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 '父母님과 침뜸'(계간 구당 2016 봄)
'父母님과 침뜸'(계간 구당 2016 봄)
민ㅇㅇ(정회원 31기)
[참 신기한 것이, 뜸을 매일 떠 보니 熟醉(숙취)가 덜한 것이다. 믿어지지 않아 몇 주 동안 주의 깊게 살펴보니 숙취가 없다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것은 나에게 적지 않은 놀라움이었다. 머리 아프다, 속이 안 좋다, 허리가 아프다, 정신이 멍하다, 피곤하고 우울하다, 입맛이 쓰다 등의 증상을 숙취로 이해하고 있던 나로서는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당침술원 豫約(예약) 실패 끝에 찾아온 침뜸 교육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2014년 봄, 나는 몇 주째 일정한 시간에 컴퓨터에 앉아 ''아!XX.'' ''뭐야 이거. 왜 이러는 거야!'' 하며 핏대를 올리며 마우스를 책상에 내동댕이치고 있었다. 그 몇 년 전에도 나는 전화기를 들고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포기가 빠랐다. 한 달도 걸리지 않았으니.
구당침술원 진료 豫約(예약)이 어렵다는 걸 과거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아쉬움이 남아 이곳저곳 검색해 보다 '뜸사랑'이라는 봉사단체, 그리고 大田에도 지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뜸자리는 잡을 수 있겠다 싶어 연락하고 찾아간 자리에 한 어르신이 생뚱맞게 침뜸교육을 받으라며 적극 勸誘(권유)하셨다.(후에 알고보니 그분은 지부장이었다.)
1년이라는 시간적 부담감, 경저적 무게, 무엇보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스러웠지만 일단 治療를 받아야 하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이틀 후 침뜸교육이 시작되었다.
평소 서양의학보다 동양의학과 代替醫學을 선호하고, 간접구뿐만 아니라 직접구에 대한 약간의 경험도 있었지만 침뜸공부를 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필연은 우연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고 하지만 그렇게 우연히 침뜸 교육이 나를 찾아왔다.
종합병원이었던 어머니, 불현듯 닥친 아버지의 병환
아버지는 2003년 봄에 發病한 후 10년 넘게 中風으로 고생하셨다. 20년 가까이 우리 집 주치의 노릇을 하던 한의원과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대체의학을 하는 곳에서 치료를 받아 왔지만 병세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每年(매년) 봄이 되면 그 정도가 더 심해진다는 것이다. 2014년 봄에도 어김없이 아버지의 상태는 더 나빠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40여 년 전 子宮外妊娠의 파열로 생사를 다투다 집 근처 병원에서 응급수술을 받았다. 파열 후 3일 정도가 지난 데다, 시골 중소병원의 난후된 환경이 가세해서 수술예후는 매우 좋지 않았다. 이후 어머니는 거의 모든 아픈 증상을 다 가진 綜合病院이 되었다. 두통, 심한 어지러움, 이명, 소화장애, 배설장애, 수족냉증, 수족저럼, 관절통, 숨이 가쁘고, 가슴이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늘 피곤 함 등. 아프지 않은 곳이 없으니 처음에는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검사와 치료를 받았지만 별무소득이었다.
그런던 중 親知의 소개로 지역에서 가장 저명하다는 한의원에서 진료를 받게 되었다. 어머니는 12장부 중 8장부 이상이 손상된 상태라 했다. 서너 개의 장부에 이상이 와도 난치라는데, 8장부 이상에 병이 있으니 不治나 다름없었다.
''지금까지 이 정도로 얘기해 주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으니 이 선생님께 치료를 받아야겠어.''
그때부터 20년 이상 손수 藥을 달여 먹으며 고단한 삶을 헤쳐 나가던 와중에 아버지의 발병까지 겹치니 우리에겐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본인의 持病(지병)에 10년 이상 남편의 병수발이 더하여 지칠 대로 지친 어머니에게 2014년 봄은 그렇게 찾아왔다.
