보는 애를 유치원에 보내고 나서 버스 타고 동생한테 가서 떠달라고 했다. 하루라도 뜸을 뜨지 못하면 병이 원래대로 돌아갈까 봐 무서웠다.
• 4개월 만에 나타난 뜸의 효능
그렇게 끈질기게 4개월 남짓 떴을까? 하루는 일요일 휴무하고 일하는 집으로 가는데 그렇게 힘들던 오르막길이 예전처럼 힘들지 않고 다리가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아! 뜸의 효능이 드디어 나타나는구나! 나는 너무도 기뻤고 희망이 생겼다.
1년 남짓 뜨니까 불던 코가 점점 가라않고 피나는 것도 멎기 시작했다. 점차 김치, 된장도 먹을 수 있게 목도 좋아지며 입 안에 침이 생기기 시작했다. 눈에 모래알 낀 느낌도 없어졌으며 눈약을 넣지 않아도 되었다. 방광염도 도지지 않았다.
• 9년 동안 매일 뜸
나는 오늘날까지 9년째 매일 뜸으로 건강을 지키고 있다. 지금 나는 그렇게 잘 삐던 허리도 이제는 삐지 않고 시큰거리던 증상도 없어졌다. 겨울이 되어도 다시는 콧물이 흐르지 않는다.
긁어도 없어지지 않던 혀의 누런 태도 언제 없어졌는지 지금은 담홍색의 깨끗한 혀가 되었다.
소화가 되지 않아 머리가 터질 듯 아파 고생했던 위도 증상이 사라져 지금은 두통을 모르고 산다. 물론 중국에서 가지고 온 개보린을 모두 버렸다.
아랫배에 차던 가스도 언제 없어졌는지 지금은 몸이 가볍고 그렇게 많이 빠지던 머리카락도 빠지지 않는다.
• 요실금 수술 후 10년
10년 전에 나는 한국 적십자병원에서 무료로 요실금 수술을 했고, 그 후에는 하지정맥류 수술도 했다. 이 두 가지 병 모두 시간이 지나면 재발하기 쉽다고 하는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재발 없이 편히 지내고 있다. 나는 이것을 중극, 수도 등에 놓았던 뜸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뜸은 나는 큰 돈도 들이지 않고 그 지극한 공통에서 탈출시켜 주었다. 지금 나는 만성병에는 뜸이 최고라는 말을 크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 가족 건강 위한 침뜸 공부
중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 좋은 의술을 공부하여 최소한 우리 가족의 건강이라도 지켜야겠다고 생각하며 2014년 10월부터 침뜸공부를 시작한다.
이 공부를 하면서 내가 왜 그렇게 잔병이 많았는지 알게 되었다. 원래 나는 선천적으로 오장육부를 허약하게 가지고 태어났던 것이다.
腎氣가 약해 중이염과 요실금을 앓았으며, 허리가 시큰거리고 잘 삐었던 것이다. 脾氣가 약해 설사를 달고 살았고, 胃氣가 소화가 되지 않았으며, 肺氣가 약해 코와 목이 아팠고, 心氣가 약해 하지정맥류와 고혈얍을 앓았던 것이다. 정말 이 공부를 잘 했다고 생각한다.
• 남편 습진 치료
나는 이 공부를 하면서 한국에 와서 몇 년 동안 고생하게 만든 남편의 濕疹(습진)도 치료했다. 무극보양뜸에 비유 신유 대장유 삼음교 축빈 혈해 견우 여구 등 혈자리를 취해 4~5개월 뜸을 떴다. 그렇게 몇 년간 약을 먹고 바르고 해도 근치가 되지 않던 습진이 진물이 서서히 마르면서 깨뜻이 치료가 되었다.
불로 살을 태워서 무슨 병을 고치냐며 의심하던 남편은 이제 적극적으로 뜸을 떠다라고 한다.
남편의 가족은 치매 가족력이 있다길래 몹시 걱정했는데 뜸이 치매, 중풍, 암까지 豫防(예방)한다니 이 보다 더 좋은 의술이 어디 있겠는가? 지금 나와 남편은 짬만 나면 서로 뜸을 떠주면서 노년의 건강한 삶을 지키고 있다.
• 한국에서 얻은 갚진 보물, 구당 침뜸
14년 전 나는 돈 벌러 한국에 왔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한국에서 얻은 수확은 돈이 아니다. 그 보다 몇 곱이나 값진 침뜸을 만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건강을 찾았다.
그 醫術(의술)을 기초 지식이나마 배웠다는 것이 최고의 수확이고 한국에서 받은 최고의 선물이다. 나는 침뜸 덕분에 體質(체질)을 개선시켰고 건강을 찾았다.
구당 선생님의 책 이름과 같이 이제 뜸은 정말 내 사랑이 되었다.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나와 나의 가족은 뜸으로 건강을 지킬 것이며, 또 많은 사람들에게 뜸을 널리 전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