치통을 치료하다
다른 동기 선생님들은 개강이 계속 연기되어 몇 달을 기다린 까닭인지 설레고 흥분된 얼굴이었지만, 孝道 한번 해드리겠다며 마지못해 시작한 나는 '1년 여를 어떻게 견디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은 채로 교육이 시작됐다. 그렇게 1주, 2주, 한 달, 두 달이 흘렀고 기초반이 끝날 무렵, 하루에 한 두시간 교재를 읽고 있는 나를 보며 적지 않은 변화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중급반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아버지께서 갑자기 이(齒)가 아프다며 통증을 호소하셨다. 우선 진통제를 드시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경혈학 수업시간에 하관에 刺鍼(자침)하면 치통이 나아진다고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났다. 마침 집에 약간의 침도 있고 하여 침통을 들고 다가가니, ''너 지금 뭐하냐?'' 하는 말이 돌아왔다.
''침 놓으려고요.''
''너 침 배운 지 얼마나 됐는데, 내가 너의 침 敎材(교재)냐?''
손을 막 내저으며 아버지는 완강하게 거부하셨다. 한동안 실랑이가 이어졌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반 강제로 하관에 자침하였다. 30분 정도 지나 발침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태를 여쭈어 보았다.
''별일이네, 이가 안 아프네.''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지만 큰 기쁨이었다.
스스로와의 사투
그해 겨울, 김장철이 돌아왔다.
''내년에는 김장을 담글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날이 갈수록 기력이 떨어지니.''
어머니의 말씀에 체한 것마냥 가슴이 답답했다.
이듬해 봄이 왔다. '침뜸 덕분에 이번 봄은 별일 없겠지' 여기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아버지의 상태는 더 안 좋아지셨다. 말은 더 어눌해지고, 다리의 痲痺(마비) 증세도 심해지고, 식사량도 줄어들어 가슴이 먹먹하고 아려왔다.
침뜸 공부가 시작되고 거의 1년 동안 매일 부모님께 뜸을 떠 드리고, 一週日에 한 번 봉사실에 모시고 가 치료를 받았는데, 아무런 소득이 없다는 회의감에 몇 날 며칠 彷徨(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침뜸치료와 공부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중도 포기는 항상 더 비싼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 과정을 마칠 때까지는 治療와 工夫를 계속 하기로 마음먹고 다시 힘겨운 일상으로돌아가고 있었다.
숙취를 없애줌
침뜸 교육도 막바지에 이를 즈음, 어머니의 성화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너도 뜸 좀 떠라, 우리만 떠주고 너는 안 뜨니 너무 미안하잖니. 계속 그러면 우리도 뜸을 뜨지 않을 테다.''
수업 시간에 본보기로 뜸을 시작했을 뿐 뜨는 둥 마는 둥 하며 지내는 자식을 더는 볼 수 없으셨나 보다. 어머니의 재촉에 하는 수 없이 나름 열심히 뜸을 뜨기 시작했다. 그것이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회석시킬 수 있을 테니.
평소 일주일에 하루는 過飮(과음)하는 습관이 있다. 물론 그 다음날에는 후회를 하지만. '이 지긋지긋한 숙취 때문에라도 술을 끊어야지' 하면서도 '인생의 고단함을 조금이라도 위로해 주는 건 술밖에 없구나' 하면서 또 술을 마신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뜸을 매일 떠 보니 熟醉(숙취)가 덜한 것이다. 믿어지지 않아 몇 주 동안 주의 깊게 살펴보니 숙취가 없다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것은 나에게는 적지 않은 놀라움이었다. 머리가 아프다, 속이 안 좋다, 허리 아프다, 정신이 멍하다, 피곤하고 우울하다, 입맛이 쓰다 등의 증상을 숙취로 이해하고 있던 나로서는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상체질상 소양인에게 술은 약보다는 毒이다. 어려서부터 음허화동 증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질 나쁜 소양인인 나에게, 음주 후의 숙취는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는 의미가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축취가 덜한 것이다. 그제야 '아! 정말 뜸이 좋은 거구나, 이 좋은 것을 매일 父母님에게 해 드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 나에게 침뜸은 삶이 얼마 남지 않은 부모님에 대한 작은 배려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없기에 큰 기대 없이, 단지 子息으로서 회한을 남기지 않으려는 苦肉之策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라니, 지금껏 음허화동 증상에 좋다는 약과 음식을 많이 먹어도 보았지만 표면적으로 아무런 효과도 체감하지 못했던 나에게 그것은 놀라움 이상이었고, 기존의 관점을 變化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氣力을 되찾음
수안보에서 정회원 합격자 硏修(연수)가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온 우리 집 김장 담금기. 1년 전에는 이듬해 김장이 어려울 것 같다며 아들을 먹먹하게 했던 어머니는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분주할 뿐 아무말씀이 없다.
''작년에 했던 말 기억하세요? 내년에는 김장을 담글 수 없을지도 모른다던 말.''
어머니는 배시시 웃으며 ''그랬었지, 내가 알게 모르게 많이 좋아진 것 같구나.''하셨다.
일본의 어느 詩人은 ''장난하듯이 엄마를 업어 보니 너무 가벼워 세 걸음 걷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이시카와 타쿠보쿠)고 했다. 나도 요즘 아버지를 업고 다니며 눈물을 찔끔 흘리곤 한다. 너무 너무거워서. 젊어서부터 입이 짧기로 소문난 아버지. 뜸 시작후 한동안 잘 드시다 작년 봄에 상태가 나빠지고 나서는 다시 예전처럼 식사를 잘 못하셨다. 궁리 끝에 우활육문에 2회 자침한 것이 작년 말이다. 그 얼마 후 어머니가 소리쳤다.
''너, 거기다 침 놓지 마! 우리 집 쌀 떨어지게 생겼어!''
침뜸의 맛
뜸사랑 정회원이 되고 한 달쯤 지났을 때, 길을 가다 인테리어 일을 하는 동네 형님을 만났다. 평소 일을 많이 해 허리가 아파 병원도 가고 한의원도 가고 하지만, 주로 鎭痛劑(진통제)로 살아가는 형님이었다.
나는 약장수처럼 침을 튀겨가며 침뜸과 그 효과에 대하여 이것저것 설명했다. 내가 침뜸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형님은 처음에는 황당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나 좀 한번 봐 줄래.''라고 했다. ''좋지요. 형님 아주 간단해요.!'' 의외로 선뜻 침뜸 치료를 받겠다고 해서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다음날 형님 댁에 가보니 평소 눈인사만 건네고 지내던 형님 친구분도 구경차 와 있었다. 자신 있었다. 무극보양뜸, 신유, 요추345극하 자침하고 뜸을 뜬 후, 몇 가지 주의사항을 얘기한 후 일어서려는데, 옆에 있던 친구분이 니도 좀 해달라며 바짓가랑일를 붙잡는다. 가진 것은 건강밖에 없을 것 같은 그 친구분은, 몇 년 전부터 많이 어지러워 일도 그만두고, 얼마 전에는 길거리에서 氣絶해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 갔다고 했다. 병원에서도 이유를 모르니 답답할 뿐이라고 했다.
눈앞이 깜깜했다. 江湖에 입문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이런 환자를 만나다니,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좀 전의 意氣揚揚은 어디 가고 풀이 죽은 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옷을 벗게 한 다음 몸 이곳저곳 살피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 '아싸!'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무좀이 심한 발톱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肝의 이상을 확인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는 취혈 후 자침하고, 뜸을 떴다.
두 달 후, 동네 형님이 밥이나 먹자고 한다. 약속 장소에 가니 그 친구분도 함께였다.
''요즘은 어지럽지 않아 살겠어, 민 선생 너무 고마워요. 이제 슬슬 다시 일을 시작해도 되겠어.''
그날 밤 늦게까지 우리 셋은 술을 마셨고, 침뜸으로 맺어진 정은 더욱 敦篤(돈독)해졌다.